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는 버나드 쇼의 말은 옳을까? 요즘 드는 생각은 젊음을 그것의 찰나성을, 그것이 가지는 남녀 간의 게임에서 가지는 위력을 항상 의식하는 젊음이 과연 그 특유의 무모함과 무지를 내칠 만할까 반문하게 된다. 젊음은 몰라야 젊음이다. 자신의 그 치기와 그 무모한 열정의 유효기간을 의식하지 않아야 진짜다. ‘이건 순간이야, 난 곧 늙을 거야.’라는 자기예언은 나이듦에 기꺼이 양보해야 한다.

Cat Person은 이런 젊음이 남녀 관계에서 가지는 역학을 명민하게 들여다보고 형상화한 책이다. 사건이랄 것도 없다.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대생이 손님으로 만난 남자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일종의 게임을 하다 관계를 맺게 되고 여자는 갑자기 이 나이 들고 자신에게 흠뻑 빠져버린 남자가 소름 끼치게 싫어져 피하는 게 줄거리다. 여자는 자신의 젊음이 남자에게 성적 판타지와 결부된 욕망으로 소비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극도의 염증을 느끼게 된다. 처음 문자를 주고 받을 때 느꼈던 호감은 이내 극도의 반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여자는 심지어 집에 고양이를 키운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남자의 이야기마저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남자는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을 Cat Person으로 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면의 음험하고 위험한 욕망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안전한 서사를 매개로 그 출구를 찾아 헤맨다. 여자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자신의 젊음을 소비하고 이용하려 했음을 눈치챈다.

여기에는 선과 악의 대치 구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불가피한 전락의 비극성이 형상화되어 있다. 남자도 여자도 그 찰나의 조우로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반목한다. 젊음이 자신의 젊음을 강렬하게 인식하는 지점은 이런 파국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이미 예리하게 인식하고 묘사했던 ‘그’가 있다. 필립 로스의 시점은 Cat Person의 대척점, 바로 그 늙음에 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만다. 그래서 그 늙음은 백전백패다. 욕망했지만 사랑하고 말았으므로. 그리고 그 젊음 앞에 자신의 젊음까지 환기해 세우는 그의 처절함은 어쩐지 서글프다. 나이 든 남자는 나이 어린 자신을 다시 불러와 나이 어린 그녀 앞에 세운다. 그런 가상의 공간에서 둘의 역학 관계는 균형을 이룬다. 그는 그러한 상상을 한다. 욕망과 사랑의 경계는 언제나 명쾌하지 않지만 더 많이 욕망하거나 사랑하는 자는 힘에서 밀린다. 결국 죽어가는 젊음 앞에서 늙은 남자는 절규한다.

다시 젊음을 돌려주어도 또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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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부고를 그의 죽음 이틀 뒤에 들었다. 순간 아연했다. 어쩐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처럼 항상 주변에 맴돌 것만 같은. 하지만 그런 필립 로스도 죽었다면,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죽을 것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절망감이다. 그는 살아생전 <네메시스>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대중 앞에서의 강연도 그러했다. 더 이상 쓰는 것의 고투를 견뎌내지 않겠다는 그의 인터뷰는 그래도 그 이야기를 언젠가는 철회하고 다시 펜을 잡을 그 날의 여지를 남기는 듯했다. 필립 로스라면 그럴 줄 알았는데 정말 자신이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고 홀로 있다 죽음의 위기를 느끼고는  911을 부르고 그것을 타고 병원에 갔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생전의 필립 로스처럼 죽었다.



















제일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  그로서는 유일한 논픽션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유산> 표지 사진.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아버지가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젊었던 그 눈부시고 강인했던 사진 속의 모습을 응시한다. 삶과 죽음의 그 강렬한 체험과 그 덧없음과 그 처절함을 그보다 더 잘 언어화할 수 있는 작가가 있을까. 아버지가 죽음을 그 자신의 강렬한 삶처럼 절절하게 겪어내는 과정을 묘사한 그의 문장은 가슴에 아릴 정도로 날카롭고 정묘했다.


"Dad, I'm going go have to let you go."

(Patrimony by Philip Roth)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에게 했던 마지막 인사처럼 죽음은 "있음에서 풀려나" 

해방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산 자들도 죽은 자를 그렇게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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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6-0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첫번째 문단이 저의 마음이었어요.
저도 그는 죽지 않을 거라고, 그는 죽음에서 비켜설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911을 부르고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로스는 정말 로스답네요.

blanca님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들이군요. 전, 네메시스를 막 끝냈고, 다시 에브리맨을 읽어요.
굿바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데.... 굿바이.... 굿바이...

blanca 2018-06-02 02:4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필립 로스 말년에 그의 전기를 집필하며 함께 시간을 지낸 작가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조만간 그의 전기를 만나게 될 것 같아요. 펜을 꺾는 용기를 낸 그의 용단도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 글을 써보려고도 했는데 잘 안 되니 포기해버렸다고 하는데 필립 로스 기준에 자신의 글이 그 더 이상 마음에 차지 않았나 봐요. 쇠퇴와 죽음을 인정한 그의 용기가 부러워요. 쉽지 않은 거잖아요.

stella.K 2018-06-0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그랬어요.
타계한 나이가 85세라고 하던데 요즘엔 워낙에 장수 시대라 그런지
별로 장수했다는 느낌이 안 들더군요.
그래도 내가 그 나이까지 산다고 하면 좀 그렇더군요.
뭐 그리 오래 사나 싶기도 하고...ㅋ

blanca 2018-06-02 02:45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필립 로스 나이 듣고 그렇게 느꼈어요. 모르겠어요. 참, 살면 살수록 산다는 건 오리무중인 듯. 제가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지 살면 더 살고 싶을지 어렵네요. 그래도 죽는 건 여전히 정말 무서울 것 같아요.
 

미국은 위대하기보다는 거대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단면이 미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기 곤란한 이유다. 인종, 계층, 문화의 스펙트럼도 상상이상으로 넓다. 미드에서 보는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혜택을 누리는 화려한 상류층의 모습도 교실에서 친구들을 저격하는 십대의 비극도 병원비로 파산해서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들도 인종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에게 표를 던지는 성난 백인 노동자들도 다 언뜻 보이기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파편들이지만 미국의 모습이다. 나는 미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학을 한 경험도 이민을 해서 장기간 살아보지도 않아서 그야말로 미국을 안다고도 미국을 제대로 경험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바깥에서 보는 미국과 실제 내부에서 부딪히며 느끼는 감상의 간극이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거나 경험했다고 느끼는 것의 한계와 곡해와 자가당착적 오류를 알기에 딱 떨어지는 말로 옮기기 힘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느낌은 어쩌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실패해 버린 지점에 대한 개인적 소회의 형상화에 빗대어질 수도 있을 것같다. 최선을 바랐지만 그것과 어긋나버린 현실을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해석하고 통합해야만 하는 숙제 앞에서 종종 아연해지니 말이다. 이렇게 나는 미국에 대한 몰이해와 미국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거리에서 우연히 <힐빌리의 노래>를 만났다. 



밴스는 자본주의 외형적 성취 측면에서 얘기한다면 예일 로스쿨을 나온 성공한 백인 변호사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한때는 은성했을 공장지대가 제조업의 사장과 더불어 몰락하고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미처 도망쳐 나오지 못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장한 그의 이야기는 실패한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소외지점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지, 그 고통을 뚫고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지에 대한 슬픈 엘레지다. 그가 자라난 오하이오는 '러스트 밸트', 미국의 대표적인 제조업의 거점이었지만 공장 및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며 붕괴일로로 치닫고 있는 곳이다. 아이들은 십대에 임신을 하고 약을 배우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과 닮은 절망을 낳고 키우며 사는 곳이다. 밴스 또한 약에 항상 취해 있던 어머니, 얼굴도 잊어버린 생부, 그 빈 자리를 들고 나는 의붓 아버지들, 절망 속에서 애저녁에 애어른이 되어버린 이부 누나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궁핍하고 신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럼에도 그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힐빌리적이었던 조부모의 따뜻한 사랑 덕분이었다. 일상이 욕설과 고성에 교양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들이었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손자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어떤 꿈과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열망과 청사진이 있었던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의 밴스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대가족이 얽혀 서로의 삶을 피곤하게 간섭하고 교육의 힘을 믿고 세속적인 가치의 무게를 의식하는 동양적인 농업 사회의 가족들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밴스는 그러한 다른 가족의 지지조차 받지 못하는 많은 힐빌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절망에 빠지는지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는다. 


밴스의 모든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지나친 자긍심, 백인의 정체성에 대한 민감한 인식, 보수정권에 대한 가치관 등은 분명 편향적인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그 편향성의 서사의 경로 자체는  공감을 자아낸다.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 그 주류에서도 결국은 또하나의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그 문화적 경계의 완고함에 대한 절망 등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회적 계층 이동의 가능성의 경로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는지에 대한 자성을 가능하게 한다.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 이후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밴스가 겪었던 어린 시절의 경제적 고통이나 가족의 해체로 초래되는 불안을 대물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또 자라나 기성의 기득권이 되어 자신들이 겪었던 소외, 상실의 기억을 잊을 때 힐빌리는 영원히 대물림되어 절망을 되씹으며 사회 안정과 통합에서 저만치 물어나 여전히 절망을 체현하게 될 것이다. 절망과 실패의 지점은 완강하다. 시선을 돌린다고 그곳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판이다. 꿈을 꾸는 것이 불가능한 지대,는 비단 미국만의 이야가 아니다. 내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건설적인 모델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미래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점점 공고해지는 자본주의의 계층 간의 경계에서 여전히 잉태되는 절망들에 어떤 해답의 경로를 제시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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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역사나 미국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흑인이 미국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제가 읽었던 서구 백인 중심의 역사와 문학의 허점들이 조금씩 보이게 되더라고요. ^^

blanca 2018-05-30 02: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디언 원주민의 슬픈 역사도 그렇고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러 인종이 섞여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의 차별이나 균열은 끊임없이 고민해봐야 하는 잠복 과제인 것 같아요. 특히 역사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신다니 흥미롭네요. 여자에 흑인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상대적 약자인지 저는 상상조차 잘 가지 않습니다.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18-05-29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힐빌리 출신으로 변호사가 되어 성공한
남자의 이야기가 책을 읽을 수록 부담
스러워졌습니다.

과연 저자가 다른 힐빌리들에게 롤모델
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
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18-05-30 02:0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이 책의 대목 대목마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어요. 근간에 백인이라는 자의식도 그렇고요. 인종을 강렬하게 인식한다는 게 역설적으로는 그렇게 태어난 인종이 누려야 하는 어떤 근원적 특혜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아직 더 생각하고 경험하고 공부해야 판단할 수 있는 얘기인 건가 싶기도 했고...댓글 감사해요.
 

전자책은 아이폰에 다운받아 보기도 하고 킨들로 읽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종이책만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일단 전자책 서재는 실제 서재처럼 시각화가 어렵다. 서재에 꼭 반듯하지 않아도 손때 묻은 책을 꽂아두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일이다. 어떤 기억을 꺼내 보거나 어떤 비교와 대조가 필요할 때 전자기기를 켜 전체적인 그림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육백여 권의 책을 남기고 나머지를 정리하며 전자책에 집중해보자,던 생각은 많이 흔들리는 중이다. 편혜영의 신간 판형은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다. 세로 판형이 길고 전체적으로 얇고 크지 않은데 품고 있는 자간도 좁지 않고 활자도 보기 시원하다. 이 맛에 종이책을 떠나지 못하나 보다.



내친 김에 킨들 크기와 비교해 보니 거진 비슷하다. 킨들의 최대 단점은 한글책의 절대 부족과 터치감이다. 반응이 한 박자씩 늦다. 활자를 키우고 줄이는 기능과 영문 신간의 접근성은 좋지만 아무래도 나의 영어 실력 부족과 게으름은 서재에 종이책을 쌓는 일과 전자책장에 먼지 앉는 책들을 채우는 일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더하다. 조금만 읽다 재미가 없으면 별 죄책감 없이 중단하는 경우가 킨들에서 더 많다. 바로 클릭만 하면 결제되는 기능 때문에 막내 아이가 킨들을 가져가 사정없이 결제해 버린 것들 수습하는 과정도 귀찮다. 킨들은 고도의 출판계의 상업성과 문학의 감성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것 같다. 책을 이렇게 손 안에 다 들어오게 하는 과정을 그저 터치 하나로 가능하게 하다니 일말의 망설임도 차단하는 영리함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쌓이는 책의 물성을 못 느끼니 그저 클릭 하나만으로 전자책 서고는 배가 빵빵해진다. 


종이책은 내용의 물화가 아닌데 언뜻 손에 잡히는 한 장이 그 허구에 한 뼘쯤 더 다가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종이책 욕심을 버리지 못하나 보다. 손안에 들어오는 그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은 여전히 떨칠 수가 없다. 줄도 긋고 간지도 붙이고 그렇게 이제 남한테 넘기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고 나면 마치 나만의 이야기가 되는 느낌은 심한 착각이지만 그 착각조차도 좋다. 


이러다 또 전자책으로 가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활자만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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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5-12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책 서재에 책 표지 말고 책등으로 정렬해서 책꽂이처럼 보이게 하는 기능이 있나요?

blanca 2018-05-13 00:5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북깨비님. 제가 못 찾는 걸 수도 있는데 알라딘도 그렇고 킨들도 책등은 아니고 책표지 정면으로 구입책이 보이네요.

Nussbaum 2018-05-1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blanca님이 올리는 페이퍼를 보면 저와 유사한 취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전자책은 너무 쉽게 주문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저도 킨들과 리디북스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TV 속에 나오는 어떤 연예인. 이상형이지만 만날 수 없고, 대화할 수도 없는.

blanca 2018-05-13 01:01   좋아요 0 | URL
리디북스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공간과 나중을 좀 저리 치워놓는다면 그 종이책이 주는 설명하기 힘든 느낌을 좀 즐겨도 되지 않을지. 아, 저희 아이가 제 맹점을 정확하게 알아서 비싼 책 막 클릭해서 다 결제해 놓고 도망가요. ㅡㅡ 절대 킨들을 손 닿는 곳에 두면 안 되겠어요.

세실 2018-05-1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활자가 좋아요.
줄 긋고, 띠지 붙이고.....나만의 이야기가 되는 착각^^
책을 구입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blanca 2018-05-13 01:06   좋아요 0 | URL
그죠,그죠. 전자책도 하이라이트를 할 수 있지만 그게 참 손으로 쭉 긋는 느낌이랑은 다르고 전체적으로 훑어보는 것도 불편해요.

psyche 2018-05-13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자책 종종 읽지만 물론 종이책이 훨씬 좋아요. 그래도 환경때문에 어쩔수없이 전자책을 읽게 되고 또 그렇게 읽다보니 익숙해지네요. 워낙 집순이라 그런지 집에서 클릭만으로 도서관 책 빌리고 반납도 자동으로 되는것도 장점이에요.
그리고 저는 와이파이를 끄고 써요. 도서관책은 컴으로 연결해서 옮기니까 와이파이 쓸 필요없구요. 와이파이 꺼놓으면 밧데리가 오래가거든요. 블랑카님도 꺼두시면 아드님이 팍팍 결제하는 걸 막으실 수도 있겠네요

blanca 2018-05-14 01:57   좋아요 0 | URL
아, 프시케님, 저 와이파이 꺼두는 것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2018-05-18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초에 여행가면서 크레마 사운드 구입해서 페란테 시리즈는 아주 야무지게 잘 읽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는.... 아, 크레마 사운드는 어디엔가 잘 있습니다 ㅠㅠ

저도 아직은 종이책이 좋고요. 전자책은 읽어주기 기능이 아주 좋던데, 그건 핸드폰으로하다 보니까...
언제쯤 전자책이랑 친해질까요~~~~

blanca 2018-05-19 02:07   좋아요 0 | URL
오, 페란테 시리즈를 전자책으로 다 읽으셨어요? 저는 아직 페란테는 안 읽어봤는데 궁금하네요. 아우, 저는 종이책이 훨씬 좋아 큰일이에요. 다시 또 책 욕심이...안 그래도 읽어주기 기능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전자책은 글자 키우기 기능은 좋은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오면(안 오기를 간절하게 바라보지만) 전자책으로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단발머리 2018-05-19 09:42   좋아요 0 | URL
아이구.... 다는 아니구여.
제가 정확히 못 했네요. 1권은 이북, 2,3권은 도서관책으로, 4권은 구입해서 읽었어요.
그 때 막 크레마를 구입해서 익숙하지 않았는데 페란테 덕분에 크레마랑 많이 친해졌죠. 크레마 전도 친구도 크레마 처음 사용할 때 쭉쭉 읽히는 쉬운 책(?)으로 시작하라 권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우리의 종이책 사랑ㅋㅋㅋㅋ
종이책이여, 영원하라!!!

transient-guest 2018-05-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책에 관심이 쪼끔 있는데 절판된 책이나 ebook으로만 나오는 책, 그리고 PDF로 갖고 있는 고전무협지 같은 걸 제대로 보고 싶어서에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킨들로 한국책을 보는 건 꽤 어렵다고 하네요. 역시 크레마를 구해야하는건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도 종이책이 더 좋아서 사실 전자책에 가는 관심은 딱 이 정도의 목적 때문입니다.ㅎ

blanca 2018-05-19 02: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킨들은 한글책은 전무하던걸요. 고전무협지가 PDF로 소장할 수 있군요! 한글책과 영어책 다 마음껏 지르고 싶은데 현실은 녹록지가 않네요.
 
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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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재판의 법정에 나온  유대인들을 학살한 전범들은 희대의 악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도 가정에서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인 경우가 많았다. 상부조직에서 하달 받은 명령을 기계적으로 집행했다고 항변하는 그들의 모습은 타인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도 끝내 이어나가고야 마는 생존의 가차없는 모순의 체현 그 자체였다. 살기 위해 살고자 하는 이를 죽인다는 것만큼 자기 기만적인 비극의 전형이 있을까? 타인의 숨통을 끊어야만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삶이라니... 편혜영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퇴락일로인 소도시의 종합병원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곳이 아니었다.






無主空山


무주는 특별하지 않다. 무언가를 전적으로 주도하거나 집행하거나 모의할 그릇은 아니다. 그의 시계는 생존과 타협, 도덕률과 공명심이 혼재되어 있는 영역에 걸쳐 있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은 횡령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의 대학 병원에서 타의로 사직하여 이인시의 선도병원의 관리부 구매 담당으로 내려온 그는 우연찮게 내부고발의 주역이 되어 비교적 친근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주었던 이석과 척을 지게 되고 동료 직원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단단하지 않은 지반에서 허룩한 생존의 촉수를 뻗치며 그저 살아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무정형의 모습이다. 그래서 언뜻 그는 일관성도 융통성도 깊이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제는 무기력하게 부정의 공모자가 되고 오늘은 친한 동료의 비리를 고발하고 내일은 병원비가 체납된 노인의 침상을 강제로 치워버리는 무자비한 모습의 혼재가 오늘날의 어쩌면 가장 실감나는 비열하고 던적스러운 인간형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주인공이면서도 사건의 직접적인 동인의 저력은 없는 배경으로 저만치 물러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무주는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때로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는 우리와 닮아 있다. 그는 생의 모순 그 자체다. 낯설지 않다.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변화를 우리의 그 무일관성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연속선상에 도열해 있지 않다. 산다는 일은 참으로 비논리적인 일이니 말이다.




利析秋毫


"이석은 평판이 좋았다."는 첫 문장은 이석을 가장 잘 요약하여 소개한다. 이석은 언뜻 두루뭉술해 보인다. 직장에서 시덥잖은 농담을 잘 던지고 수완이 좋아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람. 적당히 비겁하고 적절히 타협하는 그 지점에서 마치 삶의 기술 그 자체를 연마한 듯 보이는 능구렁이. 하지만 그는 이미 무주가 그곳에 당도하기 이전부터 삭아내리고 있었다. 이석에게는 아픈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의 숨통을 끊지 않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정직하게 받은 고정 급여로 충당불가한 수준이었다. 이것이 그의 횡령과 부정부패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당화의 지점까지는 못 가더라도 적어도 연민은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무주에게도 혼란스럽다. 이석은 아이가 아프기 전부터 나빴다. 아이가 아프고 나서는 더 나빴다. 그러나 결론은 이석의 비리를 고발한 무주는 이석의 생의 기반을 흔들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가책에 시달린다. 이석의 삶은 무주의 그것과 고통의 대비 효과로 표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그의 그것은 그의 행위를 헛된 공명심이자 이기심으로 폄하하는 근거가 된다. 이석의 고통은 이석의 부정을 어느 정도 용인하게 만들고 도덕률과 생존이 부딪힐 때 그 불투명한 경계는 뭉뚱그려 뭉게진다. 가치 판단과 대의는 생존 앞에서 흔들린다. 절대선과 절대악의 경계선이 흐릿해지며 읽는 이를 갈등하게 만드는 지점에서 작가는 물러서지 않는다. 편혜영은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에서 무주와 이석을 찾아내고 있음을 간파한다. 이미 충분히 감정을 이입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상황논리를 더듬고 있는 독자를 예상한 듯하다. 작가는 마침내 이기고 만다. 때로는 생 그 자체가 가장 도덕적 판단의 준거가 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생을, 그 사람이 아이를 품고 있을 때 그 아이의 생을 뒤흔드는 결론은 엄혹한 도덕적 심판에서 빗겨간다. 아이를 살게 하는 힘 그 자체가 도덕으로 여겨질 때 부수적인 모든 행위는 용인되며 도덕적 공황, 진공 상태가 수반된다.



골리앗 크레인


<죽은 자로 하여금>에 조선업의 퇴락으로 유령도시로 전락해 가는 이인시의 모습은 한때 눈부셨을 골리앗 크레인의 흉물스러움으로 환유된다. 시장의 논리가 밥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면 어떻게든 버텨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들의 그 생에 대한 초라한 곡진함은 이미 이용 가치를 상실한 크레인의 모습 앞에서 무너진다. 그 거대한 크레인의 비극의 정점은 한때의 은성함이고 그것을 실제 경험하고 목격한 이석의 삶의 전락과도 만난다. 우리 모두는 한때 빛났다. 그러나 생의 본질은 그것은 아니고 생의 추락은 도저히 예습할 도리가 없다. 생의 내리막길은 비로소 생의 비의를 노출함으로써 더욱 비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살고 싶고 살아나가고야 만다. 골리앗 크레인은 거슬리지만 거기 그렇게 완강하게 스스로 버팀으로써 실재를 노출한다. 





병원


선도병원은 꺼져가는 생의 불꽃을 재점화하는 의학의 숭고한 현장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다. 노인요양시설을 지어 유령도시가 되어 버린 지역에서의 이윤의 추락을 만회하기 위하여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현장은 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놓았냐고 행패를 부리는 아들이 달겨든 곳이다. 환자가 위험한 순간에 빠질 뻔했던 주사 투약 사건도 병원의 명예 앞에서는 번거롭고 사소한 해프닝일 뿐이다. 생과 사가 넘나들던 소격서는 큰 판돈이 들어올수록 기대하는 한탕이 커지는 노름판이었다.





초인을 기다리다


무주도 이석도 병원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사무장도 다 떠나고 남은 병원 안 직원들은 오늘도 자신들이 다시 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워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살기 위해서 건강하지 않은 시스템에서 부정을 저지른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그 오염된 시스템의 공백을 다시 채울 또 다른 초인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을 뛰어넘은 정의로운 초인은 그들이 정확히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초인은 생존의 바퀴를 부드럽게 굴러가게 할 기름칠을 마다하지 않을 이다. 적응해 왔던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시스템의 틀 안에서 숨 쉬게 할 자이다.  이미 또 다른 무주, 이석, 사무장은 그렇게 다른 어딘가에서 이 자리를 메우려 이미 출발하고 있을지 모른다.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려고 그 절망의 악순환은 오늘도 그렇게 끝을 모르고 계속 되고 있다. 산 자로 하여금 살게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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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1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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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2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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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2 0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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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2 0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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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2 12: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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