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1월 1일 일어나 보니 무려 열 시였다. 아무런 다짐도 결심도 미처 하지 못했는데 일어나 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는 기분은 착잡했다. 그냥 똑같은 시간들, 인간이 임의로 지은 경계에 불과하다고 되뇌어도 역시 한 살 더 먹는 일은 서른 이후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흔도 되고 쉰도 되고 그럴 텐데. 잘 할 수 있을까?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

 

이모부는 사촌동생의 결혼식 폐백실 앞에서 나와 시선이 마주쳤고 나를 향해 걸어 오셨다. 병색이 어려 있기만 했지만 그래도 이모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는데 이모부와 나는 작별하였다. 이모부도 나도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었던 듯 서로 머뭇거리며 또 한번 마주치려고 했지만 그 날은 그렇게 무언가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었다. 하지 않은 이야기들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은 이제 담을 곳이 없어졌다. 영영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교각 위에 입김을 내뿜으며 안전모를 쓰고 작업하는 인부들의 모습과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가족을 부양했던 젊었던 당신이 겹쳐 가슴 한켠이 아렸다.

 

나는 붙잡아 두고 싶은 풍경들이 가차없이 차창 뒤로 쉭쉭 밀리어져 나간다. 기착지는 잠깐씩 있겠지만 예전처럼 간이 판매대에서 우동까지 사서 들고 올 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2011년 12월 31일 기분이 저조했나 보다. 그래서 꼭 읽어 보려고 했던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었다. 밤에도 읽고 대낮에도 읽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꼭 내용을 읽지 않아도 제목만으로 수많은 추억들, 느낌들은 저마다 수런거리며 벌써 거대한 이야기를 이룬다. 이미 김연수는 얘기를 하기 전에 얘기를 끌어 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작가인가 보다. 이러한 느낌을, 추억을 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처럼 여기에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같은 제목의 단편은 없다. 그것을 찾는 건 읽는 이의 몫이다. 김연수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는 뉴욕제과점 막내 아들이었다. 그때 그 거리를 다시 복기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작가처럼 나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사당동 시장 골목을 언제나 어른 같았던 나의 친구와 다시 걸었다. 가정 시간 만들 치맛감을 끊어서 언제나 언니 같고 침착했던 그 친구와 함께.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볼 기회가 찾아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다른 시절에 할애된 시간을 줄여서라도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

 

되도 않은, 호러물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면 그 친구는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얘기를 듣는 것처럼 맞장구를 쳐주고 호들갑을 떨고 분석까지 하며 들어주곤 했다. 가차없는 비판도 아프지 않았다. 이제 그런 친구는 없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아직이라는 말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오지 않은 것들, 기다리는 것들이 한아름 내 몸 속을 꽉 채우고, 지나치는 것들이 다 그 자리에 고대로 서서 나를 기다려 줄줄 알았다.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가야 할 길을 보는 심정은 서늘하다. 아직 계획도 포부도 세우지 않았는데 길은 또 내 앞에서 저만지 달음질쳐 가서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또 걸어가야 한다. 이별도 해야 하고 포기도 해야 하고 실망도 해야 한다. 김연수의 말처럼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볼 기회가 온다면 지금 이 시절에 할애된 시간도 소중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다. 자꾸 태엽을 뒤로 감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만을 아련하고 아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늦잠 잔 새해 2012년을 천천히 되짚어 다시 걷고 싶을 만큼 소중하고 그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유년기와 청춘을 추억하는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중년과 노년을 복기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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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작년 12월 31일과 1월1일이 뭐라고.
이렇게 새 계획들을 새우고, 포부를 다지고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건 못 지킬 것을 알기에 안 세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즈음 드는 생각은, 계획을 세우건 안 세우던지간에 내가 행복하기를
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불행해지겠더란 말이죠.
언젠가 저도 나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에만 있지 쉽지 않네요.
블랑카님도 행복하시길 빌어요.^^

blanca 2012-01-03 17:0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스텔라님. 저도 모르게 그런 강박에 시달렸나 봐요. 오늘은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어요. 내가 행복해지기를 결심해야 한다는 말, 참 귀중하게 들리네요. 스텔라님도 저도 올해는 작년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1-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내가 위로해줄게요.
난 1월 1일에 11시반에, 2일에 또 11시반에 일어났어요! 진짜 위안이 되지 않아요?
일어났더니, 하루의 반이 휙 사라졌는데, 몸은 개운하더라구요. ^^

내가 차끌고, 분홍공주님 델구 일산 오랬죠. 강변북로 타면 올만할건데... 그럼
내가 가차없이 비판해주고 분석해주고 안아주고 할게염. 그리고 블랑카님은 항상 안절부절하지만
항상 무엇인가 준비하고 나아가고 있다고, 전 보고 있는데요.. 멋지세요, 항상.

올해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blanca 2012-01-03 17:0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의 운전은 꾸준히 동네운전이랍니다.ㅋㅋ 사실 이것도 저를 작아지게 하는 원인 중 하나지요. 전용도로를 탔다 주눅들었어요. 그 후로는 자신감 완전 상실했어요--;; 일산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아마 올해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중이에요^^ 코알라도 마녀고양이님도 만날 날이 오겠죠? 아, 지금 밖에 보니 완전 눈보라예요. 일산은 어떨까요? 마고님도 창밖을 한번 보세요. 올해 감기 바이러스란 바이러스는 다 마고님을 피해가기를 기원합니다.

순오기 2012-01-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언제나 돌아가고픈 추억이죠.
새해에 늦게 일어났으면 어때요, 잠을 푹 잤으면 몸도 마음도 개운하고 건강에도 좋잖아요.^^
이러면 위로가 될려나~

blanca 2012-01-03 17:0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위로가 됩니다. 맞아요. 정말 숙면을 취했어요. 이제는 좀 일찍 일어나 보려 해요. 아이가 방학을 하니 밤에 잠을 안 자서 이런 일과가 굳어졌어요. 저도 자주 아이가 되고 싶어요. 오늘 같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도요. 순오기님, 새해에는 더욱더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진 2012-01-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이 되었는데도 교회와 학교를 오간다고 아침 일찍일어나야 해요 ㅠㅠ
맞아요, 인간이 임의로 정해논건데 신경쓸 필요가 없겠네요.
그렇다면 저는 이때까지 미뤄둔 다이어리를 더 미뤄야겠어요 ㅋㅋ

아무리 나이가 한 겹 한 겹 더 쌓여간대도
블랑카님 새해 복은 무수한 겹으로 받길 바래요~

blanca 2012-01-03 17:1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사진 아이돌 같습니다.^^ 포즈도 너무 자연스럽네요. 고맘때는 마음껏 미루고 유예해도 되는 게 특권 아닐까요? 저는 그 때 일찍 일어나는 게 넘 힘들어서 꼭 대학가면 일주일 동안 잠만 잘 거라고 결심하곤 했었는데 그 심정 알지요. 이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gimssim 2012-01-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이였을 때>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내가 아이였을 때... 이렇게 인생길을 가고 있으리라 생각은 못했어요.
'소통'이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어 있는데, 소통하기를 어려워하는 남편 때문에 고전하고 있어서일까요?
어머니와 아버지만 계시면 모든 것이 다 되던 그 시절이 정말 눈물나게 그립습니다.

blanca 2012-01-03 17:13   좋아요 0 | URL
눈물나게 그립다는 말씀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언제나처럼 강고하고 차분하게 중전님은 다 잘 이겨나가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힘내시고 더불어 새해 복도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2-01-03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끔은 어린 아이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라는 책 속 구절이 마음에 깊이
와닿네요. 저도 한 번은 예전에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느낀 감정이
책 속 구절과 같았거든요. 비록 그 당시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더군요 ^^

제가 작년에는 학교 생활에 치중하느라 서재에 자주 들려서 댓글이랑 안부 인사를 남기지 못했어요.
내년에도 학교 생활하면 바쁘겠지만 올해에는 안부인사는 꼭 할께요 ^^
올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고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

blanca 2012-01-03 17:15   좋아요 0 | URL
아웅 고마워요. cyrus님이 88년생이시라는 얘기 듣고 저는 그때 무얼 했나 잠시 생각했어요. 학교 생활하느라 바빴던 시간들도 그립습니다. 그 땐 참 저도 이리저리 분주했고 이리저리 갈 곳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일들, 그 장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올해 사랑도 성취도 미래도 얻으시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잉크냄새 2012-01-0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새해 첫날 일어난 시간이 저와 똑같다니.
언제부턴가 새해가 별다른 의미없이 지나가네요.
자주하던 금연도 이제는 시작안한지 오래되었고, 5년째 새해를 중국에서 맞이하게 되네요.

blanca 2012-01-03 17:17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정말요? ^^ 금연결심은 건강을 위해 음력 설에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 저희 집 어른 두 분께서 올해는 금연 얘기를 아예 안 꺼내시더라고요. 올해 분위기가 그런 걸까요? 중국에서 벌써 5년이나 되셨어요? 이국에서 새해를 맞는 기분은 어떨까요? 올해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2-01-03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은 언제나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의 촉각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그리고 blanca님의 이 글을 읽으니 문득문득 제가 최근에 읽었던 책 속의 몇몇 구절들도 새삼 떠오르는군요.
* * *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며, 그밖의 모든 것은 다만 머릿속에 간직된 표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있던 것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이미 없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다음 순간에는 방금 있었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의미한 현재도 가장 의미 있었던 과거보다 낫고,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무와 존재와의 관계와 같다."

"삶의 지혜는 대부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주의와 관심이 알맞은 균형상태를 이룰 때만 얻을 수 있다. 경박한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현재 속에 파묻혀 산다. 불안과 근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미래에만 매달려 산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추구하며 미래 속에 사는 사람은 늘 앞을 보며 살아간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무엇인가를 향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둘러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를 즐기지 않는다. 현재는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그 곁을 지나쳐갈 따름이다. 이처럼 그들은 죽을 때까지 미래를 향해 줄곧 '잠정적'인 상태로만 살아간다.

현재의 평온함이 불확실한 불행, 또는 확실하다 해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으로 깨뜨려져서는 안된다. 틀림없이 겪게 될 불행, 그리고 언제 겪을지 분명한 불행은 매우 적다. 불행은 대부분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아마도 그렇게 되기 쉬우리라고 생각될 뿐이다. 틀림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나쁜 일들도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확실치 찮다.

우리가 이 같은 일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잠시도 평온한 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불확실하거나 언제 생길지 불분명한 불행 때문에 평생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런 불행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거나 적어도 지금 일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blanca 2012-01-03 17:20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제가 다시 적어 봐야겠습니다. 저한테 지금 가장 절실한 얘기들이네요. oren님에게 들킨 기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oren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런 좋은 댓글도 많이 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카스피 2012-01-0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ca님,2011년 서재의 달인 등극을 축하들려요.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blanca 2012-01-04 15:1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모든 삶이 기적이다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사투리가 섞인 소박한 음성의 아저씨가 내 핸드폰이 맞는지를 확인한 다음 너무나 절박한 톤으로 어머니가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수많은 보이스피싱 사례들. 당했다고 하면 왜 순진하게들 그랬을까 머리를 갸우뚱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한번 쓰러진 적이 있는 엄마가 하필 머리를 다쳤다고. 게다가 내 이름을 호명하며 엄마를 바꿔주겠다고까지 하는 낯선 사람의 다급함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결론적으로 보이스피싱임을 알고 끊어버리기는 했지만 순간 지옥으로 갔다.

 

이제 친구들, 사촌들의 부모님의 부음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다. 오랜 지병으로 미리 마음의 각오들을 한 경우들도 있었지만 어느 날 주무시다가 작별 인사도 없이 가시는 경우들도 많았다. 그런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산다는 게 죽음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의 줄을 결국 당겨야 한다는 일임이 너무 두렵고 자신없어졌다. 탄생을 마주대하고 나니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생명의 허망함이 더 둔중하게 다가왔다. 무언가를 오래 공들여 해야 하는 경우 어차피 나는 죽을 텐데, 라는 허무감이 어리석게 덮쳤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일지도 모르는데, 하는.

 

네가 죽은 이후 나는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파울라,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까 봐 두렵고 그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두렵고 늙어서 망가져 가는 게 두렵고 날로 증가하는 이 세상의 빈곤과 폭력, 그리고 부패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p.153

 

더 많은 생명을 부려놓을 수록 더 많은 상실을 각오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게 된 여자는 십대 소녀를 보고 "아이를 갖지 마."라고 되뇌인다. 칠레 출신의 저자 이사벨 아옌데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남매를 데리고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다. 유전병인 포르피린증을 갖고 있던 딸은 어느 날 감기를 앓다 병원에 입원하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다 떠난다. 딸은 서른도 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고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어린 조카 둘이 있었고 아마존의 여전사 같은 어머니와 우직한 몸에 달콤함을 감춘 의붓 아버지가 있었다. <모든 삶이 기적이다>는 1992년 12월 작가의 심장과도 같았던 딸의 상실로 시작하고 있었다. 세퀘이아 나무숲에 딸의 재를 뿌리면서 이사벨 아옌데는 마약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또다른 딸 제니퍼 이야기를 꺼낸다. 제니퍼는 재혼한 남편 위예의 딸이었다. 탯줄을 자르며 눈을 맞추고 걸음마를 시작할 때 손을 잡아주며 감격하고 처음으로 엄마, 아빠를 불렀을 때 온몸으로 응답했던 아이도 자라서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학대하는 나약하고 피폐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제니퍼는 중증 마약중독자로 끊임없이 병원에서 탈출하고 그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는 또 사라진다. 이사벨 아옌데는 딸 파울라의 마침표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남편 위예는 자신이 낳은 생명이 과연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스러졌는지초자 확인할 길 없는 불확실한 고통에 가슴을 친다. 이런 이야기들. 앞에서 끊임없이 망연해졌다. 이사벨 아옌데식으로 말하면 사방에 널려있는 어마어마한 고통들.

 

슬픔. 심리 상담사가 지적했듯이 위예와 나의 삶에는 슬픔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이는 상실감과 어려움에 대한 의식.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면 짐을 제대로 짊어져야 한다.

-p.106

 

이사벨 아옌데는 고난을 얘기하는 대신 그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그 갈피짬마다 스며드는 생의 아름다움은 눈물겹고 사랑스럽다. 아들 니코의 세 명의 아이들, 손주들을 돌보는 일상들은 코믹하고 더없이 정겹다. 기저귀를 가는 것도 목욕을 시키는 것도 컨베이어 벨트에서 물건을 조립하고 포장하듯 기계식으로 할머니, 아빠, 엄마가 덤벼드는 풍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언제나 시어머니를 놀라게 했던 며느리가 양성애자임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게다가 이사벨 아옌데의 의붓아들의 여자친구가 며느리의 연인이 된다. 그래서 이사벨이 서문에서부터 나의 삶에는 드라마가 부족하지 않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유교정서에는 경악스러운 반전이 또 저자식으로 일상에 긍적적으로 녹아 수습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감동적이다. 두 엄마는 아이 셋을 성심껏 건사한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니코, 이사벨 아옌데의 아들은 또 새로운 삶의 동반자 로리를 만나 더 정돈되고 풍요로운, 조금은 헷갈리는 가정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이 칠레의 부족 같은 대가족에게는 외부의 일들이 절대 흔들 수 없는 본질적인 결속력과 안정감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것같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재들은 드라마틱하지만 그것을 헤쳐 나가는 이사벨 아옌데와 남편 위예, 아들의 모습은 견고한 실재에 닿아있다. 거기엔 그들이 조금 더 일찍 깨달은 비밀이 있었다.

 

나는 위급한 상황이 되면 항해에 필요없는 것들, 그러니까 가진 것의 모든 것을 배 밖으로 던져 버린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결국 무거운 짐들을 버리고 계산을 마치고 났을 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사랑뿐이었다.

-p.458

 

 

사랑. 자신이 낳은 딸을 다 키워서 잃게 된 그녀가  죽고싶다고 편지에 쓰자 너의 그 말이 나를 죽고싶게 한다고 응답했던 그 늙은 어머니와의 사랑. 이사벨 아옌데는 칠레에 남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편지로 쓴다. 오고가는 편지는 어느 날 곱게 포장되어 되돌아 온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지나친 솔직함이 남아 말썽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애 막바지에 이르면 기억하는 만큼만 살아온 것이 된다"는 그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사벨 아옌데는 105살이 될 때까지 매일 어머니와 주고받는 편지를 읽을 것이라 했다. 그때 즈음이면 노망의 혼돈 속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터이고 나는 우리의 편지 덕분에 두 번 사는 게 될 것이라는 말에 눈물이 어렸다. 나도 그러고 싶다. 우리 엄마와도 나의 딸과도. 추억 속에서 나는 다섯 살. 치매가 오기 전 나의 할머니는 여전히 늙고 등이 굽은 꼬부랑 할머니. 기억을 부정하 면 나와 할머니와의 시간들은 모두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되고 만다. 끊임없이 되돌아가 당신이 부려놓은 생명은 여전히 당신에게 매달리고 말대꾸하고  주름골에 손가락을 넣고 의기양양하게 존귀한 존재가 된다. 기억도 삶이다.

 

 

이 책. 150센티미터가 간신히 되는 작은 체구의 여자. 항상 모든 것을 스스로 지키고 편견, 인습에 당당히 항거했던 하지만 지금 곁에 있는 남편 위예에게는 연약한 아내가 되고 싶고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에 그것을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여자. 일흔이 다 되어가는 작가의 진실에 근접하고자 하는 여정의 얘기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내 눈의 비늘을 한 겹 벗겨 준 기분이다. 들고 갈 짐이 없다고 장밋빛 전망으로 눈을 어둡게 하는 얘기보다 인생은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빠르고 돌발 상황으로 가득차 있다고 제대로 짐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작가가 마지막에는 머리가 빠지고 배가 나온 남편과 달콤한 사랑을 얘기하는 모습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폴 뉴먼을 닮았던 젊은 남편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일보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남편의 존재감 속에서 안온하게 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삶의 잔혹함, 기만성 앞에서도 살아갈 힘을 나게 한다.

 

고마워요. 이런 글을 써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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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1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오프서점 에세이코너에서 봤어요. 이사벨 아옌데가 소설이 아닌 (왠지 차기작은 조로의 귀환, 뭐 이런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자신의 이야기로 대중앞에 나타난 것이 의외였었어요.

고마워요, 이 책의 리뷰를 써 주어서 ^^

blanca 2011-12-20 09:00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이사벨 아옌데 소설 중에서 추천해 주실 수 있어요? 저는 아직 소설은 못 읽어봐서요. <파울라>가 읽고 싶었는데 절판이라 너무 아쉽더라고요.

... 2011-12-21 18:12   좋아요 0 | URL
이사벨 아옌데의 대표작은 <영혼의 집>이 아닐까요? 저는 영화를 먼저봤는데 제레미 아이언스, 메릴 스트립, 안토니오 반데라스, 위노나 라이너가 총출동하는 완전 호화캐스팅이었어요. 재미없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펑펑 울면서 봤던 기억이 ^^;;

<영혼의 집>과 <운명의 딸??> 그것과 <세피아..어쩌구>가 대표작 이라고 들었어요.

moonnight 2011-12-19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맙습니다. 이 리뷰를 써주셔서요. ^^

얼마전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와서 제 이름을 똑바로 대면서 `큰일났어요!! 지금 아드님이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라고 다급하게 외치더군요. 아, 그래요? 하고는 딸깍 끊었어요. 나이로 봐서는 학부형이지만 결혼을 안 했는데 아드님이라니. 사전조사가 덜 되었었나봐요. 흐흐 ^^;;;


blanca 2011-12-20 09:02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ㅋㅋㅋ 그런데 저는 어머니가 예전에 쓰러지신 적이 있어서 전화 받자마자 보이스피싱이고 뭐고 정신도 없고 하늘은 까맣고 그랬답니다. 게다가 통화조차 안 되더라고요. 지나고 나면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는데 잠시 상상만으로도 참 힘든 상황이더라고요.

다락방 2011-12-1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맙습니다, 이 책의 리뷰를 써주셔서요. 블랑카님의 이 리뷰가 아니었다면 전 이 책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에요.
보관함에 슬쩍 밀어넣습니다.

blanca 2011-12-20 09: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여자로서 산다는 것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일흔에도 아주 근사하고 행복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어 더 뭉클했어요. 마지막이 특히나 감동적이었답니다. 영화를 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석에서 한참을 못 일어나는 기분이었어요.

비로그인 2011-12-1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맘에 드는 리뷰에요..꼭 읽어 보겠어요. ^^

blanca 2011-12-20 09: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감은빛 2011-12-1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맙습니다! 훌륭한 리뷰예요! 보관함에 넣고 갑니다.

blanca 2011-12-20 09:06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이사벨 아옌데가 남미 여인인데 우리나라 정서랑 흡사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오히려 영미 작가들 삶보다 더 공감이 갔답니다.

이진 2011-12-1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멋지니 갑자기 책 내용까지도 기대되는 기현상말입니다 ㅠㅠ

blanca 2011-12-20 09:0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고마워요. 그런데 이진이 성함이에요? 너무 근사한 이름이네요.

2011-12-20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1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1-12-2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맙습니다. `고난을 얘기하는 대신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책을, 저도 읽어보고싶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11-12-21 22:50   좋아요 0 | URL
참 어려운 과제지만 결국 삶이란 게 이 방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들에게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답니다. 참 좋았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12-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사벨 아옌데 대표작으로 <영혼의 집>을 꼽습니다.

blanca 2011-12-26 10:53   좋아요 0 | URL
아, 추천 고맙습니다. 영화도 책도 기회가 된다면 챙겨 봐야 겠군요. ^^

쾌진 2012-01-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 읽고 나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추천' 눌렀어요. 이 책, 담당 편집자인데요...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아마 비슷한 감동을 경험한 게 아닐까 생각하니 기분이 뭉클해지네요.
종종 들르게 될 것 같아요.^^

blanca 2012-01-26 22:13   좋아요 0 | URL
와! 반갑습니다. 비슷한 감동을 경험한다는 말이 정말 뭉클하게 들려요. 정말 좋은 책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간직하고 또 읽고 읽고 할게요.

쾌진 2012-01-30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선생님께서 쓰신 리뷰 글을 저희 민음사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도록 링크를 걸 어도 될른지요? 홈페이지에 있는 리뷰글 아래 <독자리뷰>에서 바로 링크해서 볼 수 있도록요.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blanca 2012-01-30 21:31   좋아요 0 | URL
예, 괜찮습니다.^^

쾌진 2012-01-3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ㅎㅎ
 

그것 보려고요?

그럼 이걸로 봐요.

 

글자가 내 손톱의 반만한 활자로 그득차 있고 종이도 이미 누렇게 변해버린 <김약국의 딸들>을 내밀자 사서는 분주해진다. 바로 자리를 찾아 글자 크기는 두배요, 분량은 반에 삽화까지 있는 또다른 <김약국의 딸들>을 내민다.

 

원래 내가 읽으려고 했던 책은 이 책이었다.

 

 

 

 

 

 

 

 

 

 

 

 

 

 

결국 내가 빌린 것은 이 책이다.

무언가를 강력하게 권유해 주는 사람 앞에서 매몰차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망설이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나는 교과서 한국문학 시리즈 <김약국의 딸들>을 읽게 되었다. 사실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이 나이까지 와서 축약본을 읽는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고전들의 엉터리 축약본으로 허비한 시간들이 더없이 안타까운 터였다.

 

원래 책은 인물들도 서로 헷갈리고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이건 재미있어요.

 

재미있었다. 축약본이라도 나의 저질 기억력으로 인물들은 여전히 헷갈렸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어떻게 안 헷갈릴 수가 있을까. 묘사나 설명은 사건의 긴박한 전개 뒤로 숨는다. 지루할 새도 없고 물론 음미할 여유도 없다. 장단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나의 사념은 뒤로 하고 그저 이야기에만 한껏 열중할 수 있었던 독특한 즐거움이 돌아왔다. 부담스럽지 않게 무겁지 않게. 나는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다고 스스로에게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딸아이는 태어난 지 만 4년이 되었다. 딸아이가 젖먹이 때부터 함께 한 친구와 영화관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팝콘을 사고 콜라를 얻어 먹고 돌덩이 같은 소세지를 넣은 핫도그를 우겨 넣으며 당당하게 영화관에 입성했다. 물론 주어는 '나'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 여덟 살의 라헬은 접혀 있는 시트와 등받이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 다리 사이로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니 고작 만 네 살의 아이는 아무리 노력하고 다리를 버둥거려도 계속 시트와 등받이 사이에 끼일 수밖에. 어린이용 쿠션을 올려 주어도 무게 중심이 안잡혀 아이의 의자는 수시로 접혔다. 반복적으로 오른손으로 의자를 눌러 주어야 했다. 여하튼 엄마는 신이 났다. 팝콘을 마시고 콜라를 들이부으며 아이들보다 더 웃어댔다. 크리스마스. 여섯 살 정도까지 믿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 선물이 있었던 기억은 없었지만.

 

엘프들을 거느리고 최첨단으로 무장한 선물 배달 시스템에서 누락된 한 아이에게 선물을 제때에 전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아더의 이야기. 결국 아더는 이미 은퇴하고 퇴물 취급을 받는 할아버지 산타의 도움을 받아 미션 성공. 놓친 것들은 결국 다시 찾아야 한다고 한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다시 여섯 살이 된 걸까? 옆에는 이제 그 나이가 될 딸애가 짧은 다리를 버둥대며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인지 그저 친구와 영화관에 왔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인지 신나게 웃고 있는데.

 

나도 누락되었던 한 아이 같은데. 긁적 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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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0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축약본, 정말 싫은데....
지루하고 늘어져도 원본 그래도, 작가의 향기를 맡고 싶은데, 아마 블랑카님도 그러시겠죠?
그런데 말씀을 못 하셨단 말이죠, 아아 못살아.

아더 크리스마스 보셨어요? 블랑카님, 저는 겨울 방학 계획 신나게 세웠어요.
1월에 `장화신은 고양이` 개봉한다는데, 슈렉에 나온 그녀석이네요.
꼭 보러가야겠어요, 예고편 봤는데 그 초롱한 눈망울로 하는 앙큼한 짓이란!

blanca 2011-12-09 20:57   좋아요 0 | URL
마고님,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기분 한껏 느낄 수 있어요. 코알라양은 이제 진짜 친구처럼 함께 다니실 수 있어 공연도 보실 수 있겠고 여행도 같이 갈 수 있고. 겨울이 외롭지 않으시겠어요. 그런데 슈렉에 나온 그 눈망울 포스 짱인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라는 거예요? 갑자기 그 고양이가 두 발 모으며 반짝반짝 눈 빛내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1-12-0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0년전에 산 윗책 있는데, 어딘가에 박혀 있는데, 예전에 아침연속극으로 했을 때는 딸의 이름이 안헷갈렸거든요. 이젠 헷갈릴 것 같아요.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인지ㅋㅋㅋ 만 사년이면 생일이잖아요. 공주님께 생일추카 전해주세요.^^

blanca 2011-12-09 20:58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 이름이 헷갈려요. 심각합니다.--;; 등장인물이 많으면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차라리 대하소설 같은 경우는 워낙 반복해서 나오니 더 기억이 잘 나는 것 같고요. 드라마로도 했었군요!

순오기 2011-12-1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약국의 딸들은 님이 보시려던 그 책으로 보셔야 해요.ㅜㅜ
다섯 딸들이 쫒는 것이 확실히 구별되는데도 이름은 헷갈리는군요.ㅋㅋ
돌림자 이름의 폐해라고 생각돼요.^^

분홍공주가 이제 다섯 살이 되었군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
누락된 아이~~~~~~~ 왠지 공감되는 느낌!^^

blanca 2011-12-10 21:50   좋아요 0 | URL
아, 축약본으로 읽어버리니 원전을 다시 읽게 될까 난망시됩니다. 이런 게 폐해군요. 요새 저는 인물이 많은 소설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답니다. 분홍공주는 만 네 돌을 넘은지 한달이면 여섯 살이 되는 억울한 12월생이랍니다. 감사드려요^^

노이에자이트 2011-12-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남에서 나온 것은 가로줄이라서 읽기 불편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다시 한 번 도전해 보세요.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로줄에 나남 것보다 활자가 더 작은 걸요.

그리고 이 소설이 상상 외로 막장 드라마 같은 장면이 많아서 청소년용 삭제판으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어요.

blanca 2011-12-11 22:32   좋아요 0 | URL
노자님, 맞아요. 이 소설이 오싹한 장면들이 많더라고요. 살해 장면도 있고. 청소년용으로 개작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게다가 중학생 대상책이었고요--;; 세로줄로 읽으셨다고요? 노자님은 우리 문학도 거의 다 섭렵하신 것 같아요. 대단합니다. 그리고 다 기억하신다는 것도요. 저는 제가 읽은 책도 제가 읽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랍니다.

프레이야 2011-12-12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를 언제까지 믿느냐 하는 걸로 사람의 순수성을 좀 가늠해볼 수도 있을까요? ㅎㅎ
남중학생 조카는 아직도 믿는대요. 제 엄마와 암묵적으로 믿는 척하며 온기를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늘 느끼는 거지만 만 4살이 된 분홍공주는 무척 영리한 아이일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큰딸도 연말에 태어났는데 이번 생일은 좀 특별할 것 같기도하고 뭐 그래요.^^

blanca 2011-12-12 21:59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따님도 연말에 태어났군요. 지금은 엄청 손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 다 언니, 오빠들 같아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크면 상관없어지겠죠?^^ 크리스마스를 아직 믿는 중학생. 부러운걸요. 믿는 체로 그렇게 엄마랑 공모, 교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믿고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12-13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극단적이고 자극적이라서 기억하고 있어요.박경리 소설 중 히스테리칼한 분위기가 가장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참으면서 읽으니 세로줄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blanca 2011-12-13 23:40   좋아요 0 | URL
사건 위주로 축약하면 더 분위기가 음산해지더라고요. 저는 세로줄은 긴 막대 자 없으면 못 읽어요^^;;

잘잘라 2011-12-1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분명히 저기 맨 위에 나남 가로줄 사서 읽었는데, 영풍문고 종로점에서 현금 주고 사서 읽었는데, 아...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나요. 기억력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듯.. ㅠㅠ 아아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정말 사긴 샀던가? 읽긴 읽었던가?` 헤깔리기 시작했어요. 『보이지 않는 고릴라』 부작용인듯합니다요. 에구.. (찾아보니 책은 있어요. 제 책도 누~렇게^^;;)

기억에서 누락된 김약국의 딸들, 음, 다시 읽어볼까요? 긁적-

blanca 2011-12-15 19:54   좋아요 0 | URL
저는 요새 책을 읽고 돌아서면 아니 뒷부분에만 가도 앞부분 내용이 가물가물하답니다.--;; 아무리 고운 책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속지가 누렇게 변해서 속상해요.

2011-12-1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5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1-12-1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들릅니다. 아더 크리스마스 재미있나요?

blanca 2011-12-19 09:21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딱 크리스마스 주간에 봐주셔야 해요^^ 동심으로 돌아가 산타클로스에 대한 꿈을 마구 꿀 수 있답니다. 재미도 있어요.
 
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이야기는 작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와 이 세상을 덮친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말해 줄 입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런 이야기는 무딘 사람도 차마 발을 뺄 수 없다.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라고 작가는 서문을 연다. 비겁하지 않다. 이건 단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무관하다고 미리 숨어버리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신>이 작가의 유일한 소설로 남아버린 것도 더이상 중언부언하며 자신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의 특권인 것같다. 

건너서든 직접적으로든 인도 사람을 알게 되는 기회가 있으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사람은 카스트의 어느 계급에 속해 있을까? 였다. 인도에 대하여 배울 때 그 불합리하고 불가항력적인 계급의 피라미드는 구두점처럼 따라붙었다. 한국에 와 있는 인도 사람을 소개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계급을 왕관처럼 덧붙였다. 저 사람은 브라만이란다. 브라만. 저 머나먼 끝 대척점에는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가촉민들이 다니는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우산을 쓸 수도 없고 말할 때 내뿜는 입김까지 통제해야 하는. 그 계급의 틀에 의구심을 갖고 반역을 꾀하는 얘기 대신 다만 사람으로서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의 세상의 통념을 잠시 잊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하고 끝난다.  

라헬이 아예메넴으로 돌아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퍼붓듯 성긴 흙을 파헤치며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은빛 빗줄들.
-p.14 

18분의 간격을 두고 태어난 남매쌍둥이 라헬과 에스타가 '늙지고 젊지도 않고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인 서른하나에 고향인 아예메넴으로 돌아오면서 슬픈 회고는 시작된다. 작가의 시어 같은 묘사들은 뭉근하게 이야기를 적신다. 그 어떤 덧붙임도 함부로 내다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소중한 이야기. 절로 젖어든다. 

기억이 잔잔한 차 빛깔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잔잔한 차 빛깔 웅덩이들로 쏟아져 내리는 융단 폭격.
-p.23 

이제는 손을 흔들고 달아난 유년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꽂힌다. 쌍둥이들의 어머니 야무는 그들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하고 옥스퍼드 대에서 유학하고 돌아과 공산주의의 베일까지 뒤집어쓴 오빠 차코와 제국주의 곤충학자와 사별한 어머니가 있는 친정 아예메넴으로 돌아온다.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쌍둥이의 외가는 피클 공장을 소유하고 기독교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례까지 맞춤하게 받은 누리는 자들의 집안이다. 자비와 이성으로 변장한 치사하고 졸렬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의 구현. 그것은 공고하고 그럴 듯한 껍질로 포박되어 있다.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그들의 어머니 아무는 일종의 침입자로 간주된다. 삼촌 차코가 전처와 그 사이에서 낳은 딸 소피 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인도인으로 옥스퍼드에까지 유학한 차코의 전처는 영국인이다. 그 사이에서 낳은 피부 빛깔이 옅은 딸은 스스로를 반쪽 인도인이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쌍둥이는 소피 몰 앞에서 묘한 열등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시제를 혼합한다. 서른하나의 라헬과 그 서른하나였던 엄마 아무의 시간. 달아난 유년은 완강하게 현재로 밀려온다. 이미 사랑을 잃은 엄마. 이미 죽어버린 엄마. 불가촉천민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엄마. 저도 모르게 그 사랑을 방조하고 도와주기까지 하고 심지어 외사촌 소피 몰을 죽게 하고 엄마의 사랑까지 밀려나게 하는 쌍둥이들. 아무도 이것을 이렇게 의도한 이는 없다. 삶은 미리 결론을 안고 미친듯이 달려와 파고든다. 책장에서 시린 바람은 갈피짬마다 숨었다 나오려든다. 차마 한번에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잠시 심호흡을 한다.  

이야기의 끝은 귀향한 라헬로 돌아오지 않는다. 낯선 여관에서 몸이 퉁퉁 불어 서른하나에 죽은 엄마가 사랑했던 그 시간으로 맺는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랑.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 주고 결국은 남자를 죽게 할 그런 사랑. 엄마가 했던 사랑.  

 

그녀가 다시 그 말을 하려고 돌아섰다. 

'나알리(Naaley).'
 내일.

 

너무나 작은 것밖에 말할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백만 개의 별을 주고 싶은 이야기. 찬란한 패배자에 대한 이야기. 그러기에 신을 원망하고 신에 대하여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 작가가 얘기했듯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삶같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하나의 삶을 사는 일처럼 고달프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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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2011-1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작은 것"들에게도 "신"이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나서 제목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blanca 2011-12-08 00:02   좋아요 0 | URL
like님 역시 읽으셨군요! 저는 사실 그다지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 이런 소설이라니요!

비로그인 2011-12-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숨만 쉬고 있었어요.
블랑카님, 저도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blanca 2011-12-08 00:04   좋아요 0 | URL
강추 또 강추합니다. 수다쟁이님은 어떤 느낌을 가지실까요? 정말 읽고 나면 왜 부커상을 받았는지(사실 이 상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심사위원들 손까지 잡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그랬고 부커상 수상작품은 정말 반짝 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어요. 슬프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읽다가 빵 터져 버릴 정도로 웃긴 대목도 많답니다. 작가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2-0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매번 들었다놨다 했었어요, 블랑카님. 아룬다티 로이의 유일한 소설이랬던 것 같아요. 저는 늘 <9월이여, 오라>가 더 끌리긴 했지만요. 대학 때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를 썼었는데 그때가 막 생각나네요. 논문수준이 아니어서 지극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썼었겠지만 계급으로 나뉘는 삶과 사랑을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살만 루슈디랑 같이 사서 꼭 읽어봐야겠어요. 그리고 저도 어떤 형태로든 "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blanca 2011-12-08 22:00   좋아요 0 | URL
<9월이여 오라>가 아룬다티 로이의 에세이였군요!! 오, 놀라워요. 표지의 사진도 너무 아름다워요. 역시 무언가 다른 사람이긴 한것 같아요. 전혀 비겁하지 않은. 살면거 그러기 참 힘들잖아요.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도 쓰셨어요? 아, 그렇군요. 아직도 일본은 카스트 간 자유로운 결혼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3세계 작가들은 절망에 대한 통찰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북극곰 2011-12-0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이사가더라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으로 책장 깊숙히에 잘 챙겨두고 있어요.소설이 한 권 뿐인건 아쉽지만 그녀의 행보엔 진정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blanca 2011-12-08 22:01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이라는 표현이 참 따뜻하네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다는^^;; 아, 그래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욕심과 의무가 있다면 참 고달프겠지요. 그녀의 행보에 저도 박수를 보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예정이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듯이, 거꾸로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에 한순간 한순간 죽을 듯이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거 같아요, 삶이란게 참 동전의 양면 같아요.

누군가의 유일한 소설이라,,, 어쩐지 짠하네요.

blanca 2011-12-09 21:01   좋아요 0 | URL
이 작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떤 책 읽을까 둘러보다 소설가 한강이 추천하는 책에 있어 무심코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 앞에서는 감히 `소설의 죽음` 같은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온몸에서 자신이 가진 것,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뽑아내어 이제는 더이상 소설을 쓸 수 없나봐요. 아쉽기도 하지만 참 근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1225979 2014-03-2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저도 같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다가 여운이 남아 한 바퀴 돌던 중에 좋은 글을 만났습니다. 기쁜 마음에 덧글 남깁니다. 시간 나시면 제 블로그에 오셔서 작은 것들의 신에 대한 제 감상도 읽어주세요.

제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anssjaj 입니다.

좋은 책인데, 많이 알려지지 않아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분을 뵈니 참으로 반갑네요.

blanca 2014-03-24 18:06   좋아요 0 | URL
블로그 방문해서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참 아쉬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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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흐인벤션이었다. 싯누런 겉표지의 악보책을 올려놓고 안 쓰던 왼손을 거의 오른손 만큼 써야 하는 모험은 할 만하지도 다이나믹하지 않았다. 바흐인벤션을 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는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거의 매일 졸랐던 것 같다. 바흐인벤션만 치려하면 내 손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마구 떼를 쓰며 이제는 그만하라고 발을 구르는 것 같았다. 오 년 간의 피아노 교습은 그렇게 바흐 덕택에 막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인간의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연결된 정신의 불균형을 치유하기 위해 바흐라는 희유의 천재가 만들어낸 장절한 소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원고를 쓰다가 지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더듬어 연습하며, 숨이 멎을 듯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우주에 기분 좋게 몸을 내맡긴다.
p.295 

어깨가 결릴 때 하루키는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2성 인벤션'을 친다. 그게 하루키와 독자를 갈라놓고 그를 유일무이한 작가로 만드는 지점처럼 보인다. 나는 울면서 그 앞에서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을 생각했을 때 하루키는 '자 이제 한번 쉬어 볼까.' 하며 바흐의 인벤션을 쳤다는 얘기다. 안 쓰던 왼손의 근육을 오른손만큼 단련시키는 일은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루키는 그 느낌을 즐기고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소설을 제대로 완독해 보지 않고('노르웨이의 숲'도 거의 통독 수준이었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고도 충분히 그것에 몰입하고 반응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멈추고 머뭇거리고 돌아선 곳에서 그는 출발한다. 그러니 그의 얘기는 지루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고 뻔하지 않다.  

청춘, 반항 들의 표지자처럼 아이콘화된 그는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들었다. 작가로 데뷔한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이 책에는 단행본으로 발표되지 않은 글들, 에세이, 여러 책들의 서문, 해설, 문학상 소상 소감, 질문과 대담 등이 날것으로 퍼득인다. 내성적이고 관계를 두려워하는 하루키와 그가 좋아한다는 굴튀김 한 접시를 놓고 마주앉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라고 지우의 딸 결혼식 축사를 보내는 하루키와 함께. 

한창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았을 때 그에게 예루살렘상이 수상되어 그 수상식 참석 여부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키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물론 가는 것을 선택했다. 수상식에 참석해서 하루키는 예상과는 달리 한 방 제대로 먹인다. 역시나.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p.91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더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알이라고,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스템'입니다. 본래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저 혼자 작동하여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만듭니다. 냉혹하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p.92 

상을 주는 주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비난하는 방법은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게 통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러지 않았다. 주는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의 껍질을 깨고 그 사람들의 속살에 가닿는 말들을 쏘아 올렸다. 그것이 무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루키는 일단 그렇게 했다. 그게 하루키다. 

그의 스콧 피츠제럴드론과 레이먼드 카버 얘기는 당장 불꺼진 서점이라도 달려가 둘의 책을 들고 나오고 싶게 만든다. 레이먼드 카버의 전작품을 번역해 가는 일을 했던 하루키가 카버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스하고 눈물겹다.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 뽐내지 않는 소설을 쓰고 뽐내지 않는 시를 쓰고 뽐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고마워요, 레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위대한' 피츠제럴드에 대한 얘기는 또 어떠한가. 피츠제럴드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청춘기의 아름다운 발로이자 그 숨결이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신화로 결정화한 것이라는 하루키의 얘기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하여 자신의 성공을 연기했던 개츠비를 부활시킨다. 저기에 꿈 하나를 놓고 달음질쳐 갔던 우리의 청춘에 대한 복기와 함께. 

키스 헤링(herring;청어)의 그림을 보면 반사적으로 청어 초절임이 당겨 곤혹스럽다는, 자신이 굴튀김이 아니고 소설가라 기쁘다는 하루키의 잡문들은 무언가를 한없이 그립게 만들고 아련하게 만든다. 누군가와 반 세기를 살아도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루키는 함께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아주고 싶게 만든다. 열악하고 치사하고 차가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그럼에도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견딜 수 있는 우리들을 그는 불러 모은다.  그가 내세운 반세기가 넘어도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에게도 유효하다. 그것은 '멸망의 미학'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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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1-2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다가 좋아서 포스트잇 붙여가며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아직 다 못읽었어요), 블랑카님의 리뷰라니! 전 리뷰를 안써도 좋겠네요. 인용하신 91페이지의 에피소드는 저도 무척 좋았어요. 알의 편에 서겠다는. 그리고 모두가 거기에 가서 그 상을 받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는 거기에 가서 그 상을 받고 소감도 이야기하잖아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게 대체 가능하단 말인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나이에 대해서 이야기한 하루키도 좋았어요. 이 리뷰를 읽으니 어서 빨리 끝까지 다 읽고 싶어져요.
리뷰를 써줘서 고마워요, 블랑카님. 왜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마워요.

(235쪽을 읽는데 가슴이 벅차올라요!)

blanca 2011-11-23 23: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를 쓰셔야지요. 저와는 또다른 다락방님의 감상을 듣고 싶어요. 그죠!! 저도 수상을 거부하는 대신 가서 그 사람들 앉혀 놓고 자기 소신을 피력하는 모습이 참 하루키답다,고 생각했어요. 당사자들을 앉혀 놓고 불편한 얘기들을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하루키인가 싶기도 했고요. 다락방님이 누군가에게 하루키의 그 단편을 필사해 주는 사진 참 근사했어요.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잘 모르지만 저의 친구가 저에게 열변을 토하며 그 책을 안긴 장면, 다락방님이 또다른 분에게 마음을 담아 자신이 반한 것을 전달하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요. 그냥 하루키를 생각하면 우리의 청춘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2011-11-23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23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당장 미국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피츠제럴드와 카버.
당장 깨어지고 싶게 만드는 하루키의 알의 편에 서겠다는 말.

blanca 2011-11-23 23:11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저는 카버를 원문으로 읽어보겠다고 한창 시간 없을 때 새벽마다 아파트 베란다에 차갑게 궁둥이 깔고 한 달을 매달렸었잖아요.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그 사람은 정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여기가 아픈데 카버가 말한 건 저긴데 묘하게 공명해요. 정말 기가 막히게.

마녀고양이 2011-11-2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루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사랑해요!
저는 소설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더욱 그에게 반하게 되더라구요.
넘 좋다,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맘을 굳혔어요! ^^

blanca 2011-11-23 23:12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도 그래요! 저는 사실 하루키 소설은 워낙 마니아 들이 주변에 있어서 타의에 의해 두 번 시도해 봤는데 사실 저랑은 좀 안맞더라고요. 그러나 에세이는 아, 정말 아껴 읽고 싶어요.

2011-11-23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12-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하루키 소설은 상실의시대가 다에요.
먼북소리의 여운은 길고요.
이 잡문집도 여기저기 호평이군요, 역시.^^ 담아가렵니다.
늘 멈추고 머뭇거리고 돌아선 곳에서 하루키는 시작했다는 문장이 쏙 들어와요, 블랑카님.
조용한 일요일 오후에요.^^

blanca 2011-12-04 21:3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은 초겨울 날씨답잖에 참 푸근했어요. 저도 <상실의 시대>도 거의 대충 읽어서 하루키를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먼 북소리> 참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에세이들이 참 좋아요.

2011-12-06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6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7 0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