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나의 삶을 다시 사는 일이 아니다. 나의 아쉬움을 좌절을, 못 다이룬 소망을 이루는 매개체가 아니다. 아이라는 존재는. 생은 단 한번 뿐인 삶을 가지고 비록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낳을지라도 새로운 삶을 선물 받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지 쉽지 않다. 아이의 결핍은, 못남은 나의 어린 시절 상처를 들쑤시고 아이가 거부받거나 좌절하는 일은 나의 그것들을 다른 형태와 색채로 그러나 비슷한 때로는 더한 강도로 돌아오게 한다. '극성엄마'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아이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오해하고 아이의 성장을 자신의 성과로 곡해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뒤에는 동양적인 극성 엄마의 아우라가 있다. 심지어 로맹가리도 과목마다 과외 교사가 있었다.
솔직히 잘 알지 못하면서 이 책의 제목이 싫었다. 그냥 초극성 엄마의 자화자찬, 교조적인 조언남발일 줄 알았다. 저자 에이미 추아 자신조차 소위 엄친아다. 부부가 나란히 미국 명문대의 교수이자 유명한 책의 저자다. 중국인 이민자 2세대, 유대인 학자와의 만남. 딸 둘. 강아지 두 마리. 흔들리기 쉬운 나를 포함한 수많은 약한 엄마들을 깃발 하나 들고 현혹시키는 내용이 아닐까, 했다.
그런데 이 책은 타이거맘(저자의 띠에서 비롯된 호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돌적이고 극성인 엄마가 떠오르기는 하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뼈아픈 자기 반성의 고백이다. 학자인 부모 밑에서 큰 성공한 이민 2세대의 여인의 여행지에서조차 딸의 피아노 연습장을 찾아 헤맨 그녀의 열성의 정당화나 달콤한 결말을 전제한 책이 아니었다. 그녀의 성공한 딸 소피아가 이 책의 주인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중국식 교육관에 반항하는 둘째 딸 룰루에 관한 눈물어린 역사이자 함께 그려나가는 하나의 비정형화된 자녀 양육의 지도다. 카네기홀에서 피아노 독주를 훌륭히 해 낸 언니와 더불어 바이올린을 시작한 룰루는 때로는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엄마의 양육에 온순하게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고 튀어오르고 거부하며 엄마를 밀어내고 엄마의 허영심과 자만을 잔인하게 난도질한다. 함께 간 가족여행의 식당에서 컵을 깨뜨리고 엄마를 저주하는 말을 내뱉는 딸아이의 반항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장면은 이것이 논픽션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나도 이런 딸의 사춘기를 맞이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저자는 너무나 위험할 정도로 솔직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쓴 책은 잘 못 본 것 같다. 이끄는 대로 교과서적으로 잘 따라와주고 목표점을 상회해서 저 높은 곳으로 뛰어가는 큰딸에 도취된 부분도 그녀의 솔직한 자만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왜냐하면 그녀는 둘째 딸이 끝내 자신이 그려놓은 청사진 바깥으로 튀어 나갔던 그 순간까지도 가감없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패배와 자신의 실망감과 상실감을 펼쳐 놓았으므로. 그녀는 기대치가 높고 절제와 억압이 묘하게 어우러진 우리와는 공통점이 많은 그 자식을 틀 안에 가두어 조련하는 교육관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고 지나친 방종과 자유와 반항이 난무하는 미국식 교육관을 비판, 비난하며 자신만만해하던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 부분도 사실 지극히 현실적이다. 둘째 딸이 뜻대로 안 풀렸다고 해서 그녀가 타이거맘을 포기하지 않는 대목, 바이올린 대신 테니스를 택한 딸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좋은 코치와 훈련 과정을 알아보는 모습의 고백은 사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가치관 자체가 흔들린다고 해서 그 가치관 전체를 송두리째 폐기 처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좀 더 솔직해 지기로 한다, 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 솔직한 아주 영특하고 열성적인 한 여인의 자식교육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중국인 여성이 미국 사회에서 노력하여 상류층에 진입하고 자식들에게도 그 성공의 울타리를 든든하게 둘러쳐 주고 싶어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느 정도는 속물적인 욕망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그리고 그 욕망의 지도에서 삶의 더 큰 지도는 어떻게 휘어지는지, 어긋나는 지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감정의 결을 파헤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첫장은 마지막을 이해하고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절대적인 단서이자 복선이다.
이것은 한 어머니와 두 딸, 그리고 두 마리 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관한 이야기이자 우리의 카네기홀 입성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중국인 부모의 교육 방식이 서양인 부모에 비해 더 나은 면이 부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문화 충돌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지, 승리의 달콤함은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 그리고 열세살짜리 아이 앞에서 어떻게 겸허히 고개를 숙였는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타이거 마더 중 인용>
그러니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왜 나의 엄마가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서 그렇게 나에게 피아노 가르치기를 고집했는지. 그것은 에이미 추아가 둘째 딸에게 들려주었던 바이올린에서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장유유서의 가르침, 절제, 통제, 문화 향유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은유를 보았듯이 아름다움, 여유, 꿈을 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맥없이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때 강압적으로 그것을 저지하지 않았던 그곳에는 그러한 것들이 흩어지고 스러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권위와 자율은 양립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하지만 부모라면, 아이 앞에서라면 그것의 균형추를 찾으려는 그 기약없는 노력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움과 가치를 얻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극성인 엄마와 자식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커다란 여유와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엄마가 만날 여지는 언제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온다. 사랑은 그 사람의 삶을 소유하고 재단하는 것과는 멀다. 항상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