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이 소설가의 책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해야만 할 것 같다, 왠지.) 지하철 안.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흔들리며 이 책을 펼쳤다. 제목도 제대로 모르고 단지 그가 썼다는 것만으로.
하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아기 조카가 많이 아팠다. 세상은 왜 이리 살기 힘든가, 왜 이렇게 잔인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가, 그런 질문들이 가슴을 짓이기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려던 새해의 계획을 지키지 못한 작가의 한탄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삶은 그런 것이 전부가 아닌데, 아니, 그런 것들은 일부이고 더 절박하고 절망적인 것들이 출몰하는데, 하면서.
아주 오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서면 또 마음이 아렸다. 그러니 책은 다시 좀 괜찮아지면 재개해야 할 것 같았다. 밝은 이야기들, 너스레들을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제대로 받아들이고 나도 그렇게 웃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다 읽고 나서야 나는 알아 버렸다. 결국 김연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이 책은 자신의 일상사를 미주알 고주알 되뇌이며 소설 쓰기 막간에 쉬어가는 에세이집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정말 진지한 소설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삶이라는 그 불가해한 전체 앞에서 어떻게 쓰는 일로 많은 진실한 것들을 건져낼 수 있는 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나는 이미 그의 몇몇 소설들에 매혹당했었지만 그의 <청춘의 문장들> 앞에서 포복절도했었지만 이 진지하고도 진솔한 고찰 앞에서 다시 한 번 김연수의 팬이 되기로 굳게 다짐했다.
여기에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핵심적인 조언이 들어있다. '어떤 작법'의 나열이라기보다는 또 꼭 소설가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소설을 밀고나가게 하는 그 삶에 대한 존중, 그 삶으로 열려 있는 감각의 채집에 대한 집중을 듣노라면 누구나 이런 이야기는 마흔이 넘어가는 고개에 한번 들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와닿는다. '이를테면'(김연수가 많이 쓰는 어휘라 낯익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이상스레이 그의 문체를 조금씩 닮아 가게 된다, 물론 그 수준이야 언감생심 못 따라가겠지만 말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이 우리를 밀고 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면서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많이 원하자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고 마음먹었다. 왜 안 되겠는가? <중략>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p.41
나는 최근들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간절히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나이가 들어갈 수록 어떤 것을 소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일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때로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그 도정에서 희망고문으로 지치고 고생해야 하는 것이 싫고 귀찮아졌다. 그러면서 삶은 좀 덜 치열해지고 덜 실망스러워졌지만 그에 비례해 어떤 환희나 희열과도 멀어지게 된 것 같다. 이십 대에 많은 것들을 꿈꾸고 소망한 것이 때로 좀 부끄럽게도 느껴졌었는데... 김연수가 하는 말은 마치 나를 지목해서 '너 왜 이리 현실적인 척, 욕심이 없는 척 하는 거야!'라며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더 많이 원해도 되는데. 그런 것들이 정작 중요한데. 이루어내고 가진 것들로만 나의 삶이 규정지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
삶 앞에서 생 앞에서 심드렁해지는 것은 어떤 '~척'에 불과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김연수의 말처럼 모든 감각을 깨우고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그러한 것들을 성실하게 쓰고 하는 과정이 진짜 사는 것일진대 그것들에서 출몰하는 어떤 고통, 상처 앞에서 갑각류처럼 마음과 감각을 위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나이듦이 그러한 권태와 체념에 고개숙이는 어떤 것이라는 잘못된 오해로 '성숙'을 가장하고 있었나 보다.
시간은 '나'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시선을 불태우는 지옥불이다. 서사예술인 소설 속에는 이 지옥불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p.245
어디에선가 가장 잔인한 심판관은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살면 살수록 모든 것들을 초토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시간' 앞에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세상이 '나'라는 무게추로 재단되고 저울질 당하던 그 생생한 시간들은 간곳 없다. 이제 '어른'이라고 '나'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그러한 일인칭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기어나오는 중이다. 내가 어느 날 없어져도 세상은 잘만 돌아갈 것이다. 더 이상 인식하지도 지각하지도 사고하고 느낄 수도 없는데 세상은 진보하고 나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은 또 저마다의 삶의 역사를 쓰고 소망하고 절망하고 기대하고 실망할 것이다. 이 사실을 맨정신으로 정말 절절하게 받아들이고는 도저히 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같지 않다. 그런데, 어라, 이 작가는 가능할 것 같다. 우리의 생이 너무나 짧기에 우리의 소망을 저지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망은 삶의 구석마다 너무 자주 튀어 나오기에 그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삶은 처절한 서사가 되지만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전체로, 거대하고 장구한 그 전체에서 우리의 삶 한 귀퉁이를 볼 때 그것은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분명 자리매김할 것이기에.
이 너무나 커다랗고 슬픈 고통으로도 그녀는 '성장'을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겁쟁이다. 김연수가 '소설쓰기'로 슬쩍 '삶'을 이야기한 것은 대단히 효과적이고 유효한 일이었다. 소망과 욕망이 좌절당할 때에도 그것을 밀고 나가 삶의 이야기를 완성해 내며 죽을 때까지 쓰고 다시 쓰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 앞에서 다시 겸손해지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가 완독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여전히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