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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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부터 19일까지 조금씩 읽었다. 되도록 천천히 제대로 음미하며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이야기 속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스물셋의 건축학도 사카니시 도오루처럼 이십대여도 그의 스승격인 노건축가 무라이 슌스케 같은 노년이어도, 아니 이 모든 현재진행형 이야기가 사실은 과거의 회상이었다는 반전 아닌 반전의 시점인 오십대인 중년이어도 다 같이 공감하고 느끼고 배울 것이 있는 진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눈부신 청춘의 매력과 그것의 의미를 가까스로 짚어가게 되는 중년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노년의 광활한 시계가 눈부시게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어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인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이 아름다운 건축 사무소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영역들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언뜻 덧없어보이지만 그 현장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의 저마다의 삶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엿보는 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끝내는 것에 대한 것이다. 화자는 "황당할 정도로" 젊지만 그 손끝을 만들어 낸 노련한 선생의 삶의 완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다. 표고 1,000m가 넘는 고요한 숲 속, 설계 사무소의 아침을 깨우는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소리, 커피를 내리는 냄새 등에 대한 묘사의 생생함은 모든 감각을 일시에 깨우며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마저 이 설계 사무소가 이미 칠십 대 중반에 접어든 건축가 무라이를 중심으로 참가하게 된 국립도서관 설계 경연에 어떻게 사력을 다해, 진심을 쏟아붓는지,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에 대해 가슴을 두근거리며 엿보는 심경이 되는 것이다. 중간중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아스플룬드 같은 불멸이 된 건축가들의 일화들은 곁가지 같으면서도 이야기의 핵심적 주제인 인간과 건축의 접점이 어떻게 조율되고 진화하고 마침내 퇴장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예증이 되어주어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간이 잠시 기거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그 정성과 진심이 인간과 인간의 삶과 주고받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생과 사와 시간과 그것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흔적들이 가지는 의미에 가만히 다가간다.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는다."

이 하나의 문장은 모든 덧없는 것들, 스러진 것들, 끝내 이기지 못한 것들에 대한 충실한 진혼이 될 것이다. 문득 내 삶이 너무 덧없다 느껴질 때, 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고 이 모든 헛됨이 나를 진력나게 할 때, 이 청년이 지켜보고 증언한 한 평범하지만 어떤 숭고한 결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노년의 시가 공명할 것 같다. 더불어 번역의 힘은 우리 말의 그 건축과도 닮은 정치한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매해 돌아오는 여름이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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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김희영의 번역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6권 이후로 소식이 없어 아쉽다. 번역 속도에 맞추어 읽는 재미가 있었는데 출간 간격이 길어지다 보니 앞선 내용과 인물 구도를 이제 거의 다 잊어버려 이런 식으로 읽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다른 출판사 것으로 읽을까 싶다가도 그마저도 그렇게 되지 않고...프루스트의 묘사는 때로 장황해져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어찌나 예리한지 인간 내면 심리를 거의 해부하다시피 하여 개인적으로 처리하지 못한 모호한 감정을 프루스트를 통해 짐작하게까지 한다. 그 때 그 감정은 질투였구나, 그건 좌절된 욕망이었어, 이런 것 같은. 질투, 욕망, 비교, 온갖 속물적인 감각은 다 주저하지 않고 프루스트 그만의 언어로 잡아끌어 펼쳐 놓는다. 그 그물망은 너무 촘촘하고 넓어 벗어나기 힘들다. 그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철저한 관찰자다. 탐사가다. 















반면 편혜영 작가는 서사에 대한 감각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는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힘이 있고 이건 작가로서 분명 큰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묘사하고 형상화하는 것도 분명 작가가 가져야 할 재능의 일부이지만 역시 이야기 자체를 만드는 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 더불어  작가의 측면 사진이 참 좋다. 















나는 관찰력도 묘사력도 별로라 이런 작가의 책을 읽으면 거의 경이롭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물에 대한 촘촘한 묘사가 사진이나 동영상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까지 시각적 이미지 재생에 기여한다. 이게 과연 후천적 노력으로 가능할까? 소설 중간 중간 나오는 건축가 중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 도서관에서 그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니 어린이 대상으로 한 그림책이 있어 빌려왔다. 오히려 그의 삶을 한눈에 조망하기 좋았다. 개인적 삶에 대한 논란이 많은 예술가다. 예술적 성취와 삶의 도덕성이 어우러지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건축가 관련 이야기다 보니 평소에는 생각 없이 지나쳤던 건물의 외관이나 내벽을 살펴보게 되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이걸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까? 자문하고 고개를 흔들곤 한다. 반이나마 왔는데 아까워서 천천히 읽는다. 번역도 놀랍다. 어휘가 풍부하고 적확하고 생생하다.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면 그것을 통해 태어나는 작업도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가 되는 것 같다.
















서머싯 몸은 뭐랄까 분명 개인적으로 알았다면 존경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캐릭터인데 자꾸 끌리는 유형이라고 할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때로 자학하면서도 자랑질을 이렇게 세련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인간의 절망적인 속물성을 서머싯 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작가가 있을까? 삶도 죽음도 결국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보다 더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도 끊임없이 열등감과 한계를 느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도 약했고 체구도 작았고 문장을 세련되게 잘 쓰는 능력에도 부족함을 의식했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조차 절묘하게 합리화하는 그의 문장을 <서밍 업>을 통해 즐길 수 있다. 아직 초반 정도에 와서 글쓰기에 관련된 세계관 이야기도 좋지만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도 더 듣고 싶다. 작가 지망생이 읽어도 좋을 듯한 조언이 많다. 











언어는 어떨 때 보면 전부인 것도 같고 지극히 사소한 일인 것도 같다. 그 사이로 난 길을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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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7-13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찰력도 묘사력도 별로라시니 블랑카님 너무 겸손하세요.
저는 블랑카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근처라도 갔으면 좋겠는걸요~~~.^^;
늘 멋진 글 잘 읽고 있어요~~.^^

blanca 2018-07-14 02:19   좋아요 0 | URL
아이, 이런 칭찬은... 정말 좋네요. ㅋㅋ 고마워요. 뜨거운 여름 라로님 덕분에 힘이 나네요. 잘 지내시죠?

수이 2018-07-13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절절해요. 그래도 흐느적거리면서 계속 걷는 게 좋아요.

blanca 2018-07-14 02: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을 읽을수록 나이가 들수록 뭔가 더 알고 성장해 간다는 느낌보다는 더 오리무중인 것 같아 혼란스러워요. 나이가 들면 더 어렵고 고쳐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건가,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stella.K 2018-07-13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스트 많이 달라졌네요.
글자 좀 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편혜영 저렇게 사진 밖아 놓으니 무슨 프랑스 작가 같습니다.ㅋ

저도 프루스트에 도전해 보려고 하는데 여간해서 짬이 안 나네요.ㅠ

서머싯 몸은 저도 좋아하는 작간데 서밍 업이 번역됐군요. 좋아라!
근데 언제 읽을지 모르겠습니다.ㅠㅠ

blanca 2018-07-14 02:23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저도 잔 글씨는 정말 괴로워요. 오죽하면 아무리 좋아하는 책이라도 딱 펼쳤을 때 글자 작고 자간 좁으면 그 책 자체가 싫어진다니까요. 노안이 왔나 싶었더니 아직은 아닌데 전조일 수도 있다고 해요. 참, 악스트 글씨와 자간은 이제 보기 좋을 정도로 개선되었답니다. ^^ <서밍 업> 작가 지망생이나 글쓰는 일 하시는 분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초반 정도 왔는데 천하의 서머싯 몸도 작가로서 자기 한계를 많이 느꼈다는 점이 참 생소하네요.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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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공감받고 이해받고 싶었다. 내가 경험하는 사랑과 내가 감동받은 모든 것들의 파장 안에 친구들이 있었다. 이십대의 우정을 떠올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 그런 적이 있었어,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게도 된다. 반대급부로 오해나  몰이해, 어긋남이 주는 고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누린 만큼 상실은 아팠다. 그 찬란하던 , 때로 처절하던 시절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눈물, 웃음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이렇게 떡하니 중년의 아줌마만 남아 있는 걸까. 나는 아직도 나의 늙음과 화해하지 못한다. 해사한, 투명한, 때로 아팠던 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거기에 고여 있다. 다시 스무 살의 그 철없던 때로 돌아갈 것 같고, 얼척없던 '나'는 언젠가는 꼭 돌아오고야 말 것만 같다. 그 때의 시간들은 질감도 양감도 지금과는 달라 더 진하고 더 무겁고 더 절절해서 스스로를 지워버릴 방도가 없으니까.


 최은영의 소설들을 읽으며 그 때의 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하고 청승맞아지기도 했다. 생생하고 결이 곱고 예쁘지만 허하지 않은 그녀의 이십대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내려와 앉을 때마다 놀라기도 했다. 아, 언어란 정말 놀랍구나. 내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기억들, 말로 옮기지 못한 정서들을 그녀의 예리한 시선과 묘사는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일곱 편의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한결 같이 청춘이다. 그 지나치게 열중했던 관계들이 시간과 함께 풍화되어 가는 과정은 저마다의 상실로 내면화되지만 현재의 삶 속에 가라앉아 어떻게든 그들의 인생에 기여했으므로 헛되지 않다.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로 시작하는 <그 여름>에는 찬란한 슬픔이 어려 있는 러브 스토리가 있다. 사회적으로 통상적으로 쉽게 용인받지 못하는 형태라 해서 그 사랑의 성실성과 아름다움까지 의심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민하고 어려운 소재를 성장기와 접목시킨 작가의 문장이 참 예뻐서 코끝이 시렸다. 


 나란한 옆집 친구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아들을 중심으로 한 그 세대, 그 시대의 가부장적 사고는 이 두 친구의 접점이기도 하고 반목지점이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음침한 폭력, 그 폭력의 방조, 우리 모두는 그 시대의 부산물이자 방조자의 시선을 품고 출발하므로 페미니즘은 언제나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아가야 할 지점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601,602>


<모래로 지은 집>은 최은영이 자주 취하는 세 친구의 구도 속에 우정의 균형이 흔들리고 남녀 간의 애정이 끼어들 때 필연적로 가지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갈등과 상처의 침투를 잔잔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 기대어 완전한 이해와 소통과 공감을 얻어낸다는 것은 언제나 얼마쯤 부족하고 어긋날 수밖에 없는 바람이다. 이제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PC통신을 통해 별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그 이미지와 기대 안에서 어긋나는 현실의 모습에 순간순간 아연해지는 청춘들의 모습이 아프도록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아치디에서>가 참 좋았다. 화자는 특이하게도 외국인이다. 브라질 청년 랄도. 떠나간 사랑을 찾아 온 아일랜드에 예기치 않게 잔류하게 되며 사과농장에서 만나게 된 한국에서 온 하민과의 애틋한 시간들, 계속 할 수 없는 관계에서 의연한 척 돌아서지만 끝내는 울어버리고 마는 두 남녀의 아픈 작별과 현실과의 타협의 정경들이 낯설지 않았다. 사실 우리 모두의 생의 도식과 많이 닮아 있는 모습이다. 꼭 관계가 아니어도 결국 우리는 이상을 버리고 현실의 어느 적당한 지점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버텨내다 그렇게 늙어가며 이렇게 때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순간 우리 모두가 끝내 아프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추억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려 하지만 결국 어떤 형태로든 상처와 추억을 남기게 된다는 점에서 그건 하나의 허욕이다. 그럼에도 그 지점을 응시하고 아파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윤리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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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7-0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블랑카님은 이 책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었어요???
저는 읽고 싶어서 군침만 흘리고 있었는데~~~.^^;;;

blanca 2018-07-07 01:47   좋아요 0 | URL
배송비가 책값보다 더 들었다는 게 함정이지요.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마지막 회를 못 보고 있다. 이제 이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52부작의 크롤리 백작가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드라마는 허구지만 드라마 안의 캐릭터들 각각의 삶의 경로에서 벌어지는 만남, 이별, 상실, 죽음, 해체는 현실보다 더 사실적이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은 당연한데 새삼스럽다.



큰딸을 칭찬해야 할지 나무라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성경 외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때 마치 나에게 내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책을 다시 집어 들도록 만든 게 바로 큰딸이기 때문이다.

-클라이브 제임스 <죽음을 이기는 독서> 중




















이 책의 목차 앞에는 "내일은 내가 죽을 차례다."라는 문장이 나와 있다. 저자 클라이브 제임스는 실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추상명제가 아니라 실제 자신에게 일어날 종결 앞에서 책을 읽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누구나 마음으로는 자신의 불멸을 믿는다지만 클라이브 제임스는 프로이트의 그런 단정에 저항하고 있다. 그는 강박적은 아니지만 독자가 잊을 만하면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그가 읽는 헤밍웨는, 필립 라킨은, 콘래드는 농밀하고 간절하고 급박하고 유의미하다. 유한 앞에서 읽는 일은 언뜻 무의미고 사치스워 보이지만 "가장 어른스러운 일, 즉 사라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워진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아이 같은 충동까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이야기는 유한 안에서 무한을 갈망하는 인간 존재의 내재적 모순이 어리석어 보이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생 그 자체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책을 읽는 일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읽는 일을 계속하는 이야기는 묘한 위안을 준다. 아직 읽을 책이 있고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는 것이고 내일을 기약할 책을 사들이는 일은 나에게 아직은 영원을 꿈꾸는 게 가능하다는 암시다. 헛되고 헛된 일을 하는 게 사는 일이니 읽는 일은 그것과 더불어 헛되지만 괜찮은 일이니. 이러다가 <다운튼 애비>의 마지막 회는 영원히 보지 못할지 모르겠다. 끝나는 건 내가 끝나기 전에는 도통 적응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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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나이팅게일은 오십 대의 피아노 강사다. 그녀에게는 결국 배신당했지만 행복했던 추억을 남긴 사랑과 초콜라띠에였던 아버지의 따뜻한 부정의 기억이 남아 있다. 게다가 '그 학생'이 금요일만 되면 나타나 미스 나이팅게일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 소년은 남달랐다. 가르칠 것이 거의 없었다. 교습을 한다기보다는 어느새 그 아이의 연주를 들으며 감동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 아이를 만나는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제대로 된 학생을 만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마지막 작품들. <The Piano teacher's Pupil>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에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특별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힘의 결 사이에는 내밀한 삶의 깨달음이 숨겨져 있다. 읽는 이는 그것을 꺼내어 자신의 이야기에 슬몃 끼워 넣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읽는 자마다 저마다의 것으로 변주되어 해석된다. 그는 쓰는 일을 그렇게 사는 일과 한데 통합해 버렸다. 미스 나이팅게일의 신동 제자가 올 때마다 그녀 집의 소소한 물건들이 사라지는 이야기도 그렇다. 윌리엄 트레버는 그러한 삶의 불합리함과 모순이 언제나 포복해 있다 무언가 완전해질 것 같다는 환상의 순간을 파괴해버린다는 것을 기막히게 포착했다. 어쩐지 너무 완벽하거나 지나치게 너그럽거나 완전한 사랑일 것 같은 순간, 기막히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반전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되는 순간을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반전은 허구보다 실제에서 더 빈번한 것도 같다.


미스 나이팅게일은 그 아이를 완전히 용서해버린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우리에게 무수히 일어나는 그 휘어지고 어긋난 이야기들의 거친 모서리를 응시할 뿐이다. 그녀의 인내와 그녀의 용인은 후에 보상을 받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의아해 할 때 시간은 불완전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랬던 거야.
















조금쯤 둔감해도 괜찮다. 필립 로스가 <죽어가는 짐승>에서 노년에서 둔감함이 관례라고 했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아이는 떠났다 청년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다시 피아노를 연주한다. 미스 나이팅게일은 비로소 무언가를 이해하게 된다. 구체적이지는 않다. 윌리엄 트레버는 죽음을 앞두고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나 보다. 결국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들에 대하여. 그러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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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6-2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님의 글 읽으면서 몇 번 밑줄 그으려고;;;; ㅎㅎㅎㅎ

blanca 2018-06-20 02:06   좋아요 0 | URL
우아,라로님. 아이들 방학하고 정신 없어요. 햇살은 어찌나 뜨거운지. 지금 우버 기사가 된 느낌입니다. 해든이도 어떻게 지내는지요. 지난번에는 정말 만남이 너무 짧아 이야기를 시작도 못한 느낌이지만 먼 길 오셔서 그렇게 뵐 수 있다는 게 참 특별한 행복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