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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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는 단순한 장르소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그녀의 범인은 무자비한 소시오패스들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외적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항상 그녀의 이야기는 슬프다. 소름끼치고 잔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이 주도하지 않는 범죄는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서글펐다. 이러한 범죄소설은 분명 애거사 크리스티여서 가능한, 애거사 크리스티만 가능한 이야기 같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들을 읽는 일은 단순히 킬링타임용이 아니었다. 인간과 삶의 내면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그 층층의 겹을 뚫고 심연에 조심스레 닿아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가 추리소설이 아닌 그냥 소설을 다른 필명으로 기획했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깜짝선물로 느껴진다. 게다가 딸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장가갈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라는 이야기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의 제목이 A daugher's a a Daugher인 이유다. 딸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당시는 치열하고 아팠던 그 많은 소소했던 일화들을 다시 복기하는 것만 같은 엄마의 마음을 지적한 부분이 공감 갔다. 중년의 엄마 앤이 막 피어나는 열아홉 살의 세라 앞에서 느끼는 감상들. 작가는 나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 정확한 지점에 시선을 던지고 있어 군데군데 깜짝깜짝 놀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할머니 미스 마플은 여기에서 로라 휘스터블로 분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 그녀가 앤과 세라에게 던지는 조언은 자신의 나이로 누르는 편견과 강압이 아니라 깨알 같다. 하나 하나 발췌하여 작은 수첩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고 싶을 정도의 가르침. 이것은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가 우리들에게 남기는 소중한 별밭 같다.

 

희생이라니! 얼어 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고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모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252

 

맞다! 특히나 아이 앞에서 엄마의 희생은 멋지고 폼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딸 세라가 반대하는 리처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앤은 재혼이 결렬되자 진짜 삶과 더불어 세라와의 유대의 끈을 놓아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딸 세라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로라가 지적한 것처럼 그녀의 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여기에서 갈등은 시작되었고 세라가 자신을 방기하고 겉만 번드르르한 불량한 남자와 결혼을 강행할 때도 엄마는 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무심코 방조했다. 흔히 자식 앞에서의 무조건적이고 품이 넓은 사랑 대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범위로 모녀의 관계를 축소, 또는 확대하며 묘파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펜끝은 예리하고 아프다. 그녀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함과 약점들은 사소한 것들에 끄달리는 우리의 모습이다.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섬뜩하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드러내고 만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나 자신의 일기를 적는 것과도 같다. 좋은 엄마가 되는 일은 다시 산다고 해도 또다시 실수를 번복하고야 마는 나의 삶의 재방송과도 닮아 있다. 그저 '엄마'라는 것에 기대어 완벽한 헌신의 축복이 쏟아질 거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만용이다. 내면에 적어도 로라 휘스터블 정도의 조언가 한 명 정도는 두고 끊임없이 돌아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 죽는 그 순간까지 성장한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조언을 남발하는 나이 든 이들의 성마른 모습이 기우인 것도 그녀가 결국 남긴 가르침이 이것인 까닭일 게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라면 사는 것은 소모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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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8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5-22 10:32   좋아요 0 | URL
흠, 님도 두려운 맘이 있으시군요 근데 많은 분들이 어머니가 되고, 그러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근데 제가 왜 저걸 비밀글로 해놨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려고...??

blanca 2014-05-22 12:10   좋아요 0 | URL
비밀로 댓글을 달면 그 댓글에 또 비밀로 댓글을 달아야 할 것만 같은 ㅋㅋ 강박이 듭니다.
 

요즘 대단히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대체로 인간은 선의와 상식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기반이 흔들린다. 맹자가 인간에게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앞뒤 재보지 않고 무조건 달려가 구하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주장했던 성선설 자체가 성악설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개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는다는 사회계약설도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거대한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에 내가 들어가 있을 때 그리고 그 시스템이 나와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때 과연 용기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라고 뭐 별건가? 고작 그런 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 아귀다툼처럼 서로 짓밟고 올라서다 자기 죽는 날도 모르는 채 마침표를 찍고 마는 게 삶인가? 진실, 선의, 대의, 사랑 이런 것들은 하나의 허상인가? 그냥 소망의 언어이고 환상이고 착시인가? 질문들과 회의들로 가슴이 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없을까.

 

레이먼드 카버는 살면서 미친듯이 짧은 이야기들을 썼다. 그는 비교적 환상이 없었던 사람인 것같다. 자신이 쓴 소설에도 그 소설이 아주 그럴듯한 힘이나 영향력을 가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번번이 전율한다. 아주 공고했던 일상에서 여덟 살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면한 부부와 빵집주인의 교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에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무너졌을 때 카버의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정말이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 덩치 큰 알코올 중독자였던 소설가와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계속 아픈 잠에 빠져 있었는데 병원 밖 하늘에서는 너무 예쁜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이것은 극한의 부조리이자 불합리한 일이라고 되뇌어도 세상은 그런 것임을 이미 카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도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어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저만치 신나게 돌아간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또한 그러한 배경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동진의 낭독을 들으며 다시 한번 그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읽는 것과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이 또 지금의 이 비극들과 맞물려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정말 힘들면 잠들 수 없고 무엇보다 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먹게 해 주는 것은 최고로 어렵고 가치 있는 위로인 셈이다. 하늘나라로 가 버린 스코티의 생일케잌을 준비했던 빵집 주인은 이 부부에게 자신이 막 구운 계피롤빵을 먹게 한다. 엄마는 아빠는 그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먹을 수 있으면 그 다음이 있다. 먹기까지가 힘들다. 이러한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사람이 바로 레이먼드 카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타인과의 교감, 공감, 위로를 이야기한다. 무의미하지 않다고. 정말 있다고.

 

 

 

 

 

 

 

 

 

 

 

 

 

 

 

많이 살아 본 사람, 나보다도 훨씬 멀리 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사랑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대체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뭐죠? 이다지도 추악하고 더러운 일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내가 노인이 되면 천상병 시인처럼 이 세상을 즐거운 소풍지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혼하고 군부 쿠데타로 망명하고 다 키운 딸을 희귀병으로 잃어야 했던 칠레의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이야기를 찾아본다. 책귀퉁이는 벌써 노랗게 바래어 간다. 줄그은 부분들을 되짚는다. 그녀는 죽은 딸 파울라에게 이야기한다. 내게 인생의 경로를 결정짓는 본질적인 사건을 통제할 힘은 없었다고. 인생은 물건들이 잘 보이도록 제대로 세워 놓은 다음 후대에 남길 목적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다고. 그럼에도 운과 우리의 착한 마음을 믿고 일상이 삶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십팔 년 넘게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이미 그 점에 대한 의심은 극복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고. 결국 무거운 짐들을 버리고 계산을 마치고 났을 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사랑뿐이었다고, 이사벨 아옌데는 이야기한다.

 

 

 

정말이지 나는 모르겠다.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더 배우고 더 찾아봐야겠다. 그러나 무기력감과 허무감에 침잠하지는 않으련다. 그것은 또 다른 비겁한 타협이다. 그래도 선의를, 사랑을, 위로의 힘을, 공감의 저력을 믿어보고 싶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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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4-05-0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힘내서 살아가야하는게 살아남은 자의 몫이죠

blanca 2014-05-09 09:38   좋아요 0 | URL
하루 하루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며 살아가고 싶은데 항상 배우고 노력하고 다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꼬마요정 2014-05-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거죠. 언제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긍정은 독이 되지만, 실패를 인정하는 긍정은 부정보다는 마음이 편하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blanca 2014-05-11 0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진정한 의미의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이 또는 거기에 무심코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행위가 이 비극을 만들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부모로 산다는 것 - 잃어버리는 많은 것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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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동안 일상 생활을 갈무리 하는 것도 무언가 좀 환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밥을 짓고 아기를 데리고 아이를 등하교 시키고 숙제를 챙기고 그렇게 살았다. 비교적 타인의 도움 없이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늦잠을 잔 아이가 숙제도 안 하고 공책도 어디 갔는지 모르면서 그러한 것들을 다 엄마 책임으로 돌리는데 순간 욱하고 말았다. 아이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고작 1학년인데. 내 아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다른 많은 아이들의 아픎을 제대로 헤아릴 수나 있을까. 자괴감이 들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주 기적 같은 일이다. 지금도 나는 내가 이 아이들을 낳았다기 보다는 이 아이들이 단지 나를 빌려 세상에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뱃속에서 태동을 느끼고 죽겠다고 버둥거리며 낳은 시간들은 머나먼 과거의 추억만 같다. 첫애를 키우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싸지도 못하는 시간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냥 기본적인 것들이 제대로 안되니 자아는 고갈되고 또 닳아 없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순간의 기쁨과 환희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반드시 그것을 능가하는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모성애가 좔좔 넘쳐 흐르지 않았고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이가 미친듯이 이쁘지 않아 놀랍고 슬펐다. 그래서 내가 다시 자처해서 엄마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년 뒤에 나는 내가 자처해서 또다시 엄마가 되어 첫애 때 겪었던 그 수면 박탈과 자유 박탈과 자아 고갈의 지난한 과정을 다시 겪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만큼 고통스럽거나 이성을 잃을 것만 같은 순간은 거의 없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임을 미리 알고 체념한 덕택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안다. 이러한 시기는 아주 잠깐이고 이 시기 나의 아이는 너무 무력하고 조그마해서 내가 세상 전부라는 것을.

 

수많은 육아서가 범람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미덕은 다 있다. 우리의 전통 어부바 육아도 프랑스식 아이들처럼 우아하게 키우는 비법도 다 고개 끄덕여지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다 나와 우리와 옆집 엄마와 떨어져 있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육아서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게 좋을 것이다,라는 훈수 대신 부모되는 것이 각 단계마다 어떤 어려움과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친절한 예시와 공감을 구했었나 보다. 그럼 이 책이다.

 

<부모로 산다는 것>의 원제는 <ALL JOY AND NO FUN>이다. 저자 제니퍼 시니어가 '뉴욕 매거진'에 쓴 커버기사의 제목이었다. 이 기사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던 것같다. 부모로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임을 때로는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희생들이 개인으로서의 행복감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실제 미네소타주에서 행해지는 영유아 교육프로그램 현장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을 방문하고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각계 전문가들의 조언들을 충실히 반영하여 부모가 된다는 것의 각 단계가 가지는 의미를 연대기적으로 충실히 구성하게 된 이 책을 내어놓게 된다. 영유아 시기부터 사춘기까지 이제 부모들은 솔직하게 부모 역할의 어려움들을 그녀 앞에서 토로하게 된다. 심지어 <몰입의 즐거움>의 칙센트미하이까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순전한 몰입이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그는 이 일들이 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예측할 수 없는 아이들, 항상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아이들 앞에서 성인이 몰입을 경험하는 일이란 머리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입양한 딸이 자궁경부암으로 죽어가며 남긴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 샤론 바틀릿의 모습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러한 영유아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을 좀더 긴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손자와 바닥 분수장에서 즐겁게 뛰어 다니고 구름다리에서 아이 다리를 받쳐 주며 유일한 이 순간을 음미한다. 샤론은 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몰입의 순간을 방해하고 자신의 자아를 때로 고갈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바로 이 순간에나 가능한 일임을. 저자는 샤론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의 육아에 매몰되어 피곤에 쩔어 있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샤론의 딸은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몇 번이나 가출을 하여 샤론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딸을 다시 받아주었고 딸아이가 임신해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의 죽음을 지키며 남기고 간 손자를 최선을 다해 키운다. 저자가 인용한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처럼 인생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다 기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할 지는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맞게 되는 순간이다.

 

스펀지밥이 그려진 신발을 신고 아빠 직장에 몰래 찾아가 아빠와 비슷한 사람을 보고 아빠라며 달려갔던 그 귀엽던 여자 아기는 이제 없다. 이제 아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도 가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한다. 이제 그 아이 때문에 나의 몰입이 방해 당하고 내 자아가 고갈 되기까지 하는 순간은 거의 없다. 대신 아이는 한국식 교육 제도의 그 촘촘한 그물망에 어쩔 수 없이 걸려 버리고 말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지만 나도 곧 아이의 교육과 관련하여 불안한 순간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종일 고무줄을 하다 저녁에 밥먹으로 들어왔던 나의 여덟살과는 다른 아이의 교우 관계에도 엄마가 친구를 초대하거나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 주는 등의 역할 보조가 필요한 시대다. 또 다른 피곤함이다.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같다. 이제 아이들은 부모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추동하는 과잉 양육과 스케줄로 관리당한다. 미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싣고 끊임없이 이 장소, 저 장소로 이동하며 운동레슨, 스카우트 활동 등을 통하여 아이들이 심심해하며 자신과 놀아달라고 요구하지 않도록 한다. 부모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린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 불과 70년밖에 되지 않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 진정한 부모의 모습이라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사춘기 아이들과 관련한 대목이었다. 한국에도 중2병이라는 얘기가 있듯 미국의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에게 주는 상처의 깊이와 예리함도 만만치 않은 것같다. 사춘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이 블로그를 하지 않고 더이상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예리하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맘' 블로그에 사춘기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글쓰기를 연재하는 엄마는 거의 없다. 아이들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춘기가 소금과 같아 가깝게 닿는 것은 무엇이듯 격렬하게 만든다는 저자의 묘사는 아주 적절하다. 수면 밑의 갈등 들은 드디어 떠오른다. 아이에게 전부를 걸었던 엄마들은 좌절하고 아이와 멀어졌었던 아버지는 자신을 밀쳐내는 아들 앞에서 오열한다.

 

아이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나면 지금까지 아이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부모의 생활을 비추는데, 그 순간 부모가 충족된 삶 사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p.324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이 시기에 비로소 부모로서의 우리는 진정한 '나'로서의 우리를 아이들과 함께 한 지나온 궤적을 뒤돌아보며 다시 성찰하게 된다. 부모들은 울면서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예측가능한 것은 없다지만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손자를 돌보았던 샤론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말기암으로 죽어간다. 그녀는 자신이 입양했던 딸과 사춘기에 자살했던 아들과의 시간들을 고통으로만 회상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앞세웠지만 그녀는 영원히 그 아이들의 엄마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는 손자가 살아갈 세상을 준비하며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을 손자와 함께 이야기한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모든 고통과 희생, 심지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이미 되어버린 부모로서의 자리는 물릴 수 없다. 다시 화살을 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우리의 아이들. 이 사랑은 아무리 큰 고통과 상실 속에서도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 울지 않고 차마 읽을 수가 없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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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4-28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제 생활과 같네요

blanca 2014-04-29 13:21   좋아요 0 | URL
추울 때는 등하교를 함께 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날씨도 그렇고 그래도 이제는 적응도 되고 하니 좀 수월해져 가고 있어요. 아주 어린 아기의 이쁜 모습을 보니 요새는 그 부모님들 생각이 떠올라 한번씩 울컥합니다. 다들 이렇게 키웠을 텐데...

페크pek0501 2014-05-0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모성애가 좔좔 넘쳐 흐르지 않았고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이가 미친듯이 이쁘지 않아 놀랍고 슬펐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희생들이 개인으로서의 행복감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
공감합니다.

저는 지금도 엄마로서의 역할이 버거울 때가 있어요. 어젯밤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새벽에 들어온 아이를 기다리다 자는 것도(졸려도 참았지요), 오늘 새벽 6시 10분에 일어나 아침을 차려 주는 것도(더 자고 싶었지요) 내가 친엄마니까 가능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걸요. 하지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그때가 좋았구나, 하는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기에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예쁜 짓을 많이 해서 행복을 많이 준 아이다, 라고 생각하면요.
하지만 또 다시 태어나도 아이를 낳을까, 하는 부분에선 망설여집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부모로 산다는 건 쉽지 않고 좋은 부모로 산다는 건 더욱 쉽지 않아요.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4-05-05 09:31   좋아요 0 | URL
페크님,댓글이 너무 늦었지요. 아우, 쉽지 않은 일들이지요. 아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크면 크는 대로 애로 사항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너무 많은 부담감, 걱정, 희생들 이것은 부모로서 기꺼이 하는 거겠지만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런 가정 자체가 싫다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다시 자식을 낳느냐,는 부분은 망설여집니다. 긴 연휴 잘 보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어제 잠에서 깼는데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들은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추울까.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마음이 저릿저릿 아픈데 

애면글면 다 키워내어

어느 날 갑자기 생사조차 확인 못하는 부모들의 심정은 어떨까.

참, 삶이라는 게 가혹하구나.

 

이런 재난에 대처하는 당국의 방식은 또 어떠한가.

미숙하다는 표현조차 화가 나서 못하겠다.

어디에 신경을 집중하고 어디에 주력을 쏟아야 하는지 망각하는 인간들.

기름진 입술, 번뜩이는 눈, 역겹다.

 

남자 고등학교 뒤켠에 살던 시절. 첫눈 오던 날. 갑자기 남자아이들의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가 베란다로 건너보니

아이들은 정말 아이처럼 눈에 들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나는 저 시절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려다 보니 아직도 조그만 아이들.

눈에 들떠 맴을 돌며 비명을 왁왁 질러대는 아이들.

 

조금만 더 버텨서 기적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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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4-04-1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에서 봤던 글귀가 생각나네요. 기적이 놀라운 점은 그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라고...
에휴... 위기관리시스템은 고사하고 그저 기적을 바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후져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

blanca 2014-04-18 11: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살다 보니 정말 기적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어린 학생들을 한꺼번에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가 또 흉흉한 보도에 가슴 아팠다가..사는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4-04-1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8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4-04-1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밤새 잠을 설쳤어요ㅜㅜ 가슴이 너무 아파요.ㅜㅜ

blanca 2014-04-18 11:20   좋아요 0 | URL
어젠 아이까지 아파서 더 힘들었어요. 그냥 뜬 눈으로 새우잠을 잤네요. 좋은 소식도 없고 참 힘든 밤이었어요.

이진 2014-04-17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도 제대로 못자고 학교에 집합했을 그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떤 말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남은 공기층에 아이들 수십 명이 목숨을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어서 빨리 그들 구조되었으면 좋겠어요.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하나네요

blanca 2014-04-18 11:21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는 "여러분, 기다리던 기적을 전해드립니다."라는 앵커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뽈쥐의 독서일기 2014-04-1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적이란 거 믿고 싶어요! 하필 또 너무나 아가들이네요.ㅠㅠ

blanca 2014-04-18 11:22   좋아요 0 | URL
시간은 계속 가고 있는데 시계를 거꾸로 돌려 그 일이 일어나기 전 바로 그 시간으로 가고 싶어요.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라는 게 문득 문득 너무 소름끼치게 두렵고 절망적입니다.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진지하고 심각한 르포르타주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한 사람의 오롯한 추억들, 사는 이야기들, 살아갈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듣고 싶을 때 '수필'이라는 장르로 다가가게 된다.

 

중학교 국어 시간,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필'이라는 장르를 진지하게 조금은 지루하게 배우고 한 문장, 한 문장, 줄을 긋고 이미 해석되고 분석되어 버린 한 메모광의 메모에 대한 천착과 한 의사가 쓴 아버지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그것을 둘러쌌던 그 분분하던 해석들은 날아가 버리고 그들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열네 살 독자의 생동하는 호기심과 함께 어우러져 남는다. 읽은 것들도 결국 추억이 된다.

 

나는 아이를 업는 데 서툴다. 요즘 나오는 아기띠들은 아이를 앞으로 안는 데에 더 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첫애를 낳았을 때 친정 엄마가 동네에서 산 처네는 지금도 순전히 할머니용이다. 나도 흉내를 내어 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허리도 못 펴겠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아이는 내 등을 줄줄 타고 내려온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국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재우기도 한다.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다. 예전에는 다 그렇게 키웠다고들 한다. 육아와 가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고달팠던 것이기도 하고 더 가능한 것들이 많기도 했던 시간. '처네'는 그런 면에서 어떤 그리움, 아련함을 불러일으킨다. 목성균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는데 우연히 그의 유고 수필집 제목 <누비처네>가 너무 좋아 그를 만나게 됐다. 그의 유년시절, 청년시절, 중년시절, 노년시절을 아우르는 이 방대한 수필집이 마치 한 인간의 생애를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잘 섞어 뭉근하게 끓여낸 것 같아 이 사소하지 않은, 소소하지 않은 이야기에 오랜만에 감동을 받았다. 그의 그 단아한 문장들, 마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듯한 묘사들, 귓전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들에 그저 아연하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 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누비처네 중

 

목성균은 이때 처지가 곤궁했다. 서울에 올라가 벌인 인쇄업은 어려웠고 차마 면이 서지 않아 첫애를 낳은 지 백일이나 지난 아내를 보러 고향집으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이러한 처지를 감안한 그의 아버지는 아이를 업고 근친을 갈 누비처네를 살 돈을 아들에게 소액환으로 보내 내려오기를 독려한다. 바로 그 누비처네에 아이를 업고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가는 길의 이야기다. 그의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았다,는 고백이 와닿는다.가난과 싸웠던 젊은 아빠는 마침내 아이 셋을 오롯이 키워내고 직장에서 퇴직 후에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는 노년에 등단했다. 글만을 위한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내고 그리고 썼다. 어린 시절 진외가의 개소주를 손주에게 먹이기 위해 친정길에 나섰던 할머니와의 추억들, 산림 공무원을 하며 오며가며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 중년이 훌쩍 넘어 아내와 여행 간 이야기, 손주들과의 아기자기한 한때. 그가 젊었을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업이었다면 갖지 못했을 이야깃거리가 많다. 불현듯 동인도회사의 회계원으로 수십년 간 일했던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이 떠올랐다. 그는 목성균과 달리 가정을 갖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생계를 위하여 매일 직장에 출퇴근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가 퇴직하던 날 그의 이야기는 초로의 사내가 썼다고 보기에 굉장히 발랄하고 사랑스럽다. 내게 아들이 있다면 이름을 '나싱투두'로 붙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하지만 찰스램이 회계원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이 없었다고 해도 찰스 램의 다감하고 아기자기한 에세이들이 가능했을까 하는 데에는 의문이 든다. 그러고 보면 레이먼드 카버가 돈을 벌며 막간을 이용하여 단편 소설을 써내고 목성균 작가가 문예창작가를 중퇴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나 직장에서 퇴직하고나서야 등단하고 찰스 램이 퇴근 후에야 글을 쓸 수 있었던 상황들은 무조건 비관시 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비근한 일상사가 농밀하게 배어 있는 그들의 글을 곁에 둘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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