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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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미리 정해진 일이었다. 나는 우리 인생이 트럼프 카드와 같다고, 누굴 만나고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는 카드가 어떻게 섞이는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운명의 손에 들려 게임 판으로 나간 카드는 버려지기도 하고 다른 손에 넘어가기도 한다.

- 대프니 듀 모리에 <몬테베리타> 중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들은 농밀하다. 압축적이다. 일상의 균열로 그 사람의 삶 전체에 건 헛된 기대와 믿음을 배반하는 이야기들이다. 상대를 의심했는데 결국 문제는 나였다. 나만 소외되어 세상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 결국 우리가 기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룩한지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남기고 가는 나머지는 결코 '내'가 아니다. 이 모든 무자비한 우연성, 비논리성, 불합리가 나마저 해체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삶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유지하는 미덕은 흔한 것이 아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지금 쳐다보지 마>에서 '나'는 아이를 잃고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쌍둥이 노자매의 허무맹랑한 신비한 예지 능력에 기대는 아내를 비판한다. 아내는 나약하고 나는 강인하다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전은 그것마저 하나의 허상임을 일깨운다. 나는 결국 나의 미래를 본 것이라는 각성은 뼈아프다. 


히치콕 감독의 <새>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의 단편을 영화화한 것이다. 대자연의 재앙은 인간의 대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일상의 견고함 또한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들, 내가 믿는 사람들,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들의 지반 자체가 흔들릴 때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서 나를 덮친다. 심지어 내가 살고 있다고 여기는 시간, 공간적 공간 또한 미심쩍다. 과거를 회고할 때 흔히 우리는 그 시간, 그 공간에 나로 있었던 나날들조차 실재했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푸른 렌즈>에서 여주인공 마다가 시력 복원 수술을 하는 동한 임시로 꼈던 푸른 렌즈는 주변 사람 모두를 끔찍한 동물들 형상들로 변모시킨다. 마다는 모두를 의심하게 된다. 그들의 선의, 배려 등도 그 렌즈를 통과하면 미심쩍고 사악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대한 은유다. 우리가 모두 사회적 페르소나를 입고 사회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 아래 맨얼굴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놀랍다. 


마지막 <몬테베리타>는 감동이 있는 진지한 모색이다. 동양적 이상향인 무릉도원이 연상되는 '몬테베리타'로 떠나버린 여인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두 남자의 삶. 한 사람은 여전히 세속에 발을 담그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결국 세속과 몬테베리타의 경계에서 헤매다 죽음을 맞는다. 우리가 있는 여기를 '홍진'에 비유한 것, 거기에서 바라보는 이상향인 몬테베리타 또한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거기에 도달해서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한 냉정한 직시, 직관이 빛나는 작품. 산다는 것과 꿈꾸는 것의 경계에 선 작가의 성찰이 뭉클하다. 결국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거나 누릴 수 없다는 한계의 자각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여전히 놀랍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진지한 고민을 하는 방법을 아는 영리한 작가다. 그녀를 읽는 일은 결국 우리 삶의 독법과 만난다. 허무하고 시간 낭비가 아닌 일. 읽기의 무게를 여전히 실감하게 하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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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6-2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cinecube.co.kr/news/notice_view.jsp?b_idx=2&uid=10092&rnum=1
씨네큐브에서 히치콕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레베카는 7월 1일 저녁에 하네요.우리 벙개할까요? ㅋㅋㅋ

blanca 2020-06-27 09:03   좋아요 0 | URL
흑, 아쉽게도 번개는 못하지만 테레사님 보시고 오시면 꼭 후기 부탁드립니다.!!!

유부만두 2020-06-30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에 다 읽었어요. 매우 옛 이야기 같은데도 긴장감이 대단하네요.
은근 무서워서 한 호흡에 다 못 읽고 재미를 아껴가며 읽었어요.
읽고 나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요. 듀 모리에의 다른 소설을 더 읽어야 겠어요.

blanca 2020-06-30 19:06   좋아요 1 | URL
그죠, 유부만두님. 저 다 읽고 나니까 아까울만치 좋았어요. 안 그래도 저 지금 또 다른 책 대기중이랍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비교적 작품이 많아 다행입니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중략>


김사인 <화양연화>


살아보니 결국 승자는 돈도 권력도 열정도 사랑도 노력도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무화시킨다. 변화시킨다. 심지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본질 그 자체까지 때로 흔든다. 스무 살의 나보다 마흔 살의 타인과 더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사인의 <화양연화>를 읽으며 문득 서글퍼졌다. 덧없고 속절없는 느낌. 그가 예언했듯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그러한 시간을 맞는 것도 기대되지 않는다. 애닯고 애타는 것도 특권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던 탓이겠지. 기다리며 울던 시간도 그 시간만의 추억이 될 것임을 모르고 무너지려 했던 시간들. 


















아이가 어렸을 때 집앞에 걸어갈 수 있는  대학교가 있었다. 학교 안에는 서점이 있었고 분야별 신간과 아기자기한 문구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도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였다. 내가 다니지 않았던 이공대 안을 그렇게 세 살 아이와 함께 아무리 보내도 끝날것 같지 않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종종 가곤 했다. 그 구내서점에서 처음 본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당시의 김연수 만큼 젊은 생기가 있는 소설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날들도 나름대로 힘들었지만 '화양연화'였던 셈이었다. 스마트폰은 아직 초창기였고 사람들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을 특이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그러한 얘기를 하면 심드렁하다. 그 서점에서 강아지 스티커를 매일 사서 아예 재고를 영으로 떨어뜨렸던 기억은 없단다. 그 스티커는 침대 헤드를 점령해서 집에 오는 사람마다 경악하게 만들었었는데. 기억에 없다니. 


김연수가 오랜만에 신간을 냈다. 그의 전작을 읽어보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모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이 나이들어간다는 실감이 가장 큰 작가다. 나보다 앞질러 살아보고 했던 얘기들을 뒤늦게 경험하며 정말 맞구나, 하던 시간들도 많았다. 문학을 문학으로 남겨 놓으려는 순정의 대목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학교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내식당에서 혼자 들썩였던 그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내 기억에 포개진다. 그런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을 복기하는 날도 온다. 애달픈 시간들이 쌓여 애닯지 않은 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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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9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님. 결국 시간이었다는 것도 저 역시 깨닫고 있고요. 시간이 변화시키는 것도 저 역시 요즘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보는 눈도 그래요. 이게 이렇게 좋았던가, 이게 이렇게나 끔직했던가, 하고 늘 보던 것을 그리고 익숙한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돼요. 나이가 같다고 다 그렇진 않겠지만, 블랑카님과는 세월의 흐름과 변화를 보는 눈,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같이 가고 있다고 느껴요. 오늘 페이퍼 정말 좋습니다, 블랑카님. (아, 김연수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요.)

blanca 2020-06-20 08: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게 정말 세월, 나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게 ˝이게 나야, 내 생각은 이래˝라고 주장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낯설어요. 자꾸 변하고 닳아요.

다락방님 글 읽다 때로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 이거 내가 느낀 건데, 이러면서. ㅋㅋ 그리고 시기도 비슷해요. 잘 나이들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나이들어가기를... 함께요.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로 시작하는 <레베카>는 놀라운 작품이다. 동명의 뮤지컬로 유명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서스펜스 소설은 섣불리 장르작품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 특히나 이야기의 배경인 영국의 대저택 '맨덜리'의 묘사는 당장 눈앞에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경관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하고 생생하다. 인간의 내밀한 욕망, 복잡다단한 중층적 심리, 각자의 필요가 상충할 때 빚어지는 우연한 사건들의 파고에 대한 정묘한 표현들은 서사의 상상력의 진폭과 언어의 표현력이 맞춤하게 결합할 때의 최상의 지점을 나타내어준다. 한 마디로 경이로운 작품이다. 















속물에 교양 없는 귀부인의 수행원으로 심부름꾼 역할을 하던 소녀가 영지의 화려한 대저택의 소유주인 맥시밀리언 드윈터를 우연히 휴양지의 호텔에서 만나 드윈터 부인이 되는 이야기는 언뜻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레베카>는 오히려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이야기다. 그녀를 맞이한 '맨덜리'에는 이미 죽었지만 그 존재감을 하인들조차 떨쳐내지 못하는 전처 '레베카'의 환영이 떠돌고 있다. 모두가 그녀를 추억하고 추앙하고 그녀의 취향들을 고수하며 '나'를 은근히 소외시킨다. 심지어 남편 맥시밀리언조차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곁을 주지 않는 사람들, 무언가 나는 공유할 수 없는 레베카와의 순간들에 대한 집착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둘러싸며 점차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레베카에 대한 환상이 벗겨지는 과정은 '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미덕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단지 이야기의 서스펜스와 흡인력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어떤 내면적 갈등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삶에서 성장을 이루어내는지에 대한 사려깊은 통찰은 <레베카>가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되고 읽힐 수 있는 여지를 확장한다. 소극적이고 소심하던 나는 당차고 야무진 어른으로 나아간다. 핑크빛 환상에만 매달리지 않고 냉엄한 현실에도 두눈을 똑바로 뜨고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기본 자세를 배워나간다. 


나는 고통을 겪은 인간이 더 강하고 좋아진다고, 그리하여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불의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바로 그 불의 시련을 최대한 겪어낸 셈이었다. 우리는 공포와 고독, 그리고 대단히 큰 좌절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고난의 순간을 맞게 된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마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중


'불의 시련'을 통과하는 소녀의 시선은 독자와 함께한다. 그 누구나 그녀의 우유부단함과 공포와 두려움에 동참하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레베카를 상대로 한판 승을 벌이는 느낌이다. 그 '불의 시련'은 우리가 살며 겪는 위기와 고난의 시간들을 소환한다.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저의를 의심하게 되고, 내일을 두려워하게 되는 시간들. 그것을 통과하고 남는 평온한 내일들. 그 틈에서 결국 잃어버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의 시간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일. <레베카>를 읽는 일은 그러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그래서 막무가내로 믿고 두려워하고 부서졌던 시간들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이 역설이 성장기를 관통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고보면 '레베카'의 환영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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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베카 진짜 너무 재미있죠! 사랑 얘기인가보다 하고 읽었다가 중간부터 깜짝 놀라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제가 쓴 리뷰 찾아보니 2018년에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책이라며 별다섯을 주었네요. [나의 사촌 레이첼]도 그래서 잽싸게 샀는데 아직 안읽었어요. 아, 블랑카님. 소설 진짜 너무 좋지 않습니까? 잘 쓰여진 소설 말이에요.

blanca 2020-06-10 14:54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역시 알고 계셨군요! 저 이 소설 읽고 너무 놀라서, 안 그래도 작가 소설 다 읽어볼까 이러는 중이랍니다. 진짜 너무 정말 잘 썼어요. 그리고 작가 사진! 와우, 뭐 이건 할 말을 잃었어요. <나의 사촌 레이첼>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 저도 왠지 사면 안 읽을 것 같아요. 이게 또 꼭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단편집을 도전해볼까 하는 중이랍니다.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책˝ 이 표현 정말 정확하네요. 흑, 너무 좋아서 안 읽은 눈 사고 싶어요.

moonnight 2020-06-10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프니 듀 모리에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참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레베카는 아직 못 읽었는데 blanca님 리뷰 너무 멋집니다. 꼭 읽고싶어요^^

blanca 2020-06-10 15:03   좋아요 0 | URL
달밤님, 꼭 읽으셔야 합니다.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게 책을 손에서 못 내려놓을 정도인데 작품성까지 탁월해요. 재미있는데 우아하고. 이 작가는 뭐지? 싶다니까요.

테레사 2020-06-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레베카가 그 레베카인가요?
히치콕이 만든 그 놀라운 레베카.......와우..놀랍네요..원작이 있었다니..저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히치콕의 작품 중에 아주 많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blanca 2020-06-10 15:05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새‘ 원작자도 이 작가랍니다. 그건 단편집에 있다 해서 찾아 읽어보려 합니다. 저는 ‘새‘도 참 좋았어요. 그냥 타고난 작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흑백사진이 너무 영화배우처럼 예뻐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레베카> 읽고 그냥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는 작가더라고요.

테레사 2020-06-10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에...즐거운 일이 한개 생겼네요 ㅎㅎ 요새 즐거운 일이 없어서..꿀꿀하던 차에...ㅎ 고맙습니다..

blanca 2020-06-11 09:07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즐거운 일에 일조를 담당했다니 으쓱합니다.

페크pek0501 2020-06-10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영화로 보았던 작품이네요. 반전이 일어나서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저도 책을 사 봐야겠네요. 좋은 소개에 감사^^

blanca 2020-06-11 09:06   좋아요 0 | URL
책과 영화가 약간 다르다고 하네요. 페크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간만에 참 몰입해서 읽었어요.

테레사 2020-06-26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히치콕의 레베카를 7월1일 저녁 7.30 광화문 씨네큐브서 한답니다^^

blanca 2020-06-27 09:03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몇 년 전인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이비에스에서 히치콕 특별전으로 영화를 쭈욱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때 ‘이창‘도 참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요. 기대되네요.
 

아프기 전까지 몸과 의존의 문제는 타인의 것, 다른 영토의 일이다. 작은 수술로 입원하며 수술에서 깨어나던 시간, 옆병실 환자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은 아무리 지성과 관념을 얘기해도 결국 한 평도 안 되는 육체에 갇혀있다는 뼈아픈 인식과 더불어 '돌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수술 당일 나는 화장실을 스스로 갈 수 없었고 다음 날 모든 일상이 갑자기 대단한 일이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변했다. 많은 환자에게는 보호자가 있었고 그들의 투병은 누군가의 간병, 희생과 얽히고설켜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생애 주기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회는 그 기간의 생산성과 독립성을 전제로 삶을 규정한다. 그 나머지 기간, 우리는 소위 민폐가 된다. 비용이 되고 성가심이 된다. 건강하고 젊은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우리 모습만이 반드시 어떤 생산력을 보이고 타인에게 돌봄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때의 기간만이 진짜 삶처럼 얘기될 때 우리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늙고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김영옥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이 책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낯설다. 여섯 편의 글은 새벽 세 시, 우리가 가장 유약해지고 감상적이 되는 시간, 가장 고독해지는 시간 감당해야 하는 늙음, 고통, 투병, 간병 등 이 모든 육체의 쇠락,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 안에 가두어두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의 담론의 현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시민'이고 그 돌봄이 오롯이 사적인 영역으로만 할당되지 않는 그곳에 대한 지향과 소망이 펼쳐지는 장이다. 특히나 이러한 돌봄노동이 성차별적으로 가부장 제도 안에서 여성의 희생이자 도리로 간주되는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 두드러진다. 병실에서 아내나 부모를 간병하는 남성의 모습은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남자 간병인들도 보기 힘들다. 


돌봄위기는 '독박'의 구조로부터 온다. "늙고 아프면 가족밖에 없는" 사회는 모두게 불안하고 힘겨운 사회일 뿐이다.

-<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


가족의 돌봄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하지만 간병인과 전문 요양 기관에서의 삶은 어쩐지 좀 서글픈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잔인하다. 그것은 간병을 하는 가족에게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도 어긋난 역학 관계, 죄채감, 부책감, 억울함을 남긴다. 우리 나라에서 공론화하기 참 힘들고 민감한 사안이다. 할머니의 말기암과 치매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가족은 불화했다. 그것은 이미 중년이 된 손녀인 나에게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가족 전체가 감당하려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타인의 손길을 좀 빌려도 괜찮지 않았을까? 누군가 온전히 자식이라는 몫으로 감당하려다 했던 실수들, 감정의 예기치 않은 표출들이 효의 연장선상에서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가족이 다 감당하려 했을 때의 비극을 나는 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훌쩍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사람, 약자를 가족 안에서 감당하지 못할 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얘기들이 담론화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치유의 느낌이 있었다. '시민적 돌봄'이라는 용어가 낯설고 생경하면서도 위로가 된다. 모든 돌봄이 가족 안에서 감당되어야 하는 사회는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이지은의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에서 소개된 알라나 샤이크의 TED 강연을 직접 찾아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학구적인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다. 그러나 그의 치매는 공격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의 생을 그대로 닮은 듯다정하고 부드럽다. 못 알아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전면에 나서는 치매의 풍경에서 아버지의 차분하고 너그러웠던 마음은 그대로 남아 돌보는 사람들과 감응하고 조응한다. 아무리 지적인 작업을 의식적으로 계속한다고 해도 치매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논리적인 확신은 없다면 그녀는 소위 '착한 치매' 환자가 되기 위해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손으로 하는 종이접기 취미들, 몸의 독립성을 연장시켜 줄 운동, 그리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기, 이 세 가지의 준비는 그녀의 인지 기능이 쇠퇴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을 예비시켜 줄 것이었다. 취약하고 의존적인 자신의 내일을 아예 상상하지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울림이 큰 대목이다. 인간의 취약성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모습은 슬프지만 현실적이다. 언제나 건강하고 항상 독립적인 나의 모습이 나의 자아의 본질이라 여기면 우리는 제대로 잘 늙고 아프고 죽을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듦은 어렵다. 아픈 가족을 나이 든 부모님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시리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 이 명확한 생애 주기를 외면하는 사회는 기만이다. 언제나 생산하고 소비하고 활력 징후가 뚜렷한 구성원만이 대우받는 사회는 무섭도록 잔인한 곳이다. 아프고 늙고 유약해지는 게 반갑지는 않지만 적어도 두렵지는 않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은 큰 이정표가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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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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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은 그 이전으로 건너갈 수 없다. 잠시 입원했던 병동에서 한 경험,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내는 소리, 무너지는 존엄을 목격한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나와 다른 종족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다 알면서 견디어낸 걸까. 나는 너무 순진했었다.


그것이 명분도 대의도 부족한 그래서 내가 기꺼이 머리로 정제된 말로 반대했던 전쟁이었다면. 그리고 그 전쟁에서 내 옆의 동료가 죽어나가고 때로 무고한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고 그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일이었다면.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난 후에 그건 잘못된 것이었다고 우리가 구태여 참가해서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던 거라고 확인사살까지 시켜준다면. 게다가 하필 나는 글을 쓰는, 그래서 나의 그 무참한 기억들을 목격자로서 다시 복기해 내며 경험해야 한다면. 죄책감과 패배감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한데 그러모아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다고 딸에게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작가라면. 그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팀 오브라이언은 실제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이 소설은 그 전쟁에 참전한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것이다. 함께 한 전우들, 전장에서 사라져간 그들, 돌아온 그들, 그곳에 오기 전의 팀 오브라이언, 그리고 지금 그렇게 다시 글을 쓰며 그들을 소환해 내는 작가의 시점, 시차가 스물두 편의 이야기에 혼재되어 있다. 너무 사실 같아서 이것은 흡사 소설이 아니라 그냥 팀 오브라이언의 자전적 경험의 치열한 기록물 같기도 하고 때로 너무 거짓 같아서 다 꾸며낸 팀 오브라이언의 전쟁 연작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혼란과 애매모호함에 독자를 던져놓고 그는 자신이 처했던 괴로운 딜레마들과 갈등들을 우리도 함께 경험하고 성찰하고 고찰하고 마침내 우리의 삶에 통합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전쟁은 순전히 자세와 운반의 문제였고, 그 혹 같은 등짐이, 일종의 타성이, 일종의 공허함이, 욕구와 지성과 양심과 희망과 인간미의 그 무디어짐이 전부를 차지했다. 그들의 원칙은 발에 있었다. 그들의 계산은 생물학적이었다. 그들은 전략이나 작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p.31

이것은 전쟁에 대한 대단히 직관적인 이해다. "그들은 전략이나 작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문장의 진동이 전해져 온다. 전쟁은 우리가 머리로 그럴듯한 언어로 정당화하는 명분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육과 폭력과 무모함과 비이성과 광기와 하루 하루의 생존에 더 가닿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늙은 가진 자들의 탁상공론하에 전장에 내몰린 어린 청년들의 발이 있다. 모든 더럽고 직시하기 힘든 것들을 우리는 그들에게 밀어버린다. 팀 오브라이언 자신도 있었던 곳이다. "용감함은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들은 너무 겁나서 겁쟁이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사실적이고 진실을 품고 있다. 용감한 군인, 승전 퍼레이드, 정의 수호, 약자 보호와 전쟁은 멀다. 


<레이니강에서>는 징집을 피해 캐나다로 달아날까? 를 고민했던 스물한 살의 팀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도망자를 묵묵히 지켜보고 다시 현실로 돌려보낸 놀라운 목격자이자 진짜 어른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이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어린 청년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 그 어떤 조언도 경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곁에서 침묵하고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지지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를 전장에 돌려보낸다. "그 남자는 알았던 것이다."는 이십 년 뒤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그 작가로서의 자아의 초자아다. 그것은 가상의 노인이었을 수도 있고 그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는 전장에 들어가서 마침내 이 글의 소재를, 주제를 몸소 살아낸다.


진실한 전쟁 이야기는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 그것은 가르침을 주지도, 선을 고양하지도, 인간 행동의 모범을 제시하지도, 인간이 지금껏 해오던 일들을 하지 않도록 말리지도 못한다. -p.89


이 이야기들의 가치는 이 이야기들이 순진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데에 있다. 명분도 합리성도 이성도 논리도 실종된 곳에서 이십 대의 청춘들은 하루하루 견뎌 나간다. 때로는 자신의 내부에서 악을 발견하고 처절한 잔인함을 목도하고 소스라치며 하나의 거대한 서사의 축이 되어나간다. 청춘은 너무 이르게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예상하고 옆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며 때로 아직 남아 있는 생에 전율하고 그것에 경도되기도 하고 삼자오 압도당하여 스스로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게 내가 전우의 죽음을 야기하기도 하고 그것은 평생에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으로 남는다. 팀 오브라이언은 그러한 죽어간 전우들을 이야기로써 다시 부활시키며 죽음에 맞선다. 그는 사라졌는가 싶으면 다시 돌아와 자신이 하는 얘기의 진실성의 근간을 흔들고 독자를 깨우고 때로는 그 행위 자체로 이 이야기 모두가 소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임을 방증하는 교묘하고 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진실한 전쟁의 이야기는 삶 그 자체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며 그렇다면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전쟁을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그 이야기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지점에서 그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나는 내가 느꼈던 걸 당신이 느꼈으면 좋겠다. 이야기의 진실이 왜 때로 실제의 진실보다 더 진실한지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다.

-p.210


팀 오브라이언이 바란 바다. <죽은 이들의 삶>이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기민한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다. 그럼에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 또한 진실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그가 서두에 밝힌 것은 지당하다. 그의 잃어버린 그 아름답고 슬픈 첫사랑의 이야기의 평행우주적 결론은 이야기의 힘을 설파한다. 모든 사라져간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그 사랑을 다시 그러모을 수 있도록 자신만의 이야기로 재편한 그의 마침표는 너무 울림이 커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모두에게는 상실이 있고 그것을 팀 오브라이언의 방식처럼 다시 그러모아 부활시키고픈 소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그의 결론은 언제나 옳다. 그가 작가로서 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구원했듯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모두의 슬픔과 상실과 고통을 구원하는 상상을 해본다. 경이로운 이야기다. 


나는 어리고 행복하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p.282


죽음 앞에서 죽음을 부정하고 생 앞에서 생을 부정하고 지금 여기에서 생을 긍정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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