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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뉘른베르크 재판의 법정에 나온 유대인들을 학살한 전범들은 희대의 악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도 가정에서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인 경우가 많았다. 상부조직에서 하달 받은 명령을 기계적으로 집행했다고 항변하는 그들의 모습은 타인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도 끝내 이어나가고야 마는 생존의 가차없는 모순의 체현 그 자체였다. 살기 위해 살고자 하는 이를 죽인다는 것만큼 자기 기만적인 비극의 전형이 있을까? 타인의 숨통을 끊어야만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삶이라니... 편혜영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퇴락일로인 소도시의 종합병원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곳이 아니었다.
無主空山
무주는 특별하지 않다. 무언가를 전적으로 주도하거나 집행하거나 모의할 그릇은 아니다. 그의 시계는 생존과 타협, 도덕률과 공명심이 혼재되어 있는 영역에 걸쳐 있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은 횡령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의 대학 병원에서 타의로 사직하여 이인시의 선도병원의 관리부 구매 담당으로 내려온 그는 우연찮게 내부고발의 주역이 되어 비교적 친근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주었던 이석과 척을 지게 되고 동료 직원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단단하지 않은 지반에서 허룩한 생존의 촉수를 뻗치며 그저 살아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무정형의 모습이다. 그래서 언뜻 그는 일관성도 융통성도 깊이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제는 무기력하게 부정의 공모자가 되고 오늘은 친한 동료의 비리를 고발하고 내일은 병원비가 체납된 노인의 침상을 강제로 치워버리는 무자비한 모습의 혼재가 오늘날의 어쩌면 가장 실감나는 비열하고 던적스러운 인간형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주인공이면서도 사건의 직접적인 동인의 저력은 없는 배경으로 저만치 물러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무주는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때로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는 우리와 닮아 있다. 그는 생의 모순 그 자체다. 낯설지 않다.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변화를 우리의 그 무일관성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연속선상에 도열해 있지 않다. 산다는 일은 참으로 비논리적인 일이니 말이다.
利析秋毫
"이석은 평판이 좋았다."는 첫 문장은 이석을 가장 잘 요약하여 소개한다. 이석은 언뜻 두루뭉술해 보인다. 직장에서 시덥잖은 농담을 잘 던지고 수완이 좋아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람. 적당히 비겁하고 적절히 타협하는 그 지점에서 마치 삶의 기술 그 자체를 연마한 듯 보이는 능구렁이. 하지만 그는 이미 무주가 그곳에 당도하기 이전부터 삭아내리고 있었다. 이석에게는 아픈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의 숨통을 끊지 않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정직하게 받은 고정 급여로 충당불가한 수준이었다. 이것이 그의 횡령과 부정부패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당화의 지점까지는 못 가더라도 적어도 연민은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무주에게도 혼란스럽다. 이석은 아이가 아프기 전부터 나빴다. 아이가 아프고 나서는 더 나빴다. 그러나 결론은 이석의 비리를 고발한 무주는 이석의 생의 기반을 흔들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가책에 시달린다. 이석의 삶은 무주의 그것과 고통의 대비 효과로 표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그의 그것은 그의 행위를 헛된 공명심이자 이기심으로 폄하하는 근거가 된다. 이석의 고통은 이석의 부정을 어느 정도 용인하게 만들고 도덕률과 생존이 부딪힐 때 그 불투명한 경계는 뭉뚱그려 뭉게진다. 가치 판단과 대의는 생존 앞에서 흔들린다. 절대선과 절대악의 경계선이 흐릿해지며 읽는 이를 갈등하게 만드는 지점에서 작가는 물러서지 않는다. 편혜영은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에서 무주와 이석을 찾아내고 있음을 간파한다. 이미 충분히 감정을 이입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상황논리를 더듬고 있는 독자를 예상한 듯하다. 작가는 마침내 이기고 만다. 때로는 생 그 자체가 가장 도덕적 판단의 준거가 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생을, 그 사람이 아이를 품고 있을 때 그 아이의 생을 뒤흔드는 결론은 엄혹한 도덕적 심판에서 빗겨간다. 아이를 살게 하는 힘 그 자체가 도덕으로 여겨질 때 부수적인 모든 행위는 용인되며 도덕적 공황, 진공 상태가 수반된다.
골리앗 크레인
<죽은 자로 하여금>에 조선업의 퇴락으로 유령도시로 전락해 가는 이인시의 모습은 한때 눈부셨을 골리앗 크레인의 흉물스러움으로 환유된다. 시장의 논리가 밥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면 어떻게든 버텨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들의 그 생에 대한 초라한 곡진함은 이미 이용 가치를 상실한 크레인의 모습 앞에서 무너진다. 그 거대한 크레인의 비극의 정점은 한때의 은성함이고 그것을 실제 경험하고 목격한 이석의 삶의 전락과도 만난다. 우리 모두는 한때 빛났다. 그러나 생의 본질은 그것은 아니고 생의 추락은 도저히 예습할 도리가 없다. 생의 내리막길은 비로소 생의 비의를 노출함으로써 더욱 비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살고 싶고 살아나가고야 만다. 골리앗 크레인은 거슬리지만 거기 그렇게 완강하게 스스로 버팀으로써 실재를 노출한다.
병원
선도병원은 꺼져가는 생의 불꽃을 재점화하는 의학의 숭고한 현장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다. 노인요양시설을 지어 유령도시가 되어 버린 지역에서의 이윤의 추락을 만회하기 위하여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현장은 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놓았냐고 행패를 부리는 아들이 달겨든 곳이다. 환자가 위험한 순간에 빠질 뻔했던 주사 투약 사건도 병원의 명예 앞에서는 번거롭고 사소한 해프닝일 뿐이다. 생과 사가 넘나들던 소격서는 큰 판돈이 들어올수록 기대하는 한탕이 커지는 노름판이었다.
초인을 기다리다
무주도 이석도 병원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사무장도 다 떠나고 남은 병원 안 직원들은 오늘도 자신들이 다시 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워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살기 위해서 건강하지 않은 시스템에서 부정을 저지른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그 오염된 시스템의 공백을 다시 채울 또 다른 초인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을 뛰어넘은 정의로운 초인은 그들이 정확히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초인은 생존의 바퀴를 부드럽게 굴러가게 할 기름칠을 마다하지 않을 이다. 적응해 왔던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시스템의 틀 안에서 숨 쉬게 할 자이다. 이미 또 다른 무주, 이석, 사무장은 그렇게 다른 어딘가에서 이 자리를 메우려 이미 출발하고 있을지 모른다.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려고 그 절망의 악순환은 오늘도 그렇게 끝을 모르고 계속 되고 있다. 산 자로 하여금 살게 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