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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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김희영님의 번역으로는 일단 여기까지 출간되어 있다. 끝이 아닌 끝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2권은 '나'의 또다른 자아 스완이 아내가 될 화류계 여자 오데트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이야기와 '내'가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이다. 이 두 부분은 묘하게 닮아 있다. 스완은 상류층 출신으로 지적이고 신사적인 인물인 한면과 전혀 지적이지 않고  과거가 모호한 여자인 오데트에게 집착하고 그녀가 속한 천박한 집단에 소속되기 위하여 분투하는 의외의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나'의 고모할머니가 부여한 외할아버지 친구인 증권중개인의 아들인 겸손하고 평범한 스완과 사교계를 드나드는 화려한 샤를 스완의 분열된 측면과도 오버랩된다. 1권에서 언급되었던 우리의 사회적 인격에 대한 이야기는 2권의 이러한 캐릭터 유형과 또한 책을 읽는 우리들에 진실로 부합된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채워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든다는 프루스트의 이야기.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타인의 본모습과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곡해하고 오해할 것이다.

 

오데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며 마음의 지옥을 만드는 스완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과도하게 타인이나 일의 결과에 집착할 때 보이는 각종 어리석음과 절절하게 닮아 있다. 스완은 모두를 의심하고 모두를 유리한 대로 믿으려 하고 자신의 정당화에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위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른 우주에 속한다는 듯 시로 둘러싸이고 우리 삶은 감동적인 영역으로 변해, 우리는 그 영역에서 조금쯤 그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

-p.90

 

오데트와 스완이 사랑에 빠지며 공유하게 되는 그들만의 은어, 약속, 음악의 상징성은 그것이 덧없어질 유한한 것이기에 더 빛난다. 스완이 오데트의 코르사주 카틀레야 꽃을 바로잡아 주며 '카틀레야를 한다'는 그들만의 은밀한 언어를 만들고 그것을 신호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1권에 등장했던 '나'의 이모할머니들의 피아노 선생인 뱅퇴유가 작곡한 소악절이 오데트에게서 연주되었다는 것만으로 그 음악이 나올 때 스완이 떠올리는 오데트에 대한 사랑, 정열들은 삶의 변전과 인간의 감정들의 그 다양한 변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들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어리석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퇴색, 그 감정마저 저물고 남는 것들의 궤적은 그 어떤 것에 대입하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진정성을 갖는다. 나는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문제로 고뇌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스완의 그 지옥같은 마음 속의 전쟁을 듣는 것만으로 그냥,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누구에게든, 이라는 위로를 얻었다.

 

'나'는 스완이 오데트와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된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사랑의 결실인 소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은 '스완'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리고 갑자기 '나'의 시선은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와 모든 변한 것들의 잔상을 부여잡고 씁쓸해하는 노인의 것으로 변한다. 모든 것의 덧없음을 탄식하며 2권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3권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글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할 수 있을지. 여기까지 온 것에 그리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프루스트의 그 유려한 만연체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도 같아 뿌듯한 느낌도 든다. 서술 시점의 변주, 규칙적이지 않은 서술 시점의 횡단 등 각종 불친절함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운 구석이 많은 책이다. 그것은 여기에는 수많은 '내'가 흩어져 있어 끊임없이 잊혀졌던 '나'를 채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일은 '나'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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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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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냄새가 있다. 무언가 비릿하고 아련하고 한없이 그리운 냄새. 그 냄새에는 많은 것이 묻어온다. 여섯 살 언저리. 나는 노란 가방을 매고 한없이 비를 맞았다. 그냥 무언가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쏟아지는 비로 온통 적셔지는 내가 좋았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엄마가 수건으로 나를 닦아 주던 기억. 엄마는 나를 야단치지 않았다. 열다섯 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름이 '~진'으로 끝나던 친구 두 명과 일부러 비를 맞으며 소풍에서 돌아오던 기억.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웃을 일도 넘쳐나던 그때. 그리고 스무 살. 어쩔 수 없이 맞았던 비는 슬펐다. 청춘은 너무 찬란하다는 기대치값이 있어 현실과의 간극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냥,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부시던 나이임을 몰랐고, 무언가를 어떻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그 비릿한 내음이 피어 오르기 시작하면 나는 무언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막연한 그 느낌, 다 불러낼 수 없는 기억들. 하지만 그 냄새와 그 소리 안에 나의 과거들은 차곡차곡 자리를 잡고 쌓여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책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의 과거는 종잡을 수 없이 소환된다. 그 기억은 현재로 복원되고 다시 화자는 그 기억을 소환해 내는 매개체들에 둘러싸이는 지금으로 복귀하기도 하며 과거, 현재, 미래, 저기, 여기의 경계를 허문다. 숱하게 회자되었던 마들렌이란 과자는 일부일 뿐이다. 그 과자는 과거의 과거를 호명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준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으며 그는 더 이전의 과거, 남편을 잃고 칩거 생활을 하던 레오니 아주머니가 소년이 찾아오면 주고 했던 그 마들렌을 통하여 콩브레 마을의 정경을 다시 불러온다. 프루스트가 불러내는 과거의 부활의 정경은 눈부시다. 그의 화법에 익숙해지면 그의 이야기는 달콤한 향을 풍기며 귓가에 머물기 시작한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며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p.91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할머니 등 모계와 부계가 분방하게 얽힌 삼대 가족과 기묘한 동거를 한다. 콩브레의 저택은 정작 레오니 아주머니의 어머니인 고모할머니의 소유다. 실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프루스트의 눈에 서 종종 콩브레의 집을 방문했던 스완이라는 부르조아는 하나의 대리 자아다. 그는 유대인이고 사교계에서 유명하며 그럼에도 정작 화류계의 여자 오데트와 사랑에 빠지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지향하고 가지고 싶은 것들을 향유하는 귀족 세계를 선망하고 질투하는 '속물근성'은 기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핵심적인 정서이다.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한다고 말하는 것의 거리 어디쯤이 우리 모두는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 그런 것을 가장 잘 이야기한 사람은 거의 프루스트가 유일한 것 같다. 절대적인 악인도 절대적인 선인도 없이 그의 앞에서는 하나의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인간들의 내면과 그 인간들이 말과 행동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인간은 아름답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실수하고 번복하지만 프루스트의 펜끝에서 그려지는 그들의 궤적은 우리와 너무 닮아 있어 습자지처럼 흡수하게 된다. 존재와 삶은 아름다운 것 이상이다.

 

여기에서 남는 것은 사물이다. 콩브레 마을의 모든 일, 모든 시간, 모든 관점에 형태를 주고 완성하고 축성하는 생틸레르 종탑. 화류계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나'의 집안과 멀어진 스완이 사는 집으로 통하는 산책길, 콩브레 특유의 묘하고 경건한 슬픔을 간직한 귀족인 게르망트가가 있는 길,(그 길 앞에서 '나'는 언제나 작가로서의 소양과 자질의 부족함으로 번민한다). 프루스트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형이하학적인 것에서 풀어내는 재능이 있다. 우리가 가고 남는 사물들이 포함하는 우리의 기억들은 불멸로 그것들 안에 갇힌다.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켈트족의 신앙.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이 갇히는 동물, 식물, 무생물.

 

그러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p.85

 

자, 끊임없이 그는 기억을 이야기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이야기처럼 그의 책은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만치 와서 나의 과거를 불러내고 또 저만치 가서 지금을 불러내는 과정은 다시 사는 것에 비견할 만한다. 그가 이야기했던 도자기그릇의 물안에서 다시 복원되는 유년시절의 그 눈부신 정경들처럼, 어느 순간 나의 지금은 다시 재구성되어 훗날의 의미와 재해석을 입고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는 삶에 있어 하나의 지침이다. 조금 불친절한 그의 화법과 몽환적인 그의 음색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그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 줄 것 같다.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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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3-2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 오는 날엔 한없이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
비 오는 날 창 넓은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는거 참 좋아해요. 하긴 누구나 좋아하겠지만요^^
읽다 포기했던 이 책! 저에게도 행운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며....ㅎㅎ

blanca 2013-03-25 10:2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카푸치노 한 잔하면 정말 행복하죠! 우산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저는 지금 심한 감기에 걸려 눈물 줄줄 흘리며 이 댓글 씁니다. 세실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2013-03-24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미 영화를 본 상태이니 완벽하지 않은,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감이 가는 엠마 우드하우스양의 얼굴에 끊임없이 그 역을 연기했던 여배우 기네스 펠트로우가 오버랩됐다. 적잖은 분량인데 마지막 챕터는 너무 아쉬워서 다른 책을 읽다 다시 돌아와서 마무리했다. 착각하고 오판하고 오해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기만당하는 그녀의 캐릭터가 언제나 단면적이고 일관적인 버석거리는 여느 다른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달리 살아서 책장을 뚫고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자 해설' 부분, <정글북>의 작가 루디야드 키플링의 단편소설 <제이나이트>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전선에서 일하던 취사병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탐독하는 장교들의 북클럽에에 가입하기 위하여 그녀의 소설을 읽는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물론 여느 다른 제인의 작품처럼 이 이야기도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들은 지극히 달콤하다. 언제나 개연성 있고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이야기가 시간의 고문을 견디는 것은 아니다. 해럴드 블룸은 이데올로기와 개혁 요소가 없는 이러한 제인의 이야기가 가지는 진가를 신중하게 인정한다. 그는 <설득>에 이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으로 <엠마>를 지목했지만 클리프턴 패디먼은 이 <엠마>를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 우선으로 친다. 다른 사람들 소개팅 해 주는데 골몰하느라 (물론 그 소개팅도 대부분은 서로 전혀 안 맞는 사람을 잘못 맺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정작 자신의 사랑은 챙기지 못하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천방지축 발랄한 아가씨의 이야기. <엠마>를 읽고 다음 두 책의 저자들의 <엠마>에 대한 자기 나름의 평가와 제인 오스틴에 대한 느낌을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이 고전에 대한 친절한 지도 역할을 한다면 예일대 교수인 해럴드 블룸의 이 책은 마치 대학교 강의실에 들어가 이제 안 읽은 책이 없는 노교수의 귀한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 졸리고 가끔은 잘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구석이 있지만 강의평가에서는 최고의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양질의 강의를 수강한 느낌이다. 조금 더 묵혀놓고 책에 나오는 고전을 읽을 때마다 찾아 정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나 희곡 부문은 아무래도 거의 제대로 읽은 원전이 없어 그것에 대한 해설이나 감상의 상당 부분이 잘 다가오지 않아 아쉬웠다.

 

 

 

 

 

 

모교의 구내 서점에서 우연히(물론 재학중은 아님었다) 김연수의 책을 처음 만났었다. 윗통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청년의 모습이 뭐랄까, 청춘 그 자체 같았다.

 

 이 책은 2009년 읽고 리뷰를 썼다. 더운 여름 시원한 탄산수를 마신 것 같은 기분. 나는 드디어 김연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친절한 책은 아니었지만 너무 아름답고 청량감 있는 이야기였다. 지역과 시대를 마구 넘나들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느라 심장 박동이 빨라진 작가가 시어 같은 언어들을 마구 발사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이 근사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란 제목은 인용된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의 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을 찾아 헤맸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작품은 번역본이 없었다. 2013년 현재 <완벽한 날들>이 나오기 전까지 메리 올리버는 김연수만의 시인이었다.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번역된 시는 사실 제대로 내가 시를 읽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싫고 우리말로 되어진 시는 아직 내가 거기까지 가서 그 천상으로 가려는 시인의 그 무용하지만 가치로운 시도에 동참할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 같아서다. 아직 내게 시란 어렵고 저 너머에 있다. <완벽한 날들>은 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있어 그녀에 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어렵겠지만 아, 김연수가 그래서 메리 올리버였구나, 싶은 수긍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다.

 

'나에게 시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라고 이야기하는 메리 올리버가 43년간 지내온 프로빈스타운이라는 도시에서 그녀가 관조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경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쩌면 이렇게도 투명하고 올곧을 수 있는지. 그 시선이 참 신선하고 경이로워 나도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p.33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모든 존재, 현상에 그녀가 던지는 시선은 한량없이 친근하고 소중하다. 그녀 앞에서의 낙관은 생명의 의미이자 삶의 지향이다. 도처에서 몰려오는 절망과 비판의 부정적인 언어들을 물리치고 그녀의 그것들은 우뚝 솟아오른다. 아, 시인이란 이런 존재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는구나. 이런 시인 앞에서 현실 도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래서 메리 올리버가 인용한 에머슨의 이 글이 너무나 좋다. 하나의 예언 같다.

 

나는 식물의 법칙처럼 도덕의 법칙을 확신한다. 나는 17년 동안 해마다 6월이면 내 땅에 옥수수를 심으며 거기서 스트리크닌이 나진 않는다는 걸 안다. 나의 파슬리, 비트, 순무, 당금, 갈매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의는 정의를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는 걸 믿는다.-p.86

 

무겁고 진지하고 비관적이지 않아도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침묵되는 것들을 다 포용하는 것들은 정작 그런 것들이 아닌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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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3-05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각, 기민한 노력, 성실한 자세.
제인 오스틴, 그렇지요?

blanca 2013-03-06 08: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경험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풍부한 것들을 길어내는 걸까요? 천상 이야기꾼이란 그녀를 지칭하는 얘기인 것 같아요.

세실 2013-03-0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시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네요.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는구나....
세상엔 왜이리도 좋은 책이 많은거고, 난 왜이리도 안 읽은 책이 많은 걸까요? ㅎ

blanca 2013-03-06 08:47   좋아요 0 | URL
세실님은 책들에 둘러싸여 사시잖아요.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직장입니다.^^

감은빛 2013-03-0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 오스틴. 제게 참 많은 영향을 미친 작가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살아서 책장을 뚫고 걸어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죠.

독서에 대한 책들은 예전엔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읽기 싫어지더라구요.
특히 저런 번역서들은 말씀하신 것처럼 원전을 읽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도 하구요.

잘 지내시죠? ^^

blanca 2013-03-07 10:0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저도 독서에 관한 책을 몰아쳐서 읽었더니 이제는 다시 제대로 책을 찾아 읽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분들한테는 제인 오스틴이 별로 호소력이 없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군요^^;; 날이 따뜻해져서 기분도 좋아지고 그러는 와중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가족들도 다 평안하시기를...

후애(厚愛) 2013-03-0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지요?
요즘 봄날씨인데도 밤에는 무척 춥습니다.
건강 챙기시고, 감기조심하세요.^^

blanca 2013-03-08 10:19   좋아요 0 | URL
패딩을 입기에도 얇은 겉옷을 입기에도 참 애매한 날씨지요? 황사도 있고요. 빨리 따뜻한 진짜 봄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후애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엄마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장녀인 나의 이름으로 불렸다. 어쩌다 엄마의 이름이 들리면 부르는 사람도 그 이름을 듣는 엄마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나는 영원히 예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입사하며 명명되는 나의 이름은 무언가 경직되고 거리낌이 묻어났다. 무언가 문제가 생길 때 나의 성에 붙여 불리던 직함은 이름으로 대신되어 '~씨'가 되었다. 그래서 나의 이름이 들리면 다정함이나 친근함 대신 무언가 책임질 일이 일어날 것만 두려움이 들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기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알게 된  또래 아이 엄마들은 그래도 나의 이름을 궁금해했고 서로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만난 학부모가 나의 이름을 물어주는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아무리 관계가 오래되어도 나도 그녀들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알려 하는 것은 무언가 한 발짝 물러나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렇게 아이의 엄마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엄마'라고 부르는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이나 완전한 신뢰는 순간들의 착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때에는 그 나름으로 충실하고 진실한 관계였지만 무언가 조심스럽고 저어하는 일말의 망설이는 지점의 철책이 학부모 간에는 무너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드라마 스페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에서 유치원 학부모들인 그녀들의 관계는 물론 드라마틱함을 강조하게 위하여 과장되어 있고 뒤틀려 있고 비현실적인 부분도 많지만 내어 놓고 인정하기 힘들어 애써 외면하는 미성숙한 부모들의 감정 중에 예리하게 잘 포착한 부분들이 많다.  서로 견제하고 질시하며 겉으로는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의기투합하는 모습으로 그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아이의 성취는 각자의 성취로 치환되고 아이의 절망은 각자의 고통으로 변환된다. 어른들의 관계에서 그녀들은 없다.

 

드라마밖에서도 아이들이 싸우거나 불이익을 보게 되면 어른의 상식이나 중립성과 인내는 먼 나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친구로서의 그녀와 그 아이의 엄마로서의 그녀는 잘 통합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과 어젯밤에 한꺼번에 보게 된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와 상 위에 펼쳐져 있는 이 책은 신기하게도 겹친다. 어쩌면 나는 지금 조금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크면서 어머니와 학부모들이 가졌던 관계, 내가 이제 시작하는 관계들, 듣는 이야기들 속에서 여중, 여고 시절 그 성숙하지 못했던 감정들의 잔재가 고스란히 표출되는 것을 까끔 경험한다. 결국 해결되지 못하거나 치유되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 잇던 모든 것은 언젠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동서양 문화권을 떠나 경험하는 학부모들 간의 그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지나치게 미성숙한 불통에 대한 현상론적 관찰이 적나라하다.

 

 

당신은 사춘기 시절이 끝났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만-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은 착각이다. 자녀가 생기면서 사춘기 시절 이후 성숙해진 감정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일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악의 것을 끌어내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46

 

 

 

나의 피와 살과 눈물로 맺어지는 아이는 흔히 나의 모든 것의 투영의 결정체가 되기 싶다. 제대로 성숙하고 성장하지 못한 나의 모든 욕망, 결핍이 아이의 그것들과 혼동이 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부모가 되어 더 넚어지고 관대해진 마음 대신 더 좁고 못나고 유치한 감정들의 편린과 만난다. 그녀들이 단지 '~의 엄마'로만 보이는 순간부터 그녀들과의 관계의 중심에 '나'와 '너' 대신 '아이'가 자리잡는다. 아이가 가끔 투닥거려도 때로 서로의 아이가 더 돋보여서 조금 질투가 나는 시점이 와도 그 근저에는 인간대 인간으로 이름을 불러주고 아이를 키우는 그 고행을 함께 하는 동료로서의 동질감, 유대감, 신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의 성적이 나에게 성숙하고 좋은 엄마로서의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손해 보는 일에도 함께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넓은 엄마가 되고 싶고 또 그 소망이 퍼져 있는 그런 그녀들의 모임이 학부모 모임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러한 드라마가 너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보는 지점에서 느끼는 씁쓸함은 이런 바람들이 저마다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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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3-0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한참 학부모 입장이신 것 같아요.
내 아이 때문에 만나는 학부모 모임,
키우는 동안에는 시샘도 비교도 되지만 어느 순간 다 놓게 되고
여자라는 공감대 하나로 만나지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전 아이 다 키웠지만 학부모로 만난 친구들이 무람없어 좋아요.
첫 아이는 하나, 둘째 아이는 무려 네 개의 모임이 있다는...ㅋ
고백하자면 막강파워 엄마표 모임인 한 모임은 살짝 불편하긴 한데 제가 워낙
그쪽과는 거리가 먼 방임형 엄마다 보니 견딜만합니다.^^*

이름을 잃어가는 게 싫다고, 모두 이름 부르자고 하지만 정작 말 뿐이고
서로 누구 엄마로만 통하는데도 서글프기보단 그조차 흥미로워요.^^*


blanca 2013-03-01 20:05   좋아요 0 | URL
역시 선배님 말씀을 들어야 안심이 됩니다.^^ 저야 아직 일곱 살이라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도 방임형에 가까운데 이게 어쩌다 불안을 자극하는 모임이 있더라고요. 벌써. 영어 때문에 난리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게 어찌나 멋쩍은지 저부터도 차마 아이 친구 엄마 이름은 잘 부르지 못하겠더라고요.

순오기 2013-03-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엄마로 사는 삶도 의미있지만, 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나는 더 좋아요!
학교에서 만난 엄마들도 꼭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주는 편이어요.
아주 오랜만에 만나거나 통화할 때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하더라고요.
블랑카님 이름도 불러드릴까요?^^

blanca 2013-03-02 14:0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닉네임이 그래서 더 정겹게 들려요. 뵙거나 통화할 기회가 된다면 저도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활동하는 닉네임으로 불려도 참 기분이 좋답니다.
 

책에 대한 책은 아주 많다. 하지만 감히 나에게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으라면 알라딘 서재에서 여러번 추천된 책인 아래 책을 주저없이 내밀 것이다.

 

 

 

책에 대한 책의 가장 큰 함정은 불균형성과 저자의 자의성이다. 저자는 흔히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의 독서 경험과 자신의 독서 기호도와 작가 선호도를 슬몃 끼워 놓는다. 그것은 때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도 하지만 어떤 책에 대한 완벽한 오해, 고정관념, 오독을 불러온다. 그런 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이 책이다. 일단 이 책의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은 라디오 퀴즈 쇼의 사회자였고, 비평가이자 작가였다. <평생독서계획>의 초판은 1960년에 나왔다 저자가 99년 사망할 때까지 수정과 증보를 거듭하다 마침내 완결된 판으로 우리 손에 왔다. (작가 소개 참조) '길가메시 서사시', '맹자'로부터 치누아 아제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이르기까지 이 책의 스펙트럼은 어마어마하다. 희곡, 철학책, 과학책, 소설 등 균형을 갖춘 독서를 진작하는 저자의 배려는 흔히 독서의 여정에서 치우치기 쉬운 균형점을 잡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다. 한 권의 책에 대한 간략학 소개, 저자의 소고, 그리고 독자가 이 책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지에 대한 안내가 적절하고 친절하게 잘 버무려져 있다. 고전의 초입문에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안내 지도로 가지고 출발해도 좋을 것 같다. 빌려서 돌려주고 말기에는 너무나 참조할 구석이 많아 두고두고 옆에 두며 꺼내보게 되는 책이다. 일례로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을 읽고 클리프턴 패디먼의 그녀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 다시 이 책을 꺼내놓고 보다 그가 권하는 <엠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식이다. 클리프턴 패디먼은 게다가 아주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돈키호테>는 발췌독을 해도 된단다. 무조건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나 읽기 난해하고 지루한 책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 독자에게 그 책을 어떤 식으로 알아가야 할 지에 대한 더 쉬운 지름길도 제시한다. 이 사랑스러운 책을 쓴 저자의 책은 번역된 것으로 이게 전부다. 너무 아쉬웠다. 그러다 읽게 된 책

 

 

 

이 책의 저자 앤 패디먼은 위의 클리프턴 패디먼의 딸이다. 이 책도 책에 대한 책이다. 다만 이 책은 철저히 개인적인 책에 대한 감상이다. 항상 책에 둘러싸여 있던 유년시절,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서재를 합치는 과정 등 앤 패디먼의 재기어린 입담은 아버지의 그것보다 조금 가볍지만 나름 상큼하고 흥미롭다. 그리고 이 책에서의 수확은 군데군데 클리프턴 패디먼에 대한 개인 정보다. 아버지로서의 그. 그는 장수했지만 너무나 슬프게도 여든여덟 망막 괴사 진단을 받는다. 이러한 슬픈 노년에 대한 이야기.

 

읽거나 쓰지 못한다면 나는 끝난 것이라고 봐도 좋다."

p.60

 

 

그가 딸 앤 패디먼에게 한 이야기. 책에 대한 그 훌륭한 이야기들을 그렇게나 아름답게 유려하게 했던 그가 자신의 실명 앞에서 한 이야기.  딸이 편도선절제술을 받았을 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었던 아버지. 이제 딸은 아버지에게 전화로 책을 읽어준다. 밀턴의 <나의 실명에 대하여>를 전화로 아버지에게 읽어주는 딸. 그리고 그것을 말없이 듣는 아버지. 이 대목은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의 클라이막스보다 더 가슴 안쪽을 울리게 했다. 언제나 책을 읽고 책을 숭배하고 음식점 메뉴판의 오탈자 찾기에 골몰했던 패디먼 가족의 이야기.

 

책에 대해 이야기하였던 그는 실명 앞에서도 꿋꿋하게 책 앞을 떠나지 않는다. 어린 딸에게 읽어 주었던 그 숱한 책들은 다시 그 성장한 딸의 입에서 그의 귀로 흘러들어온다. 비극적인 계기 앞에서 그의 삶은 더욱 찬란하고 책에 대한 밀착도는 더욱 높아진다. 활자와 이야기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이 부녀의 이야기는 왠지 더 희망적이다.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 꼭 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낭만적인 메시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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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낭만주의는 blanca님도 이들 부녀 못지 않군요.^^

blanca 2013-02-20 08:43   좋아요 0 | URL
섬님, 제가 그래요?^^;;

꿈꾸는섬 2013-02-1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결혼시키기, 담아야겠어요.

blanca 2013-02-20 08:4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화제가 되었던 책이에요. 지금 와서야 왜들 그렇게 좋아들 하셨는지 역시 알라딘 서재분들이 좋아하는 책은 배신이 없구나, 싶었어요.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랬고요. 섬님도 많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댈러웨이 2013-02-1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프 패디먼의 책은 아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게 요점을 정리해놨죠. 저도 종종 참고하고 있어요. 해럴드 블룸 <세계문학의 천재들>도 좋아하실것 같아요. 클리프 패디먼의 이 책이 좋으셔다면요. 블룸의 책은 편역 오역의 문제가 지적된 것으로 아는데 참고용으로는 일단 좀 깊게 들어가서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서재결혼은 정말 사랑스런 책이에요. 블랑카님, 정말 오랫만요. :)

blanca 2013-02-20 08:45   좋아요 0 | URL
아, 댈러웨이님 정말 반갑습니다.^^ 아! 저도 언젠가 블룸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님이 추천해 주신다면야 다음에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좀 더 깊이가 있군요!

라로 2013-02-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딸을 먼저 알았어요!!ㅎㅎㅎ 그리고 그녀의 글이 좋아서 다른 책도 샀는데 그 책도 좋아요,,,번역 제목은 [세렌디피티 수집광]인데 알라딘에선 아예 검색도 안 되네요???헐
아니면 제가 못 찾는 것일까요???ㅠㅠ
암튼 저도 클리프 패디먼의 저 책에는 블랑카님과 같은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답니다!!^^
블랑카님이 글을 아주 잘 쓰신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서 그럴까요????이 글이 젤로 좋아요!!>.<
기분나쁘진 않으시죠???^^;;;
이 글 패디먼 부녀를 대신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에요!!^^

blanca 2013-02-20 08:47   좋아요 0 | URL
아, 기분이 나쁘긴요. 저는 아래에서 '기분나쁘진 않냐'는 글을 먼저 읽고 긴장하고 댓글 읽었답니다.ㅋㅋ 패디먼 부녀, 패디먼 가족의 이야기가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저도 나이들어 제일 무서운 게 사실 책을 읽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클리프턴 패디먼이 잘 극복하는 과정이 참 감동적이었어요. 혹시 앤 패디먼의 책은 절판된 것이 아닐까요?

자하(紫霞) 2013-02-2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책 다 읽었는데 부녀 사이라는 것은 블랑카님 글 읽고 처음 알게 되었네요. 오~@@

blanca 2013-02-22 14:47   좋아요 0 | URL
신기하게 부녀더라고요^^ 그런데 역시 책을 많이 읽고 책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던 집안 분위기에서 또 글을 쓰는 딸이 나온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