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예전에 참 많이도 걸어다녔던 것같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정되거나 해서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타박 타박 때로는 비도 맞고 때로는 눈도 맞으면서 잘도 걸어다녔다.

 

딸아이를 업고 안고도 사방팔방 잘도 걸어다녔다. 아기띠 밖으로 비어져 나온 손과 발을 무심코 만져보거나 그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거나 하는 낯선 이들을 만나면서.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걷기'가 뚝 끊겼다.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업으면 이제 허리가 아파서 등등의 변명을 대면서. 며칠 전 무심코 이 책을 기대없이 펴 들었다. 와, 신기했다. 어떤 책인지 모르는 와중에 만난 책, 마치 아주 친절한 철학 선생님의 찬찬한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기분. '걷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까지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그냥 랭보도 루소도 소로도 칸트도 이렇게 '걷기'라는 단순하고도 평범한 주제로 교차시키며 이렇게 길게 늘이지 않고도 전 생애를 보여주듯이 이야기해 줄 수 있다니. 난 이제야 랭보가 걸핏하면 집을 나오던 가출 청소년이었다는 이야기를, 위선적이었다는 평도 들었던 루소가 마흔 이후로 자신의 지난 날 마차 위에서 보낸 화려한 삶을 정리하고 잘 늙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것을, 니체가 미쳐가고 있을 때 어떻게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가 헌신적으로 보살폈는 지를 알게 되었다.

 

 

 

저자는 프레데리크 그로. 파리의 철학교사. 미셀 푸코 연구가란다.

 

걷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p.17

 

콩코드의 연필 공장을 하는 사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소로의 이야기는 저자의 '걷기예찬'의 가장 대표적인 예증이 될 것이다. 경제적 계산 대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쓸 때 내가 순수한 삶에서 잃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계산하자는 소로의 이야기는 저자의 그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주 당연하고 아주 진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가 삶의 의미까지 희생하며 이 세계의 부속품이 되려고 자원하겠는가. 어쩔 수 없는 시스템 속에 들어가며 이러한 자각은 때로 괴로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당연한 불가피한 한계 속에서 뛰어넘고자 하는 저 지향을 보여주는 이러한 책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냥 꼭 걷기가 아니더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니체는 카프카는 간디는 다시 한 번 감동적이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나 외워댔던 이 사람들의 그 업적의 편린들은 이 저자의 시선 끝에서 저마다 꿈틀거리며 다시 한 번 산다. 진짜 철학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제대로 맛본 기분. '걷기'는 단지 하나의 연결고리이자 은유인가 보다.

 

 

 

 

생 자체를 순례에 비교한 것은 사실 이미 진부해져버린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것은 검증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단단한 곳에 결박당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에드워드. 이 도자기 토끼 인형은 소위 차도남이었다. 소녀 품에서 사랑받다 여러 사람, 각종 상황에서 방황하다 장난감 가게로 돌아오게 된 그가 마침내 맞닦뜨린 이는.

 

여기까지는 그래서? 였다.

장난감 가게 안에 들어와 이 인형 앞에서 서 있던 여자아이의 엄마. 에드워드의 원주인. 커버린 애빌린. 사랑을 믿지 않던 도자기 인형 앞에 돌아온 사랑.

 

반전도 아니건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나에게도 에드워드 같은 인형이 있었다. 비록 비주얼은 훨씬 못 미치는 사람과 원숭이를 섞은 묘한 인형이었지만 나의 뽀송이.

 

엄마는 어느 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버린 뽀송이를 처치하셨다. 울고 불고 했던 기억. 엄마에 대한 원망. 나는 고맘 때 내가 이름을 붙이고 재워주는 뽀송이에게 에드워드 같은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엄마는 나의 그런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뽀송이는 어디로 갔을까. 에드워드처럼 온갖 역경, 온갖 사람 다 만나고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 책의 결말이 질투났다. 모든 잊혀졌던 것들은 돌아온다고 하는 그 은유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나 보다. 자꾸만 돌아오는 기억들. 사랑을 믿지 않고 오만했던 도자기 인형 에드워드 툴레인의 긴 순례가 남긴 교훈 대신 그 인형을 잊고 지내며 늙어갔던 소녀에게 결국 돌아온 유년시절의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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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06-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걷기 참 안 하는 편이에요. 주로 차로 이동하고 게을러지네요.
볕도 바람도 좋은 시간대에 아기 유모차 태워서 조금씩 걸어보세요^^ 분홍공주도 유모차에 손 얻고.
첫번째 책이 끌립니다. 담아가요^^
건강한 날들 보내요 우리^^

blanca 2014-06-11 10:3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요즘 아침은 좀 걷기가 선선한데 오후는 더워 힘들더라고요. 공주님은 벌써 잠깐 유모차 놓아 두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면 그거 밀고 멀리 도망가버린답니다.^^;; 아, 정말 좋은 덕담이네요! 건강한 날들! 명심할게요, 프레이야님.

페크pek0501 2014-06-1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가 산책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매일 규칙적으로 걸었다는 거죠.
저도 걷기를 좋하해서 밥 예약해 놓고 해 질 무렵에 걸어요. 소화불량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려
걷고 싶어지기도 한답니다. 물론 걷는 게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요.
하지만 일단 걸으면 기분이 바뀌어 버려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사의 말이, 걷기만 해도 머릿속 스트레스가 밖으로 빠져 나온다고 해요.
그러니 걷기는 몸 건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거죠.
걸으면서 길거리 풍경을 보는 재미를 이젠 즐길 줄 안답니다. 저는 걷기 예찬론자예요.
우리 많이 걸어서 몸도 정신도 건강합시다. ^^

blanca 2014-06-17 10:08   좋아요 0 | URL
페크님, 댓글이 늦었어요. 저도 그러고 보니 걷기를 통해서 위염도 낫고 더 건강해진 것 같아요. 점점 더워져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워요. 요 며칠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니 좋았어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운동화 신고 더 멀리 더 많이 걸으렵니다.^^
 
밤은 고요하리라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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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삶을 마감한 방식이나 연유에 대해서 그답다,는 진부한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왜 그러한 방식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해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로맹가리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45년 동안 최측근에 있었던 친구 프랑수아 봉디가 있었고, 이 책은 그 친구와의 대담 형식이다. 그러나 그 대담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어쩌면 그는 프랑수아 봉디라는 인물의 외피만 빌려 로맹가리 내부에서 묻고 답하는, 그가 그렇게나 경멸해 마지 않았던 두 개의 자아를 형상화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에 '합리화'와 중언부언의 '변호'는 없다. 자신의 작품이 '자아를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이라 이야기했던 그의 목소리가 정직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다소 괴팍하고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은(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맹가리의 모습이 지척 같다.

 

 

난 한 여자의 사랑의 눈길로 만들어졌네.

 

<새벽의 약속>은 그와 어머니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아버지 없이 늙은 홀어머니 밑에서 그 어머니의 희생과 눈물로 어떻게 그녀의 성공의 대리자가 되는 지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신파조가 아님에도 이 땅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우리 모두를 결국 울게 하고 말았다. 로맹 가리도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해 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랑에서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그가 모두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경의는 그가 성장 과정에서 내면에 어머니를 간직하고 그녀의 감시와 보호의 증인을 간접 경험하며 잘못된 길로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 힘과 통한다. 비행청소년들이 내면에 그러한 증인을 두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지적은 기억해 둘 만하다. <새벽의 약속>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에서 구원해냈을 뿐이라는 그의 겸양은 도리어 우리는 그러할 도리조차 없다는 자조로 무력감을 자아낸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숱한 익명으로 당신들의 희생과 눈물은 망각으로 스러져 갈 것이다. 그저 우리의 삶 자체를 어머니에 대한 헌사로 살아낼 도리밖에 없다.

 

그가 여성성과 연약함의 대변자로 스스로를 칭하게 된 것도 결국 그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 덕택일 것이다. 마초적인 것에 대한 염증, 그것이 횡행하는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개탄은 로맹가리가 가지는 소수자, 소외된 이, 여성적인 것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대척점을 이룬다. 가난한 유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결국 자신의 삶을 완성했다.

 

 

'유럽 만들기'의 허상,-프랑스는 인간의 손이었네.

 

외부무가 15년 동안 로맹가리라는 시련을 겪었다고 자조적으로 고백하는 그는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 틈에서 제3세계를 딛고 '유럽 만들기'를 주도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행동에 일침을 가한다. 그가 주장하는 프랑스적인 것은 삶과 맺는 수공관계, 지적 정직성에 있다. 이는 오늘날 유럽연합에서 불거져 나오는 각종 잡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작 동맹을 주장하며 실은 약소민족이나 국가를 수탈하여 이득을 탈취하며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각축의 장으로 변질되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정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대신 스무 권의 작품으로 항의하고, 시위하고, 청원하고,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스스로를 인도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갈망을 품을 자유주의자 부르조아라고 칭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는 동안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누구도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는 지적과 달리는 방향에 대한 통제나 의문은 교통수단 내부의 물질적 안락에 대한 문제로 대체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현실에 대한 비판 같아 섬뜩했다.

 

 

꿈의 착취보다 더 역겨운 걸 난 알지 못하네.

 

그는 소설만 쓴 것이 아니다. 전처 진 세버그가 할리우드의 스타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직접 할리우드에서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그의 할리우드에 대한 목격담은 그 화려한 이면에서 어떻게 스타를 꿈꾸는 젊은 이들의 꿈이 착취당하고 농간당하는 지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이기도 하다. 그의 '역겹다'는 표현은 기성세대가 청춘의 꿈과 소망을 하나의 소비재로 폄하하고 이용하지는 않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다.

 

 

나의 천성을, 삶에 대한 사랑을 야심과 성공욕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지.

 

외무부에서 보낸 시간들이 욕구불만과 무력감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였지만 때로 그곳에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있나 확인해 보며 초조해하기도 했다는 솔직한 고백 또한 그답다. 막상 드골이 외교고문 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가장 로맹가리 다운 거절을 한다. 타인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또다른 역사를 살게 된다는 소설쓰기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정치를 하게 된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서 그는 초연할 수 없었다. 다시 우리의 로맹가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그는 결국  춤추는 아틀란티스가 되어 무거운 세상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그 매혹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내겐 아들이 하나 있네. 그거면 따뜻하지.

 

로맹가리는 육십이 넘어가는 나이에서 거의 다 왔다고 의미심장한 표현을 한다. 진 세버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이제 겨우 열한 살. 진과는 헤어졌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자기를 닮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어머니와 맺는 첫 관계를 문명과의 관계라고 칭송했지만 그를 겁내고 그를 사랑했던 아들이 매일 그 사랑과 아버지를 확인하게 위해 올라온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부자의 관계는 결핍과 칭송을 조금 걸러낸 로맹가리와 늙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밤은 고요하리라.

 

죽음은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이 충분히 쓰지 못했고 충분히 사랑할 줄 몰랐다고 회한섞인 이야기를 남긴다. 그가 들려주는 죽음은 그가 한때 몸담았던 영화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라스트씬을 연상시킨다. 그가 사랑하는 개 샌디와 오솔길를 올라 빛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그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고 죽음 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가장 로맹가리다운 불멸의 길을 택한 것 같다. 쓰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다며 모든 사람 안에 있고자 그가 남긴 이야기는 수많은 이들의 눈과 입과 마음에서 떠돌아다닌다. 아들을 위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자신은 궁핍하게 지내도 아들에게는 최고를 고집했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불멸의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강조했던 인간애, 약자, 소수자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무시되면서도 가장 추구되어야 할 하나의 지향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한 의미와 해석은 제각각의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바란 바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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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에 대해 잘 모른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한 권 정도 읽은 게 다. 그마저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를 작가로서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나의 이해력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신작이 그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죽은 아내는 영국의 유명한 문학 에이전트였다고 한다. 뇌종양으로 거리에서 쓰러진 지 삼십 칠일 만에 운명하고 만 비극적인 최후의 주인공기도 하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로 떠돌기를 바라지 않은 듯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비상의 죄

 

아내 팻에게 바친다,는 제사. 그리고 비상의 죄라는 표제 아래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는 포문. 표지가 암시했듯 기구에 미친 사람들.  프레드 버나비, 투르나숑, 베르나르. "하늘을 나는 문제에 개입하는 건 신의 섭리를 거르스는 행위"이기 때문일까. 19세기 기구의 역사, 그리고 그 기구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작가의 아내 팻과의 사별 이야기라고 했는데 웬 뜬금없는 기구 이야기일까.

 

고도는 '모든 것을 고유의 상대적인 비율로, 또는 진실에 가깝게 축소시킨다.' 근심, 후회, 환멸의 감정은 낯설어진다. '무관심과 경멸, 태만이 이리도 쉽게 떨어져 나가다니...... 그리고 용서가 내려오다니.'-p.26

 

 

평지에서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는 이야기는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다. 땅의 자식인 우리가 신 못지 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는 방법, 바로 사랑이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락은 나쁜 예감처럼 덧붙여진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비탄의 이야기라는 첨언. 아, 줄리언 반스는 비로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비상의 죄를 저지른 버나비와 여배우 베르나르의 비탄으로 끝나는 짧은 사랑의 이야기.

 

 

깊이의 상실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p.110

 

작가 박민규가 어느 지면에선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사람들 간의 공통점보다는 눈이 부신 곳을 디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가에 시선이 갈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이듦은 결국 모든 사람을 지면으로 더 나아가면 지하로 끌어내린다. 결국 화두는 견뎌내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수렴한다.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 이야기를 드디어 시작한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p.111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사랑했던 아내와의 재회에의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는 그 황량한 그곳에서 아내와의 작별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모습은 이 섬세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비탄을 딛고 나아가는 지에 대한 하나의 처절한 탐사의 보고다. 차마 쉽게 읽어낼 수가 없어 멈추고 또 멈추게 된다. 그의 슬픔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나, 아니면 남편이 겪어야 할 일이라는 전조는 두렵고도 또 두렵다. 절대적인 분류. 슬픔을 견뎌낸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결국 대별되는 지점에 맞닥뜨려야만 한다는 그 가혹한 진실. 그것을 겪고 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이야기,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말라서)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기억의 (지하) 동굴' 등을 표시한 지도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살을 이야기하지만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빛나는 기억들로 그녀를 두 번째로 죽게 하는 것이기에 마침내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은 '내 삶'에서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며 나이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비겁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냥 누구나 이 정도 지점에서는 이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독서는 유효하다. 이렇게 끝나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p.195

 

작가의 비탄의 이야기에 슬프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결국 다 한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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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2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줄리언 반스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요, 그 두 권 모두 그다지 '좋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블랑카님 처럼 '잘 모른다'고 해야겠지요. 잘 모르고 그다지 호감도 없었던 그런 작가였는데요, 이 책의 소개글을 읽어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블랑카님은 벌써!! 읽으셨네요. 블랑카님의 이 조용한 글을 읽노라니 저도 이 책에서의 줄리언 반스를 만나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저도 블랑카님처럼 쉬엄쉬엄 읽게 될까요? 내처 한번에 읽게 될까요?

요즘에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슬퍼요, 블랑카님.

blanca 2014-05-28 11: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 책에서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야 왜 이 작가가 칭송을 받는지 십분 이해가 가더라고요. 아주 섬세하고 예리한 문장, 진짜 작가란 이런 모호한 감정을 이렇게도 적확하게 집어내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싶은.

그냥 요새는 쉽사리 겁나 우울해지네요. 시원한 라떼 한잔 마시면 그 순간 기분이 확 좋아지긴 해요, 다락방님.
 

내처 다시 다 읽어버렸다. 2011년 1월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썼다. 김연수가 서른다섯에 쓴 글, 우연찮게 그때 나도 서른다섯이었다.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로 시작하는 책.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반문하는 책. 청춘의 언저리에 쓰여진 그러니까 이제는 청춘이라고 명명하기 좀 뭣한 나이가 되기 전 돌아본 스무 살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 밑줄 그은 문장들이 생소하다. 그때 그의 서른다섯을 읽었던 나를 둘러싼 기억이 흐릿하다. 그러고 보면 고작 삼년 전임에도 나는 퍽이나 미성숙하고 어렸던 듯하다. 돌아보면 꼭 그렇다. 난 다 컸다고, 아니 이제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스물다섯이, 서른이, 서른다섯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스무 살은 너무나 강렬해 마치 화인 같다. 만났던 사람도 들었던 이야기도 봤던 풍경도 "넌 고작 스무 살이라고!  넌 스무 살이나 됐다고!"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깨달음과 시선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을 복기하고픈 생각 가끔은 한다. 나를 둘러쌌던 것들, 내가 서 있던 자리, 그 무모하고 어리석고 일방적이었던 치기들,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 그대로 땅 속으로 꺼지고프게 만들고 마는 장면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게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게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청춘의 문장들+> 중

 

 

 

처음에는 그의 서른다섯, <청춘의 문장들>이 그저 새로운 옷을 입은 줄만 알았다. 알고보니 그로부터 십년 뒤의 그의 새로운 문장들이라는 것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서른 다섯에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는 이제 떠나보낸 스무 살을 돌아오지 않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정릉의 자취방에서 매 시간마다 시를 쓰고 또 썼던, 넘치는 건 시간 뿐이었던 청춘은 이제 자전거 앞바구니에 태웠던 딸 연두가 훌쩍 크고 부모가 돌아가셔서 모두가 '나'에게 기대는 그 힘든 시기를 걸어가고 있다. 대체적으로 항상 짐작과는 달라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 둔 지점에서 그는 대통령보다 힘들다는 전업소설가로서의 길을 성실하게 걷고 있다.

 

서른다섯에 돌아보는 스무 살보다 어쩌면 마흔다섯에 돌아보는 스무 살은 더 절절하고 강렬해 보인다. 하지만 이미 떠나온 그 지점을 돌아보는 시선은 어쩌면 더 성숙하고 담담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임을 그리고 그것은 겹겹이 생생하게 그 원형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뭉근하게 나의 기억과 내 내면을 이루는 것임을, 아니 물질적으로 내 몸을 채우고 있음을, 이제 나도 그와 더불어 조금 알 것도 같다.

 

다시 그의 책머리로 돌아간다. 그가 인용한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

그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아니 지금도 시인이기 때문에 그가 내미는 시는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뚫고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작 <청춘의 문장들>에 실린 그 많은 한시 들도 당시에는 그저 바깥으로 흘러 나갔었는데 이제 다시금 만나니 재회한 친구의 진가가 이제서야 밝혀지는 것처럼 속살거리며 걸어 들어온다.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고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루미, <여인숙 전문>(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책머리에 중 발췌)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고 가도록 환영하라!  아직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을 읽지 않아 지금 두 권을 나란히 놓고 읽기 시작하려는 당신들에게 확 치미는 질투. 이미 읽어버려 아쉽고 애잔하다. 마치 내가 떠나 보낸 나의 스무 살과 서른 다섯처럼. 다시 돌아간다면 더 진지하고 더 열린 정말 인간의 마음으로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진부한 마음. 아직 나는 더 늙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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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5-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오랜만이예요.
전 스무살 한 번, 서른살 한 번, 마흔살 한 번이면 충분해요.
더 잘할거 같지도 않구요. ^^.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애잔한거 같아요. 늘, 그럴거 같아요.
제가 스무살 때에도 과거를 생각하면 애잔했고, 서른살 때에도 과거를 생각하면 애잔했고,

하긴, 며칠 전에 제 나이를 깨닫고 깜짝 놀라기는 했어요. 아하하.

blanca 2014-05-19 15:3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반가워용! 마녀고양이님처럼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지 못해 저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나봐요. 막 공부 시작하신다고 하신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만큼 훌쩍 와계신 모습 보면 더욱 대단하시다,라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저는 정말 저는 마흔이 안 될 것 같았는데 내일 모레입니다. 사실 서른도 남의 이야기긴 했어요 ㅋ

세실 2014-05-1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랑 동갑이시군요^^ 블랑카님 더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ㅎ
전 그냥 지금의 나이가 좋아요. 그 시절로 돌아가면 지금 나이를 또 겪어야 하니깐요.
우리 그냥 앞으로 열심히 살아요. 지금 진지하고, 지금 열린 마음으로^^

blanca 2014-05-19 15:35   좋아요 0 | URL
아웅! 세실님 아녀요! 김연수 작가는 저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다구요 ㅋ 아, 세실님의 이런 얘기 좋아요. 그럼 저도 세실님 나이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 그러려면 저도 세실님처럼 열심히 살아야 겠지요. 예, 열심히 살겠습니다!

세실 2014-05-21 15:20   좋아요 0 | URL
김연수가 서른다섯에 쓴 글, 우연찮게 그때 나도 서른다섯이었다. 이 글로 짐작했더니...땡이네요^^
맞아! 훨씬 어리실줄 알았아요~~~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

페크pek0501 2014-05-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 젊으셔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진짜로요.
하지만 저도 그땐 그 나이가 꽤 많은 줄 알고 지금부터 새로운 걸 시작하긴 늦어 버린 게 아닐까 불안했어요.
그러면서 40세에 작가가 되신 박완서 작가 님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지요.
지금 생각하면 새로운 걸 시작해도 충분히 되는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저는 때론 제 나이에서 10년을 깎고 싶기도 하지만 이 나이가 좋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니 다행이에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다 지나와서 다행이다 싶거든요. 또 겪어야 한다고 가정하면 싫었던 일들이 먼저 떠올라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게 꼭 좋지만은 않답니다. 젊은 시절은 불안의 시절이 아닌가요?
선배들이 늙어가는 것도 좋단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늙으면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어요.

님을 저의 젊은 친구로 선정하고 싶습니다. ^^

blanca 2014-05-20 19:41   좋아요 0 | URL
아...페크님, 댓글이 좋아 세 번 읽었어요. 젊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회한이 많은 시간들이 있어요. 불성실했던 시간,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시간, 그래서 본의아니게 주변에 상처나 피해를 준 것은 아닌지. 그게 다 덜 컸던 때문이겠지요. 저도 모옴을 좋아해서 페크님의 성실하고 깊이 있는 모옴 읽기 여정에 저도 동행중이랍니다.^^ 오늘은 너무 덥네요. 벌써 여름이 왔나 봐요...

후애(厚愛) 2014-05-2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안부가 늘 늦네요..^^;;

<청춘의 문장들> 선물 받았는데 저도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4-05-23 12:10   좋아요 0 | URL
후애님, 벌써 선물 받으셨군요! 즐겁게 몰입하며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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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형 김대식과 법조인 출신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동생 김두식. 엘리트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사실은 우리 기준에서 보면 최고의 엘리트 형제이다.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한풀이라면 그 또한 감정 섞인 질시, 패배감으로 폄하될 수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누렸고 누리고 있다고 보이는 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솔직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가식으로 비칠 우려도 있지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형과 동생이 만났다. 형은 진영 논리에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자신은 어느 정도 보수이고 동생은 진보라는 시각에서 오늘날 대학 사회에서의 유학파 교수들의 득세와 특목고 위주의 비평준화 정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진보 진영이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무지 몽매한 민중들을 개안시키려는 듯한 그들의 하향주의적 제스처에 일침을 가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형이 비판하는 것은 진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진보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정당화 하는 집단의 해악이다. 동생은 주춤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형은 결국 진보진영도 그들의 엘리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터라 '평등'을 아는 그들이 마치 '평등'을 모른다고 속단하고 덤벼든 사람들 앞에서 실질적 '평등'을 저어하는 그 위선적 작태를 벌이고 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오늘날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모순을 뼈아프게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유학이 명문대 교수 임용의 필요 조건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교수 임용 과정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중언부언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인데 그것에 대한 무게중심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원급제 식의 입시 제도가 진정한 장인을 발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오늘날 입시 제도의 복잡함과 특목고에 대한 특혜가 평준화를 무너뜨리고 가진 자의 자식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늘날 각계 각처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기고 세대들의 또다른 후계자들을 키우는 역할과 다름 아니다.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 실질적 평준화가 시행되었던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학력고사 같은 계량화가 쉬운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것이 기회와 평등 측면에 더 호의적인 것인지, 학업 성적 이외의 것들의 변수의 여유를 더 주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아주 미묘하고 속단하기 힘든 부분인 듯 하다. 다만 평가 척도를 다양화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그 기준들과 척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도 노력과 비용을 요구한다면 어불성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학력고사로 갑자기 다시 회귀하는 것도 그렇다고 이러한 복잡한 입시 전형을 유지하며 요리저리 허술한 구멍을 뚫어놓는 것도 답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소수의 이미 가진 자들이 또 누리는 자들로 둔갑하는 통로로 입시 제도가 악용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살피는 노력만은 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공부논쟁'이라는 표제는 어떤 확실한 결론이나 대안을 향해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한 허심탄회한 자성과 비판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회 전반의 불평등적 요소를 자각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하여 유익했고 되도록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던 형제의 노력과 재기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늘날 교육 제도와 대학 사회가 암암리에 엘리트주의에 물든 이들이 '평등'이라는 커다란 우산으로 교묘하게 자신들의 배다른 자식들을 양성하려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도덕성의 토대와 인본주의의 기반도 갖춰지지 않은 토양에서 보수냐, 진보냐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가늠하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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