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지금 몇 살인가?"

"스물다섯입니다."

-헤밍웨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 


프랑스 파리의 까페 돔에서 노화가 파생이 헤밍웨이에게 나이를 묻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이렇게 나이를 노골적으로 물을 수 있는 건 당시 헤밍웨이의 나이가 이십 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 대인 나에게 나이를 정면으로 묻는 사람은 이제 없는 걸 보니까 그렇다. 저 질문에 답변을 "마흔입니다."라고 한다면 상대가 좀 당황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언가 조언을 하기도 아는 체를 하기에도 목전에 사십 대는 좀 겸연쩍다.


오늘 케잌의 초를 몇 개 준비해야 하냐고 묻는 점원에게 여동생이 나를 쳐다봤다. 

그냥 큰 걸로 네 개. 이러는데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 거지? 나이듦은 부끄러움이 아닌데 요즘 들어 내 나이를 얘기할 때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래도 누군가 

"자네 오늘 나이가 몇 살인가?" 한다면

"음. 오늘부로 마흔 둘이군요. "라고 자신감 있게 외쳐야지. 아, 한국 나이는 마흔셋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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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9-04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이군요. 축하해요.
이제 한국 나이 쓰지말고 만나이 쓰자는 말도 있던데,
얼마 전 한 지인의 장례식 조문에 동행한 분이 저의 언니와
띠도 같고 동갑이라는 걸 알았는데 하나를 빼더군요.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무의식 중에 그런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그 앞에서 알은 체를 못하겠더라구요.
괜히 언니와 동갑이라고 했다 제 나이까지 폭로가 될 것 같아서....
나이 30 중반을 넘으면 이상하게 나이 얘기하는 게 편치가 않더라구요.
자다가 깨서 내 나이가 몇이지 하면 놀라고.
누구에겐 아직 한창인 나이로 비칠 수도 있을텐데 말예요.
아참, 듣자하니 WHO에서 나이의 정의를 새로 냈다는군요.
65세 이전은 아직 청년이고, 85세 이전이 중년이고. 86세나 넘어가야 노년이라고.
그렇다면 저나 브랑카님이나 아직 청년이어요.ㅋㅋ

blanca 2019-09-04 20:3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감사합니다. ㅋㅋ 만 나이 주장하게 되는 시점부터가 나이 든다는 증거 같아요. 65세 이전이 청년이라니 너무 듣기 좋네요.

페넬로페 2019-09-04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해요!!
나이 마흔 둘!!
진짜 빈말이 아니고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인 듯 해요~~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하구요**

blanca 2019-09-04 20:32   좋아요 0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는 말이 저를 설레게 하네요.

카스피 2019-09-04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생일 축하 드려요*^^*

blanca 2019-09-04 20:32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기분 좋은 생일날입니다.

hnine 2019-09-04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려요.
스물 다섯은 너무 막연하고, 저보고 나이를 맘대로 정하라면 blanca님 나이 정도로 하고 싶어요.

blanca 2019-09-04 20:32   좋아요 0 | URL
어, 저랑 동갑 아니셨어요? ^^;; 감사합니다.

2019-09-04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19-09-05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생일 축하드려요!!!

blanca 2019-09-05 10:38   좋아요 0 | URL
^^ 축하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카알벨루치 2019-09-05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초는 나이수로 하지 마시고 그냥 하나만 꽂으면 어때요? 전 그러는데 ㅋ

blanca 2019-09-06 11:42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 좋은 의견입니다. 저도 앞으로 그럴래요. ^^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9-06 12:05   좋아요 1 | URL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미만 있음 되지 않을까요? ㅎㅎ

cyrus 2019-09-05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저랑 나이 차가 조금(아니면 많이?) 나네요... ㅎㅎㅎㅎㅎ

blanca 2019-09-06 11:42   좋아요 0 | URL
ㅋㅋ cyrus님 지금 자랑하는 거죠? 아주 쪼끔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감사해요.

목나무 2019-09-05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쪼매 늦었지만 생일축하드려요 ^^
여름과 가을의 모퉁이에서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

blanca 2019-09-06 11: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설해목님. 안 그래도 저희 엄마가 저 덕분에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서니데이 2019-09-05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저도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고 좋은 일들 가득한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blanca 2019-09-06 11:45   좋아요 1 | URL
축하 댓글 감사해요, 서니데이님.
 
죽음의 부정 - 복간본
어니스트 베커 지음, 노승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쑥쑥 크는 아이의 모습은 삶의 시계를 연상시킨다. 나는 늙고 아이는 큰다. 지금 나는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 이 현재는 머나먼 과거로 붙박힌다. 깊이 생각하다 보면 가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같은 순간이 있다. 정말 여기 지금을 의식하는 내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힌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견디고 능란하게 모든 일을 헤쳐나가는 것만 같은데 나는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느낌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죽음의 공포'를 직시하는 것이 삶의 부적응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저자 어니스트 베커는 실제 말기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 책은 그의 사후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 그는 죽음을 얘기하기에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도달한 셈이었다. 가차없는 분석은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괴롭고 더욱 불안했고 그럼에도 무언가 흐릿한 장막이 걷히는 느낌에 시원했다. 




인간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간다고 항상 의식한다면 도저히 일상을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어니스트 베커는 그 허울에 사회에서 제공하는 세속적 영웅주의의 상징적 행위 체계를 제시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사회적 성취,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한편 대의, 이상적 신념 체계, 심지어 종교에 빠지는 행위조차도 결국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얘기다. 



인간은 말 그대로 둘로 나뉘어 있다.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아 자연으로부터 돋보인다는 점에서 자신이 독보적임을 자각하면서도, 눈멀고 벙어리가 된 채 1미터 아래 땅속으로 돌아가 영영 썩어 사라진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딜레마다. 

p.69


이러한 딜레마를 말끔하게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는 프로이트가 역설한 모든 인간 행동의 말썽의 원인이 성적 충동에서 비롯되었다는 명제가 지극히 편협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간과한 분석이다. 그의 정신의학적 분석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경의는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성적 본능으로 환원시키는 단편적인 시선에는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어니스트 베커는 프로이트를 시종일관 개관하면서도 그의 이론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프로이트를 넘어서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심리학과 종교를 결합한 키에르케고르가 있다.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에 인간 존재의 차원에서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는 결국 더 시원적이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이상에 기대는 것으로밖에는 해결한 방법이 없다는 결론은 좀 모호하다. 


그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실존적 한계에 갇힌 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소멸에 따른 허무감과 공포에 대한 절대적인 답을 삶 안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어니스트 베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대신 그의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과 혜안은 놀라운 차원의 깊이와 명철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두려워하며 정작 응시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감없이 추려내어 가차없이 논증한다. 이 책의 후반부가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들여 독자적 존재가 되고, 자기만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다듬고, 취향을 넓히고 벼리고, 삶의 실망거리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성숙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연 속의 고유한 피조물이 되고, 존엄과 고귀함을 갖춰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며, 더는 휘둘리지 않고 더는 완전한 반사작용에 머물지 않고, 어떠한 틀에서도 찍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앙드레 말로가 <인간적 조건>에서 말한 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60년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가며 그런 개인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그가 잘하는 것은 죽는 일 뿐인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역설은 당사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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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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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중적인 저서는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전공은 의외로 중세 전쟁사다. 이 책은 그의 박사 논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쓰기의 장점인 논리적이고 간명한 문체, 방대한 연구 자료의 철저한 고증에 기반한 체계적인 정리 집약은 이 저서를 그 누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쉽지 않은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분석, 설명하는 그의 능력이 경탄스럽다.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의 전사들의 회고록과 20세기 군인들의 회고록을 적절히 대조 비교 분석한 시도는 그 차이점을 통하여 시대를 따라 변전하는 인간들의 의식 자체를 명쾌하게 드러나게 하여 이해를 돕는다. 큰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요,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와 주제를 다룬 글임에도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몰입은 과연 유발 하라리가 가지는 학자로서의 깊이와 작가로서의 글쓰기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들, 오늘의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은 르네상스 시대 전사 귀족 계급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추정하는 여정이다. 그들에게 개체성과 자아는 중세의 암흑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의도적으로 방기되었다. 전사로서의 정체성은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감과 맞바꿀 수 없었다.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그들은 전장의 전사로서 기능했고 무훈은 그들의 가치를 규정지었다. 가족의 상실, 평민 병사의 죽음, 우정, 사랑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직 전장에서 세운 무훈, 그리고 그 무훈이 가져올 명예, 명예가 가져올 역사에서의 불멸이 관심사였다. 전쟁은 곧 그들의 실체가 있는 삶 그 자체였다. 경험적 진실 대신 표면적 실체만 있을 뿐이었다. 승리한 전쟁, 전장에서 세운 공적은 곧 삶의 성취와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역사였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에서 시간은 검은 강물과 흡사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강의 수면은 기억할 만한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가르는 경계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둡고 깊은 강물 속을 떠다니며 평생을 보낸다. 그러다 회고록 저자들은 가끔 수면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어 역사라는 빛 속으로 나온다. 삶은 이 역사의 빛 속에서 일어난 일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p.299


그들에게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귀족 전사 계급들의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뿐이었다. 나머지 계급의 사람들의 삶은 기억할 만한, 기록할 정도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불멸의 이름을 남기는 일이자 최고의 명예였다. 그렇다면 그것에는 필연적으로 정치가 개입된 것이다. 가치 판단의 역학에 작용하는 힘이었다. 


역사적 현실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학문적인 질문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질문이며, 정치적인 의미가 잔뜩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현실 중 어떤 부분이 역사적인지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면, 특정한 부류의 사람, 사건, 의문 등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해지고, 여기서 새로운 권리, 권력, 역할이 파생된다. 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역사적 현실에서 밀려나면 정치의 세계에서도 밀려난다.

p.311


귀족들의 정치는 상당 부분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유발 하라리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그 이해는 현실의 정치를 관통한다. 명예와 권력과 폭력은 자의적으로 결합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힘을 행사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그렇게도 외치는 실체적 진실은 정작 사라진다. 그것의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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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2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언행에 대해서 정당화하려 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죠. 문제는 주관적이라는 데에 있죠.

blanca 2019-08-26 13:38   좋아요 0 | URL
사람들은 흔히 대부분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이는 극소수고요.
 

더 좋은 책, 더 사랑할 작가가 또 나타나니 살아볼 만한 일이다. 지금 읽는 책보다 더 근사한 책을 나이 들어서도 만날 수 있다는 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출간 순서는 이와 반대지만 사실 서사적 흐름은 <이 소년의 삶> 이후에 <올드 스쿨>로 봐야 한다. 작가 토바이어스 울프가 서부의 우라늄 채굴 광풍을 좇아 어머니와 플로리다에서 유타주로 이주하며 시작하는 이 소년의 삶은 계부들과의 불안정한 동거, 잦은 이동 등으로 끊임없이 유동한다. 의붓아버지 드와이트의 가족과 결합하게 되면서는 집에서 육십키로도 더 떨어진 '콘크리트 고등학교'에 다니며 본격적인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걷는다. 가슴에는 보이스카우트 배지를 달고 뒤로는 물건을 훔치고 기물을 파손하는 '소년의 삶'은 동명의 보이스카우트 교본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자전적 이야기는 그가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소년의 정체성을 스스로 발명하고 심지어 그것을 위장하는 도발 속에 숨어 있는 여리고 상처받은 사랑을 갈구하는 진짜 소년의 처절하리만치 아픈 모습을 엿보는 일이다. 소년은 대단히 위험해보인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건 소년의 진심을 믿어주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소수의 어른들 덕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녀님, 드러그스토어의 여주인, 친구의 아버지는 마냥 미워하고 불신하고 비난할 수 있는 이 소년을 포기하지 않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싱글맘이었던 소년의 어머니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소년을 최악의 모습으로 가정하거나 폄하하지 않았다. 소년은 불온한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상류 사회를 향한, 사립학교 소년들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었다. 마침내 그러한 삶을 위한 자신의 페르소나 또한 위장해내는 모습은 기함할 노릇이지만 결국 우리가 오늘날의 위대한 토바이어스 울프를 만나게 되는 직접적 계기이기도 하다. 


애송이일 때, 아직 반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꿈이 옳으며, 세상은 우리의 최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그리고 추락하고 죽는 건 겁쟁이들 몫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여태껏 태어난 모든 사람 중에서 오직 우리 자신만이, 영원히 애송이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특별히 받았다는 천진하고도 기괴한 확신신을 품고 산다.

-토바이어스 울프 <이 소년의 삶>


<올드 스쿨>에서는 이 소년이 드디어 바라마지 않던 동부의 사립학교에서의 소년의 삶이 펼쳐진다. 진창에서의 소년의 삶은 급격한 반전을 겪어 드디어 손끝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만의 리그로 도약한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삶의 변전은 놀라울 정도의 진폭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허무맹랑한 소년의 개과천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행하는 연극적 자아에 기반해 있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연극의 전개의 향방은 마침내 이 두 작품을 내어놓는 스케일로까지 확장되니 경이로울 정도다. 


소년의 꿈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다. 그 한계에 속박되지 않았다. 그의 비행의 결말은 비참한 자들의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박탈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달았기에 오히려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어른의 잔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그들의 눈빛으로 절감한다. 그 정도로까지 추락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 그가 나아갈 곳은 그가 걸어온 길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었다. 작가의 고백은 뼈아픈 성찰에 기반한 것이기에 더 울림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짓궂은 소년을 끝내 미워할 수 없게 된다. 그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묻어버리고 싶은 우리의 그 치기어린 청춘의 모습 또한 있어 더욱 그렇다. 맹목적인 믿음, 여기와 저기의 끝없는 간극,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회한.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던 그 모든 것들이 이 소년의 시선을 통해 가차없이 돌아와 우리 눈앞에 당도해 있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거기에 그렇게 천덕꾸러기 애송이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때로 그 애송이는 튀어나온다. 성장은 때로 착시인 것 같다. 우리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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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죽는 꿈을 꿨다. 정확히 말하면 죽기 직전 무언가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유언을 남기고 평화롭게 눈을 감으려는데 너무 무섭고 도망치고 싶어하다 깼다. 실제 죽음은 더 아프고 더 두렵고 그 불가항력적 힘에 대항도 못 하는 무기력함에 발버둥치겠지 싶어 일어나고서도 한동안 입맛이 썼다. 치기 어린 이십 대에는 늙고 또 늙어 생이 연장되는 게 별로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또 쉽지 않은 일인지 깨닫는 요즘이다. 어제 동네에 앰뷸런스가 왔다. 실제 딸아이 때문에 앰뷸런스를 탄 적이 있지만 언제 봐도 우울해진다. 필립 라킨의 이야기처럼 결론적으로 앰뷸런스가 지나가지 않는 길도 삶도 없다. 





















죽음에 대한 묘사가 가장 와닿았던 책은 의외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다. 많은 죽음이 나오지만 특히나 톨스토이 자신이 투영된 레빈의 형의 죽음의 과정에 대한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실적이다. 문장 틈새로 숨이 막히는 긴장, 고통, 허무, 절망의 냄새가 배어 나온다. 톨스토이는 생전에 모든 영광, 영화를 누린 작가이지만 말년에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특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학, 의학에서 거의 필독서가 되었다. 세상은 죽어가는 당사자를 이미 사물처럼 취급하며 자신들 만의 욕망과 생을 활발하게 이어나가는 데에서 그 비정한 생의 관성, 이기심이 드러난다. 내가 눈을 감아버리면 내 안의 세계는 막을 내리지만 내 바깥의 세상은 완강하게 버티고 일말의 타격도 없이 여전히 돌아갈 것이다. 아니, 때로는 그냥 이 세계라는 것이 '나'라는 허상과 함께 태어났다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상상도 해본다. 


오전에 로쟈님의 서재에서 본 이 책 안에는 답이 있을까. 아니면 더 진한 질문들과 불확실성만 확실해지는 걸지 모르지만 빨리 읽어보고 싶다. 이러고 또 책 주문할 궁리만 하고 있는 나, 참으로 앞뒤가 안 맞는구나. 가을 냄새가 나는 바람결, 여름의 막바지면 한 살을 더 먹게 되고 나는 또 젊음에서 늙음으로 죽음으로 걸어간다. 흑, 스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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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8-13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살고 있는 신림동에는 이틀에 한번 꼴로 밤마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요.
아버지때문에 두 번 앰뷸런스를 탄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하더라구요.
주위에서 죽은 사람이, 아픈 사람이 점점 늘어갈수록 죽음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공포와 우울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네요.
저도 로쟈님 서재에서 저 책을 보고 읽어보면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아침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blanca 2019-08-14 10:08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 보면 그 특유의 생기가 참 부러워요. 그 생기를 저는 이미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늙고 병들고 이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걸 경험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9-08-16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론적으로 앰뷸런스가 지나가지 않는 길도 삶도 없다.˝ - 상당히 와닿는 글입니다.

늙음으로 가는 길로 시간을 정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고 보면 시간의 소중함이 느껴집니다.
저도 30대엔 제 나이가 많은 줄 알고 젊은 20대를 부러워하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긍정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10년만 젊기를 소망하더군요. 그러면서 저를 부러워하더군요. 저 역시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좋겠군, 할 때가 있어요. 아마도 노인이 되고 나면 지금의 ‘나‘를 돌아가고 싶은 때로 규정할지 모릅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40대까지는 젊은 것 같습니다.ㅋ 제 사견으로는...

blanca 2019-08-16 18:15   좋아요 1 | URL
아이들 커가는 걸 보면 더욱 실감해요. 저도 30대 때 쓴 일기 보면 실소가 나옵니다. ˝오늘 서른하나가 되었다. 충격이다.˝ 뭐 이런- -;; 가소로울 따름이죠. 아, 젊은 40대를 알차게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