19세기 미국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함께 영미 문학사의 3대 비극으로 일컬어진다.
<모비딕>의 첫 장 서두를 여는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두자]라는 문장은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벽돌 부피의 분량에 본명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이슈메일이라는 모호한 인물이 화자로 등장 하는 <모비딕>의 초반부는 고래잡이 상선에 올라탄 이들이 거친 바다의 풍랑에 부딪치면서 겪게 되는 고단한 삶의 여정처럼 읽혀진다.
특히 소설의 상당 부분은 신문 르포타주 처럼 고래 사냥에 쓰이는 다양한 도구들과 고래 잡이들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쉽사리 페이지가 넘어 가지 않는다.
이내 중반부를 넘기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나서 책 커버에 붙은 현란한 수식어들에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세계 3대 비극, 미국 최고의 걸작, 역대 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의 추천 도서, 미국 중고교 학생들의 필독서, 성경만큼 널리 읽혀지는 작품, 세기의 명작....
아무리 세기의 명작이라 해도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고 고리 타분한 전개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지 못한다.
하지만 멜빌의 <모비딕>이 성경 만큼 널리 읽혀지는 작품이라면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 먹고 책을 펼쳐 집중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첫 문장에 등장 하는 <이슈메일>은 누구인가.?
'이슈메일'은 히브리어로 읽으면 이스마엘이라는 발음이 된다. 유대인의 시조 아브라함은 첫 번째 아내 사이에서 자식이 없다. 대신 하녀의 몸에서 그의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들의 이름이 이슈메일이다.
하지만 이후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들을 낳자 하녀의 아들 이슈메일은 추방되어 척박한 팔레스탄인 땅을 헤매는 방랑자가 된다.
단지 하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한 이슈메일의 원죄는 무엇인가?
어미의 비천한 신분 탓인가?
아니면 태생적 운명 탓인가?
구약 성서 창세기 16장을 읽고 또 읽어도 이슈메일의 운명은 가혹할 뿐 어디에도 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 허먼 멜빌은 왜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에게 성경에서 따온 이슈메일이란 이름을 부여했을까?
24만 단어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스물 한 살의 청년 이슈메일은 고래잡이 상선에서 홀로 살아남아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삶의 비밀을 세상에 전하는 전형적인 이야기꾼이지만 정작 방대한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다.
이슈메일은 '피쿼드'라는 고랫배에 승선 해서 태평양으로 출어 했다가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한 흰고래에 받쳐 배가 침몰하게 되자 반드시 그 흰고래를 포획하기 위해 광기 어린 집념에 사로잡힌 선장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한 인물이다.
따라서 <모비딕>은 다른 모든 동료 선원들이 사망한 가운데 악착 같이 혼자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스스로 이스마엘이라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한 젊은이의 체험담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이슈메일이라는 청년이 무법천지의 고래잡이 상선에서 가까스로 홀로 살아남아서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삶의 비밀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고래 잡이 상선인 포경선 '피쿼드'는 미국 백인들에게 전멸 당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으로 미국 북동부와 코네티컷 강 유역에 거주 했던 미 대륙 토착 원주민 부족이다.
1637년 백인 부대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피쿼드 부족의 비극은 민족 분쟁을 넘어 인종 섬멸 작전으로 불렸던 미 대륙의 끔찍한 피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미 대륙 원주민이 최초로 백인 부대에 맞서서 대등한 대결을 벌였던 <피퀴드 전쟁>은 영국에서 '메이 플라워' 호를 탄 백인 기독교 인들이 미 대륙에 도착 한지 17년 만에 미국 북동부 지역을 점령하며 신게계에서 거둔 눈부신 '승리'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허먼 멜빌이 <모비딕> 작품을 통해 미대륙의 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표현 했던 것일까?
흰 고래는 잔혹한 미 대륙의 침략자 백인 기독교도들을 상징하는 것일까?
수수께끼 같은 암시로 가득찬 <모비딕>은 단순히 몇 단락으로 스토리를 요약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작품이다.
<모비딕>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고래 사냥과 고래 잡이의 삶의 여정을 지나서 중반부로 들어 가면 고래를 추적해서 파멸 시키려는 에이햅 선장의 광기 어린 인간의 섬뜻한 면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와 있듯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다. 큰 어머니로 부르는 사라의 박해를 피해 하녀 신분인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을 떠나 모래 사막 같은 황무지 각지를 방랑하는 추방자이고 방랑자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등장하는 이슈메일 역시 계모 밑에서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난 인물이다. 그에겐 가정도 어머니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정 붙일 곳 없는 육지에서 기약 없이 무작정 바다를 떠도는 모험의 길을 선택했다.
절망적인 소외감에서 선택한 자신의 여정 속에서 이슈메일은 피쿼드호의 선상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바라보며 광기와 이성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 본다.
독자들 중에서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완독 하지 못할 경우 우주 같이 방대한 <모비딕> 작품에 감춰진 중심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폭의 풍경화에는 숲과 나무 그리고 강이 있듯이 방대한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 등장인물들의 생김새,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숲 속의 나무 뿐만 아니라 뒤엉킨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소설 읽기의 진정한 매력은 전체 이야기의 핵심인 중심부와 그 이면에 감춰진 세부 사항의 전체 도감을 머릿 속에 그려 보며 소설의 진정한 주제를 탐색해 나가는 것이다.
2024년 2월 1일 부터 투비컨티뉴드에 쓰기 시작한 창작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는 100회 완결을 기획해서 2025년 1월 9일 제 1부 50회 부터 중반부로 넘어 갔다.
https://tobe.aladin.co.kr/n/306335
<굿바이, 부다페스트>는 1914년 유럽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가문의 '이슈트반 저택'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세대와 인종, 그리고 계급별로 나눠서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내고 있다.
<굿바이, 부다페스트>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장군 죄르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루돌프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어머니 시시황후의 영향으로 헝가리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황태자 루돌프는 보수적이고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 하는 황제 아버지와 달리 진보적인 사상으로 시대를 앞섰던 선구자였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절친이였던 장군 죄르지의 인생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았고 어느 날 후계자 자리에 올라간 사촌 동생 페르디난트 대공이 펼쳤던 평화적인 외교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에 속한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총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요제프는 모든 것이 유지 되길 바랬다.
반면 그의 아들 황태자 루돌프는 모든 것을 바꾸어야만 제국의 평화와 질서가 유지 된다고 믿었다.
<굿바이, 부다페스트>에는 20세기 초 격변의 시대에 세대와 인종,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에서 역사에 실존 했던 인물과 내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
<굿바이, 부다페스트>의 첫 번째 출발 지점은 '비밀의 사제관'이다.
https://tobe.aladin.co.kr/n/149538
이야기의 초반부에 장군 죄르지와 그의 어린 딸 조피나, 집사 마그다,남자 하인 언드레시, 요리사 어누슈카,영국 국교회 교구당 소속에 이슈트반 가문 저택 사제관 목사 클라이만, 정원사 요셉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가정교사 안나와 세상을 떠난 마망 아가타, 엄마 릴리가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가정 교사 안나가 사라져 버린 사실에 놀란 조피나는 떠난 이유도 몰라 그녀가 사용했던 방으로 들어가 슬픈 감정을 억누른다.
조피나는 2살 때 세상을 떠난 엄마 릴리와 3년 전 엄마 곁으로 간 마망 아가타를 그리워 하던 중 목사 클라이만이 있는 사제관 예배당으로 간다.
예배를 마치고 저택을 벗어나 목사 클라이만과 함께 전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 조피나의 눈 앞에 1914년대 부다페스트 전경이 펼쳐 진다.
조피나와 목사 클라이만이 저택을 나간 사이에 조피나의 방은 불길에 휩싸이고 불이 진압 된 후 시신 한 구가 발견 된다.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제 2화 '이슈트반 저택의 이방인'들 편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부다페스트 시장 비서 티서가 소환장을 들고 저택으로 찾아 와 장군 죄르지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티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시계 촛침처럼 감시하고 관리하는 비서 쾨니그의 모습이 나온다.
제 3화 '토끼 섬의 고아들'편에는 도나우 강 유역에 있는 토끼 섬의 수도원에서 비서 쾨니그와 죄죄 박사가 한 여자 아이를 탈출 시키고 목사 클라이만은 아이의 신변 보호를 위해 교구당 신도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 소녀의 이름은 주전너, 장군 죄르지와 같은 나이인 소녀는 저택의 하녀가 된다.
<굿바이, 부다페스트>의 초반부의 이야기가 서서히 진행 될 수록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장군 죄르지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저택에서 불이 났을 때 조피나는 어디에 누구와 있었을까?
사라진 가정교사 안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토끼 섬의 수도원에서 탈출한 고아 소녀 주전너는 누구 일까?
조상 대대로 귀족 가문의 아이들, 사회적 지위가 없는 여성들, 하녀와 하인들, 부패한 공무원과 관료들, 사회적 지위 상승을 꿈꾸는 유대계들, 피 땀 눈물을 흘리는 노동자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상가들, 계급의 차별과 부의 평등을 위해 싸우는 아나키스트들, 제국의 영토를 넘보는 스파이들과 테러리스트들이 비록 역사에 이름을 새기지 못했지만 내가 창작한 <굿바이, 부다페스트>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야기가 중심부를 향해 치닫는 동안 앞서 등장한 인물들과 깊이 연결된 인물들의 사연들이 맞물리면서 서서히 갈등이 증폭 되어 퍼즐 조각처럼 흩어졌던 복선들이 하나 둘 씩 맞춰져 나간다.
2025년 7월 3일 <굿바이, 부다페스트>는 제 75화 '신 앞에 맹세하다' 지점까지 다다랐다.
https://tobe.aladin.co.kr/n/454202
1914년 세계는 수 세기에 걸쳐 유지 되었던 계급과 질서가 요동치며 민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들끓어 올랐다.
세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하루 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삶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적 사건 속에 다양한 인물들의 삶이 투영된 <굿바이, 부다페스트>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이 개개인의 삶에 중첩되어 펼쳐진다.
누군가는 격변의 시대에 편승하고, 누군가는 개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누군가는 기존 체제를 전복 시키기 위해 총을 꺼내 들었다.
격변의 시대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남는다.
소설의 첫 시작은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과 사고, 지식들이 총 동원되지만 이야기가 중심부를 향해 치닫을 수록 삶에 관한 심오한 관점이 투영 되어 깊은 곳에 실재 할 수 있는 어떤 신비한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세기의 걸작 <모비딕>과 비교 할 수 없지만 1년의 시간을 넘어 70회에 달하는 분량을 쓰는 동안 단순 시대를 대변하는 이야기가 아닌 1914년대의 격변의 역사 현장에서 살았던 인물들의 삶의 여정 속에 담긴 진실함을 담고자 노력 했다.
2023년 1월 12일 부터 투비 컨티뉴드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꼬박 2년의 시간을 넘어 2025년 7월 3일 현재까지 1670개의 노트를 발행했다.
현재 투비 컨티뉴드에 총 10개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고 매일 <모닝 페이지>에 글을 쓰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모닝 페이지
https://tobe.aladin.co.kr/s/2724
[왜 우리는 창조력을 발휘해야 하는가? 창조력만큼 사람들을 관대하고 즐겁고 활기차고 대담하고 훈훈하게 만들어 재물이나 다툼에 무관심하게 해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 중에서
창작 플랫폼에 매일 글을 쓰고 창작을 하고 부터는 하루 일과가 이전 보다 더 촘촘해졌고 시간을 좀 더 효율적이고 융통성 있게 쓰게 되었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24시간 이다.
24시간에서 평균적으로 잠자는 시간(일반적으로 6-7시간 숙면)을 제외 하면 개개인이 활동하고 움직이는 시간은 대략 12시간 정도일 것이다.
밥벌이를 하지 않는 시간에 나는 항상 머릿 속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글을 쓰고 있다.
숏품 그리고 웹툰과 웹소설의 범람 속에서도 깊이 있는 스토리를 찾아 읽는 이들이 있다.
집필 공간도 집필을 구상하는 노트도 출간을 준비 하기 위해 쓰는 원고도 없는 무명 작가가 쓴 에세이 <모닝 페이지>와 창작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를 꾸준하게 읽어 주는 독자들이 있다.
사람들이 왜 쓰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안에 갖고 있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사고를 한 쪽으로 밀어 버리고 내 안에 숨어 있는 평온하고 작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글쓰기는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