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는다. 너무 소설 같은 소설. 다채로운 서사. 극적인 전개. 평면적인 인물. 그런 소설 대신. 

정말 소설 같지 않은. 단조로운. 별로 대단할 것도 하찮을 것도 없는 고만 고만한 사람들. 그래서 주위를 한번만 쭈욱 둘러봐도 닮은 꼴을 굴비꿰듯 줄줄이 엮어낼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죽지 않은 아내와 건강한 갓난아기 외에 일을 그만둘 듯하면서 못 그만두는 형이 있었다. 천식으로 죽을 듯하면서 아직 살아 있는 누이도 있었다. 새로운 지위를 얻을 듯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장인도 있었다.

 
   

 

이런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 겐조의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마치 나쓰메 소세키의 3인칭 일기를 읽는 느낌이다. 본가에서 버림받다시피 하고 입양되었다 다시 양부모의 이혼으로 파양되다시피 한 남자의 얘기.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양부모.  

   
 

 겐조는 바다에서도 산에서도 살 수 없는 처지였다. 양쪽에서 내쳐진 채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했다. 바다의 것도 먹고 때로는 산에 있는 것에도 손을 댔다.

 
   

 

나쓰메 소세키는 언제나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런데 그 행간에 눈물이 스며 있다. 그 눈물은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아도 그 경험이 남기는 저릿한 슬픔을 공감한다. 다른 일들로 함께 울 수 있다. 바다의 것도 산의 것에도 손을 대는 겐조의 모습이 눈물겹다. 그리고 그 겐조를 둘러싼 한결 같이 무능하고 때로 몰염치한 주변인들. 어느 구석 하나 시원할 것도 상쾌할 것도 없는 지지부난한 일상들. 사실 그런 것이 삶의 대부분임을 소세키는 예리하게 꿰뚫고 있다. 삶, 사람 들이 언제나 유의미하고 위대해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고 있지만 못 본 척한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무능력하고 비열한 모습들이 흩뿌려진 소세키의 인간 들은 그래서 어쩐지 익숙하고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다. 대단한 이야기나 경구가 없어도 그의 이야기가 언제나 흡인력을 가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너는 결국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겐조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목소리는 더욱 겐조를 추궁했다.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겐조는 끝내 울부짖었다.
 "모르겠어."
목소리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모르는 게 아니지. 알아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거겠지. 도중에 멈춰 있는 거겠지.'

 
   

 

결국 들켜 버렸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1-06-2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철학자의 글을 정리하다가 '이처럼 절실하게 벗어나고자 하는'이라는 대목에서 blanca님의 이 글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다소 엉뚱한 느낌은 들겠지만 뭔가 상통하는 것도 있겠다 싶어 댓글로 남겨 봅니다. ㅎㅎ
* * *
한가한 망상(妄想) 속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찬란하고 가장 의기양양한 상황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대하는 쾌락들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처해 있는 초라한 지위에서 우리가 언제든지 손안에 넣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쾌락들과 거의 언제나 같은 것이다. 허영(虛榮)과 우월(優越)이라는 경박한 쾌락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우리는 개인의 자유만이 존재하는 가장 초라한 지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마음의 평정(平靜), 즉 모든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향유(享有)의 천성이자 기초가 되고 있는 마음의 평정과, 허영 및 우월이란 쾌락은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가 지향하는 휘황찬란한 위치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절실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초라한 지위에서 용이하게 즐길 수 있는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쾌락들을 마찬가지로 쉽게 향유할 수 있을는지도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 아담 스미스,『도덕감정론』中에서

blanca 2011-06-27 23:25   좋아요 0 | URL
언뜻 한번 읽고는 바로 이해되지 않아서 세 번 정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겐조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정말 필요한 얘기네요. 가장 찬란한 상황은 가장 초라한 지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있어야 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oren 2011-06-28 00:46   좋아요 0 | URL
blanca님의 댓글을 보니, 어느 철학자가 매우 긴 호흠으로 자신의 철학을 장황하게 펼쳐 놓은 책 가운데 어느 한 구절을 '덜컹' 끌어 와서 무턱대고 댓글로 남겨 놓은 것 같아 죄송스런 생각도 듭니다.

blanca님께서 인용해 주신 [겐조의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한 질문과 울부짖는 대답]이 자꾸만 머리를 멤도는 것 같아 목소리가 여전히 똑같은 철학자의 뒤이은 언급 한 대목을 덧붙여 봅니다.
* * *
저 평범한 안전과 만족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

불굴의 근면함으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경쟁자보다 우월한 재능을 획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한다. 이어서 그는 그러한 재능들을 공중(公衆)의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며, 똑같이 열심히 여러 취직의 기회를 사람들에게 간청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춘다. 그는 내심(內心)으로는 증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봉사하고, 자신이 경멸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아부한다. 그가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은 자신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어떤 공적이고 우아한 휴식(休息)의 관념인데, 그것을 위해 그는 어느 때에든 자신의 힘으로 쉽게 이룩할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의 평정(平靜)을 희생한다. 그리고 만약 아주 늙어서 드디어 그것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이 어떤 점에서도 그가 이것 때문에 포기했던 저 평범한 안전과 만족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최후의 순간이 되어 그의 육체가 고통과 질병으로 쇠약해지고, 자신의 적들의 불의(不義), 동지들의 배신(背信)과 망은(忘恩) 때문에 그가 받아 왔다고 상상하는 수많은 침해와 실망의 기억에 의해 그의 마음이 쓰리고 괴로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그러한 부와 권세가 사소한 효용(效用)만을 지닌 허접한 것에 불과하고, 육체의 안락과 정신의 평정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장난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족집게 상자 정도의 쓸모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부와 권세는, 족집게 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편리함 이상으로 번거로움을 더 많이 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 아담 스미스,『도덕감정론』中에서

blanca 2011-06-28 21:24   좋아요 0 | URL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예전에도 한번 인용하신 것 기억나요. 어떻게 이렇게 명철하고 예리하게 삶을 파악하고 묘사할 수 있을까요? 정말 놀랍네요. 기회가 되면 꼭 완독해 보고 싶게 만드는 인용구입니다. 죄송하긴요.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댓글인걸요.

비로그인 2011-06-27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요새는 담담하면서 조금은 밝은 느낌의 글이 좋아집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 걸으면서도 조금은 힘이 나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그 소설 속의 인물과 사건들을 보면서 전철의 그 수많은 사람들, 하루에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사건들. 나름 담담하면서 조금은 밝게 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blanca 2011-06-27 23:2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도 이제는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얘기에서 질기고 생명력이 있는 얘기로 옮겨 가려고 합니다. 그런 시점이 온 것 같아요^^

cyrus 2011-06-2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상중 씨의 <고민하는 힘>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좋게 평가하던 내용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한 번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감명깊게 읽어봤는데 국내에 나스메 소세키의
작품이 생각보다 많이 번역되었더라구요. 전에는 민음사 시리즈에 있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문동에도 그의 작품이 번역되었군요. ^^

blanca 2011-06-28 21:20   좋아요 0 | URL
예. 저는 아직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읽어 보지 못했어요. 정말 기묘하고 매혹적인 작가입니다. 캐도 캐도 무언가가 자꾸 더 나오네요. 저도 정말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나쓰메 소세키를 알기 위한 입문서라고 하네요. 자전적인 작품이라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6-28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요맘때 소세키 소설에 빠졌던 때가 떠오르네요. 전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은 작가입니다^^

blanca 2011-06-28 21:21   좋아요 0 | URL
후와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아, 전집이 나오는 것도 괜찮겠어요.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드문 드문 소세키를 읽게 되네요. <그후>도 참 좋았어요.

비로그인 2011-06-2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급박하니 글을 읽을 수가 없더이다, 블랑카 님. 그 어느 글도 내 속으로 스며들 수가 없어서.

blanca 2011-06-28 21:22   좋아요 0 | URL
쥬드님, 동감해요. 저는 그때 오히려 독서가 괴롭더라고요. 정말 말 그대로 활자만 겉돌며 읽게 되고요. 결국 허구가 현실을 이길 수는 없는 걸까요?

마녀고양이 2011-06-29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결국 들켜버렸네요... ㅠㅠ

blanca 2011-07-01 12:41   좋아요 0 | URL
저도 제 얘기하는 줄 알았답니다.--;;
 
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따르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연령'인 56세에 이르러서 나는 젊은 시절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무서운 게 없던 젊은 시절, 시력을 잃어버린 위대한 작가 보르헤스의 옆에서 책을 읽어 주며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망구엘. 그는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말들로 적시에 독자들을 감동으로 무릎 꿇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56세에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고 같다. 사라진 도서관, 씌여지지 않은 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남고야 만 책, 도서관들에 대한 얘기는 까만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들 같다. 우리는 이미 밤하늘에서 과거의 소멸된 별들을 본다. 그 별들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미래를 꿈꾸는 그런 아이러니는 모순 같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아련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와 같은 얘기이기도 하다.  

   
 

 "암흑시대에 마케도니아에서, 마지막 촛농을 흘러내리는 불빛을 빌려, 한 남자가 어린 아들을 위해 고대의 낡은 책으로부터 짤막한 구절을 옮겨 쓰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셉티미우스였습니다. 그 덕분에 <아킬레우스의 사랑>의 한 문장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사랑은 어린아이 손에 쥐어진 얼음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소포클레스는 말했습니다.
-p.139

 
   

 

소포클레스의 사라진 비극에서 우리는 이 한 문장을 건진다. "사랑은 어린 아이 손에 쥐어진 얼음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킬레우스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리고 수천 년을 지나서도 그 사랑의 느낌은 유효한 것일까?  망구엘은 책이 실제 세계를 온전히 반영할 수도 복원할 수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끊임없이 직조해 내는 그 불가능한 열망들의 흔적 들은 때로 현실과 존재를 뛰어넘는다. 이제 손에 얼음을 쥔 어른은 아킬레우스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을 막연하게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고 스러져 버리는 것. 쥐고 있는 동안 고통스러운 것. 하지만 결국 또 쥐게 되는 것.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p.241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 책이 꼭 대단히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그 타이밍의 내 상황과 묘하게 겹쳐 굉장한 동질감과 위안을 주는 시간. 불면의 밤, 티테이블에 우연히 펼쳐져 있던 공지영의 초기 에세이에서 공지영은 울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비극을 덜어줄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불행한 순간, 행복한 사람이 던지는 기만적 위로가 아닌 비슷한 무게의 슬픔을 듣는 것. 위안. 그게 통찰로까지 확장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책에 대한 예찬, 옹호 대신 자박 자박 이리저리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의 탄생과 성장, 노화, 죽음에 대하여 하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정작 저자인 망구엘에게 책과 독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따라서 나는 어떤 종류의 계시도 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말해진 것은 내가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제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스런 과정을 통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바랄 수 없는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궁극적으로 내가 알게 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의 경험도 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럼 내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면서 나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  

아마도 위안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위안일 것이다. "
p.337

 
   

 

 그래.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위안받기 위해서였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11-06-1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주는 위로와 위안, 저도 알아요.^^
저 근데 요새 노는데 정신팔려 책도 잘 안 읽어요.ㅎㅎ

blanca 2011-06-16 21:17   좋아요 0 | URL
^^ 꿈섬님 뭐하며 재미있게 노시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요새 저희 집이 너무 더워서 되도록이면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정말 덥네요. 오늘은 읽을 책도 똑 떨어지고. 어떻게든 도서관을 좀 뚫어보려고 하고 있답니다.

감은빛 2011-06-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위안이었군요.
저는 어떤 이유 때문에 책을 읽는 건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1-06-16 21:1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의외로 아주 겸손하고 기대가 적은 저자의 독서관이 오히려 더 와닿더라구요. 좋은 책 맞는 것 같아요.^^

2011-06-16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1-06-1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아, 이 말은 너무 옳고도 좋으네요, blanca님.

blanca 2011-06-16 21:1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좋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아요. 참 좋더라구요. 구구절절 옳고 좋은 말들. 멋진 인용구들. 추천드려요.

2011-06-1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7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6-1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어쩔 때 블랑카님 따라쟁이인 것 같아요. 이 책 저도 오늘 받았는데 어제 리뷰를 발견하게 되어서 신기했어요. 얼른 읽고 싶은데 이렇게 좋은 인용구들을 골라내어 페이퍼를 쓸 순 없을 것 같네요. 언제나 도서관과 책에 대한 책은 참 좋아요, 그쵸, 블랑카님.^^

blanca 2011-06-17 14:19   좋아요 0 | URL
^^ 저 따라쟁이 좋아해요. 저도 글쎄 도서관과 책에 관련된 책만 해도 벌써 많이 모였더라구요. 무심결에 계속 모으고 있었나 봐요. 또 나와도 또 사지 않을까 싶어요.
 

집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우리 집 주변에는 없다. 내 책이야 야금야금 아껴 가며 사고 팔고 하지만 아이 책은 매번 사 줄 수 없어 참 고민이었다. 분노의 검색질 덕택에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에 보물 같은 곳이 있음을 알아 냈다. 주변의 풍광이 도서관 중 최고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동대문정보화도서관. 몇날 며칠을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했다. 우리 집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다. 택시도 안 잡힌다. 걸어갈 수도 없는 거리. 그런데 도서관 홈페이지에는 주차장 수용 차량이 열 대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어젯 밤 약도를 숙지했다. 약도는 골목길이 대부분이었다. 초보운전자인 내가 과연 제대로 갈 수나 있을런지 가더라도 만약 주차장에 자리가 없으면 도서관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턴해야 하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여하튼 도서관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에 출발했다. 

역. 시. 나. 나는 도저히 거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골목길을 놓치고 그 옆의 영휘원 주차장에 들어가는 쾌거를 세웠다. 영휘원. 고종의 고종의 계비인 순헌귀비 엄씨(嚴氏)의 묘소. 주차장에는 떡하니 매서운 눈초리로 아주머니가 버티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의 굴욕을 알까? 괜히 담담한 척 내려 입장료 천 원을 지불하고 영휘원에 입성했다. 그렇다. 도서관에 가려 했던 나는 고종의 계비의 능에 도착한 것이다. 꼼수는 구경좀 하다 아주머니의 눈길을 피해 옆 골목길로 달음박질 쳐서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긴 했지만 잘 조성된 수목들과 탁 트인 녹지가 의외로 내 눈길을 사로잡아 사부작 사부작 몇 걸음 둘러보다 다시 나와 오른쪽 골목길로 빠져 나왔다. 

그 골목은 정말 내 생애 최고의 도전 과제였다. 경사도가 거의 70도에 가까웠고 햇살은 가차없이 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가도 가도 좌회전할 구멍은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에 닿고 다리가 쑤실 무렵 왼쪽으로 장미가 흐벅지게 핀 골목길이 나타났다. 역시 한참을 가니 초등학교 맞은편에 오붓이 도서관이 숨어 있었다. 

도서관은 자그마하고 아담하고 정겹고 아름다웠다. 숲 속에 안긴 듯한 착각.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책을 보며 싱그러운 녹음을 눈동자에 마구 문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지. 만. 나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이곳을 결코 정기적으로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미 관심을 잃고 있었다. 잠시 창가에 비치된 안락의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았다. 

 

 

지하 주차장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열 대 수용 가능한 곳이었다. 이 도서관에 올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그 등산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집앞에 대중교통도 없고 그냥 돌아서야 했다. 

내려오는 골목길. 등이 굽은 노인들은 힘겹게 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독특한 냄새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반지하방에 고목처럼 늙어버린 할머니가 문을 열어 놓고 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힘들다고 투정하는 그 골목길을 매일 올라야 하는 사람들 앞에 괜시리 숙연해졌다. 골목길 초입에는 덩그러니 세콤을 단 담이 높은 집이 버티고 있었다.  

골목길. 사람들에는 아련한 향수와 정취를 풍기는 그곳이 오르막과 더위와 만나 넘기 힘든 큰 산으로 엉 버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아기자기한 푸른 도서관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휘원 주차장에서 다시 눈치를 보며 슬며시 집으로 출발했다. 망구엘 아저씨의 <밤의 도서관>을 펴 들었다.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그의 재주에 탄복하며. 아무래도 이 계절에는 정말 밤의 도서관이 필요한 모양이다.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11-06-1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가까이 사는 전 축복받은 사람이네요.

blanca 2011-06-14 21:22   좋아요 0 | URL
우아,완전 부러워요. 정말로....

2011-06-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6-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대문구 정보화 도서관!
제가 참 좋아하는 곳입니다.
교통이 좀 불편하긴 하죠.
회기역이나 고대입구역에서 버스가 있긴 하더라구요.
저는 회기역에서 산책겸 걸어서 왔다갔다 한 적은 있습니다.

역시 집이나 일터 근처가 아니니, 자주 안가게 되긴 하더라구요.

blanca 2011-06-14 21:2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도 아시는군요! 정말 너무 좋은데 참 난감하더라구요. 저희 집에서 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해도 그 근처라면 시도해 볼 텐데 거기서 또 등산을 해야하니까요. 그냥 저 혼자 다닌다고 해도 너무 부담스러운 시추에이션이더라구요. 사실 아이와 함께 다닐 도서관을 탐색중이었기에 좌절했답니다.

감은빛 2011-06-16 10:17   좋아요 0 | URL
그 도서관에 일하는 사서님이랑 우연히 블로그에서 친해져서,
몇 번 만나고, 식사도 하고 했었어요.
그 도서관에 오면 특별회원으로 모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거리가 멀어서 늘 안타까워했답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면 자주 찾아갈만한 멋진 도서관이예요.
도서관 서포터즈도 활성화되어있고, 여러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도 많구요!
장정일 선생님이 진행하는 문고 읽기 강좌도 꽤나 흥미롭더라구요.

무슨 초등학교던가요.
그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그리 가파르지 않은 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암튼 블랑카님께서 쉽게 다닐 수 있는 도서관을 금방 찾게 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1-06-1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이 대개는 오르막 저 끝에, 걸어서 올라가기엔 너무 힘든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지요. 주차시설도 턱없이 부족하구요. 여기도 그런 곳이 많답니다.
접근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 중 지리적 위치도 빼놓을 수 없어요.ㅠ
힘들게 올라가 앉은 창밖 녹색은 참 눈이 부시네요. 고생하셨어요.
이참에 '밤의 도서관' 담아갈래요.^^

blanca 2011-06-14 21: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정말 그래요. 그래도 전에 살던 집 앞 버스를 타고 가면 바로 근처 도서관 입구에 내려 주었거든요. 아이도 데리고 가고 참 좋았는데 이 예쁜 도서관이 참으로 난감한 위치에 있더라구요. 너무 이쁘고 탐나서 더 좌절감이 크답니다.

블루데이지 2011-06-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의 역사, 도서관에 담긴 철학~~밤의 도서관이 급 궁금해집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땡스 투~~~

blanca 2011-06-14 21:26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 쇼파에 던져 놓고 수시로 읽고 있는데 야금야금 참 재미있네요. 사실 오늘 도서관 탐색을 나선 것도 이 책 덕택입니다.

세실 2011-06-1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서관도 오르막길이 있고, 주차공간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넓은 정원엔 장미랑 백합이랑, 여러 꽃들이 피어 있지요~~~ 이사할때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가도 참고하면 좋을꺼 같아요. 아이들이 어릴때는요^*^

blanca 2011-06-15 10:1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일하시는 도서관 가보고 싶어요. 참 궁금해요. 백합도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신도시는 주변에 도서관이 있는 경우가 많다더라구요. 부러워요. 다음 이사 때는 좀 찾아 봐야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6-1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운전 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몰고다니는 모습에........
으아, 그저 부러울 뿐이예요. 용기가 저보다 훨 나아요!

그런데, 능 구경 잘 하셨어요? 좋은데요.
좁은 길, 할머니. 삶의 한구석 같네요. 그림이 짜안해요. ^^

blanca 2011-06-15 10:1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부러워하실 필요 없는 게 정말 구린 운전자랍니다. ㅋㅋㅋ 저 운전하는 것 누가 관찰하면 참 속 터진다 할 거예요. 여기는 운전 안 하면 집에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해야 한답니다. 어떨 때는 참 재미있기도 해요. 능 참 좋은데 벌써 너무 더워요. 창덕궁도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더워서 엄두가 안 나네요. 할머니는 제가 괜히 호기심에 쳐다 본 것 같아 죄송스럽더라구요. 실질적인 도움도 못 드리면서 무심코 고개를 돌려 버린 게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icaru 2011-06-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블랑카(영타가 젬병이라--;;) 님의 재주에 탄복하며.,,, 이런 글 좋아요~

blanca 2011-06-15 21:37   좋아요 0 | URL
꾸벅, 감사합니다. 저도 영타가 느려 되도록 아이디를 한글로 친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어떻게 된 주거지역이길래 버스정류장이 없단 말입니까...승용차 없을 땐 집에서 몇 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가셨나요?

blanca 2011-06-15 21:38   좋아요 0 | URL
노자님, 물론 버스 정류장이 한 오분 가면 있긴 해요. 문제는 한 대만 오지요. 그 한대와 저의 목적지가 겹칠 때는 거의 없답니다.

穀雨(곡우) 2011-06-1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책에서 백배공감. 여간 부담이 아니더라구요. 그래도 잘 읽으니 좋아하니 그걸로 되었다는 최면을 걸고 몇차례 지름신 강림을 해 줍니다. 도서관도 멀고 도무지 중고로 돌려 책 사주기에는 그렇더라구요.ㅋㅋ

그나저나 용기백배 드라이버시군요. 골목길 운전이 젤루 힘들던데...간격이 서투르니 긁힐까 노심초사하게 되고...

blanca 2011-06-15 21:39   좋아요 0 | URL
곡우님, 도서관이 정말 아이들한테 절실한 것 같아요. 책값도 만만치 않은데 매번 사줄 수도 없고 중고로 잘 나오지도 않고. 어린이 도서관 근처에 사는 친구가 참 부럽더라구요. 골목길요. 안그래도 초보인데 여기 골목길들은 참 인내를 시험한답니다. 급경사에 좌우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 제 차는 긁혀도 남의 차는 안 긁을라고 무진장 땀흘리며 다닌답니다.^^

순오기 2011-06-1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도서관에 가려고 나선 길이 영휘원엘 가셨군요.^^
도서관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곳에 있으면 좋은데...땅값 때문에 그런 곳에 짓지 못하겠지요.ㅜㅜ
요즘은 학교 도서관도 지역주민에 개방하니까 가까운 곳에 학교는 없는지 알아보셔요.

blanca 2011-06-16 21:2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예. 저 결국 도서관 뚫고 말 겁니다.^^;; 다각도로 접근해 보려구요. 아무래도 땅값 때문이겠지요? 참, 아쉬워요. 도서관이 사실 가장 사람들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자리잡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
 

이만구천 원짜리 티는 어이없게도 목 둘레에 오십 원짜리 동전만한 크기의 구멍을 달고 있었다. 입어보기도 전에 소스라치게 놀라 종이봉투에 다시 넣어 두었다. 

스페인의 중저가 브랜드인 그 옷의 환불 기한은 무려 한 달. 일이 주 내외인 여타 국내 브랜드에 비해 엄청 길다고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써먹을 데가 금방 생겨 버렸다. 똑같은 옷은 없고 마음에 드는 다른 옷들은 애초에 샀던 이 티의 가격의 두 배 정도였다. 삼 주 정도 지나 환불을 받아 버렸다.  

그리고 멕시코시티로 떠나 보낸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무심코 사탕 색깔 같은 나풀나풀한 옷들이 디피된 가게로 들어가 그 아이가 사무실용의 하얀 블라우스를 충동적으로 구입하는 것을 봤던 그 가게를 또 충동적으로 들어갔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적당히 유치하고 적당히 인상적인 색감들의 착한 가격의 옷들 속에서 민트색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이만구천 원을 환불 받았으니 만이천 원을 더 쓰고 그 원피스를 산들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터였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그 원피스를 샀다. 그 가게는 아주 묘하다. 곳곳에 막 흥분하며 이 신발을 신어보고 저 옷을 입어 보던 친구의 흔적들이 떠돌아 다녔다. 마치 꽃을 포장하듯 곱게 접은 옷을 미농지에 싸서 커다란 비닐백에 넣어 주는 점원은 내 친구를 기억할까?  

 

중년의 미국 여인이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를 읽고 있다. 시인답게 묘사 하나 하나가 정말 만져질 듯한 질감이다.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에 비길 만하다.  

그런데 위화감을 느낀다. 외국에 육백 평이 넘는 부지의 집을 사서 그것을 또 자신의 구미에 맞게 수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녀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것들은 자꾸 내 눈앞에 비늘을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질투하며 책을 읽고 있다. 나의 인식의 한계는 사실 경험의 한계 안에 갇힐 테고 그것은 단연 나를 둘러싼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내가 보지 못한 것들, 모르는 것들이 내가 누릴 수 없는 것들과 겹칠 때 밀려오는 감정은 사실 유치하고 적나라한 것이다. 

동생에게 꼭 창덕궁에 같이 가자고 했다. 창덕궁에 가고 싶었던 것을 너무 늦게 기억해 냈다. 예전에 애 업고 버스 타고 갔는데 마침 휴관이었던 그 창덕궁에 장마가 오기 전에 가기로 다짐을 받아 두었다. 먼저 볼 수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볼 참이다. 그 다음에는 꿈을 꾸어야지. 민트색 원피스를 입고.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1-06-10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트색 원피스 입고 창덕궁에요!! 블랑카님의 민트색으로 창덕궁이 다 환해질 거에요.
요즘 원피스가 자꾸 입고싶어져서 친구랑 조만간 원피스 사러 가기로 했어요.
내게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원피스를 봐둔 데가 있다고 해서요 ㅎㅎ

blanca 2011-06-12 20:3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한테 잘 어울리는 드레스가 궁금해집니다. 어떤 색깔일까요? 오늘 개시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디자인이라 잘못 보면 집에서 바로 나온 것처럼 보이네요--;;프레이야님, 이쁜 원피스 쇼핑 잘 하세요^^

2011-06-10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2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3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하(紫霞) 2011-06-1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가게 어디인가요?^^
민트색 원피스~아 너무 이쁠 거 같아요!

blanca 2011-06-12 20:33   좋아요 0 | URL
베리베리님! 명동의 커피빈 맞은 편에 있어요. 정말 색감이 너무 이뻐서 누구나 충동적으로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는 옷가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사탕 색깔들 같아요. 보고만 있어도 절로 기분이 상큼해진답니다.
 
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를 들쳐 업고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녹음이 무성한 공원도, 동물들이 께느른하게 관람객들을 응시하는 동물원도 아닌, 바로 백.화.점.이었다. 

일단 육아에 관련된 돌발상황에 대처하기에 더없이 편리한 곳이었다.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졸려 하면 간이 침대에 재우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행위들을 하는 엄마를 우호적으로 지켜봐 줄 곳으로는 동네 반경 사 킬로 내외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내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특히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환각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보너스였다.  

그런데 역시 댓가가 있었다. 그건 욕망이었다. 백화점 안 사물들은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그 사물들은 벌써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여름 수영복은 호사로운 여름 휴가를. 이쁜 아이의 핑크빛 원피스는 아이와 유원지를 거니는 모습을, 차르르 떨어지는 정장은 '내'가 좀 더 그럴듯하게 사람들에게 나서는 풍경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백화점에 대한 얘기는 그러니 한 뼘의 시공간 안에 갇힌 '나'에 대한 얘기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백화점'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고 저자 '조경란'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어떤 대상에 대한 얘기는 흔히 객관성을 가장한 주관적인 시선 비틀기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나 자신에 대한 얘기는 지나치게 솔직한 척 하다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그 경계에 선 저자의 시도는 산뜻하고 도발적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 속에 버무리는 솜씨도 탁월하다. 이 책은 작가의 말을 보면 작가 조경란이 내밀한 속내를 가장 많이 털어 놓은 마지막 작품일 될 것도 같다. 알랭 드 보통이 어떤 대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제공하는 대신 스스로를 너무나 많이 숨겼다면 이 책에 드러난 작가의 담백한 솔직함은 분명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딸 셋의 장녀. 두 동생의 결혼식 날 모두 붉은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큰언니의 얘기. 등단한 작가가 특설매장에서 책을 팔던 얘기. 앵클 부츠의 닳아진 굽을 몇 번이나 갈아 신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 

   
  불완전하며 부족한 나는 결코 사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의 순간이 아무리 짧을지라도 그것은 확실하고 분명한 즐거움이다. 나는 구매했다. 여기에 필수적인 요건은 '나는 선택했다'라는 감정이다. 나는 선택했고 그것은 즐거움으로 남는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 소비의 이유도 소비의 기쁨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행복했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그러니 그 어떤 소비도 약간의 죄책감은 남긴다. 저 가방이 없다고 저 옷을 안 입는다고 바깥에 나가 친구를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저 가방을 들고 저 원피스를 입고 친구를 만나는 풍경은 아름답다. 나는 내가 선택한 새로움으로 나를 휘감고 한층 더 산뜻한 웃음을 흘릴 수 있다. 어쩌면 나의 그런 모습에 친구도 더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를 조금 더 가치 있는 주변인으로 인식할 지도 모른다. 살 수도 포기할 수도 있는 지점에서 간당간당하게 서 있다 이윽고 매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점원의 환대에 우쭐한다. 입어 보고 들어 보고 거울 앞에 선다. 점원이 시선을 잠시 돌리는 순간 가격표 꼬리를 확인하고 좌절한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다. 그 고민 속에는 이미 그 물건을 기다리는 즐거운 마음도 딸려 들어가 있다. 이미 구면인 점원에게서 카드 영수증을 받아 드는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충만감을 맛보지만. 두 번의 외출로 그 사물들이 주었던 환각들은 스러져 버리고 만다. 쇼핑의 도식을 알면 허무하다. 그런데 그 중간 중간 고개를 내미는 찰나의 기쁨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된다.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새로움'에 대한 환각은 소비로 권장된다.

이 책은 훈계하거나 모든 것을 머리로 판단하라고 조언하지 않는다. 그냥 백화점 층마다 권장하고 난무하는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때로는 그 욕망의 주체가 저자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우리의 욕망을 이해받고 때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이다. 욕망의 반성, 조절, 통제는 없고 욕망에 대한 이해, 분석, 통찰 만을 제공한다고? 그것이 바로 이 책만의 장점이기도 하고 이 책을 읽지 않을 나머지 사람들의 이유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1-06-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블랑카님!
책 참 좋았죠? 말씀하신 것 처럼 이 책은 백화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조경란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러나 또 백화점에 가서 소비를 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이제는 조경란이 본인이 말하는 과거의 시절과는 달리 넉넉해진 것 같아서, 그걸 깨닫게 될때마다 저는 약간 멈칫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도 이 책이 좋았어요. 저는 블랑카님처럼 별을 다섯개를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blanca 2011-06-08 21:2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지금까지 읽은 에세이 중 가장 좋았다고 하셔서 바로 질렀죠^^ 그리고 정말 그 말씀이 맞았고요. 저는 조경란 단편 몇 편만 읽어 보고 단발머리에 좀 차가운 인상이라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제가 생각했던 모습이랑 너무 달라 놀라기도 했어요. 굉장히 솔직하고 담백하더라구요.

양철나무꾼 2011-06-0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조경란은 뭐랄까...좀 탐욕스럽고 섹시하게 느껴져요.
전 백화점은 아니고, 아울렛이란 이름 붙은 상설 할인매장이요.
혼자 밥도 못 먹고, 영화도 못 봤었는데...꼭 쇼핑은 혼자 했었어요~^^

blanca 2011-06-08 21:23   좋아요 0 | URL
저도 조경란에 대한 비슷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더라구요. 경제적으로도 참 많이 힘들었고 참 다감하고 넉넉한 이모의 모습도 보이고. 쇼핑을 같이 하는 건 참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혼자 내밀하게 해야 하는 작업 같아요^^

비로그인 2011-06-09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 전 이 책에서 저를 읽었어요.브이넥 원피스나 스키니 진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그 아래엔 검은색 페디큐어를 칠하고, 흰색의 탠디 스트랩 샌들을 신고,아, 그런 다음에는 어찌할까. 저는 제 스스로가 욕망의 주체였으면 했어요. 제 스스로가 제가 사랑하는 이의 욕망의 대상이자 근원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한번씩 거울을 아주 오랫동안 응시하고, 이 옷 저 옷을 대어보고, 그런 과정 없이는 나를 알기가 어려웠습니다.그래서 나이먹는 것도, 내가 변하는 것도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늙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했던 내 모습에서 내가 멀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에요.그리고 백화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입니다.


사족-저는 가격표도 안보고 아예 계산하면서 `어머 그런데 이거 얼마에요?'라고 묻든지, 아니면 아예 물건을 집어들자 마자 `이거 얼마죠?' 부터 먼저 묻곤 해요. 제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충분히 짐작 가능한 곳만 들락거리기 때문입니다.


blanca 2011-06-08 21:25   좋아요 0 | URL
아, 쥬드님 좋은 리뷰도 아주 잘 읽었답니다. 쥬드님은 항상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글을 쓰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늙는 게 두려워요. 어려 보인다,는 공치사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지금이 늙어가는 거겠지만요. 저는 수시로 가격표를 몰래 몰래 끄집어 내어 확인한답니다.^^;;

비로그인 2011-06-0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인지 자꾸 우선 순위에서 멀어지고 마는 책.
하긴, 읽지 않은채 곳곳에 누워있는 다른 책들도 무기력하게 손길을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새로운 책을, 이렇게 다른 분들의 인상을 접하고 읽는 건 또 다른 느낌을 전해 주더라고요.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낯을 살짝만 봤는데 좀 알게 되면 다시 이 페이퍼와 이 책에 관한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1-06-08 21:26   좋아요 0 | URL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마지막 책이 어떤 실망감을 준 경우. 저는 한동안 책을 멀리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또 드문드문 좋은 책을 만나게 되면 다시 책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책 대신 세상을 열심히 관찰하고 계시잖아요.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2011-06-08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9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6-08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지 않을 나머지 사람들의 이유, 그것이라면 전 읽지 말까 싶기도 하고
이거 무지하게 갈등이네요. 하지만 읽고싶은 쪽으로 확~ ㅎㅎ
여러 리뷰에서 평이 좋으네요.

blanca 2011-06-09 18:1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참 괜찮아요. 저는 그냥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백화점의 역사와 조경란의 삶과 그리고 나의 삶을 함께 놓고 찬찬히 둘러보게 되더라구요.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