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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공감받고 이해받고 싶었다. 내가 경험하는 사랑과 내가 감동받은 모든 것들의 파장 안에 친구들이 있었다. 이십대의 우정을 떠올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 그런 적이 있었어,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게도 된다. 반대급부로 오해나 몰이해, 어긋남이 주는 고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누린 만큼 상실은 아팠다. 그 찬란하던 , 때로 처절하던 시절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눈물, 웃음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이렇게 떡하니 중년의 아줌마만 남아 있는 걸까. 나는 아직도 나의 늙음과 화해하지 못한다. 해사한, 투명한, 때로 아팠던 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거기에 고여 있다. 다시 스무 살의 그 철없던 때로 돌아갈 것 같고, 얼척없던 '나'는 언젠가는 꼭 돌아오고야 말 것만 같다. 그 때의 시간들은 질감도 양감도 지금과는 달라 더 진하고 더 무겁고 더 절절해서 스스로를 지워버릴 방도가 없으니까.
최은영의 소설들을 읽으며 그 때의 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하고 청승맞아지기도 했다. 생생하고 결이 곱고 예쁘지만 허하지 않은 그녀의 이십대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내려와 앉을 때마다 놀라기도 했다. 아, 언어란 정말 놀랍구나. 내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기억들, 말로 옮기지 못한 정서들을 그녀의 예리한 시선과 묘사는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일곱 편의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한결 같이 청춘이다. 그 지나치게 열중했던 관계들이 시간과 함께 풍화되어 가는 과정은 저마다의 상실로 내면화되지만 현재의 삶 속에 가라앉아 어떻게든 그들의 인생에 기여했으므로 헛되지 않다.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로 시작하는 <그 여름>에는 찬란한 슬픔이 어려 있는 러브 스토리가 있다. 사회적으로 통상적으로 쉽게 용인받지 못하는 형태라 해서 그 사랑의 성실성과 아름다움까지 의심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민하고 어려운 소재를 성장기와 접목시킨 작가의 문장이 참 예뻐서 코끝이 시렸다.
나란한 옆집 친구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아들을 중심으로 한 그 세대, 그 시대의 가부장적 사고는 이 두 친구의 접점이기도 하고 반목지점이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음침한 폭력, 그 폭력의 방조, 우리 모두는 그 시대의 부산물이자 방조자의 시선을 품고 출발하므로 페미니즘은 언제나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아가야 할 지점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601,602>
<모래로 지은 집>은 최은영이 자주 취하는 세 친구의 구도 속에 우정의 균형이 흔들리고 남녀 간의 애정이 끼어들 때 필연적로 가지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갈등과 상처의 침투를 잔잔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 기대어 완전한 이해와 소통과 공감을 얻어낸다는 것은 언제나 얼마쯤 부족하고 어긋날 수밖에 없는 바람이다. 이제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PC통신을 통해 별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그 이미지와 기대 안에서 어긋나는 현실의 모습에 순간순간 아연해지는 청춘들의 모습이 아프도록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아치디에서>가 참 좋았다. 화자는 특이하게도 외국인이다. 브라질 청년 랄도. 떠나간 사랑을 찾아 온 아일랜드에 예기치 않게 잔류하게 되며 사과농장에서 만나게 된 한국에서 온 하민과의 애틋한 시간들, 계속 할 수 없는 관계에서 의연한 척 돌아서지만 끝내는 울어버리고 마는 두 남녀의 아픈 작별과 현실과의 타협의 정경들이 낯설지 않았다. 사실 우리 모두의 생의 도식과 많이 닮아 있는 모습이다. 꼭 관계가 아니어도 결국 우리는 이상을 버리고 현실의 어느 적당한 지점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버텨내다 그렇게 늙어가며 이렇게 때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순간 우리 모두가 끝내 아프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추억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려 하지만 결국 어떤 형태로든 상처와 추억을 남기게 된다는 점에서 그건 하나의 허욕이다. 그럼에도 그 지점을 응시하고 아파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윤리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