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현실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픽션을 더이상 읽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한 이가 누구인지 도저히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는 이미 현실 안에 가두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고 또 그 핏줄에 왕위를 물려 주고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 영조와 우리는 고작 삼백 년도 떨어져 있지 않다. 작품 전체에서 비누 냄새의 환영을 불러 일으켰던 <젊은 느티나무>의 강신재 작가가 <혜경궁 홍씨>를 집필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혈질이면서도 솔직하고 매력적인 사도세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내었다. 상당 부분 픽션이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영정조 시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는 깜찍한 이재은이 혜경궁 홍씨의 아역을 연기해 내어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은 시대사극 <하늘아, 하늘아>가 한창이었다. 뒤이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도 더듬더듬 읽게 되었다. 남편을 잃고 친정 식구들마저 아들의 손에 의해 간접적으로 몰살당하다시피 하게 된 구중궁궐 속 여인의 하소연이 눈물겨웠다. 게다가 아들마저 앞세우게 되는 그녀의 삶을 머리로보다는 감정적으로 동정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남편의 죽음에 있어 혜경궁 홍씨와 그녀의 친정 일가가 행사한 영향력이 거의 주도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든 정말 심한 정신병력 때문에 도저히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든 사도세자의 최후는 아들 정조에게도 오늘날 남은 우리들에게도 심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세손이 대리청정한 지 약3개월 후인 영조 52년 3월 초, 영조의 병환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영조도 세월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손이 영조 옆에 붙어서 감귤차와 계귤차를 올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맥도가 가망이 없어졌으니 마지막으로 좁쌀 미음을 쓰자는 의관의 말에 세손이 미음을 떠서 올렸으나 영조는 이를 받아먹지 못했다. 종말이 다가오노 것이다.  
 도승지이자 약방 부제조인 서유린이 세손에게 청했다.
"궁성을 호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손은 울면서 답하지 않았다. 서유린은 어탑 앞에 나아가 영조에게 유교를 쓸 것을 청했다.
"전교한다. 대보(옥쇄)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드디어 기나긴 장정이 끝이 났다. 비극으로 점철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중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무력하게 목도하며 울먹여야 했던 소년의 시대가 개막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 선포는 아버지를 죽게 했던 반대 당파 세력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내뱉은 경고가 아니였다. 정조가 위대해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노론을 껴안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에겐 정치가 목적이 아니라 백성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살게 하는 통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군주였다. 

 

 

 

 

 

 

 

중추의 권력을 소유한 자가 귀를 여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일단 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나' 아닌 '너'는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을 뛰어넘은 이들은 아주 드물고 그래서 역사에 기록된다. 정조가 적서 차별을 철폐하고 심지어 노비 해방의 꿈을 꾸고  당시의 글좀 읽었다는 고루한 선비들이 더없이 위험하다고 경기를 일으켰던 서학에까지 관용을 베풀고 귀를 열었던 것은 어쩌면 언어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참극 속에서 이룬 성장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 그 비극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그의 삶은 통치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참으로 경탄스러운 것이다. 고난에 함몰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뛰어넘는 것은 결단과 양보가 필요한 일이다.  

 

정조가 설계하려 했던 미래와 미완의 꿈을 훔쳐 보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제대로 추모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묘소를 옮기는 사업을 계획한 것이 화성 건설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화성은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배후 도시로 선진농법을 도입하고 각종 상업 활동을 장려하고 군사도시로서의 체계를 갖추며 제2의 수도로까지 도약을 준비하게 된다. 정조는 상왕이 되어 화성에 내려와 자신이 노후를 보낼 계획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이 1997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그 성곽 안에 녹아있는 정조의 열망, 꿈, 희망, 백성들의 땀, 노고 들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다. 신도시를 건설하기까지 숙고를 거듭하고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신속하고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배려한 점, 이름이 없었던 노동자들에게 이름 하나 하나를 다시 호명하여 기록하고 그들의 땀에 걸맞는 대우를 해 주려 노력했던 모습 등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조의 이루어지지 못한 꿈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 앞에 떨어진다. 이 시대를 보고 정조는 과연 어떤 얘기를 할까. 

   
  그러나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가니 그 괴로움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정조어찰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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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1-06-0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지원, 정약용에 관련된 책들을 보다가, <정조>까지 갔답니다. 어쩌다 조선후기로 들어와버려서,^^ 도서목록에 있는 것들 좀 정리되면,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참, 저는 박시백의 만화로도 즐겨본다지요.

blanca 2011-06-08 21:28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안 그래도 박시백을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답니다. <순조실록>이 어떨까 싶어서요. 저는 채제공에 관련된 책을 찾고 있는데 없어서 좌절하는 중이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시백 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이덕일 씨 해석을 비판했죠.

이덕일 씨의 사료해석의 오류 등은 여러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특히 정병설 씨가 본격적으로 조목조목 파고 들었죠.<사도세자의 고백>을 집중 비판하고 있습니다.역사비평 2011년 봄호에 논문으로 나와있는데 인터넷에도 대강은 볼 수 있으니 관심있으시면 '정병설'을 검색해보세요.

blanca 2011-06-09 18:1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이덕일을 비판하는 학계 의견이 많더라고요. 사도세자 관련 부분은 좀 과도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저는 사도세자에게 통제 불가능한 정신병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부분도 그렇고요. <영원한 제국>의 이인화도 남인 계열 후손이라 그런 소설을 썼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이 부분은 제가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내내 생각했던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 읽어 보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9 23:16   좋아요 0 | URL
<영원한 제국> 부록으로 실린 이문열 글을 보면 남인 후손들의 시각을 알 수 있죠.또다른 부록인 도날드 베이커의 글도 재밌고요.

요즘은 강이천이나 이옥 등 정조의 탄압을 받은 인물에 대한 책도 나오고 하니까 기존의 정조찬양 흐름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관심이 갑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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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의 마침표는 다른 책이다. <쿠오 바디스>는 1세기 로마의 네로 시대를 그리고 있지만 정작 작가 시엔키에비츠는 폴란드인이다. 말미의 작품 해설에는 시엔키에비츠의 <등대지기>라는 단편 소설 얘기가 나온다. 폴란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소설이며 국정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도 영감을 줬다는 그 얘기를 찾아 헤매다 이 책을 만났다. 

짧은 얘기로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듯이 단편소설은 '제약'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미완으로 끝나는 한계를 가진다. 그런데 그 한계 안에서 처절한 성공을 거두게 되면 응축된 얘기에 삶의 정수를 '찡'하게 추출해 낼 수 있다. 굉장히 어렵고 드문 일이다. 어렵고 드문 일을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웬만해서 몰입하기 힘든 단편 하나하나에 푹푹 발이 빠졌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3국에 120여년 동안 분할점령되었던 역사,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었던 나치의 침공하에 아우슈비츠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증언적 위치 등이 폴란드적 정서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체험은 이야기 곳곳에 점점이 들어와 박혀 '생'에 대한 조금 더 음울하고 관조적인 시선을 불러낸다. 깊고 오묘하고 슬픔에 찬 눈동자를 통과한 이야기이다. 

얼음처럼 서늘하고도 깊은 전율과 함께 앞으로 그가 절대 목격하지 못할 수많은 영상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거대한 초록빛 대양, 야자수와 섬으로 가득한 푸른 바다,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대지, 항구와 마을에 있는 여인들, 그가 만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에 없고, 앞으로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 <자작나무숲> 중  

폐결핵에 걸려 자작나무숲 형 곁으로 돌아오는 동생이 죽음 앞에서 자신이 놓칠 것들을 하나씩 셈하는 동안 잠시 망연했다. 그가 절대 목격하지 못할 것들을 나는 목격하고 있는지. 내일이라도 당장 볼 수 있는 건지. 초록빛 대양, 만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되려 삶을 황홀하게만 느끼게 되는 스타시 앞에서 잠시 부끄러워졌다. 조금 더 관능적이고, 조금 더 정열적으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게 만드는 얘기.  

"제 아이가 아닙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아니예요!"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뛰어간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싶은 것이다. 트럭을 타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걸어서 수용소까지 가게 될 사람들 틈으로, 계속 살아남게 될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건강하다. 그녀는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악을 쓰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엄마, 엄마, 가지 마!"
"내 아이가 아냐, 내아이가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표제작. 이 수용소 안에 눈물어린 자기 희생적 모정은 없다. 아이와 함께 가스실로 가는 대신 살고 싶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분홍빛의 통통한 뺨을 가진 천사 같은 아이를 뒤로 하고 태연하게 걸으려 애쓴다. 내 아이가 아니라고 절규하면서. 인간에 대한 지극히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시선. 하지만 생에 대한 절절한 끄달림. 시린 바람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꿈꾸며 아이의 옷가지들을 세탁하고 기차 안에서 아이를 목욕시키던 프리모 레비의 어머니들은 여기에 없다. 프리모 레비의 절규는 오히려 여기에서 공명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인간이기에 살고 싶고 살고 싶기에 생의 미덕들을 포기하게 되는 역설적 비극이 젊은 작가의 푸르스름한 눈빛 앞에서 흔들린다.

이 이야기들의 마침표는 <자작나무숲>의 작가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에게서 빌려온다. 모든 것은 그림처럼, 혹은 음악처럼 아름다웠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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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6-02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추천해주시니 꼭 읽어보고 싶은데 우울해질까봐 걱정이네요ㅠㅠ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blanca 2011-06-02 22:18   좋아요 0 | URL
후와님, 꼭 읽어 보세요. 정말 대단해요. 번역도 너무나 좋고.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단편들을 만났답니다.

양철나무꾼 2011-06-0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너무 좋단말이죠~^^
전 장편이나 대하소설을 선호해서 단편은 잘 안 읽는데...님의 추천이니 한번 읽어보기로 하죠~^^

아, 자작나무~^^

blanca 2011-06-04 23:18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들어 단편에 대한 그 미진함, 또 아무래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정말 콩트 수준으로 전락해 버리는 그런 면에 거부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왜 사람들이 추천했는지 알 것 같더라구요. 양철댁님도 참 좋아하실 거예요. 굉장히 차분하고 관조적인데 또 지루하지도 않고 아주 독특하답니다.

북극곰 2011-06-0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은 나랑 아니구나...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왠지 이건 끌려요. 읽어볼게요.

blanca 2011-06-08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 책은 참 괜찮더라구요. 리뷰 평점이 후한 이유들이 있었더라구요. 잘 읽히고 아름다워요. 추천드립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참나물을 데쳤는데 기대했던 쌉싸래한 고소함 대신 씁쓸한 첫맛만 남고. 늦은 낮잠을 잘못 잔 아이는 옆에서 울며 아우성이고. 옆지기님은 '나. 가. 수' 볼륨을 이십 이상 올려 놓고 정작 보지는 않고 화장실 들어가 나올 생각은 않고. 탱탱하게 찔려고 했던 가지는 열어 보니 완전 물컹하니 진이 나오고 있고 베어 물 때마다 아예 "난 가지였던 거지. 지금 가지는 아니야."라듯이 그대로 바스라져 차마 먹을 수 없고. 

두 시간의 사투는 고작 병어 조림 하나에 자기 먹을 건 없다고 징징대는 아이와 배탈 나서 밥 먹기 힘들다는 옆지기. 참으로 진뜩진뜩한 일요일밤. 우리는 교보로 갔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교보에 와버리는 센스. 나는 언제나 서점에 나를 데리고 오는 사람앞에서 무장해제된다. 이순신장군 앞 밤에 색색깔로 피어 오르는 바닥분수. 아이들은 그 밤에 옷을 적시며 물놀이를 한다. 아. 름. 답. 다. 

1년은 금방 가겠지? 
아니. 행복한 1년은 금방 가지만 내가 예전에 괴롭게 경험했던 1년은 진짜 하루가 천년 같더라. 

항상 이게 지나고 나면 더 좋은 다음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인생은 또 이게 지나가야 하는 '다음'으로 목을 내밀고 기다리게 한다.  

 

너무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축지법 같다. 정말 독특한 문체들. 과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눈에 보일 것 같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손으로 닿을 듯한 묘사들. 그래서 되도록 천천히 읽는다. '초콜릿처럼 검고 잘 다져진 땅'이라는 문구에 줄을 긋고 그런 땅을 상상해 본다. 엉뚱하다. 갑자기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지 않은 걸 기억해 내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분수를 바라보는 나에게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어젯밤. 

"이거 매일 이렇게 틀어줘요?" 

"잘 모르겠는데요. 저도 오늘밤 처음 봐서..." 

"오늘 다들 처음 왔구나. 나처럼." 

아주머니는 괜히 막 웃는다. 어렸을 때는 낯선 사람이 쳐다 보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한 마디, 두 마디씩 나누고 기분좋게 뒤돌아 서는 게 좋다. 끈끈한 게 나쁘지 만은 않다. 쿨한 게 항상 미덕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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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3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웃님들 글에서 유난히 '무장해제'라는 말을 많이 읽었어요.
나는 평소에 무엇으로 무장하고 살고 있나, 생각하다가 금방 생각이 안나서
너무 무방비상태로 사는거 아닌가도 싶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참 어이없게도, 온통 '나는 옳다'로 무장하고 있네요.
이렇게 바보같을 수가 없네요.

blanca 2011-05-30 22:35   좋아요 0 | URL
무장해제. 그런데 메리포핀스님, 저는 너무 자주 무장해제를 해서 문제랍니다.^^;; '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일까요? 그런데 또 들여다 보면 저도 항상 '나는 옳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마녀고양이 2011-05-3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부러운걸........
물어보지도 않고 교보로 와버리는 센스있는 남자와 사는 누가. ^^
난 같이 가자고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가는데염. 크크.

나이들수록 약간은 끈끈한게 나쁘지 않아요, 그죠? 오늘 과하게 공감하고 가염~

blanca 2011-05-30 22:36   좋아요 0 | URL
ㅋㅋ 어제 안그래도 너무 덥고 이래저래 짜증 나 있었는데 그냥 책냄새 맡으니 다 사그라들더라구요. 맞아요. 한동안 쿨한 게 최고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는 좀 적당히 엉겨 붙는 맛이 좋아져요. 진짜 '아줌마'처럼 되가나 봐요^^;;

세실 2011-05-3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참나물의 독특한 향이 아직은 싫어요. 희한하죠?
광화문에 분수도 있군요. 밤에 가면 시원해서 좋겠어요.
맞아 짜증날때 서점가면 좋을꺼 같아요. 왜 그생각 못했지? ㅋ

blanca 2011-05-30 22:3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도 예전에는 그 쓴 뒷맛이 참 싫었는데 요새는 중독 증상이 오더라구요. 그런데 어제 참나물은 참 너무하더라구요. 완전 쓴...한동안 들여다 보지 않게 될 것 같아요.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려 다 버리니 어찌나 기분이 우울하던지요. 맞아요. 세실님은 특히나 더 잘 어울리십니다. 서점에 고운 사서분이 가시면 근사한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요^^

카스피 2011-05-3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날씨가 후덥지근하니,이젠 정말 분수를 찾을 시기가 온것 같네요^^

blanca 2011-05-30 22:3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정말 오늘도 역시나 어찌나 더운지. 선풍기를 껴안았네요. 오월 말에 선풍기를 벌써 꺼내 보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아요. 커피도 이젠 다 아이스만 먹게 되네요.

비로그인 2011-05-31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구멍가게 처럼 골목 모퉁이마다 작은 서점이 있었죠. 크시옹스카, 하고 살짝 부를 때면, 입 속에 민트가 있는 기분. 겨울 숲 속에서 봄바람을 꿈꾸는 민족.전 무조건 사랑해요.

blanca 2011-06-01 21:44   좋아요 0 | URL
골목 모퉁이마다 서점이 있는 나라. 크시옹스카가 무슨 뜻일까요? 독일인가요? 전 무조건 사랑해요,라는말이 참 달콤하게 들리네요. 곳곳에 서점이 있고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는 풍경이 있는 곳이 그리워져요.

like 2011-05-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종문화회관의 야외커피테이블에서 분수 내려봐도 좋더라구요.^^

blanca 2011-06-01 21:45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딱 그 전망이 되는 곳을 봤어요. 아마 제가 본 곳이 like님 가셨던 곳일 것 같아요. 당장 실천해 보고 싶어지네요....

like 2011-06-03 22:54   좋아요 0 | URL
오늘 교보앞을 지나쳤는데, 작년에 없던 이상한 tv가 전망을 막고 있더라구요. 서울시의 예술적감각은 정말,,,

cyrus 2011-05-3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있을 때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가지 않은데,, 여기서는 시간이 금방 가는거 같아요,
무더운 날씨의 여름이 다가오고 있고 2학년 1학기도 이제 끝나가네요 -_-;;
옆지기님과 함께 교보에 들리는 모습, 글에너사마 화목한 두 분의 모습이 보이네요 ^^

blanca 2011-06-01 21:47   좋아요 0 | URL
cyrus님 예전 회사 남자 동기들이 힘들면 무조건 군대에 있는 걸로 치자,고 서로들 얘기하면서 격려하는 모습에 제가 군대를 다녀 온 듯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정도로 힘들었단 얘기였겠지요. 아, 벌써 그렇게 되네요. 아, 2학년으로 복학하신 거군요. 그럼 아직도 유예기간이 좀 있으니 이번 여름방학 때는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도 가시고 좋은 추억도 만드시기를... 그 젊음이 시간들이 가능성들이 참 부럽게 느껴집니다.

꿈꾸는섬 2011-05-3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물을 데쳤다는 글에 얼른 들어왔어요.ㅎㅎ
전 참나물은 그냥 무쳐 먹는게 더 맛있더라구요.^^ 특히 고기 먹을때 먹으면 정말 좋던걸요.ㅎㅎ
근데 블랑카님 멋진 남자랑 살고 있었군요. 부러워요.^^ 근데 애는 감기 안 걸렸어요?

blanca 2011-06-01 21:47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그냥 무쳐 먹을 수도 있어요? 오, 그런 거군요. 흑, 벌써 공주님은 수족구가 왕림하사 며칠 집에서 저랑 칩거했답니다.

하늘바람 2011-06-0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물
음 저도 뭔가 오늘 나물 거리를 데쳐야겠어요
너무 반찬이 없어서리

blanca 2011-06-01 21:48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저도 이 세상 최대 고민이 무엇을 해 먹을까 랍니다. ㅋㅋㅋ 반찬은 항상 없어요--;;

하늘바람 2011-06-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언제나 서점에 나를 데리고 오는 사람앞에서 무장해제된다
그런데 그분이 옆지기라는 거지요?
흥 샘나서 흑흑

blanca 2011-06-01 21:48   좋아요 0 | URL
ㅋㅋ 어쩌다예요.

비로그인 2011-06-05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저도 오늘 또 다음을 외치게 될 것 같습니다. 일요일 일곱시. 그 시간을 보낸 다음에 말이지욥 ^^
blanca님 여름이 더 다가오기전에 즐거운 하루 되세용 ~

blanca 2011-06-07 21:2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오랜만이에요. 요즘 초여름 날씨가 끈끈하지 않은 청량감이 있어 참 좋네요. 어디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항상 '다음'을 기대하기 때문에 삶도 지속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어떻게든 정호 오빠의 집을 들를 구실을 마련해야 했다. 거기에는. 

노란 계림문고의 <소년소녀세계명작문고> 전집이 완비되어 있는 서가가 정면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핏하면 이 구실 저 구실로 책을 빌려가는 게 고작 아홉 살 먹은 계집아이를 영 당당하게 못 만들었다. 그래서 괜시리 여동생을 대동하고 딴 소리를 해대며 그 집을 드나들었다. 오빠는 지금 생각하면 깜찍하게도 대여 장부를 만들어 동네문고의 사서처럼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그런 기억들 투성이다. 저 아이는 내가 미처 가지지 못한 계몽사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반절 삼십 권을 가진 아이구나. 심지어 저 아줌마는 좋겠다. 책이 많아서.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너무 참지 않아도 되는 경제력을 가지기를 소망했었다. 책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같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 지점을 넘어서는 경계선에는 독서가 더 무르익고 내가 더 숙성해야 하고 내 삶이 조금 더 많은 깨달음을 품고 나아가야만 뛰어 넘을 수 있는 뜀틀이 엉버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체육시간에 걸핏하면 뜀틀 위에 앉아 버리는 기염을 토했던 기억이 난다. 훌쩍 넘어 착지를 하는 상상과 그러지 못한 데에 대한 좌절감과 웃어버리고야 마는 또래들에 대한 수치심 같은 것들이 뒤엉켰던 그 기억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나, 그리고 비슷하거나 그닥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구름판이다. 그냥 맨땅에서 발을 굴러 저 높은 뜀틀을 넘어 보려 했던 우리들에게 법학자 조국, 자연과학자 최재천, 섬진강 시인 김용택, 북디자이너 정병규,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사진작가 배병우, 건축가 김진애, 승효상, 출판 문화인 김성룡, 영화감동 장진, 바이올리니스트 조효범, 전통 공연예술 연출가 진옥섭,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들이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고 구르는 기분은 정말 금방이라도 하늘 천장에 손을 뻗어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기대 이상이었다. 일면식도 없이 누가 나에게 자신의 서재를 속속들이 보여주고 자신의 유년을 고백하며 눈물짓고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책의 목록을 기탄없이 건네 줄 것인가. 게다가 그 사람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온 삶에 자족하고 스스로에게 떳떳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걸어간 길을 더듬어 보는 것은 내가 앞으로 걸어갈 거친 길들을 조금은 부드럽게 매만지는 일과도 같다. 책을 읽는 일과 삶을 사는 일을 혼동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저 다 용서받고 용인받을 수 있을 것 같은 활자 박아 넣기도 무모하거나 어떤 한 곳으로 치우쳤을 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음을 소스라치게 깨달을 수도 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껍질과 벽을 깨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독서의 힘에 대해 얘기한 조국. 책이 책을 사도록 만드는 경계선까지 가야 비로소 독서의 재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조언하는 북디자이너 정병규. 책만 보고 사람과 소통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효재의 손가방에는 놀랍게도 항상 <천재유교수의 생활> 만화가 들어있단다. 사진작가 배병우는 피사체의 본질을 알지 않고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독서에 천착한다고 한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책과 미친듯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반가웠다. 인생의 궤적과 독서의 궤적이 묘하게 오버랩되는 자신들의 서재를 기꺼이 열어 젖히고 독자들을 기꺼이 환대하는 모습이 참 따사롭기도 했다. 책을 열고 또 서고를 두드리고 서가에 손가락을 얹어 먼지 얹은 책 등을 매만지는 느낌은 또 어떠한가. 항상 책을 펼치는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가 이미 되어 있고 자신들의 말과 삶이 언제나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너그러운 조언들. 귀에 거슬리지 않고 바로 가슴으로 들어와 박히는 얘기들. 사람들은 대꽃을 좋아하지만 대꽃이 피면 대나무는 모두 죽기에 유년시절 고향에 핀 대꽃은 가슴에 박힌 대못이 되었다는 진옥섭의 회환어린 고백에 결국 주르륵 줄을 그음으로써 너저분한 간지들은 옹색해 보이게 됐다. 처음부터 그래도 되었을 것을 괜시리 책에는 함부로 줄을 치지 못하는 그 설명하기 힘든 주저는 내가 책에, 또 삶에 가지는 하나의 망설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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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5-2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 계몽사 디즈니동화전집을 가지고 있었어요. 신데렐라, 정글북, 아기사슴 밤비,,
지금도 디즈니의 일러스트가 기억이 남네요, 아직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때는 디즈니 만화라면
정말 좋아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세상을 점차 알게 되니 지금의 디즈니는 미국적, 상업주의적 이미지만
먼저 떠오르네요 ^^;;

그리고 저도 친구나 친척 집에 가면 항상 보는 것이 서재랑 냉장고 안인데요.. ^^;;
그 집의 서재에 재미난 책이 있으면 항상 들리게 되면 꼭 읽고 가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촌형 집에 가면 웅진씽크빅에서 만든 어린이자연과학 시리즈가 잇었는데 자주 읽었는데,,
오늘 블랑카님의 글을 읽으니 어렸을 때의 서재에 대한 추억이 나네요. ^^

blanca 2011-05-27 21:29   좋아요 0 | URL
아, 그거 기억나요. 그리고 지금도 비슷한 게 또 나온답니다. 저도 약간 디즈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세대를 넘어 참 좋아하네요. 지금 저희 꼬맹이는 디즈니 공주 시리즈에 완전 홀릭해 있답니다. 어린이자연과학 시리즈도 기억나요. ㅋㅋㅋ 다들 비슷하군요.

아이리시스 2011-05-2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맹이는 몇 살이예요? 이 책은 요즘 광고가 '핫'해서 여기저기서 참 많이 봤어요. 이젠 남의 서재보다 내 서재에만 집중해야지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건 나올 때마다 보고 싶어요. 저도 책에 줄을 못 긋는데 그건 책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귀찮아서이기도 해요. 히히. 요즘은 어릴 때보다 책보관 욕심은 거의 줄었고 제가 읽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요. 블랑카님은 단어선택이 참 예뻐요. 조근조근하다고 늘 생각했는데 뭐랄까, 오래 고민해서 타이핑 한 그런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blanca 2011-05-30 12:17   좋아요 0 | URL
다섯 살이요^^. 저도 이런 책 넘 좋아해서 뻔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매번 구입하게 되네요. 그런데 이번 것은 서재 그 자체보다 각자의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 더 참신했던 것 같아요. 참 좋더라구요. 조근조근하다는 말 참 이쁘네요.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님.

비로그인 2011-05-28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절판인, 어떤 책 한 권을 생각하게 하는 blanca님 글입니다. ^^
그 책만 떠올리면 안개낀 모두 조용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이 생각나는데, 나와 그 느낌 둘이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이 책은 읽거나 들춰 보진 않을 것 같지만요. 그래도 왠지 가깝게 느껴지네요.

blanca 2011-05-30 12:1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잘 지내시죠? 하늘은 이쁜데 공기는 나날이 끈끈해 지네요. 저는 건조하고 시원한 공기가 좋은데. 어쩔 수 없이 또 여름을 맞아야 하나 봐요. 절판된 책. 안 그래도 교보문고 가니까 그런 책을 개인별로 다시 만들어 주는 코너가 있더라구요. 어떤 책이었을까요....

마녀고양이 2011-05-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악! 책을 요즘 거의 읽지 못 하는 저로서는
책을 구매할 의욕조차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집에 쌓여있는 책이 저주스러워요, 요즘~ 부들부들.

그런데 이거 참, 저는 책에 죽죽 줄을 긋거든요. 그 글귀에 줄을 못 그으면
내 책 같지 않은거예요. 빌려 읽기도 싫어하구요, 내 책이어야 해요. 그게 제 삶에 대한 태도일까요? ㅋ
큰일이야........ 무소유를 지향해야 하는뎅.

blanca 2011-05-30 12:20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정말 한창 바쁘시죠! 저도 요새 이상하게 한 권 읽는데 한 일 주일은 걸리나 봐요. 하여튼 정말 슬럼프 같아요. 커피는 다시 막 쏟아 붓고 있어요 ㅋㅋㅋ 위가 괜찮아지니 역시나...요새는 제가 제 자신을 못 믿겠어요. 무소유. 저는 죽을 때까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되도록 요새는 두 번 안 읽을 책은 바로바로 중고책으로 처분하려고 하고 있답니다. 자리를 만들어 줘야 다음 책이 올 수 있으니까요. 책꽂이가 이제 없답니다.--;;
 

내부순환로를 지치는 차들의 헤드라이터의 불빛이 노면에 방울 방울 번져 서로 섞이는 날, 베란다를 내다보면 그 날이 비가 오는 날이다. 도로에 둘러싸여 산다는 건 무척 이색적이고 낭만적이고 동시에 성가신 일이다. 월요일 아침, 줄지어 서서 굼뱅이처럼 기어가는 차들에서는 절로 월요병 냄새가 풀풀 날린다. 금요일 오후 느릿느릿 밀리는 차들의 뒷꽁무니에는 주말의 휴식과 아껴둔 약속들의 기대가 겹친다. 

오늘도 헤드라이터의 불빛은 바닥에서 물기로 번진다. 근처 대학교 서점에 가서 백만년 만에 핑크 표지의 잡지를 집어 들었다. 패션 잡지의 표제기사에는 폴오스터, 아멜리노통 등 14인의 위대한 이야기꾼들에 대한 기사가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패셔니스타와는 담을 쌓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도발적인 눈매의 여배우가 노려보는 엘르를 들고 집에 왔다. 엘르와 나는 어울리지 않지만 가끔은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책과 작가들과 관련된 얘기들로 나를 매료시킨다. 몇 해 전에는 작가가 된다는 것에 그 어떤 문예지나 단행본보다 심도있게 리서치를 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만드는 사람들 중에 분명 탐서가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강력하게 든다. 캣워크를 하는 매력적인 모델 사이로 책에 대한 진지한 얘기들을 발견하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방 안에 혼자 있었다"는 폴 오스터는 담배 연기 속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폴 오스터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물론 시도해 보려는 생각은 있지만 매번 주문 전에 그는 정작 10년 동안 읽지 않았다는 서평을 참고로 다음에 읽을 것을 기약한다.  

   
 

 글 쓰는 건 참 이상해요. 병에 걸린 것 같죠. 어릴 때 글쓰기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절대 고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써야만 하죠. 쓰지 않고서는 사는 게 아니었어요. 

-폴 오스터. ELLE와의 인터뷰 중

 
   

 

이 바이러스에 시간과 강도의 차는 있지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감염된 파울로 코엘류, 아멜리 노통, 조너선 사프란 포어, 알랭 드 보통이 차례로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자신들의 그 숙명적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풀어 놓는다. 물론 아주 쉬크한 흑백의 초상화들과 함께. 맘씨좋고 너그러운 인상의 할아버지 파울로 코엘료는 페이스북, 트위터와 온라인 스토어를 부지런히 활용하여 독자들과 소통한다고 한다. 아멜리 노통은 글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싶어 하루 실험해 보고 사춘기 계집애처럼 마음이 널을 뛰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토로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글쓰는 일을 매일 그만둬야지 한단다.(세상에!)
 

다들 책에 대한 관심이 스러져 가고 있고 작가의 사생활을 궁금해할 파파라치가 별로 없는 세태를 절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책과 활자, 창작에 의해 선택 당하고 만 숙명에 굴복한다. 쓰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단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살기 위해 써낸 것들을 손에 쥐고 씌어 지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채굴하는 기쁨이 읽는 행위의동인이라고 해도 될까?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뇌쇄적인 눈빛의 표지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면 작가들이 끊임없이 천착하는 생의 유한성과 허무는 영원에 대한 끌 수 없는 기대를 끄집어 내게 한다. 모든 모순, 대립, 한계가 한데 뒤섞여 있는 것 같은 잡지 한 권을 읽고 나니 왠지 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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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블랑카님의 이 글을 자신들의 잡지에 싣고 싶어 하는 편집자들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 블랑카님 같은 고급 독자들까지 매료시키기 위해 말이죠^^

blanca 2011-05-23 10:18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저 비행기 태워주시네요. 안그래도 대부분이 꾸물한 봄하늘, 지지부진한 감기, 할 때마다 떨리는 운전, 등으로 의기소침한 저에게 감사합니다.^^;;

stella.K 2011-05-2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어울리기는 내가 더하지 싶은데...
잡지라곤 거의 안 사 보는데 정말 블랑카님 덕분에
이건 저도 사 보고 싶어졌어요.^^


blanca 2011-05-23 10:19   좋아요 0 | URL
ㅋㅋ 스텔라님, 엘르 편집자가 아무래도 정말 책을 좋아하나 봐요. 몇 년 전에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기사는 정말 엄청난 분량과 깊이를 자랑하더라구요. 어찌나 재미있게 읽었던지. 외국 작가들도 수시로 인터뷰하고. 득템이라니까요.

비로그인 2011-05-2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저 패션을 사랑해서 보그를 매달 사서 읽어요. 비행기 탈 땐 꼭 보그를 손에 쥐고 있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저, 그것들은 아름다우니까요.
참고로 코스모폴리탄이나 슈어, 다른 잡지들 보다는 보그나 그나마 엘르만 보는 이유는, 그들이 남자에게 잘 보이는 법 보다는 패션, 런웨이, 시즌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나마.

blanca 2011-05-23 10:20   좋아요 0 | URL
아, 보그! 저도 사실은 패션잡지를 참 좋아했어요. 심 대부터. 이뻐서요. ㅋㅋ 잠깐 나왔던 탑모델이라는 잡지도 열심히 읽고. 그러나 저는 전혀 패셔너블하지 않지요. 코스모폴리탄은 이제 못 보겠어요. 연령대가 이제 안 맞는 것 같아요.엘르는 여전히 참 좋네요. 저는 언제나 쥬드님의 실물이 참 궁금합니다. 세련되고 이쁜 여인일 것 같아서요.

비로그인 2011-06-01 12:48   좋아요 0 | URL
저는 차갑고 부서질 것 처럼 생겼대요. 최근에 저를 본 사람이 그랬어요.
예쁘다거나 못생겼다보다, 이 형용사들이 더 좋았어요.

blanca 2011-06-01 21:49   좋아요 0 | URL
더 궁금해져요. 그리고 옆 사진을 봐도 선이 참 가늘고 섬세한 모습일 것 같아요. 갑자기 제가 쥬드 님한테 작업 거는 남자처럼 느껴집니다. ㅋㅋㅋ

다락방 2011-05-2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너선 사프란 포어란 말씀이십니까! 전 엘르 는 사본적이 없는데 생에 처음 사보게 되겠네요. 조너선 사프란 포어라뇨!!

blanca 2011-05-23 10:22   좋아요 0 | URL
락방님! 안 그래도 저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진도 어찌나 멋진지요. 흑백으로. 인터뷰 기사는 한 쪽 정도이지만 지면은 두 쪽을 할애했더라구요. 저는 정말 몰랐어요. 그가 매일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어할 줄은. 하여튼 아주 흥미롭고 좋았어요. 잡지에 형광펜으로 줄치며 읽어보기는 정말 처음입니다.

2011-05-23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3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3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3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5-23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지란게, '모든 모순, 대립, 한계가 한데 뒤섞여 있는 것' 이라는 정의에 딱 들어맞네요.
특히 ELLE는 말이죠. ^^

그런데 말이죠, 난 살 빼기 전에는 저런 잡지 안 볼거예요, 짱나요!
(앞으로 평생 못 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대리 만족을 못 하는 성격이니... 차라리 안 볼 밖에요. 하기사, 살 빼도 모델처럼 될 가능성은 없으니 결국 못 보겠네요. 잡지를 사지 않는게 그런 이유였나. 아하하.)

blanca 2011-05-23 22:0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사진으로 뵈니 날씬하시던데요. 이쁘고 날씬한 여자들 나온 장은 대체로 건너 뛴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