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을 하필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올려 놓으니 마치 하지 않은 숙제처럼 꺼림칙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정말 재미있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책이 아닌 것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면 이 책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어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아주 묘한 마력과 무게를 지닌 책이다. 솔직히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긴 힘든데도 불구하고 3권을 또 찾게 된 것을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의 첫사랑에 대한 오직 내면에서 일어나는(실제가 아니다) 밀고 당기기의 향연은 초반에 아버지가 아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부러 초대한 귀한 손님 노르푸아 씨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저지당하기 일수였다. 도저히 중간까지 독파하기가 힘들어 관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노르푸아 씨가 가고 나니 사랑하는 소녀 질베르트를 만나기 위하여 드나드는 스완 씨 댁에 이야기로부터 누구나 경험하는 첫사랑의 그 처절한 실패에 대한 그 섬세한 묘사와 해부에 중독되고 만다.

 

이를테면. 상대는 나한테 크게 관심이 없는데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얼굴을 볼 수 있는 경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 그를 만날 기회를 박탈하여 고고하게 나의 애면글면한 마음을 다스리는 그 무용한 노력의 지도에 대한 탐사. 그러니까 나는 너를 이제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너를 일부러 보지 않을 거라는, 너를 향하지만 결국 나에게서 발화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거짓말들, 에서 자유로웠던 첫사랑은 드물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심리의 결마다 펜을 들이밀어 하나 하나 언어로 길어올린다. 놀랍다. 하지만 어렵다. 만연체의 문장은 수시로 출발점을 이탈한다.

 

그의 첫사랑은 그의 집안에서 더이상 교류를 거부하게 된 귀족 스완이 화류계 여자 오데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다. 그의 사랑과 그의 시선은 질베르트에게 가 닿은 듯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어머니 오데트에 대한 밀착된 경의, 경멸이 혼재된 애정어린 관찰과 묘파로 이어진다. 그러니 정작 이 소년이 첫사랑의 추억을 바친 자는 그녀의 딸이 아니라 딸의 어머니인 그녀인 듯하다,는 느낌은 오판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야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파고드는 속살, 내면에 천착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누구나 통과한 한 시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지난 날에 대한 정밀한 탐사다.

 

결국 다 읽긴 했지만, 제대로 읽어낸 것같지 않다. 프루스트는 살면서 읽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같다. 내가 나의 사춘기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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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사랑은 실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겠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청소년 만화로 읽은 기억만 가물가물...

blanca 2014-07-22 14:47   좋아요 0 | URL
아, 만화로 나와 있군요! 성공해도 실패해도 결국 성장의 하나의 과장인 것 같아요. 저는 얼마 전에 읽었어도 줄거리가 연결이 안 된답니다.--;;

transient-guest 2014-07-23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으로 3000페이지가 넘는다는, 읽은 이들의 반은 끝까지, 나머지 반은 중간에 내려놓는다는, 프루스트가 쓴 유일의 완성본 소설이라는 이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ㅎㅎ 저도 영문으로 셋트 갖다놓고 딱 한 페이지 이후로는 못 보고 있습니다. 너무 길어서 다 못 읽을까봐요. 그런데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맘은 늘 한결같구요.ㅎㅎ 책이란게 재미있는게, 그렇게 쌓아두면서, 나중에 은퇴하면 다 읽어야지 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요.ㅎㅎ

blanca 2014-07-23 17:44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가 쓴 유일한 완성본의 소설인지 몰랐어요. 저도 사실 3권은 애저녁에 사 놓고 최근에 읽을 책이 없는 상태에서 읽게 된 거예요. 4권도 읽으려고요. 촐판사에서 알아서 천천히 출간해 주니 그 속도에 맞추면 될 듯 합니다.^^;;
 

에밀 졸라는 글을 쓰는 일의 무게를 실감하고 작가의 사회적 책무에 용기있게 반응했던 사람이다. 그런 면면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작품들은 대단히 재미있다. '고전'의 반열에서 그 만큼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도 드물지 않을까. 발자크의 '인간극'처럼 그도 '루공마카르'총서를 기획해 한 가문과 그 배경이 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 했다. 하나 하나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야기의 조각으로도 자리매김한다.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자 부부의 말 안듣던 딸 나나는 그의 <나나>에서 성장한 팜므파탈로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파멸의 매개체로 독립하여 등장한다.

 

 

 

 

에밀졸라는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쓰는 그 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는 애저녁에 결별하였다. 대신 그는 환경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서 자신의 의지, 희망, 노력 등을 유린당하며 함돌되어가는 지극히 약하고 평범한 인간군상에 밀착하였다.이것을 현실적이라고 혹은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여야 할 지 그의 노련한 내러티브 실력 앞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연기력도 가창력도 없이 그저 육감적인 외적 매력으로 어필하며 무대에 서는 여배우 나나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 애정, 물질 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방탕하고 난잡하게 살다 시간과 육체적 쇠락 앞에서 파멸하는 모습에 대한 속도감 있는 이야기는 통속적이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슬프고 허무하기도 하다.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남자는 나나 앞에서 타락한다. 그녀 앞에서 세상은 유치하고 쉽고 더럽다. 에밀졸라는 모든 겉치레의 휘장을 벗겨 버리고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욕망, 내밀한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짐승'을 그린다. '나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졸라는 '나나'를 밟고 건너가며 이야기한다. 세탁부로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열심히 먹고 살아가려 했지만 결국 술에, 돈에 삶을 저당잡히고 말았던 제르베즈의 딸은 자신의 몸을 팔아 물질적 결핍은 해소했을 지 모르지만 또다른 방식으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픈 결론을 맞고 만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사회의 하류층의 삶의 파멸은 영원히 돌고 도는 그 궤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그러한 그들의 결핍과 물질적 욕망을 유린하고 이용하는 상류층의 위선도 덧붙여 있다.

 

'나나'는 에밀졸라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고발'의 한 방편이 된 감이 있다. 그래서 나나가 그렇게 되어가는,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에 대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웠다. 그래도 이 더운 여름, 에밀 졸라의 '나나'를 만나는 것은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운 일면이 '나나'의 시대와 얼마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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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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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등학교 때였던가. 백과사전을 사고 덤으로 기자들의 특종 사진집을 받았다. 격랑의 현대사는 정지된 흑백의 사진으로 파노라마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한창 뉴키즈며 듀스에 열광했던 여학생이 처음부터 진지하게 접근했던 것은 아니고 한번씩 호기심으로 사진 정도를 들춰보는 식이었다. 잘 모르는 나에게도 시위현장에서 택시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켜고 동참하는 모습은 큰 울림이 있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대학교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최루탄의 위력을 실감했던 기억 때문에 택시기사들까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가지고 나와 시위에 동참하는 모습은 낯설기도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감히 그럴 수 있었던 상황과 그들의 용기가 흑백사진 전면을 뚫고 나와 짙은 호소를 하고 있었다. 그 현장은 광주항쟁이었다.

 

그곳에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껴안고 우는 그의 어머니 사진도 있었다. 아름답고 부유해 보였던 사회 선생님은 어느 날 전태일 열사 이야기로 눈빛을 빛냈다. 다 알아듣고 가슴으로 공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모두 상쇄할 만큼 전태일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울 수 있는 용기와 고결함은 낯설고 저릿했다.

 

나는 현대사에 무지하다.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 말미에 첨언처럼 있었던 그 간략하고 죽어 있었던 연대기는 단지 헷갈리고 무용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각자의 정치적 호불호가 마구 재단해 내는 그 '사실'들이 부담스러웠다. 광주항쟁과 전태일과 박정희로부터 나의 삶은 얼마나 멀게 느껴졌던가. 나의 사적인 삶이 결국 공적인 것의 큰 범주 안에서 무기력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각성은 죄없이 죽은 아이들과 홀로코스트에서 돌아와 기억하기도 싫었을 사실들을 책임감 있게 증언한 프리모 레비 덕분이었다. 무지하고 무관심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당신과 나의 삶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좌초 당하고 결박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의 자각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독서는 어떤 의무감과 부책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스스로를 프티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 엘리트로서 정치에서 실패하고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유시민이 자신이 태어난 1959년부터 2014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55년 동안 우리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번민하는 당사자로서의 복기와 해석, 이해에 관한 것이다. 일단 그의 출발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이다. 55년 동안 민주주의가 후퇴한 적도, 경제 위기에 봉착한 때도 있었지만 분명 우리가 비교적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있어 진보를 이루었고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59년 역사교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가 이야기하는 현대사는 그의 개인적 삶, 다층적 이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와 어우러져 지루하거나 난삽하지 않게 다가온다. 현대사에 거부감이나 약간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의 설명과 참고문헌에 대한 소개는 친절하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유인이 '욕망'이었다고 판단하는 그의 시선은 위정자들의 권력욕과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지층을 가감없이 해부한다. 해방후 거대한 난민촌이었던 우리나라가 중앙집권적 경제개발을 통한 산업화의 '병영'을 통과하여 민주화 시대의 '광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유시민이 다시 읽고 주석을 달아 펼쳐내는 하나의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성장사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인물'에 대한 나름의 평가이다.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장 한가운데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그의 시선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각인됐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애증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과 맞닿아 있다. 그 어떤 주의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고 오로지 권력욕에 사로잡혔다고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함께 이루었다는 그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했던 시민 자신들의 열정, 성취, 인생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마찬가지다. 또한 이인제가 고용보험을 정착시킨 일,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짠 일 등에 대한 언급은 한 인간에 대한 단편적이고 단정적인 판단을 지양하고 복합적이고 다원적으로 정치인이나 행정가를 보는 새로운 좌표를 던져준다.

 

이 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명명된다. 박정희 정권하에 산업화에 일익을 담당했던 경제관료들, 자신의 몸을 태워 오늘날의 민주화를 선물한 민주화투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어가다 보면 역사가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절로 다가온다. '레드 콤플렉스'를 정신적 병리현상이지만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려는 생존의 방편으로 이해한 대목도 설득력이 있다. 저마다 자신의 프리즘으로 간단하게 절단한 단면만을 부각시켰던 불구의 현대사가 그의 앞에서는 균형감과 설득력을 얻어 또렷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참신하고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그의 마지막 이야기는 문학적이다. 건조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고 이야기하는 공간을 짓기 위해 생명과 삶을 바친 이들에 대한 경의로 촉촉하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p.417

 

현실이 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그것을 뚫고 나오는 인간의 욕망은 더 나은 곳을 꿈꾼다. 그것에 대한 신뢰가 관통하는 지점에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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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7-1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땡스투 하고 구입하겠습니다

blanca 2014-07-18 10:47   좋아요 0 | URL
고마울 따름이지요. 무엇보다 재미있고 쉽고 똑똑한 책이어서 추천드리고 싶어요.

순오기 2014-07-18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은 정치인보다 글쟁이가 더 어울린다 생각해요.
거꾸로 보는 세계사처럼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 되었으면.... ^^

blanca 2014-07-18 10:4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아직 위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차차 하나씩 읽어봐야겠어요. 유시민 스스로도 정치에서 실패했다고 돌아온 글쟁이로 자신을 이야기하더라고요.
 
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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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를 나왔지만 교사가 되지 않았다. 아니 되지 못했다. 대학 4학년 때 나간 교생 실습, 교실에서 아이들은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기도 했고 나의 예상과 흡사한 모습이기도 했다. 가장 지척에서 가장 오랫동안 볼 수 있었던 '교사'라는 직업과는 영영 멀어져 버렸다.

 

아이를 낳았다. 우연히 가장 친하게 된 동생은 열정적인 교사였다. 아이를 함께 키우며 우리는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녀가 점점 부러웠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더욱더 교실에서의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 그녀의 모습은 내가 가지 않았던, 못했던 길에서 더욱 빛났다. 교권은 무너지고 교실은 붕괴되었다,고 연일 떠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교사들은 아이들 곁에서 죽고 아이들을 껴안았다. 가장 평범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위대한 일도 이루어지는 법인 것같다.

 

1학년, 2학년, 3학년. 항상 오십 명을 넘었던 학생. 선생님들은 지쳐 있었고 아이들을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쓰다듬어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도무지 수업 내용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칠판에 판서한 글씨들이 희미해 제대로 필기해 집에 가서 짚어 볼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나 하나로 우주 전체를 채울 것도 같은데 저기 저 높은 곳에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선생님의 눈길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종일 책상에 엎드려 울어도 누구하나 물어봐 주지 않았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물론 바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열등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춥고 초라하고 가슴 아픈 일인지 너무 일찍 알아버려 후에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적을 올리고 친구들과 교감하며 즐겁게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이 들어 가며 돌아오는 기억은 전반전의 것인가 보다. 후반전을 잘 뛰어도 전반전에 벤치에서 몸을 구부리고 앉아 지명을 기다리던 서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는 '교사'는 나에게 다소 음울하고 차갑고 슬픈 울림을 가진다.

 

백 세를 바라보는 엄마 앞에서 교사로 수십 년을 재직하고 베스트셀러를 펴 낸 유명 작가는 아직 여전히 열등생이다. 세 명의 형과는 달리 연산, 철자법에서 헤매고 꼴찌와 가까웠던 아이의 기억은 인생 중후반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교란 속에서 흔들리는 노모 앞에서 혼자 자립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걱정거리다. 다니엘 페낙,은 '학교의 슬픔' 그 자체다. 집안에서 말썽을 일으켜 간 기숙학교에서 그는 진짜 교사를 만난다. 그는 젊고 열정적인 교사가 아니라 교직 말년을 아이들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그는 다니엘의 내면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다. 일주일에 한장씩 소설을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하게 한 국어 선생님은 다니엘을 누군가의 앞에서 진짜 학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이는 열심히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성장하여 자신과 같은 열등생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뭐라도 해야지 '결코 아무것도'라는 말은 '결코' 없다는 것, 나와 내 동료들은 절대 그들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이를 수 있게 하려면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p.206

 

다니엘 페낙이 직접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암송하게 하고 아이들이 직접 만든 재미있는 내용으로 받아쓰기를 정기적으로 테스트하며 한 명씩 한 명씩 손을 잡고 언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재미를 알게 하는 이야기는 무척 유쾌하고 역동적이다. 반항하는 아이, 비아냥거리는 아이들 모두를 뒷전으로 밀어내지 않고 함께 부둥켜 안고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려는 글 쓰는 선생님의 모습은 지나친 이상화라는 비난을 염두에 둔 듯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솔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그'는 현대에서 학생의 모습을 부모의 부에 기생하는 자본주의 소비의 도구로 전락시킨 것에 분노한다. 오늘날의 젊은 교사들이 이러한 고객들로 이루어진 학급을 대면하는 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그의 지적은 날카로운 것이다. 익명으로 떠오른 아이들을 지칭한 것도 아이들이 입은 옷과 신발의 메이커였던 슬픈 현실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상품을 만들어 순진한 열망을 소비욕으로 치환시킨 어른들에게 의당 가해져야 하는 비난의 몫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 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광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p.348

 

우리는 '아이였을 때'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도구화한다. 성장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들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어른의 말에 반항한다고 하면서 정작 나름의 방법으로 순종하고 이 시간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다니엘 페낙이 부끄럽게 덧붙인 사랑.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래서 투박한 진실인 사랑. 그리고 언제나 내민 손을 잡아주는 일. 심지어 우리의 손을 뿌리쳐도 포기하지 않는 일. 왜냐하면 주머니에 넣은 그 아이의 손은 사실 잡아 줄 누군가만을 기다리는 중이므로. 이것은 바로 나에게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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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6-26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토닥토닥...그랬었구나....교사가 되셨어도 아이들을 참 따뜻하게 보듬어 안았을텐데.....
가끔 학창시절로 돌아가보면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혼난 기억, 친구들과 싸웠던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나더라구요. 나름 그 당시에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가? ㅎㅎ
다섯 종류의 아이들....맘 아픈 현실입니다.

blanca 2014-06-26 18:5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교사가 되지 않았던 게 아이들 입장에서 다행이었을 거라고 ^^;;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다시 생각이 바뀌어 노력하는 좋은 교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가져 봅니다. 저는 사실 가장 자주 떠오르는 기억은 중2 언저리인 것 같아요. 그 때 친구들이 제일 강렬하게 남아서요.

transient-guest 2014-07-09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가 무척 싫었어요. 국민학교도 중학교도 청소하고 매맞고 시달린 기억, 그리고 집-학교를 오가는데 하루에 평균 2-3시간을 쓴 기억밖에 없어요. 그나마 고등학교부터는 미국에서 다녔는데, 일단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리지 않는것, 그리고 3시면 학교수업이 모두 끝난다는게 초기의 어려움을 잊게 했지요. 그리고 처음에 와서는 토-일 쉬는게 그냥 매우 연휴 같더라구요.ㅎㅎ

blanca 2014-07-09 14:01   좋아요 0 | URL
rransient님 댓글 읽다 웃음이 나왔어요^^;; 청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고 여러가지로 아직 '학교'가 가지는 문제는 항상 불거지고 결핍은 따라오고. 그래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또 내일이 나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요. 저는 수업 시간에 많이 졸았던 기억, 그리고 여중, 여고를 다녀 아이들이랑 연예인 이야기로 꽃피웠던 기억, 학교 앞 매점에서 열심히 군것질하던 기억 같은 게 많이 남아요.

transient-guest 2014-07-10 01:30   좋아요 0 | URL
지인들 중에 새로 설립된 사립학교에 1기생으로 들어간 이는 학교를 지어가면서 다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1학년 교사만 짓고 학생을 받아서 나머지 공사를 그해에 진행하고, 2학년으로 가면, 다시 3학년 교사를 짓는 식으로 부실하게 운영한 것이겠지요.
 

 

모두는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장님에 귀머거리, 벙어리였다. 잔혹한 짐승들의 핵 주위에 있는 '불구'의 무리였다. 거의 모두가 비겁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p.46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늙은 뱃사람의 노래> 중 인용된 싯구는 이 책의 '제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것은 지옥이다."라고 절규했던 프리모 레비는 40년이 지난 뒤 젊은이들에게 이 악의 현현이 점점 멀고 희미하게 물러나는 것에, 아니 이 악령이 다른 형태로 부활을 꽤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물러나는 기억들을 다시 고찰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먼 기억 앞에서 엄정하다. 심지어 그것을 '의심스런 출처'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고찰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지평으로까지 확대된다.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10개월간 생활한 그의 처절한 체험은 <이것이 인간인가>에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저서 중 한 장의 제목인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는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와 절멸한 자에 대한 레비 나름의 관찰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 탐사의 보고였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이것이 인간인가>가 스스로 살아낸 세월이다. 살아남은 자가 언제나 최고는 아니였다,는 그의 이야기는 씁쓸한 진실이다. 심지어 그는 최악의 사람들이 생존했다,고까지 절규했다. 완전한 증인들은 가라앉았다,는 그의 냉소적인 목소리는 자신의 생환 그 자체마저 다시금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에 기댄 체로 거르려는 엄중한 도덕적 결벽을 보인다. 그의 자살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진 자신에 대한 단죄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비록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감히 용서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어려웠던 가해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 그 자체를 말살당하고 나서 그가 삶의 소멸까지 온전히 자연의 힘에 맡기기는 힘들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그 인간들이 뿜어내는 숨결로 덮인 삶을 긍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수용소를 하나의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로 보고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만을 가해자 뿐만 아니라 희생자, 그 둘 사이의 회색지대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된 시선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간다. 권력은 마모되지 않고, 부패된다는 그의 경고는 울림이 크다. 수용소의 SS들 뿐만 아니라, 좌절한 사람들도, 억압받는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고 거기에 기생하여 자신의 존엄을 저버리고 생존해 나가기를 바랐다는 그의 이야기는 인간 세계에서 권력층과 거기에 기생하는 특권층에 대한 투쟁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에 대한, 그리고 그럼에도 그 투쟁이 영원한 지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빅터 프랑클처럼 그는 차마 희망과 인간이 역경을 딛고 올라서는 저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화학자이자 작가로서 성공한 그의 여생도 그가 1년도 채 안 있었던 그 지옥 같던 수용소에서 듣고 보고 당한 것들에 대한 상처와 가치관의 혼란과 인간성에 대한 실망을 상쇄키시지는 못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 증언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자신에게 기록했던 이 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의 경고는 섬뜩하고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극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유효하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에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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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6-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을 주는 책이군요.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습니다.
저절로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길 기대할 수 없고 공식적으로 거론해야 하는
엄숙한 시간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blanca 2014-06-23 10:3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수용소 관련 책을 모아 읽었는데 절로 기분도 음울해 지고 인간과 세계의 진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나이 들어가는 게 이런 것을 알며 어느 정도 냉소적이 되고 체념도 하게 되고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