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에는 사십 대의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이십 대에는 이십 대만이 공감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 어떤 연령대를 통과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고 때로는 그 안에 있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육십 대의, 이만 여구가 넘는 시신을 부검한 법의병리학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하지만 그 고백의 무게와 깊이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리처드 셰퍼드는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일을 하는 영국의 법의학자다. 아홉 살에 생모를 잃고 어머니의 역할까지 함께 그러안은 아버지의 양육 아래 그가 법의병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히 친구가 학교에 갖고 온 [심슨 법의학]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제사에 인용된 알렉산더 포프의 <비평론>의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그의 안치소에서, 법정에서 하나의 금언이 된다. 여러 죽음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비인간성을 대면하게 되는 에피소드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도 결국 진실의 힘과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할 용기다. 죽음이 만연한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라는 페르소나를 다시 재창조해내어야 하는 그 간극의 어려움에 대한 표현도 진솔하다. 셰퍼드는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한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런 생활에 어떻게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으로 삶 자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가 이야기하는 그 숱한 죽음들에서 진실의 체를 거르는 일과 더불어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학습된다. 비단 죽음 뿐 아니라 그것과 교차되는 그의 생애의 내레이션의 교훈 또한 여운이 길다. 종반부에 그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통과하는 여정의 그 생생한 고통은 읽는 이에게도 전해져 올 정도로 절절하다. 그가 속한 학계와 사회의 변화와 그 자신의 노화, 삶의 경로의 전환,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간 죽음들의 진실들의 귀환은 긴밀하게 서로 얽혀 이야기의 현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


그는 이 책이 하나의 치유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투병을 고백하면서 그가 객관화했던 죽음들은 공포나 환멸이 아니라 공정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그리고 당사자들에게는 결국에는 종국의 안식으로 수렴한다. 때로 섬뜩하고 끔찍했던 이야기들의 마침표는 화자의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그 비극성으로 마음을 산란하게 했지만 차갑지만 고요한 여운을 남긴다. 이 책 안에서 진실의 정의가 필요했던 미제의 살인 사건들은 결국 정의의 축으로 이동하여 안도를 준다. 그를 괴롭혔던 억울한 혐의들도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결국 그렇게 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남겼던 그 숱한 죽음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삶과 죽음은 결국 만난다는 하나의 비장한 은유처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1-27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이 책의 분위기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와 비슷한가, 싶어지네요. 저도 읽어볼게요.

blanca 2019-11-28 11:4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는 아직 못 읽어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더라고요. 순간순간 섬뜩섬뜩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한 추리 단편 같아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13년에 시작해서

1914년에 마침.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E.M 포스터 <모리스>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지금까지 숱한 제사를 봤지만 포스터의 이 헌정이 최고인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바치는 <모리스>를 거의 단숨에 읽었다. 흡인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등장 인물들이 거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떤 선택, 그 선택의 반향, 열린 결말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어떤 판단 자체를 유보시킨다.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초래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은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은 실패했다. 사랑은 이따금 기쁨을 가져다주는 감정일 뿐이었다.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p.330


모리스 쪽의 이야기다. 모리스는 그렇게 느낀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첫사랑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떠난다. 클라이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페르소나와 타협한다. 심지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모리스도 그런 식으로 살아주기를, 그래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어떤 꺼림칙한 잔여를 깨끗이 치워주기를 바란다. 모리스를 일깨운 쪽은 그인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모리스다. 모리스의 좌절과 모리스의 두려움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쩨쩨하다. 타협과 안주가 없으니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우리의 삶이 클라이브와 더 가깝다고 해서 그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포스터는 영리하게 포착한다. 모리스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렸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모리스는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남은 흔적이라곤 조그맣게 쌓인 달맞이꽃의 꽃잎뿐이었다. 꽃잎들은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땅 위에서 애처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죽을 때까지도 모리스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블루 룸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고사리 풀숲은 물결쳤다. 영원한 케임브리지 어딘가에서 친구는 온몸에 햇살을 입고 그에게 손짓하며 5월 학기의 소리와 향기를 떨치기 시작했다. 

-p.348

포스터의 묘사는 눈부시다. 향기와 시각은 시간의 결을 넘나든다. 꺼져가는 꽃잎과 지는 청춘의 모습은 겹친다. 여전히 남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는지에 대한 몫은 읽는 이들의 것으로 남겨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1-14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블랑카님 벌써 읽으셨군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까요?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이 생각나네요. 그 책에서도 서로 사랑했던 남자 둘이 헤어져서 한 쪽은 나중에 커밍아웃하는 작가가 되지만 한쪽은 여자랑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거든요. 그리고 내내, 그 작가의 행보를 좇습니다.

blanca 2019-11-15 11:30   좋아요 0 | URL
포스터 자신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약력을 보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배신 당하고 이것에 반복이었더라고요. 다락방님 예랑 비슷하게 사랑했던 남자들 대부분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요.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애의 대부까지 서주고...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포스터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삶 자체가 아주 드라마틱하더라고요. 그냥 몇 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 읽어도 가슴이 시려오는 그런 삶을 살았더라고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한정된 시간, 분량 안에 집적해야 한다는 채근이 더 농밀하고 말해져야 할 것을 다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앤드루 포터는 그것을 영리하게 포착한 작가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화자가 그러했는지 아닌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로버트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으로 시작하는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어쩌면 아주 뻔한 불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다. 젊은 여학생과 노교수의 로맨스는 숱하게 반복되어 온 서사다. 성차, 연령차, 심지어 위계의 헤게모니까지 개입하는 이 설정은 전형적이지만 우리의 복잡하고 굴곡어린 삶의 층위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많이 살아버린 사람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망을 앞둔 이의 만남은 시간이 가로지르는 삶의 어떤 단면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주기 좋은 장치다. 앤드루 포터는 적절하게 힘을 주고 빼야 하는 지점을 의식하며 되도록 뒤로 물러나 로버트와 '내'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그 은밀한 교감을 독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만든다. 일주일에 한번 결혼할 전도유망한 남자가 있는 여자가 나이 든 교수와 절대 넘어가지 않는 그 팽팽한 선과 통념의 경계 안에서 그 누구도 이 둘을 결코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공감을 자아낸 것은 작가의 저력일 것이다. 


소년의 시선으로 붕괴되는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는 <코요테>에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픈 아름다움이 있다. '회상'은 앤드루 포터 이야기의 근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사실 그건 이랬던 거야. 라고 마치 약올리는 듯한 반전이 곳곳에 있다. 기억은 왜곡되고 현재 시점에서의 과거의 복기는 언제나 허술하고 맹탕이고 왜곡되어 있어 진실의 맹점은 언제나 우리를 가격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어머니는 남고 소년은 성장한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다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소년은 남은 어머니보다 떠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소년은 상실을 치유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가 열여섯 살이던 그해 봄"을 회상하는 <외출>에서 스치듯 지나간 아미시 공동체 소녀와의 사랑은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고 마침표를 찍게 한다. 작가는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는 소년, 사회 전체적으로 고립된 아미시 공동체 출신의 소녀가 만나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소외된 외톨이들의 교감과 성장통이 남기는 상흔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이 둘이 만난다고 해서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차가운 깨달음과 함께. 뼈아픈 성장이 남기는 아련한 추억은 남아 예술이 된다. 


<코네티컷>에서 어머니가 이웃 부인과 가진 관계의 색깔 또한 그렇다. 둘은 동시에 각자의 상황으로 불행했고 이 시점에서 나눈 관계는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다. 여지없이 소년은 이것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어떤 상식, 통념,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생의 속살을 알른알른 내비치는 앤드루 포터의 시선은 가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의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꼭 해야 하는 이야기,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나 새롭고 뭉클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9-11-13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 년 전, 21세기북스 출판사의 것으로 이 책을 읽었어요. 다 좋았는데 표제작이 제일 좋았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 같아서 마음이 아팠었죠.
남자 교수의 절제된 사랑이 존경스러웠고... 그의 죽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여 주인공이 통곡하며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땐 남편의 존재 따위를 의식하지 않고 실컷 슬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만나니 반가운 책입니다.


blanca 2019-11-14 12:47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미 읽으셨군요. 댓글 읽으니 그 내용이 연상되어 또 뭉클해집니다. 명작이란 이런 건가봐요...
 

체육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했던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삼십 대 중반이었다. 집앞 복지관 헬스센터의 트레이너 덕택이었다. 재미삼아 인바디를 측정했던 나의 체중 대비 지나치게 낮은 근육량에 승부욕이 발동한 (나의 추정이지만) 그녀는 거의 삼 일 동안 1:1 강습을 시작했다. 스쿼트, 런지, 부위별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각종 운동 기구의 사용법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줬다. 그 이후로 운동하는 여자가 되었다. 물론 각종 변명으로 중간중간 게으름을 피운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운동 하고 난 후의 그 성취감과 몸의 상쾌함을 기억하기에 완전히 몸을 쉬는 일은 없게 되었다. 문제는 딱 너무 힘들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이를테면 걷기도 육천 보를 걷게 되면 하루 운동량을 다 채웠다 가정하고 널브러져 있다. 근육 운동도 삼십오 분이 마지노선이다. 그러니 근육이 붙을 일은 없다. 근육이 붙기 직전에 나가떨어지니까. 그럴 때면 평생 몸을 주어진 연장이라 생각하고 갈고 닦은 하루키의 말도 생각나고 운동 하기 전의 그 저질 체력의 과거도 떠오른다. 매일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들의 극기와 절제는 상상이상이다. 나에게 만 보는 언감생심이다. 나는 운동에 관한 타협과 자기 정당화에 능하다.



















그러나 내 몸과 삶에 나쁜 것은, 내 작품에도 좋지 않다. 부정적인 충동은 절대 예술가의 연료가 될 수 없다. 예술가의 삶은 단 한순간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루에 단 하나의 점만 캔버스에 찍어나가도 10년이 지나면 나의 시간이 집적된 작품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단순한 비유지만, 나는 예술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p.120


하루에 만 보도 이만 보도 아닌, 삼만 보를 걷는다는 하정우의 이 책은 비단 걷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물론 고작 육천 보 걷고 나가떨어지는 나에게 지금 당장 나가 걷고 싶게 만드는 뿜뿌질은 확실히 해주지만 그가 배우로서 가지는 불안감,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일환으로서의 삶의 전반적인 자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충분히 내실과 인기를 동시에 확보한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배우는 아직도 훨씬 더 훌륭해질 일이 남았구나, 싶을 정도로 신뢰가 간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환상이나 현실 부정이 없는 기반 아래 일상의 귀중함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어쩌다 한번씩 체감하긴 쉬워도 자기 삶의 주축이 되도록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정우는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선 것 같다. 고통스러운 삶의 파도가 몰아치면 가장 힘든 것이 일상의 유지다. 밥술을 뜨는 것이 힘들어지고 자기 몸과 정서에 좋은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루틴에 기반한 삶 속에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선을 넘어가는 것은 완전한 극복은 아닐지라도 그 고통을 적어도 회피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일이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 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중략>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p.165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는 말이 참 좋다. 너무 힘들다 여기면 운동도 읽기도 먹는 일도 때로 힘겨워진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고 걷고 읽어야 한다. 쓴다면 더 좋다. 일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몸을 일과처럼 만들며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며 기다린 배우의 마음이 응원이 된다. 이제 칠천 보는 걸어야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1-09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루틴의 중요성을 요즘 새삼 실감하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9-11-09 10:03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다락방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기억해 두고 싶은 문구가 많았어요. 빌려 읽었는데 살 걸 그랬어요...

moonnight 2019-11-09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살까 하다 잊고 있었는데 사야겠네요@_@

blanca 2019-11-10 08:23   좋아요 0 | URL
달밤님, 사세요. 사서 읽으면 좋은 책을 빌려 읽으면 흑 난감해진답니다. 사자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고 그냥 보내자니 다 옮겨 적을 수도 없고...

방랑 2019-11-0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열심히 걷고 있어요. 단풍도 보고 운동할 겸 집 주변에 사찰도 가고요. 책 읽을까 고민했는데 사야겠네요

blanca 2019-11-10 08:25   좋아요 1 | URL
방랑님, 저는 작년까지 걷기를 정말 열심히 하다 요새는 이래저래 변명거리가 많아져 게으름 피우고 있었거든요. 하정우가 공항까지 걸어갔다,는 소문 ㅋㅋ을 듣고 사실일까 했는데 그 대목 읽고는 그냥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걷기는 몸뿐만 아니라 내면의 근육도 함께 키우는 일인 것 같아요. 다시 가열차게 해봐야겠다, 뭐 이런 새로운 결심이 서게 되는 책이랍니다.
 

동네 서점은 아주 성실하다. 이를테면 아이 문제집을 사다 혹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있어요? 하면 반드시 그 책의 정체를 파악하고 재고를 확보해 둔다. 그래서 잊어버릴 때쯤 그 책을 발견하게 한다. 그 책을 사면 다시 빈 곳에 똑같은 책을 채워둔다. 내 뒤에 누군가가 이 책을 사 간다면 다음에도 또 이 책은 반드시 돌아온다. 설령 아무도 사지 않을 책이라도 주인에게 어떤 강고한 철학이 있는듯 누군가 찾는 책은 반드시 다음에 있다. 그 사람을 보면 어떤 감동이 느껴진다.

지금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으며 감탄하는 중이다. 작가 이력을 확인해보게 될 정도다. 레이먼드 카버와 체홉과 줌파 라히리가 한곳에서 회합하는 느낌이다. 좋다고 소문난 책은 반드시 읽어볼 가치가 있구나. 이 정도면 잊지 않고 이 책을 읽어야 할 부책감을 안겨준 서점 주인장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19-11-0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읽으면 무슨 물리학 책 같은데 말입니다.
저는 동네서점 가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요즘 동네 서점이 옛날 아날로그 시대의
그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시절이 그립긴 합니다.
예전에 단골 서점 아저씨가 조카 대하듯 저를 맞아주곤 했는데...ㅠ

blanca 2019-11-08 09:49   좋아요 1 | URL
이 책 있냐고 물으면 다들 표정이 ㅋㅋ 저도 제목 보고 물리학 책인 줄 알았습니다. 어릴 때만 해도 정말 동네 서점들이 활황이었지요. 이제는 정말 찾기 힘들게 됐습니다. 중고서점도 그렇고요. 약속 장소를 그런 곳으로 정하곤 했는데 다 옛말이 되었다는 게 참 서글프네요.

다락방 2019-11-07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블랑카님 ㅜㅜ

blanca 2019-11-08 09:50   좋아요 0 | URL
헉, 다락방님 이미 아셨어요? 이 단편을! 와, 저 이것 읽다 아까워서 중간에 접었잖아요. 이 작가 천재 아닙니까. 게다가 데뷔작.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아요...

psyche 2019-11-08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네책방. 서점이 없는 동네 (블랑카님도 잘 아시겠지만)에 살다보니 더욱 부럽네요.

blanca 2019-11-08 09:52   좋아요 0 | URL
프쉬케님, 하지만 그곳은 또 도서관이 그리고 아마존이 있잖아요. 저는 요새 사실 프랑스 자수에 빠져 손에 바늘 찔려 난리랍니다. 프쉬케님 손으로 만드시는 것에 재능있으시잖아요. 그래서 프쉬케님 떠올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