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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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p.187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작은 등롱을 발견한다. 같은 이탈리아 민간 노동자였던 로렌초는 아무 이해관계없는 그에게 여섯 달 동안 매일 빵 한 쪽과 먹다남은 배급을 제공해 준다. 로렌초는 인간이었다,고 회고하는 대목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회의적인 반문이 수용소의 경험 전체를 관통한다면 그가 인간이었다,는 깨달음은 미약하지만 그 기저에서 깜빡이는 하나의 전언 같다. 그럼에도 희망은 유효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그렇다,인가? 다 읽고 나서도 또 그의 삶 전체에 대한 간략한 얘기를 접하고서도 확신할 수가 없다.

데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들을 통하여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에 대한 심리학적, 인문학적, 철학적 고찰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그들의 증언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게 했다. 이 책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유대인으로 태어나 화학자이기도 했던 프레모 레비가 반파시즘 빨치산 부대에 가담했다 밀고를 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살아 나오기까지의 이야기의 장대한 증언록이다. 그의 얘기들은 후에 그 자신이 회고했듯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도 아니고, 복수심으로 날선 언어도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로 엮여 있다. 그는 단지 유대인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머리칼도 이름도 다 잃어버린 채 왼쪽 팔뚝에 수인번호를 새기고 강제노역수용소에서 부나(일종의 고무)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목격하는  악에 타협하며 때로는 그것을 생존방식에 끼워 넣으며 살아나가는 수많은 사례들, 벌레처럼 죽어나가는 자들의 모습은 그에게 인간의 존재,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그가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 같은 어떤 가능성의 체현 같은 인간형의 목도와 이 참상을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 덕분이었다.  

화학자인 저자의 문체가 대단히 심미적이고 유려하여 놀랍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가는 대합실로 상상한 단테의 <신곡>이 군데군데 스며 들어오는 대목과 이 수용소가 단순히 우발적이고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맹목적인 도그마의 귀결이자 나름 이방인에 대한 논리적인 존재방식의 구현이라는 그의 해석과 맞물려 우리가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여 미래를 설계해야 할 지에 대한 엄중한 성찰을 권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 수용소체제로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한편 죽음으로 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준비하고 아이들을 씻겼다는 대목. 그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은 모습에 대한 회고. 그가 배급당번으로 지정되어 장이라는 젊은 청년과 유월의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그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주려고 단테의 신곡의 구절들을 기억해 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이 비애서린 증언록에 작고 아릿한 삽화를 그려준다.

이렇게 살아나온 그가 말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목은 참으로 안타깝고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생존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는 훗날 그의 수용소에서의 고통의 기억들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대신, 자신을 더 풍요롭고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얘기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그 극단의 마지노선이 뚫리는 것을 체험하고 나왔음에도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얘기했다. 물론 엄중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그의 다음 얘기들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감동적인 전언이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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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2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책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저는 반성 중...
알라딘 블러그에 책 리뷰는 없고, 순 제 잡기만 올리고 있으니.. 아이고.
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려고 사놓고, 아직도 감감 무소식 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말년에 생을 자살로 마무리 했다고 하던가요? 음.... 궁금해지네요.

blanca 2010-05-27 15:1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감기는 좀 괜찮으세요? 저는 죽음의 감기 속에 홀로코스트 관련 책을 읽는 실수를 범해서 너무 힘들어하다 오늘 급기야 병원까지 갔어요.--;; 대기실에서 아픈 사람들 보고 더 기분 우울해지고. 기침 심하게 하니 사람들 다 피하고---;; 그런데 집에 오니 갑자기 몸이 급 회복됐어요.

책은 비몽사몽 간에 너무 질러서 쌓여있구요 ㅋㅋㅋ 예, 나이 많이 들어서요. 대체 왜 그랬는지. 그런데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온 사람들이 많이들 그랬다고 하네요.
 

코가 꽉 막혔다. 눈물, 콧물 다 줄줄 흘러내리고 흡사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모든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귓가를 윙윙대는 것만 같다. 

어딜 가나 분노와 불신, 비난 등이 난무한다. 한몫 거들어 댓글을 달고 숨돌리고 또 분노하고 그러다 유아기로 퇴행중이다. 이런 어른 노릇이 힘겹고 지겨워지려고 한다. 벌써. 

힘들 때면 내가 아이였을 때를 생각한다. 완벽하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무조건 위로받고 이해받을 여지로 충만했던 시기는 죽을 때까지 꿈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좋았던 건 아이로 살아봤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추억의 시계는 점점 더 거꾸로 돌아가 멈춘다. 그래서 노망이 나면 옛기억을 붙잡게 되나 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 귀한 줄을 알고 그 사람들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거다. 나이든 이들이 결정하고 추진한 바를 젊은 아이들이 고스란히 감수하고 때로는 생명까지 바쳐야 되는 이 모순이 역겹다. 살아온 시간들을 빌미로 다른 이들의 남은 시간들을 분탕질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시간에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일이 아닐까. 

정말 정치를 제대로 알고 시국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화가 나는 것인지, 나 자신의 결핍과 감정마저 투사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에 흠뻑 빠져 홀로코스트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책을 사서 읽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빌려서 줄을 긋지 못하고 간지를 무슨 문어발처럼 붙여 대는 일이 낯설고 좀 싫다. 도서관에 다 있는 책들인데 주문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제목 한 번 걸쭉하다. 누구나 극단의 상황에서 쉽게 되뇌게 되는 말이지만 사실 저자가 수용소 체험을 직접 회고한 이 책의 리얼리티에 기분이 너무 다운되서 책을 그만 읽었다는 사람까지 있으니 그 정도의 이해는 곡해이상이 아닐 수 있다. 이렇게 아우슈비츠에서 힘겹게 살아나온 저자는 끝내 자살한다. 슬픈 반전이다. 삶이란 언제나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튀어 나오는 불편하고 흥미로운 영화 같다.  스스로 삶의 종결을 집행한 이가 살아나온 이야기라니. 

<디아스포라 기행>은 실제로 보고 사려고 했는데 서점에서 미친듯이 머리를 쥐어뜯다가 디~ 다음이 생각안나서 못보고 말았다. 이럴 때 아이폰이 절실하다. 알라딘 장바구니만 보면 되는데. 여하튼 디아스포라를 생각해 내려고 온갖 단어를 다 조합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프리모 레비의 위 책이 등장한다고 하니 두 책이 묘하게 엮여 있는 셈이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대우하는 최악의 마지노선을 더듬거리며 살아나간다는 것에 대한 실증이 아닐까 싶다. 이런 책들은 언제나 읽고 나면 기분이 침체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말로 쓴 청춘의 얘기를 읽고 싶었다. 신경숙의 언어는 투명하고 아름답다. 김훈의 그것이 명징하고 둔중한 맛이 있다면 그녀의 문장들은 잘 닦인 구슬 같아 손안에 품고 싶어진다. 이 언어가 삶의 결 속에 잘 미끄러져 들어갈 때의 그 성취는 놀랍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이제는 나의 시계를 이십대로 돌려 조금 가까운 과거를 쓰다듬어 보고 싶다. 누군가 전화해서 '너의 스무 살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해본다.  

내일 깨면 코가 뚫리기를. 책들이 오겠지. 그 책들에 코를 박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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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에 '즐겨찾는 서재'로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blanca 2010-05-25 09:58   좋아요 0 | URL
마기님 어서 오세요^^ 즐겨찾는 서재가 되는건 언제나 기뻐요.

기억의집 2010-05-25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의 책을 읽고나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에게 대하는 모순때문에 더 괴로워요.

아, 근데 왜 저는 신경숙한테는 매력을 못 느끼는지 모르겠어요. 20대 시절에는 한국소설을 많이 읽어 신경숙의 초기작품을 읽긴했는데.... 점점 멀어지네요. 그 때도 매력을 못 느꼈는데 지금도 매 한가지. 블랑카님이 신경숙의 언어가 투명하고 아름답다는 말에 끌리긴 해요.

코를 뻥뚜러에 갖다 댈 수도 없고..하핫, 책 받는 순간 시원하지 않을까요?!

blanca 2010-05-25 10:03   좋아요 0 | URL
아! 레비책을 읽으셨군요! 안그래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들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더 비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대인 핍박을 얘기할 때 슬쩍 넘어가기 쉬운 문제가 바로 이거더라구요. 본인들의 고통만 부각되고 정작 자신들이 행하는 또다른 학대는 어물쩍 넘어가는.

신경숙은^^ 저는 원래 안좋아했었는데요. 아주 늦게 <외딴방>을 읽고 다시 보게 됐답니다. 시적인 문장이 좋아서요. 신간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코는. 흑흑. 기억의 집님. 요새 감기 걸린 사람들은 다 저어하는 분위기라 가택 연금되어 울고 있습니다. 너무 괴롭네요.--;;

stella.K 2010-05-2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홀로코스트 문학 한동안 안 봤는데 나이를 먹어서일까요?
다시 관심이 가요. 아직 읽은 책은 없지만...또 조만간 다시...
아무래도 읽고나면 기분이 다운이 되긴 하겠죠? 하지만 그 뒤에 희망을 보기도 하지만...

신경숙의 <리진>은 흥미롭게 봤는데 역시 <엄마를 부탁해>를 보고는 또 갈등이 생기더군요.
도무지 이 작가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하는 걸까? 글은 너무 잘 쓰는데 우울하고 맥아리없는 건 여전하고,
어.나.벨 책은 예쁘고...암튼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요.ㅠ

blanca 2010-05-25 10:5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이상하게 <엄마를 부탁해>가 아쉬움이 많이 남더라구요. 맥아리 ㅋㅋㅋ 갑자기 딴 얘긴데 제가 자주 쓰는 용언데 누가 대체 그게 뭐냐고 하더라구요.^^;;

함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stella.K 2010-05-25 11:12   좋아요 0 | URL
앗, 전염됐다. 그렇지 않아도 누가 썼던 것 같은데 누구지...?
했다능. 그런데 블랑카님이셨군요.ㅎㅎㅎ
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마녀고양이 2010-05-2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 나으세요. 저는 머리만 아픈데, 블랑카님은 코도 막혔군요.
제 처지가 조금더 나은가... 아하하. 지금은 아가야가 괴롭혀도 금방 커버리면, 그리울걸요~ ^^

blanca 2010-05-25 17: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리워하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후회안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마녀고양이님 처지가 훨씬 나아요. 일단 코가 막히고 콧물이 나면 남사스러워 밖에 잘 못나간답니다.ㅋㅋㅋ

L.SHIN 2010-05-2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들에 코를 박고 싶어진다"

나의 스무 살은 어땠었지..? 하고 무심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 스무 살이 끝날 무렵에 죽을 뻔 했었군요. 하지만 그 때 만큼 열심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잠시 뿐 이어도.

blanca 2010-05-25 17:49   좋아요 0 | URL
진짜요? 또 궁금해지는걸요. 온갖 상상이 ㅋㅋㅋ 스무 살은 어렸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가장 저한테 의미 있는 나이예요.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 같아요.

2010-05-25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5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5-25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얼른 감기 나으세요.^^ 일교차가 커서 감기 잘 걸리죠.
제목보고 얼른 들어왔어요. 저도 스무살을 기억하고 싶어요.ㅎㅎ 누군가의 스무살도 기억하고 있구요.ㅎㅎ

blanca 2010-05-25 17:50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누군가의 스무 살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아기가 감기에 걸리면 대번 또 저한테 옮네요. 빨랑 나을게요.

2010-05-25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6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따라쟁이 2010-06-0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십대를 살면서도 스무살이 그립습니다. 원래. 스무살이란.. 그런건가봐요. 안녕하세요^-^

blanca 2010-06-04 10:03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 퍼스나콘이라고 하나요? 파란 하늘에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모습이 너무 이뻐 한참 보게 됩니다. 이십대를 사신다니...흑흑 그 말 만으로도 따라쟁이님을 부러워하게 되네요. 스무 살 때는 몰랐어요. 그렇게도 눈부신 나이인줄....
 

MBC에서 방영한 법정 스님 관련 스페셜의 아련한 잔상과 오월을 머금고 돌아온 아카시아 향기가 만들어 준 고적한 밤.
 

인간의 미덕에 대한 최후의 마지노선마저 무너뜨린 나치점령하의 집단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안온한 행복의 거름으로 당겨쓰는 행위를 제일 치사하다고 생각하건만 아카시아 향기가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금' 행복하다고, 살아있는게 좋다고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했다.

 

행복하여라, 훌륭한 아파트나 누추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진 채, 홀로 앉아 꿈꾸고 울 수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형이상학적 문제를 두고 스스로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타인의 돌봄을 받는 환자들이여!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자들이여,
그리고 또 행복하여라, 그대들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냐,
병원의 침대나 저택에서 정상적인 생을 누린 끝에,
정상적인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여!
-마우렐(본문 중 인용) 

추억으로 아로새겨진 과거를 의식적으로 망각하고 감히 내일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 엄혹한 참경을 직시하고 같은 인간이 행하는 패악들을 견뎌나가 마침내 그것들을 증언하기 위해 돌아온 자들의 얘기다. 마흔에 요절한 저자 테렌스 데 프레가 나치와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을 채집하고 그것을 문학적,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재구성한 역작은 34년이나 삶의 지주로 이 책을 품어왔던 역자의 노고에 힘입어 한층 빛난다. 암투병중인 역자는 이 책의 서문만 세 번을 쓴다고 했다. 유신의 군사체제하 햇병아리 수습기자로 처음 접하게 된 이 책은 그의 삶의 굴곡직 서사를 돌아와 아직도 살아있다,고 자신을 표현하기에 이르른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기록을 보존하려는 욕망처럼 강한 것은 없다 

살아돌아온 자들은 강렬한 증언의 욕구를 얘기했다. 고통의 아로새겨짐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세상을 향해 토해내기를 부추겼다. 질병. 궁핍 속에서도 이 시기의 모든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려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만오천 명을 하루에 처형한 트레블랑카 집단 강제 수용소에서는 그곳의 기억을 보존하고 참상을 세상에 증언할 한 두 사람을 세상밖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산 자는 죽은 자들에 대하여 빚진 바를 청산하고 그들을 자신을 통해 복원해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들이 증언하려고 하는 대상으로서의 이 세계가 그들이 고발하려고 했던 조건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이 증언이 가지는 시사점을 보여준다. 증언은 곧 문명의 전진이 어떻게 생명의 존귀함을 교묘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진실을 얘기하려는 것이 일차적인 본능이라면 이 본능은 결과론적으로 이 지향하는 세계와 살고 있는 세계의 그 간극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모색해야 하는 인류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자는 죽는다. 

신체의 생리적인 작용을 학대와 조롱의 대상으로 의도적으로 이용했을 때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대한 참혹한 보고의 대목이다. 또한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뚫고 나오는 체면을 지키고자 하는 마지막 저항이 어떻게 생의 의지로 승화되고 결과론적으로 생존의 승률을 높이는지에 대한 통찰은 놀랍다. 극한 상황에서는 신체와 정신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자신의 모습을 관리하지 않는 것이 곧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뚫고 나가지 못해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마다의 고통의 시기를 지나가게 된다. 이 기간은 흔히 자신의 신체를 돌보지 않고 혹은 학대하기 쉬워진다. 심적인 위기에서 육체는 하나의 거추장스런 부산물로 치부된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서는 되레 심신의 구분의 철책이 무너져 묘한 상호순환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깨달음은 우리가 처할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 지에 대한 강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슬프고 괴롭다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술과 담배로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기억해야 겠다. 화장실에 갈 최소한의 자유도 얻지 못한 채 용변을 서서 흘리고 다녀야 했던 그들도 매일 세수를 하고 신발끈을 묶으며 외모를 가꾸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런 자들은 살아 나왔다. 

 

그럼에도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의 의지의 촉발 

재소자들이 초기의 수용소 생활을 접했을 때 받은 충격이 자아의 붕괴로까지 이어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해체와 붕괴는 상당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통합과 회복으로 승화되는 신비로운 메커니즘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사방에서 넘쳐 흐를 때 사람들은 절망의 심연에서 생의 의지를 회복했다. 특히나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별이 총총하던 어느 날 밤, 한 노인이 구슬프게 불렀던 노랫소리에 다들 귀를 기울이며 감동받아했던 체험을 얘기하는 생존자의 증언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보존되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 같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수용소에서의 집단 생활은 아귀다툼을 연상하게 한다. 서로를 불신하고 배척하고 배신하고 짓밟는 참경들. 그러나 여기에는 기적이 있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카오스와 아노미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개인의 요행이 아니라 집단적 성취였다. 점호시간 쓰러지면 총살이었다. 그러나 비척대는 재소자는 앞뒤로 받쳐주는 이들 덕택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심지어 생일날 자신의 자리에 사과와 낡은 칫솔을 누군가가 선물로 두고 가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를 지켜주며 버텨냈다.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무수한 작은 아름다운 모습들이 연출되었다. 벌겨벗겨지고 머리를 박박 깎고 오물이 엉긴 몸으로 그들은 서로 빵을 나누어 먹고 어린이들을 끝까지 온전하게 지켜내었다. 이 지옥에서 그들은 주린 배로 질서를 짜 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연대는 요원하거나 이상적인 지향이 아니었다. 생명 간에 열린 틈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배려와 지지가 인간의 존엄을 사수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우리를 거대한 하나의 가족으로 결합시켰다는 생존자의 증언은 가슴께를 둔중하게 울린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집단 강제수용소의 체험은 정신분석학적, 행동주의적 해석이 주류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시각은 지극히 1차적인 적응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유아적 퇘행 등으로 설명되는 이 대목은 그들이 2차적으로 통합,보수,극복의 모습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간과한 것이다. 땅에 밀착하고 생존 그 자체로 집결되는 그 의지들의 출현에 복잡다단한 의미를 덧붙이는 것도 경계한다. 생명이란 그저 우리의 몸속에 있는 원형질적 자기 보존력인 것이다. 숨쉰다는 것이 가지는 그 단순한 마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분투한다. 

 

집단수용소 자체의 해석 

이 책이 훌륭한 것은 재소자들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가해자, 집단수용소 자체의 출현에 관한 통찰력 있는 고찰이 있다는 것이다. 집단 수용소가 인류의 예술, 문학,신학 가운데 악마적 요소를 추출하여 신중하게 재현한 것의 사례로 제시되고 파괴,고통, 상해와 모독을 향한 극단적 상상의 정당화,합법화의 가장 잔인한 예시로 해석되는 것이다. 두렵고 패악스러운 것들을 꿈꾸면서 어느새 그것을 현실 속에 재현하는 데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은 소름끼친다. 또한 죽음을 강하게 부정하고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여 인식하고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명의 발달이 인간 그 자체의 명징한 생명력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 지에 대한 지적은 날카롭다. 우리는 몸을 상품화하면서도 비하하는 묘한 딜레마의 질곡으로 묶어 버렸다. 이미지화되어 소비재로 탈바꿈시킨 몸은 인간 그 자체를 도구화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 지 짚어볼 일이다. 아름다운 몸을 숭상하는 것이 그 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지독한 다이어트로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례들은 하나의 예증 같다.  

 

살아 돌아온 자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

우주의 다른 모든 것은 하향 운동을 하는 반면 생명만이 상향운동을 한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갈구, 삶에 적합한 어떤 소질 같은 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생명 자체에 원형 보존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는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여 살아 남아온 생존자들을 통해 터득하게 되는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다. 자크 모노는 모든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는 하나의 화석이며 그 내부 단백질 입자 하나 하나마다 조상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 속에도 지옥을 뚫고 돌아온 생존자들의 핏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생명은 끈질기게 공생하고 살아남고야 만다. 그 존귀함을 또렷하게 응시할 때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해야 할 지에 대한 단순한 해답을 알아차리게 된다.  

순간 순간 우리는 행복감을 가슴 깊이 들이마실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 내어 내 가슴 깊은 곳 작은 여백에 눈물을 채울 수 있다. 그게 지금 살고 있는 우리가 끝내 죽어간 자들, 그럼에도 살아 돌아온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생명은 생명을 덜어 먹고 사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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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2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번에 학교 과제물 때문에 집단 심리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어요. '악의 평범성'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우리처럼 평범한 누구라도 압력과 분위기가 조성되면, 조종당하여 악과 범죄를 저지른다는 거여염.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 만이 그에 저항하여 선을 행한다는거지요. 집단 수용소의 피해자는 그 반대겠죠. 살아남고자 거기에 집중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거죠? 참 대단하고 존경스러우면서도 죄스럽습니다.

우리는 현재 무의식적으로 어떤 집단에 수용되어 어떤 피해자를 만들고 있을까요?

blanca 2010-05-24 18:3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집단심리라는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니.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칩니다. 희망을 가지고 그래도 내일은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나가야 겠지요. 오늘은 감기에다 인터넷만 보면 심란하고 화나는 소식에 날씨까정. 아주 대박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5-24 19:21   좋아요 0 | URL
아아.. 블랑카님이랑 나랑 전생에 쌍동이 아니었을까요?

저도 동일한 이유로 대박입니다, 오늘. 감기 몸살 + 뉴스 승질 + 개인적 화나는 소식 + 날씨 짬뽕.
액땜이나 하러 어디 한번 가야겠군요, 둘이~ ^^

blanca 2010-05-24 22:41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게다가 말안듣는 아기까지--;; 약먹고 헤롱대는데 밖으로 나가자고 한바탕 울어대는데 분노의 게이지가 급상승하더라구요. 아, 진짜 여름에 한번 얼굴 보며 얘기좀 해야 할까요?^^;;
 

나는 그 때 지독한 육아 우울증에서 질척거리고 있었다. 하나의 너무 무기력한 작은 사람 하나를
코알라처럼 몸에 붙이고 다니며 쪽잠마저 황송하게 여기며 하루하루를 견디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절하게 깨달아 갈 무렵 그 사람은 축축한 눈가를 예의 그 하회탈의 주름으로 감싸며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 행복하다,는 말에 울었다. 행복하지 않은 내 자신을 절망하거나 그를 질투해서가 아니였다.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의 후반의 삶의 시작이 감동스러웠기 때문이다.
퇴임대통령이 그리는 새로운 지도가 신기루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죽어 버렸다. 아이는 많이 컸다. 달리는 아이를 쫓아다니며 나는 또 울며 다녔다.
아이를 업은 두 엄마가 함께 울었다. 눈물을 흘리고 다니니 웃는 사람이 다 미웠다.
웃으면 안돼, 정말 그러면 안돼는 거야,라고 타인의 감정까지 강요하고 다니는
내 자신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또 울었다.
많이 행복하다던 그가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그 외형적 사실 밑에 가라앉아
미처 움트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의 씨눈들이 아까워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벌써 그런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아이는 이제 말대꾸를 한다.
자꾸 왜냐고 묻기 시작했다. 나도 왜냐고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지는데
그것조차 어쩌면 허용안되는 그 분위기가 치사스러워서 웃음이 난다.  

언제 가장 그리우세요? 

밤에 혼자 숙소로 돌아갈 때 ...여기 일교차가 큰 날은 물안개가 짙거든요. 가로등 불빛에 몽환적인 분위기인데...문득 누가
등을 툭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그런 느낌이 드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돼요
<...> 소 같은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취재수첩을 덮었다. 

-한겨레 21 제811호 <그는 가고 뜻은 남았다>중 인용  

대학 농활 때 거머리가 무서워 논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김전비서관은 이제 홈페이지에 농군일기를 올린다.
양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문자로 세상을 이해하고 조직화했던 그가 이제는 논에 오리와 우렁이를 풀어놓으며
세상을 직접 만지고 더듬으며 새로 배워 나가고 있다. 그의 상관은 그의 기안서류에 서명을 해주는 대신
그의 가슴 속 상흔으로 결재를 해 준다.   

여름이면 늦반딧불이가 황홀하게 귀환한다는  그곳에 정작 그것들을 불러모으고
저편으로 저물어 버린 그가 또 그리워지고 만다. 
비겁하고 말뿐인 진보는 언제나 흘러넘치는 감정에 질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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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19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진보는 항상 흘러넘치는 감성에 질식하고 만다는 표현, 딱 맞아 떨어지는거 같아요.
어째 블랑카님 요즘 쳐진거 같아요? 나도 그런데...
우리 둘 다 흘러넘치는 감성을 감당하지 못 하고 있는 걸까요? 요즘 같아서는 미칠거 같아요.
그래서 내 주문을 걸며 날씨 탓을 하며 뉴스 탓을 하며 별 짓을 다하는데,, 빠져나오기 힘드네요.

노대통령 1주기네요. 그분이 그립습니다.

blanca 2010-05-20 13:40   좋아요 0 | URL
저는 대체로 쳐져요 ㅋㅋㅋ 벌써 1주기예요. 세월 너무 빠르죠? 마녀 고양이님도 저도 다 행복하다고 즐겁다고 자기주문을 걸면서 그렇게 살아가야되겠죠? 그런데 투표결과보고 더 기분나빠지면 어떡할까도 싶어요^^;;

2010-05-20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0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5-20 21:46   좋아요 0 | URL
ㅋㅋ 저는 제가 남매를 둔 사람으로서 장점을 말해볼께요. 일단 어느 정도 키워놓으니깐 둘이 놀더라구요. 전 거의 책 읽어주는 것 이외에는 애들사이에 잘 안 끼어들어요. 둘이 잘 노니깐...애들이 놀다가 잠깐 잠깐 불러 제낄때가 있는데 그 때 응해주는 척 하죠.
하지만 엄청 싸우기도 해요. 장난 아니여요.
단점은 진짜 돈 많이 들어요. 흑흑 오늘 우리 월급날인데..학원비 제하고 뭐 했더니 겨우 현금 삼십만원 쥐나봐요. 전 학원 많이 보내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70만원 넘게 깨져요.돌아버리죠. 아들한테만 50이고 딸애가 이십오만원이에요. 아들애는 방학중에는 미술 좀 보내달라고 하는데 일단 보내주기로 했는데 학원비 13만원을 어디서 쪼개야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애 낳지 말라고 해요. 어차피 크면 따로 노는데 궂이 형제애를 강조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전 언니하고 친했는데 애 어느 정도 크니깐 거의 연락 안 하고 살게 되더라구요.
오히려 여기 블로그에서 친하게 지내는 분들하고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요.
저의 고민도 거의 다 블로그 지인들에게 터 놓게 되고.
블랑카님, 애 낳을려면 터울 없이 낳으세요. 같이 놀게 하려면 터울 없이 낳는 게 좋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저의 아이들한테도 애 낳으란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부부끼리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는 거 같아요. ^^ 너무 현실적인가요!

2010-05-20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0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0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호텔의 뷔폐 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동분서주하는 젊은 남녀의 시중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뭔가 모르게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양 극단의 지점에 있었다. 하나는 과연 그들이 그렇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받는 서비스들이 그에 합당할 만큼 보이는 그대로 양질의 서비스일까, 하는 일종의 의심이고 다른 하나는 똑같은 인간들이 계층적 층위에서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풍경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물론 그런 풍경이 그 두 집단의 전부를 표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한 풍경에서 알레르기적 감상을 불러일으킨 나 자신이 감정적 프리즘을 들이대었을 여지도 있다. 여하튼 언제나 그런 풍경은 그 두 집단 어디에도 나를 제대로 놓아 볼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첫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파리의 콕도르 거리에서 투숙한 여관에서의 생활과 고급호텔 접시닦이의 체험, 런던에서의 싸구려 간이 숙박소를 전전하는 부랑자 생활에 관한 소설이다. 그의 전매특허이다시피 한 르포르타주 형식을 띠고 있어 사실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가난의 체험에 대한 보고서다.  

그의 글이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체험적 진술이 과장 확대되지 않고 건조하지만 성실하고 재기어린 문장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삶의 복판에 흠뻑 빠져든 저자의 목소리는 작위성과 허술한 틈새대신 통절한 고백과 통렬한 비판으로 사무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고급 호텔의 그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서 나비 같은 드레스와 어린 아이 눈망울 만한 다이아몬드 반지에 휘감긴 금발 미녀가 마시는 칵테일과 그 건너에서 그녀를 위하여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써는 연미복차림의 신사 뒤에 43도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후텁지근하고 불결한 지하실에서 하루에 다섯 시간만이라도 자보는 것이 소원인 접시닦이들이 미친듯이 설겆이를 해대고 서로 악다구니를 해대고 울부짖는 풍경을 보게 된다.   

그 안에서도 하나의 계층의 층위가 형성된다. 가장 덜 노예적인 노동자 같은 계층인 요리사와 고용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병리적 환상에서 자신의 노예적 기술에 자부심을 느끼는 웨이터들, 그리고 미래의 전망이라곤 없고 강력한 피로에 굴복하여 하루하루를 견뎌 나가는 것으로 삶을 밀고 나가는 접시닦이들. 이들이 바로 불충분한 인원으로(자본주의의 핵심이 아닐까?) 그 거대하고 복잡한 서비스 체계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주역들이다. 복잡한 서비스를 단순하게 완성시키는 비결은 바로 불결의 비밀스러운 혈관이다. 이들이 낳는 서비스는 보여지는 서비스이고 우리는 보여지는 서비스에 비용을 지불한다. 우리는 더럽게 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했다,고 '나'는 고백한다. 호텔과 큰 음식점에서 100명이 200명에게 사치의 값싸고 조악한 모조품을 제공하기  위하여 악마처럼 고생한다는 대목은 우리가 흔히 누린다고 생각하는 서비스의 생득적 해악을 암시한다. 물론 1933년과 2010년의 시차를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사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누구보다도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용역을(물론 물질적 대가가 수반되지만)제공하고 제공받는 이 시스템의 순환에서 정작 잘려나가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절실하다.  

그는 돈이 미덕인 시대(이것은 현대에도 유효하다.)에서도 유일한 가난의 미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바닥까지 가 보는 그 절망의 심연이 주는 일종의 담담한 안도와 앞선 미래를 떠올리지 않고 그저 닥치는 대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의외의 일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가난은 미래를 전멸시킨다. 가난이 가장 슬픈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없고 외부를 인식할 기회를 박탈당하다 보면 먼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하나의 불가능으로 다가온다. 가난의 표피적 이해의 껍질을 벗고 나온 저자의 진솔한 고백은 우리가 복지 정책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또한 자선을 받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은인을 미워한다는 얘기는 자선의 과시적 풍모의 속물적 더께를 과감히 벗겨내야 함을 강변한다. 복지라는 것이 황공한 자선의 형태로 광고될 때 수혜자들이 정작 받게 되는 것은 하나의 온정적 혜택이 아니라 비열한 권력의 또다른 횡포와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고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의당 당연한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 기대에 섞인 불순한 구석을 자각하지 않으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이해는 요원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돈에 쪼들리면서 확실히 배워둔 한두 가지는 짚어낼 수 있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고,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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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17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치의 값싸고 조악한 모조품... 전 이 글귀가 현대 사회를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넘치는 상품들. 옷, 가방, 가구, 신발, 심지어 책까지.

저 요즘 책 거의 못 읽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놨나봐여.. 미치겠어염. ^^

blanca 2010-05-18 16:4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진짜 고개가 끄덕끄덕해지더라구요. 마녀고양이님, 전 벌여 놓은 일도 없는데 책 읽는 시간을 시간이 참 없네요^^;; 요새는 왜이리 게을러지는지. 글자를 읽는 것도 귀찮을 정도랍니다.-..-

기억의집 2010-05-1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저 밑바닥 생활 아닐까 싶어요. 저도 이 책 읽었는데, 전 조지오웰의 산문은 다 좋아요. 그처럼 간결하고 논리적이고 딱 부러지게 에세이를 쓰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순식간에 읽어 치웠던 거 같아요. 그의 글이 님 말씀대로 과장되지 않아서 더 그런 것일까요?

blanca 2010-05-18 16: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분도 저의 완소가 될 듯^^;;해요. 진짜 간명하면서도 또 재미있게 쓰는 그 능력이라니. 재간둥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5-1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일부가 예전에 고급영어독해집에 실렸는데 제목 번역이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었어요.덕분에 따라지의 뜻을 알게 되었지요.

blanca 2010-05-19 13:48   좋아요 0 | URL
그랬어요? 알고 보면 옛날 영어 독해할때 명문들이 참 많았던것 같아요. 따라지 인생ㅋㅋㅋ 어감으로만 느끼지 말고 정확한 뜻을 한 번 찾아 봐야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5-19 19:06   좋아요 0 | URL
이호철 씨 소설에 월남한 따라지 인생 운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이 분이 월남자라서 그런 이야기는 실감나게 잘하지요.

루체오페르 2010-05-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다. 인간의 역사는 동서고금만 다를뿐 대동소이 하다는걸 느낍니다.

blanca 2010-05-20 13:43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저는 이것 읽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인간이 느끼는 정서는 기본적으로 비슷한가봐요. 현실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정말 신기했답니다.

순오기 2010-05-2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작이네요.^^
블랑카님은 리뷰나 페이퍼 썼다 하면 당선작이군요. 축하해요!

blanca 2010-05-29 14:3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헤헤.그건 아니에요^^;; 주말 잘 보내고 계시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달팽이 2010-06-0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선을 받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은인을 미워한다...충격이네요
책읽는 것도 재밌지만 독후감 읽는 재미도 쏠쏠하네요ㅋ

blanca 2010-06-04 10:02   좋아요 0 | URL
그게 자선을 베푼 사람은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조금 저자세에서 감격해주기를 바라는데 그런 심리까지 다 간파하나봐요. 그런 자선은 위선인가 봅니다. 야망의25시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