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반지갑을 쓰다가 처음 내 손으로 장만한 장지갑을 골똘히 들여다 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물건을 가지지만 그 물건만 내가 죽고도 완강하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소비가 주는 환상은 어쩌면 불멸에 대한 기만적 위로가 아닐까, 하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후대에 역사 속에서 추려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 숱한 익명 속에 스러질 것이고 어쩌다 나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족적을 남기게 된다면 책을 좋아했던 할머니 정도로 추억되어 한 문장 정도로 남을까.

 

그러니 16세기의 프랑스 농부의 이야기는 태반이 문자를 쓸 수 없었다는 그 시대에 운명의 장난으로 기이한 송사에 휘말리고 그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21세기의 나에게 날아올 이유가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시사점을 남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가는 나날들이 몇백년이 지나고도 과연 유의미한 가치를 지닐까. 지금 우리는 언어를 써서 자신의 일상이나 읽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이렇게 사이버 공간에 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마저 소실된다면 아니 가까스로 그것들이 남는다고 해도 그 행간, 사이에서 비어져 나간 것들은 어떤 식으로 유추되고 정리될 것인가.

 

 

프랑스의 근대사 전문가인 저자가 살려 낸 16세기 가장의 가출로 벌어진 한 가정 내에서의 일련의 소동은 그것을 법정에서 지켜보고 내러티브의 주축이 되기로 한 판사 자신의 삶, 오늘날 여기에서 그것들을 복원해 내고 추정하고 추측하는 우리들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아버지의 곡식을 훔치고 난 후 벌어질 일련의 후속타가 두려워 어린 아내와 아들을 남기고 돌연 가출해 버려 피렌체 산맥을 넘어 심지어 적들을 위해 전쟁을 하고 다리까지 잃게 된 마르탱 게르가 마침내 귀향한 후에 맞닥뜨린 현실은 기함할 노릇이었다. 자신을 자처한 낯선(아마도) 사내가 아내와 동침하여 아이까지 낳고 버젓이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떡하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초엘리트 코스로 엄친아였던 판사 코라스는 이 기이한 사건의 사기극의 주인공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자신이 담당했던 소송에 관련된 모든 것들과 자신의 주석을 남기게 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사기꾼 가짜 마르탱에게 자신을 이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톨릭이 대세였던 당시에 가랑비에 젖듯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프로테스탄티즘에 물들며 그는 자신이 딛고 섰던 그 굳건한 지반이 와해되고 있음을 알았을까. 이 출세에 기민했던 인문주의자는 가짜 남편의 품 안에서 행복해했던 마르탱 게르의 아내의 그 납득하기 힘든 변절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 삶에 대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생각의 제단을 쌓아간다.

 

책임감 없이 집을 떠났다 나무 의족을 달고 돌아온 남편, 그 사이 남편을 자처하는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 남이 일구어 놓은 것들을 거짓 행세로 가로채고 버젓이 그 안의 따뜻한 사랑까지 소유하려 했던 아르노 뒤 틸이 남긴 흔적은 지금 여기에 숨겨 놓은 어떤 추악한 욕망, 진실에 대한 소망, 타인에 대한 미움, 질투가 한데 어우러진 삶의 축약본 같다. 지근거리에서 커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 어떤 조망 아래에서는 한없이 사소한 것들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 조망은 '읽는 일'에 기대는 바가 크다.

 

 

 

 

 

 

 

 

 

 

 

 

 

 

 

 

프루스트는 독서를 우정에 비유한다. 그 우정은 부담없고 진실한 것이다. 내가 하는 실수, 언변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든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그 친구가 나의 생 전체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젊은 날 존경해 마지 않았던 대문호 러스킨에 대한 무조건적 경배의 철회는 그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독서에 관한 소고에 잇대어 러스킨의 아미앵 기행에 대한 주석, 화가 샤르댕과 렘브란트, 모로, 로세티에 대한 글들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예술 작품에 할애한 섬세한 묘사와 감상, 화가 엘스티르가 화자에게 끼치는 지대한 영향 등이 가지는 깊이를 이해하게 해 준다. 프루스트가 지향했던 어떤 진실, 실재에 대한 천착의 결정체가 위대한 화가들이 도달한 지점에 있다고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번역의 체를 통과한 프루스트의 목소리는 그 어떤 모호함과 사변적인 분위기 안에서 명료해지지 않아 때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다.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이 지루하면 지루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프루스트 자신이 이야기한 바가 있기 때문에 사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은 좀 부담스럽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 그런데도 그가 어쩌다 토로하는 자신의 깨달음들은 너무 귀중해서 도저히 그의 곁을 맴도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타인의 구미에 맞추어 일할 때 우리는 성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할 때 그 결과는 반드시 누군가의 공감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한 무엇이 아무에게도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법이다.-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중

 

암요,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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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발력이라고는 없어서 상황의 변화, 임기응변, 무질서 이런 것들에 취약하다. 그런데 이제 십육 개월 들어선 녀석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신다. 누나는 전혀 관심없어했던 변기와 신발장에 이 아이는 거의 탐닉 수준이다. 하루의 반나절은 현관에나가서 신발을 만지고 맞지도 않는 자기 발을 꿰어 넣어 안방으로 달려오고 막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 속 물을 휘젓는다. 몇 번이나 훈육을 한답시고 정색도 해 보고 심지어 맴매 시늉도 해보지만 그 때 뿐이다. 다른 말귀는 척 하니 알아들으며 이러한 긴요한 지시 사항은 못 알아듣는 척 하는 내공도 보인다. 그래서 안으로 들여놓으면 서랍이라는 서랍은 다 열어 내용물을 다 꺼내 바닥에 늘어 놓고 높은 곳이라는 곳은 다 올라가서 각종 위험한 묘기를 부린다.....

 

그러다 보니 나는 가택 연금 상황이다. 막간의 독서는 유일한 정돈된 세계다. 현실이 너무나 불안하니 책 속 세계에 더 빠져드는 기현상이다.

 

 

 

 

 

 

 

 

 

 

 

 

 

 

아, 좀 전에 다 읽었는데 토마스 하디는 천재가 분명하다. 하녀인 어머니와 석공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신부의 꿈을 좌절당한 그가 소설가로 어마어마한 선금을 지급받을 만큼 명성과 그에 비례하는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며 일생을 보내다 말년에는 시인으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마치 <테스>의 주석 같다. 어떻게 보면 시골의 절세 미녀가 그 미모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란만장해지는 조금은 진부한 스토리라인임에도 그 클리쉐의 결마다 배어든 하디의 문장들과 그 스토리를 엮는 손길이 눈부시다.

 

그들은 계속 만났고,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날마다 그 이상스럽고도 장엄한 중간 지점,

즉 여명에, 보랏빛이나 분홍빛 새벽에 만났다.

-p.200

 

남녀의 만남을, 그 만남 속에 소리 없이 살그머니 스며드는 사랑의 묘사를 이런 문장들로 엮어 낼 수 있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여주인공의 질곡의 삶은 처절한 비장미가 느껴지지만 옹색하지 않다.

 

그녀가 지나갈 때 이 작은 물웅덩이 위로 별빛도 재빨리 지나갔다.

그곳에 반사된 별빛을 보지 못했더라면 머리 위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음을 몰랐으리라.

거대한 우주가 그렇게 하잘것없는 곳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p.349

 

현실이 너무 단조로워서(사실 이제 단조로운 게 얼마나 감사한 지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테스의 사연 많은 삶의 곡절에 몰입되어 그녀가 너무 가엾게 느껴졌다. 부적절한 시기에 너무 늦게 만난 사랑으로 계속 좌절되는 그녀의 소망,꿈들의 나약함이 눈물겨웠다. 스물 언저리의 여자, 아니 청년들이라면 세상의 그 허술한 얼개 틈에 발을 빠뜨리는 실수를 곧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운이 나쁘면 그 실수가 발목을 잡는다. 테스의 삶이 슬픈 것은 하디가 바로 그 청춘의 그 나약한 지점을 너무나 절묘하게 포착하여 형상화해 낸 힘에 기댄 바가 클 것이다. 삶은 리허설이 없다,는 그 가혹한 진실의 민낯을 조금은 광포한 결말로 다시 한번 마주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이 정돈될 수 없는 일상에 기대게 된다. 나중엔 눈물나게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머리 위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음을 기억하기로 하자, 나에게 하는 말. 바닥에는 온갖 물건들이 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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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2-0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분명히 아까 북플로 점심시간에 댓글 달았는데 제 댓글 어디갔어요? 네? ㅠㅠ 북플이 먹었나봐요..

블랑카님 글 정말 좋다고, 그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테스에 저렇게 반짝거리는 문장들이 나오던가요? 새삼스럽습니다.

blanca 2014-12-05 20:37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어요? ^^ 아웅, 넘 좋더라고요. 이 세상엔 너무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제 다 읽고 죽을 수 있을지 그 전에 노안 오면 어쩌나, 이런 고민을 ㅋㅋ 합니다. 다락방님의 칭찬이 참 따땃해요.

icaru 2014-12-0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돈될 수 없는 일상이 도피처이고 안식처라는 것을 저는 좀 늦게 깨달은 케이스인데,, 일찌기 @@@ 테스를 안 읽었더래서 그런 걸까요?? ㅎ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했다고~ 어린아이를 거두는 삶은 실은 풍요로운 것일지도요... 이마저도 나중에 깨닫는다는요,,

blanca 2014-12-05 20:40   좋아요 0 | URL
저는 첫째 아기 시절 너무 힘들게 기억해서 지금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조금 더 즐기면서 여유를 가지고 그 예쁜 시기를 함께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둘째인 지금은 최대한 노력하려 하지만 현실은 --;; 끊임없이 불평할 거리를 양산하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게 요새 아기만 데리고 다니면 나이드신 분들이 다 지금이 이쁠 때다, 힘들지만 즐겨라,라고 약속한 듯이 이야기들을 하셔요.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 봅니다.

moonnight 2014-12-0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엉 저도 퇴근전에 분명 댓글 썼는데 어디로 간 걸까요. ㅠㅠ;;; 좌우지간 블랑카님 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테스를 꼭 읽어보겠다고.. 그랬는데ㅠㅠ;

blanca 2014-12-06 13:11   좋아요 0 | URL
아, 북플로 작성하셨어요? 아직 불안정한가봐요. <테스>는 정말 강추입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어요^^ 책이 아무리 좋아도 인내를 필요로 하면 연말에 힘들잖아요^^;;
 

이제 누군가에게 취미가 독서라고 밝히는 일은 다소 멋쩍은 것이 되어 버렸다.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는 이야기에 부모 교육을 받기 위해 모였던 아이 엄마, 아빠 들은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생명체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종이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나이들어가는 중년에게 행복한 순간이 된다는 것에는 공감하기 힘들다는 듯한 눈빛으로 느껴졌다,면 자격지심일까.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액정으로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시대에 '독서가'가 된다는 것은 조금 고독한 일인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재미있게 읽은 책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많았고, 그 책을 줄서서 서로 빌려주고 빌려받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책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책을 기반으로 건설된 사회에서 살면서도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고, 책이 액세서리에 불과한 사회에 살면서도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가 될 수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중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라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대우를 받지 않아도 어느 지점에서 책을 소유하고 읽고 해석하고 느끼고 정리하고 분류하고 내면화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 어떤 의의나 의미를 부여받고 싶은 소망이 크고 있었다. 왠지 위축되고 무의미하고 때로는 이 한정된 생, 공간에서의 그 종이 위의 검은 잉크 자국들에의 집착이 낭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적어도 말줄임표를 허용할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렇다면 한 차원 높은 세계에서 이 세계를 응시하고 해석하고 해체하고 형상화할 수 있었던 보르헤스에게 그의 눈을 대신해 책을 읽어 주었던 소년이었던 알베르토 망구엘이 개인적인 차원의 독서의 지평을 역사적인 것으로 확대한 그의 책을 읽는 일은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판형과 사백 페이지를 넘는 분량은 사실 그리 접근성이 좋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읽는 일'의 역사까지 천착할 만큼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시작하는 이 읽는 일에 대한 섬세하고 정성어리고 사려 깊은 천착은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이 상상한 미처 쓰지 못한 <독서의 역사>의 첨언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쉽게 접근할 듯하면서도 학구적이고, 정보를 제공하는 듯하면서도 사색적이다." 걸프전이 벌어지기 전 바그다드 고고학 박물관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이 직접 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자 중 가장 오래된 예인 진흙 조각에 파인 홈으로부터 마침내 즉각적으로 우리의 생각,느낌을 구태여 출판의 형태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이버로 유통시킬 수 있는 작금에까지 그 장대한 독서의 역사는 사실 우리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만들어 낸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은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저자의 미덕은 이러한 역사 현장의 복원이 죽어 있는 하나의 해설이나 주석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의 드라마인 것처럼 그려낸 상상력과 문체의 힘에 있을 것이다. 15세기 라틴 학교 학생들이 남긴 노트에서 복원해 낸 읽는 일의 자발적지평의 확대의 현장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하나의 연대기의 자잘한 기록에 그치지 않음에 놀라움까지 느끼게 된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자들 앞에 그 교실에서 노트의 빈 공간에 자신의 해석, 느낌을 끼적이는 청년들의 자태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바로 독서의 역사다. 이제 읽는 일은 더 이상 공적인 영역 안에 가두어진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은밀하고 내밀한 개인적인 것으로 마침내 옮겨 가게 된 것이다. 낭독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간들이 지나고 묵독이 허용되고 더 나아가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고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책 읽는 사람들이 편재해 있다는 상징으로서 펭귄문고의 출발을 이해한 그의 이야기는 오늘 읽고 싶은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당일 바로 받아 언제든 읽고 싶을 때 읽고 심지어 그 느낌, 감상까지 사이버 공간에서 공유할 수 있는 이 자유가 고독과 맞닿아 있다는 아이러니를 호사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한다.

 

'피그말리온 서점'에서 눈이 번 노작가에게 행복한 포로가 되어 책을 읽어주던 소년은 그 위대한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쓰지 않은 책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교를 부려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마치 이 책에 다 언급되었던 것처럼 짐짓 너스레를 떠는 작가의 계략에 어리둥절하다 독자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그에게 속아주는 것이 숱한 노고들이 녹아 있는 이 책에 대한 독자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을. 그러니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 이 책을 제대로 읽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독서의 역사>는 알베르토 망구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잡혀들어가는 행복한 포로 생활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이상 책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육천 년간 인간이 독서가로서 존재했던 과거에서 길어내는 하나의 위로이자 확신이다. 책은 결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독서가로 남는 일도 고독하고 위험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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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12-0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아이들 키우며 책을 읽는 일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요.
밤의 도서관, 담아갑니다.
올해 마지막 달의 첫날
두 이쁜이들과 행복한 날 보내세요^^

blanca 2014-12-02 13:2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잘 지내시죠! 아무래도 여유가 없다 보니 책 읽는 시간이 참 소중해요.
프레이야님도 연말 마무리 잘 하시고 더 행복하고 건강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라요^^
 

죽는 게 무섭고 늙는 게 언짢다. 한 해의 말미에 이르면 그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추운 바람, 훌쩍 커버린 아이, 무언가 조금씩 세월의 결이 아로새겨지는 낯선 나의 얼굴, 다음 해의 달력들. 이제 내가 살아 온 시간 만큼 더 살 수 있다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된다.

 

재미있는 책, 영화, 일상의 자잘한 불평 사항들, 가족에 대한 서운함, 놀라움, 소소한 기쁨 들을 주고 받다 갑자기 '죽음'이나 '노화'의 두려움을 가지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 아니, 설사 그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남는 것은 공감의 기쁨조차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제가 죽고 나서도 완강하게 버틸 물건을 사는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만큼은 이 물건과 영원히 살 것 같고 불멸과 손을 잡을 듯하다.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물이 우리를 이긴다고. 그러니 소비가 반드시 지탄 받을 말한 일은 아니기를. 그것마저 아니면 죽음과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사는 일은 끊임없이 소유하려는 무용한 시도들이다.

 

 

 

 

"바이제너가 나를 위해 네가 옛날에 치던 피아노로 <나비>를 연주해 주었다. 그 곡을 듣고 내가 받은 인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도대체 단 하나의 음조차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물론 이 작품 속에는 눈물이 솟구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 때문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해지고 말았단다. 멀어지는, 소멸해가는그 소리들은 노년의 모습이야. 해마다 하나씩 소리가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이윽고 더 이상 우리의 소리를 들려줄 수 없는 날이 오는 거야. 자기 뒤에 긴 울림을 남기는 사람, 자신의 힘을 우수한 이들에게 물려주는 사람은 행복하겠지. 내 마지막 시간이 이 먼 속삭임 같은 것이 되기를......

-미셀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 중 

 

슈만의 어머니가 아들의 음악을 듣고 묘사한 노년과 죽음은 그녀가 아들의 음악을 듣고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솟구치게 한다. 멀어지는, 소멸해 가는 소리들과 죽음으로 가는 우리의 삶을 교차시키는 그녀의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은 슈만이 왜 그토록 평범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처절하게 예민하게 자신의 내부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고통을 감지하는 촉수로 하나 하나 걸러내며 분투했는 지를 암시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슈만이 언어로 도저히 채집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소리화했는지 어휘의 광대함으로 분해하고 두드리고 모으고 펼쳐 내는 저자 미셀 슈나이더의 곡진한 노력과 아찔한 재능은 이 손바닥만한 책자에서 슈만의 삶을, 인간의 유한한 삶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예술의 그 무모하지만 한결같은 아름다운 소망을, 진정 제대로 적시에 형상화해내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한 살을 더 먹으려는, 이제 곧 불어올 살을 에이는 바람 앞에 서 있는 모두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책. 슈만의 음악을 잘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신병에 시달리며 세상에서 사랑했던 아내 클라라로부터도 점점 고립되고 자신의 내면에서까지도 추방당하는 이방인의 겉으로 드러난 삶은 주석으로 물러나고 대신 그가 노래했던 소리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의 수수께끼를 해독하려는 그 무용해 보이고 무모해 보이는 시도들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슈만은 정신병원에 28개월이나 갇혀 있었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자의적인 식사 거부에서였다. 그의 죽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슈만의 삶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묘사했던 죽음으로 가는 도강에서 그의 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소거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머니가 꿈꾸었던 죽음처럼 자신의 뒤에 긴 울림과 먼 속삭임을 떨군다. 그것은 슈만의 음악. 미셀 슈나이더가 "지상에 체류한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부채와도 같다."고 이야기한 것을 기억한다면 슈만은 음악으로 그 부채를 상환하고 떠남으로써 죽음을 완성한다.

 

산다는 것은 자꾸 빚만 늘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떠날 때도 홀가분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들은 또 삶 자체를 가혹한 것으로 만든다. 주어진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절히 수긍하는 일이란 편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모두가 슈만처럼 살 수는 없다. 떠나고 남는 것들로 우리의 삶이 규정지어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해의 끝머리를 부여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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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마치 귓전에 들리듯이 생생하게 꿈틀댔다. 한번에 다 읽어버리기 아까워 그리고 한번에 다 감당할 수 없는 격정의 양에 질려 되도록 음미하듯 읽고 싶었다. 분명히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러나 축약본에다 아직 그것들을 듣고 보고 느낄 깜냥이 안 되었던 터였던지 막연하게 음침하고 괴이한 느낌만을 받았었다. 이제 나와 나의 삶이 충분히 숙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니 죽을 때까지도 그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악덕의 화신 같은 사내와 당당하고 도발적이었던 여인이 나누었던 불멸의 사랑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지켜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날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캐서린의 친정집에서 함께 자랐다 그녀가 린턴가와 결혼함으로써 그 집에 함께 와 그녀의 딸까지 돌보게 되며 한 가문의 영락에 얽힌 사연을 지척에서 지켜보고 때로는 그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어 결정적 증언을 하기도 한 나이 든 하녀 넬리 딘의 회고담 속에 녹아 있다. 넬리 딘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나'는 록우드라는 런던의 신사로 린턴가의 오랜 저택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폭풍의 언덕에 사는 히스클리프로부터 세낸 청년이다. 4마일 정도 떨어진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위시한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와 우연히 그 집에서 묵게 되어 비몽사몽 간에 만나게 된 캐서린의 유령으로 인해 록우드는 이웃집의 내력을 하녀장 넬리 딘에게 조르게 되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폭풍의 언덕의 어쇼가에 업둥이로 들어오게 된 히스클리프의 사연을 풀어내게 된다.

 

집시의 외모로 거리를 헤매던 히스클리프가 어쇼 남매와 맺게 되는 인연은 파국의 전조가 된다. 사내애 어쇼는 히스클리프가 아버지의 사랑을 찬탈했다고 여기고 그를 몹시 미워하게 되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붙어 다니며 가망 없는 사랑을 키우게 되나 이웃집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반듯한 도련님 에드거와 결혼하며 히스클리프와 '폭풍의 언덕'을 떠나게 된다. 캐서린이 당시 하녀 넬리에게 독백처럼 내뱉는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시 같다. 어쩌면 캐서린의 이야기는 우리가 젊은 시절 소진해 버리는 그 많은 실패하는 첫사랑에 대한 하나의 소고 같아 가슴이 저릿하다. 누구나 그 때는 '그 아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듯한 아픎을 느끼지 않았던가.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여.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중략> 그 애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p.132

 

히스클리프는 지금까지 보고 들어 왔던 숱한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집시 같은 겉모습에 욕설과 악담과 폭력 그 자체다. 사랑하는 캐서린과도 격앙되어 저주와 폭언을 주고 받는다. 심지어 캐서린에 대한 애증은 그녀의 시누이와의 사랑없는 결혼의 강행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학대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상식적이지도 않고 연민을 자아낼 구석도 없다. 에밀리 브론테는 끝까지 히스클리프의 개과천선을 기대했던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다. 그는 여전히 그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캐서린 또한 자신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21세기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쉽게 용인될 수 없을 것 같다. 하물며 국교회 목사의 딸로 목사관을 평생 거의 벗어나지 못했던 19세기 초의 에밀리 브론테가 그려낸 이러한 인물형이 그 당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내었는 지 상상이 가 섬찟했다. 에밀리가 그려낸 두 남녀는 로맨스의 주인공들로도 현실의 인간형으로도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광포한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마침내 그들이 낳은 딸과 아들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려지는 저간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격정적이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애잔한지 책장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에밀리 브론테는 '죽음'에 세상의 '관습'에 고착된 '도덕관'에 도전장을 준엄하게 내민다. 그것은 억지스럽지도 않고 역겹지도 않다. "온 세상이 그 애가 한때 살아 있었지만 이제 내 곁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비망록"이라고 되뇌이며 죽음을 맞는 히스클리프의 죽음은 늙은 충복 앞에서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흔히 '끝'이라고 여기는 '죽음'도 뛰어넘어 간직하려는 그 무모하고 무력한 '사랑'에 대한 힘과 소망을 보여주는 것같아 울림이 크다. 밝은 곳만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은 쉬운 일이다. 어둡고 음험한 곳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욕망의 잔재를 끌어모아 잉걸불을 피어 낸 그녀의 위대한 펜 끝에서 가슴이 떨렸다.

 

위대한 이야기는 감히 불멸을 꿈꾼다. <폭풍의 언덕>은 그 어떤 모든 지평과 한계를 뛰어넘어 저 너머에 살아 스스로 생명력을 발한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온몸으로 반기고 천천히 다다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담대함은 에밀리의 실제의 삶, 죽음과도 닮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메시지는 시공간을 가르고 우리라는 과녁에 적중했다. 그녀는 우리가 감히 꿈꾸는 것들, 감히 밖에 내어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싸안고 펼쳐 보여준다. 그녀 앞에서 '감히'는 무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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