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않다"와 "불행하다"가 동의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온전히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질투심이 없어졌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별것 아닌 일을 별것 아닌 것으로 좀 밀어 둘 수 있지만 그것이 사소한 일들 모두를 쿨하게 넘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좋은 인간이 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살아온 만큼 더 살면 노인이 된다. 지금은 어떤 능선을 따라 내려오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천상병 시인은 세상이 아름다웠노라고 회고할 수 있게 늙었지만 나에게 비친 세상은 점점 더 참혹하게 느껴지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게 비치고 나를 감싸던 안온한 포근함은 점점 더 하나의 착각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이 일어나고 언제나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은 수시로 무너지는 풍경, 그것이 내가 곧 사는 곳이다. 이제 더 이상 바깥은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춥지만 지글지글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귤을 까먹으려 읽고 또 읽었던 '쿠오레' 같은 세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엄혹한 현실이다.
혹독한 시련과 고통, 불평등과 부조리, 착취와 굴종만이 삶의 조건인 것일까? 어린 시절, 세상에 대한 느낌은 늘 따듯했다. 비록 늘 지쳐 있었지만 어딘가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와 다정한 엄마, 자신이 누군가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뿌듯한 안심...... 그것은 마치 새 둥지처럼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은 다 사라지고 없는 걸까? 왜 모든 게 가혹하고 싸늘해진 걸까? 그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천명관 <퇴근> 중
맞다. 이런 느낌인 것같다. 미래의 사회상을 그린 극단적이고 어두운 이 <퇴근>이라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이 만들어낸 세계의 나락에서 건져 낸 이 비참한 가장의 회고는 사실 미래의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때로 너무 슬프고 너무 아프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종종 가지는 안온하고 따뜻한 그 안정감의 보루만은 명확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구체적인 풍경 때문이 아니었고 어린이만이 세상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그 아주 편협하고 자그마한 영역의 울타리가 주는 본질적인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년이 되어간다는 이러한 싸늘한 느낌은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위로,가 분명 주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한국작가가 쓴 단편을 찾아 읽지 않게 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밀도 있는 찰진 서사가 뚫고 들어오던 내면의 벽이 더 두꺼워진 탓도 있을 테고 어느 순간 한국의 단편에도 어떤 '찡'하던 총기가 감하고 매력이 흘러 넘치던 전성기를 치고 내려오는 지점에서 좀 머뭇댔던 탓도(나만의 생각?)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김훈, 김연수, 은희경, 성석제, 김영하, 김언수, 천명관이 쓴 단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같았다. 그것도 이럴 줄 알았어,가 아닌 역시 산타 할아버지는 늙지 않는구나, 싶을 만큼의 재기가 여전히 반짝이는.
김훈의 노량진 고시텔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의 이야기는 역시 그의 정묘한 문장, 묘사 들과 어우러져 생생한 하나의 르포 같았다. 사실 나도 여기에서 재수를 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는 낯설지만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사육신의 묘지의 이야기와 공무원 시험 과목 중 국사의 쪽집개 식 강의가 펼쳐지는 풍경과의 교차는 마치 우리의 삶과 어떤 죽어 있는 이론, 상식의 대조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필요에 의해 가난한 계약 동거를 마치고 쿨하게 찢어지는 '나'와 '영자'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담담하지만 어떤 '찡'한 구석이 있다.
김연수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여전히 김연수적인 아름다움과 또 거기에 덧대어진 약간의 권태, 하지만 은은한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였다. 한국의 포크 여가수가 일본에 공연 초대를 받아 간 사연, 또 그 사연이 서술되는 방식인 이미 끝난 사랑에게 보내지는 이메일, 자신은 미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성의가 익명의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는 감동, 김연수의 시선은 여전히 별을 향해 있어 반갑기도 하고 안심이 된다.
김영하의 <아이를 찾습니다>는 섬뜩했다. 마트에서 우연히 아이를 잃게 되고 그 아이를 찾아 헤매며 흘러가는 십년 남짓한 세월이 파괴하는 일상, 그 일상을 다시 뚫고 들어오는 실종된 아이의 귀환이 행복이라는 마침표 대신 더한 비극과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의 진폭은 소설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쳤다. 앓던 이가 빠진다,는 표현. 어쩌면 우리는 어느새 '앓던 이'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미결로 남아 나를 규정하고 내가 그것을 하소연하는 데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민했던 모든 문제가 풀리고 남는 것은 명쾌함과 행복이 아니라 어떤 황망함과 또다른 상실감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그러한 예리한 간파.
천명관의 <퇴근>은 놀라웠다. 회사에 정식으로 출퇴근하는 정규직들은 극소수의 상류층으로 고착화되고 대다수는 '담요'라는 너절하고 초라한 '환유' 아래에서 하루 하루 힘겹게 생존을 위하여 투쟁해야 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일말의 진실은 사실 우리가 지금 오늘 애써 외면하는 지대에 있다. 미 모든 역겨운 일들의 중심에는 사실 사람마저 도구화 부속화시키는 천민자본주의의 횡행이 있지 않을까. 작가는 이제 욕할 정부마저 슈퍼리치들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들이 철저히 돈의 논리에 종속되는 황량한 풍경을 눈에 보이듯 그린다. 천식에 걸려 암시장에서 약을 구해야 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해매던 무능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갔던 아버지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압권이다.
토마 피케티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 터라 그와 함께한 좌담 자리의 기록이 반가웠다. 자본주의의 소득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그의 대안적 관점은 실현 가능성이나 한계 등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누구나 느끼고 있는 물질에 의한 삶과 생명의 소외,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진지하고 젠체하지 하고 모색하는 움직임이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자주 인용하는 발자크의 소설에서의 인물들의 '돈'을 매개로 혹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가 반가웠다. 발자크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돈'에 시달렸던 '돈'에 집착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날에도 지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같다. 기회가 된다면 토마 피케티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삶을 기록하는 데 끝내 실패하는 행위잖아요. 중요한 건 실패하면서도 끝까지 기록한다는 거죠.
-리뷰 좌담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의 곁에서' 중 양재훈
이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만져지는 것들만으로 효율성으로 수익성으로만 무언가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세태에서 실패하는 게 당연한 무용한 시도들을 밀고 나가는 일은 분명 쉽지 않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가지는 무게와 가치, 아름다움이 있다. 응원을 보내주고 싶고 오랜만에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