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 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인데!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이런 이야기. 노년. 그것은 마치 대학살과 같다고 되뇌었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37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제 겨우 서른셋인,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드디어 등장한다.
"자신이 가지지도 못할 미래를 위해 개처럼 일한" 보험 외판원 아버지와 끊임없이 가족 전체를 통제하고 자기기만의 장치로 모정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대인 아이 앨릭스는 부모의 억압, 통제에 대하여 시종일관 시니컬하게 불평한다. 그런데 그 주체는 정작 이미 서른 셋까지 성장해 버린,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아직 미혼이고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앨릭스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신병 주치의임 직한 '선생님' 앞에서 부모가 강압적으로 수여한 '유대인 아이'라는 정체성의 그 얄팍한 모순과 자기기만적인 주술에 대한 처절한 공박과 순종적이고 온순하고 명철한 유대인 소년 뒤의 찌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아들의 간식 메뉴까지 통제하려는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느라 나오지 않는 앨릭스의 내용물까지 확인해 보려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통렬한 익살. 그 속에는 '부모'라는 거대한 권력, 아니 우리 인간들이 문명화된 것으로 위장한 수많은 금기, 억제, 규율이 어떻게 하나의 진실을, 삶을, 생동을 억압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예시가 있다.
반면 하류층 출신의 여자를 성적인 노리개로 자신의 억압된 욕망의 환타지의 대체물로 (그러나 대단히 신랄하게 정당화하며) 이용하는 앨릭스의 이야기들은 그가 자신을 하나의 희생물이라고 변명하며 정작 자신의 사회적 권력으로 한 여자를 억압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여하튼 참으로 찌질한 녀석의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곳에 선 지점에서의 고백들.
화제가 되었던 선정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앨릭스의 사춘기 시절 자위에의 탐닉에 할애한 장들은 이 책을 두었다 아이들이 갑자기 읽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의 수위. 차분하고 고즈넉하게 노년기를 읊조렸던 필립 로스 할아버지가 삼십오년도 더 전에는 이러한 앨릭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한 당혹감, 놀라움, 그러나 그 앨릭스의 불평들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어쩌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를 자신의 청사진대로 만들고 자신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들을 대신 달성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욕구를 하나의 '사랑'이라 위장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주 위험한 부모로의 역할에서 균형감을 찾아야 한다는 엄중한 가르침.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자신들만의 이너써클을 만들고 정작 유색인종에는 교묘한 무시를 일삼는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도덕적 기만. 그러니 토가 나오는 '공정한 척, 착한 척'에 대한 가차없는 까발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고 솔직해지기는 대단히 어렵다. 덜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의 사회화 과정인 것처럼 오인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앨랙스의 불평 앞에서 누구나 얼마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회당의 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러시아의 공산주의자가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선언하고, 어머니가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대우한다고 위선을 떨었던 검은 청소부와 함께 식탁에 앉겠다고 주장했던 소년은 그러나 서른셋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열다섯의 소년이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 간의 건강하지 못한 공생 관계, 애착, 집착은 사실 서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서구 사회에서도 유독 이방인적인 것으로 우리의 끈끈한 부모, 자식 관계와 겹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단일 민족에 대한 자부심, 다른 인종에 대한 이질감, 거부감, 학업적 성취에 대한 높은 평가, 성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금기, 억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신나는 성토의 장에서 앨릭스는 그 잘 길들여짊에 대한 대가로 얻은 것들을 향유하며 뒤켠에서 성적 비행을 일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억압, 금기, 순종에 대한 반역, 부모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중언부언 불평만 늘어놓다 판을 치워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마침표가 없는 이야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것들은 마치 예언처럼 빨리 찾아오는 환멸과 종말 앞에 설 때 결국 돌아온다.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귀결은 이러한 것. 서른 셋임에도 부모 앞에서 열다섯이었던 아이는 망각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전에 일흔 다섯이 되어 '무'에 묻혀 버린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고 만 것. 필립 로스는 말한다. "저는 분명히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무진장 애쓰는 그런 주인공과 닮았지요."('작가란 무엇인가' 중 인용)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 무용한 시도들, 그 자체를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성과나 답이나 마침표가 없는 그 도정에 필립 로스가 말하는 '진실'이 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