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인문학 책이나 사회과학 서적과는 친하지 않은 편인데 이백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핑크빛 책자에 반해 버렸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연구하는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의 형사사건 관련 자료에 대한 일종의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적절하게 진지하고 적당하게 가벼운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한 책이라 쉽게 읽히면서 역사가가 아카이브와 역사, 사회적 현상, 심지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에 대하여 많은 알찬 앎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아스날 도서관의 사료를 찾으러 가는 저자의 풍경이 마치 단편처럼 묘사되어 있는 부분도 흥미롭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현명할 수 있는 역사가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아 모처럼 풍요로운 읽기를 경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시하고 엉뚱한 일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이 오면, 역사가라는 이 피곤하고 강박적인 직업에 대해 자문해보게 된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그저 잃어버린 시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겠다는 이상에 바쳐진 시간일까?-p.25


참으로 솔직한 발언이다. 그가 역사가라는 직업만 아니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18세기의 어마어마한 아카이브의 바다에 질식할 듯이 익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방대한 자료의 양에 질리고 그 자료를 해독하며 의미를 끌어올리는 과정은 21세기의 첨단 기술과 멀어 보인다. 아무 의미없고 성과 없는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도 비켜 가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의 좌절은 눈부신 통찰로 이어진다.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착각,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진실을 보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착각을 깨뜨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진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경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명령과 그럼에도 진실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 사이에 난 길은 좁은 길일 때가 많다.

p.118


사람에게는 그가 구태여 학자나 저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 느낌, 이론을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 진실이 핵심이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가 때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진실을 버리지 않는 길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인간이라면 사수해야 하는 절대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미끄러진다. 저자는 그 지점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언어로 낚는다. 모호하고 애매했던 지점들이 이 이야기 안에서는 맑고 투명하게 떠오른다. 역사가의 개인적인 아카이브가 보편적인 대중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책은 특수하거나 고답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누구나 이 역사가의 아카이브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저마다의 깨달음의 순간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함부로 단언하고 합리화했던 순간들에 대한 성찰의 도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인식, 나의 해석, 나의 판단의 오류를 점검할 수 있다. 


바스티유 감옥 안의 남자는 아내에게 헝겊에 편지를 써서 빨랫감 사이에 숨긴다.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그 편지의 수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원한 절차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뭉클하다. 남자는 감옥의 빨래하는 여자에게 만약 편지가 아내에게 잘 전달되면 부디 양말을 빤 뒤 파란 실로 아주 작은 십자가를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십자가는 끝내 남지 않았으므로 그 편지는 아내에게 가 닿지 않았다는 추정을 하는 아를레트 파르주의 해석은 지극히 개별적이지만 이 무명의 남자가 아내에게 전하려고 했던 간곡한 메시지의 무게를 헤아리는 연민이다. 그의 아카이브 안의 사연들은 시대와 장소의 경계를 훌쩍 넘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와 닿는다. 우리 모두 어려운 순간에도 반드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간절하게 상대에게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이 좌절되더라고 그 마음만은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세대에 이러한 것을 헤아려 줄 누군가가 우리의 그 잃어버린 소망을 짐작해 줄 것이다. 역사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라는 방증 같은 책의 울림이 크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2moon 2020-04-0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한테 올 책들 중 한 권인데, 리뷰를 읽고 이 책부터 읽어야지 생각했어요. 추천 꾹. :)

blanca 2020-04-02 18:31   좋아요 0 | URL
와, 찌찌뿡이네요 ^^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랜만이에요, 302moon님.

2020-04-13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답답하고 불안한 나날들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2020년의 1사분기가 지나가고 있다. 외출도 약속도 교류도 수업도 없다. 전염병이란 걸린 자가 어떤 낙인을 부여 받기 쉽다. 동선은 때로 타인을 통해 내가 위협 받을 수도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경로가 되어버렸다. 예전 같으면 이웃의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서 함께 타고 인사를 나누는 게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일처럼 보인다.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된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참 이 시기와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칠백 페이지의 분량에 질려 그냥 읽지 말까 싶었다. 그런데 시작하자 마자 나도 모르게 그 칠백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모스크바의 호텔에 가택연금된 옛 제정 러시아의 백작의 이야기는 9평 남짓의 방에서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를 보여준다. 호텔 바깥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종신형을 받은 로스토프 백작이 그 호텔 안의 종업원들과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고 낳지도 않은 딸을 키워서 어엿한 피아니스트로 세상에 내어 보내는 과정은 묘하게 담담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우아하지만 가라앉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유쾌하다. 백작이라고 내도록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는 한때 호텔 옥상에서 투신하려 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잡역부는 달콤한 벌꿀을 나누어 줌으로써 백작을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건져낸다. 거창하거나 현학적인 철학 대신 근면하고 소박한 노동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그가 직접 수확한 당밀을 나누어 먹으며 생의 의지를 다시 재확인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살게 되는 계기는 이러한 평범한 일상의 번득이는 아름다운 순간을 재확인함으로써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이 시기의 금언으로 간직하고 싶다.
















번역되기를 고대했는데 실제 신간에 떠서 깜짝 놀랐다. 딘 쿤츠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실제 코로나19에 대한 예언적인 부분이 나온다고 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우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갑론을박이라 확인해봐야겠다. 꼭 그 대목 아니더라도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해보고 싶었는데 기대가 크다. 소설이 경제, 정치 분야의 전망보다 미래를 더 정확히 전망할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주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현실화할 무한한 힘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때로 입밖으로 내어 이야기되는 순간 실현 가능성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좀 불안해 질 때가 있다. 카뮈의 <페스트>는 그런 면에서 섬찟하다. 카뮈는 인간들에게 그 끔찍한 질병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얘기하며 끝을 맺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20-03-28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는 사놓고 못 읽었는데 책무더기 중 아래에 깔려있(다고 추정되)어서 찾기도 만만찮-_-;;;;;;;;;;;;;
하여간; 재미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저도 언젠가 읽으리라 희망합니다^^ 딘 쿤츠 궁금해요. 블랑카님 서평 기대합니당^^

blanca 2020-03-28 19:50   좋아요 0 | URL
두꺼워서 저도 처음에는 좀 읽기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런데 한번 읽기 시작하면 그냥 술술 넘어간답니다. 이 작가의 다음 책도 기대됩니다. 아, 저 딘 쿤츠 책도 정말 기다렸는데 출간일이 무려 4월 12일이라 좀더 기다려야 될 듯해요. 이건 원서조차도 잘 없더라고요. 여튼 읽고 사고 싶은 책은 쌓여만 갑니다.
 
해부학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부학 책 《그레이 아나토미》의 비밀
빌 헤이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레이 아나토미> 하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메디컬 드라마를 떠올리게 되지 사실 동명의 위대한 해부학의 고전을 쓰고 요절한 저자 헨리 그레이와 삽화를 그린 같은 이름의 헨리 카터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경학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만년을 함께 한 빌 헤이스 또한 자기만의 전문적인 관심사 분야를 파고들어 꾸준히 글쓰기를 한 작가로 이 <해부학자>를 통하여 그는 이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두 명의 발굴되지 않은 삶의 궤적을 자신이 직접 참가한 해부학 수업의 과정과 함께 엮어 그려 나간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인 헨리 그레이는 문자로 된 사적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아 그의 삶을 직접 추적하는 데에는 적잖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천재 해부학자 외과의사는 삼십 대에 천연두로 요절하여 자신의 책이 중쇄를 거듭하며 의대생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지 못한다. 그레이를 묵묵히 보좌하며 막대한 양의 정밀한 삽화를 그리며 책의 완성에 기여한 헨리 반 다이크 카터는 상대적으로 나름대로 성실하게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한 일기를 남김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레이의 드러나지 않았던 그간의 행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카터는 그레이에게 어떤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레이의 추진력과 카터의 무식할 만큼 집요한 성실성으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반짝 천재성을 드러내었던 그레이의 삶이 전염병으로 일순간 너무가 허무하게 중단된 반면 카터는 비교적 노년까지 남아 자신들의 역작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모습과 또 그것에 따른 열매를 맛보게 된다. 


저자 빌 헤이스는 원래는 헨리 그레이의 전기를 쓰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젊은 학생들과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해부학 개론" 수업을 듣고 해부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두 헨리가 탐구하고 천착하며 써 낸 해부학 교과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도 점점 더욱 깊어짐을 느끼며 이야기는 좀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며 더욱 다채로워진다.  많지 않은 자료를 재구성하여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두 젊은 해부학자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며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랑과 작별, 상실의 이야기를 슬며시 끼워넣는 손길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은 공백은 그래서 저자 빌 헤이스 자신의 삶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많은 시신들 사이에서,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체와 죽음은 각기 배우는 곳이 다르다. 인체는 해부학 시간에 시신을 해부하며 배우는 거지만, 죽음이란 사망-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p.359



해부학자의 삶의 동행자였던 빌 헤이스의 연인은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에게 헌정되고 이 책을 통하여 그는 다음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헨리 그레이와 헨리 카터는 나란히 저자의 삶에 나름의 힘을 행사한 셈이다. 사람의 몸을 해부하여 신체를 알고 거기에 생기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그것의 올바른 가이드 라인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다시피 하여 만들어 낸 길이 남을 명저, 그것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결국 맞이하고야 마는 상실과 죽음이 아름답게 교차하는 책이다.  학생들에게 적절한 해부학 교과서를 남겨주고자 했던 어쩌면 그 평범했던 의도가 두 젊은이의 열정과 성실성과 만나 맺어낸 우연한 눈부신 성취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고 진실성 있게 복원하고자 했던 저자의 지난한 노력의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겨찾는 유튜버 중 '편집자K'가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이의 충만한 느낌이 좋다. 특히나 그녀가 직접 출간에 참여한 책을 소개할 때는 여지없이 영업당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시인 박연준(남자인줄)의 산문집. 향긋한 티백과 함께 받아 그 티와 함께 읽었다. 시인이니 만큼 단정하고 정제된 문장들이 촘촘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좋아 다시 돌아가 읽었다. 


생애의 모든 날을 그러모아 '평생'이라 부른다면 빛나는 날은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는 가능한 한 찬란한 날만 골라 서 있고 싶었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해와 달이 하나씩 있고, 내가 나로 오롯이 서 있는 하루. 

-박연준 <모월모일>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러한 문장에 담아 표현하는 건 시인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 같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 느낌이 시인의 문장으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한 그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좋다. <조그맣고 딱딱한, 붉은 간처럼 생긴 슬픔>은 시인의 일곱 살의 슬픔을 애도한 글이지만 동시에 내가 잊어버렸던 그 유년의 상처를 떠올리게 했던 지점이기도 해서 먹먹했다. 같은 시인이기도 한 남편과의 소소한 일상, 서로에 대한 애정, 자잘한 다툼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잔잔하게 공명한다. 공통의 관심사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반려자와 함께 하는 생활에 대한 문장들이 사계를 통과하며 절로 저자와 그들의 삶을 그려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가 읽어도 공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날들에 대한 사려깊은 이야기다. 표지의 핑크빛 투명한 비누의 사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슬며시 핸드폰 배경화면을 비슷한 것으로 바꿨다. 


잔잔해도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여전한 열정, 애정의 흔적이 분분하는 이 책과 달리 노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쓸쓸하다. 이질적이기도 하고 중년이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그러한 날들을 예비해야 한다는 자각은 스산하다. 
















역시 시인의 에세이다. 도널드 홀이라는는 미국의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팔십 대의 시인이 이야기하는 노년에 대한 삽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고 기동력을 줬던 운전대는 잦은 사고로 인해 놓은 상태이다. 한 마디로 원하는 곳에 가려면 반드시 동행해서 도와줄 타인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게 된 상황이다. 


나는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더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

-도널드 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아마 중년 이후부터 이미 시작되는 흐름일 것이다. 청춘이 확장의 절정이라면 중년은 이미 그곳에서 서서히 하강 곡선을 타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연령대다. 잘 늙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너그럽기는 쉽지만 이제 가진 것조차 서서히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수시로 느껴야 하는 시점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려면 인위적인 노력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살 곳이 자기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하고 배려한다는 행위도 그러하다.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 생태계를 고려하는 판단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이 지구를 결국 떠날 것임을 머리로라도 받아들여야 가능한 얘기다. 노시인은 심지어 시를 쓰는 동력과 활력도 하강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시는 그를 떠나버렸다. "시가 나를 버렸다"는 겸허한 고백이 저릿하다. 이제 그는 서서히 소멸을 향해 망각을 향해 저항하지 않고 걸어간다. 그 도정에 관한 이야기가 쓸쓸하다.


두 시인의 에세이가 채운 이틀, 약국 앞에 선 긴 줄에서 이름 모를 아저씨가 마스크를 가득 담은 상자를 실어오는 소리에 반가운 손님 맞듯 다 같이 웅성거렸던 날들과도 겹친다. 여전히 모르고 알아야 할 것 투성이인 '모월모일'들이 봄과 함께 떠나간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3-1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홀의 책 나온 거 보고 브랑카님 생각했는데. 딱 맞혔네요! ㅋㅋ
박연준 시인 장석주 작가의 아내인 줄 알고 있습니다.
무가지 <예스채널>에 글 연재하던데 잘 쓰더군요.
아직 책은 못 읽어 봤습니다.^^

blanca 2020-03-18 20:44   좋아요 0 | URL
오, 스텔라님 예리하셔라. ^^ 아, 저는 시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잘 몰랐어요. 시인들이 대체로 산문도 참 잘 쓰더라고요.

다락방 2020-03-18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391039

위에 스텔라님이 적어주셨는데, 박연준 시인의 남편이 장석주 시인이고요. 둘은 결혼하면서 결혼식대신 같이 책을 냈어요. ‘우리가 결혼한다‘는 걸 책으로 알린 셈이죠. 그 책이 제가 링크 드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입니다. 두 시인의 글이 같이 실려있어요. 저는 어쩌다보니 박연준 시인의 책 대부분을 읽었는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제 경우엔 딱히 좋진 않았어요.

blanca 2020-03-18 20:4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다락방님은 시에도 전문가이니 딱 아시는군요. 저는 이름만 듣고는 남자 시인이라 생각했어요. ^^;; 아, 링크 따라가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moonnight 2020-03-19 0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떤 책을 읽고 장석주 작가에게 정이 좀 떨어져서=_= 그와 결혼한 박연준 시인에겐 뭐랄까 안쓰러움이 들어요. 주제넘게도 말이죠. 쿨럭.
이 책은 출간소식 듣고 관심 갔는데 아직 사진 않았네요. 블랑카님 좋다 하시니 구매해야겠어요. 도널드 홀 책이랑 함께용^^

blanca 2020-03-19 08:4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럴 수 있죠, 저도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여자 아나운서랑 갑론을박 벌이는 쇼 보고 어제 정나미가 뚝 떨어졌어요. 아, 요새는 또 다들 왜 이렇게 책을 예쁘게 만들죠? 완전 소장각이랍니다.

유부만두 2020-03-20 08: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비슷한 이유로 박연준 시인의 글을 찾아 읽진 않았네요. 쿨럭.

표지에 혹한 사람에 저도 있습니다. 향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표지에요.


단발머리 2020-03-19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홀의 인용해주신 문장 너무 좋네요. 늙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지는데 전 아직도 늙어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거부감이 들어요. 블랑카님의 차분한 글을 읽을 때 그래도 그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잘 읽고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블랑카님^^

blanca 2020-03-20 07:44   좋아요 0 | URL
어제 문득 거울을 보고 또 놀랐답니다. 정말 나이들어가는 자신의 외형에 특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순리와 타협해가는 것이겠지요. 커가는 아이들 모습도 너무 아쉬워요. 다섯 살 적 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는 얘기를 이해 못했는데 꼭 한번만 다섯 살적 아이들을 불러와 꼭 안아주고 싶어요. 흑, 눈물나요.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다. 암울한 시대에 홀로 빛나는 삶은 없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기만을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IMF가 오기 전 청춘을 경험한 90년대 학번이 90년새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얘기에는 설득력이 있다. 경제적 부흥과 청춘이 만나 만들어지는 서사는 빛난다. 


미국의 대공황기가 끝난 1930년대 후반의 부유한 청춘들에 대한 얘기는 그래서 유독 눈길을 끈다. 이미 피츠제럴드가 기민하고 화려하게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직 투자전문가인 에이모 토울스가 데뷔작으로 비슷한 주인공들을 불어내어 그럼에도 전혀 식상하지 않은 <우아한 연인>을 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시대의 흥청대는 분위기와 통통 튀는 젊고 아름다운 인물들의 욕망,좌절, 사랑, 배신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섬세하고 생생해서 마치 그 시대 안으로 저도 모르게 초대된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케이티 콘텐트는 그 자신이 물론 서사의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 같은 명민한 시대의 관찰자이자 증언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녀의 시선을 통과한 그 시대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고 그 자본주의와 온갖 겉치레의 사다리에 기어올라가려는 적나라한 욕망의 오점들로 오염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마치 개츠비의 형제처럼 보이는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케이티와 룸메이트 이브는 팅커 그레이와 우연히 만나 친구이자 묘한 삼각 관계에 얽혀들며 이 수수께끼 같은 청년이 속한 맨하튼 상류 사회의 화려한 사교계와 그 안의 내밀한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결국 이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이 구현해 낸 그 복합적인 삶의 기만을 통해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종종 혼동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느낌이다.  계층의 사다리의 상부에 비교적 쉽게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타인의 필요와 맞아 떨어질 때 어떤 비극을 연출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미덕은 그 골조를 통해 완성해 낸 건물 자체의 수려한 경관일 것이다. 진부할 수 있는 테마가 전혀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이러한 능력에서 나왔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사십 대 후반의 남성 작가가 20대 중반의 여성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히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파티에 참가했을 때의 케이티의 그 시린 마음을 여러 다양한 경로로 경험한 기억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어리석은 치기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남은 중년의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될까? 에이모 토울스는 그 어리석지만 찬란한 아둔함의 정서가 반드시 청춘과 만나야 함을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남용했던 시간들은 반드시 그때였기에 가능한 지점이 있다. 망각했던 시간은 진저리나는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중년의 끝자락'에 무사히 안착한 케이티가 회고하는 이십 대의 느낌은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십 대에서 사십 대로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가 가지지 못하는 어떤 회고적 시선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무의미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 많다. 특히 케이티의 남자친구가 이웃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신청곡을 적어 끊임없이 종이 비행기를 그쪽으로 날려 보내려는 무용한 시도에 대한 장면, 셋이 본격적인 삼각 관계에 돌입하기 전 연말을 마무리하고 나란히 새해를 맞이하며 함께 노래 부르고 눈싸움을 하는 정경이 참 예뻐서 기억해 두고 싶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저릿해지는 청춘의 이야기다. 뒤돌아보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찰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처럼 공명한다.  


금박의 제목이 빛나는 우아한 분홍색의 표지와 핑크빛 가름끈은 책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3-16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블랑카님, 이 좋은 소설을 이제야! 드디어! 읽으셨군요.
저는 케이티를 우연히 만난 팅커가 케이티에게 ‘그래, 여기에요?‘ 라고 묻는 장면을 너무 좋아해요. 케이티가 찾아가는 비밀 장소가 있다는 말을 일전에 했던 걸 기억하고 말이지요.

에이모 토울스는 이 작품 후의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요, 블랑카님. 이 책을 이렇게나 좋게 읽으셨다면,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blanca 2020-03-16 17:02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안 그래도 <모스크바의 신사>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왜 이렇게 전형적으로 멋있는 남자들이 많이 나오고 또 다 여주인공 좋아하고. 이렇게 쓰면 되게 유치한 것 같은데 전혀 그런 분위기도 안 풍기고. 좋은 작가는 정말 차고 넘치는군요.

비연 2020-03-1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이 책을 냉큼 주문했었는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 다들 호평이신데.. 얼른 읽어야겠다는.
에이모 토울스의 글은, 우아하면서도 두리뭉실하지 않아 좋은 것 같아요. 아름답지만 슬픔이 담겨 있는 장면들을 우아하게 묘사한다는 느낌이랄까.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습니다.. 흐미.

blanca 2020-03-16 17:03   좋아요 0 | URL
아. 비연님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으셨군요! 저는 지금 받아서 며칠 후에 시작하려 해요. 이 책과 어떻게 다를지, 기대됩니다. 진짜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아하면서도 섬세하죠.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