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책을 읽는 경험은 첫 키스와 같다.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 키스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

 

 

 

이제 2012년도 채 한달이 남지 않았다. 거울을 본다.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온 날만큼 더 살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또 몇몇의 지인도 내 곁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꾸준하게도 뚜벅뚜벅 제 갈길을 간다. 한파는 시간의 흐름과 마무리를 응축한 은유 같아서 더 시리다. 눈이 와도 이제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일은 없으리라. 아이의 성장은 나의 또다른 시계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그녀는 나에게 완고하고 성마른 인상이었다. '의식의 흐름기법' 들어는 봤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를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그에게 이 책은 첫 키스를 회고하는 첫사랑 같은 글이라 한다. 이미 열다섯 살에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첫 키스는 뒤늦게도 찾아온다. 이 책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의식의 흐름'이란 거창한 어구 아래 그저 내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모호한 생각, 느낌 들이 그녀의 명료한 언어로 분출된 듯한 느낌. 정말 농밀한 책. 구십 년도 더 전의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무단 침입한 듯하다. 표현할 수 없었던, 말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그녀의 언어에 빚진다. 소설의 한계의 철책은 그녀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구나.

 

 

런던이다. 찬란한 6월의 아침. 오십 대의 클라리사는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 파티가 열린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서사는 그것이 전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런던의 풍경, 그녀를 둘러싼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 때로는 그렇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의 정경.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p.9

 

수많은 아침을 밀어넣은 지극히 농밀한 이 하나의 아침. 이 순간. 젊은 시절의 어리석은 사랑도 오늘의 어리석은 세속적인 욕심도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리 불행해도 인생은 포기 못할 그 어떤 마지막 꿀을 숨기고 있다. 무모하고 비겁하고 "낭만적인 해적 같은 남자"인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랑, 피터 속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바로 이거야.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을 천천히 불빛 아래 돌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최상의 향기를 더해주는 힘이지. <중략> 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p.115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추억의 귀환. 끊임없이 테잎은 되감기고 의미는 가공된다.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했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이제는 무의미하다. 내 인생에 삶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무게의 추는 숙명적으로 내 삶의 닻이다.  단하나의 무의미함도 어떤 하나의 사소함도 걸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댈러웨이 부인>을 읽아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속의 '사자' 거기에도 파티가 있었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 우연히 죽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아내 옆에서 삶을 조망하는 남자가 있었다. 묘하게 닮아 있는 이야기.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p.291

 

노이모 자매의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은 아내 레이첼의 추억을 버지니아 울프의 피터처럼 불빛 아래 천천히 돌려보게 된다. 역설적으로 추억의 귀환은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의식으로 연결되고 현재의 순간에 대한 농밀함으로 통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두 작가의 생몰 연대를 보니, 놀랍게도 같다. (1882~1941)  버지니아 울프의 약력을 보니 그녀의 죽음이 제임스 조이스의 죽음에서 온 우울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친분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밀착되어 있던 관계였던 것같다. 파티라는 생의 축제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삶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두 작가의 공통적인 통찰에서 유려하게 빚어낸 깨달음이다. 클라리사도 가브리엘도 어쩌면 작가들 자신의 투영인지 모르겠다. 파티를 개최하고 파티에서 시를 읽고. 각기 다른 의미에서 파티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그들도 그들이 걸었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리도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그럴 것을 이미 안다. 내일 죽을 것을 이미 아는 것은 머리로 가능한 명제이지, 가슴으로 간직하는 깨달음은 아니다. 모든 것의 유의미성도 무의함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지금 하는 사랑은, 지금 하는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기도 한다. 삶 앞에서 어리석어지는 것은 이 단순한 명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클라리사의 말처럼 그것은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뛰어들고 싶어했을 정도로 화창했던 유월의 아침. 그 순간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반복된다.

 

눈이 온단다. 사박사박 그 눈을 밟으면 2012년 12월 5일은 또 허공으로 스러질 것이다. 그 경계를 딛고 나는 또 나아가고. 무작정 스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은. 

 

P.S.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다. 각기 다른 세 시대, 세 여인의 접점은 <댈러웨이 부인>이다. 심지어 한 명은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라는 이름과 같다. <디 아워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을 <댈러웨이 부인>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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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사랑의 시작
    from A Month in the Country 2012-12-06 23:17 
    서재 이웃분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누구처럼 쓰고 싶은지. 소설이나 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 나는 누구를 표준모델로 골라야할까 고민을 좀 했었다. 일전 한 페이퍼에서도 썼었는데, 내게 '글'이란 정연(井然)과 정연(整然)이 만나서 이뤄내는 무겁거나 깊은 어떤 것,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의 밖에 머무는 어떤 것이다. 지금처럼 소소한 상념들을 블로그에서 끄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학소녀 시절을 벗어난 이후 '소설'이든 '
 
 
댈러웨이 2012-12-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저는 <출항>을 끝냈고, 울프의 다른 책들이 오는 동안 <등대로>를 다시 읽었고, <제이콥의 방>을 읽고 있어요. 반가워요. 버닝햄의 책도 함께.

댈러웨이 2012-12-05 21:35   좋아요 0 | URL
마이클 커닝햄이에요. 뭘 버닝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 블랑카님, 저 먼댓글 달고 싶어지는데요? ^^

blanca 2012-12-06 09:31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이 떠올랐어요. 왜 댈러웨이라고 이름 붙이셨는지 설명 안 하셔도 느낌으로 다가올 만큼 너무 좋은 책이더라고요. 저도 커팅햄이라고--;; 수정했답니다. 참, 댈러웨이님! 저 울프의 다음 책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으로(아, 너무 지난한 표현이지만) 한 권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2-12-0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커팅햄의 <첫 키스> 비유가 왜 <댈러웨이 부인>에 가서 걸리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일인.
억지로 읽어보려 했는데도 그냥 덜 읽고 반납하고 만 기억이 있네요.
어쩌면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삼아봅니다.
291쪽 옮긴 글(깔끔한 번역 같지 않아요.)보다 저는 블랑카님의 해설이 더 좋은 걸 어쩌라구요?^^

blanca 2012-12-06 09:33   좋아요 0 | URL
아, 팜므느와르님, 댓글 읽고 커닝햄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추신으로 덧붙였습니다.^^ 아, 번역이요! 그러실 수도 있어요. 제가 읽은 이태동님의 번역은 참 좋았어요. 일단 표지가 이뻐서 낙찰했더랍니다.^^;;
 

이런 뭉클함은 간만인 것 같다. 책 말미 작가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 "사망하기 이 주 전,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금을 수령한다."는 지점.

 

 

 

 

 

<감상소설>의 작가 미하일 조셴코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평생 소외된 삶을 산다. 혁명 후 고도의 정치화된 소련 사회에서 그가 그려내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빈곤한 사람들의 정경은 하나의 직무유기로 치부되어 마침내 작가동맹에서조차 제명되어 생계에 극도로 곤란을 겪게 된다. 해결의 물꼬가 트이자마자 죽음을 맞게 되는 그의 삶은 그가 이 책에서 그려낸 숱한 비극적 삶의 주인공들과 묘하게 겹친다.

 

이 소설들은 변변찮고 약한 사람들과 서민들에 대한 것이며, 사라져가는 가련한 삶에 대한 것이다.
-1판 서문 중

 

 

그는 러시아의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니다. 생소한 작가. 지극히 평범한 제목의 단편집.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는 갑남을녀는 비범하다. 이야기 속에 박제된 비현실적인 종잇장같은 인물들 대신 당장이라도 펄떡이며 물 위로 튀어오를 것 같은 그들의 생명력은 적나라하게 사실적이다.  작가는 나약하고 어리석고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그래서 자기가 쳐 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기도 하는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로 치면 루저들에 대한 조망이다. 그 루저들은 하나의 기질이 극대화되어 희화화된 면도 있지만 그 속에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그들의 실수와 착각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들은 미끄러진다.

 

아폴론과 타마라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군대 징집에 끌려가는 무도회 전문 피아니스트. 그는 몰락한 채로 돌아오고 여자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이제는 단조로운 피아노 소리에 왈츠를 추는 문화마저 쇠락의 길을 걷고 피아니스트는 공동묘지의 산역꾼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몰락일까? 사랑하는 여자와 이루어지지 않고 더이상 아름다운 음악들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의 삶은 다른 종류의 소소한 행복들로 채워진다. 그는 성실히 일하며 평화롭게 늙어간다. 그리고 예전의 여자가 죽고 난 이틀 뒤에 죽는다. 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 마침표를 찍는다. 군대에 소환되지 않고 무도회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높여 사랑하는 여자와 살았어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그 여자와 손을 맞잡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삶은 단편적인 도식에 의하여 성립하는 명료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글과 말로 체감할 수 없다. 대신 이런 작가의 이러한 이야기로 찰나이나마 저릿하게 느낀다. 그때 그랬더라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그것은 아무도 단정지을 수 없다. 외형적인 가치 척도로 절대 우위에 있는 상황의 가정법 안과 그렇지 않은 배경 속의 나. 삶은 저울질로 완벽하게 무게를 잴 수 없다.

 

사람들

 

귀족 가문 출신의 사내가 몰락하여 마침내 아내마저 이웃에게 빼앗기는 처지가 되는 정경은 눈물겹다. 그가 짐승처럼 살며 아내 주위를 배회하다 떠나고 난 뒤 아내는 이웃 남자의 아이를 출산한다. 작가는 '멋진 봄이었다'고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내의 전남편에게서 빼앗아 온 석유곤로 값을 돌려줄 수 없게 되자 그 금액만큼을 고아원에 기부한다. 사라져 버린 '그'가 가졌던 느낌들은 낯설지 않다. 삶은 오늘도 여전히 투쟁에서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기념으로 고아원에 기부를 하는 남의 아내를 빼앗은 남자는 어떠한가. 이런 모순적이고도 비합리적인 캐릭터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던지. 그러나 현실 안에서 우리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는 것들이 오롯이 한데 담긴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사람의 속은 때로 마블링 같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뒤틀려 있는 모습. 그것은 차마 직시하기 힘들었던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의 표출이다.

 

그는 불가사의한 삶 앞에서 경악했다. 삶이란 지상에서의 존재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 같았다. 그는 죽음과 같은 슬픔 속에서 문제는 바로 삶의 지속이라고 느끼며 자신의 능력, 자신의 지식, 그리고 그것을 적용할 수단을 생각하고 찾았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차례로 상기한 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서글픈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 중

 

 

즐거운 모험

 

전도유망한 청년이 아가씨와의 저녁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친척 아주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풍경은 또 어떠한가. 아주머니는 마침내 죽고 청년은 아주머니가 남긴 유산으로 아가씨와 결혼에까지 이른다. 작가는 맹랑하다. "그들은 행복했다." 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권선징악은 없다. 어떤 일로도 단죄받지 않는다. 그가 삶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생이 가로수 길을 걷는 아침 산책처럼 보이던 젊고 아름답던 시절에, 작가는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의 두 눈이 그런 것을 보려 하지 않았다. 작가의 눈은 여러 가지 즐거운 것들을, 여러 가지 아름다운 대상과 경험만을 보았던 것이다. 꽃이 자라는 모습,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모습,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 사람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 무엇이 무엇으로 움직이고 무엇에서 자극을 받는지, 작가는 어린 나이와 우둔한 성격과 순진한 관점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훗날 작가는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러 가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이런 것이 보인다. 머리가 백발인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과 악수하고,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건넨다. 예전이라면 작가는 이런 장면을 보고 영혼의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중략> 그렇지만 지금 작가는 시선의 착각을 믿지 않는다. 의심이 작가를 삼켜버렸다. 작가는 그 백발의 사람이 악수를 하고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는 것은 위태로운 자신의 일자리를 살려보려 하거나 교수 자리를 얻어 미와 예술에 대해 강의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 <라일락 꽃이 핀다> 중

 

슬프지만 우리는 상대방을 오해하고 오독하며 켜켜이 쌓인 불신의 탑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방어기제를 평생을 통해 활용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도 없고 아름다움과 진실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삶 그 자체를 추동할 수도 없다. 먹고 살고 견디려면 어느 정도는 절망적이어야 한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말들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이 그의 인물들을 통해 표현될 때 우리는 찔리기도 하고 속절없이 웃음보가 터지기도 한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이야기했던 찰리 채플린의 시선은 조셴코가 이미 형상화했던 명제였다. 암염소를 소유한 줄 알고 뚱뚱하고 늙은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구조조정까지 당하는 하급관리의 이야기에 마냥 웃어젖힐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이런 것이 전부일까? 작가 조셴코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내면에서 지치지 않고 피어오르는 그 작은 소망. 그도 그런 게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러나 작가의 성정은 감상적이며, 작가가 소망하는 것은 보도 위에 제비꽃이 자라는 것이다.

-<라일락 꽃이 핀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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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 오랜만입니다. 저만 오랜만인가요~? ㅎㅎ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단편집이라.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조합이라 기대가 가요.
특히 피아니스트가 나오는 첫번째 단편이 끌리는 군요.

blanca 2012-11-30 10:2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서재에는 종종 방문하고 있다지요. 이제 곧 방학이네요.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검색하다 그냥 기대없이 읽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답니다.

댈러웨이 2012-11-3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렇게 리뷰를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지금 뭐 했게요? 비밀! ^^

blanca 2012-11-30 10:2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온갖 상상이--;;

2012-11-30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30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1-3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뭉클한 단편, 읽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문학동네, 요새 할인대전 하던데 왕창 구입하고 싶지만 갈등 중이에요^^

댈러웨이 2012-11-30 10: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오늘까지 미루다가 그래서 문학동네 지를려구 책상에 앉았어요. ㅎㅎㅎ.40프로면 정말 배송비 빼고도 남는 금액요. 민음사도 40프로라. 하. 갈등요.

blanca 2012-11-30 18:37   좋아요 0 | URL
그게 한 두권씩은 해당 안되는 이야기겠죠? 이 댓글들을 읽는 순간 또 찾아보러 가게 되네요 ㅋㅋ

Jeanne_Hebuterne 2012-12-0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상상력이 있는 사람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순간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리뷰.

blanca 2012-12-05 12:45   좋아요 0 | URL
아, 상상력에 비례하는 공감력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를 심하게 아프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늦된 아이에 속하였고 특히나 숫자에 둔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나눗셈 쪽지시험을 보았을 때 물론 결과는 처참했고 틀린 수대로 손바닥을 맞고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수학, 물리학, 화학 등에서는 꾸준히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영영 숫자, 과학과는 멀어질 줄 알고 기뻐했지만

 

소위 문과 속의 이과라 통칭되는 전공과 관련된(그러니까 나의 전공과는 무관한) 회사에 취업을 해서 울며불며 또 회계 공부를 해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좌절할 수밖에. 솔직히 청소년 권장도서라는데도 불구하고 화학에 관련된 내용의 태반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 중고등학교 수준이었을 텐데.

 

 

 저자 올리버 색스는 이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정신과 교수로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사랑의 기적>의 원작자로도 유명하다. 2004년 출간된 <엉클 텅스텐>의 개정판이다. 일종의 올리버 색스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꼬마 소년의 화학에 대한 열정의 기록이라고나 할까. 중간 중간 과학과 의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장착하고 태어난 듯한 대가족에 대한 아련한 시간들에 대한 회고도 있다.

 

엉클 텅스텐은 텅스텐으로 백열 전구의 필라멘트를 만드는 일을 했던 올리버의 데이브 외삼촌을 일컫는 용어다. 18남매 중 열여섯 째로 태어난 어머니 덕분에 올리버는 이모와 삼촌 풍년을 맞는다. 삼촌들은 올리브의 화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이모들은 숫자와 자연, 애정에 대한 갈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주로 그가 하는 이야기는 역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선적, 논리적인 순서가 아니라 도약, 분열, 수렴, 일탈, 반복, 궁지로 점철된 화학사에 대한 것이다. 돌턴의 원자론으로부터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양자의 발견까지 화학 교과서에서 줄기차게 거론되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기억의 지형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 정말 낯설게 그러나 때로는 낯익게 튀어 나온다. 물론 그의 입을 빌려 나오면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각색된다. 한창 화학 교과서 주기율표에서 원소들의 위치와 특성을 암기해야 하는 현역에 있는 학생들이 읽는다면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 같다. 화학을 단순히 여러 교과 중 골치 아프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박제한 상태에서 암기하고 끝내버린 나로서는 너무 뒤늦게 발견한 책이라 아쉬울 뿐이다. 꼬마 올리버가 이렇게 화학에 열중한 이유는

 

내가 화학을  사랑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학이 '전환의 과학'이기 때문이었다. 성질 자체는 고정되어 변함없고 영원한 몇십 가지의 원소가 수많은 화합물을 탄생시키기 때문이엇다. 원소의 고정불변성은 나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안한 세상에서 한 자리를 지키는 일종의 닻과 같았다.

-p.323

 

라듐에 대한 장에서 그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받아 읽었던 퀴리부인의 전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기억과 겹친다. 시간이 훌쩍 흘러 그가 수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을 때 그의 추억은 한 명의 청중을 미소짓게 한다. 바로 퀴리 부인의 딸이자 그 전기의 저자였던 에브 퀴리였다. 나도 언젠가였는 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제일 처음으로 읽은 전기가 바로 마담 퀴리에 관한 것이었다. 삽화가 아주 아름다워서 퀴리 부인이 소녀 시절에 마호가니 책상(아, 마호가니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앞에서 아버지와 나누던 교감,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던 모습, 남편의 죽음 등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장에는 흑백 사진으로 퀴리 부인과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떠났던 허니문의 기록도 있었다. 그 책을 몇 번이고 읽고 나도 퀴리 부인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올리버 색스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아련한 잔상에 잠겼다 퀴리 부인의 딸과 조우한 대목에서 나도 마치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것처럼 반가웠다. 원자물리학, 핵물리학은 순수하고 태평했던 퀴리 부부의 시대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는 그의 슬픈 증언은 인간의 지적인 호기심, 사물의 진리를 파헤지고자 하는 연구욕이 지배욕과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버릴 때 얼마나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지를 보여준다.

 

자 이 정도까지 왔으면 이 책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다. 솔직히 끝까지 못 읽었다. 주기율표의 원소 하나 하나마다 자신의 삶을 대응시킨 프리모 레비의 간이 자서전 같은 이야기. 아마 나는 우라늄부터 인내심과의 사투를 벌이다 포기해 버렸던 것같다. 올리버 색스의 책과 함께 읽었으면 완독에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같다.

 

 

 

 

 

 

 

 

 

 

 

 

 

 

 

 

 

가을에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냄새가 난다. 낙엽, 휴식하는 대지, 불타는 나뭇가지 더미, 즉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끝나가는 것들에게서 나는 냄새 말이다.
- <주기율표> p.133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상상과 감성을 잊고 워즈워드도 말했다시피 '찬란했던 영광이 평범한 일상의 빛으로 바래가는 과정'인 걸까?

-<이상하거나 멍청하거나 천재이거나>p.354 

 

 

올리버 색스는 열네 살 때 '화학에 대한 열정이 죽었다'고 느낀다. 끝나가는 것들. 유년기의 끝과 청소년기의 시작이 맞물려 있는 지점에서 올리버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 든 할아버지가 되어 그 시간들을 다시 복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하며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끝나가는 것들에서 나는 냄새를 다시 찬찬히 맡는다. 그리고 그 향기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전염된다. 관심분야는 달랐지만 무언가에 대한 계산되지 않은 열정으로 하루가 짦았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책. 다 읽고 나면 태반이 화학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절반을 넘는 삶에 대한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좋은 책. 아이가 크면 화학이 지겹다고 얘기하기 시작하면 꼭 읽히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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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3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학과목을 싫어했던 저도 이 책을 학생때 읽었더라면 좋았겠어요. 주기율표도 전 완독 못한 상태인데 저런 구절이 있군요! 블랑카님 여긴 제법 바람이 쌀쌀해요. 행복한 오후 보내세요.^^

blanca 2012-11-14 10:21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여긴 정말 너무 너무 추워용. 따악 감기 걸리기 좋은 날씨. 전 겨울을 안 좋아해서 벌써 봄을 기다린답니다.

다크아이즈 2012-11-13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딴 건 모르겠고, 지금 같은 가을에는 블랑카님의 글을 읽는 게 제격이란 생각밖에는...
이런 화학스런(!) 책을 어떻게 감질맛나는 블랑카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 시샘 어린 존경만...
앗, 위에는 제가 의지하는 프레이야님 등장하셨다~~ 늦가을 오후 저, 대박났어요.

blanca 2012-11-14 10:23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솔직히 제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이제 좀 말랑말랑한 책들로 가려고 한답니다.

댈러웨이 2012-11-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리부인을 저도 읽은 것 같은데 왜 마호가니 책상 같은 건 기억이 안날까요? --;

블랑카님, 사실 좀 일찍 댓글을 달고 싶었어요. 근데, 저도 심하게 문과였는데... 이런 책을 읽으셨네요. --; 밑에 인용하신 두 부분은 문학책 같습니다. --; 뭐에요, 이 책?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하는 거에요? --; (땀만 삐질삐질 --; 그렇지만, 나중에 아이에게 읽히면 정말 좋을 것 같긴 하네요. ^^)

blanca 2012-11-15 09:59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책상이 너무 강렬해서^^;; 뭔가 찾아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에겐 역시나 무리수였던 것 같아요. 좋은 책들이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더라고요. 딱 화학 시간에 수업 받을 때 함께 읽으면, 특히나 주기율표 배울 때 너무 좋을 것 같아요.^^

Jeanne_Hebuterne 2012-11-2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주기율표를 외우고, 화학과 생물의 그 무서운 결과 값에 감동했던 사람 중 1인으로서 주기율표를 아직 못 읽은 것이 늘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보면 칼슘 같기도 하고 저렇게 보면 칼륨 같기도 한데 철이 아닐까? 라는 대화는 화학에서는 불가능했어요. Ca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칼슘이 될 수밖에 없는 그 명징함. 나올 수 없는 무엇이 나오면 돌연변이라 일컫는 희극을 사랑했어요. 어쩌면 너무 많은 기준에 자신을 스스로 맞출 수 없어 한탄하다 겨우겨우 찾아낸 원칙에 기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블랑카 님의 글을 읽으니 뒤늦게 듭니다. 깨달음은 너무 늦거나 이르지 않게 찾아와야 하는 것을.

blanca 2012-11-29 10:05   좋아요 0 | URL
저는 이과와는 담쌓고 지낸 사람이라 이런 명료한 학문에 열중하고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은 또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 같아 한편 부럽답니다. 다음 생에는 좀더 명료하고 용감하게 태어나고 싶어요.쥬드님.

다락방 2012-11-3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기율표]의 티타늄편이요, 블랑카님. 이 책은 티타늄에서 압권이에요!!

blanca 2012-12-02 14:3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다시 한번 <티타늄>편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무도회가 끝난 뒤 펭귄클래식 8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무도회가 끝난 뒤>는 마치 삶의, 청춘의 은유 같다. 제목만으로도 왠지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삶은 몇 개의 찬란한 순간과 그 순간들의 뒷감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뒷감당이 반드시 성가시고 초라하고 처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삶의 교사 톨스토이가 교조적인 설교를 늘어 놓을 때에는 조금 멈칫하게도 되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설교대신 명징한 서사를 날린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데에 절로 수긍이 갈 정도로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딱 그대로의 완벽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순간들이 있다. 노년에서 뒤돌아 본 그곳에 정지되어 있는 순간들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평범한 이름의 이반은 젊고 활기찼던 대학생 순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의 회고담을 숨을 멈추고 듣는다. 거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소녀가 있고 그 소녀가 위무도 당당한 은빛 견장을 단 아버지와 등장하여 마주르카를 춘다. '나'의 앞에서 그 부녀는 하나로 혼재된다. 딸을 아름답게 입히기 위하여 정작 자신은 낡은 부츠를 신고 딸과 무도회에서 스텝을 밟는 아버지. '나'는 단박에 그 부녀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소박한 부츠와 딸을 닮은 다정한 미소가 함께 떠오르면서 가슴 벅차도록 정겹고 따뜻한 감정이 밀려들었지요.

-톨스토이 <무도회가 끝난 뒤> 중

 

삶은 때로 가혹하게 교훈을 설파한다. 삶은 단순하지 않다. 무도회에서의 아름다운 부녀와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다.  반전은 잔혹하게 다가온다. '나'는 거리에서 그 다감하던 아버지의 모습 대신 도망가려던 포로를 가차없이 매질하고 학대하는 폭력의 주동자로 그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의 시선을 짐짓 피한다. 당당하고 부유한 아버지가가 되기 위하여 타협하여야 하는 것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 이성적이고 세속적이고 그럴 듯한, 그렇고 그런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톨스토이는, '나'는 이러한 폭력의 구체화만으로도 자신의 소망, 환상, 사랑을 그 자리에서 포기해 버린다. 톨스토이가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재산, 저작권을 포기하려 했던 그 모습과도 닮아 있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달아 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물러서기란 쉽지 않다. 그게 뭐 어때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라고 쉽게 타협하고 체념해 버리고 침묵해 버리고 견디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두 남자는 묘하게 닮아 있다. 그렇게 인생의 비의는 벗겨진다. 정말 톨스토이다운 이야기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가난하고 비참한 농노가 주인에게 자신의 결백과 진정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한 심부름은 맡은 돈을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가 대들보에 목을 매는 것으로 종결된다. <폴리쿠시카>. 이 불쌍하고 전혀 정당해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묘사의 천착은 눈물겹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하니 막힌다. 옮긴이가 '최상의 리얼리즘을 이루어 낸 작가'라고 그를 명명한 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삶은 그 정도로 비참하고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맥을 함께 한다.

 

<무도회가 끝난 뒤> 사랑과 정의와 대의의 환상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  그 청년과 <폴리쿠시카>의 그 비참한 농노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절망을 얘기하려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얘기해 버렸다. 대령에게서 매질을 당하던 포로와 그 대령의 품에 안겨 사뿐히 스텝을 밟던 아름다운 소녀와 주인에게 자신의 충절을 증명해 보이려다 또다른 배신자처럼 오인받을 상황에 몰려 목을 맨 농노. 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다 존귀하고 눈물겨운 생명이다. 그런 얘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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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0-3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훔쳐볼 때마다 <글 잘쓰는 블랑카>라는 생각만 들게 하는 블랑카님.
첫 단락부터 장난이 아니네요.
많이 읽는다고 다 잘쓰는 건 아닐텐데, 이건 뭐... 비결은 꾸준히 쓰는 걸까요?

blanca 2012-10-31 22:14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쌀쌀한 날씨에 제 마음 따뜻해지라고 이런 댓글 달아주시는 거지요?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0-3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첫 문단부터 압도적입니다^^
블랑카님, 전 요즘 안나 카레니나를 뒤늦게 읽고 있어요. 영화는 진작에 봤지만 원작을 제대로 읽질 않아서요.
언젠가 님이 쓰신 리뷰도 본 적 있는데요.
톨스토이는 절망을 얘기하려다 사랑을 외치는, 그런 작가 같아요, 정말.

blanca 2012-10-31 22:15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안나 카레니나 읽고 계시는군요! 아 꼭 리뷰 써 주세요.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이지 피아노를 치기 싫어했다. 시골에서 넉넉하지 못한 집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피아노를 그렇게나 배우고 싶었는데 그 꿈은 한참이나 어린 막내 동생 때에나 가서야 이루어질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 엄마가 스물 다섯 구월에 낳은 나는 여섯 살이 되자마자 피아노 의자에 앉게 되었다. 어쩌면 가장 안 좋은 예체능 교육의 동기였는 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당시로 여유 있는 집도 아니었는데 조기 음악 교육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사를 가면 동네의 가정식 피아노집에 등록하는 일이 엄마에게는 가장 급선무였다. 당시 방음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텐데 이십 평도 안 되는 아파트의 방방마다 피아노를 넣고 뚱땅거려도 주민들은 용케 참아 주었나 보다. 친구도 이웃들과의 안면도 갈등도 분란도 다 그런 피아노 학원 안방에서 비롯되었다. 의자에 앉으면 페달에 발도 닿지 않는 체구의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사진은 대견해 보이기보다 좀 안쓰러워 보인다. 고달프고 지루했던 기억들이다. 어찌 어찌 콩쿨까지 나가 예선에서 보란듯이 김칫국을 마시고 나서야 엄마는 나에게 피아노에 대한 소질도 열정도 없음을 어느 정도 수긍했나 보다. 그 이후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어 버렸으니.

 

중학교 때 음악 실기 시험에 긴요하게 써 먹고서는 언제나 꼬부랑 할머니였던 나의 할머니가 쌈짓돈을 모으고 모아 사 주신 피아노도 좁은 집에 짐이 된다는 이유로 팔아 버리고는

 

이제서야 다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이제는 하농의 그 단조롭고도 규칙적인 선율의 중독성도 체르니의 연습곡이 때로는 그럴 듯한 작품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임도 소곡집의 그 유치하지만 아이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동요 연주의 즐거움도 알겠는데 말이다.

 

이미 빈약한 대우를 받으며 멀리 떠나가 버린 나의 그 피아노도 다시 들여놓고 싶고 옆에서 매의 눈으로 나의 연습 상황을 감시했던 그 엄격한 피아노 선생님도 곁에서 나를 다시 채근해 주었으면 싶고 좋은 성적표보다 이선희의 'J에게'를 안 틀리고 치면 더 감격해 했던 엄마의 그 음악 교육에 대한 열정도 다시 찾고 싶다. 자식에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 되고 싶었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은 언제나 시행 착오를 거쳐야 교정될 수밖에 없는 실수이고 자식은 또 그 엄마 나이가 되면 엄마의 실수가 이기심과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그것도 또 하나의 성장의 과정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같다.

 

 

이 영화를 제대로 처음부터 보았는 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이들이 이 영화 속 미소년들에 열광했고 키팅 선생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을 때 학생들이 시위하듯 책상 위에 모두 올라갔던 장면만은 무언가 뭉클하고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남아 있다.

 

원작이 소설이 아니라 이 작품 자체가 아마 영화를 기반으로 다시 소설 형식으로 쓰여진 것 같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영화 대본을 읽는 현장감이 있다. 풍경이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내내 나는 다시 그 자그맙고 추운 교실로 다시 돌아가 아이들과 끊임없이 흥분하고 이야기하고 졸던 나날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 소설이란, 영화란 참 대단한 것같다. 과거를 소환한다. 그 내용과 크게 관련이 없어도 그것을 처음 만났던 당시의 정경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키팅 선생이 지금의 나보다 젊었다는 것. 모든 것을 깨닫고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보이는 그가 삼십 대 초반에 불과했다는 것. 키팅 선생도 아니고 여전히 난 죽은 시인의 사회 서클의 회원들 정도의 정신 연령인 것 같은데 이제 삼십 대 중반에서도 밀려나려고 준비중이라는 것.

 

그. 리. 고. 저도 모르게 벌써 아이에게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들의 청사진을 그려 보이려 한다는 것.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벌써 제명당하고도 남을 만큼 이 만큼 와 버렸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꿈을,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소비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또다시 하고 있다는 것.

 

설거지를 하는데 요새 한창 '나가수'에 흠뻑 빠져 있는 딸아이가 "엄마, 난 가수가 될래"라고 한다. 나는 "음...그것보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하며 멈칫한다. 닐은 연극을 하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닐의 꿈을 폄하하고 짓밟는다. 그러한 아버지에게도 키팅 선생의 얘기처럼 꿈을 꾸던 닐과 비슷한 나날들을 보냈던 소년기가 있었을 터이다. 나이가 들고 사는 데에 부대끼게 되면서 우리는 절대 저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모습을 닮아간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러나고 닐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 말을 처음으로 거역했던 닐이 자신의 열정이 단순한 치기에 불과하다는 아버지의 얘기와 아버지가 차곡차곡 그려 놓은 소위 엘리트 코스의 청사진을 보고는 절망했던 모습. 열일곱. 그 영향받기 쉬운 나이. 폄하되기 쉬운 열정, 소망.

 

아이는 어른의 훈육과 말로 자라지 않는다. 모든 깨달음은 결국 몸으로 부딪혀야 공명한다. 서른 다섯이 넘어서야 비로소 피아노를 치는 즐거움을 알았듯이 여섯 살 때에는 열 여섯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까먹지 말아야겠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전언이다. 언젠가는 사춘기가 될 아이에게 실수하고 싶지 않다. 아이의 꿈을 내가 재단하지 않으려면 이 페이퍼를 꼭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나이듦은 반드시 성장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너에겐 나에겐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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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난감 피아노
    from 처녀자리의 책방 2012-10-25 19:20 
    그때는 미처 몰랐던 걸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연한 기회에 깨닫게 되다니. 블랑카님의 피아노와 어머니에 얽힌 기억를 쓴 페이퍼를 읽고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아직도 다 못 헤아린 엄마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까지였을까. 내가 11살 때 엄마는 오르간을 사들이셨다. 딱히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뜻밖의 선물이었다. 알뜰살뜰한 엄마가 중고도 아닌 새 것으로 오르간을 들이시다니 놀랍고도 설렜다. 내가 오르간을 치기를 원하신 것 같은데 나는 애
 
 
다락방 2012-10-2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이 멋진 글이네요, 블랑카님. 9월달에 한창 피아노학원을 알아봤거든요. 저도 다시 배우고 싶어서요. 그런데 알아보기만 하고 역시나 실행에 옮기진 않는 게으른 영혼이에요, 저는.

하농의 단조롭고 규칙적인게, 이제는 즐겁나요, 블랑카님? 저는 어릴적에 피아노 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녀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됐거든요. 그리고 하농을 배우기 전까지는 피아노 치는게 몹시도 즐거웠고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는 꿈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농을 배우면서부터 학원을 빠지고 연습도 안하고 결국은 피아니스트가 될 거란 꿈조차도 사라져버리고 말았죠. 그런 하농이, 이제와 다시 배우게 된다면, 즐거워질까요? 피아노는 제게 풀지 못할 숙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다시 배우리라,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되리라, 매번 생각만 하고 있는데 블랑카님의 이 페이퍼는 제게 그걸 당장 실행에 옮기라고 말해주는 듯해요.

이 페이퍼는 블랑카님에게도 꼭 기록해두어야 할 것이었지만, 제게도 꼭 읽어야할 것이었네요.

blanca 2012-10-25 09:2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하농 정말 싫어했어요. 울면서 쳤던 기억이 ㅋㅋ 그 다라라라 라라라라 트라우마까지 남아 있답니다. 그런데요. 다시 치니까 너무 달라요. 그 순간 만큼은 온갖 스트레스 잡념 다 없어지더라고요. 꼭 다시 시작하세요. 저는 1주일에 고작 두 번 하는데도 제가 막 달라지는 것 같아요. 피아노 연주가 들어간 음악을 들으면 불끈 저것 꼭 나중에 쳐야지, 이렇게 자극도 되고요. 저도 시작하기 전에는 정말 망설였어요. 그냥 한번 해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농밀한 한 시간이 가능할까 싶더라고요. 성인은 아이들과 달라서 진도가 확 확 나갑니다.^^;;

2012-10-24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5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12-10-2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키우다보니 내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런 면에서 블랑카님이 피아노 연주를 다시 시작하신 일은 부럽고도 멋진 일이네요.

제가 엄마라는 사실이, 교사라는 사실이, 가슴 한켠에 엄청난 부담으로 밀려올 때가 많아요.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부끄럽지 않게 살고픈데 때로는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될 때도 있고. 첩첩산중이에요. 몸으로 부딪혀 공명하기 전에 먼저 지혜로워지고 싶은데 잘 안되겠지요? ^^

blanca 2012-10-25 09:30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저도 그런 생각해요. 한참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던 때도 있고요. 엄마 되는 것은 엄마가 되어 가는 것인 것 같아요. 영원한 시행착오와 후회.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다고 그렇게 믿어요, 우리.

oren 2012-10-2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을 읽어보니 예전에 제 딸아이도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마다 힘들어하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심지어 레슨을 받을 때조차도 피아노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봤었는데, 결국 제 오빠보다 훨씬 일찍 피아노 배우기를 그만두게 되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토록 배우기 싫어하던 피아노를 그때 왜 그리 가르치려 들었나 싶은 생각도 들긴 합니다.

저는 어릴 때 피아노 레슨은 커녕 피아노를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는데(시골의 자그마한 분교의 교실 안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낡은 풍금'을 보고 자랐지요), 나이 오십을 넘기다 보니 피아노 연주도 정말 좋아하게 되더라구요. 어제도 밤늦게까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각각 두번씩 듣고 잤는데, 사실은 오늘 저녁 8시에 고양 아람누리에서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내한 공연'에 들어있는 프로그램을 예습 차원에서 들은 거랍니다. blanca님의 이 글 제목대로 저 역시 늘 '지금 이 순간'을 정말 절실하게 느끼며 살고 싶은데, 오늘 저녁 공연이 또다른 '멋진 순간'이길 고대하고 있답니다.(마침 KBS 제1FM에서도 실황 생중계를 한다고 하니 시간 되시면 blanca님께서도 직접 들어보셔요~)

blanca 2012-10-25 09:33   좋아요 0 | URL
oren님, 저도 여섯 살 꼬맹이 수영 시키면서 싫다 얘기에도 끝까지 시키려고 무던히 구슬리고 그랬어요. 이제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저도 어지간히 피아노 치는 것 싫어했어요.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일명 '눈물의 피아노'라고 울면서 피아노 많이 쳤답니다. 고양 아람누리의 문화적 혜택을 누리실 수 있어서 참 부럽습니다. 한 발 늦게 댓글을 달게 됐는데 어젯밤은 정말 행복하셨겠어요!

감은빛 2012-10-24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당시 남자아이 치고는 드물고 피아노를 잠깐(아주 잠깐)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귀찮고, 지겹고, 싫어했던 일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 우리 큰 아이는 피아노 학원을 다닙니다.
그 녀석에게는 어떨까 궁금해서 물어보면,
어떤 날은 가기 싫다고 하고, 또 어떤 날은 재미있다고 하네요.
그 당시의 저도 어쩌면 칭찬을 듣거나,
스스로 생각해도 좋았던 날에는 재미있어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2-10-25 09:35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큰 아이가 몇 살이에요? 아, 그래요. 저도 분명 좋았더 날이 있었을 거예요.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이겠지요? 악기 하나를 제대로 배우고 연주한다는 것은 평생의 자산이 될 거예요. 그 땐 정말 몰랐거든요.

프레이야 2012-10-24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페이퍼 읽다가 제 엄마가 사주신 장난감 피아노 생각이 나서 울컥합니다.
악기를 하나쯤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풍요한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해요.
전 끈기 부족이라 못한답니다.^^ 그렇다고 제 딸들에게 그런 걸 강요한 적은 없는데 다행이 아이들이
알아서 배우려하고 잘 하더라구요. 작은딸은 특히 더 그래요. 뭐든 누구의 권유나 강요로 억지로 되는 건 아니겠죠.^^
먼댓글로 페이퍼 쓸게요^^

blanca 2012-10-25 09:3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어머니가 사주신 장난감 피아노에 어떤 추억이 얽혀 있을까요? 아, 맞아요. 저는 이제야 알았어요. 악기를 다룬다는 것의 의미. 조금 더 즐겁게 열심히 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이제는 솔직히 손목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2012-10-25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5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0-2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먼댓글 달고 싶어져서 어젯밤 몇 자 써보다가 포기했어요. 발랄하게 톤을 잡아야하는데 자꾸 축축 쳐져서요. ㅠㅠ 그래도 혹 갑자기 먼댓글이 달릴지도. '이제서야' 우리가 무엇에 대한 진가를, 즐거움을 깨닫기 시작했듯이, 다 제 각각의 시기라는 게 있듯이... 그나저나 아이가 이쁜 6살이군요. ^^ (오타 지금 봤어요. 죄송. 고쳤어요. ^^;;)

blanca 2012-10-25 09:41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먼댓글 기다리겠습니다. ^^ 말대꾸 많이 하는 여섯 살이랍니다.--;;

라로 2012-10-2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레이야님 글을 읽고 프님의 먼댓글을 따라와서 읽었어요!!
저도 먼댓글 달고 싶어요. 그런데 두 기라성의 글에 제 초라한 먼댓글을 단다는게,,,ㅎㅎㅎㅎㅎㅎㅎ
암튼 우리 모두 다른 경험들이 만나 비슷한 느낌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블랑카님,,,,갑자기 둘째는 언제???가 묻고 싶어지다니~~~^^;;

blanca 2012-10-28 12:46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저 먼댓글 받고 싶어요! 둘째를 저도 기다립니다 ㅋㅋ 나이차가 벌써 얼마나 벌어지는지 흑흑.

잘잘라 2012-10-2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피아노 치는 블라카님~~~ ^^♪

blanca 2012-10-28 12:47   좋아요 0 | URL
요새 같이 연습 열심히 했으면 전공도 가능했을 것 같아요--;;

2012-10-2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8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