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안 오는 시간, 비교적 관대함이 주어지는 나날들, 너무 이상주의적이어도 입찬 소리만 해도 조금은 미쳐도 용인되는 시절.
영감은 번득이고 천재가 태어나는 시간. 시인으로 가는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유일무이한 찰나들. 김연수가 종일 시를 쓰고 또 써도 시간이 남아돌았던 바로 그 시간. 하지만 두 번 경험하기엔 조금 저어하게 되는 성장통.
<길 위에서>의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우스, 앨런 긴즈버그, 루시엔 카는 1950년대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고유명사는 이제 마치 보통명사처럼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청춘의 치기, 무모함, 반항, 자유로움을 안고 회자된다. 시에서의 운율, 압운,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은 이 작가들 앞에서 탈피해야 하는 껍질이자 도약해야 하는 디딤대가 되고 민낯과 속살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다 거기에서 지금까지 미처 꺼내어 놓지 못한 실재의 조각들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쓰다듬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들이 공유한 시간들은 성정체성에 논란을 지피기도 했다. 여러가지 소문, 의견이 있었지만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동성애적 성향을 지녔던 것은 어느 정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인 듯하다. 신비한 눈빛의 배우로 십대 후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연상시키는 데인 드한이 그들의 모임 중 뮤즈가 되다시피 한 루시엔 카를 연기한다. 똘똘이 스머프가 떠오르는 해리 포터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유명한 시인 아버지와 정신병자 어머니의 가정 안에서 혼란을 느끼며 루시엔 카에 점차 매혹당해가는 미묘한 연기의 몸짓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루시엔 카는 앨런 긴즈버그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심이 발화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이 왜소하고 주눅들어 보이는 소년은 사랑과 우정, 이끌림과 염증의 미묘한 경계에서 루시엔과 관계를 맺으며 대시인으로 가는 여정에 선다.
<킬 유어 달링>의 핵심 사건은 실제 루시엔 카의 살인 사건이다. 오늘날로 보면 스토커를 죽인 셈이 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은 종반부에 가서야 일어나는 만큼 영화의 전면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음악에 이끌려 루시엔 카의 방으로 들어간 신입생 앨런에게 예이츠의 vision을 들려주는 그의 모습은 영화라는 영상물이 어떻게 그 한계 안으로 언어의 실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지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 되어 준다. 예이츠의 시, 앨런의 시, 심지어 랭보의 시까지 소년들의 입에서 자유자재로 읊조려지며 사건의 배경이 되고 영상의 자막이 되어준다. 예이츠는 비트 세대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부활했다. 삶과 죽음의 그 반복되는 수레바퀴에서 탈피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사랑에서 집착으로 변질된 동성 애인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낢은 그들이 예이츠의 시를 오독하기 쉬운 청춘이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잭 케루악은 욕망과 마음이 이끄는 길의 여정에서도 생을 진지하게 반추했다.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순환 속에 자리할 지도 모른다는 감각은 역설적으로 이들 사이에서 예이츠의 시로 벼려진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찰나 안에 가두어진 영원은 그렇게 이 영화 안에서 성공적으로 발화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노년의 예이츠의 시를 읽는다고 했다. 그의 시에는 어떤 '초월적인 것'이 있다는 노작가의 이야기가 와닿는다. 시가 죽어가고 폄하되는 나날들, 결국 사람과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위대한 과업은 시인의 손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영화 같아 마지막 엔딩 크레딧 앞에서 숙연해졌다.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아이들, 시인의 시로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했던 과거의 흔적들이 그 어떤 그 사건의 진지한 분석, 설명, 변명보다 중심을 건드렸다는 느낌은 착각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에서 업을 끊고 진저리 나는 순환의 매듭을 풀어버리려 했던 시도는 인간이 생에서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결국 늙어가는 것이고 청춘과 석별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