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앤 스콧 지음, 강경이 옮김, 이정호 그림, 안지미 아트디렉터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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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아이의 책장에는 화려한 채색삽화와 이야기가 가득한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와 그 아이의 책을 구경하고 우리집으로 올라가던 길 나는 처음으로 '부러움'과 '시새움'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함의 무게를 느꼈다. 엄마가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그 전집을 사주었는 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책이 고프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아들 둘을 다 서울대에 보낸 아저씨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책 세 권 정도를 살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고르고 재면 뒤통수가 괜시리 따가웠다. 엄마가 한번씩 들러 아저씨의 아들 자랑과 공부 노하우를 들어줘야 조금 더 편하게 책을 고를 수 있다고 느꼈었다. 조금 더 커서 대형서점에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오랜 시간 책을 고르며 고뇌하고 즐거워하고 초조해하는 즐거움을 덜 눈치를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만 원 안짝으로 몇 권의 책을 안고 나오는 길,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한 친구는 커서 이 문고 사장 아들과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연히 재회한 그 친구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게 되어 되려 책과 자신의 과거 소망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 책의 저자 앤 스콧과 책의 만남은 유년시절 매주 토요일마다 펭귄문고를 한 권씩 사모으던 오빠와 우연히 식료풍 가게의 빈 오렌지 상자를 들고 와 책장으로 쓰면서 오렌지 향으로 시작된다. 첫 책, 오렌지 향. 그리고 그녀는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밀한 이야기를 품은 서점들과 조우하며 제가끔의 사연을 가지게 된다. 런던,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뉴욕, 옥스퍼드, 아일랜드. 그녀의 서점은 단순히 서점 주인과 손님이 만나 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였던 젊은이가 미래의 위대한 시를 낳게 되는 산실이자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명사가 만나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가게 되는 곳이자 그녀 자신 청춘의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고 시든 곳이기도 하다. 마치 유서깊은 가문의 인장 같은 서점의 상징 도안이 나부끼고 그 서점의 탄생과 성장, 사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러나 넘치지 않게 복원되는 한 장 한 장은 그 자체로 하나로 완결된 유현한 이야기 같아 호흡을 잠시 멈추고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그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궁금한 작가에 대해 물으면 거의 세미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서점 직원들이 있었던 컴펜디언 서점. 16세기, 에든버러에 국립출판사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구체적으로 실현했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던 체프먼과 밀러의 출판사가 있었던 곳. 길 건너 아마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로버트 번스가 시인이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템플턴스 서점, 위대하고 또 위대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언어로 눈부시게 그려낸 <새뮤얼 존슨의 생애>를 가능하게 했던 보즈웰과 새뮤얼 존슨이 만남을 가진 토머스 데이비스 서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초판을 팔았던 패럿서점, 그녀의 사랑이 태동했던 바우어마이스터스 서점.

 

태양이 고운 금빛으로 쏟아져내렸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p.169

 

그녀는 이 서점에서 아일랜드 출신 시인 루이스 맥니스의 시집 ,<가을 일기>를 사서 읽어주며 사랑 고백을 했던 '그'와의 아름다운, 나날이 뒷걸음질하거나 머물지 않고 성실하게 성장했던 사랑을 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와의 만남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 사랑이 시작되고 자라나고 마침내 스러져 가는 그 길목에 있었던 서점은 그녀의 눈부시고 무모하고 찰나 같았던 청춘을 소중하게 머금고 익어간다.

 

살아남은 곳도 찰나의 역사들과 추억들만을 머금고 덧없이 사라져간 곳들도 그러나 제가끔의 사연들을 충실히 이야기하고 총총히 걸어나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앤스콧의 '나만의 서점' 그녀는 책에 대한 은근한 도취와 집착의 주관과 그 책들을 껴안고 있는 곳의 객관적 사실들이 정확히 만나는 지점에서 신중하게 멈춘다. 그곳으로 가만히 다가가는 일. 참으로 유쾌하고 저릿하고 근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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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23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그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
- 좋은 문장이네요.

시내 교보문고에 애들을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이라서
대형 서점을 보고 놀랐지요.
"세상엔 읽을 책이 이렇게 많단다."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성공했지요.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지만 애들과 한 번씩 그런 데서 책을 사는 재미는 여전히 있어요.

blanca 2013-12-24 08:31   좋아요 0 | URL
pek님, 저도 여전히 교보문고 가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제 딸은 매번 자꾸 팬시용품점으로 가서 이것저것 졸라대서^^;; 그나마도 둘째가 태어나고서는 못가게 되어 버렸지만요. 아이들한테 너무 재미나고 자극적인 것들이 많은 세상이라 저희들 어렸을 때 느꼈던 책에 대한 감동은 저만치 물러난 것 같아 참 아쉬워요...

moonnight 2013-12-2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적 제 부모님은 책이란 잠시 스쳐가는 것이지 간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셨죠. 지금 이렇게 게걸스럽게 책을 사모으는 이유가 어렸을 적 사무쳤던 갈증 때문일까 가끔 생각하게 되어요.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고 ㅠ_ㅠ

블랑카님의 리뷰 덕분에 또 한 권의 책을 더 사게 됩니다. 빨리 읽게 될 것 같아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3-12-24 08:32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달밤님! 저도 어렸을 때 책에 대한 해결되지 못한 갈증이 지금 책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고등학교 땐가 서점에서 나중에 읽고 싶은 책 다 사리라,고 결심했던 그 기억이 나네요.

icaru 2014-01-0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란, 자신의 의미 있는 경험과 결합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 같다는 생각을 또 하네요~ ㅎ 덕분에 또 즐거운 리뷰 읽기랍니다~~!!

blanca 2014-01-03 16:45   좋아요 0 | URL
icaru님 댓글을 읽으니 정말 그런 것같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snow2959 2014-02-0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보고 저도 한권 더 사야겠네요^^ 아! 집에 읽을 책도 많은데 또 한권 지르게되었네요 ㅎㅎ

blanca 2014-02-09 16:33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저도 요새 책을 너무 많이 가진 게 아닌가 싶어 하나 하나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도 다 가지고 있을 이유만 잔뜩 있네요.

칸츄리 2014-02-0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댓글에동감합니다. 흐음.

blanca 2014-02-09 16:34   좋아요 0 | URL
^^ 저도 딴 건 다 포기가 되는데 참 책 욕심은 나날이 늘어만 가네요. 이것도 하나의 집착이자 소유욕인 듯도 싶고 그래요.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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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 많이 울었다. 업어 키우다시피 한 남동생을 잃은 어느 누나의 글을 읽고 한참을 울었다. 그 누나의 글에 댓글을 썼다 아침에 지워버렸다. 나와는 다른 고통의 층위. 이해한다고 나도 안다고 마치 고통의 경중을 겨루듯 적은 나의 글이 불편하고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라는 주어가 들어가면 최악의 상황은 예외가 될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한없이 안전하고 안온하게 그렇게 심심하지만 부드러운 삶을 주문한다. 하지만 삶의 응답은 때로 가혹하다. 평균적인 평범한 그러한 수식어로 둘러싸인 안전망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예외란 없는 것임을 깨달으며 늙고 죽어간다. 그게 또 삶의 또다른 단면이다. 애써 부정하고 돌아서면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작가. 그녀는 영어를 쓰지만 미국도 영국 출신도 아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게다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젖을 수 있는 장편이 아닌 단편작가다. 단편은 때로 숨이 차고 때로 흩어지는 집중력으로 귀기울이기 힘들다. 그래서 아주 잘 쓸 수 없다면, 아주 잘 읽힐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준비 대신 딴 생각을 할 구석을 남겨둔다.

 

구석에 다림질을 할 수 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를 두었다. 그곳에서 와이셔츠를 다리며 때로 드라마를 본다. 그때 기분은 아주 묘하다. 정말 주부가 된 느낌.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린 느낌. 다림질이 훑고 간 자리에도 남는 주름은 나의 무능력과 나의 열패감 같다. 나른하게 행복하기도 하고 뼈아프게 슬프기도 하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작업실> 중

 

앨리스 먼로는 분명 남편의 셔츠를 정기적으로 다림질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업실>의 그녀가 하필 다림질을 하다 습작 작가로서 '작업실'을 얻겠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대목.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라는 말.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대체로 옷을 다려주지 않는다. 남자에게 보호받으며 대신 얽매여 지내야 했던 것들에 대한 고찰. 그녀는 작업실을 얻었지만 기묘한 임대인의 귀찮은 관심권 안에 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남편대신 그녀에게 사소한 관심들과 억압과 권력을 암암리에 행사하려 한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방을 빼게 된다. 다시 그녀는 남편의 셔츠를 다림질하던 그 자리로 돌아왔을까.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어떠한가. 화자는 어린 소녀. 아버지는 소위 온갖 것을 파는 만물 외판원이다. 우리나라의 약장수 같은. 어느 날 아버지는 소녀와 동생을 데리고 약을 팔러 떠나고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한 여인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와 추억하는 것들. '나'는 너무나 달라져버린 아버지의 현재의 삶의 풍경을 관조하며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깨닫는다.

 

<휘황찬란한 집>은 어떤 집일까. 달걀장수 노파가 엉버티고 살아가는 퇴락하고 흉물스런 집 앞에서 선량하고 아이들을 더 잘 키워내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그 노파를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를 아이들의 생일파티에서 공모한다. 이미 '우리들'보다 훨씬도 전에 그곳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노파의 무게는 간곳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을 그저 비난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 무심코 타인이 가진 것들을 침해한 적은 없는지. 삶은 가끔 누군가를 딛고 진행될 때가 있다.

 

그 간극은 <태워줘서 고마워>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장갑공장에 다니는 소녀를 잠깐 태워주고 사랑을 느껴버린 '나'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여우의 먹이가 되어버릴 찰나 말이 도망갈 수 있게 울타리 대문을 닫지 않은 계집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계집아이가 되기를 강요당하며 느낀 좌절감이 온 곳이기도 하다. 삶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에 오히려 속박당하며 무거운 철책을 사이에 두고 건너갈 수 없는 이야기들을 독백처럼 쏘아보내고 다시 튕겨져 나오는 그것들을 주워담는 일.

 

이 이야기들에는 저돌적이고 도전적이고 낙천적인 사람들 대신 때로 순응하고 체념하고 무력해지는 우리들에 대한 흔적이 있다. 앨리스 먼로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허울좋은 거짓말로 휘황찬란한 모조품을 만드는 대신 솔직 담백하지만 한없이 그리워지는 우리들의 유년을 잊지 않는다. 이곳에 살기 때문에 저곳을 돌아보지 않는 의도된 무관심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때로 불편하고 때로 너무 가슴 아프다. 한때 외면했던, 이제는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상처들의 속살거림 속에서 당신은 흐느껴 울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어설픈 소통대신 완벽한 고독을 택하는 그녀 앞에서 알은 체 하지 않고도 딱 그 정도에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약간의 눈물을 훔치는 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다. 삶의 뒤안길,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 퇴락해 버리고 잊혀져 버린 것들, 그러한 그림자들을 딛고 선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들은 조각조각 모여 삶의 거대한 하나의 은유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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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론 울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입을 꽉 다물고, 울면 다 무너질까봐 버티고 묻어버리고 억압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요...

블랑카님 글을 보면서,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나에게는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던 일들이 숱하게 현실이더라는,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더라는, 현실은 실제로 더욱 참혹하더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니까요. 그게 간혹 저를 휘청거리게 합니다만....

그러나 다림질하면서 블랑카님이 느꼈던 슬픔과 행복, 동시에 다가와서 살만합니다.
좋은 페이퍼네요,,, 쪼옥~

blanca 2013-12-18 20:3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렇겠군요. 너무 큰 상실과 고통을 안고 가는 사람들. 누구나 아픔이 있겠지만 삶이란 게 참 가혹하구나, 싶을 때도 있어요... 이제 또 연말이라 그럴까요. 한 살 더 먹고 인생의 반 정도를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린 시절은 잡힐 것 같은데 참, 싱숭생숭해요.

그래도 순간 순간 맛난 커피, 좋은 책, 좋은 사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요, 우리.

페크pek0501 2013-12-1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벌써 이 책을 읽으시고 리뷰가지 쓰셨네요.
저는 이 책을 사 놓고만 있습니다. 내년에나 읽겠지요. (내년이 꽤 먼 것 같네요. 바로 코 앞인데...ㅋ)
이야기가 끊어져서 단편보단 장편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읽어 볼 만하겠지요.
도대체 얼마나 잘 써야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인지, 궁금해요.
님 덕분에 미리 리뷰를 읽으니 좋습니다. 책이란 정보를 갖고 읽으면 더 좋은 법이니...

blanca 2013-12-20 10:22   좋아요 0 | URL
페크님, 꼭 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사실 노벨 문학상으로 갑자기 조명되는 작가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신이 있는데 이 작가 작품은 딱 한 권 읽었는데도 그래서 탄 거구나, 싶더라고요. <디어 라이프>도 읽고 싶어요.
 
The Kinfolk Table 킨포크 테이블 one The Kinfolk Table 킨포크 테이블 1
네이선 윌리엄스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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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친족이나 가족을 뜻하는 말이라는 KINFOlK는 네이선 윌리엄스가 2011년 창간한 잡지다. 상업광고를 배제하고 '단순한 삶, 함께 나누는 식사'의 의미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잡지라고 한다. THE KINFOlK TABLE은 이 계간지의 푸드스타일링북이다. 네이선 윌리엄스의 아내 케이티의 사진. 이 잡지의 출발을 알렸던 젊고 매력적인 부부가 이 책의 초대 손님이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연령,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의 짧은 이력, 자신만의 레시피, 추억이 나열된다.

포토그래퍼와 스타일리스트인 연인 윌리엄 히어포드와 알리사 파가노. 이 사진 한 장만으로 이 연인의 이 순간의 관심, 배려, 사랑이 포착된다. 푸드스타일링이라는 근접하기 힘든 단어를 구태여 붙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순간을 엿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순간이 과거에 현재에 미래에 있었을 것이니까. 어린 시절 먹었던 구운 토마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남자의 모습이 다감하다.

어딘가에서 이런 샐러드를 먹은 기억. 이 샐러드를 만드는 레시피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구하기 힘든 제철 재료들에 조금 기운이 빠질 뿐. 이 책을 요리책으로 활용하기에는 브루클린과 덴마크라는 공간적 거리감이 느껴진다. 다만 이 요리에 얽힌 추억과 이 요리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그 특별한 레시피의 소개로 요리책으로 아쉬운 부분은 채워진다.

막무가내로 만들어본 기억이 있는 카프레제. 생각보다 모짜렐라 치즈는 예쁘게 썰어지지 않아 토마토와 교대로 어슷 기대어 놓은 모습은 기대이하였다. 가족들은 신기하다며 시도해 봤지만 별맛이 날 리 없는 이 생 샐러드에 생각만큼 감탄해 주지 않았던 기억. 자라면서 애플파이를 먹었던 연인의 레시피는 조금 더 그럴 듯하다. 조만간 다시 시도해 보자.

이 간단하고 현실적인 레시피는 당장이라도 실행 가능하다. 이런 부분이 빛난다. 별 재료 없고 특별한 과정이 없지만 아련한 추억을 품은 그러고도 지극히 현실적인. 푸드스타일링 북이라고 듣도 보도 못한 재료들과 거대한 오븐을 항상 동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밥을 얻어먹는 일은 아주 하찮은 것 같지만 대단한 일이다. 별로 내키지 않았던 저녁 초대에서 정성껏 만들어 준 음식을 먹으며 나는 갑자기 목울대가 시큰해졌다. 그것은 그 사람과 정말 처음으로 만나는 일과 같았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시간을 공유하며 불가능할 것 같았던 교감을 나누는 일. 식탁 한켠에 의자를 내어놓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곁을 주는 좀더 세련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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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2013-12-0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련된 표지에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면 다소 평범한 듯 하면서도, 또 은근한 매력이 있는 듯해요 전 크리스마스 맞이 kinfolk 잡지 한권 주문했어요.^^ 바삭 구운 베이컨 피넛버터 샌드위치는 꼭 해먹어보렵니다!

blanca 2013-12-02 09:40   좋아요 0 | URL
like님, 벌써 또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랐어요. 절대 될 것 같지 않았던 나이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싱숭생숭합니다. 맞아요! 된장스러운 책인 줄만 알았는데 ㅋㅋ 사진도 레시피도 참 소박하니 좋더라고요. 저도 꼭 해 먹으려고요^^

2013-12-05 0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6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3-12-1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나온 사진을 다시 찍는 게 이렇게 은은한 매력을 발산하는군요~ #

blanca 2013-12-10 12:08   좋아요 0 | URL
icaru님, 또 사진 찍을 때도 은근 재미있더라고요. 워낙 원사진이 좋아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괜찮게 나오더라고요.
 

집 앞에 바로 대학병원이 있다.작년 폐렴에 걸려 입원하여 밤새 뒤척이며 고열에 시달렸던 아이를 억지로 휠체어에 태우고 엑스레이실 앞에 줄을 서던 기억이 난다. 제발, 오늘은 좋아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고작 아침 일곱 시 언저리의 엑스레이실 앞은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침상에 누워 거의 의식이 없는 사람도 제 발로 서서 엑스레이를 찍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모두의 표정은 지쳐있고 삶이란 것을 희구하면서도 그 삶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훈의 말마따나 삶은 결국 던적스럽다. 그 춥던 으시시하던 기억. 호랑이 캐릭터가 점점이 박혀 있던 그 어린이 환자복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많이 아팠던 아이. 그리고 그 수많은 아픈 사람들. 그럼에도 하늘에서는 그때도 정말 눈이 부실 만큼 흰 눈이 내렸었다. 그 눈이 정말이지 너무 서러웠다.

 

어제 하늘에서는 또 미친듯이 눈부신 눈이 내렸다. 발코니 전창 앞에서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석달인 아가에게 이 눈부시고 마구 언제까지나 살고 싶게 만드는 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기만일지라도 그런 것들에 기대어 삶은 지속되는 것같다.

 

 

읽은 책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모교 구내서점에서 만난 날, 김연수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이 낭만적인 이름의 작가의 팬이 되기로 했다. 뭐랄까 아주 서정적이고 명철한 작가의 시어 같은 문장들이 속살거리며 다가왔다. 단편집이니 만큼 전부 좋았다고는 못하겠고 그럼에도 어떤 이야기는 너무 좋아 잠시 멈추고. 이런 이야기.

 

나는 나의 열세 살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뭘 하고 있었나? 1982년, 중학교 1학년. 프로야구 개막. 봄바람에 흔들리던 성당 초입의 벚꽃들. 브라보콘과 키스바의 여름. 봉고에 음식을 잔뜩 싣고 가족들과 찾아가던 일요일의 계곡. 응접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의  모습. 여름에도 서늘하던 본당의 건물. 형형색색의 빛으로 반짝이던 스테인드글라스.

-<파주로> 중

 

이야기 속의 '내'가 열세 살을 떠올리게 된 것은 선배의 열세 살 딸내미 앞에서 그와 같은 나이였던 소녀 '안네의 일기'를 떠올리면서였다. 좁은 곳에 갇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음에도 소년과 사랑에 빠져 달콤함에 젖어들었던 안네. 언제 '안네의 일기'를 읽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훨씬 축약되고 민감한 내용이 삭제된 안네의 일기에 기대어 나도 어린이에서 사춘기 소녀로 건너가던 기억만은 남아 있다. 서쪽의 창가. 밤이면 봄이면 벚꽃과 노을이 아련하게 걸어들어왔던 그곳. 김연수는 추억을 불러내는 재주가 있다.

 

 

 

 

왠지 이런 책이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뻔한 이야기라도 두서 있게 조곤조곤 일러주는 사람을 한 명쯤은 곁에 두면 삶의 질서가 잡힌다. 정갈하고 소박한 이야기. 삶에 있어 모든 곁다리 같았던 것들을 제자리에 두고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순간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되새김. 법정의 책을 오랫동안 곱씹어 보며 읽다 못내 아쉬워하며 돌려준 친구에게 불현듯 선물하고 싶어져 감행했다. 순간 티비를 보며 무기력해있던 친구는 이 책을 시작했다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머리가 덜 아팠으면.

 

 

 

 

 

 

 

 

 

 

반값 세일이길에 표지가 너무 크리스마스틱하길래 구입했는데 딸아이가 종일 오리고 붙이고 모아두고.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들을 만들 수 있는 책. 눈꽃결정 모양은 창에 붙이면 손쉽게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수 있을 것같다. 집에 온 아이 친구가 자기도 갖고싶다고 해서 두 권 더 주문해서 아이들이 좀 엄마들을 덜 귀찮게 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모빌을 만드는 부분은 좀 어려워서 어른의 손이 가야 하기는 하지만. 가격대비 알찬 책이고 꼬마 친구들에게 선물해 주고 생색내기도 좋다.

 

 

 

 

 

벌써 크리스마스고 벌써 연말이다. 전도연은 티비에서 나이 먹으니 정말 진심으로 너무 좋다고 하던데 그녀보다 어린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좀 덜 망아지같아지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자꾸 철이 드는 게 좋기만 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젠 이해받고 용인받을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이다. 자꾸 범람하는 추억들. 할머니가 되면 그 추억들 한 복판에서 좌초할 것같다.

 

정말 제대로 된 기억이라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분명 뒷산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위해 키작은 나무 하나를 베어 왔고 우리는 그렇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졌드랬다.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든 내가 고작 내 허리밖에 오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내어놓자 아이는 어찌나 실망하던지 꼭 자기 키보다 더 큰 트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아빠는 정리를 잘 하면 그러마 하고 약속하고 나는 어수선해서 안 된다고 딱 자른다. 잘 모르겠다. 절대 되고 싶지 않았던, 저러지는 말아야지 했던 어른들의 모습이 나에게서도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귀찮고 어처구니가 없어도 했던 많은 것들을 번복하고 싶지 않은 그 게으름은 성숙이 아니라 비겁한 타협일 텐데 때로 그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며 씁쓸하다.

 

우아하게는 어렵더라도 덜 추하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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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11-2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고 프네요 김연수

blanca 2013-11-29 09:58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시를 썼던 사람이 쓰는 산문은 문장이 참 아름다운 것 같아요. 겨울의 초입에 잘 어울리는 글들입니다. 바람이 찬데 하늘바람님도 아이들도 감기에 걸리지 않기를...

프레이야 2013-11-2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달 아가에게 흰눈을 보여주셨군요. 사진기로 찍듯 아가는 눈으로 마음으로 찍었을거에요. 백일이 다가오군요 그럼. 백일때 아가들 참 이쁘죠. 추억을 불러주는 김연수의 문장. 열세살 짜리 저의 기억도 불러지네요. 요즘 기억에 대한 단상이 몇 떠올랐는데 한번 써봐야겠ᆢ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ㅎㅎ 나이 들어 좋다고 말한 전도연이 확 좋아지네요. 덜 추하게 나이 들고 싶다는 블랑카님은 물론이구요^^

blanca 2013-11-29 10:0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아이들은 어리고 저만치 삼십대는 걸어가고 연말이고 이래저래 싱숭생숭해져요. 첫애때는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그 나이때의 귀여움을 즐기지 못해 너무 아쉬워요. 비록 몸은 힘들지만 이제 순간 순간의 사랑스러움을 돌아볼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아, 빨리 쓰세요!

icaru 2013-11-2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되면 추억 한 복판에서 좌초할 것 같다... 아,, 저도 이런 생각해 본적이 있는요 ^^ (그리고 전, 가끔 나이 들었을 때 내 모습 생각해 보는데요. 어쩐지, 고집세고, 목소리 크고 완력이 강한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저만의 생각일지도요) 말이지요~
블랑카 님 이 글을 읽고 있자니, 어느 시인의 성탄제라는 시가 생각나요... 할머니, 아버지, 어린 나와 지금의 나... 나이듦...
심플하게 산다,는 제목이 어찌나 동하는지, 허나 도서관서 대출해 읽어야겠다고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합니다.^^;;;

blanca 2013-11-29 10:02   좋아요 0 | URL
icaru님! 성탄제! 저도 이 시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알알이 붉은 산수유 열매~" 이 부분이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이 책 예전에 서점에 가서 그냥 들춰보는 수준으로 보고 말았는데 제대로 읽으니 뻔한 얘기들인데도 참 와닿더라고요. 마음이 정갈해진다고나 할까요.

saint236 2013-11-28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만드는 책이라...심하게 땡깁니다.

blanca 2013-11-29 10:02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이 책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ㅋㅋ 비록 종이이지만 만들어 놓고 보면 제법 그럴싸해요. 트리에 걸어도 될 정도로요. 강추합니다.!

세실 2013-11-2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드니 조금씩 중심에서 벗어나는 여유도 좋고, 대접 받는 것도 좋고(?) ㅎㅎ
우아하게 살도록 노력해요, 우리!
김연수 책은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blanca 2013-11-29 10:04   좋아요 0 | URL
세실님, 그런거죠?! 그런데 세실님은 그냥 나이드신 게 아니라 꾸준히 성장하고 배우시고 그러잖아요. 저는 지금 정체 상태로 나이만 먹고 있는 중이라 나이드는 게 더 두려운가 봐요. 김연수 책은 커피 마시면서 한 편씩 내키는 대로 읽으니 참 좋더라고요.^^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믿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불안감이 더 높아진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경우는 자괴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일, 그냥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실어버리면 더 쉬워지는 경우도 있다.

 

첫아이를 낳고 소위 멘붕이 왔다. 일차적으로 자고 먹고 싸는 일에 갑자기 장애가 왔다. 신생아는 두 시간에 한번씩, 때로는 한 시간에 한번씩 수유를 해야 한다. 이유없이 밤을 새워 울기 시작하면 아이를 안고 베란다를 서성이다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게 수면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있다. 급하게 기저귀를 갈거나 달래줘야 하는데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참다참다 변비가 오기도 한다. 게다가 나에게 온 아이는 좋게 표현하면 섬세했고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극도로 예민했다. --;;

 

자, 언제나 그랬듯 나는 육아를 책으로 할 수 있는 줄 알고 책을 사모으며 독파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한 손에 안고 오른손으로 책도 넘기고 줄도 긋는 신공이 생긴다.

 

 

 

 

 

 

 

 

 

 

 

 

 

 

 

이 영국인 간호학교 출신의 저자는 양육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아이의 불규칙성과 돌출행동들을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이 책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무조건 아이를 울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신 최대한 아이를 덜 안아주면서 아이에게 규칙적인 일과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귀띰을 준다. 아이의 기질을 관찰하고 그 기질에 딸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는 적어도 육아와 보육의 그 무한 반복의 질곡에 생각없이 얽매이는 실수는 방지해 주려 한다.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아기를 돌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찬찬한 관찰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지에 대한 좌표 정도를 설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육년이 지나 둘째를 낳은 지금에도 나는 이 책들을 여전히 꺼내본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수시로 수유하고 안아 흔들어 재우는 나의 모습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첫째는 소위 '수면교육'에 들어가 두 시간 동안 안아주는 대신 자장가와 다독임을 시도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과거를 후회한다. 아이의 수면과 수유는 그렇게 관리하려는 수고 대신 상당부분을 시간이 해결해 준다. 그런데 그 앞의 거리를 내다보지 못하고 지금 여기에서 아이의 생리활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이 승산없이 좌절당하면 육아는 오히려 더욱 난공불락의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 나는 노력하고 있고 통제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족감은 아이의 울음이 미칠 아이의 상실감으로 다 상쇄되어 버리는 것같다. 물론 아이를 존중하고 믿어주는 그 긍정의 자세는 배울 만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업고 어르고 부둥켜 안고 키웠던 우리 어머니들 밑에서 나온 오늘의 엄마가 따로 재우고 아이의 수면과 수유를 완벽하게 시간표에 맞추어 관리하는 정서는 낯설고 어색하다. 설사 그래서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것은 아이의 기질이 협조해 준 덕분이 더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안 될 아이는 아무리 수면교육을 시켜도 안 잔다. 2008년도의 다이어리에는 예민한 기질의 아이가 스스로 등대고 스르르 잠들 날을 고대하며 수면교육을 시키며 좌절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수면교육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세 살이 되고 여섯 살이 되며 밤에 자지 말라고 해도 키가 커야 한다며 스스로 들어가 잠이 든다. 결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당시 더 많이 안아주고 기다려 주지 못한 시간들이 참 아쉽다.

 

 

 

 

 

 

 

 

 

 

 

 

 

 

2013년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며 맛보았던 달디달았던 자유의 시간들은 다시 추억이 되고 --;; 자발적으로 다시 그 기본적인 욕구들이 저지당하는 상황이 출몰하는 육아의 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전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미 EBS에서 방영되어 반향을 불러일으킨 방송분에 대한 책이다. 다들 아기띠나 유모차를 사용할 때 오히려 외국에서는 우리 전통 포대기를 이용하여 아이를 업어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를 업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의 주인공도 우리나라 엄마가 아닌 외국 여성이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첫손녀를 업고 싶어하셨다. 그러나 이미 국민아기띠로 안고 업히는데 익숙했던 아이는 포대기를 동원해서 업어주려는 할머니들에게 착 업히는 대신 울음으로 항변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사방팔방을 다니며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배웠던 나의 경험을 애석하게도 나의 딸은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등의 온기와 그 등의 체취로 할머니와 교감했던 만큼 나의 딸은 할머니와 친하지 않다.

 

여기에는 본능과 직관에 따르는 육아가 있다. 책으로 배우고 아이의 일과를 통제하는 육아가 아닌, 그저 살을 맞대고 부비며 아이가 달라는 대로 주고 자고 싶은 대로 재워주는 세 살 이전까지의 애착형성의 보살핌이 있다. 엄마가 편하자고 아이를 울리며 불편한 정서를 역으로 경험해야 하는 고문 아닌 고문도 없다.

 

이자벨 필리오자는 육아에는 유용한 성장의 법칙들이 있지만 '반드시'라는 것은 없으며, 초보부모가 배워야 하는 것은 그런 법칙들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아이를 믿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인류학자들은 수유는 자연적인 반응행동이지 관리되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류는 탄생 이래 17세기까지 한 번도 수유를 관리당해본 적이 없다.

-p.87

 

물론 전통육아라고 능사는 아니다. 대가족 전체가 협력하고 동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예전의 육아는 분명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는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 양육자 자체의 정서나 휴식에 대한 배려도 아쉽다. 단, 육아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지침에는 대단히 값진 무게가 실려 있다.

 

어제 둘째 아이 대신 일곱 살 큰 아이를 업어 주었다. 아이는 아직도 무던한 편이 아니다. 임신했다고 동생이 있다고 더이상 안아주지 않았던 아이가 등에 업히니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많은 말 대신 가끔 업어주려 한다. 나는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고 맨날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 엄마는 동생을 업고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꿈이 어찌나 서러웠던지 나는 아직도 그 서러움을 기억한다. 우리 육아에서 '업는다'는 행위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같다. 세련된 아기띠로도 업는 자세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예전에 우리 엄마들이 포대기로 업어주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누구나 결국 사랑과 관심을 요구한다.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 너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냥 내 앞에서 요구되는 관심과 사랑을 주려고 노력해 볼란다. 십 년이 지나고 무엇이 옳았는지보다는 어떤 것이 후회를 덜 남기는 지로 판단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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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0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가 제 외할머니를 엄청 좋아해요. 외할머니가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여동생이 잠시 친정에 다니러 오면 그 때 보았던 게 전부거든요. 그런데 왜그렇게 좋아할까 저희 식구들 모두 의문이었는데, 이 글을 보니 알 것 같아요. 여동생은 애기띠로 동생을 안아주었지만, 저희 엄마는 애기띠가 어색하다고 하시며 포대기를 사가지고 오셔서 업어주셨거든요. 그때문이었나봐요, 조카가 그토록 제 외할머니를 사랑하는 건. 지금도 할머니 뒤만 졸졸 따라다녀요.

그런데 블랑카님, 일곱 살 큰 아이를 업으시다니, 무겁지 않으셨어요? 전 네 살 된 조카를 안는데 이제 힘이 딸리더라고요.

blanca 2013-11-08 12: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포대기도 어렸을 때부터 안 해주면 어색한지 제 딸은 안하려 들더라고요. 할머니가 업어주는 맛을 못 느껴보고 커서 저도 아쉬워요. 아, 물론 무거워요. 그런데 제가 둘째를 가지며 첫째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놀아주지도 못한 기억 때문에 아이가 요새 자면서 울기도 하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서요. 참 좋아하더라고요. 저는 좀 폼은 안 나지만 포대기로 아기를 좀 업어볼까 하는 생각중입니다. ㅋㅋ

페크pek0501 2013-11-0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이란 참 신기해요. 기억이 나지 않던 시절인데도 어느 한 순간은 또렷이 기억나거든요.
저도 여섯 살쯤인가 되었을 때인데, 엄마가 업어 줬던 걸 아직도 기억해요.
엄마와 함께 놀러간 친구 집에서 제가 잠이 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업고 집에까지 간 거예요.
업히는 게 좋아서 자는 척을 했던 것까지 기억합니다. 얼마나 업혀 있는 게 행복했으면요...
그때만큼은 아무 것도 부럽지 않아요. 엄마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이런 값진 경험이 있다면 그 시절에 엄마에게 혼나는 일이 있어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추억을 많이 갖게 해 주는 게 어쩌면 자식을 위하는 최고의 일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간단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죠.

blanca 2013-11-09 11:06   좋아요 0 | URL
pek0501님, 업히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오래 아주 소중하게 남나봐요. 예전에는 업어주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기띠라는 중간 매개가 있어야 하니 그 맨 살에 착 닿아 주변을 구경하던 기억은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허리가 자꾸 아파서 아이들을 꾸준히 잘 업어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프레이야 2013-11-0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공주 업어주셨다니 잘하셨어요. ㅎㅎ 울작은딸 유치원다닐 때 가기 전후로 꼭 집안에서 잠시 업어줬던 기억이 나요. 참 좋아했죠. 큰딸은 아주 어릴 때 말곤 안 업어줬네요. 다 커도 업히고 싶을 때 있잖아요 우리도^^ 울엄마도 제가 초등 이학년 때 급성신장염을 앓을 때 이불 덮어 씌워서 업고 등교시키셨지요. 그런데 그때 그 촉감이 기억 나질 않아요ㅜㅜ 오른손만으로 책장 넘기고 밑줄긋기까지 하셨다니 진짜 대단해요 블랑카님. 몸조리 잘하세요^^

blanca 2013-11-12 07:4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을 업고 등교하시는 친정어머님 모습이 그려지네요. 사실 육아라는 게 세상과 떨어져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아이 먹이며 오른손으로 책 읽고 그러면서 견딥니다.^^;; 그런데 줄을 그으려니 왼손이 더 편해서 왼손으로 연습까지 하고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3-11-0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째 힘드시죠? 그리고 이쁘기도 엄청 이쁠거 같고...
솔직하게 부럽네요, 아가야와 함께 지내시는 모습이, 저는 감당이 안 될거 같으면서도 부러워요.

블랑카님의 열심히 고민하시는 마음만으로도 아이들이 이쁘게 자랄거 같아요.
멋진 엄마를 두었으니,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 ^^

blanca 2013-11-12 07:48   좋아요 0 | URL
아...마녀고양이님,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각오했던 것보다 더 힘드네요. 특히 허리,손목이 너무 아파요. 지금은 솔직히 행복하다,는 생각보다는 힘들다, 시간아 가라! 이러면서 견디는 중이에요.

저는 마고님이 부러운 걸요.

꿈꾸는섬 2013-11-2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전 외출할땐 아가띠, 집에서는 포대기를 많이 이용했던 기억이 나네요.
집안일할때는 포대기가 정말 최고였는데...ㅎㅎ
아이 키우는 일은 책이나 이론으로 되는 건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해요.
자연스럽게 아이의 기질에 맞는 방법은 부모와 아이가 찾아야하는 것 같더라구요.
블랑카님 날이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꿈꾸는섬 2013-11-25 16:13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뜸한동안 둘째도 낳으신건가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blanca 2013-11-26 10:40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백일이에요. 꿈꾸는섬님은 그간 잘 지내셨어요? 자주 서재마실 오세요. 저희는 이미 가족이 다 한차례씩 감기 혹독하게 했답니다. 아이들 아플 때가 제일 속상하고 힘든 것 같아요. 현수와 현준이도 잘 지내죠?

2013-11-26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0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