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반에 육십삼 명이 이부제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오후반이 되면 커다란 운동장 뒤켠의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동생을 가져 배가 남산만했다. 나의 1학년은 너무 춥고 슬프고 두려운 기억들.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육십 명 넘게 거느려야 했던 선생님은 이상적인 스승 이전에 이미 너무나 지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체벌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슴에 자욱이 남았지만 이제는 이해의 덮개로 슬몃 지워보고 싶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있다는 말. 누구든 훌륭해지기는 쉽지 않은 그런 상황.

 

학부모가 되었다. 아이는 또 나만큼이나 작다. 유치원과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끝이 올라가는 상냥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모든 것을 들어주고 도와주던 시대는 마감했다. 형형색깔의 아기자기한 주변환경도 조금 살풍경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규칙과 통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아이 반 학생은 다해서 스물다섯 명. 오십 명을 넘어가는 아이를 통제해야 했던 피곤함은 다행히 없다. 아, 그런데 엄마는 아기를 안고 업고 있다. 아이를 밀착해서 도와줄 수는 없는 여건. 게다가 동생은 이제 엄마를 안다. 제3자에게 맡길 수 없는 한계. 학교에서는 아직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한다. 엄마의 딸이었던 나의 1학년과 나의 딸의 1학년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그 추웠던 1학년에서 저만치 물러나지 못했다. 자꾸 돌아오고야 마는 것들. 나는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힘들지만 그래서 읽고 쓸 시간이 없지만 아니, 읽기만 하고 정리를 할 시간은 없지만 무언가를 끄적거릴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으려 한다. 말대꾸를 시작한 아이가 사실은 나에게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에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아직은 미성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도 결국은 책으로 얻어낸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벌써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많은 것들의 정서를 잃어 버렸다. 이제 눈높이를 조금 낮추어도 될 텐데.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아이 앞에서 잘난 척을 한다. 중학교 때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에 흠뻑 빠져 티비 앞에서 심드렁한 엄마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다. 이렇게도 가슴 떨리는데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스타가 더이상 멋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엄마의 나이가 되면 더이상 가슴 터지도록 눈부시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이 그레그라는 아이의 눈높이는 작가의 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별 기대 없이 시작한 책인데 내가 잊어버렸던 많은 것들이 그리고 내가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이 책을 통하여 걸어들어왔다. 웃기기만 한 가벼운 책은 아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느끼는 왕따 문제, 형제 간의 소외감, 어른들의 편견, 성적, 숙제의 중압감 등이 그레그를 둘러싼 코믹한 일화들을 통하여 묘사된다. 구태여 머리로 이해하지 않고 천천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초특급 엄친아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그레그와 같은 구석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 정도 된 아이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같다. 일부러 어떤 화제나 공감대를 찾아내지 않고 그냥 이 책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만으로도 아이와의 교감, 공감이 가능할 듯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씌어져 읽기 어렵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 솔직히 막 책장이 넘어갈 정도로 서사가 긴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분량 자체가 많지 않고 자식을 여덟이나 둔 중년의 램지 부인과 시대의 인습과 편견에 저항하는 그림 그리는 여자 릴리 브리스코에 투영된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모습을 짐작해 보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어느 순간 램지 부인은 죽고 그녀의 집은 쇠락하고 릴리 브리스코는 늙어 다시 램지 부인의 집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램지 부인의 아이들은 반항과 살의의 대상인 아버지 램지와 함께 등대로 향한다. 이 모든 것을 상징과 은유로 읽는다면 <등대로>는 너무나 사변적이고 어려운 추상화가 되어 버린다. 그저 '삶' 앞에서 때로 무력하지만 어떤 지향과 영원히 남을 불멸의 것을 추구하며 '꿈'을 꾸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 낸 하나의 그림으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식들 때문에 최고의 것을 향한 지향의 노정에서 넘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좌절된 꿈을 그린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에 대한 하나의 헌정된 이해와 경의일런지도 모르겠다. 릴리는 홀아비가 된 램지에게 그가 바란 '공감'을 의도적으로 주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등대에의 상륙을 예감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완성하려 했던 그림을 마침내 마친다.

 

 

 

 앨리스 먼로는 현대 단편 소설의 쇠락에 단연코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이 상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가 무엇인가, 조금은 갸우뚱 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면 그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노벨 문학상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어야 받을 수 있구나, 싶은 수긍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작품은 그녀가 절필을 선언하기 직전에 낸 것이라 하니 여든이 넘은 이 작가의 가장 최근의 성취를 목도하게 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에 탐닉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일본에 가 닿기를>,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버림받고 나중에 우연히 조우하는 그 광경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눈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아문센>, 장애가 있는 부유한 여자와의 긴 외도로 뜯어낸 돈으로 자신의 안온한 가정생활을 유지했던 남자에 대한 깨달음이 반전인 <코리>, "어디에서나 이것이 삶이라고 외쳐댔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더 겪어봐야 한다는 듯이." 같은 문장을 얻게 하는 <돌리>.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여든이 넘어서도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여자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망한 사업, 어머니의 병("그것은 너무 일찍 발병한 파킨슨병이었고, 그때 어머니는 사십대였다."),아버지의 구타.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절을 불행한 것으로 추억하지 않는다. 설거지가 끝나면 문짝이 떨어진 따뜻한 오븐에 발을 넣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는 모습. 혀가 굳어버린 어머니의 말을 대신 통역하는 그녀. 아이 맡길 사람과 차비가 없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 일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용서하며 사는 삶으로 수긍해버리는 마지막 문장.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것을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대가라면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은 비겁한 것일까.

 

 

 

 앨리스 먼로는 평생 같은 주제에 대한 변주라는 비난을 받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주영 작가의 어린 시절의 변주는... <홍어>에서도 <잘 가요 엄마>에서도 또 여기에서도 항상 배고픈 소년과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날품을 팔아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자식을 키우는 홀어머니에 대한 애달픈 묘사는 각도와 결과 요철을 달리해서 변주된다. 그러나 그 변주는 지루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아픎을 더 세밀하고 절절한 것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그의 섬세하고 생생하고 형형한 문장들 속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대체된 삶으로 가능하다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세 살 터울의 굶주림으로 마른 버짐이 핀 아우가 아직도 어미에게 업혀야 하는 나이임에도 형과 품팔이를 나간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 따라 나섰다 주인집 아이를 대신 업고 있는 엄마의모습에서 뒤돌아서는 장면은 "세상은 아무리 비열한 배반도 능히 저지를 수 있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너무나 처절하고 너무나 빈한하고 너무나 슬프고 그럼에도 아이들의 그 속절없는 기대와 믿음과 희망의 부스러기를 하나 하나 짚어가는 아름다운 눈길이 있다. 가난이 훑고 간 그 너절한 뒤켠에서도 고고함과 꿈을 지키려 하는 모자의 모습은 한 작가를 태동시킨 저력이 어떤 것이었는 지에 대한 곁눈질을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조금 덜 치사하고 조금 덜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잠깐 청명했던 하늘은 다시 찌푸리고 울고 다닐 줄 알았던 아이는 웃으며 교문을 나오고 설마, 하며 다시 친정 엄마에게 시도했던 육개월 아기의 엄마 인식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고(대성통곡) 나는 이제 마흔이라는 나이를 향해 걸어가고. 모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가능해지고 당연할 것으로 알았던 일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그렇게 '절대'라는 말과 절대 멀어지는 게 삶인 것 같다. 봄이 오는 것을 보면. 그럴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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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3-0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부모 되신거 축하드립니다. 첫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할때 참 많이 설레였죠~~~ 제 아이가 벌써 고3이라니.....ㅎ
학생수가 반으로 준만큼 선생님의 손길도 많이 닿아서 다행입니다. 더 밀착되는 느낌은 있더라구요.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단편속에 숨어있는 반전이 참 기발하게 생각되더라구요^^
<디어 라이프>도 도전해야 겠군요.

blanca 2014-03-08 19:1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도 유치원생이랑 거의 같은 스물 다섯이라는 숫자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저는 이상스레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어 괜히 어렵게 생각하고 그랬는데 말씀도 다정하고 좋은 분일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제 아이는 생애 처음 만나는 공교육 현장에서의 선생님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기대와 기억을 가져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더 좋았어요^^

꿈꾸는섬 2014-03-0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공주님 입학을 축하해요.^^
둘째가 어리면 힘들더라구요. 현준이 입학하고 현수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ㅜㅜ
그래도 이제 곧 자립하겠죠.^^

blanca 2014-03-08 19:20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현수도 축하드려요! 아, 저 같은 경우는 잘 눈에 띄지 않아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당장 학부모 총회에 애를 업고 가야 하나, 고민이에요. 요새 한시도 안 떨어지려 해서...민폐나 되지 않을 지 모르겠어요.

감은빛 2014-03-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아이가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메고 나설 때,
저 조그만 녀석이 저 큰 가방을 메가 다니는구나.
나도 그랬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학부형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학교라는 또 다른 세상에서 아이가 잘 적응하기를 바래요!

blanca 2014-03-12 15:1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선배님이시군요~ 아직 적응기간이라 얼떨떨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은 부분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3-1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 같은 분은 아직 결혼도 안 한 동창들을 보면 "너희들은 언제 결혼해서 애기 낳아 학부모 될 거니..."하는 마음이 들 거에요.

blanca 2014-03-13 21:29   좋아요 0 | URL
ㅋㅋ 정말 친한 친구가 아직 솔로예요. 저는 지금 결혼해서 아이 낳으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삼십 대 중반의 경계가 가지는 의미가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요.
 
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움베르트 에코, 오르한 파묵,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 이언 매큐언, 필립 로스, 밀란 쿤데라, 레이먼드 카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E.M 포스터.

 

움베르트 에코와 오르한 파묵, 폴 오스터의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다. 하루키는 소설을 제외한 에세이, 이언 매큐언은 <속죄>, 밀란 쿤데라는 <농담>,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 카버는 <대성당>,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 헤밍웨이는 제대로 다 읽은 것인지 기억 안 나는 대부분의 작품들, 윌리엄 포크너는 <내가 누워 죽어 있을 때>, 포스터는 <전망 좋은 방>의 앞부분 정도.

 

그러나 '완강한 무관심'이라는 전부를 다 아우르려는 만용을 경계하는 신선한 개념과 글쓰기를 기본적으로 '사랑의 행위'라고 보는 에코의 "저는 모든 것을 후회해요"라는 고백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는 이야기다. 작품을 다 쓰고도 다시 타자기로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손끝으로 체감하는 폴 오스터가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 다음에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는 이야기는 "인생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연약하고 너무도 알 수 없다."는 덧붙임으로 더없이 투명해진다. 그래, 분명 내가 느끼는 것들, 하지만 이야기하여질 수 없고 언어로 담아낼 수 없었던 것들을 명징하게 눈 앞으로 불러오는 그의 재능은 그의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파리 리뷰 인터뷰'의 강력한 매력이다.

 

모든 작가는 믿을 만한 독자가 있어야 합니다. <중략> 그렇지만 독자는 솔직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독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격입니다.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거짓으로 위로해서도 안 되며, 칭찬받을 만한 작품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로 칭찬을 해서도 안 됩니다.

-P.181 

폴 오스터의 이야기다. 이것이 그 인터뷰 자체의 질과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작가와의 인터뷰가 고른 흥미와 감동과 몰입을 자아낸 것은 아니다. 대단히 기대했던 필립 로스는 아직 <에브리맨>을 쓰기 전이라 그런지 도통 읽어보지 못한 작품과 캐릭터들에 집중한 이야기가 나로서는 노년의 대작가가 늙음과 죽음을 그렇게도 생생하고 포괄적으로 그려 낸 연유를 알아내지 못해 아쉬웠고 밀란 쿤데라의 작품의 기법은 평범한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어렵게 느껴져 알아듣는 데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왜 카버가 단편작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삶 앞에서 그가 느꼈던 무기력함과 고단함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럼에도 그가 사치라고 생각했던 예술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 지를 가감없이 이야기하는 대목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답고 슬픈 단편 같았다. 나는 정말 레이먼드 카버가 이런지 몰랐다. 정말 몰랐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살아남고, 공과금을 내고, 식구들을 먹이고, 동시에 자신을 작가로 생각하고 글쓰기를 배우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해 동안 쓰레기 같은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글을 쓰려고 애쓰면서 제가 빨리 끝낼 수 있는 걸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한 권에 2~3년이 걸리는 소설을 쓸 방법이 없었어요. <중략> 그래서 단편이나 시를 썼지요. 삶이 제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언제나 엄청나게 많은 좌절감에 직면해야 했어요. <중략>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고, 언제나 한 발만 내딛으면 파산이 기다리고 있었어요.-p.323 

회복된 알코올 의존자라 자신을 명명하는 레이먼드 카버는 열여덟에 결혼해 열아홉에 아빠가 되었다. 그 부부에게 청춘이라고 할 게 없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전설로 남은 위대한 단편 작가의 실제 삶은 얼마나 처절했는 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니 그는 삶을 제대로 알았다. 겉만 핥고 남는 시간에 여유롭게 써대는 그런 긴 이야기 대신 당장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이상과 꿈에 좌절당하는 현실의 속살을 절절하게 알기에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그의 표현을 빌자면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불꽃을 쏘아 올리는 어떤 것"은 소설의 일반적인 정의가 아니라 반드시 카버의 것, 그의 작품에 적용되는 찬사일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르케스는 기대 이상으로 대단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다섯 권의 책을 내고도 단 한 권의 인세도 받지 못했다는 이 작가는 노벨상은 자신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단었했는데 노벨상을 결국 받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심심한 위로를 표해야 할 것 같다. 계속해서 작가에게 명성이 가져오는 해악과 불편함에 대하여 역설하는 마르케스는 그것이 나쁜  고독을 만들기 때문에 권력자의 고독과 닮아 있다고 덧붙인다. 게다가 소설을 읽는 대신, 여성 잡지와 가십을 읽느라 바쁘다는 너스레와 정말로 유일하게 평생 동안 후회하는 일이 딸이 없다는 점이라는 고백은 이 작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루가 아쉬울 정도로 유쾌할 것 같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 아주 귀엽고 유쾌한 사람인 것 같다.

 

노벨상을 받기 전의 마르케스와 아직 <에브리맨>을 쓰기 전의 필립 로스는, 그리고 세상의 온갖 찬사를 받기 전의 레이먼드 카버는 마치 결말을 다 알고 있는데 입에 침을 축이며 그것을 머금고 있는 알고 있는 자의 여유를 두둑하게 하는 묘한 이끌림이다. 한편 그러기 전의 그들이 그런 후의 그들과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과 아쉬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백이다.

 

솔직한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폴 오스터의 말을 유념하고. 그럼에도 이 책은 칭찬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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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2-0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가 귀엽고 유쾌한 사람이었군요^^
오늘 아침 출근길에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초등 두 아이의 엄마이며 학원 강사인 직장맘의 육아 애환을 듣는데 눈물 나더라구요. 레이먼드 카버........에구 딱해라.

blanca 2014-02-06 22:11   좋아요 0 | URL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고백하는 모습이 사실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작가가. 읽다가 가슴이 참 아프더라고요. 저는 막연히 알코올 중독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왜 술에 빠지게 되었는 지 현실적인 고통, 좌절로 막다른 골목에 빠진 결과였다는 것을 (물론 그게 잘못된 거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듣고 나니 그런 상황에서 빚어낸 그의 작품들이 더 빛나게 느껴졌어요.

페크pek0501 2014-02-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벌써 이 책을 읽으셨군요.
신문의 신간 안내 면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 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던 책이에요. ^^

blanca 2014-02-06 22:11   좋아요 0 | URL
저도 관심만 가지다가 읽게 되었는데 아주 너덜너덜해졌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참 좋았어요, 페크님.

mira 2014-02-0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고뇌들이 제대로 나와있네요. 읽고 싶어지는군요

blanca 2014-02-06 22:13   좋아요 0 | URL
mira-da님, 사실 작가들의 소설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이러한 사적인 고백들과 어우러진 인터뷰가 참 흥미롭기도 하고 그 작가의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정말 작품 얘기 위주로만 한 인터뷰도 있어요. 밀란 쿤데라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저는 그래서 좀 오히려 섭섭하더라고요.^^;

transient-guest 2014-02-07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면 솔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팬심이랄까, 그저 그 작가의 글은 무조건 읽고만 싶고,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두 개를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더 유명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더 잔잔한 맛이 느껴져 좋아합니다.

blanca 2014-02-07 13:1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안 그래도 관심이 있었는데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솔직히 <백년 동안의 고독>이 저의 취향이 아니었던 터라서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입이 좀 힘들었어요. 레이먼드 카버는 너무 좋아하는 작가인데 역시 인터뷰 내용 듣고 나니 더욱 더. 정말 정직하게 솔직한 사람 같았어요. 사실 소설가가 자신의 삶 그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반면 그는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는 모습이 진정성이 있어 보였어요.

감은빛 2014-02-2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의 인터뷰네요.
재밌을 것 같아요.
움베르트 에코와 오르한 파묵은 읽어봤고,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책장에 방치중이예요.
헤밍웨이는 분명 읽었을 것 같은데, 막상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네요.
나머지 작가들은 확실히 읽은 기억이 없네요.

이 글을 읽으니, 이 책을 시작으로 저 작가들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 읽고 싶어져요.

blanca 2014-03-01 08:09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재미있어요. 에코와 파묵을 읽어보셨다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저도 <백년 동안의 고독>은 힘겹게 읽었어요^^;;

앤의다락방 2014-12-23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이면 아마 주문한 책들중에 이 책도 섞여 배달 됩니다~ 읽고 싶은책이었거든요~ 이 리뷰를 보니 더욱 기대되요^^

blanca 2014-12-26 07:34   좋아요 0 | URL
댓글이 너무 늦었지요? 지금쯤 이미 다 읽으셨을까요?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보내셨겠죠!

에이바 2015-06-1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작가란 무엇인가` 1권이 2014년에 나왔었군요. 인터뷰는 더 오래되었지만, 개인적으로 깔끔했다고 느낀 인터뷰는 포크너였고요. 카버와 오스터 인터뷰는 작가의 인성이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따뜻하고 진솔하고요... 전 파묵 인터뷰가 별로였어요.
 

김주영이라는 작가를 이제서야 알게 됐다. 아쉽게도 유명한 <객주>는 읽어보지 못했다.

 

"잘 가요, 엄마."

안개처럼 씨앗처럼...... 한평생 무겁고 가혹한 삶의 중력에서 벗어날 날 없었던 어머니는 결국 한줌의 먼지였다. 그러나 민들레 꽃씨가 되어 바람을 타고 멀리로 흩어지는 것은 잠깐의 착시였을 뿐, 먼 느낌이 들도록 던진 몇 줌의 먼지는 대부분 우리들 두 사람의 바짓가랑이와 구두 위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해주 최씨였던 어머니는 끼닛거리 마련에 평생을 박해받은 이승에서 처연하게 소멸되고 말았다.

- 김주영 <잘 가요 엄마>p.88

 

 

 

어떤 이야기는 마치 작가가 단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픽션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작가를 만나게 된 첫 작품이면서도 내도록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도저히 억지로 그냥 만들어 낼 수 없을 것같은 느낌. 정묘하고 아름다운 묘사는 작가의 가슴에서 나와 손끝으로 영글었다. 소설은 정말이지 아무나 막 되는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절로 내려앉는 처절한 문장들. 책장이 쉽게 넘어가도 아쉽고 더디게 넘어가도 아쉽다.

 

구순이 넘은 노모가 자식들과 며느리에게 천덕꾸러기처럼 대우받다 혹은 스스로가 어느 정도 자초하기도 한 소외에 갇혀 있다 슬프게 사라지는 장면.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들의 곡절 많은 삶의 복기. 소설 중간을 무지르고 바로 '작가의 말'로 가본다.

 

어머니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로부터 유린당하고 희생당하면서도 그런 질곡과는 무관심한 채로 일생을 보냈다. 오히려 그 참혹한 공포심을 끌어안고 흡사 아무런 구애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혹은 남의 것이든 끌어안고 살았다. 드디어 어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죽음조차 아무런 불평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곧 함정은 아니란 것을 나에게 가르쳤다.

-작가의 말 중

 

 

어디까지가 작가의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그가 만들어 낸 이야기인 지의 그 모호한 경계쯤에 그의 가엾은 '어머니'는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어머니'는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고단한 삶의 뒤안길에 서성인다. 일단 그녀는 그 시대에서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남편의 사랑과 부양을 받을 수 없었다. 성이 다른 두 아이를 데리고 평생을 신역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장남은  머리가 영글자 그녀를 떠나버린다. 나이가 들어서는 유명해진 아들의 뒤켠에서 숨을 죽이고 엎드려 지낸다. 그녀의 수명은 길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 염꾼들 앞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져 쪼그라든 그녀의 몸은 마침내 돌아온 아들 앞에서 눈물겹다.

 

대문이나 사립문, 담도 울도 없었던 초라한 집에서 아버지도 없이 어머니와 배를 곯아야 했던 어린 아들이 새아버지와 의붓아우를 얻게 되며 느꼈던 소외감과 비애는... 새아버지가 나타난 후로 잠들면 따뜻한 어머니 품에서 떨어져 건넌방에 옮겨질 때마다 느꼈던 그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것같은 느낌에 대한 묘사는 이윽고 몰래 나타나 아들을 껴안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눈물에 대한 감각으로 더욱 아프다. 아들을 사랑했지만 아들은 어미의 그 사랑을 실감하지도 받아내지도 못한다. 새아버지와 새아우, 믿고 의지했던 사촌누이로 만나야 했던 친누이의 야반도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친구와의 이별, '나'는 설 곳이 없어 떠나고야 말았다. 어린 마음은 오기와 복수심, 치기로 꽁꽁 얼고 만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제 노인이라고 불려도 될 만치 늙어서도 이러한 어린 아이는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치뜬다. 그러니 그와 어머니와의 이별은 화해와 용서, 사랑으로 감동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는 못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사내의 모습은 그러니 더욱 비감어리고 공감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깨닫고 성숙하고 용서하고 감내하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렇다면 그것은 위장이자 위선이자 거짓말이다.

 

 

 

 

홍어를 떠올리면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먹게 되었던 그 비릿하고 충격적인 맛이 코를 알싸하게 만든다. 정말이지 지독했다. 첫맛이 전부라 착각하며 안심했던 나를 한번에 가격했던 그 암모니아의 잔향. 그 후로 홍어는 나에게 쉽지 않다. 역시 같은 작가의 이야기라는 표징. 떠난 아버지. 어머니와 남은 '나'라는 사내아이. <잘 가요 엄마>와 비슷한 구도의 가족. 설국을 뚫고 하나씩 찾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또 떠낢. 사실 이 소설을 서사의 다이나믹함으로 이해하려 하면 곤란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만큼 눈이 덮어버린 그 풍경 위로 사각 사각 밟고 걸어오고 걸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문시처럼 눈부시다. 작가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지난한 산고 끝에 새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 자로 보인다. 분명 그의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 누가 이 이야기를 펼쳐든들 그의 호흡 앞에서 외면할 수 있을까.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이 눈을 뚫고 그해 겨울 눈을 살고 사는 삼례, 집을 나간 아버지가 결국 돌아올 것인지, 어머니는 그 아버지를 맞아줄 것인지, 부엌에서 사라져 버린 홍어는 어떻게 된 것인지, 모든 것에 대한 답 대신 그 질문들을 충실히 살아가는 인물들의 그 삶을 정직하게 맞아내는 열심에 그저 감탄하게 되어버리는 이야기. '홍어'는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나 쉽지 않고 역시나 끈질긴 잔향이 남는다. 그러니 홍어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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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주영 님의 소설을 저는 '신문 연재'로 처음 만났었는데 '81년과 '82년까지는 꼬박 꼬박 읽었던 듯해요.('83년 이후엔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그 분의 소설을 못 읽었죠.) 그 당시 저는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할 때였는데, 하숙생을 많이 치는 하숙집에서는 대개 주요 일간지 서넛 정도는 보는 편이었죠. 아침밥을 먹다가도 연재소설을 읽고, 그때 못 읽으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신문을 찾아서라도 읽곤 했었지요. 그땐 참 모든 전화도 하숙집 여주인을 통하지 않으면 받지도 걸지도 못할 때였죠.

김주영 님의 연재소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깊이와 가슴 깊숙한 곳을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쑤시는 듯한 맛이 있었지요. 이 분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이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 마을과 이십 리 남짓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특히 고향 어르신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답니다. 이문열 작가의 고향(영양군 석보면) 또한 김주영 소설가의 고향인 진보와는 지척인데, 두 사람은 거의 동향 사람이라고 할 만한데 작품과 작풍이 다른 게 저로서는 몹시 흥미롭더군요. 아마도 이문열 작가는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찍 상경하는 바람에 (제 생각으로는) 도시물을 많이 먹은 듯한 반면 김주영 작가는 어렵게 자랐고 안동에서 십여 년 동안 엽연초 생산조합의 주사로 일할 정도로 시골 생활을 오래 한 경험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어요.

blanca 2014-01-28 13:00   좋아요 0 | URL
oren님 댓글 읽으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얻네요. 김주영 작가가 실제로도 어렵게 컸군요. 군데군데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궁핍에 대한 묘사가 가슴을 아프게 해서 아, 이 작가의 성장 과정에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많았겠구나, 하고 짐작만 했어요. oren님의 댓글 속에서 대학 시절 하숙집에서 연재 소설을 읽던 청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순오기 2014-01-30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위치 레시피는 페이퍼에 있는 대로 하되, 재료는 그때 그때 냉장고에 있는 게 뭐냐에 따라 달라지죠.^^
감자 삶을 때 소금을 조금 넣으면 되는데, 저는 되도록 싱겁게 먹으려고 소금 안 넣어요.
그래도 식품마다 소금을 함유하고 있으니 요플레만 해도 괜찮았어요.
어제는 아들이 휴가와서 샌드위치 먹고 싶대서,
감자와 요플레는 기본이고 양배추와 사과에 견과류도 넣고 딸기를 듬뿍 얹어 만들었어요!^^

blanca 2014-02-01 09:5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이제 한창 마무리하시고 쉬고 계실까요? 저도 명절 잘 보내고 아기 때문에 짬을 못 내 이제서야 커피 한 잔 하네요. 친절한 레시피 잘 참고해서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 볼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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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되어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p.16

 

이런 이야기가 서두에 있었다. 줄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스무 살 젊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들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생동하는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일이다. 감정의 격랑 속에서 애늙은이처럼 내일을 걱정한다면 결코 청춘이 아니다.

 

역시 '나쓰메 소세키다!'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다. 언제나 그의 작품이 그렇듯 별 사건도 별 구실도 없는데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의 영롱한 구슬 같다. 온천장에 그림을 그리러 온 화공. 결국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못하고 하이쿠만 잔뜩 읊다 가는 그 화공의 눈앞에 그려진 봄날의 숲, 바다,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여인, 동자승, 러일전쟁 출정을 앞둔 젊은이. 그 화공의 시선은 거만하기도 하고 옹졸하기도 하고 편견 안에 갇히기도 하고 한없이 배회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그의 언어에는 어떻게도 건드릴 수 없는 울림이 있다. 화공의 입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의 붓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한장의 화첩을 적신다.

 

미지근한 해변에서 소금기가 있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이발소의 포렴을 졸린 듯이 펄럭인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 그 밑을 빠져나가는 제비의 모습이 날쌔게 거울 속으로 떨어진다. 건너편 집에서는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할아범이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잠자코 조개를 까고 있다. 짤가닥 하고 작은 칼이 닿을 때마다 붉은 조갯살이 소쿠리 안으로 숨는다. 껍데기는 반짝하고 빛을 내며 60센티미터 남짓 되는 아지랑이를 가로질러 날아간다.-p.80

 

이러한 묘사는 이발소 주인과 '내'가 나누는 해학이 깃든 대화의 말미에 나온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재미는 이러한 명징하고 투명한 묘사에도 있지만 그 틈새마다 비어져 나오는 현실적인 즐거움에도 있다. 그러니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머리를 감겨주는 대신 비듬을 격력하게 털어주는, 소세키의 문장을 빌리자면, "지극히 값싼 기염을 토하는 이 주인"과의 이발소 풍경에는 생동하는 유머가 있다. 마침내 이러한 주인까지 즐거운 봄빛 속의 구성 요소로 끼워넣는 능력은 분명 나쓰메 소세키적인 것이다. 그이기에 가능한.

 

서양문명, 중국문명, 일본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이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의 문명관에는 구구한 해석이 따른다고 한다. 결국 그가 지향했던 곳에는 자연과 예술, 심지어 인간까지도 그 자체의 날것으로 완상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동백꽃이 하나씩 연못에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그의 시선과 언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또 뚝 떨어진다."이러한 문장의 반복은 마치 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한 묘파의 일환이다.

 

내세에 환생하면 명자나무가 되고 싶다는 화공의 목소리는 사실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것같다. 온천장에 와서 한 장의 그림도 못 그려낸 화공.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반드시 그림이 아닐 것이다. 생의 한 단면, 사계절의 하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 이렇게 단편으로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하는 능력. 그것의 집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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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17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가 서두에 있었다. 줄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스무 살 젊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들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생동하는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일이다. 감정의 격랑 속에서 애늙은이처럼 내일을 걱정한다면 결코 청춘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급 동감하면서도 .. 그런 청춘들이 간혹, 그러니까 제게는 천재들 같은 이들이 있더라구요.
세월의 배움이 가르쳐 주기 전에 간파해버리는 청춘들..

blanca님의 비유법에 읽어보지 않은 글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

blanca 2014-01-18 12:31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제가 그렇게 현명하게 젊음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도 같아요. 정말 그런 현명한 청춘들을 만나보셨다니 그 아해들도^^;; 새벽숲길님도 부러워집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스메 소세키처럼 묘사법을 구사할 수 있다면...
전 꿈에도 그리할 것 같지 않아 자꾸만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구시대? 사람이지만 신세대 감각에 절대 뒤지지 않는 소세키...
블랑카님도 휴일 잘 보내시어요.^^*

blanca 2014-01-18 12:3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 사람은 정말 작가로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태생부터가 남다른. 물론 노력도 했겠지만 사물을 보고 표현하는 능력이 남달라요. 저는 모처럼 아이가 영화관 나들이를 가서 ㅋㅋ 좀 쉬고 있어요.
 
국수
김숨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신산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그러한 풍경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속단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에 하필 읽은 이러한 이야기들은 위로가 된다기보다는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누른다.

 

김숨의 소설집의 그녀, 그들은 늙었거나 가난하거나 배신당했다.

지금 이 순간 젊거나 행복하거나 부유한 자는 없다.

김숨의 그녀, 그들은 탐욕스럽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다.

추상적인 문제들이나 고차원적인 사고나 뜬 구름 잡는 식의 호사가 그네들에게는 없다.

그래서 잘 읽히나 그 읽힘이 편안하지 않고 뒷맛이 쌉사래하다.

그것은 작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시선에서 조망된 우리네 삶이 본래 그런 식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국수>

이미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읽어도 마지막 대목에서는 눈물이 또 툭 떨어진다.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로 시작하여 국숫발을 뚝뚝 끊어 설암에 걸린 계모에게 먹여주는 마지막 장면까지 반죽을 치대고 밀고 썰어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전처의 자식 넷을 거두었다 말년에 홀로 외롭게 암으로 투병하며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예전에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국수를 만들어 주는 과정 하나 하나에 모녀의 관계를 투영한 이야기는 여자의 인생, 가족의 숙명, 삶의 지난함 등이 눈물겹게 형상화되어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대단한 서사를 스펙터클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 하나의 과정, 하나의 감정을 심도있게 묘파해 내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방증 같은 이야기다.

 

 

 

 

 

<옥천 가는 날>

옥천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곳이다. 열두어 살 무렵 할머니집이 있는 대구로 내려가다 아버지는 접촉 사고를 내셨고 대부분 안 다친 상황에서 나는 이를 심하게 다쳤다. 가장 가까운 장소가 옥천이었고 아무데나 짚어 간 조그마한 치과에서 중년의 여의사는 응급 처치를 아주 정교하게 신속하게 잘 해치웠다. 사고수습으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행한 나이 든 사촌 오빠를 아버지로 착각한 그녀는 어떻게 하다 아이 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고 심하게 야단을 쳤다. 여하튼 옆으로 넘어간 이를 지지대로 다 세우고 상처난 곳을 붕대로 덮어주는 등 그녀의 처치는 나중에 다른 치과 의사들한 테도 매우 깔끔하고 인상적이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옥천' 하면 아무 연고도 없이 기착지처럼 들른 그곳이 참 믿음직하고 따뜻하게 기억된다. 그러나 정숙과 애숙 두 자매가 옥천으로 가며 주고받는 이야기들로만 짐작할 수 있는 그녀들의 사연은 어둑시근하고 가슴아프다. 구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그녀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인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느라 노모를 돌보지 못하는 언니 정숙,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노모를 마지막까지 돌보았으나 요양급여를 타기 위해 노모의 온전한 정신을 치매로 위장해야 했던 동생 애숙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들은 그녀들의 팍팍하고 고생스런 생계와 노모와의 아픈 추억들을 외연으로 밀어낸다. 완전히 죽어 있다는 암시 대신 마치 지척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듯한 암시를 주는 노모와 그녀들의 자리는 마무리 즈음에 가서야 구급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좁은 구급차 안에서 생과 죽음이 속살거리는 풍경.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중풍에 걸린 홀시아버지를 모시는 첫애를 임신한 며느리의 마음 속은 무간지옥이다. 하루종일 오리 뼈를 고아 그 국물을 마시며 생에 대한 끈덕진 애착을 시위하듯 표현하는 노인은 어느 날 이웃집 여자에게 빌려 준 돈 삼십만원을 대신 며느리가 받아 쓰라는 이야기를 한다. 산책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노인, 약속한 귀가 시간을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시아버지에게 삼십 만원을 빌려 갔다는 이웃집 여자의 부재.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어쩌면 그 누구의 귀환도 바라지 않는 여자의 진심일런지도 모른다. 어떤 대답도 듣기 어려운 삶 그 자체일런지도 모른다.

 

<명당을 찾아서>

홀린듯이 부동산의 사내의 '명당 운운'에 석모도라는 섬을 따라나선 부부의 이야기는 기막히게 괴괴하다. 김숨 작가의 서스펜스적인 문장들은 큰 사건 없이도 읽는 이의 간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신기루처럼 잡을 듯하면 사라지는 꿈꾸었던 집 대신 이 부부가 당도하게 되는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역시나 이야기는 흔쾌히 답을 주지 않아 김이 좀 빠지기도 한다.

 

<구덩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구제역으로 숱한 돼지들의 목숨줄을 끊어놓아야 했던 아픈 시간들을 우리는 금세 잊어버렸다. 이 이야기는 돼지들을 살처분할 구덩이를 파는 사내의 던적스러운 삶의 행로와 인간들이 꾸역꾸역 살기 위해 그 구덩이 속에 파묻어버리는 것들의 풍경이 교차하면서 읽는 내내 소름이 오소소 돋게 한다.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종용받는 사내와 그 사내가 지금 하는 일에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는 교통사고 휴유증을 앓는 주인집 아들의 대면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삶의 행로를 따라 비어져 나오는 숱한 지저분한 실수들과 악행들의 무게를 실감케 한다.

 

삶과 나이듦과 죽음의 그 거칠고 적나라한 속살. 한결같은 그 천착이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자꾸 동심원을 맴도는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그렇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과 손길이 빚어낸 이야기들의 울림은 크고 깊다. 입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턱 언저리에 묻기도 하고 흘리기도 하는 국숫발을 반죽하는 시간이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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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 역시 대단하군요.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이 소설집을. 한달 뒤에나 가능한 얘기지만.. 여튼 블랑카님 글은 늘 균형있고도 설득력 있는 섬세함을 잃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전 단편 '국수'만 읽었거든요. 두번 읽어도 같은 부분에서 찡했어요.)

blanca 2014-01-08 16:29   좋아요 0 | URL
섬님도 국수 읽으셨군요! 어떤 대목에서 찡하셨는 지 궁금합니다. 저는 솔직히 읽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국수가 자꾸 먹고 싶어져서 ㅋㅋ 혼났습니다. 엄마가 아주 어렸을 때 손수 국수 반죽을 밀어 동네 아주머니들과 나누어 먹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요새는 참 보기 힘든 풍경이지요.

페크pek0501 2014-01-0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어린 데도 읽을 것 다 읽으시는 님의 책에 대한 열정... 을 봅니다.
차라리 아이가 어릴 때 저도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젊었으니 눈이 피로하지도 않았고
오랜 시간 책을 봐도 끄떡없던 시절이었어요.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좀 커서는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줄창 책을 봤어요.

김숨 작가의 글은 (이름은 들어 봤으나) 아직 읽어 보지 못했으니 제가 이 시대를 잘 따라가지 못함은 확실한 것 같네요.
느릿느릿... 저는 고전에 묻혀 지낼 새해가 될 것 같아요.
대신 님의 리뷰 보면서 아, 이런 소설이 있구나, 하는 정도는 하고 살아야겠어요. ^^

blanca 2014-01-10 09:40   좋아요 0 | URL
아, 아이 안고 재우거나 수유할 때 책을 보게 되요. 그래야 즐겁게 견딜 수 있거든요^^;; pek0501님의 모옴 여정이 너무 기대됩니다. 페이퍼 열심히 찾아가서 볼게요.

세실 2014-01-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 작가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되는, 외면할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이군요.
읽어봐야 겠습니다.

blanca 2014-01-13 21:2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젊을 때부터 지금도 젊지만 나이 든 사람들의 내면을 그려내는 솜씨가 아주 비범한 작가예요. 주로 노인들의 고달픈 삶, 내면을 많이 그려서 사실 읽고 나면 한없이 다운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을 아주 노련하게 잘 그려내고 읽히는 재미도 있어서 추천드리고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