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젖먹이 남동생을 잃은 아홉 살의 나는 진정으로 위로가 필요했다. 슬픔의 당사자들인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더군다나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아홉살의 누나가 땅거미가 걸어들어 오는 그 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방바닥에 엎드려 동생 때문에 운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거창한 위로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너의 슬픔을 죄책감으로 덜어내지 말라고 얘기해 줬으면 됐을 것을.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중 

여덟살 생일을 맞는 스코티의 행성이 그려져 있는 케잌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아들을 생일날 교통 사고로 잃게 된 부부는 주문한 생일케이크를 찾아 가지 않는다고 여러 번의 괴전화를 건 빵집 주인을 찾아간다. 큰 외상 없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 아들의 죽음 앞 뒤엉킨 슬픔과 충격, 배려받지 못한 아픔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그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막상 그들 부부의 사연을 알고 난 빵집 주인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따뜻한 계피롤빵을 내어주며 자신의 소외된 삶을 고백하고  부부의 상실감을 다독거려주자 그 기묘한 만남은 밤을 지새우게 되고 다사로운 햇살 같은 것이 된다.  

자식을 가져보지 못한 빵집 주인은 그들 부부의 슬픔을 예단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뿐이라고 덧붙인다. 위로의 계명 같다. 상대의 슬픔을 어떻게 속속들이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런 기대나 단정은 치워버리고 시작할 일이다. 그저 슬퍼하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슬픔이 풀어 헤쳐져 저절로 흐를 수 있게 자그마한 통로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위로에 현란한 테크닉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위로가 무엇인지 모르고 덥석 그것을 거머지고 휘두르려 하면서 상대를 은근하게 조종하려 하지 않았던가? 혹은 위로가 필요함을 알면서도 무심코 눈감아버리는 무의식적 방기를 습관화하지는 않았는지. 위로는 카버의 얘기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것같다. 

그리고 표제작 <대성당>. 이미 김연수가 <<세상의 끝 여자친구>><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로 노골적인 오마주를 바친 작품이다. 아내의 친구를 카버는 맹인으로, 김연수는 인도인으로 설정하였고 카버는 그 불의의 방문객과 화자(남편)가 대성당을 함께 그리는 것으로, 김연수는 인도인이 그린 코끼리 그림으로 소통의 절정을 형상화한다. 

맹인과 정상시력을 가진 사람이 함께 눈을 감고 손을 겹쳐 대성당을 그린다는 상상만으로도 나에게는 카버를 읽을 이유가 충분했다. 그리고 실제 그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더듬을 수 없는 지점 벼락 같은 것이 쾅 쳤다. 사람의 감정의 파고를 언어로 온전하게 가두어 둘 수 없음이 아쉬울 정도로 그럴 정도로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소통의 장벽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의 현현을 보여주는 그 지점, 화자는 외친다. "It's really something" 

 하루키와 김연수의 뜨거운 오마주를 한 몸에 받는 카버는  체호프와 닮아 있다는 극찬을 받았다. 단편소설의 성취를 판단하는 준거점에 떡 버티고 있는 체호프(정말 극렬하게 동의한다!)에 비견되었던 그의 단편소설집을 받아들고 난 감상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하나 다 흥미롭고 훌륭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드라마틱한 재미도 오헨리 같은 기가 막힌 반전도 없이 조곤조곤 얘기해 나가는 그의 사람 간의 소통에 대한 희구의 체현들이 어쩌면 취향에 안맞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두편은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한 만큼 이 두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작가에게 큰 빚을 진 것 같다. 그러니 리뷰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인 별점을 찍는 순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야박한 별점과 이 두 작품에 고작 다섯 개의 별점밖에 주지 못할 그 통탄 사이에서 망설여졌다.

김연수의 번역은 의외로 직역이었다. 말미에 밝혀 둔대로 카버의 문체를 살리고 싶었던 탓이었다고 한다. 어색한 부분의 번역투 문장들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지만 잘 읽히는 유려한 의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번역자의 색깔이 불거지고 매끄러운 의역이 좋았지만 원작자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집해 버릴 위험을 고려한다면 직역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읽는 입장에서 번역은 언제나 아쉬운 여지를 남기지만 그 지난한 노고의 과정 그 자체로 고마워해야 할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소통을 갈구한다. 고독의 향유도 결국은 소통의 열망에 대한 고독한 위장에 불과하다. 일면식 없다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낯선 이와 어느 순간의 전부를 공유하며 감정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카버가 우리의 소망을 대변한다.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늦어버렸지만. 혼자라도 시나몬롤빵 탐사를 떠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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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4-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에서 두번째 문단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 공감되네요.
의역이 지나치면 그럴 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 좋다고들 하던데 전 못 읽었어요.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는 글귀에도 동감^^

blanca 2010-04-15 21:5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최근들어 의역의 함정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요.

이 책은 저에게는 저 위의 두 단편만 너무 좋았답니다.^^;;

후애(厚愛) 2010-04-16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고 주말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세요.^^

blanca 2010-04-16 14:35   좋아요 0 | URL
후애님, 감사합니다. 드뎌 오늘부터 봄이 온 것 같은 날씨이네요. 벚꽃도 참 예쁘고. 후애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0-04-16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연수 님 작품 읽기는 포기한지라,,, 그분의 번역작인데, 문체까지 살리기 위해 직역이라면 역시 포기하렵니다.
김연수 님 작품은 묘하게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요. 공감을 형성하는 분들이 따로 있는듯 합니다.

무조건적인 공감은 아는척이 될 수 있는 듯 해여. 상대의 느낌을 같이 받아주는게 아니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신을 위안하고 그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어요... 빵집 주인 참 좋은 분이네요.

아침부터 시나몬롤 빵이라~ ㅠㅠ. 살 빼야 하는데. 블랑카님. 우리 몸빼 바지 모임 하나 만들까요?

blanca 2010-04-16 14:39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조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들어주는 과정에서 이미 위로가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시나몬롤빵이 카모메 식당에도 나오잖아요. 그 때부터 먹고팠는데 제빵 잘하시는 분들은 그거 보고 구워 드시더라구요. 마녀고양이님도 한 번 시도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밴드바지 ㅋㅋㅋ 편한 옷에 중독되면 위험합니다.^^;; 제가 밑위 길이 긴 청바지 없냐고 하니까 옷가게 점원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그런건 딴데 가서 찾으라고 하던걸요.

穀雨(곡우) 2010-04-1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서 그런지, 전 직역의 고통에 난독증에 빠질 때가 있더군요.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궤도이탈이 되는 현실을 볼 때는
번역의 고통에 백배동감.
김연수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책이라고 하니 읽어 봐야 겠습니다.
그리고 소통에 대한 멋진 생각에 아울러 공감합니다.

blanca 2010-04-16 14:41   좋아요 0 | URL
곡우님. 번역이 작품 자체를 어그러지게 만들고 아예 작가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직역과 번역의 절충점은 참 미묘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직역이 솔직히 잘 안 읽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곡두님이 어떤 작가분들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기억의집 2010-04-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나몬 듬뿍 들어간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어요.전 이양반 소설에 매력을 못 느끼겠어요. 이 책 말고 제발 조용히 좀 해줘 읽었는데.....
전 하루키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노동자문학의 소설가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blanca 2010-04-21 12:02   좋아요 0 | URL
솔직히 체호프라는 극찬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더라구요. 기억의집님 하루키는 좋아하세요?

기억의집 2010-04-21 18:57   좋아요 0 | URL
흐흠, 하루키 엄청 좋아해요. 한 20년빠라고 할까나~~~ 근데 요즘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 읽으면서 하루키에 대해 약간 삐긋거리기 시작했어요. 하루키가 보는 세상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일큐팔사 3권을 어떻게 끝낼지 모르겠지만...닫혀 있는 세계를 활짝 열어놓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해도 해도 너무했다. 바로 날씨 너!
미친듯이 바람 불다 사월의 눈보라까지 맞은 날 콧물 흘리며 낚지 덮밥 먹었다.
넓고 휑한 그 식당. 아이에게 먹이려 알밥을 비비다 왠지 찜찜했던지 알을 계속 건져 옆으로 이동시키는 친구에게
왜? 매울까봐? 했더니 대답은 식당주인과 아줌마가 해 주신다.
하나도 안매워! 그걸 다 왜 빼! 

백 평은 되 보이는 그 넓은 식당 소머즈의 귀를 가졌는지
카운터의 주인 아저씨랑 부엌 근처에서 서빙보던 아주머니
정색을 하신다. 일순 무안해진다.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하는 건지. 
나의 친구는 그게 아닌데,를 삼킨다.

엄마는 따뜻하게 파카입고 아이는 얇은 봄잠바 걸치고 바람 분다고
온 얼굴로 칼바람을 환영하며 콧물까지 흘리며 좋아해 주신다.
일순 계모가 된 느낌이다. 

폭풍의 언덕 초입의 경비실에 택배가 맡겨지면 이런 날 정말 슬프다.
뒷문에서 내려 내리막길로 내려오려는 꼼수를 동원한 오늘 딱 걸렸다.
알라딘 책 경비실에 맡겨져 있단다. 분명 아이는 내려오는 것만 즐거워하지
올라오려 들지 않을 것이다. 

슬픈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반값으로 나온 입체 북<나의 체리나무집>이 저 택배 박스에 있다고 아무리 꼬드겨 봐도
주머니에 딱 손 꽂고 요지부동이다. 그러더니 이런다.
엄마! 그거 분홍색 구두야? 지금 꺼내줘. 

눈보라는 더욱 거세진다.
정말 느무느무 춥다. 온 몸이 곱아들 것 같다. 머리는 산발이다. 나도 힘들다. 이 언덕을 칼바람 속에 오르는 것이.
이건 아주 예쁜 언니 집이야. 구두는 없어.
 

아! 포효해 주신다. 분홍 구두가 웬 말이드냐?
왜 <나의 체리나무집>대신 분홍 구두가 나와줘야 하지?
이 비약을 어떻게 해석하고 해결해줘야 하는 거지?
  

집에 오니 <나의 체리나무집> 그 섬세하고 예쁜 집 상당 수를
초장에 찢고 무너뜨리고
지금 아빠랑 영풍문고로 가주셨다.  

몸살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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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4-13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요새 감기몸살 조심해야하는데요,
오늘 따뜻하게 하고 푹 주무세요.
전 며칠 고생하다 오늘 영 괜찮아졌어요.
여기도 오늘 봄바람이 대단하네요. 벚꽃잎이 난분분~~~

blanca 2010-04-14 12:4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기 걸리셨군요. 오늘도 역시 날씨가 어제와 별반 차이가 없더라구요--;; 벚꽃 너무 이쁘지요? 프레이야님도 감기 끝 몸을 잘 추스리시기를 바랍니다.

穀雨(곡우) 2010-04-1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구두라...^^ 울 집 꼬맹이한테 분홍구두를 사 주겠노라고 큰 소리치고
사러 갔더니 사이즈 품절...@.@ 어찌나 실망하고 슬픈 눈을 해 대던지...
갑자기 구두에 떠 오른 잡설입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꼬드겨 다른 걸로 대체
했지만 아직도 서운했던지 구두만 보면..아빠는 #@$%% 안드로메다 언어를....ㅋㅋ

blanca 2010-04-14 12:41   좋아요 0 | URL
저 이번 주말에 사주마고 약속했는데 진짜 곡우님 같은 경우가 생기면 어쩌지요? 여자아이들은 분홍 구두에 대한 로망이 있나봐요^^;; 이쁜 언니가 신고 가는 것 보고 한참을 들여다 보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4-1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살이 온 블랑카 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읽는 내내 웃느라고.... 아이고, 허리야.
그쳐,, 입체북을 좋아라는 하는데 갈가리 찢는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저희 딸두 동물 나오는 입체책의 상당 부분이 올렸다 폈다 하느라고 찢어졌어요...
뱀 대가리(!) 붙이느라 고생한거 생각하면.. ㅋㄷㅋㄷ

감기 조심하세요, 어제 너무 추웠어요!

blanca 2010-04-14 12:42   좋아요 0 | URL
그러면 안되는데 저는 책에 상처를 주는 걸 보면 화가 갑자기 치밀어 올라서요--;; 그러면 안되는데. 사실 제 책도 아니잖아요. 그죠?ㅋㅋ 마녀 고양이님도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오늘 패딩 입고 나갔는데도 더운 줄 모르겠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4-14 14:26   좋아요 0 | URL
추운날은 아예 나갈 생각도 안 해여,, ㅎㅎ

순오기 2010-04-1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씨는 정말 미친거 같아요. 도서관에 우람한 벚꽃들이 마구마구 흩날리고 있었어요.ㅜㅜ
칼바람에 계모가 된 기분, 왜 난 실실 웃음이 나오죠.ㅋㅋ
따뜻한 물(차) 자주 마시면 웬만하면 이겨내던데... 허브차도 도움되고요.

blanca 2010-04-14 23:30   좋아요 0 | URL
봄이 날짜상으로는 반도 더 갔는데 오는 것도 못 본 것 같아요. 안그래도 오늘 살구꽃과 벚꽃 구분하며 다녔어요^^;; 너무너무 추워요. 감사합니다. 순오기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2010-04-15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5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4-2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 간혹 워더링하이츠 이야기 하셔서 저 블랑카님 집 근처로 피크닉 가고 싶어요^^
바람 맞고 싶다는.

blanca 2010-04-21 12:0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희 집에 오면 다 씩씩거리며 이사가라고 하더라구요^^;; 바람 맞으시면 안되죠 ㅋㅋㅋ 저희집 근처로 오시면 환영이지요^^
 

비를 맞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추리해 보이지  않을 설익음과 당당함이 있었다. 이제는 비를 맞고 있으면 조금 불쌍해 보일 만한 처지가 되었다. 비를 맞지 않고 빗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빗소리는 그 어떤 배경음악보다 단조롭고 거슬리지 않는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었다. 소설 같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얘기가 신뢰성이 부족해 봬서가 아니라 그가 외부에 나와 토해낸 내부의 얘기들이 모이니 하나의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대기업들의 눈가리고 아웅식의 편법 승계와 횡행하는 부조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삼성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와 그 신화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욕하더라도 마지막은 그래도 삼성이잖아,라고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었다. 그래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불편했을런지도 몰랐다. 언론에 의해 주입되고 각종 경제 지표에 깊게 물려 있는 거대 기업의 아우라에 물들어 우리는 그의 얘기를 경청하는 데 인색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삼성이 진심으로 불편해졌다. 거대 이익 밑에 깔린 도덕을 목도하는 일은 괴롭고도 아픈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서는 안될 터다. 불편하고도 아픈 진실을 들추어 내고 타성과 관성을 벗겨 내는 일은 숙명적으로 저항과 거부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존재의 방점을 찍어가며 살고자 한다면 그 소롯길을 피할 도리가 없다. 상쾌한 기분전환을 필요로 한다면 권할 수 없는 책이다.  

   

한 때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열풍이 대단했었다. 두 작가가 나란히 연인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고백한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적이고 신선했던 것 같다. 잘 뽑아낸 작가들의 사진도 홍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츠치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의 얼굴선은 그대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환영을 만들어 냈다. 텍스트가 작가의 존재로 이미지화되는 경험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배경인 이탈리아의 두오모도 더불어 각광받았었다.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녀의 책은 일단 잘 읽힌다. 복잡한 심리묘사도 지루한 배경 묘사도 없다. 푹 꺼지는 낡은 소파에 드러누워 졸며졸며 읽어도 왠지 다 작가는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안온함이 있었다. 지극히 단조롭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상의 얘기들을 줄세워 놓았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만져 보는 일에 중독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작 <빨간 장화>는 그런 단조로움이 더이상 나와 소통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이별의 예감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나는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나 보다. 식상하다고 감히 얘기할 수 없는 것은 나는 이 작가를 좋아했고 지금도 미련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은 지금 가고 있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해설이 돋을새김처럼 떠오른다. 좀 과장하자면 신부측 하객이 신부보다 더 예쁜 경우 같다. 해설이 너무 좋았다,는 어느 리뷰어의 말에 말미의 피로감을 누르고 주의깊게 읽었다. 시적인 언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사려깊고 진지한 해설은 기대이상이었다. 맥락의 독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수전 손택의 소설론이 인용되었고, 체호프의 단편의 떨림이 전해졌다. 김연수가 번역하고 오마주를 바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도 들이민다. 그러니 내 시야 반경 안에 들어올리 없었던 수전 손택의 책들이 들어왔고, 체호프의 단편에 압도되어 미친듯이 중고로 산 단편집에 줄을 좍좍 그어대고, 마침내 카버의 <대성당>까지 읽게 된 것이다. 이 정도라면 나는 신형철에게 오마주를 바쳐야 하는 건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지금은 <대성당>을 읽고 있는데, 아니 레이먼드 카버를 읽고 있는데(참 이상한게 왜 작가의 작품보다 작가를 읽는다고 해야 간지가 나는지,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아주 좋아 죽겠다고 과장하지는 못하겠다. 단편이 정말 끝내준다,는 생각을 줬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얘기들과 아퀴를 지어야 하는 얘기들이 엉키는 그 교차로에 선 작가의 혼란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대단하다고 느꼈던 단편선은 솔제니친과 오정희 정도다.  

레이먼드 카버의 얘기들은(아직 표제작도 읽지 못했지만) 그리 대단한 얘기들도 아닌데 일단 재미있다. 동료집에 방문했다 그 집의 아기를 계속 보여 달라고 졸라대는데 안주인이 지금은 자게 하고 깨면 데려오겠다고 못 박는 그런 얘기.(사실 내가 그랬었다. 하도 시달리다 보니 손님들에게 아기를 깨워 보여주고픈 마음까지 사그라들더라.) 그렇게 귀하게 용안을 대면할 기회를 얻었으나 막상 못생긴 아이를 보고 거짓으로 예쁘다,고 못해주며 여럿이 무안해지는 그런 장면들에 대한 얘기. 그러니 너무 사실적이고 너무 적나라해서 되레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이런 얘기는 누가 소설로 써주기 전까지는 대놓고 하기 참 힘든 사연들이다. 

그리고 오고 있다. 이 책들이. 괜히 이런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때다. 뜨고 싶은가 보다. 

 

 

 

 

 

 

 

언제나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빠지기를 거듭하는 책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너무 사랑한다고 외쳐대는 바로 그 책들. 나는 언제쯤 읽게 될까. 그리고 이 망설임은 뭘까. 

 

 

 

 

 

 

 

망설임의 이유는 단 하나다. 책장이 잘 안 넘어갈까 걱정되서다. 좋은 책이 언제나 기똥차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좀 재미있어 죽겠다고 당장 읽으라고 등좀 떠밀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즘 드는 걱정들은 독서 편식이다. 문학과 심리학, 처세술, 자녀교육 쪽으로만 기우뚱하고 인문사회과학쪽으로는 담을 쌓은 독서가 현실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지 않나 심히 걱정된다. 꿈만 꾸지 그 꿈으로 가는 현실적인 이정표에는 청맹과니처럼 우둔하다. 그러니 각종 사회 현안들을 나의 열등감이나 투사시켜 극도로 흥분하고 떠들기나 했지 나름대로의 프리즘을 통해 통찰력 있게 해석하고 제대로 비판하는 일에 서툴다. 욕하기 위한 욕을 주워섬기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사람이 추해진다. 그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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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4-13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때마다 느끼지만 글을 참 잘 써요.
나는 대체 묘사가 안돼서 있는 그대로만 옮기니 재미가 없어요.ㅜㅜ
나도 이런 거 써야 하는데...읽었던 책, 읽다만 책, 읽어야 할 책~ ^^

blanca 2010-04-13 17: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칭찬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명 블로거인 순오기님 글이 재미가 없다니요. 순오기님 글 읽다 가슴 찡한 감동을 많이 받았답니다.

다락방 2010-04-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의 세권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마치 저를 위한 선택인것 같아요. 제가 모두 대단히 사랑하는 책들이에요. 특히 [엄청나게~]는 제 인생의 책이라고 선택할 만큼 아름답고 감동이 충분한 책이지요. 책장이 잘 안넘어 갈 것 같다는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엄청나게~]는 가끔 처음에 멈추는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사실 몇장만 읽어도 꽤 사랑스러운 소설이거든요. 저도 최근에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엄청 충격 받아서 중권도 사두었어요. 세 권 다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실 거에요. 정말로요. 제가 지금 등 떠밀고 있는거에요, blanca 님.

blanca 2010-04-13 17: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오셨군요. 위 세 책을 다 읽으셨군요. 우와! 저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답니다. 알고는 있는데 항상 뒤로 미루어 두게 되요. 꼭 읽게 될 거니 자꾸 미루는 건지, 참, 이상하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는 쌍둥이 형제가 나와 서로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면서요? 제 기억이 맞는 건지. 세 권인 줄 몰랐는데 알고 마음을 접었었는데 다락방님의 추천이라니 꼭 읽어야 겠습니다.

마노아 2010-04-1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맛있어서 출력해서 읽었어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일단 눈과 코를 자극하는 글맛이 있네요. 제시하신 책들도 분명 그럴 것 같아요. 저 중에서 제가 읽은 책들은 그랬어요. 저도 다락방님처럼 등 떠밀어요. 마지막줄 책들 강추예요~

blanca 2010-04-13 17:10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제 글을 출력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마노아님과 다락방님 함께 등떠밀어 주시니 기꺼이 떠밀리겠습니다.

프레이야 2010-04-1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동감이에요.
김연수의 저 소설집, 읽다만 책이에요.
읽어야할 책들은 부지기수로 쌓여있구요.
좋은 하루 보내요, 블랑카님^^

blanca 2010-04-13 17:1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 글을 아침에 봤어야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거시기한 날씨 속에 아기가 길거리에서 떼도 한바탕 써주셔셔 아주 고단한 하루를 보냈답니다.--;; 저는 요즘 최대한 책을 천천히 사고 안 쌓아두려 분투중이랍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stillyours 2010-04-1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내 인생의 책이라 감히 말할 수 있었던 책들!
표지만 보고도 두근거려요.
저도 다락방 님 뒤에서 같이 등 떠밀래요!

그리고 <엄청나게-> 읽고 나서 그의 아내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도 읽으시기를 바란다는 !

다락방 2010-04-13 10:23   좋아요 0 | URL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좋아요! 이것도 등 떠밀어 주세요. ㅎㅎ [사랑의 역사]보다는 제게는 [오스카 와오~]가 더 좋았어요. 어쩌면 니콜 크라우스가 사프란 포어의 아내라서 질투와 시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ㅎㅎ

그리고요 blanca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도요! 많은분들이 [엄청나게~]보다 [군인은~]을 더 좋아하시더라구요. 물론 저는 그래도 여전히 꿋꿋이 [엄청나게~] 가 더 좋지만 말입니다.

stillyours 2010-04-13 11:07   좋아요 0 | URL
아, 나도 시기와 질투에 한표! <오스카 와오>도 좋았는데 결말에서 다소 손발이 오그라들었..다는..거ㅋ
그나저나 <군인은->도 읽어야지 했는데, 이 댓글에 등 떠밀렸어요ㅋ [훈훈한 등 떠밀기군요]

blanca 2010-04-13 17:13   좋아요 0 | URL
moon님 반갑습니다. 인생의 책이라니 이 이상 더 강력한 추천이 있을까요? 그런데 부부 소설가라니, 정말 질투가 솟구치네요--;; <군인은-> 책도 찾아 봐야 겠어요.^^

마녀고양이 2010-04-1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그런데 글을 보면서 실실 웃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블랑카 님과 저랑 책 취향이 영 딴판인거 같아요,, 심리 쪽만 비슷하고.. ㅋㅋ
댓글다신 분들이 너무 좋은 책이라고 동의하시는데,, 전 평생 손이 안 갈거 같아요,, ^^
대체 소설 쪽은 고전이나 스릴러 추리 소설 빼고는 왜이리 손을 못 대겠는지,, 반성 중이랍니다. 흐흐.

blanca 2010-04-13 17:16   좋아요 0 | URL
소설을 한동안 안읽다 작년들어서인가부터 갑자기 이 쪽으로 너무 집중되서 그것도 균형을 위해서는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갈등했답니다. 취향이 다양한게 좋은 거지요. 제 여동생도 소설을 절대 읽지 않는답니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꼬셔도 그러는걸요.

JJini 2010-04-14 17:35   좋아요 0 | URL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20대초반까지는 소설을 읽지 않았었어요ㅎ그때는 소설은 너무 유치하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생각은 미쳐 못하고 말이에요~ㅋㅋ
시간이 지나니 자연히 손이가고 눈이 가더라구요.

2010-04-14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4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덕수맘 2010-04-1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고있으니 저책들에 푸욱 빠져보고싶네요..어쩜이래도 제맘같은지...너무 급하게 독서를 해서인지 요즘은 언친듯 쉽게 책을 못잡고 있는 제게 활력소를 넣어주셨어요..헤헤 오늘부터 다시 독서님과 친해지고싶네요..울아들의 방해만 아니면..ㅋㅋ같이 읽는걸 좋아해서..전 늘 동화를 읽어야하는,,,ㅋㅋ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위주의 동화책을 산후 후회한적이 많았죠..ㅋㅋ덕수가 안읽더라구여..난 재미있는데 스타일이 좀 다른가봐여..ㅋㅋ

blanca 2010-04-14 12:39   좋아요 0 | URL
덕수맘님 반갑습니다. 저도 그렇게 산 책이 있어요. 호랑이 할머니 얘기인데 구름빵 작업한 작가가 한 거라고 해서 너무 신나게 사서 딸애 앞에 주었더니 울고불고 난리났더랍니다. 이 책 너무 예쁘고 좋은데 한 번도 제대로 읽히지도 못했답니다. 저도 딸내미랑 스타일이 다른가봐요.--;;

blanca 2010-04-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eaf0309님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나 봅니다.^^;; 저는 거의 한 오년 동안 그러다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2010-04-15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4-2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이상하게 엄청나게 시끄럽고~~와 존재의 세가지 비밀 모두 별로였어요.
많은 리뷰어분들의 엄청난 호응에 저도 읽었는데 저는 그저 그랬어요. 제 감성이 별난건지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하핫!

가오리여사도 제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는.
그러고보면 취향이란 것을 무시 못 해요. 그쵸?
안 되겠다.^^ 오늘 블랑카님 글은 여기까지~~ 하늘같은 남편 와서 밥 차려야해요^^
낼 다시 올께요^^

blanca 2010-04-21 12:08   좋아요 0 | URL
저 지금 엄청나게~ 읽고 있는데 몰입이 안되네요--;; 아...요새 잡는 소설들은 제가 취향이 변한건지 대체로 자꾸 허술한 부분이 보여요. 당분간은 논픽션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 순서를 거꾸로 달고 있네요. 기억의집님 가장 먼저 단 댓글인데 가장 나중에 답합니다.^^
 

 

# 어제 갑자기 내 이를 보더니 세 살 딸이 "이빨이 못생겼네." 했다. 앞니가 덧니인데 이십대에는 귀엽다고 자위 ㅋㅋ 하며 지냈는데 삼십 대를 넘어 귀여움과 거리가 멀어져 가니 도드라지는 덧니. 할머니도 치아가 가지런해야 이쁘다는데 육십대에도 교정하는 분도 보고 딸아이한테 이런 얘기까지 듣게 되니 고민하게 된다. 돈과 시간, 교정기를 끼고 변할 얼굴 등에 대한 부담으로 망설여지기도 하고.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가 늦게 교정을 시작해 소개팅 나갔다 교정기 사이에 음식 부스러기 다 끼우고 박장대소하다 딱지 맞는 장면도 맴돌고. 그래서 미란다는 신경질내며 교정기를 떼어 버렸지, 아마. 

# 무릎팍 도사를 챙겨 보는 편인데 어제 엄정화 편이 참 좋았다. 가수활동과 나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활짝 웃던 그녀가 갑자기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하며 울먹이는 장면에서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자신의 지난 인생을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할 수 있는 그녀가 진정으로 부러웠고, 그 얘기를 울면서 해야하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기도 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는 들어둘 만한 것 같다. 윤여정의 돈이 절실할 때 최선의 연기가 나온다던 그 가식없던 고백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돈과 성에 대한 얘기에 대한 고백은 언제나 치부 같아 어려운데 정정당당하게 양지로 내보낸 그녀의 고백은 그녀가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나 양가적 감정을 극복했다는 얘기도 되니까. 또 한 편 부럽다. 

# 봄이 오긴 왔나 보다. 오전에 바람맞고 복수하듯 카라멜 마끼아또를 들이키고 있다. 기분 안좋을 때 좋은 날씨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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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4-0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주 심하지 않으시면 그냥 있으심이.... 어때요?

엄정화는 받는 거 없이 미워서.. 왜 그런지 저도 몰라요^^ 전 양미경이 좋아요. 언젠가 인터뷰하다가 자기는 말하는 거 너무 싫어해서 가족하고도 별로 말이 없이 지낸데요. 근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솔직하게 느껴지던지.. 나이 들면 타인에게 잘 보일려고 하잖아요. 근데 그녀한테 그런 게 없어서 너무 좋았어요. 말 없어도 편한 사이를 만들어야겠어요.

마끼아또 너무 달달 하지 않아요. 전 모카쪽이 좋아요. 하기사 시럽면에서는 오십보 백보죠!

blanca 2010-04-08 22:42   좋아요 0 | URL
딸애 말 듣고 충격받아서요. 못생겼다니, 어흑-..- 제 옆지기도 엄정화를 별로 안좋아해서 안보더라구요. 너무 싫어해서 ㅋㅋㅋ 진짜 솔직하네요. 사실 가족 안에서 가장 처절하고 치사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다들 숨기고 싶어하잖아요.마끼아또는 먹고 나면 항상 후회하는데 열받을 때는 단것을 먹어줘야 해서요--;;

순오기 2010-04-0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모토가 '생긴대로 산다'여서 그냥 동지하면 안 될까요?^^
기분 안 좋을 때 좋은 날씨~ 못말리는 시누이라니, 어쩜 이리도 심사를 잘 표현했을까 싶어 웃어요.

blanca 2010-04-08 22:43   좋아요 0 | URL
ㅋㅋㅋ 기분 안좋을 때는 날씨 좋은 것도 얄미워요. 교정하면 치아건강이 상한다고 해서 사실 이러다가 말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4-0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어린 딸이 벌써 타박을 줄 나이가 되었네요?
엄정화 어제 너무 이쁘더군요. 열심히 사는 그녀가 좋아졌답니다. 그런데 신랑과 둘이서 저렇게 이뻐진다면 계속 성형할 만 하겠다 했어요... 요즘 연예인들 다들 고친 아름다움이라,, 이젠 별로 부럽지 않더군요. 저도 돈 벌어서 고치면 이뻐질거 같아서. ㅋㅋ

blanca 2010-04-08 22:44   좋아요 0 | URL
어제 보니 또 확 변했더라구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참 사근사근하더라구요. 성형도 시작하면 중독될 것 같아요. 책처럼^^;;

프레이야 2010-04-0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맞고 카라멜 마끼아또요??^^
달콤한 것 먹고싶은 때가 있지요.
엄정화 연기, 꽤 좋은 편 같아요.
주연 신작영화 '베스트셀러' 괜찮을까나요?
근데 덧니가 살짝 애교스러울 것 같은 블랑카님^^

blanca 2010-04-09 14:55   좋아요 0 | URL
아, 베스트셀러^^;; 그랬군요. 제 딸은 못생겼다고 퉁박을 주네요.--;;

꿈꾸는섬 2010-04-09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덧니라 이가 참 못생겼었는데, 전 사고로 치아를 상해서 가짜이를 달고 있어요.ㅠ.ㅠ 가지런하긴 한데 제 이가 아니니 너무 불편하더라구요. 못생겼던 제 이가 그리워요.ㅜ.ㅜ

blanca 2010-04-09 21:10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꿈꾸는섬님 얘기를 듣고 마음을 잡아야 겠어요.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박완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 프루스트

우리는 삶 속에 포박당해 근시가 된다. 삶의 이미지를 제대로 굴절시켜 줄 광학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삶 속에 발을 담그고 있고 잊혀진 추억들과 잊혀진 사람들이 죽음 속에 갇혀 있다면, 소설가들은 삶과 죽음 그 가파른 경계를 유영하고 다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경계선상에서 두 세계를 흘낏 둘러볼 수라도 있는 그들의 얘기는 언제나 생경하고도 항상 익숙하게 들린다. 생경한 것은 흐릿하게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이고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얘기들은 우리 안에 있었던 것들을 건져 올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완서, 이동하, 윤후명, 김채원, 양귀자, 최수철, 김인숙, 박성원, 조경란.
우리 시대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소설에 헌납했다. 언뜻 그들의 단편소설들은 소설적 장치를 빌린 자기고백서 같은 성격을 띤다. 소설집이 일종의 에세이이자 작가들의 뼈아픈 자기 성찰록으로 치환되어 떠오르는 것은 소설적 허구의 한계를 깨고 도약하고자 하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같아 경이롭다. 이야기가 삶 그 자체로 용해되어 버린다.  

이 책의 제목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박완서의 표제작에서 왔다. 유년시절 작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본 노을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채색된다. 이는 이동하의 입을 빌어 한 생의 일몰에 대한 목격으로 연결된다. 서로 다른 작가 둘이 해거름 풍경에서 조우한다. 해가 지며 주홍빛으로 풀어내는 그 아스레함이 애잔하고 처연한 것은 삶의 마침표,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적 풍경은 삶과 죽음의 현현이다. 유년기 작가 둘의 눈동자는 그것을 어렴풋이 체감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둘은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사물들과 자연현상들에서 삶과 죽음의 추상적인 화두들을 휘핑크림처럼 걷어낼 수 있는 재능은 글쓰는 자들만의 특권이자 업고이다. 윤후명과도 이 작가 둘은 교차한다. 전쟁에 관한 얘기다. 

우리에게는 도저히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전쟁, 전쟁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윤후명 <모래의 시> 중 

6.25의 경험을 공유하는 작가들은 저마다의 이향을 겪는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가 길 위에서 방황한다. 한 명(박완서)은 고향의 개념을 확장하여 사람 사는 곳으로 발을 디딤으로써 귀향의 과제를 완수하고, 다른 한 명(이동하)은 귀향 의지 자체를 포기한다. 이는 의미의 완성을 포기한 윤후명과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나름대로 귀향의 과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그들은 증언의 욕구를 달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을 쓰는 일로 연결된다. 자기 인생의 증언은 가장 절실하고 진실할 수 있는 작품의 소재가 되지만 그 함정 안에 웅숭그리고 있다 보면 그 자신도 청자도 모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소설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던 소재가 어느새 소설을 더 넓은 지평으로 확대하지 못하는 하나의 한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것을 깨는 일은 이 소설가들이 영원한 과업으로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양귀자의 요절한 천재 화가 오빠의 얘기가 인상에 남는다. 동네 슈퍼에서 우연히 만난 오빠의 후배에게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찍은 셋째 오빠의 회상은 생을 견디어 나가는 것에 실패한 피붙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천재로서 기억되는데 드라마틱한 방점을 찍은 자살의 선택에 대한 근원적 의문과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이정표가 된다. 양귀자의 소설은 뜻밖에 최수철의 <페스트에 걸린 남자>에서 조언들을 얻는다. 죽음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의 만남을 목격한다. 자살충동은 기실 삶에 대한 강력한 욕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얘기는 양귀자의 오빠가 견디어 내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한 충동이 아니라 삶의 분출하는 충동을 일상의 자잘한 고충들에 녹여내는 일이었다.

언젠가 사라질 시간을 지금 살아주고 있다고 여자는 느낀다. 현재를 살고 있다기보다 사라질 것이 분명한 시간을 살아주고 있다고 느낀다. 언젠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어 있을 시간을 살아주고 있는 사람들......-김채원의 <등 뒤의 세상> 

브라우닝의 시구처럼 현재는 과거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로 스러지는 길목에서 그저 시간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몸을 싣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죽음도 삶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명명한 하나의 참조점 이상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항시 망각하고 말아버리는 이 중요한 진리들을 문장 사이의 공백에 사려깊게 물려 놓은 작가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렇게 삶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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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4-0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서 읽고 있어요. 단편이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읽고 있는데, 양귀자선생님때문에 샀어요. 아주 오랜 만에 글 쓰셨다고하셔서 샀지요.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아주 오랜만에 읽는 것이라서 약간 거리감이 있긴 했지만..... 근데 이야기삘은 많이 떨어지신 거 같았어요. 블랑카님 말씀대로 이동하의 작품이 결말이라고 생각해야겠네요^^

blanca 2010-04-08 22:46   좋아요 0 | URL
양귀자 좋아하세요? 그죠, 너무 오랫동안 안 나와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소설가가 소설을 안 쓰며 사는 삶은 어떨까, 하고. 그렇다고 안써지고 쓰기 싫은데 계속 억지로 쓸 수도 없고 원래 이런 구석에 관심이 많아서요^^;;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삶이랑 일상이 너무 궁금해져요. <모순>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4-09 09:44   좋아요 0 | URL
양귀자 선생님은 글 써서 성공했으면 그길로 문단에 몸 바쳤어야했는데, 엉뚱하게 음식점을 내거나 해서 그런데 많이 신경쓰시는 거 같아요. 도서출판 살림도 양귀자 선생님 부군이 운영할걸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처음 출판사 그만두고 차린 출판사가 살림이었는데..

전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불만이 많아요. 주제도 이야기도 소재도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게다가 이야기의 끈을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러니깐 양귀자 선생의 이번 단편 제목처럼 단절을 이어주어야하는데 그걸 못하더라구요. 장정일씨도 이번 구월의 이틀 실망했어요. 예전과 같은 에너지가 하나 없더라구요.

2010-04-09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9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