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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많이 울었다. 업어 키우다시피 한 남동생을 잃은 어느 누나의 글을 읽고 한참을 울었다. 그 누나의 글에 댓글을 썼다 아침에 지워버렸다. 나와는 다른 고통의 층위. 이해한다고 나도 안다고 마치 고통의 경중을 겨루듯 적은 나의 글이 불편하고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라는 주어가 들어가면 최악의 상황은 예외가 될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한없이 안전하고 안온하게 그렇게 심심하지만 부드러운 삶을 주문한다. 하지만 삶의 응답은 때로 가혹하다. 평균적인 평범한 그러한 수식어로 둘러싸인 안전망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예외란 없는 것임을 깨달으며 늙고 죽어간다. 그게 또 삶의 또다른 단면이다. 애써 부정하고 돌아서면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작가. 그녀는 영어를 쓰지만 미국도 영국 출신도 아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게다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젖을 수 있는 장편이 아닌 단편작가다. 단편은 때로 숨이 차고 때로 흩어지는 집중력으로 귀기울이기 힘들다. 그래서 아주 잘 쓸 수 없다면, 아주 잘 읽힐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준비 대신 딴 생각을 할 구석을 남겨둔다.
구석에 다림질을 할 수 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를 두었다. 그곳에서 와이셔츠를 다리며 때로 드라마를 본다. 그때 기분은 아주 묘하다. 정말 주부가 된 느낌.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린 느낌. 다림질이 훑고 간 자리에도 남는 주름은 나의 무능력과 나의 열패감 같다. 나른하게 행복하기도 하고 뼈아프게 슬프기도 하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작업실> 중
앨리스 먼로는 분명 남편의 셔츠를 정기적으로 다림질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업실>의 그녀가 하필 다림질을 하다 습작 작가로서 '작업실'을 얻겠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대목.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라는 말.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대체로 옷을 다려주지 않는다. 남자에게 보호받으며 대신 얽매여 지내야 했던 것들에 대한 고찰. 그녀는 작업실을 얻었지만 기묘한 임대인의 귀찮은 관심권 안에 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남편대신 그녀에게 사소한 관심들과 억압과 권력을 암암리에 행사하려 한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방을 빼게 된다. 다시 그녀는 남편의 셔츠를 다림질하던 그 자리로 돌아왔을까.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어떠한가. 화자는 어린 소녀. 아버지는 소위 온갖 것을 파는 만물 외판원이다. 우리나라의 약장수 같은. 어느 날 아버지는 소녀와 동생을 데리고 약을 팔러 떠나고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한 여인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와 추억하는 것들. '나'는 너무나 달라져버린 아버지의 현재의 삶의 풍경을 관조하며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깨닫는다.
<휘황찬란한 집>은 어떤 집일까. 달걀장수 노파가 엉버티고 살아가는 퇴락하고 흉물스런 집 앞에서 선량하고 아이들을 더 잘 키워내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그 노파를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를 아이들의 생일파티에서 공모한다. 이미 '우리들'보다 훨씬도 전에 그곳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노파의 무게는 간곳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을 그저 비난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 무심코 타인이 가진 것들을 침해한 적은 없는지. 삶은 가끔 누군가를 딛고 진행될 때가 있다.
그 간극은 <태워줘서 고마워>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장갑공장에 다니는 소녀를 잠깐 태워주고 사랑을 느껴버린 '나'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여우의 먹이가 되어버릴 찰나 말이 도망갈 수 있게 울타리 대문을 닫지 않은 계집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계집아이가 되기를 강요당하며 느낀 좌절감이 온 곳이기도 하다. 삶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에 오히려 속박당하며 무거운 철책을 사이에 두고 건너갈 수 없는 이야기들을 독백처럼 쏘아보내고 다시 튕겨져 나오는 그것들을 주워담는 일.
이 이야기들에는 저돌적이고 도전적이고 낙천적인 사람들 대신 때로 순응하고 체념하고 무력해지는 우리들에 대한 흔적이 있다. 앨리스 먼로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허울좋은 거짓말로 휘황찬란한 모조품을 만드는 대신 솔직 담백하지만 한없이 그리워지는 우리들의 유년을 잊지 않는다. 이곳에 살기 때문에 저곳을 돌아보지 않는 의도된 무관심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때로 불편하고 때로 너무 가슴 아프다. 한때 외면했던, 이제는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상처들의 속살거림 속에서 당신은 흐느껴 울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어설픈 소통대신 완벽한 고독을 택하는 그녀 앞에서 알은 체 하지 않고도 딱 그 정도에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약간의 눈물을 훔치는 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다. 삶의 뒤안길,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 퇴락해 버리고 잊혀져 버린 것들, 그러한 그림자들을 딛고 선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들은 조각조각 모여 삶의 거대한 하나의 은유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