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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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소도시 푸엔데토도스 마을에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시스코 고야의 아버지는 바스크 태생으로 미천하고 가난한 도금공이었지만, 운 좋게 몰락 귀족의 딸인 그라시아 루시엔테스와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낳는다.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에서 가문의 배경이 없는 미천한 이들이 출세 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 뿐이였고 이 성직자들 중에서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는 이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부모에 의해 수도원에 형제들과 들어간 고야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종교재판소 미술검열관이었던 종교화가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Jose Luzan y Martinez, 1710-1785)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판화 작업 부터 석고 데생 작업에서 미술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한다.

문하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고야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을 받아 스페인 역사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공부 하기 시작하고 여러 차례 왕립 아카데미의 경연대회에 도전 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1770년 무작정 떠난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무수히 많은 종교화를 관찰하며 베끼는 작업을 하던 고야는 군주 초상화의 복제화 작업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1775년 부터 마드리드의 산타바르바라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공예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고야는 엘 파르도의 궁전 식당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밑그림 작업을 의뢰 받는다.


18세기 중반 스페인에서 부유한 귀족의 하인겸 비서로 일하거나 상업으로 부를 쌓은 벼락 부자를 의미하는 ‘마호’(Majo남자 멋쟁이 )와 마하(Maja; 여자 멋쟁이)를 고야는 그림에 등장 시켜서 춤추고, 술 마시고, 싸우고, 소풍을 즐기고, 카드놀이를 하고, 연을 날리고, 연애놀이를 하는 신나게 놀고 먹는 이상적인 모습을 연작 그림 형태로 완성한다.

당시 놀고 먹는 게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던 귀족들에게 고야의 연작품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 고야에게 작품 주문이 쇄도 하게 된다.

고야는 밤 낮으로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기 위해 귀족들의 유흥과 취향을 충족 시켜 주는 그림 위주 작품을 그리는 동안 그의 아이들이 줄줄이 사망을 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아이들의 죽음으로 삶의 낙을 잃어버린 고야는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에 더이상 집중하지 않고 버림 받고 굶주리며 거리를 떠도는 이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시기 부터 고야는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이들이나 거리의 매춘부, 핍박받는 농부들, 부유한 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맹인과 정신 지체를 앓는 광대들을 그리며 도시의 빛과 어둠을 기록하듯 동판화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고야가 살던 시기에 마드리드는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번화하고 부유한 이들이 몰려 사는 곳이였지만 수시로 칼부림이 일어났고 어디에서든 도적떼가 출몰해서 어떤 식으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범죄 도시였다.

1778년 부터 그리기 시작해서 1780년에 완성한 '교수형 당한 남자'라는 판화 작품에서 고야는 머리와 목은 쇠로 만든 목줄로 수직기둥에 고정된 끔찍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사형수를 마치 순교자처럼 그렸다.

고야가 사형수를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처럼 그린 이유는 당시 사형을 집행하고 그 임무를 직접 수행했던 이들은 성직자들이였기 때문이였다.

신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시민들을 처형 시켰고 수도원 안에서 신의 이름을 더럽힌 성직자들도 목에 밧줄이 감겨서 동료 사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고야는 1786년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최고 권력자 부터 그 권력에 아부하고 빌어 붙는 이들, 탐욕으로 가득 찬 계층과 사회에 가장 미천한 계급이 이들의 모습까지 다양한 기법으로 완성해 나갔다.

고야의 경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스페인 땅에서는 혁명과 내전이 터졌고 마녀 재판을 하듯 무고한 시민들은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했다.

영국의 첩자로 의심을 받았던 고야는 생활고를 겪던 중 중병을 앓아 후유증으로 귀가 멀어 버리게 된다.

그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암흑의 시기 동안 성화 속에 등장하는 가장 고귀한 신적인 존재들을 마녀와 마귀, 괴물의 얼굴로 둔갑 시켜 버린다.

사방이 컴컴한 공간에서 한 화가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고 그의 주변으로 스라소니, 고양이, 박쥐떼들, 올빼미 일곱 마리가 모여 있다.

판화집 <변덕>의 43번째 작품인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의 판화를 그리던 시기에 고야는 종교 재판소에서 언젠가 자신을 소환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폭력과 광기에 사로잡힌 형상을 스라소니,고양이·올빼미·박쥐들에 투영시켰다.

고야는 낙후된 스페인이 발전하려면 교회에 의존하지 말고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야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스페인 땅에는 이성 보다 비합리성, 불안, 폭력, 광기로 무장한 권력자들이 권세를 잡고 피의 전쟁을 벌였다.

마드리드는 공동묘지로 가득했다. 산이시드로 공동묘지, 카라반첼 바호 교구 공동묘지,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 뒷편에 둘러싸여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영국인 공동묘지까지 영국인 공동묘지 옆 건물에는 잔디밭도 없고 양로원을 연상시키는 크고 작은 화려한 속옷이 거미줄처럼 얽힌 빨랫줄에 항상 널려 있었다.

-엘비라 나바로의 <지옥의 건축학을 위한 기록> 중에서

1980년 시청 도시 계획 담당관으로 일하던 그는 중앙아메리카로 이주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멕시코로 건너간다.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마약과 미신에 빠져 살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예전의 일터인 시청으로 돌아가지만 지난 시절 제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던 큰형의 환영이 수시로 나타나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온갖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죽은 큰 형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고 실체를 보지 못하는 가족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큰 형은 국방성의 고위직 인사로 재직 할 당시에 미확인 비행 물체를 추적하는 아폴로 계획 지상 추적소의 관리를 맡게 되지만 비밀을 발설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 시민들은 어딘선가 수상한 물체가 출몰하면 총질을 하며 공포에 떨고 국가는 수상한 징후가 보이는 지역은 모두 봉쇄 시켜 버린다.

매일 신문에 미확인된 비행 물체가 어디선가 출몰 했다는 출처가 없는 기사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전국의 사기꾼들과 자칭 예언자라는 이들, 우주 천제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괴소문에 날개를 달아 주고 이 모든 혼돈의 원인자로 미확인 비행 물체를 추적하는 관리인인 큰 형이 지목된다.

큰형은 가족들에게 조차 외면을 받아 서서히 정신이 마비되어 멍청한 고깃덩어리 처럼 변해 버리고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다 결국 누군가 자신의 목에 '정신 이상자'라는 팻말을 걸어두었다며 자해를 시도한다.

수시로 울고 웃다가 펄쩍 펄쩍 짐승처럼 뛰어다니던 큰 형은 거리로 뛰쳐 나가 악마가 도시를 지배 하니 악마의 시선으로 건물들을 보기 시작한다.

교회 천장에 그려진 성상화에 사탄주의가 깃들여 있다는 망상을 한 큰형의 눈에 수도사와 사제들 모두 악마의 사신으로 보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신 병원에서 어떤 죽음을 알지 못한 큰형의 망상에 시달리던 동생은 어쩌면 큰형은 어디에선가 성직자나 구마 사제로 생을 이어가고 있을 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어느 목요일, 차에 앉아 있던 그는 별관의 어느 방 커튼 사이로 비치는 큰형의 그림자를 보았다.

말라붙은 야자수 잎이 발코니에 달려 있었다.

큰 형은 방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구석에 몰아넣고 위협하거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불이 꺼졌다. 다시 한 번 온몸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그의 뼈와 근육은 머리가 상황을 논리적이면서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건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연속 되풀이 해서 일어났다.

나흘째 되던 날 성당의 원형 천장에 등이 켜지고 드디어 동생은 큰형의 모습으로 보이는 사람의 형태를 보게 된다.

다음날 미사를 마친 동생은 교구 신부에게 찾아가 천장에 직접 올라가는 방법이 있냐고 묻자 신부는 몸을 안전벨트로 고정하지 않으면 올라갈 방법이 없다고 딱 잘라 답한다.

동생은 신부에게 누군가 천장에 올라가 있는 걸 보았다고 말하자 신부는 그를 내쫓아 버린다.

그 날 밤 동생은 천장에 누군가 올라가고 있는 걸 목격하게 되고 몇 시간에 걸쳐서 그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고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1780

1780년 고야는 수도원 사제들에게 잔혹하게 사형 당한 어느 사형수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바로 옆에 그려서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입을 벌린 채 두 눈을 감지 못한 상태로 죽음에 이른 자를 마치 박해 받은 성인이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그렸다.

인간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혀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죽음, 그리고 죄를 지어서 성직자들 손에 죽은 평범한 시민이 지은 죄의 무게는 서로 동등한 것일까?

고야가 죽고 나서 그의 조국은 잔혹한 내전을 치루며 결국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힘과 목소리가 센 자들이 외치는 불확실한 정보나 편견을 기반으로 해 다른 이를 비난하고 배척하며 낙인을 찍어버리는 괴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선한 존재일까? 아니면 악한 존재일까?

이 세상은 과연 천국에 가까운 곳일까?, 아니면 지옥에 가까운 곳일까?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후보에 오른 연작 소설집 , 스페인 태생의 엘비라 나바로의 <토끼들의 섬>은 과거와 현실을 오고 가며 스페인 땅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처한 노동의 현실과 개인 존엄의 위기, 사회의 불안정함, 정체성의 혼돈에 사로 잡힌 모습을 수평적, 수직적으로 시 공간을 이동시키며 과연 이 세상이 인간이 살아 갈 만한 환경인지 실험적인 문체로 펼쳐 보인다.

어디에 살고 있어도 인간은 항상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니 어디서든 이런 문구를 보게 되면 현실에 처한 암울한 내 운명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조언을 누군가 해주지 않을까라며 귀와 눈이 솔깃해진다.

기적과 점술은 실제로 존재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교활한 사기꾼이 많죠,

삶의 진실을 밝혀줄 타로점을 봐드리겠습니다.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8034550930

-점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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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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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배경의 한 남자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치 권총을 발사 하듯 그의 손에 들려진 라이터에 불꽃이 솟아 있다.

독일의 현대미술가이자 전 세계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20세기 회화 작품을 21세기적 세계관에 투영시킨 미래 지향적인 예술가다.

회화 장르에서 시작한 그의 예술은 사진처럼 이미지를 재현하는 기법으로 세상을 향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는 한 남자의 자화상부터 소녀가 된 자기 딸의 뒷모습을 사진에 기초해 화려한 색채, 그윽하고 안정감 있는 톤, 정교한 붓질로 아름답게 재현 해서 ‘사진을 기반으로 한 그림들(photography based painting)'을 독특한 장르로 승화 시켰다.

(c)Gerhard Richter's 'Betty,1988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회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사진 원본에 붓질을 해서 이미 완성된 작품에 덧칠 하는 연출 기법으로 마치 21세기 디지털기기로 사진을 보정 하듯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가 완성한 작품은 사진일까?회화 일까? 아니면 사진을 기반으로 한 그림일까?

(c) Mieno Kei

미대를 졸업한 뒤 광고 회사에 다니던 ‘카논’은 상사의 괴롬힘에 시달리다 결국 퇴사하고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가 특집기사를 맡게 된다.

여름이 시작 되기 몇 달 전인 3월 3일 히나마쓰리 축제에 맞춰 시작한 전시회 <늦여름> 안내장을 발견한 카논은 전시장을 찾아 가고 미스터리한 화가가 남긴 작품 <늦여름> 앞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그림의 크기와 사진같은 세밀한 기법에 탐복한다.

그림 속 모델이 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해서 죽음의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화가 '나유타'의 특집 기사를 맡게 된 카논은 그의 실체를 취재하는 동안 나유타의 독특한 사진 회화 작품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연기로 덮인 하늘과 멀리 치솟은 불기둥, 제일 앞쪽에 찌부러진 기와지붕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꼭대기에 한 소녀가 이쪽을 등지고 서 있다. 불에 그을리고 찢어진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이와이 슌지의 <제로의 늦여름> 중에서

‘사신’(死神)으로 불리는 어느 천재 복면 화가의 이야기를 쫓는 ‘아트 미스터리’ ‘제로의 늦여름’에는 어느 천재 복면 화가가 남긴 여러 작품들이 등장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는 회화적인 언어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림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로테스크한 나유타 작품 중에서도 내가 비교적 좋아하는 그림이 있었다.

<까마귀 공원>이라는 작품이다.

어린 소녀의 초상화로, 티 없는 귀여움이 어딘지 후지이 쓰토무(일본 서양화가)의 작품을 연상 시킨다.

도록의 같은 페이지에 실린, 또 다른 소녀를 그린 <카나리아의 집>과 마치 한 쌍처럼 보인다. 어둑한 방에 있는 소녀를 심플하게 그린 <카나리아의 집>에 비하면 <까마귀 공원>에는 다소 독특한 구상이 엿보인다.

눈동자에는 쓸쓸함이 가득하고 입은 일자로 다물렸다. 손에 든 한 장의 사진에는 소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 소녀는 웃고 있다.

회화적인 언어로 미술 작품을 묘사했지만 스토리의 전개는 유괴와 행방불명의 덫이 곳곳에 깔려 있어 오싹하다.

미술 기자 카논이 나유타가 남긴 작품 세계에 빠져 들 때마다 작품 속 소녀들은 행방 불명 되거나 살해 당해서 피해 가족들의 삶은 산산 조각이 나버린다.

'훌륭한 그림은, 한 눈에 압니다. 뭐랄까, 사체인데 살아있는 것 같았죠. 대단한 거죠. 언제가 되든 어디서든 꼭 공개하고 싶은 그림이네요. 하고 제가 말했을 겁니다. 얼마 후 아드님이 직접 연락해왔어요. 그림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작가명은 '나유타'가 좋겠다. 뭐, 그런 얘깁니다.'

유화를 사용해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 이미지를 보고 그리기 위해 본인의 사진을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잡지와 신문, 책에 수록딘 실제 이미지를 스크랩 해서 붓으로 흐릿하게 화면을 뭉개버리거나 흘려버리는 기법으로 생생하면서 선명한 리얼리티 경계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는 이런 사진 회화적인 작업을 통해 광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갔던 어린 시절의 시간부터 종전 후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인간성이 상실된 현대 독일의 모습을 반영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에는 예기치 못한 선택과 우연, 영감 그리고 파괴의 요소들로 가득 채워져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화가의 시선으로 해석된 세상을 보게 만들었다.

화가 나유타는 왜 죽었을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왜 유괴 되거나 살해 당했을까?

화가는 증거로 작품을 남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남긴 작품에는 '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누구도 구하지 못해. 그런 저주'가 걸려 있는 것일까?

가세가 붓을 들고 가시와기 슈조의 그림과 마주했다. 그의 붓끝이 거장의 세계에 닿는다. 붓이 움직인다.

사는 동안 한 번 쯤은 어떤 작품 앞에서 매혹 당하거나 일순간 마음에 무언의 감정이 솟아 날 때가 있다.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을 그린 화가의 심성은 어떤 상태 였을까?

글로 묘사된 나유타의 그림을 머릿 속으로 상상 하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행동을 추측해 보고는 내가 붓을 잡았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배경은 어떤 색으로 처리 했을 까..

이젤을 세워 놓고 작품을 완성 하고 나서 사진으로 작품을 찍어두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버린 나유타,만면에 웃음을 띤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그 또는 그녀가 긴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채 춤을 추고 있는 작품들....

<연옥>....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제 몸에 불을 붙이고 불길에 휩싸여 춤추는 사람을 촬영해서 사진으로 현상하고 마지막 붓으로 완성한 화가 나유타.

영화 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와이 슌지 감독은 겨울의 계절이 시작되면 생각나는 영화‘러브레터’와 ‘릴리슈슈의 모든 것’, ‘립반윙클의 신부’, ‘키리에의 노래’ 등 거의 모든 자신의 작품의 원작을 직접 쓸 정도로 일찌감치 글쓰기 재능을 인정받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화가 나유타가 실제로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회화를 완성하듯 이와이 슌지 감독은 미스터리한 예술 세계를 그린<제로의 늦여름>에서 카메라 촬영 기법처럼 스토리를 전개 시켜 나가면서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회화적인 언어로 묘사했다.

Overpainted photograph 17. Nov. 99 ©Gerhard Richter 2017

연기로 덮인 하늘과 멀리 치솟은 불기둥, 제일 앞쪽에 찌부러진 기와지붕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꼭대기에 한 소녀가 이쪽을 등지고 서 있다. 불에 그을리고 찢어진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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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훈드여, 새로운 사상은 반드시 두 가지 질문을 받게 되오. 하나는 그 사상이 약할 때: 너는 어떤 존재인가? 타협하고 거래하고 사회에 순응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 살아남으려 노력하는가, 아니면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에 꼬장꼬장하고 게다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산들바람에 휘어지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쪽을 택하는가?─후자인 경우, 대개는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쯤)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이오. 그러나 백번째에는 세상을 뒤바꿀 수도 있소.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1989년 9월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자마자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비하 하고 모독 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불태우며 극렬한 시위로 들끓어 오른다.


악마의 시는 무슬림 인구 집단이 많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수단,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태국, 탄자니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에서 출판을 금지 시켜버린다.

1990년 2월 14일 이란 테헤란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89년 6월 사망) 유언으로 남긴 '무슬림을 모독한 자는 처단하라'라는 종교 법령' 파트와'를 발표하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무슬림들은 살만 루슈디를 발견 하는 즉시 무함마드의 이름으로 처단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990년 2월 14일 파트와가 발령된 다음날 부터 살만 루슈디는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 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악마의 시>를 불 태우는 시위와 작가 살만 루슈디의 생명을 지키자는 시위로 극렬하게 나눠져 버린다.

이 책을 출간하는 나라의 담당 출판사들은 무슬림으로 부터 폭탄 테러 위협을 받았고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들은 무슬림 폭도들에게 공격 당하거나 살해를 당했다.

유럽에서 <악마의 시>를 가장 먼저 출간한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그리고 아시아 국가에서는 일본의 번역가와 출판인들이 무슬림의 공격으로 안타까운 생명을 잃자 세계 각국의 출판인들과 작가 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살만 루슈디와 출판인들과 번역가들을 무슬림의 테러 대상에서 보호 받아야 하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 하라는 선언서를 발표 한다.

영국은 살만 루슈디를 24시간 밀착 보호 하며 이란에게 경제적 외교적 제재 조치를 취했다.


살라딘은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그 사건이 다윈의 보복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덤스데이는 저 딱딱한 빅토리아시대에 살았던 불쌍한 찰스에게 미국의 마약문화에 대한 책임을 덮어씌웠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 와서는 자기가 그토록 반대하던 부도덕한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중에서

1981년 <한밤의 아이들> 출간한 살만 루슈디는 전 세계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세계 문단 중심에서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영국 정보부의 보호 아래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세워 보다가 사용했던 침대가 무려 56개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격투기, 권투 같은 호신술을 배운다.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가 본격적으로 서점에 깔리기 3개월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언을 반드시 지킨다는 무슬림들이 파트와는 발령한 사람만 취소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살만 루슈디를 향한 칼 끝을 저버리지 않았다.

제국 시절에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를 지배해서 무슬림의 이민자들과 난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프랑스는 1993년에서야 <악마의 시>를 번역 출간 하고 이슬람의 테러 행위가 미국 땅으로 번질 것을 우려 했던 미국은 프랑스 출간에 뒤이어 미국판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파트와 법령을 충실하게 시행했던 무슬림 폭도와 테러리스트들은 세계 곳곳에 알라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테러짓을 저지르는 동안 살만 루슈디는 공포심에 떨며 무기력하게 살지 않았다.

그는 매일 각종 호신술을 연마 했고 전 세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언론의자유, 종교적, 관용, 문학의 자유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하며 전세계 여론을 움직였다.

1998년 서방 국가의 제재 압력에 버티기 힘들었던 이란은 루슈디의 사형 선고를 철회 한다고 발표 했지만 루슈디를 처단 하는 어떤 무슬림도 처벌하겠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파트와 법령이 발표 되자 마자 이틀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도저히 이런 상태로 살 수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 자기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부를 들키는 것, 그 살 떨리는 벌거벗음의 상태 그것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의 모든 비밀이 고스란히 드러나버린 상황을 -납치,추락,체포 -목격하지 않았던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반세기를 지나서도 무슬림들은 <악마의 시>를 쓴 작가 살만 루슈디를 용서 하지 않았다.

2022년 여름 살만 루슈디는 뉴욕대에 주최하는 강연장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이슬람 테러리스트 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한쪽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고 한 쪽 눈 시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바닥에 쓰러져 내 몸에서 바깥쪽으로 퍼져가던 피 웅덩이를 바라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피가 많네. 나는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극적이고 특별히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 내 목을 눌렀다. 큰 엄지손가락 같았다. 그 손가락이 가장 큰 상처를 눌러 내 생명이 담긴 피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살만 루슈디의 <나이프> 중에서


원형 극장 무대에 살만 루슈디가 올라가는 순간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쓴 24세 무슬림 청년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찌르고 얼굴 위쪽과 입 왼쪽, 가슴, 허벅지를 차례차례 찌른다.

살인마 무슬림 청년이 살만 루슈디를 찌른 시간은 단 27초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과 의사들의 빠른 응급처리를 받은 살만 루슈디는 왼손 힘줄과 대부분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로 응급실로 실려와 죽음을 향해 갔다.


눈을 잃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시신경이 손상되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나를 죽이지 못했으나 내 눈을 가져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눈을 잃는다는 건 신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시야의 4분의 1을 아예 보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마취제를 투여 받은 살만 루슈디는 가족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 삶을 되찾아야 해. 죽음과 비슷한 상황에서 그저 회복만 할 수는 없어.

삶을 되찾아야 해.'

일주일 동안 끔찍한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 회복 기간 동안 살만 루슈디는 앉고 일어서고 걷고 움직이는 법을 천천히 시도하고 파트와 법령 선포 당시 아홉 살 나이였던 아들, 이제는 새 하얀 머리카락으로 풍성하게 뒤덮인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끔찍한 사고를 겪은지 18일 만에 살만 루슈디는 환자복을 벗고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휠체어에 올라탄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 하는 눈도 귀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회복의 시간을 갖고 칼이 아닌 펜을 들고 한 글자 씩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언어도 칼이었다.언어는 세상을 베어 세상의 의미를 그 내적 작동 방식과 비밀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언어는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베어 들어갈 수 있었다. 언어는 헛소리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가 나의 칼이었다.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들고 달려간 테러리스트 이름은 하디 마타르 24살의 레바논 출신인 그는 ‘악마의 시’를 단 두 페이지만 읽은 뒤 범행을 계획했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그의 집에선 3만개가 넘는 증거물들이 쏟아졌다.

이란과 이슬람 국가는 이 사건과 자국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고 그 테러리스트도 단독범행이라 자백했다.

현재 미국 경찰은 배후 세력을 찾아내지 못했다.

파트와가 선포 된지 33년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칼에 찔린 살만 루슈디는 강한 의지로 살아 남았다.

그는 회복 기간 동안 자신의 목을 찌른 그 테러리스트에게 범행의 이유를 묻는 일문일답 형식의 상상속 대화를 시도한다.



-살만 루슈디

신의 본성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테러리스트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고 모든 것을 아시지. 그분은 곧 모든 것이야.

-살만 루슈디

너희의 전통에 따르면, 너희의 신과 그 책에 나오는 다른 민족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믿는 신은 다른 거지? 그 사람들은 그들의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테러리스트

그들이 틀렸어.

-살만 루슈디

너는 내가 부정직할 뿐 아니라 악마이기도 하다는 거네. 그래서 나를 죽이는 게 옳다는 거야?

-테러리스트

너는 새끼 악마일 뿐이야. 그러니 자만하지 마. 하긴 새끼도 악마도 악마지.

-살만 루슈디

악마는 파멸 시켜야 하고?

-테러리스트

그래, 넌 이십억 명의 미움을 받고 있어. 그것만 알면 돼. 그렇게 까지 미움을 받다니. 어떤 기분일까? 벌레가 된 기분이겠지 잘난 체하며 온갖 말을 떠들어대지만 사실 너는 자신이 벌레 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어. 발로 밟아 죽여야 할 벌레 말이야. 넌 다른 나라고 여행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전 세계 나라의 절반 정도에는 발도 들일 수 없어. 그런 곳들에서는 너에 대한 증오가 너무도 강하니까.

-살만 루슈디

평범한 남자에게 할 만한 평범한 질문이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나?

-테러리스트

난 신을 사랑한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고 나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성을 모독했는지 아닌지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라졌다.

1989년 ‘악마의 시’는 출간 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돼 수입·유통·출판이 금지되어서 이슬람권에서 책을 읽은 사람이 드물었고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휘두른 테러리스트도 딱 두 페이지만 읽어 보고 범행을 계획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신성 모독이 아닌 시대와 사회에 대한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찬 20세기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은 온건한 사람으로 보이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내가 여기 있는 까닭은 내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든 것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인,카리브인, 인도인,파키스탄인,방글라데시인, 키프로스인, 중국인-만약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들이 일자리와 존엄성과 자식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저 하늘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입니다.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중에서


봄베이발 여객기가 런던 상공에서 폭발하고 두 남자 살라딘 참차와 지브릴 파리슈타만 살아 남는다.

살아 남은 두 사람의 운명은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탑승 했을 때의 영혼과 자아를 벗어 던져 버린다.

모국어도 잊어 버리고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영혼, 초능력을 갖은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현실에서 소멸 되어 버린 채 지상의 천사로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 거야. 자네와 나. 생일 축하하네. 이봐 생일 축하 한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홀수 장에서 비행기에서 추락 하기 전 지상에서 15년 동안 배우의 삶을 살았던 지브릴 파리슈타의 삶을 보여 주고 짝수 장에서는 천사로 변신한 모습으로 교차 시키며 세상을 들끓어 오르게 만드는 온갖 사건들을 끄집어 낸다.


기억할 거야 양탄자 타고 다니는 레카 우리가 추락할 때 봤잖아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는데 미친놈 같은 스코틀랜드 복장을 하고 고라(백인, 유럽인) 같던데.

이름은 제대로 못 들었지만

알리도 그 둘을 봤는지 못 봤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알리는 그대로 서 있기만 했고

레카가 시킨 일이었어 알리를 위층으로 데려가라고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은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면서

나는 손가락으로 알리를 겨냥했고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어

나는 알리를 밀지 않았어

레카가 밀었지

나는 절대로 알리를 밀어버릴 수 없었으니까.

스푸노

내 마음을 알아줘 스푸노

빌어먹을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에서 초월적 존재의 진짜 정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고 그의 정체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그 초월적 존재는 시 공간을 오고 가며 현실과 지옥, 그리고 천국 속에서 지상의 온갖 사건 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푸념 하고 변명하며 거짓말 같은 진실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파트와 선포 후 33년 6개월 만에 자신의 목을 찌른 테러리스트가 법정에 서게 되는 날 작가 살만 루슈디는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삶에 당신이 침입한 것은 폭력적이고 해로웠지만. 이제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지요. 당신이 감옥에서 보낼 나날이 무엇으로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아닐 거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앞으로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아마 별것 아닌 듯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칠 겁니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나날 동안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상관없는 존재가 될 겁니다.

나는 당신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서 기쁩니다. 내 삶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살만 루슈디


루슈디는 자신을 향한 칼에 펜으로 맞서며 언어로 세상을 베고 찌르면서 종교의 관습과 굴레로 겹겹이 쌓여 있는 불평등을 향해 진정한 자유의 힘이 무엇인지 언어의 힘으로 증명해 보였다.

회복 기간 동안 써 내려간 <나이프>에서 루슈디는 이런 말을 한다.


합리주의자의 신앙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해. '사람은 자신의 열정에 어울리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신을 믿고, 자신의 잔인함에 핑계를 대기 위해 믿음을 이용한다. 오직 친절한 사람만이 친절한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경우에든 친절하게 행동한다.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로 살해를 지시하는 자는 신의 제자가 아닌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살인 교살자일 뿐이다,

어느 시대나 어떤 사회에서도 예술은 논쟁과 비판을 불러 일으키지만 예술의 궁극적 가치를 인간성의 본질에 부합되는 자유와 존엄의 권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단,그 예술의 가치가 형편 없다면 사람들에게 금세 잊혀 질 것이고 역사에 기록 되지 않을 것이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추방 당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오비디우스가 세상에 남긴 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살해 당하고 불태워지고 소각 되고 쇠창살에 갇힐 지라도 말을 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유까지 막아 낼 수 없다.

신의 이름을 외치며 칼을 들고 달려든 자에게 생명을 잃을 뻔 했던 살만 루슈디는 폭력이 아닌 펜을 들고 예술로 이렇게 답했다.


언어는 나의 칼이었다.

만약 내가 뜻밖의 칼 싸움에 휘말렸다면

아마도 ‘언어’라는 칼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만 루슈디(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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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11-11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작가의 분노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오늘도 눈호강하고 갑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당~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

scott 2024-11-19 11:22   좋아요 2 | URL
살만 루슈디 여전히 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눈과 팔의 신경이 끊어져 버렸지만 죽을 때까지 칼 대신 펜을 쥐고 악의 공포를 이겨 내겠다고 합니다
에이 아이 시대에 더 소중해진 펜의 힘! ^^
 
인버트 영매탐정 조즈카 2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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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모자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남자의 실루엣만 봐도 영상이나 책을 읽지 않았어도 실존 하지 않는 어떤 인물 보다 유명한 탐정 셜록 홈스라는 걸 전 세계인들은 알고 있다.

셜록홈스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지만 그가 소설 속에 살았던 주소는 실제 하고 있고 그 주소가 있는 장소에 세워진 집은 셜록 홈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어 박물관까지 차려져서 전 세계 팬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 세상에 실존했던 어떤 역사적인 인물들도 탐정 셜록 홈스의 필적할만한 캐릭터가 되지 못한다.

허구의 인물을 창조한 작가 코난 도일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영원불멸한 가상의 인물을 창조 할 수 있었을까?

1882년 영국 포츠머스에 병원을 개업한 코넌 도일은 환자가 찾아오지 않아 월세를 내지 못할 정도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고심 끝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첫 작품부터 정통 역사 소설에 도전하고 모아 둔 돈을 탈탈 털어 출간하지만 책이 팔리지 않아서 자리만 차지 하고 있으니 흔적도 없이 서점 진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변에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없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한 코넌 도일은 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 시들이 쌓여서 어느새 100편 넘는 시를 발표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도전한 분야는 추리 소설로 평소에 종이조각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던 분야에 코넌 도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다.

그렇게 탄생한 코넌 도일의 첫 추리 장편이 '주홍색 연구'로 서점 가판대에 진열하자 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책이 되고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출간 독촉에 떠밀려 써낸 두 번째 장편 '네 개의 서명'도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사람들은 코넌 도일이 창조해낸 캐릭터 셜록 홈스에 열광하며 사슴 사냥꾼 모자에 파이프를 문 셜록 홈스 패션을 흉내내는 남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뒤이어 나온 단편모음집 '셜록 홈스의 모험'은 코넌도일을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만들며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 놓았다.

광팬들은 새 책이 출간 될 때마다 서점에 구름같이 모여들고 코넌 도일은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스타작가가 되었지만 얄팍한 대중 소설 작가 보다 굵직한 역사 소설가로 남기를 원했다.

마침내 코넌 도일은 더 이상 자신의 소설에 셜록 홈스를 등장 시키기 않기로 결심하고 1894년 출간한 '마지막 사건'에서 홈스를 죽여버린다.

광팬들에게 셜록 홈스가 스위스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숙적 모리아티와 함께 추락사 하는 장면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였다.

소설을 연재하던 잡지사들은 구독 거부 사태에 직면하고 광팬들의 항의로 마음고생에 시달리던 코넌 도일은 어머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편지를 보낸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답장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코넌, 네가 힘든 걸 잘 알겠다. 그런데 도대체 왜 셜록 홈스를 죽인거니?"

어머니에게 답장을 받은 코넌 도일은 7년을 버티다가 결국 셜록 홈스를 살려낸다

괴물 개의 전설과 그에 휘둘리는 인간의 속성을 그린 '바스커빌가의 개'에 드디어 홈즈가 다시 등장한다.

"나는 지금까지 수사력의 범위를 현실 세계로 제한하고 이 세상의 악과 맞서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가상의 괴물이라면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존재 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에 푹 빠져버린 독자들의 비 이성적인 심리적 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경험했던 코넌 도일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인 영적인 힘에 대해 깊이 연구 했다.

셜록 홈스는 마치 접신을 한 영매 처럼 낯선 사람을 한 번 훑어보는 것 만으로 직업과 성격은 물론 최근에 다녀온 곳이나 현재 처한 상황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처음 본 사람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셜록 홈스의 이런 능력은 사건마다 초인적인 추리력을 보여 줘서 읽는 독자들에게 큰 재미를 안겨 주었고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가 되었다.

의학을 공부하고 진료실도 운영했던 코넌 도일은 자신 창조한 홈스처럼 이성과 논리로 무장 했던 인물이 아니였다.

그는 신과 대화 할 수 있다는 ‘접신’을 신봉하며 심령술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마녀 법 폐지에 앞장섰다. 협심증을 앓아 정원 산책도 힘들어했지만, 북유럽으로 심령 순회를 떠날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생애 마지막 4분의 1을 심령술 전도사로서 살다 갔다.

만약 실제 세상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초능력자가 등장해서 첨단 수사 기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 현장에 투입되어 미제 사건을 해결 하게 된다면 현장의 증거물과 범행 동기 그리고 범죄 행위에 대한 법적 논리에 부합되지 않게 된다.

게다가 죽은 자의 마지막을 본다거나 아예 피살자의 혼을 불러오는 영매가 자칫 억울한 이들에게 누명을 씌울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의 범죄 사건에 거짓말 탐지기는 도입이 되어도 영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수사 현장에 투입되지 않는다.

단,미국의 FBI도 난항을 겪게 되는 수사에 최면술과 심리 요법을 통해 목격자의 기억을 더듬어서 무의식 중에 잠재된 기억을 끄집어 내어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 내기도 한다.

조즈카 히스이 신비로운 비취색 눈동자를 갖고 있는 그녀의 직업은 영매 탐정, 사건을 해결 하러 나갈 때마다 컬러 렌즈를 착용하고 패션 잡지 화보에 등장 할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 입는다.

비취색의 신비로운 눈빛으로 영적인 시공간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능력은 '인버트(invert)

즉, 사건의 발생 동기를 거꾸로 추적해 나가면서 법과 논리를 뒤집어 버리며 오리 무중한 사건의 실체를 밝혀 내는 명 탐정이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들과 수사 담당자들 앞에서는 영적인 능력으로 진상을 미리 파악하고 나서 이성적인 논리에 맞춰 사건의 퍼즐을 하나 하나 수집해서 사건의 최종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 않는다.

신중하게 접근 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현실의 세상에서 충족 시켜 줄 누군가를 통해 사건을 해결 할 뿐이다.

추리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사건 발생 시점 부터 막연하게 범인이 누군지 찾기 시작한다. 일단 잠정적으로 이 사람이 범인일 것 같다는 의심을 갖고 나면 작가가 곳곳에 설치 해 놓은 논리를 따라 가기 보다 독자 스스로 정해 놓은 잠정적 범인의 행적을 쫓는데 급급하다.

따라서 독자 이기도 한 작가들은 첫 시작부터 이 사람이 범인이다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추리 소설은 추리를 즐기기 보다는 <반전>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의외의 범인과 의외의 결과, 흔히들 독자들의 허를 찌르고 뒤통수를 때리는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치밀한 논리와 두뇌 싸움의 대열에 독자들도 가세 하게 만들며 읽는 쾌감까지 느끼게 만든다면 시리즈 작품이 나올 때까지 목을 빼고 기다릴 것이다.

일본 추리 소설계에선 갖가지 초현실적인 설정을 동원한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가 대세로 영적 능력의 매력적인 여성 탐정이 주인공인 <영매 탐정 조즈카>는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시작으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본격미스터리 베스트10 등 도서차트 5관왕에 오르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영적 능력을 갖춘 영매 조즈카는 세상을 뒤 흔들어 버릴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가령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피해자가 살해 당한 장소에서만 기운을 느낄 수 있고, 또 영혼과의 공명 여부도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추리소설가 마코토와 짝을 이뤄서 여러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따라서 독자들은 영매 탐정의 영적인 능력이 보여주는 비 이성적인 논리와 현장 답사를 하며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흔적과 증거물을 토대로 논리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소설가 마코토의 합동 수사 과정을 함께 추리해 나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영상 드라마 시리즈로도 제작된 <영매 탐정 조즈카>는 영적인 능력 때문에 친구도 없고 스스로 저주 받은 존재라 느꼈지만 범죄 수사에 기여 하면서 비로소 세상을 만나게 되고 사건 해결의 논리적 실마리를 찾아주는 소설가 마코토와 우정과 애정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흘러 넘치는 청춘 소설과 사이코 스릴러 탐정물을 혼합한 새로운 추리물이다.

추리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보다 더 끔찍한 범행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대에 영적인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답답한 현실을 토로 하러 가는 이들이 몰려 가고 있다.

유툽에 무속, 무당, 샤머니즘이라는 단어 키워드로 검색하면 총천연색 한복과 알록 달록한 방울을 흔들고 부채를 펼치는 한국 무속인들 영상들이 수백개가 좌르륵 뜬다.

이들 무속인들은 현재 가장 핫한 연예인들, 인기 몰이를 하는 배우들, 급부상하고 있는 인물들, 정치인들 그리고 재벌들 사주를 분석하는 영상들이 많고 어떤 무속인들은 적중률 90퍼센트 이상을 보이며 유명인들의 운세를 미리 예측하기도 한다.

출처: South Korea's young shamans revive ancient tradition with social media ,.reuters,2024.0608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문 직종인 점술가는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21세기에 가장 멋지고 세련된 인생 상담소로 발빠르게 변모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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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04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라는 직업도 어느 정도 소위 신기가 있어야 되지 않나 싶어요. 작가 스스로 자신의 무의식을 깊이 파헤치다 보면 작품이 이성의 영역을 벗어 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scott 님, 추리 소설과 영적 탐정에 관한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scott 2024-11-04 18:24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려면 예지력과 신기가 있어야 독자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뚝 떨어지고 있네요
마힐님 건강 잘 챙기세요 ^^

희선 2024-11-05 0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셜록 홈즈는 많은 사람한테 영향을 주고 그걸로 다른 소설이 나오기도 했군요 소설뿐 아니라 만화도... <카모노하시 론의 금단 추리>에서는 모리어티 집안과 홈즈 집안 후손이라는 설정이 나오더군요 카모노하시 론이... M 집안은 범죄 집안으로 모리어티 후손...

영매탐정이지만... 다음은 말하지 않아야겠군요 첫번째 책 본 사람은 다 알겠지요 scott 님은 두번째 책 만나셨군요 첫번째 뒤에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 게 맞기도 했어요 그건 범인이군요


희선
 
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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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는 극심한 가난 속에 떠돌이처럼 친구들의 집을 오고 가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악상으로 작곡했다. .

그는 악상이 떠오를 때면 친구와 식사 도중에 메뉴판에도 음표를 그렸고 잠을 자던 중에 악상이 떠올라 밤새 작곡하다가 새로운 곡이 떠오르면 앞서 작곡했던 것을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방탕한 생활로 얻은 매독 후유증으로 인해 건망증이 매우 심해진 슈베르트는 쓰던 곡을 곧잘 잊어버린 경우가 많았고 평생 동안 자신의 피아노를 8개월밖에는 가지지 못해서 대부분의 곡을 기타로 작곡하거나 허밍으로 음을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실내악곡은 악기로 연주되는 가곡 처럼 악기 특유의 음색으로 노래하듯 울린다.

애절한 선율로 가득 찬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는 음악가들에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듣고 싶은 곡으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장례식 때 슈베르트 현악오중주 C장조 D.956, 작품163/2악장 아다지오를 연주 해 달라고 부탁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조셉 선더스는 자신의 무덤 비석에 이 곡 제1악장의 제2주제를 새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슈만은 때 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슈베르트 사촌 형에게 찾아가 자필 악보를 보여 줄 수 없냐고 부탁했을 정도로 듣는 이들에게 한 없는 슬픔과 애수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최고의 음악가 였던 베토벤의 시대에 태어난 슈베르트는 웅장한 화음으로 가득 채우는 화려한 교향곡 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첼로의 악기로 구성된 실내악 화음에서 악기 고유의 음색으로 침울하면서도 풍성한 소리의 화음을 완성했다.

슈베르트의 작품은 후대의 낭만파 음악의 꽃을 피우게 만들었다.

(c) Untitled Blue, Green, and Brown ,Mark Rothko,1953

색면 추상화 작품을 남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한 가지 또는 두 세가지 색 만으로 세기의 작품을 완성했다.

물감 몇 개와 캔퍼스 그리고 붓만 손에 쥐고 있으면 누구나 칠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어린 시절 부터 물감 섞이 놀이를 해 본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색의 배합만으로 완성 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하양과 빨강의 색이 겹치면 분홍빛이 나오고 빨강과 푸른색이 뒤섞이면 보라 빛이 나오고 푸른색을 더 많이 배합하면 질흙 같은 검은 빛이 나온다.

마크 로스코는 가장 먼저 커다란 붓으로 흰 색 캔퍼스 바탕에 흰색과 갈색을 뒤섞은 밑바탕 색을 칠하고 붉은 빛을 덧칠해서 분홍빛을 나오게 하고 마지막 붉은 선홍색을 제법 큰 면적으로 칠하고 스펀지에 물을 적셔서 번지는 기법을 구사했다.

마크 로스크의 단순해 보이는 색감과 기법을 상세하게 분석 해 보면 세상에 쏟아져 내리는 빛을 시시각각으로 분석해서 기하학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c) UNTITLED NO. 17, Mark Rothko,1961

도형의 윤곽선이 뚜렷하지도 않고 경계선 조차 선명하지 않는 이 작품은 도형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도 없고 색의 조화도 그리 썩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윤곽선은 뭉개져서 성기게 칠해져 있지만 묘하게도 자세히 바라 볼 수록 색의 경계선이라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크 로스코는 작품의 이름을 정하지 않고 숫자로 표기 했지만 스케치 노트에 '비극, 황홀경, 죽음' 같은 단어를 적고 나서 '황홀한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에 써 놓았다.

고대 건축 양식과 연극, 음악에서 회화적 영감을 얻었던 마크 로스코는 초기 시절엔 엄격한 형식에 얽매여서 완벽한 구도를 갖춘 작품을 완성 하는데 몰두 하다 차츰 구상주의적이면서 사실주의를 표방한 회화에서 벗어나 오선지 위에 화음을 그려 넣은 음표처럼 색과 형태가 층을 이루고 차례 차례 배열되는 수직성을 갖춘 추상 주의 작품으로 발전 시켜 나갔다.

그는 붓을 들고 캔퍼스 앞에 설 때면 슈베르트의 실내악 음악을 틀어 놓고 오선지에 음표를 채워 넣는 물감을 덧칠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감미롭게 흘러가는 선율 속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협화음과 함께 조성이 바뀌어 버린다.

이 기법은 놀라울 정도로 마크 로스코가 색을 다루는 기법과 매우 흡사한데 강렬한 색조의 대비를 통해서 그림이 걸려 있는 장소에 따라 색의 움직임과 활력이 달라진다.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 서면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두 가지 또는 세가지 색 사이의 경계선이 여러 층으로 겹쳐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직사각형의 가장자리에서 감정이 요동치듯 일렁이는 강렬함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c)Rothko Chapel, Houston, 1971

스스로 생을 마감 한 마크 로스코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예술은 분명 예술이 작용하는 시대의 모든 지적 과정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크 로스코(1903-1970)

마크 로스코가 세상에 남긴 예술의 지적 영감을 받은 세기의 작가가 있다.

나는 1970년 11월 27일 생이다.

처음 내 생일을 삼촌에게 말했을 때, 삼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책장에서 두툼한 화집 한 권을 꺼내 왔다. 날카로운 책장에 손을 베이지 않기 위해 삼촌은 면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겼다.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야.

삼촌이 말했다.

190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브루클린으로 망명했고 1970년 2월 25일에 죽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죽던 날을 전후해서 너는 처음 생겨 났겠구나.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중에서


작가 한강이 2005년 가을 무렵부터 구상에 들어간 <바람이 분다. 가라>는 2007년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연재를 시작해서 이듬해 가을까지 일 년 반 동안 연재하다 다시 일 년 남짓의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새로 고쳐서 장장 4년 6개월여의 긴 시간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새벽의 미시령 고개에서 사십 년이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자동차 사고를 둘러 싸고 그에 얽힌 인물들의 내밀한 사연이 진실을 캐묻는 화자 이정희의 기억과 힘겨운 행보를 따라 전개되는 이 작품은 촉망 받던 한 여자 화가의 의문에 싸인 죽음을 두고, 각자가 믿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치르듯 온몸으로 부딪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 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 해.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중에서


“그날 새벽 폭설이 그 모든 흔적을 덮었다”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바람이 분다. 가라>는 촉망 받던 여류화가 서인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그녀의 친구 이정희와 서인주의 죽음을 신화화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신전에 올리려 하는 남자 강석원의 감정의 흐름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치열하게 충돌하고 부딪치면서 격렬한 숨과 서사의 파동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꿈틀거린다.

작가 한강은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매 순간 흔들리고 번민 하는 삶의 날카로운 경계 위에 서 있는 당신은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내는 것으로 진실한 빛을 얻을 수 있는가?

이 그림을 처음 마주 하는 순간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가 살짝 뒤로 물러 섰다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림을 바라 보는 동안 캔퍼스를 가득 채운 색들에 서서히 스며 들어간다.

마치 성소 앞에 서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 하듯 그저 거대한 그림의 색 앞에서 하염없이 밀려 드는 감정의 선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전시장 밖을 나오니 바람이 불어 온다.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번의 삶에서 여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디 마디 끊어지는 것이었다고,

어떤 마디의 기억들은 전생처럼 멀고 어둑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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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0-31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님의 작품 분위기랑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정말 잘 어울리는것 같아요! 한강의 회화버전이 로스코이고, 로스코의 소설 버전이 한강이라고 할 정도로요!ㅎ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scott 2024-11-04 18:25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 잘계신거죠!
마크 로스코 전시를 서울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서울 나들이로 ^^

Falstaff 2024-11-01 0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베르트의 D.956 아다지오 악장. 오랜만에 듣습니다.
도라이 쿳시는 이 아다지오 악장 자체가 섹스라고 주장하느라 상대로 하여금 그만 김이 팍, 새버리게 만들었다지요. ㅋㅋㅋ

scott 2024-11-04 18:26   좋아요 2 | URL
퐐스타프님에게 슈베르트의 아다지오는 ㅎㅎㅎㅎ

Falstaff 2024-11-04 18:37   좋아요 2 | URL
아이작 스턴에 대한 경의지요 뭐.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