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 존 가트맨.최성애 박사의
존 가트맨.최성애.조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들이 한 시간씩 약속 장소에 늦어도 화내지 않았다. 고객이 전화에 대고 육두문자를 날려도 흥분하지 않았다. 십 년 동안 화를 내는 모습을 전혀 못 봤다는 친구의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다. 정서적으로 대단히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고, 감정조절에 능하다고 자만했다. '다혈질'과 거리가 먼 나의 모습을 나는 좋아했다.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예민했다. 엄마 아니면 그 누구도 한 시간 이상 볼 수 없었다. 백일 기념으로 한 가족모임에서 아이는 두 시간을 울어대는 기염을 토해냈다. 졸리거나 감기가 걸리면 종일토록 울어댔다. 피곤한 몸, 나 아니면 안되지만 그 누구도 그 가치를 산술적으로나 표면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일에 매여 점점 나는 다혈질이 되어 갔다. 아니, 사실 감정조절도 못하고 대단히 유치했던 '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 팔할이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잊혀졌던 유년기의 기억들의 미처 봉합되지 못한 상처들이 아가리를 벌렸다. 육아는 분명 또다른 자기성장의 계기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종의 관문이 있다. 자기노출. 내 눈으로 차마 보고 싶지 않아 파묻어 버렸던 수많은 약점과 취약한 지대들이 드디어 백주대낮에 내 앞에 도열하는 환각.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 아프고 참혹하다.  

웃는 아이는 이쁘다. 밥 앞에서 둥지 안에서 먹이를 물어오는 어미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쫘악쫘악 벌려 대고 '엄마를 제일 사랑해'라고 볼에 입을 맞추고 어른들 앞에서 배꼽인사를 하는 아이는 누구나 예뻐할 수 있다.  

본게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 친구를 마구 가격하는 아이, 아니면 맞고도 구석에서 훌쩍이며 전혀 방어를 못하는 아이, 밥은 안먹고 사탕과 과자만을 요구하는 아이들 앞에서 시작된다. 많은 엄마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는 더없이 너그럽다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친구를 때리는 아이의 모습에 광분하는 엄마, 맞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눈을 흘기는 엄마,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끼치면 바로 등짝을 시원하게 때리기 시작하는 엄마, 그 어떤 아이의 행동에도 눈하나 끔쩍하지 않고 무감각하고 방임하는 엄마, 너그러움을 가장하고 아이에게 이기심을 조장하는 엄마, 아이의 감정에 공감해 주지만 잘못된 행동에는 단호한 엄마(모범답안이겠지만) 등 백인백색이다. 나는 유독 일관성이 없는 부류에 속했던 것 같다. 평소에는 아이의 감정을 공감해주려 애쓰지만 나의 컨디션이 저조하면 목소리 크게 내기 대회에 참가하면 대상 감이었을 것 같다. 격정 소나타. 감정의 기복과 훈육의 강도는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밤에는 처절하게 반성했다. 세 아이를 키워내며 크게 화내지 않았던 친정엄마를 사랑하고 원망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일찍 잠자리에 든 엄마에게 악몽을 꾸고 갔다 무안하게 야단맞고 돌아선 기억, 무작정 슬프고 나쁜 감정을 거부하라고 했던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 '사랑한다'고 나를 안아주는 서구식 사랑을 해주지 않았던 서운함.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들어주려고 동분서주했던 그 표없는 사랑들이 서로 웅웅거리며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버텼다.  

   
  가장 급할 때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의 기본형입니다. 평소 아이가 별 말썽을 부리지 않을 때는 감정도 잘 공감해주고 다정다감한 모습이다가도, 아이가 말을 안 듣고 떼를 쓰고 울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를 내거나 야단부터 친다면 '억압형'이 그 사람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뻔하지 않은 책이다. 제목은 <내 아이를 위한 감정 코칭>이지만 사실 <나를 위한 감정 코칭>으로도 읽힐 수 있다. 육아서를 읽으며 얻게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부가 소득은 내 안의 상처받은 여린 과거들의 치유 경험이다. 설명할 수도 설명되지도 않는 격정적인 감정 분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곳엔 나의 아이보다 '내가 아이였던 시간'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과정이 불편할 수도 있다.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 유난히 참기 힘든 아이의 행동은 내가 아이였을 때 부모가 과도하게 반응했던 나의 그 반복되던 실수였던 경우도 많다.  

감정코칭의 핵심은 모든 감정은 다 받아주고 공감해 주되 타인과 아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의 한계는 분명히 정해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감정이다. 우리는 기쁨, 행복함,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좋은 것이고 분노, 우울, 짜증 같은 부정적 감정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나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아이가 어쩌다 보이는 분노, 짜증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시기, 분노 같은 감정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모든 감정이 삶에 어떤 면으로든 기여한다는 얘기는 기너트의 <부모와 아이 사이>에도 나온다. 오늘 EBS에서 우연의 일치로 보게 된 다큐에서도 이러한 아이의 부정적 감정에 반응하는 두 엄마의 다른 모습이 나왔다. 부정적인 감정을 훈육의 대상으로 보는 엄마와 그 감정 자체를 심판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의 대비는 아이의 감성 지능의  차이로도 연결됐다. 그림책의 주인공들을 놓고 보이는 공감의 정도가 엄마가 아이를 훈육하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남녀를 통합했을 때 27~28세는 되어야 전두엽이 온전한 기능과 작동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철들었다'고 표현할 만큼 계획, 판단, 우선순위, 감정 조절, 충동 조절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지요.  
   


전두엽 성숙이 이렇게나 늦게까지 끄는 것인 줄 몰랐다. 청춘의 방황은 생물학적 성숙도에 연관된 이야기였다. 스무 살에 철드는 것은 불가능했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놓아 본다. 아이들은 1층 뇌인 감정으로 먼저 수용과 공감을 해 준 뒤, 2층 뇌인 전두엽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여 행동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이십 대 성인도 철들기 힘든 마당에 아이들을 데리고 전두엽 수준의 논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강요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슈퍼에서 뜬금없이 딸아이가 소세지를 졸랐다. 집에는 구워먹을 소세지가 잔뜩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계산대의 아주머니가 간식으로 먹는 소세지 껍질을 벗겨가며 맛있게도 드시고 계셨다. 아이가 말하는 소세지는 이런 소세지였다. 그거였다. 나는 지레 엉뚱한 떼를 쓴다고 짐작하고 훈육하려고 뒤돌아 섰고 거기에 아이가 소세지를 먹고 싶었던 이유가 버티고 서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내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아이의 떼는 잘못되거나 과도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과 욕구로 설명될 수 있다. '사랑'은 '자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읽어주는 것인가 보다.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7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11-02-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가치있는 결론을 얻으셨네요. '사랑'은 자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읽어주는 것이라는.

blanca 2011-02-14 00:15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문제는 그러고도 항상 실수를 번복한다는 거예요. 매일 반성하고^^;; 제 인생 중 가장 어려운 어려운 과제가 '좋은 엄마'가 되는 거랍니다. 딸아이가 커서 저의 딸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는데. 참 쉽지가 않네요.

2011-02-13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4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11-02-1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별찜을 하게 만든 리뷰였습니다.(웃음)
평소라면..그다지 관심있게 돌아보지 않을 주제였지만, 제 주변에 아이를 출산하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보니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책, 그리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나중에 그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해보아야겠어요.

blanca 2011-02-14 00:18   좋아요 0 | URL
엘신님한테도 도움이 되는 리뷰가 되었으면 좋겠는걸요^^;; 별찜이라니 황공합니다. 두서없고 깊이도 없어서 좀 부끄럽지만 찜당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아, 이 책 추천해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좀더 빨리 이것들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거든요. 영아기에 도움되는 얘기가 참 많더라구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2-1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공감하며 읽습니다.
다시 아이를 키우라고 하면 못 하겠다 하겠지만, 성인이 되지 못한 채 엄마가 되어버린 저를 생각하면
다시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만 번도 더 하게 되거든요..
이 책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신청해 놨는데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할지 감을 미리 잡으니 좋네요.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1-02-14 00: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현맘님처럼 다시 시작해서 제대로 그 실수했던 순간들을 고쳐 보고 싶지만 또하라고 하면--;; 참 난감하지요. 아, 신청해 놓으셨군요. 저는 우연히 겉표지를 보고 충동적으로 집어든 책인데 참 많은 것들을 곱씹게 되었어요. 제 자신도 되돌아 보게 되고요. 강추합니다.^^

프레이야 2011-02-1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참뜻은 '너를 읽어주기'. 이 말만 꼭 새겨둬도 좋은 엄마 될 거 같아요.
구구절절 너무 좋은 내용의 글, 잘 읽었어요, 고마워요. 블랑카님.^^
서구식 사랑을 해주지 않은 엄마아빠, 저도 그게 참 아쉬운데
대물림으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래주지 못한 거 같네요.
받아본 사람이 줄 줄도 안다고.^^

blanca 2011-02-14 00:2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은 벌써 좋은 엄마시잖아요. 저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사춘기도 받아내야 하고 아직 초짜인 걸요. 제가 왜 서구식 사랑 얘기를 하냐면요. 얼마전 아는 동생이 칠순의 노모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정말 깨가 쏟아지더라구요. 마치 연인처럼. 사랑한다고 막 그러고. 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엄마랑 막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그런 관계가. 그 동생도 똑같이 얘기하더라구요. 저도 그래서 더 과도하게 뽀뽀하고 사랑하고 그러려고 해요. 그런데 너무 많이 하니까 딸내미가 싫어해요 ㅋㅋㅋ

비로그인 2011-02-14 0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도 그렇지만 아빠들도 꼭 봐야 하는 책이로군요.
물론 책보다 블랑카님의 리뷰를 먼저 보는 게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ㅎㅎ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아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될 것 같은데...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하는 훈련을 따로 받은 기억이 없어
그 부분에서만은 아직 아이인 것만 같아서요^^

blanca 2011-02-14 23:47   좋아요 0 | URL
후와님 그럼요 아빠가 보시면 더 좋지요. 저도 감정 조절이 사실은 안 되는 거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것도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어요. 요즘에는 더더욱 그러네요.

송도둘리 2011-02-1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자기 안에서 나오는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좋은 글을 본것 같습니다. 윗 분 댓글처럼 아빠가 될 사람들도 한 번 봐야 될 책인 것 같네요. 저도 컨디션에 따라 반응이 극과 극을 달리는 터라...다행히 27살이 되야 철이 든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하니 안심입니다.^^;

blanca 2011-02-14 23: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대목에 굉장히 위안을 받았어요^^;; 과거가 다 설명되는^^;; 사실 지금도 제 전두엽이 완전히 성숙했는지 의문이랍니다.^^

양철나무꾼 2011-02-1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껍질 벗겨먹는 간식 소세지, 좋아하는데요~
구구절절, 고개를 주억이게 되는 리뷰예요~^^

blanca 2011-02-14 23:4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ㅋㅋ 저희 친정엄마가 아이에게 한 번 사주신 후로 아주 그 소세지 타령이 늘어진답니다. 게다가 계산하시는 아주머니가 턱하니 벗겨서 드시고 계시니 더더욱 그랬나 봅니다. 저는 집에서 구워 먹는 프랑크 소세지 얘기하는 줄 알고 한소리 하려고 했었는데 그런 거였더라구요^^;;

꿈꾸는섬 2011-02-1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글에 전적을 공감해요. 세상에서 아이 키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요?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엄마도 감정을 분출할때가 많잖아요. 물론 제 얘기에요. 제 몸상태에 따라 너무 일관성없이 아이들을 대할때 많아요. 육아지침서는 때때로 읽으며 자기 반성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좋은 리뷰네요.^^

blanca 2011-02-15 19:03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방금도 저는 그랬는 걸요. 휴, 노력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항상 모자라네요. 일부러 육아서를 읽어요. 지금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반성하기 위해서요. 감사합니다.

마녀고양이 2011-02-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두엽 성숙이 20세 정도라는 말에, 그래서 청소년의 판단 미숙이 야기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끄덕한 기억이. ^^
그런데.. 20세의 두배를 나이 먹고도 이 모양 이 꼴인 저는 무엇일까요? 아하하.

가장 급할 때의 제 모습, 가관입니다. 지금 그 생각을 해보는 중입니다. 한순간에 욱 하는 나. 뒷끝도 없고 그때 잠깐 그래 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찔리는군요.

blanca 2011-02-16 22:43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도 전두엽 성숙하려면 차례 멀었어요. 그래서 이 리뷰 쓰며 그냥 저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적었어요. 그러다 눈물도--;;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그런 얘기가 듣고 싶었나 봐요.

2011-02-2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누르긴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겠)네요.ㅎㅎ
살짝 방향을 틀어, 그 사람의 이유를 보아내는 것. 어렵지만 해야겠습니다.

여러 모로 배우고,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

blanca 2011-02-22 22:10   좋아요 0 | URL
섬님, 안그래도 저는 매일 반성하는 게 일과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나 봐요. 요즘은 그걸 절절하게 깨달아요.

세실 2011-02-2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자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읽어주는 것인가 보다. 참 좋아요.
아이들뿐이 아니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겠죠.


blanca 2011-02-22 22:11   좋아요 0 | URL
세실님, 머리로는 맨날 그래야지, 하는데 항상 마음과 감정이 어긋나 버리네요. 그대로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진지해지고 성숙해질거라 기대하며 살아가나 봐요. 사람이 사람을 낳고 키운다는 게 참 어렵고 미묘하고 신비한 것 같아요.

2020-01-10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0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몰입의 즐거움 - 개정판 매스터마인즈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이희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구판절판


인격발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과 관계는 대체로 순환성을 갖는다. 처음에는 결과였던 것이 나중에는 원인으로 작용한다.-93쪽

원만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118쪽

그 사람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내려면 본인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 사람이 내리는 판단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121쪽

무질서로 나아가려는 흐름은 고정변수나 다름없다.-148쪽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개인 의식이 죽고 난 뒤 어딘가에 보존되든 아니면 깡그리 사라지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전체 현실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남으리란 것이다.-193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2-0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책이 추천도서 목록에 눈에 띄어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읽는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간만에 이 책 재독해봐야겠습니다. ^^;;

blanca 2011-02-08 21:17   좋아요 0 | URL
우연히 서점 갔다 보고 언젠가 읽으려 했다는 기억이 나서 읽게 되었어요. 뻔한 소리들이라고 생각하면 집중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래야 한다'는 얘기를 논리정연하게 또 실감 있는 목소리로 듣다 보니 기억할 대목들이 참 많았답니다.

2011-02-10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0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추장스럽다고 오래된 스피커를 내다 버린 후 컴퓨터가 시위하듯 입을 닫았다. 오디오 드라이버도 다시 깔고 다른 스피커도 연결해 보며 낑낑대던 남편은 손을 들어 버렸다. 갑자기 들어야 하고 듣고 싶은 것들이 산처럼 쌓였다. 순한 학생처럼 네이넘의 지식인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해봐도 묵묵부답이다. 연두색 출력 단자. 이거 맞는데. 갑자기 본체 컴컴한 뒷편에도 연두색 출력 단자가 있나 찾아 본다. 있다! 이어폰 꽂는 데에다 떡하니 연결해 놓고 소리 안 나온다고 주변에 호소하고 다녔다. 도와준다고 약속했던 제부가 왔으면 거하게 망신살 뻗칠 뻔 했다. 기본 중의 기본도 제대로 모르고 놓치고 마는 것들. 이런 것들이 아찔하다. 바보 같다. 

그리고 정말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없었던 영화 <시>의 초입부를 보기 시작했다. 벌써 새벽 한 시. 전날에도 <유령작가>를 새벽 세 시까지 보고 연달아 달린다. 영화관에 가 본 지가 사 년이다. 주위에서 <아바타>로 들썩일 때는 소외감을 느꼈다. 다들 알고 얘기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에서 물러나는 것은 우울하고 쓸쓸한 일이다.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우며 영화관을 가지 못하고 가지 않은 것은 게으름과 귀찮음을 숨기기 위한 변명거리일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힘든 시대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귀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 소설가였던 선생님은 윤동주의 시를 적어주시곤 했다. 아이들은 마치 가수에게 노래를 조르듯 수업 시작 전 시를 조르는 습관을 들였다. 화석 같은 정경이다. 이 영화에는 시를 조르는 할머니가 나온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고도 무감각한 외손자를 돌보고 반신불수 노인을 목욕시키러 다니는 미자 할머니. 자꾸 명사에서 미끄러져도 금새 작은 수첩에 시상을 메모하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응시하느라 걷던 길을 멈추는 주책맞은 몽상가. 빛나고 생기어린 아름다움은 주름살 골에 희미하게 박혀 미끄러지고 있지만 가느다랗고 투명한 음색으로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대배우의 넘치지 않는 연기와 아름답게 시간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가는 듯한 모습은 절절하게 예뻤다.  

문화원에서 시작 강의를 받는 나이든 늦깎이 학생들의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회고하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유행가가사를 짚어가며 가르쳐 줬던 손녀는 할머니의 부재 앞에서 오열한다.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고 덤덤해했던 초로의 사내는 갑자기 지하에 살다 이천의 임대 아파트에 들어왔던 그 해방의 소박한 순간을 기억하며 전율한다. 봄에 비죽비죽 솟아 나오는 새순이 너무 이뻐서 쓰다듬어 주며 나이듦을 체감한다는 중년의 여인네는 누구와 닮아 있다. 내가 두고 갈 것들과 내가 가도 남을 것들은 순간을 더 고양시키고 서럽게 만든다. 소위 불륜에 빠져 아름답지만 너무 힘든 사랑을 하고 있다는 아주머니는 너무 아프다고 울먹인다. 

일상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그때는 몰랐다. 잠깐이라도 멈추고 싶은데 기착지의 막간은 너무나 짧다. 차창 뒤로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애달프다. 가질 수 있는 것도 없고 영원한 것이 없음을 머리로는 아는데 자꾸 사소한 것들에 끄달린다. 매일 매일이 어리석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시작 강의 시간. 미자 할머니는 강사와의 약속을 지킨다. '아네스의 노래'라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떠난다. 윤정희의 낭송은 갑자기 어린 소녀의 것으로 바뀐다. 죽은 그 아이다. 소녀와 할머니. 꿈 같은 만남. 아찔한 거리감. 사실 누구나 소녀였고 누구나 할머니로 죽는다. 어렸을 때 나는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로 태어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할머니로 영원히 내 곁에 계실 거라고 참으로 지겹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가고 난 다음에서야 할머니도 소녀였다고 정말 그랬다고 그리고 나도 할머니가 되는 거라고 결국 그러고 말거라고, 지금 나를 미친듯이 사랑하는 이 어린 딸아이는 언젠가 그 시간들마저 다 잊어 버리는 때가 올 거라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엄마, 정말이지 세상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들뿐이네요.'-사노 요코 <나의 엄마 시즈코상> 

어쩔 도리 없는 일들. 그리고 너무 이쁜 풍경들. 봄이 되면 더하겠지. 환장할 수밖에.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실 2011-02-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이 풍부한 소녀스럽고, 고운 할머니인데 현실이 참 팍팍하네요.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습니다.
나이들수록 말을 아껴야 겠다는, 실없이 웃지 말아야 겠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습니다.

blanca 2011-02-07 21:3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정말 그랬어요. 글구 아이가 나를 보고 웃어줄 때 그리고 나를 계속 부를 때 더 열심히 응해주리라고 결심도 했구요. 서글퍼지는 대목이 많더라구요. 제가 할머니한테 했던 행동들도 생각나고.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2-06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방송 일요일 밤 11시 한국영화걸작선을 보면 정말 윤정희 씨 영화가 많음을 알 수 있어요.모두 젊은 시절 영화지요.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런 영화를 꽤 보았답니다.특히 신성일과 주연한...그런데 저 영화 포스터...정말 많이 늙었군요.엉엉엉...미녀가 나이들면 더 슬퍼 보여요...구하라 누나도 늙겠지요.

blanca 2011-02-07 21:3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노자님, 정윤희 아세요? 저 하도 어른들한테 그녀 이쁘다,는 얘기 많이 들어 어제 검색해 보고 정말 반했답니다. 최고더라구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도 찾아 보고 싶었는데 EBS에서 해 줄 때 열심히 볼걸,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이쁜 사람들이 할머니가 되면 이목구비가 큼직하니까 더 확연히 늙어 보이는 것 맞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2-07 21:43   좋아요 0 | URL
수애 씨가 정윤희 씨 비슷하다고 하지요.교육방송에서도 안성기 정윤희 주연의 안개마을을 가끔 방영합니다.제가 이 프로그램 덕에 60~80년대 영화를 좍 끼고 있지요.

비로그인 2011-02-07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령작가>는 저도 그 시간에 보았는데, <시>가 방영되었는지는 몰랐네요.
영화관에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모두들 야단 맞은 학생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호되게 야단 맞은 기분이었죠.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blanca 2011-02-07 21:40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저 이틀 연속 새벽 세 시에 잤답니다.--;; <유령 작가>, <시> 둘 다 삶의 무자비한 잔혹성을 보여주는 영화였어요. 보고 나면 꼭 우울해지는.... 호되게 야단 맞은 기분... 맞아요.

마녀고양이 2011-02-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힘든 시기라는 문구 절대 공감.

어느 시대나 그렇긴 하겠지만, 요즘은 특히 예술이 금전과 연결되어 힘든 시기죠.
대중에게 영합해야 하고, 하기사.. 인정받는다는 자체가 대중 인기 영합일까요? ㅠㅠ

순수한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정녕 힘든 시기인 요즘이지만, 그만큼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양면성도 바라봅니다. 아, 곧 봄이 되나요? 통영 다녀오면서, 통영의 봄빛을 맞으며, 그 생각했어요, 베란다 손질 좀 해야게따 하구.

blanca 2011-02-07 21:42   좋아요 0 | URL
시인들이 특히나 더 힘든 것 같더라구요. 인터뷰 기사 같은 것 읽으면. 이런 풍토에서는 대시인이 다시 나오기는 힘들겠지요. 통영의 봄빛,이라는 말이 하나의 시어 같아요. 너무 이쁘네요. 베란다. 생각하니 심란해지네요. 여긴 곰팡이가 멋지게 춤추고 있어서 락스로 뿌려 놓고 닫아 놓고 산답니다.--;;

2011-02-07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1-02-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조르는 할머니,,, 누구에게요?
결국 자기 자신에게요?
궁금해요.

봄, 오지 말라고 조르면 봄이 안 올까요.
봄, 어서 오라고 조르면 봄이 어서 와 줄까요.

blanca 2011-02-07 21:45   좋아요 0 | URL
미자 할머니는 시인을 보고도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냐고, 조르고 자기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조르다 한 편을 남기고 떠나요. 죽음을 암시하는 라스트 신이랍니다. 저는 올해부터 봄이 정말 정신 잃을 정도로 기다려지기도 하고 그래요. 이제 정말 좋은 줄을 알겠어요. 신기해요.

비로그인 2011-02-0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궁창 속에 발붙이고 서서, 무지개를 보더라.

-영화를 보신 저희 모친이 하신 말씀. 전 못봤습니다. 저 대신 보고 저 대신 허무하고 후련해 하셔서, 이러한 감상만을 빌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직 안봤지요.

blanca 2011-02-07 21:46   좋아요 0 | URL
쥬드님의 언어감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군요. 시궁창 속에 발붙이고 서서, 무지개를 보더라! 이 영화 보고 나면 참 쓸쓸해져요. 나라서 쓸쓸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인 게 쓸쓸해져요. 다 불쌍하고 슬퍼요. 나이들고 죽음을 앞두고 망각으로 가면 결국 다 사라지고 마는건데 현생은 끊임없이 집착과 끄달림을 부르네요.

2011-02-07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2-0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우리딸이 말해줘서 꼭 보고 싶었는데 깜박했어요.ㅜㅜ
이상하게 '시'와 인연이 안 닿네요.
우리동네 극장에선 안했는데, 작년에 인천갔을 때 내가 다니던 극장에 걸려서 볼려고 했는데
그걸 보면 내가 뵙고 와야 될 분은 못 만나게 되고.... 갈등하다가 영화를 접고 그분을 뵙고 왔어요.
그래도 시를 본 것보다 그분을 뵙고 오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토닥여줬는데...

나도 시를 써본다고 우리동네 대학교사회교육원 시창작반에 디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blanca 2011-02-08 21:1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꼭 보셔야 해요. 순오기님도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시창작반에 다니셨어요? 우아, 그럼 더욱 더 보셔야겠어요. 시창작반 수강생들의 자기 삶 고백 장면은 정말 뭉클하더라구요.

카스피 2011-02-0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영화를 노쳤군요.신문을 안봐선지 요즘 통 TV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 당최 알수 없어요ㅡ.ㅜ

blanca 2011-02-08 21:19   좋아요 0 | URL
저도 신문도 안 보고 티비도 잘 안 봐서 중요한 것들을 자꾸 놓쳐서 영화는 챙겨 보려고 해요. 안그러면 극장을 가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요. '아프리카의 눈물' 같은 프로도 너무 좋더라구요.

꿈꾸는섬 2011-02-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이번에 TV에서 보았어요. 애들 다 보내놓고 한가하게 영화구경해야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이 영화보고 정말 너무 좋았어요. 역시 이창동 감독이다 싶기도 했구요.

blanca 2011-02-10 13:42   좋아요 0 | URL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출신인 걸 몰랐어요. 정말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더라구요. 윤정희의 연기도 참 좋았구요. 구십 살까지 연기하겠다는 꿈 이루어질 것 같아요. 저는 갑자기 이 시대의 배우들한테 필받아서 다 검색해 보고 그랬잖아요^^ 저는 지금 <블랙스완> 기대하고 있어요. 아이 유치원 가고 나면 저 사 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영화가 된답니다!^^

꿈꾸는섬 2011-02-11 23:18   좋아요 0 | URL
이창동 감독의 소설도 전 참 좋았어요.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들도 모두 좋았구요.
윤정희님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죠. 그 절제된 표정과 소녀같은 모습, 정말 멋졌어요.
아이 보내놓고 블랑카님의 자유를 만끽하시길...그런데 아이들 올 시간은 또 어찌 그리 빨리 오는지 모른답니다.ㅎㅎ

후애(厚愛) 2011-02-17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기회가 오면 영화 <시>를 보려고 합니다.^^
잘 지내시죠?

blanca 2011-02-17 23:05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참 좋아하실 거예요. 꼭 보실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팔아요, 팔아. 자리도 비좁고!
아버지는 내키지 않는듯 머뭇거린다.
그래도 할머니가 사 주신 건데......

좁은 집에서 세 형제가 십 년 가까이 방치하고 있던 밤색의 삼익 피아노는 그렇게 실려 나갔다.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 놓는다. 이런 피아노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사실 대체할 수가 없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p.217

 
   

 

만 다섯 살도 되지 않아 피아노 가방에 바이엘을 넣고 가정식 피아노교습소를 들락거리게 됐다. 어렸을 때 너무나 피아노가 배우고 싶었지만 팍팍한 생활로 좌절당한 엄마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 이사만 갔다 하면 제일 먼저 근처의 피아노 학원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딸은 절대음감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버지가 눈물의 피아노라고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던질 만큼 언제나 야단맞고 흐느끼며 피아노를 쳤다. 그 부작용의 여파로 지금도 나는 아이의 의사에 반하는 조기 음악 교육에 반대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피아노 연습하는 게 더 싫고 지겹고 힘들었다. 소질이 있냐, 소질이 있다, 피아노 선생과 엄마 간에는 희망없는 모종의 공모와 속임과 속아줌이 있었다. 콩쿨 예선에서 바로 탈락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소위 좀 쪽팔려서 조금 울고 말았지만 의외로 야단치는 사람도 없고 기대했던 사람도 없었던지 하나의 해프닝이 되어 버린 일.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발표회는 모든 피아니스트 지망생이 제2의 호로비츠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엄청난 신용사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극소수의 독주자만이 정상에 이르러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어린아이에게 재능이 좀 있다고 하면 지레 그런 능력, 그 모호하고 진귀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없이 많은 어린 음악가가 억지로 되풀이하여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그 엄청난 시련을 겪는 체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p.90

 
   

 파리의 한 동네 좁은 거리, 피아노를 수리하고 중고 피아노를 사고 팔기도 하는 아뜰리에를 방문하며 저자는 (작중 화자)는 '피아노'를 살아 숨쉬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유년기의 역사를 오롯이 복원해 내는 하나의 매개체로 다시 만나게 된다. 피아노의 역사, 구조가 지루하거나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고 매우 흥미롭고 평이하게 그려진다. 언제나 한 발치 물러서서 조금은 겁먹은 상태로 바라봤던, 다시 끌려 들어갈까봐 스리슬쩍 도망칠 준비를 했던 피아노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쉬운 연습곡을 조율이 안 된 상태로 다시 치게 되었다. 형편없었지만 색다르고 소중한 느낌이었다. 전적으로 이 책 덕택이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인이 되어 재회한 피아노와의 사연을 담담하게 고백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인다. 중고 베이비 그랜드를 데포르주 공방에서 구입하고 다시 교습을 받게 되며 '나'는 피아노에 헛된 꿈을 투자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거는 대신 '나'를 투명하게 보태고 자기 규율이 주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그건 어린 시절과는 분명 또다른 피아노가 주는 즐거움이었다고 고백한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좌절감을 맛보며 덮었던 바하인벤션은 중학교 1학년때 쉬운 대중음악곡이나 초보용 재즈 연습곡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번성했던 레코드점에서 <라붐>의 주제곡 악보를 삼백원 주고 사와 연습하여 음악 실기 시험 시간에 치며 아이들의 호응을 얻어내며 참 오랜만에 피아노 배우기를 잘 했다,고 으쓱했다. 그런 대중음악들을 연습하기 시작하면 손을 망친다,고 겁을 줬던 사람들도 있었지만(망칠 손도 없었지만) 즐기며 평이한 유행가들을 가끔 쳐대며 유년 시절 울며 억지로 피아노를 쳤던 시간들 덕을 조금씩이라도 봤다. 

   
 

 마지막 화음들이 허공에 머물다 서서히 물러나는 동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가 소유하기는 했지만 결코 정복하지 못한, 언제 보아도 낯설어 보이는 악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음악이 중요했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나는 내 피아노로 어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얼마나 깊은 만족을 주는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그 만족은 무한했고,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영향은 깊디깊었다. 나는 방 건너편에서 피아노를 바라보면서, 그 모퉁이가 텅 비었을 때를 기억해보려 했다. 전생의 일 같았다.
-p.345

 
   

 

텅빈 모퉁이. 그 모퉁이를 채웠던 밤색의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는 지금 어디에서 누군가의 손 밑에서 또다른 의미와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아님 아예 죽어버렸을까. '너'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너가 있었던 그 시간들을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더듬거리며 그리워한다.


댓글(2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02-0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설 잘 쇠셨죠? 쓰신 페이퍼 차분히 읽고 갑니다..
번역도 괜찮고, 영화의 카메라같은 저자의 시선이 높지 않고 편안한 위치여서 부담 없이 푹 빠질 수 있었던 책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책장에서 뽑아 다시 들고 있는데요. 언제인지.. 밤 11-12시쯤 하던 드라마 같은 느낌도 듭니다.

마치 흙속에 묻혀 있던 무엇인가가 나오듯, blanca님의 기억의 알맹이들이 두두둑 나오는 소리도. 잘 듣고 가고요.

(음악도 한 곡 띄울려고 했는데 되질 않네요.. 코드 붙이는 방식이 바뀐것인지.)




blanca 2011-02-05 22:01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덕분이죠. 고마워요. 저는 너무 잔잔해서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요, 정말 말씀처럼 저자의 시선이 참 편안해서 물 흐르듯이 읽히더라구요. 피아노에 얽힌 추억들이 마구 오버랩되면서 참 특별한 독서를 했답니다. 바람결님, 저 이사오면서 컴퓨터 스피커를 버린 게 잘못된 건지 소리가 안 나온답니다. 오디오 카드도 다시 설치해 보고 했는데 정말 알 수가 없네요. 게다가 라디오 클래식 채널도 안 잡히고 참, 총체적 난국 상황이랍니다. 지금 정말 음악이 고파요.

프레이야 2011-02-0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설날 잘 보내셨어요?
저도 피아노를 포함해 악기에 소질 없어요.ㅎㅎ
끈기부족이 제일 큰 원인인 거 같아요.
아주 어릴 적 엄마가 사주신 장난감 피아노가 기억나요.
치면 제법 띵똥띵땅 소리가 그럴싸했어요.

blanca 2011-02-05 22:1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도 잘 보내셨죠! 전 올해부터 조금 일이 손에 익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예체능에 두루 소질이 없답니다. 딸내미는 안 닮았으면 좋겠어요.

2011-02-05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5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2-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정영목 씨 번역 책이군요.
예전에 저는 어렸을 때 피아노 치는게 좋아서 피아노 학원에 가게 되면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네요. 글의 제목처럼
예전 그 때가 그리워지기도 하네요 ^^

blanca 2011-02-05 22:12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참 아쉬워요. 이왕 하는 거 즐겁게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정영목 씨가 은근히 눈에 많이 띄네요. 요즘에 정말 번역자 들을 한 번씩 확인하게 됩니다.

잘잘라 2011-02-06 21:08   좋아요 0 | URL
정영목 씨 번역, 좋아해요^^

다락방 2011-02-0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 아름다운 책을 blanca 님도 읽으셨군요! 반가워요!
:)

blanca 2011-02-05 22:1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다락방님이 이 책 얘기 하셨죠! 그 빵냄새 나는 골목 부분 인용도 해 주셨고요. 차암 좋더라구요. <올리브키터리지>도 이 책도 저를 한 방에 훅 가게 하네요^^ 현대 영미소설을 안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 아주 즐겁습니다. 읽을 책이 왜이리 많죠!

순오기 2011-02-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피아노 얘기에 공감할 분들이 많을 거에요~
나는 피아노를 배우는 세대가 아니어서, 우리 애들에게 답답함을 면하라고 배우게 했지만, 대회는 한번도 안 내보냈어요. 피아노 대회라는 게 어떻게 되는 건지 잘 알기 때문에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참여시키지 않았어요.
피아노 대회에 참가 시키기 위한 피아노 교육의 폐해를 잘 그려낸 <피아노를 쳐 줄게>라는 그림책이 있어요.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는데 포토리뷰로 올릴거지만...

blanca 2011-02-06 21:2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잘 하셨어요. 저희는 잘 모르고 그렇게 힘들게 고생 한 번 진하게 했어요. 그런 그림책이 있어요? 요즘에도 그런 풍경이 사라지지 않았나 보군요. 포토리뷰 기다리겠습니다.^^

2011-02-06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2-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라붐 사서, 연습했었는데... 아하하.

피아노 말이죠, 어릴 때 배우는데 정말 능력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더라구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다시 배우고픈 욕구가 엄청 솟는거예요. 코알라 핑계대고 그럭저럭 괘안은 디지털 피아노를 샀는데,
우리 코알라는 냉큼 피아노 관두고, 저는... 아직두 미련을 못 버려서 언젠가는 다시 배울거야 하는 중~ ^^

정말이지, 지난 날을 생각하면 이젠 전생의 기억 같아요. 에고.

잘잘라 2011-02-06 21:10   좋아요 0 | URL
흐하하하. '전생의 기억'같다는 말, 실감나요. ㅎㅎ

blanca 2011-02-06 21:27   좋아요 0 | URL
마고님도 라붐 ㅋㅋㅋ 저도 그래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즐기며 배워 보고 싶어요. 아이를 위해서도! 디지털 피아노 사셨어요? 저는 피아노가 집에 없어요. 언젠가 또 다시 사게 되겠죠. 저는 어제도 전생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2-0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모니카를 조금 불줄 압니다.패티 김의 '이별'을 연주하면 여자들이 쓰러집니다.

blanca 2011-02-06 21:28   좋아요 0 | URL
노자님 댓글을 저를 빵 터지게 하네요 ㅋㅋ 저보다 젊으신 걸로 아는데 패티 김의 '이별'이라니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1-02-06 23:28   좋아요 0 | URL
으하하...제 애창곡으로는 연령 추정을 할 수 없다니까요.70년대 가요는 물론이고 60년대 가요도 많이 알아요.청소년들보다 최신곡을 더 많이 알고 있기도 하구요.

블랑카 님 또래들도 패티 김의 '이별'은 거의 모르지 않을까...음...길옥윤 씨가 작곡한 노래가 좋은 게 많아요.그리고 정훈희 씨 20대 때 노래 중 '너무나 사랑했기에'(김학송 작곡)는 기타로 연주하면 좋답니다(근데 저는 기타는 못쳐요).한번 검색해 들어보세요.기타 간주가 애절한 곡이랍니다.

잘잘라 2011-02-0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 놓는다.....」 공감 백배, 페이퍼에 몰입해서 어릴때 살던 성북동 개량한옥 작은 방까지 다녀왔어요. 아... 피아노 치구 싶네요. 외워서 칠 수 있는 건 동요 몇 곡 뿐이지만요. ㅎㅎ

blanca 2011-02-06 21:29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성북동 개량한옥이 어린 시절!!! 정말 눈물나게 부러워요. 그럼 어린 시절 한옥에 사셨건 거예요? 지금 언제라도 가보실 수도 있고요? 외워서 칠 수 있는 곡이 저는 없답니다. 무참하지요. 친 세월이 몇 년인데 저는 피아노 조기 교육의 철저한 실패 사례인듯 합니다.--;;

잘잘라 2011-02-07 11:12   좋아요 0 | URL
성북동 그 집, 지금은 없어요.
앞 집에서 우리집을 사서 두 집 다 허물고 3층 건물 새로 지었거든요. ㅜㅜ

blanca님! 피아노.. 아픈 과거(?^^)는 잊고 새로 시작하시는 어때요?
저는 떠돌이 신세라 피아노는 사서 둘 데두 없구,
해서 기타 배울 생각이예요. ^^

blanca 2011-02-07 21:49   좋아요 0 | URL
아아아. 그렇군요....저도 피아노 없어요. 바이올린이나, 해금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이제는 현악기로^^ 클래식 기타 배우실 거예요? 메리포핀스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치시는 날 꼭 페이퍼 올려주세요. 저의 로망입니다.^^

잉크냄새 2011-03-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 하나쯤 연주할수 있으면 인생이 더 풍요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입한 오카리나는 먼지만 쌓이고 있지만요...

blanca 2011-03-15 22:0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오랜만이에요. 오카리나가 먼지에 쌓인 풍경을 어느 집에서도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늦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카리나 소리 참 좋아요.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옮긴 이가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감동이 찾아 온다고 속보이는 칭찬을 하는,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인 작가가 쓴, 그렇고 그런 책인 줄 알았던, 이 책.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마지막 대목을 읽으며 결국 옮긴이의 속보이는 그 칭찬에  동조하게 되었다.  광고회사의 잘 나가는 아트 디렉트였고, 세 번 결혼을 했고, 이제 일흔하나인 그는 오른쪽 경동맥 수술을 위해 수요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그는 아직 떠나고 싶지 않았고, 아니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고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했지만, 심지어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내일을 그렸지만 그는 이제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과거 추억을 복기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머나먼 미래, 그것도 '나'라는 존재가 없어 울 수도 웃을 수도 불평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이상 알아 보고 안아 줄 수도 없는 상황을 섬뜩하고 슬프게 그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있음'을 치우고 난 후에는 그 어떤 것의 의미도 '나'를 걸러 건져 올릴 수 없게 된다. 여전히 남은 사람들은 지겨워하며 일상을 누리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상처를 내는 언사들을 날릴 것이고 영원히 살고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모든 것들을 오만하게 움켜쥘 것이다. 

소설의 처음은 소설의 말미에 희망을 품고 수술실에 들어간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거기에서 목도한 옆침대 소년의 죽음, '에브리맨'이라는 상호의 아버지의 보석가게, 그리고 하필 겨우 서른 넷에 머나먼 얘기인 것 같은 죽음을 의식했던 일 등 그의 죽음 전에 삶을 채웠던 기억의 편린들은 조각조각 그 '있음'과 '없음'의 간극을 메운다. 흔해 빠진 죽음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추상화된, 일반화된, 간접화법으로만 떠오를 수 있는 단어였다. 불멸의 보석을 팔았던 그의 아버지와 그 보석상의 이름인 '에브리맨'과 그는 모두 그 무한한 '무'에 도달한 그 시점에서도 결코 그것과 화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죽음은 부당하다. 논리적이도 유의미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그건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그럴듯한 논거들을 갖다 붙여 정당화해도 그건 다 사기다. 왜냐하면 그것을 얘기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는가. '있음'의 지점에서 '없음'의 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 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 앞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발적인 죽음을 택하고 "좋아"한 것은 불가능하고 도저한 일을 이루어 냈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이지, 모두가 가능한 일은 특히 에브리맨이 가능한 선택지는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이 섬뜩했던 것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을 수긍하지 않는 주인공의 헛된 미망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사회적인 시선으로 매우 성공한 축에 꼈던 사람이다. 전도유망한 아트 디렉트였고 퇴직 후에는 고급 은퇴자 마을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건 우리가 부러워하는 삶의 전형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끝은 역시나 허망하다. 더 허망했다. 

희망을 얘기하고 의미를 덧붙이는 이야기가 날아가고 난 자리에 슬몃 끼여든 이 적나라한 무의미한 삶에 대한 폭로.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정말 그런걸까.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1-02-0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서를 고를때, 역자를 좀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어요.
정영목님은 그런 의미에서 제가 왕 애정하는 역자세요.
그분이 번역하신거면 그냥 읽고봐요, 후회하는 법이 없죠.
그런 의미로 지명도와 다르게 제겐 별로인 분이 김석희 님이세요~^^

참,참,참...참 고우시더군요~
신문을 들추다가 '와락~' 신문을 끌어안았다니까요.
올핸 님을 롤 모델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아요.
(전 일주일에 4권,한달에 열 여섯 권 정도 읽어요.)

님 명절 잘 보내시구요~^^

blanca 2011-02-01 20:50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는 예전에 첨부된 글들은 안 읽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꼭 옮긴이의 글을 읽게 되더라구요. 저는 아직 양철나무꾼님처럼 역자 이름과 성격들을 잘 구분해서 알지는 못해요. 이 책의 감동에 역자의 공도 있었군요. 신문은--;; 그저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양철나무꾼님도 구정설 잘 보내세요!

2011-02-0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2-01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의 소설은 <더 플롯 어게인스트 아메리카>(영문이 안 나오네요 ㅠㅠ)를 사전 찾아가며 따문따문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소설 당기네요. 특히 이 대목이요.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거기에서 목도한 옆침대 소년의 죽음,"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었고, 거기서 앞 침대의 할아버지가 주검이 되어 실려나가는 걸 목도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러니 저로서는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이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명절 잘 쇠세요 블랑카님^^

blanca 2011-02-01 20:52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정말 그런 경험이 있으셨어요? 그럼 꼭 꼭 반드시 읽으셔야 합니다. 분량도 얇고 재미도 있어서 시간도 별로 안 걸려요. 후와님의 평이 꼭 들어보고 싶어요. 게다가 주인공과 같은 추억의 공유라니요. 후와님도 즐겁고 따사로운 명절이 되시기를...

비로그인 2011-02-01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우선! 양철님의..
-> 신문을 들추다가 '와락~' 신문을 끌어안았다니까요.

이 신문은 경향신문이겠죠? 아~주 익숙한 주소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ㅎ
그런데 이게 네 번하고 끝이라니,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좀 더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도 괜찮을 것 같던데..^^

음. 왠지 남기신 글은, 요새 좀 집중해서 보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다룬 영화의 장면을 닮은 것 같아서 마음에 닿습니다. 새벽에 앉아 있으려니 술이 덜 깬 것 같아 머리속이 어슴푸레 하지만, 그 영화의 색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네요.


blanca 2011-02-01 20:54   좋아요 0 | URL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솔직히 참 힘겹게 읽었어요. 분량도 너무 많고 나중에는 좀 집중이 안되더라구요.(재미가--;;)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맘 한켠이 어찌나 시리던지. 아이를 두고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맘이 감히 상상이 안되더라구요. 영화를 봤으면 더 저릿했겠죠. 기네스 펠트로가 아이들을 그네에 태우며 미소짓는 장면 캡쳐한 것만 봐도 슬프던걸요. 그건 저도 나중에서야 제가 끝인 줄 알았답니다.^^;;

마녀고양이 2011-02-0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말이죠, 경향신문 가서 바로 찾았어........ 방금여~
흐흐,,,,, 봐따봐써. 언제 했대여... 아이 이쁘당.... 반가와요.

음, 책 리뷰 보고, 있음 없음에 뭉클해서 생각에 잠기다가 댓글 보고
검색하고 그 바람에 그 감성 다 날아갔네... 어쩔 수 없어요. 즐거운 설 연휴!!

blanca 2011-02-01 20:55   좋아요 0 | URL
마고님 ㅋㅋㅋ 저 느무느무 부끄럽고 그래요. 잊어주세요--;;; 내일 가열차게 일할 예정입니다. 마고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2011-02-01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2-0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국문학 작품을 읽게 되면 번역가 이름과 이력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유독 정영목이라는 분의 역서를 많이 읽었던거 같아요.
지금도 민음사 <오스카 와일드 단편선>을 읽고 있는데 이 책 번역 역시 그 분이더군요 ^^
제가 아는 분도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을 강추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어요.
최근에 <울분>이라는 제목의 신간도 나왔더군요.
설 연휴 잘 보내시구요,, 명절 증후군 조심하세요 ^^

blanca 2011-02-03 22:46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읽는 책도 정영목시의 번역이네요. <오스카 와일들 단편선> 좋은가요? 궁금했는데. 시루스님 아주 자알 보냈습니다. 힘좀 썼죠 ㅋㅋㅋ 생각보다 안 힘들어서 제 저질체력이 개선되었나 좋아하고 있답니다. 시루스님도 잘 보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