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중년의 내가 인정하기에는 조금 안타깝지만 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느끼는 감성이, 쓸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어딘가 한 구석은 열려 있고, 날것의 경험은 겉돌지 않고, 소통과 교감에 대한 기대를 속단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애타는 간절함이 서려 있는 이야기가 있다. 김연수가 그랬던 시간에 만든 이야기들을 신형철 평론가가 갈무리하던 시간을 기억한다. 쓰고 해석하고 느끼고 마무리하는 둘의 궁합은 정말이지 최고여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이야기가 너무 좋은데 그 이야기를 다시 복기하며 내가 놓친 것들을 꼼꼼히 챙겨주는 평론가의 마무리까지가 소설가의 작품의 연장선상인듯한 느낌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상기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잊어버린 감각이 되돌아오고 이젠 다시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느낌들을 다시 맛보았다.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일곱 작품과 짝꿍처럼 곁들여 있는 신진 평론가들의 평론도 다 함께 마저 읽어버렸다. 물론 내가 충분히 젊었을 때 한창 젊었던 소설가와 비슷한 평론가의 평론을 읽으며 느꼈던 그 시간의 감동의 진폭과 결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감동을 충분히 기억해 낼 만큼 좋았다. 


강화길의 <음복>은 아직 제사문화가 남아 있고 곧 화자 같은 올케를 맞이하게 될 지 모를 지금 나의 상황을 곱씹어보게 했다. 비판없이 전승되는 가부장 제도의 집약인 '제사'에서 그것을 주도하는 남성들의 역할과 그들을 보조하고도 자신이 한번도 본 적조차 없는 상대 배우자의 조상에게 절조차 나가서 할 수 없는 여성들의 희생과 그 틈의 긴장, 감정의 소진이 신세대 며느리의 시선 앞에 생생하게 정경화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고 골치아픈 모든 문제들로부터 보호되는 남편을 사랑하는 '나'의 모순은 결국 이 젠더의 구조화가 미치는 여성들 간의 갈등, 암투로 교묘히 왜곡되고 있음을 간파한다. 대목마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고 비판 없이 그러한 가족적 전통 서사를 받아들였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은행의 계약직이었다 늦깍이 대학생이 된 화자가 여성 강사와 만나 교감하고 오해하고 어긋나며 역설적로 그녀가 걸어간 길을 답습하게 되는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최은영 특유의 큰 서사 없이도 삶의 어떤 그리운 정경을 불어내는 재주와 그것에서 확장되는 사회적 소외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만나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화자의 자문에 깊이 공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똑똑하고 당차던 그녀들이 사라져간 길을 다시 꾹꾹 눌러 밟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의 질량감을 길어올리는 작품이었다.


김봉곤의 <그런 생활>은 허구의 소설이라기보다 작가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커밍아웃과 애인과의 동거 생활에 대한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에세이 같았다. 여전히 유쾌하고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으면서 삶의 행간의 의미를 끌어올리는 작가의 능력은 그의 성정체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특히나 화자의 책을 읽고 난 어머니가 사투리로 "니 진짜로 그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라고 묻는 대목에서는 그 장면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 막상 심각한 장면인데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에 찍힌 방점은 많은 것들을 내포한다. 어머니가 장성한 아들에게 기대하는 전형적인 기대치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그런'이 비극적인 신파로 전락하지 않는 데에는 분명 김봉곤 작가의 생에 대한 활달한 긍정과 씩씩하고 리드미컬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자체의 생동감이 하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타협, 수긍인데 이야기는 침잠하지 않고 왜 이리 유쾌하게 역동적인지 나도 그의 '그런 생활'을 어느새 인정하고 이해해버린 듯한 느낌.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어느 구석인가 테드창을 떠올리게 하는 단서가 있다. 우리의 집단화된 구조화된 사고체계를 격자로 실체화하고 그 안팎을 넘나드는 화자와 이단아 같은 친구의 관계망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어느새 우리 안에 고착화된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고정 관념, 계승되는 각종 제도와 교육에 관련한 그 경직된 틀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여지없이 상큼하고 창의적이었다. 결이 아직 촘촘하지 못하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시간과 함께 충분히 숙성할 것이라는 기대가 되는 작품.


장류진의 <연수>는 내가 삼십 대 중반이 넘어 중년의 여성 강사에게 받았던 운전연수를 떠올리게 해서 반가웠다. 모든 것에서 엄친딸인 화자가 운전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그녀를 교묘하게 자극하고 결국 독립시키려는 강사의 모습이 유사 모녀 관계를 연상시키며 어떤 현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아들을 키워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평범한 부모로서 느끼게 되는 어떤 상실감감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가 살아오며 체득한 사회적 제도망에서 자신들이 낳고 키워낸 자식이 일탈할 때 부모로서 어떻게 반응하고 그것을 삶에 통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참신한 작품이라 읽고나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이야기였다. 


전반적으로 모두의 작품이 건드리는 사회적 통념과 경직화된 구조의 공고함은 어떤 유연함을 사고의 전환을, 도약을 향해 약진하는 느낌이다. 서사는 참신하고 문장은 구어적이고 결론은 열려 있다는 공통점에 기대어 오랜만에 모든 단편에 집중해서 즐거움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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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10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 최근에 다들 좋다고 하던데 블랑카님도 별다섯을 주셨네요. 거침없이 저도 지르겠습니다.

blanca 2020-04-10 14:39   좋아요 0 | URL
일단 다락방님, 재미있어요. 보통 단편들은 인내심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이번 작품들은 하나 같이 그냥 재미있어서 즐거워서 읽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또 가볍지도 않고요. 그저 ‘인정‘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책값도 착하고요. 표지도 예쁘고 이러고 보니 완전 영업 중이네요. ^^

moonnight 2020-04-10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그래요? 저도 헐레벌떡;; 보관함에 던져넣습니다. 일단 재미있다니♡ 얼른 읽고 싶어요. blanca님^^

blanca 2020-04-11 13:25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공감하는 대목이 분명 있어요. 제 기억에 사변적이고 추상적이고 한창 무슨 말인지도 모를 이야기들이 난무했던 시간도 분명 있었어요. 심지어 소설을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요. 그런데 이제 뭔가 꿈틀꿈틀 이야기들이 다시 피어나는 느낌이랄까요. 이 정도의 작가들이 계속 나와준다면 이야기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아, 너무 극찬을 하고 나니 사람에 따라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괜히 부담스러워지네요. ^^ 저는 정말 좋았어요.

감은빛 2020-04-10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 읽으며 저도 안타깝단 생각이 드네요.

저도 이 책 찜합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20-04-11 13:2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중년은 정말 영 나와는 먼 친정 엄마한테나 쓰는 용어인 줄. 하지만 현실은 이젠 완연한 중년이죠. 후회하시지 않으실 거예요. 추천합니다.

유부만두 2020-04-21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읽는 중이에요. 실은 블랑카 님께서 빼놓으신 단편에 분노했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읽고 있는데 줄어드는 남은 쪽들이 아쉽네요. 블랑카 님 감상이 어떤 면에선 더 제 맘에 가깝고요. ^^

blanca 2020-04-21 20:40   좋아요 1 | URL
혹시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좀 잘 안 읽히긴 했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이야기였어요. 전반적으로 아주 가벼운 이야기들은 없었고 너무 무겁고자 했던 이야기도 없어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체험을 글쓰기에 활용할 때는 자칫 독자와 유의미한 접점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하며 공감을 얻으려면 그 이야기는 내면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본질로의 천착과 외연으로의 확장의 균형점을 적절히 찾아야 할 것이다. 우울증에 25년간 시달린 박물학자 에마 미첼이 일 년 동안 집 주변의 숲속을 산책하며 만난 야생식물과 동물, 곤충을 수집하고 배열하여 사진찍고 그리고 기록한 이 관찰기는 그녀가 완벽하게 치유되었다는 과장된 결말을 제시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있는 힐링의 여정을 제공해준다. 11월 6일 그녀는 숲속에서 산사나무와 가시자두와 화살나무와 들장미와 너도밤나무 가지를 주워 펼쳐놓고 사진을 찍어 이 책의 삽화를 만든다. 그 삽화를 들여다보는 나는 단 한번도 그러한 것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명명하며 관찰한 경험이 없어 어느 것이 어떠 이름에 대응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한참을 멈추어 그녀가 펼쳐놓은 색과 빛에 젖는다. 자연의 그 무수한 다양성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생존의 주기에 경탄하다 보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겪는 모든 고단한 것들도 결국 어떤 섭리에 귀의할 것임을 믿게 된다.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책이다.
















일본계 작가의 십 대 아들이 영국의 공립 학교에 진학하여 겪게 되는 계층과 인종의 긴장과 갈등의 성장기는 쉽게 읽히고 공감의 영역이 넓다. 특히 사춘기 아이를 기르는 부모라면 아이가 학교에서 겪게 되는 각종 갈등 상황에 저자인 엄마가 반응하는 공감어린 대화의 방식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을 것같다.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거하여 작동하여 결론적으로 위계를 만들어버린 영국의 교육 체계는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 학교와 저소득층이 다니는 공립학교가 연습하는 수영장 레인을 노골적으로 구분하여 운영하는 모습에 특히 놀랐다. 아이들 마음에서는 자연스럽게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명확한 경계와 장벽이 자리잡고 때로 그러한 낙인을 서로에게 붙여 도발하는 현장에 어른이 어떻게 현명하게 개입하는지에 대한 예시는 씁쓸한 한계를 노출한다. 평등과 자유가 어떻게 절충 지점을 찾아야 하는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현장에서부터 가장 사려 깊게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른들의 방관과 편견과 이기심이 어떻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 현장에 파고들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 같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혼란에 왠지 낯익은 묘사들은 기시감이 든다. 헤밍웨이는 쉽고 짧은 영어로 이야기를 탁월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많은 단어나 복잡한 문장 구조를 쓰지 않고 툭툭 던지는 짧고 활력 있는 문체로 그 어떤 공간과 사건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그의 재주에 경탄스러웠다. 위대함이란 이렇게 태어나는 것같다. 배의 구조와 관련한 전문 단어들은 사실 잘 와닿지 않아 아쉬웠다. 한글 단어를 찾아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바다와 거대한 물고기를 상대로 처절한 사투를 벌이다 결국 다 잃고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진 노인의 모습은 인간의 삶 자체의 은유 같아 가슴이 저릿하다. 그러한 노인 곁에서 훌쩍이는 소년의 모습은 노인의 그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시도가 가지는 궁극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듯하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사랑, 공감, 소통. 그리고 우정. 짧디짧은 책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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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4-09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지요?
아이들 학교 안 가니까 많이 힘드시겠지만요~.^^;;
˝개인적인 체험을 글쓰기에 활용할 때는 자칫 독자와 유의미한 접점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하며 공감을 얻으려면 그 이야기는 내면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본질로의 천착과 외연으로의 확장의 균형점을 적절히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 읽고 반성합니다. 딱 저에게 해당되는;;;;
하지만 저처럼 글을 잘 못쓰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을 도리가 없더라구요.^^;;;
글을 쓰다보면 블랑카 님처럼 잘 쓰게 될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요???응??^^;;;;
좋은 글 잘 읽었어요!^^

blanca 2020-04-09 09:21   좋아요 0 | URL
아이들도 이제 두 달째에 접어드니 점점 지겨워지는 것 같아요. 오월이라도 개학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게다가 온라인 개학이 여기는 처음이라 그런지 버벅대고 시행착오가 많아서 여러가지로 어려워요. 미국도 빨리 진정되고 빨리 전세계적으로 확 사그라들어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에잇, 라로님 이건 저한테 하는 이야기였는데요? 한국은 지금 봄이 한창이라 이 상황이 더욱 실감이 안 납니다. 다만 갑자기 미세먼지가 확 사라져서 실감해요. 작년 이맘때 미세먼지 대단했었거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이 시간 잘 이겨내기를 바라요.
 
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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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문학 책이나 사회과학 서적과는 친하지 않은 편인데 이백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핑크빛 책자에 반해 버렸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연구하는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의 형사사건 관련 자료에 대한 일종의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적절하게 진지하고 적당하게 가벼운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한 책이라 쉽게 읽히면서 역사가가 아카이브와 역사, 사회적 현상, 심지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에 대하여 많은 알찬 앎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아스날 도서관의 사료를 찾으러 가는 저자의 풍경이 마치 단편처럼 묘사되어 있는 부분도 흥미롭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현명할 수 있는 역사가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아 모처럼 풍요로운 읽기를 경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시하고 엉뚱한 일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이 오면, 역사가라는 이 피곤하고 강박적인 직업에 대해 자문해보게 된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그저 잃어버린 시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겠다는 이상에 바쳐진 시간일까?-p.25


참으로 솔직한 발언이다. 그가 역사가라는 직업만 아니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18세기의 어마어마한 아카이브의 바다에 질식할 듯이 익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방대한 자료의 양에 질리고 그 자료를 해독하며 의미를 끌어올리는 과정은 21세기의 첨단 기술과 멀어 보인다. 아무 의미없고 성과 없는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도 비켜 가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의 좌절은 눈부신 통찰로 이어진다.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착각,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진실을 보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착각을 깨뜨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진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경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명령과 그럼에도 진실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 사이에 난 길은 좁은 길일 때가 많다.

p.118


사람에게는 그가 구태여 학자나 저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 느낌, 이론을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 진실이 핵심이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가 때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진실을 버리지 않는 길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인간이라면 사수해야 하는 절대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미끄러진다. 저자는 그 지점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언어로 낚는다. 모호하고 애매했던 지점들이 이 이야기 안에서는 맑고 투명하게 떠오른다. 역사가의 개인적인 아카이브가 보편적인 대중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책은 특수하거나 고답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누구나 이 역사가의 아카이브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저마다의 깨달음의 순간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함부로 단언하고 합리화했던 순간들에 대한 성찰의 도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인식, 나의 해석, 나의 판단의 오류를 점검할 수 있다. 


바스티유 감옥 안의 남자는 아내에게 헝겊에 편지를 써서 빨랫감 사이에 숨긴다.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그 편지의 수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원한 절차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뭉클하다. 남자는 감옥의 빨래하는 여자에게 만약 편지가 아내에게 잘 전달되면 부디 양말을 빤 뒤 파란 실로 아주 작은 십자가를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십자가는 끝내 남지 않았으므로 그 편지는 아내에게 가 닿지 않았다는 추정을 하는 아를레트 파르주의 해석은 지극히 개별적이지만 이 무명의 남자가 아내에게 전하려고 했던 간곡한 메시지의 무게를 헤아리는 연민이다. 그의 아카이브 안의 사연들은 시대와 장소의 경계를 훌쩍 넘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와 닿는다. 우리 모두 어려운 순간에도 반드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간절하게 상대에게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이 좌절되더라고 그 마음만은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세대에 이러한 것을 헤아려 줄 누군가가 우리의 그 잃어버린 소망을 짐작해 줄 것이다. 역사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라는 방증 같은 책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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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20-04-0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한테 올 책들 중 한 권인데, 리뷰를 읽고 이 책부터 읽어야지 생각했어요. 추천 꾹. :)

blanca 2020-04-02 18:31   좋아요 0 | URL
와, 찌찌뿡이네요 ^^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랜만이에요, 302moon님.

2020-04-13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답답하고 불안한 나날들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2020년의 1사분기가 지나가고 있다. 외출도 약속도 교류도 수업도 없다. 전염병이란 걸린 자가 어떤 낙인을 부여 받기 쉽다. 동선은 때로 타인을 통해 내가 위협 받을 수도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경로가 되어버렸다. 예전 같으면 이웃의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서 함께 타고 인사를 나누는 게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일처럼 보인다.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된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참 이 시기와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칠백 페이지의 분량에 질려 그냥 읽지 말까 싶었다. 그런데 시작하자 마자 나도 모르게 그 칠백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모스크바의 호텔에 가택연금된 옛 제정 러시아의 백작의 이야기는 9평 남짓의 방에서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를 보여준다. 호텔 바깥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종신형을 받은 로스토프 백작이 그 호텔 안의 종업원들과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고 낳지도 않은 딸을 키워서 어엿한 피아니스트로 세상에 내어 보내는 과정은 묘하게 담담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우아하지만 가라앉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유쾌하다. 백작이라고 내도록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는 한때 호텔 옥상에서 투신하려 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잡역부는 달콤한 벌꿀을 나누어 줌으로써 백작을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건져낸다. 거창하거나 현학적인 철학 대신 근면하고 소박한 노동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그가 직접 수확한 당밀을 나누어 먹으며 생의 의지를 다시 재확인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살게 되는 계기는 이러한 평범한 일상의 번득이는 아름다운 순간을 재확인함으로써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이 시기의 금언으로 간직하고 싶다.
















번역되기를 고대했는데 실제 신간에 떠서 깜짝 놀랐다. 딘 쿤츠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실제 코로나19에 대한 예언적인 부분이 나온다고 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우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갑론을박이라 확인해봐야겠다. 꼭 그 대목 아니더라도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해보고 싶었는데 기대가 크다. 소설이 경제, 정치 분야의 전망보다 미래를 더 정확히 전망할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주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현실화할 무한한 힘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때로 입밖으로 내어 이야기되는 순간 실현 가능성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좀 불안해 질 때가 있다. 카뮈의 <페스트>는 그런 면에서 섬찟하다. 카뮈는 인간들에게 그 끔찍한 질병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얘기하며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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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3-28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는 사놓고 못 읽었는데 책무더기 중 아래에 깔려있(다고 추정되)어서 찾기도 만만찮-_-;;;;;;;;;;;;;
하여간; 재미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저도 언젠가 읽으리라 희망합니다^^ 딘 쿤츠 궁금해요. 블랑카님 서평 기대합니당^^

blanca 2020-03-28 19:50   좋아요 0 | URL
두꺼워서 저도 처음에는 좀 읽기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런데 한번 읽기 시작하면 그냥 술술 넘어간답니다. 이 작가의 다음 책도 기대됩니다. 아, 저 딘 쿤츠 책도 정말 기다렸는데 출간일이 무려 4월 12일이라 좀더 기다려야 될 듯해요. 이건 원서조차도 잘 없더라고요. 여튼 읽고 사고 싶은 책은 쌓여만 갑니다.
 
해부학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부학 책 《그레이 아나토미》의 비밀
빌 헤이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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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 하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메디컬 드라마를 떠올리게 되지 사실 동명의 위대한 해부학의 고전을 쓰고 요절한 저자 헨리 그레이와 삽화를 그린 같은 이름의 헨리 카터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경학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만년을 함께 한 빌 헤이스 또한 자기만의 전문적인 관심사 분야를 파고들어 꾸준히 글쓰기를 한 작가로 이 <해부학자>를 통하여 그는 이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두 명의 발굴되지 않은 삶의 궤적을 자신이 직접 참가한 해부학 수업의 과정과 함께 엮어 그려 나간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인 헨리 그레이는 문자로 된 사적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아 그의 삶을 직접 추적하는 데에는 적잖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천재 해부학자 외과의사는 삼십 대에 천연두로 요절하여 자신의 책이 중쇄를 거듭하며 의대생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지 못한다. 그레이를 묵묵히 보좌하며 막대한 양의 정밀한 삽화를 그리며 책의 완성에 기여한 헨리 반 다이크 카터는 상대적으로 나름대로 성실하게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한 일기를 남김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레이의 드러나지 않았던 그간의 행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카터는 그레이에게 어떤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레이의 추진력과 카터의 무식할 만큼 집요한 성실성으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반짝 천재성을 드러내었던 그레이의 삶이 전염병으로 일순간 너무가 허무하게 중단된 반면 카터는 비교적 노년까지 남아 자신들의 역작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모습과 또 그것에 따른 열매를 맛보게 된다. 


저자 빌 헤이스는 원래는 헨리 그레이의 전기를 쓰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젊은 학생들과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해부학 개론" 수업을 듣고 해부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두 헨리가 탐구하고 천착하며 써 낸 해부학 교과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도 점점 더욱 깊어짐을 느끼며 이야기는 좀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며 더욱 다채로워진다.  많지 않은 자료를 재구성하여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두 젊은 해부학자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며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랑과 작별, 상실의 이야기를 슬며시 끼워넣는 손길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은 공백은 그래서 저자 빌 헤이스 자신의 삶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많은 시신들 사이에서,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체와 죽음은 각기 배우는 곳이 다르다. 인체는 해부학 시간에 시신을 해부하며 배우는 거지만, 죽음이란 사망-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p.359



해부학자의 삶의 동행자였던 빌 헤이스의 연인은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에게 헌정되고 이 책을 통하여 그는 다음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헨리 그레이와 헨리 카터는 나란히 저자의 삶에 나름의 힘을 행사한 셈이다. 사람의 몸을 해부하여 신체를 알고 거기에 생기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그것의 올바른 가이드 라인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다시피 하여 만들어 낸 길이 남을 명저, 그것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결국 맞이하고야 마는 상실과 죽음이 아름답게 교차하는 책이다.  학생들에게 적절한 해부학 교과서를 남겨주고자 했던 어쩌면 그 평범했던 의도가 두 젊은이의 열정과 성실성과 만나 맺어낸 우연한 눈부신 성취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고 진실성 있게 복원하고자 했던 저자의 지난한 노력의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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