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옆 협탁을 정리하다 우연히 에메랄드색 예전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노트는 기대보다 작아 몇 달을 쓰다 그만 둔 채 뒷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일상의 짧은 단상이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낯설어 놀라웠다.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였다니... 무언가를 끄적거린다는 게 그리 쉽게 폄하될 일은 아닌 듯싶다. 그마저도 없다면 과거는 형체 없이 가뭇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말 그대로 주인공 알렉세이 아르세니예프가 스무 살까지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서술하는 형태의 인생의 압축이다. 묘사의 밀도가 어찌나 촘촘한지 간만에 문장이 그려내는 풍경 안에 직접 초대 받은 느낌이 황홀했다. 작가 이반 부닌이 볼셰비키 혁명에 반하여 망명한 프랑스에서 집필한 이 장편 소설에는 많은 부분 작가 본인의 인생의 경로가 투영되어 있어 쉽게 장르를 규정짓기 어려보인다. 이반 부닌은 러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니 생각보다 우리나라에 덜 알려져 있는 셈이다. 


나는 또 아름다운 달밤을 기억한다. 달 아래 남쪽 지평선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부드럽고 밝았으며, 드높은 창공에는 보기 드문 감청색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형들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이며, 언젠가 우리도 그 세계로 가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이런 밤이면 아버지는 집이 아닌 창 밑의 짐마차나 마당에서 잠을 잤다. 짐마차 위에 건초가 깔리고, 건초 위에 이부자리가 깔렸다. 아버지는 유리창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따스하게 잠을 이룰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이 들면서 밤새 달빛과 시골 밤과 낯익은 주변 들판과 저택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대목을 발견하면 나도 어느새 그 아름다운 달밤에 짐마차 위에서 쏟아질 것 같은 감청색 별들을 올려다 보다 까무룩 잠이 드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인식'이 깨어나는 그 순간부터 충실히 복원해 낸 중부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가문 태생의 소년의 성장기는 그의 눈으로 관찰한 모든 것들의 장막을 뚫고 들어간 예리한 펜이 그려내는 하나의 그림, 움직이는 나날 그 자체다. 두서없이 얘기하는 것 같은 그의 삶에 일어나는 눈부신 모험, 환희, 실망, 사랑, 상실 들의 틈새마다 읽는 이들 나름대로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단서들이 흩뿌려져 있다. 지나고 나 미처 언어로 형상화하거나 기억의 창고에 저장해 놓지 못한 수많은 공감의 순간들이 작가의 고백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은 놀라운 것이다. 


나는 사람의 모든 일 가운데 '글쓰기'라고 불리는 가장 이상한 일을 위해 뭔가를 기대하고 생각해내는 생활이 아니라 예정된 일과 걱정거리로 가득찬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오래전부터 부러워했다.

천부적인 시인이었던 작가의 내심이 투영되어 있는 고백 같다. 전심을 다한 관찰을 통해 그것을 언어로 하나하나 옮겨 보려는 처절한 시도는 때로 화자를 지치게 한다. 재능은 때로 천형이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 관찰의 대상이 되는 그들 삶의 일상성에 부러움을 표시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작가가 가져야 하는 태도와 책임에 대하여 각성시키는 부분이다. "써야만 한다!"는 강박은 그가 러시아 민중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들로 끊임없이 돌아오게 한다. 몰락한 집안, 실패한 사랑의 개인적인 삶과 그가 응시하는 조국 러시아의 모습을 끊임없이 왕복하는 이야기는 지루할 새가 없다. 


작가는 이따금씩 이미 늙어버려 조국을 떠난 자신의 현재를 상기시킨다. 그러고 보면 독자는 이 젊은이의 이야기가 노작가 자신의 고백인 건가 싶은 혼란스러움으로 어리둥절하게 된다. 진실은 어디까지인가,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은 감각의 향연들이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재의 언어와 만날 때 비로소 듣게 되는 삶의 지도는 그 누구의 것이든 뭉클하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들을 다시 사는 듯한 환각이 결국 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거리의 탐지 속에서 아득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까운 이야기. 이반 부닌의 이야기를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짧게라도 매일의 단상과 인상을 챙겨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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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 모르는 영역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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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단편집은 그 작가를, 작품을 좋아해야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의 지문만 남긴 채 작품이 사그라지면 때로 읽기를 멈춘다. 그래도 계속 이 작가를, 이 작가의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질문이 시작되면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좋아하는 작가들, 모르는 작가들, 썩 내키지 않는 작가들이 한데 모인 단편집은 읽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어조도 내러티브의 성문도 달라 각각의 풍경의 초입이 서걱거리지만 그곳만 통과하면 새로운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적응이란 요원하고 새로운 이야기마다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한다.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실망할 각오와 새로운 발견에 놀랄 태세를 갖춰야 한다.


대상작인 권여선 작가의 <모르는 영역>은 어긋나는 부녀의 현실적인 조우가 편안하다. 딸과 아버지를 매개했을 어머니의 부재는 의외로 딸과 아버지의 본격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는 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모와 장성한 자식의 소통의 빈 틈은 구체적이고 진부하지 않다. 섣불리 화해하는 갑작스런 소통의 지점 대신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절제가 좋았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개인적으로 오히려 대상작보다  자선작인 <전갱이의 맛>이 더 좋았다. 전남편이 성대낭종 수술을 받은 후 함께 전갱이 구이를 먹으며 나누는 '말'이 발화자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무심코 내뱉는 그 수많은 '말'들이 결국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그의 고백으로 이어질 때 수긍이 갔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생의 비의를 찾아내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김미월의 <연말특집>은 우연한 기회에 소식을 듣게 된, 대학 시절 한동안 룸메이트였던 엉뚱한 아웃사이더였던 선배 언니를 회고하는 이야기다.  그녀가 집단에서 소외되고 버려지는 데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게 된 화자의 복합적인 심경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풍경의 당사자가 되거나 방조자가 된 경험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죄책감과 거리낌을 느끼지만 결국 화자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암시가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포기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나아갈 길을 찾는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새로운 삶은 급작스러웠지만, 급작스럽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았다."는 놀라운 통찰이 담긴 문장을 안긴 이야기는 김봉곤의 <컬리지 포크>였다.  문장이 진부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리듬의 탄력이 놀라워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근래에 발견한 가장 신선하고 귀여운 이야기였다. 내용이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무겁거나 지리멸렬하게 만들어버리지 않는 능력이 놀라웠다. 


최옥정의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는 죽음을 앞둔 화자의 심리 묘사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어 몇 번이고 멈추어야 했다. 본인이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쓸 수 없지 않을까 싶은 문장들에 작가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덧붙인 이야기에 그래서 그렇게 묘사할 수 있었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몸 안에 가두어진 우리의 한계에 대한 자인은 슬프도록 절절하다.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구나, 이토록 죽음 앞에서 그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까지 꾹꾹 눌러 쓸 수 있는 것이구나, 싶어 더더욱 숙연해졌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만남, 시인 백석의 분단 이후 북한에서의 삶을 그린 김연수의 <그 밤과 마음>은 한 편의 단편보다는 중편이나 장편으로  더 나아가야 할 것 같은 아쉬운 지점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하루가 그가 북한에서 보낸 중년 이후의 삶 전체를 압축하기에 너무 짧아 보였다. 


최은영의 <아치디에서>는 그의 단편집에서 이미 만났던 작품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역시 또 좋았다. 완성되지 못하는 사랑이 남기는 여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기는 각자의 생에 찍히는 화인이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햇볕 아래에서도 읽고 어두운 밤 속에서도 읽어낸 이야기들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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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1-08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계속 내리네요.
비 때문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바람이 차갑습니다.
blanca님, 따뜻하고 좋은 오후 보내세요.^^

blanca 2018-11-09 03: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요.^^
 
[eBook] 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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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길을 걷는데 뜬금없이 어딘가에서 탄내가 났다. 화재를 감지하게 하는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낙엽 태우는 냄새 같이 군고구마를 굽는 향기처럼 따스하고 그리운 느낌이 나는 냄새에 순간 멈칫했다. 설명하기 힘든 느낌의 정체를 더듬어 보니 분명 어렸을 때 추운 겨울이 오면 으레 거리에서 맡아지던 냄새였구나 싶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그 냄새에 갑자기 내 기억이 찻잔의 꽃잎처럼 펼쳐지며 돌아오진 않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를 재촉하게 되었다. '걸어본다' 시리즈 중 네번째. 시인이 공부를 위해 우연히 찾아와 이십 년 넘게 살게 된 독일의 도시. 그녀의 시선은 미처 거기에서 태어나 산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않은 거리두기의 지점에 가 닿아 있고 이곳은 그 도시를 들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너무 다가가서는 곤란한 일이다. 한 발짝 떨어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 고인이 된 시인이  살고 있던 독일의 뮌스터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의 초입에는 그녀가 직접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가 의외의 덤이다. 거리의 풍경은 독일 전후의 역사, 시인 자신의 삶, 인용한 시인의 생애와 어우러져 한 편, 한 편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어색해하며 반가워하며 잡는다. 


모든 살아온 장소들이 어쩌면 지나간 꿈이거나 다가올 꿈인지도 몰랐다. 라일락 향기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염없이 빛났다. 저 별에도 우리는 갈 수 없으리.


이제는 전쟁으로 갈 수 없게 된 시리아에서 함께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굴했던 스승이 은퇴 후에 사들인 자그마한 집에서 묵게 된 시인이 밤에 라일락 향기를 잡으려다 못 잡고 내뱉은 탄식은 그녀 자신의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시처럼 빛난다. 그녀가 끝내 경유지로 여겼을지 모를 장소에 몸을 누이고 남은 이야기. "세계의 노예가 될 수 없어서 나는 내 자의로 이방인의 위치를 만들었다."는 그녀의 고백은 왠지 좀 근사하다. 고독할 때 시를 베낀다는 그녀의 스승처럼 제자는 자신의 고독을 지워지지 않을 시로 승화시켰다. 


언젠가는 그녀가 걸었던, 온갖 전쟁의 상흔과 학문의 열정과 시대와 결별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만의 거리를 두며 자기 갈 길을 가는 그 꼿꼿한 성정이 한데 다 뒤섞여 한 겹씩 벗겨내어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그곳에, 뮌스터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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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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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긍정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훼손하고 폄하하고 사람이 타인의 삶을 유린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종국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복합적이고 그의 생은 읽기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문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어제는 고귀한 일을 행했던 오른손으로 오늘은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비겁한 행동을 하는 왼손을 숨기는 인간의 치사한 면으로 인간 전체를 매도하거나 역사 전체를 악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고 반문합니다. 아주 많이 늙어 깊이 성숙하여도 나는 똑 떨어지는 답을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답들을 더듬어 봅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잊혀진 잃어버린 목소리를 각자의 시선에서 복원해 낸다. 비단 열여섯 살 소년 동호 한 명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뜻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 청년들의 그 날의 경험, 그 일이 남긴 상흔이 그들의 이후의 삶에 어떻게 드리워졌는지에 대한 천착은 실제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귓전에서 듣게 하는 착각을 낳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처절하다. 작가가  그들을 '너', 혹은 '그녀'로 거리두기를 하며 객관화와 중립의 거리두기를 하려 했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완강히 버티는 그 믿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사실들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킨다. 모두가 대단한 명분이나 현학적 가치를 지향하여 온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들은 선의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함부로 도륙된 같은 인간들의 몸을 수습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어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부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절규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의 욕구와 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여름을 견딘 자들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유린하고 파괴하려 했음에도 끝까지 남는 건 무얼까? 이 질문은 내도록 읽는 일을 힘들게 했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을 아직 꾸지 못한 꿈, 만나지 못한 사람,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파괴한 저들도 과연 여전히 인간일 걸까? 그들을 이미 만나버리고 살아남은 남은 자들은 대체 그 절망을 어떻게 수습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잊혀졌다 다시 돌아왔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운다." 이야기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거대한 악의 현장은 빈곤한 명분과 허접한 논리들로 뒤덮이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고 그것이 짓밟아버린 선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여전히 멀다. 


"우리는 고귀해" 노동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소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끌고 지나간다. 아무리 파괴하고 앗아가려 해도 결국 절대 함부로 갈취할 수 없는 그것의 고결한 핵에는 깨끗하고 절대 오염되지 않는 성역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든 짓밟으려는 거대한 악의 빈곤한 행사에 도취된 저들도 역시 같은 인간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순이다. 한강은 그것을 머리로 해석할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진혼제를 정성껏 지낸다. 소년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역사를 망각하고 그 실수와 그 상처와 그 훼손을 묻어버리고 정치와 권력행사를 혼동하고 공권력의 남용에 무감각해져 무고한 생명과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다. 자신의 욕망과 무지와 폭력이 만날 때 빚어질 비극은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위협한다.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 있다. 흩어진 비극적 사실들의 파편을 수습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증언한다는 것은 그래서 엄중한 무게를 가진다. 경청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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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넘으면 또 산이다."

친정 엄마 얘기가 귓가에 맴돈다. 솔직히 수긍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힘들게 산을 탔는데 또 넘어야 할 산이 내 앞에 나온다면, 게다가 그게 삶의 은유라면 생각만 해도 지친다. 그런데 정말이지 요즘은 엄마의 얘기가 당신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높이와 굴곡은 저마다 또 시간마다 다르지만 결국 숙제는 어렵고 어떻게든 마쳐서 제출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아무리 열과 성을 다 해도 결국 일의 완성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작용한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운명론적 체념이 나날이 한뼘씩은 늘어간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주명리학으로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한치의 오차없이 읽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주명리학이 점이나 미신, 헛소리로 폄하될 것도 아니다. 음과 양의 기본 개념에서 출발한 간지의 순환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살이를 풀이하는 일은 내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리듬에 내 시선과 자세를 맞추는 일이다. 일확천금이나 운수대통의 지점을 적시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일들이 결국 지나갈 것이며 그 지나간 자리에 앎이 남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가 사주명리학을 비교적 쉽게 설명한 입문서라고 하는데 정작 학문적 접근은 쉽지 않았다. 만세력을 보고 나의 출생연월일시를 넣어봤지만 대충이라도 읽어낼 수 없었다. 사주에 불이 많구나, 이 정도. 사주명리학 그 자체보다는 삶의 본질적 흐름과 외부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자본주의적 가치와 이분법적 잣대를 분리하여 나의 운명 그 자체를, '나'라는 인간 그 자체를 어떻게 포용하고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철학적 인문학적 시선이 와닿았다. 


특히 무기징역을 받고 추운 독방에 내몰린 신영복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 죽었어요."라고 이야기한 대목의 인용은 뭉클했다. 단지 두 시간, 그것도 고작해야 무릎크기의 햇빛을 기다리며 그래도 태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외부적 사건,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마음 속에 바로 파고드는 이야기.


나의 운명과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들의 삶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혹은 해석하거나 인과 관계로 정렬해 보려는 오만은 버려야겠다. 내가 이 땅에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데 내가 또 언제, 어떤 식으로 갈지 짐작할 수 없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견딜 수 있다. 견디고 버티면 어떻게든 시간이 가겠지.


















"엄마, 조보다 더 큰 수는 뭐야?"

요새 꼬맹이의 최대 관심사는 무지 무지 큰 수다. 아마 나도 고맘때쯤 아빠한테 비슷한 질문을 했고 아버지의 대답은 

"무량대수니라."해서 "에잇, 거짓말"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로 찾아보니 무려 "무량대수"가 있었다. 제대로 앉아 찾아보니 이 큰 수의 용어가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다. 칼 세이건의 마지막 책은 이러한 이야기로 출발한다. 정말 큰 수. 무지 무지 무지 큰 수. 칼 세이건이 사람들에게 "billions and billions"로 불렸던 건 아무래도 그가 우주의 역사와 그 언어로 충분히 묘사하기 힘든 광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언뜻 스치며 이야기한 단위가 부풀려진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의 생전 마지막 이야기를 이 큰 숫자들로 시작한다. 아이한테 큰 수를 설명하기에는 10의 지수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보너스로 알게 되었다. 숫자에도 과학에도 직관적인 이해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칼 세이건의 이야기의 태반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우주의 역사와 광대함을 듣는 것만으로 나날의 범속한 일들, 치사함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위안이 된다. 더 고차원적이고 거시적인 지대로 발을 딛는 것만으로 조금은 덜 작아진다. 착시일지라도.


사주팔자도 우주의 비의도 구체적인 일상의 지엽적 문제들의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 이 자리에 발을 딛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설명하기 힘든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 준다. 그래서 읽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도 앞으로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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