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산다는 것 - 삶의 끝에서 헤닝 만켈이 던진 마지막 질문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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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을 어린 시절 겪은 적이 있지만 죽음은 '나'를 주어로 한 것은 아닌 줄 알았다. '삶은 유한하다'는 명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프로이트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이 불멸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나에게도 얼마쯤 해당되는 이야기였나 보다. 작년 피부암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밤마다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생은 유한하다.'는 명제를 뼈아프게 실감했다. 긍정적인 면이었을까. 이후로 무언가를 마냥 기뻐하고 순간에 함빡 몰입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조직 검사 결과가 괜찮았다,고 해서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겁쟁이가 됐다. 누.구.나. 죽.는.다. 우리 모두 결국은 죽는다.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죽는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정말 안 무서워요? 이 모든 게 결국 끝나는데...거리를 웃으며 지나다니는 대학생들을 보며 아직은 생의 유한성을 실감하지 못하니까 그런거야, 라고 되뇌일 때도 있다. 생의 절반이나마를 통과하면 이렇게 되는 걸까? 이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 추운 겨울도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꽃 피는 봄도 그렇다. 그러면 모든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갑자기 생생하고 절절하게 느껴진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스무 살이 보는 벚꽃과 서른 살이 감상하는 벚꽃과 마흔이 감동하는 벚꽃의 질감은 엄연히 다르다. 달라진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책이다. 스웨덴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헤닝 만켈은 지금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그는 암투병을 하는 노년이다. 그가 복기하는 삶의 단편들은 흩어져 있지만 결국 유기적으로 묶여 한 작가가 사람으로 얼마나 진지하고 투쟁적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된다. 그를 스치고 지나갔던 비극적인 풍경들, 타인의 삶, 아름다운 공명의 순간들이 빛난다. 아프리카에 가서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의 곁을 지키고, 계속되는 내전과 살육의 현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투사처럼 기획했던 그가 마침내 내전의 평화로운 종식을 들었던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반추하고 젊은 시절 풋사랑과 추위 속에서 나누었던 육체적 교감을 추억하는 장면들은 하나 하나가 완결된 짧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는 주절주절 자신의 사적인 삶을 주워섬기는 게 아니다. 10만 년도 더 전의 빙하 속의 물과 10만 년도 더 후까지 위험성이 제거되지 않을 핵폐기물이 후손에 끼칠 영향에 대한 걱정까지 문명의 향유가 아니라 착취가 판을 치는 소외된 아프리카 대륙까지 거대하게 확대된 시공간의 자장에 그의 개인적 삶은 포개지고 확장되고 융화된다. 그러다 보면 그가 그렇게나 어렵다고 이야기했던 죽음까지 어쩌면 꽤 괜찮은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으로 생과 사를 축소하면 인간의 존재와 삶은 더없이 무의미하고 비극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 한없이 확장되다 보면 아름답고 거대한 모자이크의 한 부분처럼 딱, 여기, 지금에서의 생의 고결한 가치를 불러온다.

 

죽는다는 건 현존하는 인간의 전통 중 가장 위대한 전통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p.108

 

그는 스웨덴 사람이지만 생의 많은 부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결정"이 그의 평생을 관통해온 질문이라는 고백은 감동적이다. 사회의 변방에서 생존 그 자체에 매달리느라 다른 차원의 고민이나 사고는 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우리가 지금 자본주의의 공간 안에서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의 반대급부와 어두운 면면을 응시하게 한다.

 

정말로 중요한 모든 이야기들은 각성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5

 

나한테는 헤닝 만켈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죽음 앞에서 가감없이 "두렵다"고 고백하면서도 품위와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힘을 끌어모으는 노작가의 진지하고 섬세한 모습, 그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소외된 세계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노정, 자신의 삶을 거대한 역사와 공간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조망하는 시선은 나를 각성시켰다. 크레타에서 매일 안온하고 단조롭지만 한없이 고결하고 경건하게 느껴지는 하루를 채웠던 그의 읽기, 쓰기의 추억은 나를 떨리게 했다. "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그의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찡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세상에 여전히 예속과 압제가 있는 한 문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문명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책임의식이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고 새로운 은총의 순간들을 기대하며 살고 있다. 나 스스로 뭔가를 창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창작한 것을 볼 수 있는 기쁨을 아무도 내게서 빼앗아가지 않는 순간들, 내게로 오고 있는 순간들. 나에게 인생이 가치 있으려면 반드시 와야만 하는 그런 순간들을.- p.450

 

만켈의 에필로그. 2014년 이 에필로그를 끝으로 2015년 10월 5일 잠에서 깨지 못한 채 그는 두려웠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며 기다렸던 삶의 대미로 뚜벅뚜벅 평화롭게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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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7-01-1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닝만켈의 이 책을 봤지만,
님이랑 비슷한 종류의 두려움으로 미뤄뒀었죠.
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저도두렵지만 차근차근 공부하고 기다릴 수 있을것 같아 이 책이 읽고싶어졌어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자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__)

blanca 2017-01-18 10:35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이 책 읽고 저는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이 달라졌어요. 작가의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뭉클했어요. 빨리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2017-01-1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힘들었겠습니다 괜찮은 거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생각해도 자신의 죽음을 바로 생각하기는 어려워요 아니 자신보다 부모님 죽음도 바로 생각하지 못하는데... 저는 제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 때가 찾오지 않아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blanca 님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희선

blanca 2017-01-18 10:36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해요. 흑, 저는 아직 무서워요. 그렇지만 점점 덜 무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살면 살수록 사는 일과 죽는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같고 잘 모르겠습니다.

2017-01-19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0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0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01-2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ca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7-01-27 13:21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서니데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01-27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린이 딸과 이십대 정도로 보이는 남녀들이 커플로, 혹은 각자 혼자 온 (지금까지 거의 항상 어린이, 아기로 아비규환인 극장 관람이 대부분이었다.) 전혀 다양하지 않은 연령층의 관람객과 함께 영화를 봤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만화로는 <언어의 정원> 정도를 봤다. 그런데 역시나 일관되게 흐르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시간'의 불가역성이 해체되는 부분이다.  시간의 자장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과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은 다른 차원에서 병존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온갖 회한은 다 치유될 수 있다,는 환상이다. 죽은 사람들도, 헤어진 연인들도 결국은 다시 살아나고 만나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다시 교환된다. 이게 환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묘하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저마다의 상흔을 치유하는 역할이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땜질하고 고치고 끌어안고 뭐 이런.

 

동경에 사는 소년과 시골에 사는 소녀는 서로 몸을 바꾸고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개입하고 때로 수정한다. 나중에 그 둘은 서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둘의 차원을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 어긋나고 비껴가지만 결국은 감독이 바라는 대로 된다. 곳곳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것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흔적이 느껴졌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과 설정 자체는 조금 다르더라고 결국 한 마을이 파괴되고 그 마을 안에서 꿈꾸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과거를 다시 수정하는 대목에 대한 감흥은 그 깊이와 넓이 자체가 다를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 파괴될 것들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파고들었다. 역사 속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한없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는 지루하다,고 했고 아름다운 영상과 누구나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환상에 끄달린 엄마는 과거 어느 지점, 지점마다 그 아이들처럼 달려가서 고치기도 하고, 더 용기있게 행동하기도 하는 지극히 애니메이션적인 꿈을 꾼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아이와 내가 함께 이 시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으로 수렴하는 이야기들을 해체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우연과 모든 곡절은 지금 여기로 수렴한다. 영화관에서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 잠시 동안 가졌던 모든 불가능에 대한 환상은 꺼진다. 나는 열네 살이 될 수 없고 지금 당장 삶의 모든 힘겨운 과제들을 완수한 팔순 노인이 될 수도 없다. 죽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살릴 수도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도 오 초만 흘러도 비가역성으로 응고된다.

 

사는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결국 시간은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닫아 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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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7-01-1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들과 이 영화 봤어요.
아이들은 조금 시쿤둥(아마도 어려웠을거라고 추측)했고 저는 몰입해서 봤어요.

blanca 2017-01-12 18:22   좋아요 0 | URL
현준이와 아마 제 딸이 동갑이거나 한 살 어린가 그랬던 걸로 기억나요. 정말 시큰둥하고 재미도 없었다고 막...어린이나 청소년 정서는 아닌 것 같아요. 감독이 어떻게든 사랑이 꼭 이루어지게 결론을 내는 편이라 저는 오히려 아주 가슴 아픈 이별의 사연이 있는 건 아닌가 혼자 생각 중이에요.^^

꿈꾸는섬 2017-01-12 18:23   좋아요 1 | URL
현수와 분홍공주님이 동갑이죠.ㅎㅎ

서니데이 2017-01-1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더 늦기전에 보고 싶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blanca님, 좋은하루되세요.^^

blanca 2017-01-12 18: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보시면 좋아하실 듯해요. 잔잔하고 아름답고... 오늘은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moonnight 2017-01-1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감정적이 될까봐 두려워서 못 보겠어요ㅠㅠ;;; 후유증 걱정ㅠㅠ;;;;;;

blanca 2017-01-13 18:51   좋아요 0 | URL
좀 감정적이 되어도 괜찮아요. 이게 한 해 한 해 감성이 달라지니 감성이 풍부한 그 시간을 누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서른 즈음에 저는 애니메이션만 보면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던 기억이 나요. 아주 오열을...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시간들조차 그리워져요...점점 그 말랑말랑하던 부분이 단단해져 가더라고요.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 존 버거 <자화상> 중 -Axt

 

처음에는 잘못 읽은 줄 알고 드러누웠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존 버거였다. 그는 구십이 되었고 여기에서는 아직 살아 있지만 여기에서 나간 세상에서는 결국 한 세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었다. 평균적인 사람들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장수한 편에 속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놓고 본다면 역시 짧다. 나는 존 버거를 알지 못한다. Axt 안에서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를 번역한 번역가 김현우는 전업 번역가가 아니지만 그에게 존 버거는 각별하다. 때로 전체 안에서의 비율로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보면 오해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번역가의 본질에 그 자신이 사랑하고 경외를 느낀 작품과 작가가 오롯이 자리잡은 느낌이 영롱하다. 실제 존 버거를 대면하고 자신이 그를 번역한 시간의 의미와 의의를 술회한 대목에서 이러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팔십 년간 글을 쓴 작가와 그러한 그의 언어 뒤편에 놓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의 본질까지 짐작하며 다른 언어로 성실히 열정적으로 옮겨 놓은 그가 어우러져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을 완성해 낸다.

 

 

 

 

 

 

 

 

 

 

 

 

 

 

내처 존 버거와 틸다 스윈튼이 함께 찍은 <사계>라는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게 되었다. <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 or John Berger>다. 배우 틸다 스윈튼을 포함한 네 명의 감독이 존 버거가 사는 프랑스령 알프스의 작은 마을 퀸시에 가서 찍은 다큐다. 이것은 존 버거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존 버거는 하나의 구심체로서 역할하며 더 크고 깊은 차원의 경지까지 이야기를 확대한다.

 

 

 영화배우 틸타 스윈튼은 존 버거와 서른네 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생일이 같고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와 존 버거의 대화는 담백한  울림이 있다. 둘 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그 추억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하지 못한 그 사라져 버린 숱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들을 아쉬워할 뿐이다. 틸다 스윈튼의 아버지는 다리를 잃었다. 그는 한 다리로 네 남매를 키웠다. 담담하게 그러한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러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존 버거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는 흔히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노인과 그 이야기에 심드렁한 젊은이의 풍경을 본다. 존 버거는 듣는 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고 고백했던 이야기처럼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다. 이 다큐는 존 버거의 것이라기보다는 존 버거와 함께 함으로써 나오는 생명의 순환,자연의 리듬, 노동, 죽음을 둘러싼 모두의 진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 듣고 말하는 이야기, 틸다 스윈튼의 쌍둥이 남매가 존 버거의 아들 이브와 함께 하는 장면 등은 서사는 억지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삶 그체에서 그대로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 서사가 교차할 때 진정한 의미의 소통과 메시지가 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https://youtu.be/d8dUvpL726Y

 

 

"연대가 중요한 것은 지옥이지, 천국이 아니다."라는 존 버거의 이야기가 여기 이곳에 날아와 꽂힌다. 말하고 듣고 연대하는 지점은 언제나 영원히 중요하지만 힘든 여기일수록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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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조선‘ 소리 듣는 이 세상을 살면서 위안되는 것이 연대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blanca 2017-01-09 11:05   좋아요 0 | URL
절대다수는 선량하고 상식선에서 행동하며 죽고 남을 다음 세대를 고려한 의사 결정을 한다고 믿고 싶어요. 이 신뢰가 깨어져 버리면 산다는 게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요.

순오기 2017-01-0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새해맞이로 좋은 글과 영상 감사해요!♥

blanca 2017-01-09 11: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페이퍼에서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읽었어요. 빨리 회복되시기를 바라요. 아무쪼록 새해에는 건강하셔서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 모두 즐겁게 해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2016년 12월, 나는 대전으로 가는 KTX를 탔다. KTX는 처음이다. 대구에 할머니집이 있어 수시로 기차를 탔고 객실에서 연년생 여동생과 투닥거리곤 하다 경유지의 그 십분 동안 아이들에게 가락국수를 먹이고자 뛰어 내려가 줄을 서서 좁은 객실 복도에 우동 두 그릇을 들고 웃으며 나타났던 아버지가 떠올라 혼자 우동을 사 먹었다. 하지만 그때의 맛도 그때의 느낌도 물론 아니었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좀 쓸쓸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흔을 보냈다.

 

기대했던 차창의 풍경은 황량한 논,밭, 공장지대로 채워져 있었고 그마저도 너무 빠르게 휙휙 지나가 감상에 잠길 틈이 없었다. 기차가 아니라도 예전의 대전은 지방으로 내려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기착지였다. 아무리 밀려도 연착되어도 대전을 찍으면 얼마간 부모님은 안심을 하셨다. 그런 대전이 이제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서울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어 버렸다. 내 안의 아이는 아직 생생한데 나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인생의 시간도 그렇게 점점 빨라져 가는 것 같다.

 

"나는 끝내 그 사람에게 죽음을 권할 수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 <긴 봄날의 소품> 중

 

 

 

어떻게 이렇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죽지 말라고 했다."도 아니고, "사는 게 낫다."도 아니고 "끝내 죽음을 권할 수 없었다."는 이 말이 울린다. 나쓰메 소세키니까 할 수 있는 그다운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세키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문학, 삶을 둘러싼 고민들,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가 앞에서는 자유롭게 나왔던 듯하다. 슬픈 여자의 고백 뒤에 소세키가 한 이야기다. 그 어떤 구체적인 사연은 나오지 않지만 여인은 몹시 슬프고 힘든 와중에 소세키에게 조언을 구했던 듯하다. 여자의 고백 앞에서 소세키는 죽음을 의식하지만 이 불행한 삶을 끝내 긍정하지 않고는 삶 안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진행시킬 수 없음을 간파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삶에 대한 부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죽어간다"는 의식은 삶을 더 명징하게 의식하게 만든다. 여기, 지금을 비판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우리는 걸어간다.

 

 

"그럭저럭 살아 있다."

 

와병 중에 나쓰메 소세키는 스스로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병이 결국 진행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갈 것임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인의 아내의 요절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국화를 던져 넣으리, 그대 관 속에"라는 작별의 하이쿠를 바친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추모사다. 모든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 잘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계속 이렇게 걸어가게 되는 것 같다. <열흘 밤의 꿈>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이 나온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백 년만 기다려주세요"였다. 떨어진 별 파편을 주워 여자의 무덤 위에 놓으며 남자는 붉은 해를 헤아리며 백 년을 고대했다. 남자는 결국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하고 깨닫는다. 소세키가 이 이야기를 1908년에 소개했으니 벌써 훌쩍 백 년이 지나 내가 읽게 된 것이다.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그렇다면 또 앞으로의 백 년은 얼마나 훌쩍 지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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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31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전 긴 봄날의 소풍 ㅡ으로 제목을 봤어요 . 그렇게 보고싶었나봐요 . 봄하면 소풍이 자연스레 떠오르니까...소풍이 길다는건지 ..봄날이 길다는 건지 ..하면서 궁금해 했는데 ㅡ 소품이었네요!
시적인 표현이네요. 찬란한 봄엔 모든 것이 소품같이 있을 자리에 있는 느낌 일까 ㅡ호기심 도 들고요!^^

blanca 2016-12-30 17:11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네요. 저도 그렇게 읽었어요. ^^ 소세키의 소설, 에세이 등이 모두 참 좋았어요. 마지막 글도 묘하게 봄에 끝나네요. 이 추위가 물러가고 빨리 봄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그장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cyrus 2016-12-30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봄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3개월만 지나면 되는데 살다 보면 이 시간도 금방 지나갈 것 같습니다.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요, 올해 마지막 주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blanca 2016-12-30 17:12   좋아요 2 | URL
아, 나이 들수록 겨울이 힘들어요. 아이들도 계속 감기에 걸리고요. 푸념하네요^^;; cyrus님, 새해 복 많이 받고 2017년에는 좋은 일들이 더욱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나와같다면 2016-12-30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뭐죠..? 이 서늘함.. 어디서 오는거죠?

blanca 2016-12-30 17:13   좋아요 1 | URL
이 하이쿠 같은 댓글은 어떤 뜻이 있는 걸까요? ^^;; 궁금합니다.

낭만인생 2016-12-3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 누구나 다 가는 군요.. 기분이 묘합니다.

blanca 2017-01-01 09:07   좋아요 0 | URL
어렸을 때는 일 년도 까마득했는데 이제는 오 년, 심지어 십 년도 훌쩍 지나가리라 생각되니, 상대적으로 인간의 삶이 참 짧게 느껴져요.

jeje 2016-12-3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점점..빠르게 흐르는것은 분명히 느끼는데.휴.
차가 지나가고, 불빛이 반짝거리고, 커피가 식고 있습니다. 저의 현재는 그렇게 지나고 있습니다.
blanca님 연말 알차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7-01-01 09:07   좋아요 0 | URL
아, jeje님이 묘사해 주신 풍경이 눈 앞에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jeje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요.

2017-01-06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7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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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뚱뚱한 여자는 없었다. 못생긴 여자도 없었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았다.

-p.227

 

살면서 속물이 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장담할 일이 아니다. 내 안의 욕망, 시샘, 질투, 비교를 언어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결함만으로 설명되고 규정된다는 건 유달리 속물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속단하는 것만큼 한계에 갇힌 이야기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욕망 그 자체가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인의 전부라 여기고 그 틀안에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특히 아이를 가진 엄마는 참으로 복합적이고 다변적이고 언어화하기 힘든 섣불리 규정되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기심, 모성애, 이타성은 명확한 경계를 때로 불허한다.

 

어쩌면 내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속물적인 이야기다. 인류학을 공부했지만 인류학자라고 스스로를 규정짓지 않는 저자 웬즈데이 마틴이 '맨해튼 엄마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동화'되어 완벽한 거리두기에는 실패한 상태에서 그들을 학문적으로 고찰하고자 시도한 이야기다. 그녀 자신이 거기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들만의 배타적인 세계에서 왕따도 당해보며 객관, 중립, 주관을 왕복하며 풀어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아이의 놀이약속을 잡아보려다가 숱한 거절을 당한 체험, 마침내 우연한 기회로 그 집단에 받아들여졌을 때의 어쩌면 좀 속물적으로 보이는 환희, 소위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남성들의 고급 자동차처럼 작용하는 세계에서 그 가방을 어렵게 구하려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실제 그 세계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  "협오스럽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정면 응시였다.

 

'생태학적으로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안전성은 확보된 지 오래라 생존 그 자체의 문제로 분투할 필요가 없는 이 최고급 동네의 생래적 자유이기도 하고, 더불어 양가적인 구속이기도 하다. 물질적 제한에서 해방된 자리에는 극도의 불안, 질시, 경쟁이 게재된다. 최고의 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파크애비뉴 70번대 가의 엄마들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술을 마시며 그 불안을 잠재운다. 저자는 내심 그러한 그녀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 안쓰럽기도 하고 경멸스럽기도 하다. 최고급 학력을 지닌 이 동네의 많은 여자들은 직장을 다니며 일하지 않는다. 최고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가정내에서의 위치에는 그녀들이 학창시절 누렸던 평등의 개념은 사변적으로 전락한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권리, 의무,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풍요로운 물질을 둘러싼 미묘한 불평등, 긴장이 팽배하다. 그러니 그녀들은 불안하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는 "낯을 잃을까" 두렵게 만든다. 보이는 것들을 최고급으로 유지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는 그녀들의 정체성을 공고화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정체성 자체를 타의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실제 저자 자신이 아이를 잃는 경험을 하며 거만하고 도도해 보였던 그녀들의 호의, 연대를 경험하며 현대 사회의  "모성집약적인 양육 문화"가 어떻게 엄마들을 짓누르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에서 실제 그녀들이 경험했던 숱한 남녀평등의 신화는 자의든 타의든,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들의 공격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그녀들의 에너지와 지성,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의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그녀들을 한정하게 된다.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숱한 긴장과 알력 관계는 이들을 박제화했던 것이다.

 

건설적이거나 절충적인 해법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고찰은 관찰자가 그 집단에 동화됨으로써 수시로 기우뚱거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의 미덕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나'는 끊임없이 최고의 사교계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분투하지만 그러한 속물근성은 결국 고전이 되었다. 대단히 고결하고 대단히 이상적인 것은 지향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역동과는 때로 빗겨간다. 그렇다고 모든 속물적 욕망이 정당화되거나 이상시되는 것도 존재와 삶을 한 차원 전락시키는 것이 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예술은 글쓰기를 포함해서 인간의 저급한 욕망과 고결한 이상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균형의 무게추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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