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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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던가. 학급문고라는 것이 있어 각자 집에서 가져온 책들로 작은 도서관을 꾸몄었다. 그 때 <여자의 일생>을 집어와 몇 번이나 읽어보려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의 문제였던지 아니면 고작 열다섯 언저리였던 나의 시선이 차분히 머물지 못해서였던지 이 책은 번번히 나를 비껴갔다. 통속적인 제목과 통속적인 여인네의 삶이 한창 세상 전체가 언제든 나의 손으로 조물딱 조물딱 하여 나의 꿈대로 변형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나의 치기와 어우러지지 못했다. 나는 아주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서글픈 수동적인 삶과는 공통분모가 찾아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던 것도 같다.

 

다시 새로운 여자의 일생을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낳은 내가 읽는다. 이백 년도 더 되는 시차. 시골 귀족의 외동딸 잔느. 수녀원을 막 나온 열일곱의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 환희를 투영한다. 그 설레임, 그 막연한 진동. 모파상이 그려내는 그 점액질의 본능적인 삶에 대한 무모하고 막연한 기대감은 내가 처음 <여자의 일생>을 펼쳐든 그때를 다시 살려낸다. 그러니 나는 가능했다면 이렇게 열일곱의 잔느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공상, 몽상. 가끔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폭우를 뚫고 푀플의 아름다운 가족 소유 저택에 도착한 잔느는 마침내 교구 신부의 소개로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근사한 남편감 쥘리앵 자작을 만나 사랑에 빠져든다.

 

황혼은 짧았다. 별들이 촘촘히 박힌 어둠이 펼쳐졌다. 라스티크 영감이 노를 저었다. 바다가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잔느와 자작은 나란히 앉아  작은 배가 뒤에 남기는 이 움직이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 생각도 않고, 망연히 앞만 바라보며, 감미로운 안온함에 잠겨 저녁 기운을 마시고 있었다. 잔느의 손이 의자에 기대 있는 동안, 자작의 손가락 하나가 우연인 것처럼 그 위에 놓였다. 그녀는 이 가벼운 접촉에 놀라고, 행복하고, 당황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p.58

이 가슴을 떨게 하던 사랑도 막상 결혼 생활과 만난 남편의 비열하고 치졸한 이기심과 타성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심지어 그는 아내가 함께 젖을 먹고 자매처럼 자란 하녀 로잘리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기까지 한다. 이후 태어난 아들 폴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잔느는 남편이 자신과 친구처럼 지냈던 백작부인과 외도를 저지르다 그녀의 남편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 앞에서도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이동식 오두막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현장을 발각당해 장사 같은 백작의 손에 의해 송두리째 오두막이 구르는 광경의 묘사는 비장하다고 하기에는너무 희화적이서 웃음이 터졌다.

 

사람 좋은 친정 부모님들과 다시 함께 하게 되는 잔느의 삶은 다시 아들 폴을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결혼 이후 그녀의 주체적인 삶은 간데없다. 때로는 종교에 광적으로 몸을 맡기기도 하지만 모파상의 시선에서 조명된 종교의 그 적나라한 허점에 대한 공박은 그것마저 허무한 허구의 것으로 귀결되게 한다. 한없이 사랑했던 친정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며 어머니가 생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추억의 상자에서 어머니의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잔느의 절망은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과거와 겹쳐져 결혼 생활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회의로 이어진다. 모파상이 그려내는 삶은 잔느에게 그 어떤 단 하나의 희망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아니면 '삶'이라는 그 자체가 어쩌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저만치 굴러가 버리고 마는 바퀴 이상이 아닌 것 같다는 자각에 울울해지기도 했다.

 

그녀가 애지중지 길러 낸 아들 폴의 응답은 더욱 가혹하다. 그는 일찌감치 창녀와 돈 안 되는 사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끊임없이 잔느에게 돈을 요구하고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을 마음으로 독립시키지 못한 무력한 어미는 아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그의 정부를 미친듯이 질투한다. 잠시 종교에서 멀어졌던 잔느는 신이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을 질투한다고 느낀다. 인간의 감정으로 현현하는 것이 신인지도 모른다,는 모파상의 덧붙임은 잔느가 다시 사제에게 돌아가 조언을 청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 판단하지 못하고 상황과 타인이 이끌어 가는 대로 그녀 자신을 방기함으로써 더한 비극으로 치닿는다. 말미에 다시 돌아오는 하녀 로잘리의 훈수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층 더 그러하다. 옛 주인의 심복으로 아들에게 더이상 휘둘리지 않도록 단속하는 하녀의 모습은 물론 잔느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잔느의 삶이 잔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강화하는 하나의 실증 같아 더욱 불쾌하다.

 

아들의 정부가 죽으며 남긴 손녀딸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종의 환희를 느끼는 잔느의 모습은 조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 옛날 바람난 남편을 통해서라도 둘째 딸을 얻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그 처절했던 잔느의 무모하고 서글픈 시도는 마침내 아들에게서 소득을 얻는다. 경쟁자였던 아들의 정부는 죽고 이제 다시 집착과 애정을 기울일 대상을 손에 얻게 된 것이다. 하녀 로잘리가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 모파상의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아프다. 꿈을 꾸며 노래를 부르던 소녀가 다 시들고 약해빠진 노파가 되어 또다른 생명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그것은 하나의 희망으로서가 아닌 또다른 비극의 매개체가 되어 안긴다.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과 기대도 모조리 짓밟아 버리는 데에 이렇게 능숙한 묘파가 가능한 작가는 두 번 다시 나올 것 같지 않다. 그것 또한 삶의 또다른 절망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화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둘러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너무 아프다. 정말 그렇다. 그는 '희망'을 '기만'이상으로 독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각오를 담보한다. 이후 당신은 정말 우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해서 역설적으로 더욱 더 열심히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바로 모파상의 미덕이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의 플롯은 이미 우리 삶에서 태동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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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4-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업이나 취업에 실패하거나 실연당한 사람은 모파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인간의 어두운 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끝까지 파헤치니까요.<여자의 일생>을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권해서도 안 되겠죠.

blanca 2014-04-14 10:50   좋아요 0 | URL
모파상이랑 에밀 졸라가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대단히 현실적이고 음울하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여자의 일생>이 제목부터가 좀 청승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읽어보니 과연 오늘날이 모파상의 시대에서 진보를 이룬 것인가, 아직도 비슷한 면이 많구나, 싶었어요. 인간의 본성은 어떤 진보나 발전의 틀을 갖다 대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어두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졸라도 그렇고 모파상도 그렇고 여성의 심리나 내면을 대단히 섬세하게 잘 그렸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4-04-14 17: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졸라는 혁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담기도 했지만 모파상은 그런 것도 없는 완벽한 비관주의적 사실주의 작가죠.그래서 졸라는 드레퓨스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섰나봐요.

여성작가는 남성심리 묘사가 서투른데 남성작가는 여성심리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 많죠.왜 그런지 예전에 곰곰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blanca 2014-04-15 09:54   좋아요 0 | URL
노자님 얘기 듣고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네요. 남성의 심리를 잘 그리는 여성 작가는 언뜻 떠오르지가 않아요.

302moon 2014-11-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읽으려다 포기했었어요ㅎ 저는 단편이 더 좋더라고요

blanca 2014-11-29 00:25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을 포기했던 기억이 ㅋ 나네요. 모파상의 단편집도 사실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주거 정리 해부도감 - 정리수납의 비밀을 건축의 각도로 해부함으로써 안락한 삶을 짓다 해부도감 시리즈
스즈키 노부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더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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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갑자기  여러 가지 일들이 함께 몰아닥칠 때 효율적으로 그 일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아직 서툴렀던 나는 전화를 받다 상사에게 불려가 일감을 받고 또 손님을 받다 우왕좌왕 하다 외근까지 나가고 나면 마치 세네 명은 일하는 것 같은 지저분한 책상을 잔해처럼 뒤로 했다. 그런데 유독 책상이 얼음알 처럼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대체로 그 사람들은 '일 잘한다'는 평까지 받고는 했다. 결국 모든 능력은 교차하는 것일까, 하는 부러움에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종종 그들의 책상을 탐방했다. 말 그대로 '각 잡힌 자리'였다. 저 사람들은 타고난 걸까? 그냥 그때 그때 정리를 잘 하는 걸까? 아니면 몰아서 하는 걸까?

 

아이를 낳고 정리에 대한 능력은 본격적으로 시험을 받게 된다. 게다가 연령대가 층이 지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장난감을 정리하지 않을 이유가 너무 많아진다. 그러니 '버리기'로 정리를 시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큰 아이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처분해야 하는 유아 블럭이 둘째 아이는 지금 당장 가지고 놀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가지고 놀 가능성이 다분하니, 이런 식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물이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정당해 보인다. 게다가 현관! 아이 자전거, 아기 유모차, 미처 정리하지 못한 택배, 신발들. 방문객들은 오른팔로 유모차 손잡이를 밀어야 우리 집에 입성할 수 있다. 내 공간을 이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게다가 '정리'는 아주  묘하게 인간의 자괴감을 자극한다.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내 공간조차 안전하게 확보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쉰다'는 개념은 이미 '정리된 곳'을 전제하기에 또다른 노동이 앞서야 한다.

 

그러니 정리에 대한 필요와 욕구가 생길 때마다 나는 마치 정리를 하듯 열심히도 정리책을 읽는다. 그런데 최근들어 나오는 대부분의 정리서적은 '버린다'는 개념과 맞물려 있다. 막상 그 앞에서 심히 망설여야 하는 사람은 또다른 스트레스 섞인 과제를 부여받는다. 물론 이러한 지침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쌓아놓기'에만 충실한 사람은 반드시 귓등으로라도 한번쯤은 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잘 버릴 수 없는 사람은 또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버릴 수 없는데 어쩌지? 또 다 내 잘못인가, 하는.

 

이 책은 백오십 페이지도 안 된다. 게다가 일러스트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 다 읽어내는 데에 두세 시간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수납의 묘약을 던져 주는 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저자는 정리의 달인인 주부도 아니고 전문적인 정리 수납 컨설턴트도 아닌 좀 뜬금없는 건축가다. 집을 짓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정리 이야기라. 그런데 그의 시각에서 보는 '정리'와 '집'에 대한 이야기가 꽤 참신하고 청량하다. 소방법 때문에 복도에 유모차를 놓는 것이 꺼려져 현관에 들여놓고 스트레스 받고 있는 나에 대한 변명거리도 던져준다. 이는 현관을 단순히 손님이 들어오는 공간이 아닌 항구처럼 여러 물건들을 적재하고 수납하는 공간으로 겸용 사용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설계에서 기본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무리한 확장으로 흙이 묻어 집안에 들여놓기 힘든 것들의 자리를 앗아가는 대신 미리 집을 짓기 전부터 봉당이나 달개집을 염두에 두는 통찰에 대한 이야기. 즉 처음부터 애초부터 우리가 살며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부터 '정리'와 만나자는 주장이다. 전창이 주는 눈부신 햇살이 벽을 생략해 각종 수납 공간을 파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나 빨래를 건조할 실내 공간, 부엌의 각종 쓰레기가 과도기적으로 쉬고 갈 공간을 미리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아일랜드 식탁이 가지는 단점 등에 대한 예리한 지적 등은 대단히 실용적이다.

 

물론 이미 부족한 공간, 이미 없는 자리에서 떠밀려난 것들에 대한 해결책은 아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리 강박으로 좀 과도한 죄책감을 양산해 내는 데에 물린 사람이라면, 혹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면 흥미롭게 금방 읽어내고 소장할 만한 책이다.

 

아기 유모차는 여전히 현관에 떡 버티고 있지만. 그 모습이 좀 덜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 책의 미덕일까, 하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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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2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2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둘째를 낳고 2008년 첫째를 키우면서 작성한 메모를 훑어본다. 낮잠 시간, 이유식량, 육아를 책을 보고 하려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여덟 살의 자리에 엄마, 아빠가 세상 전부였던 낯가림이 심한 아가가 기어온다. 영원할 것 같았던 모습은 다이어리에 희미한 흔적처럼만 남아있다. 아쉽고도 또 아쉽다. 더 여유를 갖고 융통성 있게 순간을 즐기며 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그리고 더 많이 적어두지 못해 기억이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은 것도 아쉽다.

1851년 3주 동안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을 돌보며 썼던 이 일기는 자기 충족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작품으로 상당히 매력적이고, 무표정한 듯하지만 아주 재미있어서 호손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상을 줄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손을 음울하고 괴로움을 많이 겪은 인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으며, 품질 높은 시가와 한두 잔의 위스키를 좋아하고, 장난기 있고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 <작가란 무엇인가> 폴 오스터 편 중 

 

너새니얼 호손이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근 3주 동안 다섯 살짜리 둘째 아들 줄리언을 돌보며 적은 육아 일기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후 세대의 작가 폴 오스터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폴 오스터의 파리 리뷰 인터뷰 내용 중 언급된 이 일기는 내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이 뒤이어 번역되어 무척 기뻤다. 폴 오스터의 이야기처럼 무언가 좀 음울하고 기기묘묘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작가가 삼십 대 후반 늦은 결혼으로 얻은 사랑스러운 아들에 대하여 어떤 기록들을 남겼을까 무척 궁금했다. 1851년 마흔 일곱이나 된 아버지가 다섯 살 아들을 삼 주 동안이나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놀아주고 먹이고 재웠을까, 하는. 사실 요새 같이 아버지의 역할이 강조되고 각종 정보도 많은 시기에도 아버지가 홀로 사내아이를 돌보기란 쉽지 않다.

 

 

 

 

 

아침 일곱 시, 아내가 줄리언과 나를 붉은 농장에 남겨두고 처형 엘리자베스와 첫째 우나, 막내 로즈버드와 함께 집을 떠났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 애늙은이가 하는 말.

"아빠, 애기가 가니까 좋지 않아?"

 

자, 이렇게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는 개구진 다섯 살 사내 아이를 온전히 돌봐야 하는 과업을 수여받았다. 다행히 줄리언은 아홉 시가 되기 전에 잠들고 일곱 시 즈음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수면습관과 혼자서도 잘 놀고 가끔 함께 놀아주면 더없이 신나하는 아주 사랑스럽고 애교많은 아이다. 아이는 풀 위의 이슬을 '요정들이 작은 주전자를 기울여 풀과 꽃에 물을 부었다'고 묘사한다. 아이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는 <백경>의 허먼 멜빌 아저씨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말을 타고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틈에 멜빌과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 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여유도 누린다.

 

아버지는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아이의 재잘거림을 때로는 거추장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아이를 있게 한 아내와 아이를 더없는 축복으로 여기며 함께 한 시간들을 하나 하나 눌러쓴다. 매일 아침 아이의 머리를 말고 우유를 가지러 가고 산책을 하고 방문객을 맞는 단조로운 생활들은 갈급하게 하루씩 줄어들고 아내를 오망불망 기다리며 아이를 온전히 맡기고 자유로운 시간을 기대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은 할 수 만 있다면 아이가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해 두고 싶어했던 바람과 맞물려 눈물겹게 아름답고 정겹다.

 

나의 육아일기. 아직은 내 손 안의 여덟 살 아이와 7개월의 아기.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비처럼 쏟아지던 그 수많은 자질구레함들과 아이의 은성한 언어들은 가뭇없어질 것이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고 시간이 빨리 갔으면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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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3-2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바로 그 책이었군요! 아하.

blanca 2014-03-27 10:49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책 상세 설명 뜨기 전에 사실 무슨 책인가 했는데 제가 기다렸던 바로 그 책이었어요!

다락방 2014-03-27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요!

2014-03-27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03-29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를 엮은 책은 묘한 매력이 있어서 저도 좋아해요.
저도 시간에 대해서 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이젠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어요.
하루가 지나가는 것도 아쉬워요. 나 오늘 뭐 한 거지? 하면서... ^^

blanca 2014-03-31 10:04   좋아요 1 | URL
페크님, 부모님들과 어제 시간을 보냈는데 그냥 그 흘러가는 시간도 너무 아까운 거예요. 게다가 벚꽃. 이런 아름다운 꽃들을 나는 아무리 길게 봐도 이제 오십 번 이상 볼 수 있을까, 하니 또 슬프고... 이상해요. 봄을 타는 건지. 요새 자꾸 울컥 합니다.--;;
 

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 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인데!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이런 이야기. 노년. 그것은 마치 대학살과 같다고 되뇌었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37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제 겨우 서른셋인,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드디어 등장한다.

 

 

 

 

 

 

 

 

 

 

 

 

 

 

 

"자신이 가지지도 못할 미래를 위해 개처럼 일한" 보험 외판원 아버지와 끊임없이 가족 전체를 통제하고 자기기만의 장치로 모정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대인 아이 앨릭스는 부모의 억압, 통제에 대하여 시종일관 시니컬하게 불평한다. 그런데 그 주체는 정작 이미 서른 셋까지 성장해 버린,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아직 미혼이고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앨릭스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신병 주치의임 직한 '선생님' 앞에서 부모가 강압적으로 수여한 '유대인 아이'라는 정체성의 그 얄팍한 모순과 자기기만적인 주술에 대한 처절한 공박과 순종적이고 온순하고 명철한 유대인 소년 뒤의 찌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아들의 간식 메뉴까지 통제하려는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느라 나오지 않는 앨릭스의 내용물까지 확인해 보려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통렬한 익살. 그 속에는 '부모'라는 거대한 권력, 아니 우리 인간들이 문명화된 것으로 위장한 수많은 금기, 억제, 규율이 어떻게 하나의 진실을, 삶을, 생동을 억압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예시가 있다.

 

반면 하류층 출신의 여자를 성적인 노리개로 자신의 억압된 욕망의 환타지의 대체물로 (그러나 대단히 신랄하게 정당화하며) 이용하는 앨릭스의 이야기들은 그가 자신을 하나의 희생물이라고 변명하며 정작 자신의 사회적 권력으로 한 여자를 억압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여하튼 참으로 찌질한 녀석의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곳에 선 지점에서의 고백들.

 

화제가 되었던 선정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앨릭스의 사춘기 시절 자위에의 탐닉에 할애한 장들은 이 책을 두었다 아이들이 갑자기 읽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의 수위. 차분하고 고즈넉하게 노년기를 읊조렸던 필립 로스 할아버지가 삼십오년도 더 전에는 이러한 앨릭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한 당혹감, 놀라움, 그러나 그 앨릭스의 불평들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어쩌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를 자신의 청사진대로 만들고 자신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들을 대신 달성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욕구를 하나의 '사랑'이라 위장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주 위험한 부모로의 역할에서 균형감을 찾아야 한다는 엄중한 가르침.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자신들만의 이너써클을 만들고 정작 유색인종에는 교묘한 무시를 일삼는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도덕적 기만. 그러니 토가 나오는 '공정한 척, 착한 척'에 대한 가차없는 까발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고 솔직해지기는 대단히 어렵다. 덜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의 사회화 과정인 것처럼 오인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앨랙스의 불평 앞에서 누구나 얼마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회당의 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러시아의 공산주의자가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선언하고, 어머니가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대우한다고 위선을 떨었던 검은 청소부와 함께 식탁에 앉겠다고 주장했던 소년은 그러나 서른셋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열다섯의 소년이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 간의 건강하지 못한 공생 관계, 애착, 집착은 사실 서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서구 사회에서도 유독 이방인적인 것으로 우리의 끈끈한 부모, 자식 관계와 겹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단일 민족에 대한 자부심, 다른 인종에 대한 이질감, 거부감, 학업적 성취에 대한 높은 평가, 성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금기, 억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신나는 성토의 장에서 앨릭스는 그 잘 길들여짊에 대한 대가로 얻은 것들을 향유하며 뒤켠에서 성적 비행을 일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억압, 금기, 순종에 대한 반역, 부모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중언부언 불평만 늘어놓다 판을 치워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마침표가 없는 이야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것들은 마치 예언처럼 빨리 찾아오는 환멸과 종말 앞에 설 때 결국 돌아온다.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귀결은 이러한 것. 서른 셋임에도 부모 앞에서 열다섯이었던 아이는 망각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전에 일흔 다섯이 되어 '무'에 묻혀 버린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고 만 것. 필립 로스는 말한다. "저는 분명히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무진장 애쓰는 그런 주인공과 닮았지요."('작가란 무엇인가' 중 인용)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 무용한 시도들, 그 자체를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성과나 답이나 마침표가 없는 그 도정에 필립 로스가 말하는 '진실'이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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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4-03-20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 페이퍼를 읽고 보관함에 담습니다. 비록, 오래전에 사둔 에브리맨도 아직 못 읽었;;;
어흠, ;;; 저도 블랑카님처럼 읽고, 또 느끼고 싶어요.^^

blanca 2014-03-21 08:56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에브리맨이랑 함께 읽으면 정말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하고 의아해지실 거예요.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에브리맨이 더 좋았어요. 군더더기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잘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가 있구나, 싶었어요.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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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때로 지루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의 표면은 너무나 허술해서 어느 순간 찢어지고 여린 속살이 드러나고 삶은 저만치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준다. 영원한 평안과 불멸은 없기에 누구나 이러한 순간에 당도한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듣고 볼 때 우리는 우리가 그 '누군가'에 해당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안도, 그래도 삶은 또 그런 결함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렇게 이다지도 연약하고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이라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끄달리는 작디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하필 그 때 임신 중이었고 아무래도 이러한 내용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뒤로 미루어 두었던 트루번 커포티의 논픽션 소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또르르 굴러나올 것만 같았던 <풀잎하프>의 작가는 이제 잔혹한 일가족 몰살의 현장에 자신만의 현미경의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 전체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일단 그가 짚어가는 사건의 내막과 그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의 단면들은 그의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들로 대단한 흡인력을 보인다. 1959년 캔자스 서부의 홀컴 마을에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발을 들여놓고 마는 것이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버트 윌리엄 클러터는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성실했고 또 그 만큼 부유했고 언제나 바라는 것을 어느 정도 손에 넣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자선에도 너그러웠고 홀컴 마을의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치들를 대표하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뒤에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듯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중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적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11월의 어느 날, 사과를 먹기 좋은 날씨에 생명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여덟 시간 뒤, 그는 아내, 딸, 아들과 살해당한다.

 

원한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고작 없어진 40달러의 돈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강도 살인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트루먼 커포티는 마지막에 범인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수법이 아닌 애초 처음부터 이 무자비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살인을 저지른 두 명의 사내의 삶도 병렬적으로 배치, 추적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이 두 명의 교도소 동기는 다른 잔챙이 같은 범죄들은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정작 리버밸리 농장주 가족의 살인 사건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지점에 있다. 분명 범인은 맞는데 그 범인의 범죄 현장에서의 행각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커포티는 처음부터 독자들이 편견 없이 딕과 페리, 이 두 청년 그 자체를 먼저 알아가기를 원했는 지도 모른다. 비교적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딕과는 달리 인디언 어머니의 피가 섞이고 체구가 왜소한 페리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애정과 연민이 닿아 있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페리는 양친 부모에게 학대당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고아원에서 방치되는 등 비참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정상적인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고 따뜻함에 대한 기대와도 멀었다. 페리는 상처받은 짐승의 오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트루먼 커포티는 형사 듀이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실제 트루먼 커포티는 이 사건 취재 중 페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객관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이 범죄를 추동한 것은 감옥 안에서 우연히 리버밸리 농장에서 일했던 이에게서 농장주의 금고 이야기를 듣고 이 농장을 털 생각을 한 딕이었다. 그러나 이 범죄의 전면에서 범죄 자체를 주도한 것처럼 나오는 페리는 사형 집행앞에서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사죄한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이나 실제 선고와 집행 사이의 그 머나먼 간극의 허점에 대한 이야기는 담담하게 덧붙여져 있지만 핵심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는 욕심을 가지지는 않는 그 현명한 지점을 포작해 낸 대단한 명민함이 돋보인다.

 

트루먼 커포티는 피해자의 관점도 가해자의 관점도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 마는 수사팀의 입장에도 전적으로 치우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그들 편에 다가가 있다. 이것은 중립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객관성에 대한 집착도 아니다. 다만 어떤 진실, 삶의 그 허무한 실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 대한 애면글면한 천착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처음에는 애꿎은 무고한 선량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가까이에는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죽임을 당하지만 정말 끝에는 사 년의 시간동안 그 사건에 시달림을 받았던 형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엔딩씬이다. 한 편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들은 또 삶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이라는 것처럼. 카버의 말처럼 소설은, 이야기는 많은 것을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삶을 바꿀 수는 없다.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서 어쩐지 허무했다. 너무나 무력한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서. 분명 행복해지는 책은 아니다.

 

이 작품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결국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초라한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삶은 하나의 첨언 같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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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3-1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사놓고 영화로 먼저 봤네요. 얼마전에 약물과다로 돌아가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카포티로 연기했던 그 영화요. 제가 산 책은 그래서 표지에 배우얼굴이 나와있어요. 영화에서는 이 작가를 좀 안좋게 표현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죠.

blanca 2014-03-13 21:2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이 영화 못 봤는데 최근에 죽은 배우가 커포티로 분했군요! 이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도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너무 글을 잘 쓰는 작가지만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지만 이 작가의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결핍을 숨기기 위한 과장이 상당 부분 작용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후애(厚愛) 2014-03-1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가끔씩 다녀가는데 댓글을 안 남겨서 너무 죄송해요.^^;;;

건강조심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blanca 2014-03-17 10:24   좋아요 0 | URL
후애님 서재는 종종 방문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