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졸업식 행사가 다 취소되었다. 대학생들 입학식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까지 취소된 마당에 이 정도는 불만거리도 안 될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Contagion, 2011)에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십 대 딸은 신종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거의 집에서만 갇혀 지낸다. 아름다운 추억을 쌓을 기회도 남자 친구와 만날 시간도 신종 전염병 때문에 다 빼앗기고 만다.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집에서 졸업식 파티를 열어 준다. 아이들도 이 시간 동안 많은 기회를 추억을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질적으로 충족되어도 내가 어린 시절 열린 공간에서 겪은 많은 체험과 그로 인해 남은 추억의 공간을 아이들은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들은 이따금씩 미소짓게 되는 추억으로 남았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니. 그런데 한편 이 제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장 먼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 마르셀의 동생은 말기암도 아니었고 희귀병에 걸려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이도 아니었다. 마흔한 살의 성공한 사업가였다.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까지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루였다.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는 척, 마치 이 순간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듯, 이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써버렸다. 시간은 나쁜 놈이다. 또 다른 하루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동생 마르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여러번의 금주 및 재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어했다. 가족들도 지쳤다. 이미 합법적으로 안락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던 네덜란드에서는 마르크의 죽음의 욕망을 합법적이고 절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삶을 스스로 도움을 받아 끝내고 싶어하는 동생의 소망을 가족들은 끝내 이해하고 그 날들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 책은 마르크의 형인 마르셀이 그러한 동생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풀어낸 이야기다. 


마르크는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애썼어도 질병을 극복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르크를 꼭 끌어안고 빰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크에게는 우울증 등 중복된 정신장애가 있었다. 알코올 중독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일상 생활을 파괴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러 번 시도했던 치료는 모두 불발로 끝났다. 노부모와 형의 일상생활까지 덩달아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제 그만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합법적인 장치가 그의 이러한 욕구를 실행에 옮기는데 일조를 담당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어렵고 민감한 이야기라 한 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와 고통의 시간을 차마 짐작하고 단언할 수 없다. 가족들이 그러한 그의 선택에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지 섣불리 단정하고 말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삶의 매 순간은 축복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분일초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다. 그 어떠한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죽음에 앞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인생은 너무나 복합적이고 복잡하기에 어느 한 단면을 보고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진심으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논쟁적인 이야기다.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은 쉬운 얘기지만 어렵다. 2002년부터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안락사의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합법적인 종결을 인간이 선택에 의하여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는 그러한 가치 판단과 더불어 그 과정에 개입하는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이야기다. 심리 상담가, 의사, 화장터 직원 등이 개입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점이 많다. 내가 그 일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 일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살면 살수록 어렵다. 삶을 넘어서는 고통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한 당면하기 싫은 문제들까지 넘어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부모님이 했던 고민을 이윽고 내가 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서사 또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이야기 또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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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2-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중독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은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죠.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어떤 이는 숨쉬기조차 되지 않아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해요.
저는 가장 큰 벌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에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그만 끝내고 싶은데 죽을 자유조차 없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요.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20-02-13 11:11   좋아요 0 | URL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 육체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짐작이 가요. 행복하게 무병 장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나이듦, 죽음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꾸 두려워져요.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축복과 즐거움 뒤에 있는 어두움, 고통의 측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참 어렵습니다.
 
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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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루마니아의 한 소년이 러시아 수용소에 끌려가 오 년의 시간을 보낸 뒤 귀향하는 이 이야기를 읽었다. 유대인의 포로 수용소 이야기가 아닌, 온 가족이 야밤에 나치군에게 끌려가는 이야기가 아닌, 루마니아의 독일어를 쓰는 가정에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두고 소년 홀로 끌려가 그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죽거나 다치거나 절망하거나 때로 해방되는 그 쉬운 결말 대신 귀향해서도 가족의 따뜻한 환대가 아닌 왠지 모르는 서먹함, 부적응을 여생 동안 걸머지고 다녀야 하는 소년의 마음을 택한 것은 기민한 핍진성이다.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그곳에서의 시간이라면 치를 떠는 증언들을 충분히 듣지 않았던가. 그들이 돌아오고 나서의 삶에 주목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초점이 거기로 옮겨가는 순간 이야기의 절실함에서 얻는 주목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까, 포로 수용수에서 돌아온 많은 이들이 이후의 삶에 대하여 떠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해방 이후의 그 자유가 주었을 당혹감 대신 살아남은 자의 그 처절한 사투와 의지에 주목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그러한 기대 의식을 배반한다. 아주 다른 이야기다. 색다르고 아름답고 처절하고 반역적인 이야기다. 이야기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삶의 속살에 가닿는 그 직접성은 직접적 체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고백 같았다. 


소년은 현재에도 있고 육십 년 이후에도 있다. 회고의 시점과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무의미한 반복적인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어 같은  단어들로 자신의 체험을 철저하게 재구조화하는 소년의 현재는 끊임없이 중첩된다. 그 정도로 수용소에서의 기아는 끈질겼음을 짐작케 한다. 소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그 기아 상태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


삽질을 하며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슬렀고,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 중노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 그래요, 할머니,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p.81

그가 수용소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사물과 형상을 찾는다. 기아는 '배고픈 천사'가 된다. 그것은 실질적인 대상이다. 여러 장에 걸쳐 여러 에피소드에 한창 성장기의 소년이 느끼는 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배고픔에 대한 감정은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고픈 천사'는 수용소에서의 소년의 머리까지 기어오르고 소년이 하는 도적질, 존엄성의 포기, 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 등 모든 행동과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정서이자 시발점이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하는 것일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p.265


수용소 이후의 삶에서 소년이 그가 집을 떠나 없는 동안 마치 그를 대체하듯 동생을 낳아버린 가족에 대하여 느끼는 서운함과 거리는 심지어 소년이 수용소에서의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의 박탈, 곤궁, 단순 노동에 대한 이끌림으로까지 나아간다. 러시아인이 아니면서 그들을 위해 일하며 포로들을 괴롭혔던 수용소 지도부원 투어 프리쿨리치는 소년의 삶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말이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속성을 규정한다. 삶에 대한 무게의 중심추가 된다. 이 아이러니는 소년이 돌아오고 나서도 결코 그의 손아귀에서 만큼은 해방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p.307

억압자는 피억압자의 그 억압적 체험이 삶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그의 기억은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폭력적으로 암시한다. "나 거기 있었다"가 보물이 되는 순간 그의 삶은 평생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없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실제 소년 레오의 모델이자 목소리가 있었다.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함께 쓰자는 약속을 못 지키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헤르타 뮐러는 그와 함께 한 약속을 홀로 지킨다. 그가 얘기했던 '실존의 절대영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언어는 그래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마력을 가진다. 그녀의 어휘는 마술적이고 환상적이고 중의적이다. 오스카의 '숨그네'가 그녀를 통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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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위험 가득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최신 개정증보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김현구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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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상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직원의 권유로 가입한 상품은 공격형 투자에 적합한 파생투자상품 위탁 판매를 통한 것이었다. 소액이라면 소액이라지만 최근 독일 국채 관련 파생 상품이 급격한 원금 손실을 보면서 은퇴자금 전부를 그 관련 상품에 넣은 노년층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들으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손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찬찬히 상품 설명서를 들여다 보면 원금 손실이 나기 쉬운 설계였다. 다섯 장도 넘는 상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전문가의 설명에 건성으로 응수하며 힘들게 번 돈을 공격적인 투자 상품에 넣은 것이다. 헛똑똑이는 '블랙 스완'에 먹혔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는 결단코 그 상품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월가의 파생상품 투자 전문가로 일한 경력이 있다. 1987년 '블랙 먼데이'는 그가 '블랙 스완'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 세계의 불확실성과 비예측성을 얘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백조라면 응당 흰색일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까만 백조는 이 세계에 대한 이론의 틀, 플라톤적 관념 체계 자체를 전복시키는 혁명이었다. 나심은 이 '예측 불가능성'과 '우리가 모르는 것'에 집중한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


나심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럴듯한 스토리에 쉽게 현혹된다. 낱개의 사실들은 연결 고리로 뭉클한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 행간에는 거짓과 과장, 온갖 곡해가 개입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그럼에도 환원주의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우리는 모두 두서없는 날것의 진실보다 매끈한 거짓 이야기를 더 믿으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적 세계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된다.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p,233

상당히 도발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선정적인 뒷이야기, 감동적인 스토리로 왜곡된 진실이 뒤늦게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봐 온 점을 감안한다면 나심의 도발은 타당하다. 건조한 진실의 입에 기꺼이 손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세계화, 지구화에 대한 우려


세계화가 취약성이 서로 얽혀 오히려 파괴적인 검은 백조를 양산한다는 나심의 의견은 예리하다. 금융 전문가 및 경제학자 등을 대놓고 저격하고 그들의 통계 수치를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킨 이 책은  수많은 논쟁에 불을 지피고 적을 양산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뒤이어 일어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하나의 예언서로 격상되는 이변을 맞는다. 그는 이미 금융기관들이 합병되어 비대화되고 현실과 맞지 않는 확률에 기댄 예측치로 복합 상품을 설계하여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엄청난 파국을 맞을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작금의 현실을 예감한 듯 나라 간 이동이 용이해지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될 위험이 크다는 우려도 있다. 이 세계의 복잡성은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의존적으로 얽혀 예측 자체가 무의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레바논인인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낙관적 희망을 가졌던 것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목도하게 되며 회의주의적 경험론자로 거듭난다.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는 낙관에서도 비관에서도 여지없이 노출된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과 비정형성, 비선형성을 이제는 감내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래서 그렇다면 어떻게


나심은 자신의 책이 경제서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실제 확률에 관련된 장은 일반 독자들은 건너 뛰어도 좋다고 덧붙인다. 몽테뉴와 세네카에 대한 경의는 시종일관 그의 아름다운 문장과 만난다. 이 책은 그의 주장처럼 경제서가 아닌 것도 아아니고 그가 어쩌면 기대했을 철학서라고 보기에도 그 모든 요소를 건너지르고 아우르는 방대함이 있다. 세계에 대한 사람들이 흔히 주목했던 전문가 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뒤에 그는 쉽게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은 세네카에 대한 얘기다. 철학자 세네카의 서한집에 나오는 아이들과 부인을 잃은 스틸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고전의 마지막 장을 장식해도 좋을 정도로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스틸보의 대답은 '니힐 페르디티, 옴니아 메아 메쿰 숨트' 였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나의 재산은 모두 내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회의주의는 삶 자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진지한 비판 의식을 가져야 하고 누군가 지나치게 그럴 듯한 논리를 펼 때 의심의 촉수를 뻗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졌다고 자만할 때 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그럼에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인사는 세네카의 'vale'라는 인사로 갈음했다. '강인하기를'  우리 모두가 극한 확률을 뚫고 태어난 거대한 검은 백조라는 그의 시어 같은 이야기에 맞춤한 작별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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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 - 광기와 매혹 현대 예술의 거장
앤드루 윌슨 지음, 성소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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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다는 건 거물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심지어 자기 분야에서 전위적인 선구자의 역할을 맡는다는 건 대체 어떤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져오는지 그 당사자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명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 두 세계의 균형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사적 개인과 공적 개인의 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그 분열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누리는 명성, 권력, 재력에만 주목하고 그 뒤안길에서 흘릴 눈물은 흔히 무시해버린다. 이제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자신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 다가오는 이들, 상업적 이윤을 끊임없이 창출해야 하는 부담감, 혁명적인 새로움을 항상 창출해야 하는 부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어린 시절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한 천재를 좀먹어 가는 과정에 동행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마치 그의 주변인, 심지어 그 자신에게 들어가 그러한 고강도의 삶을 체험하는 느낌,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 과연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알렉산더 맥퀸. 그의 이름은 거의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되었다.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라나 성적 학대와 빈곤에 시달리던 그가 최상류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는 패션계의 거물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패션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들의 경력을 찾아봤다고 한다. 소년의 꿈은 실현되었다. 고모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진학하게 된 패션 스쿨 패션쇼에서 그는 '보그'의 이사벨라 블로의 눈에 들게 된다. 이후로 둘의 기이한 공생 관계는 난임이었던 블로가 맥퀸을 자신의 아들이자 또다른 자아로까지 생각하는 관계로 진전하게 된다.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에 빠진 블로는 맥퀸을 자신의 상류층 세계에 끌어들이고 지원하여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브랜드를 완성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맥퀸은 전위적이고 반역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패션쇼 자체를 보수적인 세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그 자신의 위인전으로 격상시킨다. 언론의 혹평과 호평은 항상 동시에 쏟아져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인간 본능의 어둡고 심오한 악마적 분위기에 그는 침잠한다. 그의 노골적이고 기이한 옷들과 쇼는 그 자신을 유명하게도 만들었지만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했다.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되었을 때 그에게 가해진 어마어마한 압력과 부담은 상상 이상이었다. 패션계는 냉엄하고 잔혹한 자본주의의 집약체였다. 그는 소진되었고 구속되었다. 약물과 방탕한 생활과 천재적 성취는 혼재되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배신하고 배신 당하고 이용하고 이용 당하고 실험하고 선도하고 창조하고 절망하고 넘어지고 무너졌다 다시 일어섰지만 영혼의 쌍둥이 같았던 블로의 자살과 어머니의 죽음은 결국 그를 허물어뜨렸다.


"죽음은 슬픈 일이죠. 우울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에요. 죽음은 인생이라는 한 주기의 끝이에요. 무엇이든 끝을 맺어야 해요. 죽음은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마련해 주니 긍정적이죠."


악동 훌리건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맥퀸은 6형제 중 막내였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엄청난 부를 거머쥔 후에도 노모 앞에서는 목이 메는 아들이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슬프다. 대답은 "엄마보다 먼저 죽는 거요."였다. 맥퀸은 그러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는 약속과 자신이 세상을 향해 남긴 작품들이 남길 의미들을 기약하며 그는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예비하고 떠나 버렸다. 


맥퀸의 친구는 그가 아무리 대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도 자존감이 낮았다고 얘기한다.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 순간의 새로움에 탐닉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강박적으로 쥐어짜야 하는 패션계, 본질적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교환되는 세계에서 그는 불행했다. 그의 모습에서 읽는 자들은 스스로의 단편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긴 채 사라져버린 그의 비극적인 결단이 남기는 여운이 가지는 두려움에서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자본주의의 무모한 룰렛 돌리기에 잠식 당하지 않기 위해 과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더 난해하고 심오한 질문에 둘러싸일지도 모른다. 맥퀸은 죽어서도 이렇듯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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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내려서 신난 멍뭉이처럼 연휴 왔다고 여기저기 인사댓글 달고 다니는 syo입니다.
blanca님, 복된 연휴 되세요^-^

blanca 2020-01-24 13:21   좋아요 0 | URL
멍뭉이 ㅋㅋ syo님도 즐거운 신나는 연휴 되기를 바랍니다. 날씨도 따뜻해서 한층 더 좋네요.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건축학도가 칠십 대의 노장 건축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보낸 한 때가 어떤 식으로 그의 삶에 각인되는지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절창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풍광, 귓가에 들리는 듯한 소리의 감각에 대한 표현들, 시간의 경과 속에 변전하는 것들에 대한 천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땅에 건물을 짓는 행위에 대한 심오한 탐구는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단숨에 흡입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시종일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오마주가 투영되어 있다. 특히나 라이트가 노년에 만든 일종의 젊은 건축도들의 도제 시스템의 장소인 '탤리에신'은  이야기의 배경인 건축 사무소의 영감을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시스템, 노건축가의 카리스마로 운영되는 시스템, 실현되지 못한 설계들, 그럼에도 그곳에 있었던 청춘들이 계승한 스승의 미완성의 꿈들. 간토 대지진을 견뎌낸 라이트의 제국호텔에 대한 이야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자연스럽게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진혼곡이 된다.

















라이트는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할 정도로 세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유명한 건축가다. 그가 생의 후반에 건축한 별장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차를 넘어선 영감과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의 성취와는 별개로 그의 사적인 삶에는 많은 논란의 지점이 있다. 아버지로서 무책임했고 남편으로서 불성실했으며 사적 개인으로서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약속을 어겼고 거짓말을 남발했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고객의 아내를 가로채고 산적한 문제들에 무책임하게 도피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러한 일들을 수습하고 여전히 속아주는 무리들이 그의 성취들을 가능케 한 역설은 어느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처절한 비극과 배신극과 불굴의 의지와 무모한 낭만적 열정이 결합된 막장 드라마와 위대한 성취가 혼재된 복합적인 융합체다. 그래서 그의 삶을 그의 성취와 함께 이야기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침묵할 일도 폭로해야 할 일도 많은 인생이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건축 비평가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다룬 것은 이 균형의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해 낸 저자에 대한 맞춤한 경의라고 생각한다. 평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쓰는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제대로 완성해낼 수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만 그의 공과를 치우침 없이 평가하고 존경하지만 비판 받아야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저력이 놀랍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하나는 그가 지어 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실제로 산 것이다.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20세기 건축의 연금술사>


헉스터블의 언명은 머리말에 있다. 그녀는 '두 개의 삶'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이 역사적 건축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자신이 남기고 싶었던 그래서 창조해 냈던 또 다른 삶으로 표현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서전을 썼다. 그리고 이 자서전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는 라이트가 가공한 진실로 윤색해 낸 삶이다. 그러나 그 거짓은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라이트는 이단아였고 독불장군이었고 아웃사이더였고 반역자였다. 스스로를 '위대한 건축가'라 칭하는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그의 일종의 제자 양성 도제 시스템이었던 펠로십조차 거대한 사기극이자 싼값에 젊은 건축학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러한 일로 그를 고소한 이들도 있었다. 출생 연도부터 출신 학교 등 그가 스스로 설명한 많은 것들의 진실성이 의심 받았다. 금전에 무책임해서 수시로 돈을 빌리고 안 갚았고 공사 대금은 언제나 예상보다 훨씬 불어나 있었으며 현장을 자주 비웠다. 그의 건축물 또한 무너지기도 했고 빗물이 새고 여러 하자를 드러냈다. 이러한 많은 결점들이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더 의아할 정도다. 그럼에도 그의 건축물들은 여느 다른 동시대의 동료들의 그것들 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결정적인, 선도적인 탁월한 점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가 만들어 낸 것들을 도저히 모방해 낼 수 없었다. 그의 설계는 반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실현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이 딜레마를 헉스터블은 정확히 지적한다. "예술에 있어서는 위대하지만 태도에 있어서는 왜소했다."는 그녀의 평은 함축적이다. 


그가 조강치처를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과 함께 할 보금자리로 설계한 '탤리에신'에서의 비극은 오래도록 뇌리에 박힐 정도다. 그가 떠나 있던 시간에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무참하게 살해 당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삶의 비극 앞에서도 라이트는 일어난다. 그곳이 몇 번이고 화재에 전소되어도 라이트는 없는 돈을 끌어들여 재건한다. 심지어 육십이 훌쩍 넘어 남들은 은퇴할 연령에 이르러서도 그는 가장 정력적으로 일에 뛰어들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제자 양성 시스템을 자급자족 공동체로 만들어 낸다. 그의 위대한 성취는 이러한 생의 후반기에 이루어진다. 이 대책없는 몽상가의 투지와 무모함은 그가 이루어 낸 예술적 성취가 빚진 대목이다. "완벽함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헉스타블의 말은 라이트를 가장 잘 집약해서 표현한 문구다. 그는 완벽해지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는 역설의 지점에 우뚝 선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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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1-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평전 읽어보고 싶네요.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인물인 듯@_@;;;;;

blanca 2020-01-23 17:40   좋아요 0 | URL
이건 소설가도 생각해 내지 못할 극적인 일들이 빵빵 터지는 인생이더라고요. 놀라운 건 남들 다 은퇴할 나이에 역사에 남을 업적 또한 빵빵 터뜨리고요. 요새 예술가들, 소위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 중이랍니다. 자기 분야에서는 프로지만 나머지는... 반드시 수습해 주고 받아주고 이해해 주고 처리해 주는 반려자가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 흥미롭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