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읽다 말다 결국 못 읽고 말았다. 우연히 다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어릴 때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의 참상 아래 가족들의 생존기가 이제 한 문장, 한 문장 다 절절하게 와닿았다. 차마 읽는 즐거움을 논하기도 미안할 만한 그 버석거리는 이념 밑에 놓인 사는 문제들의 묘사가 형형하다. 우리 말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노련한 손맛이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맞춤한 시간의 골이 있는 듯하다. 너무 이르면 안 만나느니 못하다.

 

 

 

 

 

 

 

 

 

 

 

 

 

 

 

 

거꾸로 다시 작가의 유년 시절을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는 중이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자연과 어우러진 찬란한 작가의 유년시절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럽다. 이게 과연 어떤 느낌인지 나는 영 알 길이 없다.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 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 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 붙으면, 개울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 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 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 자주색 점이 박힌 당개나리의 만개 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

 

뒷 이야기를 미리 알고 읽는 과거의 아름다운 찰나들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더욱 아련하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우등생에 의젓한 박완서의 오빠는 후에 전쟁 중 부상을 겪고 힘겹게 투병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 놓은 채 무력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늦게서야 태어난 첫 사촌 여동생 명서의 구슬 같은 모습에 어른들이 흥겨워하는 모습도 후에 명서의 죽음으로 갑절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그 당시로서도 남다른 학구열로 자식 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엄마를 따라 서울로 왔다 방학 때면 안식처로 자리했던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은 분단으로 인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 될 것이다.

 

가끔 예전의 사진들 속 모습을 보면 미래를 알지 못하고 그 시간의 구획에 갖혀 지냈던 모습들에 아연해지기도 하고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생로병사를 떠안고 흐르는 시간의 무게 아래 묻히지 않을 것이 없다. 이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살아서 자신의 유년과 청년기를 회고했던 작가 또한 이미 고인이 된 터이다. 화자는 떠났다.

 

너무 예쁜 벚꽃이 이제는 자주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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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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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명성을 얻은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르는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는 것은 나쁜 사과가 아니라 나쁜 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도덕적 준거를 들이대어도 비교적 떳떳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바로 나쁜 사과 옆에서 그것의 부패를 목격하거나 나쁜 통에 함께 짓이겨 들어가 고통스러운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고결함은 또한 그 순간부터 발휘되기를 기다린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숭고한 시간의 시험 앞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의 마치 오류 같은 띄어쓰기에 멈추게 된다. 문법적 규칙을 넘어서는 붙여쓰기에 따라 읽다 보면 어떤 흐름과 시간성이 밀려온다. 이것은 비범한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로 그 시간성은 펼쳐진다. '그'는 '나'와 '경주'라는 여선배와 함께 했던 직장 동료다. 그리고 이미 그는 고인이다. 죽은 자와의 재회는 그 수많은 이해타산과 오해와 가식의 비늘을 벗겨내고 어떤 실재로 나아가는 데에 유리한 장치다. 그들이 근무했던 직장은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퇴사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고 그 앞에서 이례적인 투쟁을 한 여직원이 밀려 나가고 빈 자리에 '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앞의 예외적인 남자였고 동기였던 여직원 경주는 그러한 그의 자리와 침묵을 상기시킨다. 셋은 함께 어울렸고 저마다의 그 불편한 윤리적 결단의 시점에서 '나'만을 남기고 그 결단에 몸을 던진다. 평범했던 그들이 해야 했던 그 처절한 선택은 공교롭게도 죽음과도 만난다. '나'는 그들의 고통의 바깥에서 '눈 한송이가 녹는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애도한다.

 

김애란의 <애도>는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당사자들의 소외감을 구체화한다. 아득바득 모아 마련한 조그마한 아파트 안에서 해피엔딩은 없다. 대신 젊은 부부는 그들이 포기하고 감수했던 그 모든 것들의 무게를 감당했던  아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잘못 보내온 복분자원액이 사정없이 튀어 버린 벽을 새로 도배하며 하필 아내가 그 도배지의 꽃을 머리에 이는 형상으로 자신들의 자식 잃은 슬픔에 대한 타인들의 그 조롱과 무관심이 극화되는 장면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은 상실이 내가 아닌 타인의 것이 될 때 그것이 결코 소통되거나 제대로 위무되지 못하고 썩고 이지러지는 것임을 자조한다.

 

손보미의 <임시교사>도 하나의 맥락이다. 그림 같은 중산층 집안의 베이비시터로 그 가족과 소통하고 그 가족의 상실과 불행까지 함께 공유한다고 착각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내 주었던 중년의 '임시교사'의 결말은 결국 그 격의 없음의 거리에 아연해진 부부에 의하여 내쳐지는 것이었다. 위로와 소통의 통로는 때로 어떤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고 그 경계는 자기 내면의 철책이 되어 방어선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방향이 되지 못할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여자는 그러나 자기 나름의 치유법의 방편으로 외면하게 된다. 쌉싸래한 이야기였다. "사는 건 다 그런 거지"는 많은 것들을 싸안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기호의 <권순천과 착한 사람들>에서의 '나'와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의 '나'는 묘하게 겹친다. 어떻든 여기에서 '나'는 작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었을 지점에 서 있게 된다. 같은 아파트의 사채업자의 집앞에서 힘들게 모아 어머니 대신 갚아준 돈을 돌려달라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권순찬 앞의 소위 작가이자 교수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의 옆에 서 있다 기절하는 노인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도 있었던 '나'는 분명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슬쩍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남는 그 께름쩍한 기분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나름의 방법으로 찾기 시작한다. 아주 나쁜 통은 아니지만 이 통에는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가 하필 내 옆에 있고 '나'는 그러한 시선이 일견 불편한 것이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 이미 다 벌어져 버린 일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보다 잃어가는 중인 사람들의 옆에서 자신을 챙겨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더욱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비겁한 결말과 나름의 합리화가 가지는 한계에 답답하다. 이야기는 이미 끝나고 난 지점에서 짚어가는 게 더욱 쉬운 일이고 듣기에도 더 낫고 그 간극은 결국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도리어 이야기를 피하게 되는 불편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은 그 한계를 응시한다.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전하는 그 투명한 테두리"에 서서 어슬렁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거기에 머물 것인지 아예 바깥으로 물러나버릴 것인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것 같은 수상작들이 놓치지 않은 그 경계의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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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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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계나보다 몇 살은 어렸을 때였다. 서울 집에서 신도시로 출퇴근하는 길은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출퇴근 경로와 반대여서 곧잘 자리가 나곤 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씻고 지하철 빈 자리에 앉으면 젖은 솜뭉치럼 졸다 목적지 방송에 용케 뛰어 나가곤 했다. 매일이 똑같이 고단하고 때로 고통스러웠다. '생각'이란 걸 할 때는 자학하게 되었고 일요일 오후만 되면 마음에 먹구름이 밀려왔다. 행복하지 않은 생각들은 그것의 원인보다 그것으로 향하는 출퇴근 길에 더 또렷해졌다. 지하철이 들어오기 전에 때로 '사는 것은 지옥 같구나.' 라고 느끼고 그러한 생각에 멈칫 안전선 뒤로 물러난 일도 있었다.

 

오랜만에 그러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십 대 후반의 계나는 가난한 집의 장녀다. 그러한 배경 속 그녀가 흔히 연상되듯 가족 모두를 부양하거나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전적인 유형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명한 금융 회사에 취업도 했으니 흔히 말하는 '삼포 세대'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에게는 직장이 있고 예의바르고 건실한 중산층 출신의 남자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출퇴근 지옥철에 시달리며 느끼는 단상들과 직장 회식에서 부딪히는 일들에 대한 감상은 이미 다 나눠 먹어버려 더 이상 나눌 부분도 없는 사라져 버린 파이에 오늘의 젊은 아이들의 가지는 전반적인 비애감을 뿌리부터 공유하고 있다. 계나가 다른 것은 어떤 명쾌함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주하는 이곳에서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p.10

 

그녀의 결행은 대단한 명분이나 체제 저항적인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그 지점을 포착하지 못하면 이야기는 오히려 지나치게 가볍게 어그러진다. 호주로 떠나 그녀가 겪는 일련의 실패, 오해들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거나 그녀의 결단 자체를 방해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이야기다. 작가는 이 개인주의에 천착한다. 집단주의나 체제에 대한 거창한 해석이나 비판 지점에 대한 집착은 그것 자체가 폭력으로 다가올 만큼 작가 장강명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그것의 허위에 염증을 느끼는 듯하다. 젊음이라는 대물 렌즈 밑에 들어오는 것들은 어쩌면 가장 진솔한 속살들이다. 결국 누구나 그럴듯한 명분 아래에 각자가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 데에는 어렵지는 않지만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견디는 것들이 정당화된다. 때로 한국이 싫은 것은 국가라는 울타리가 든든한 방책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그 소소한 행복들마저 자본주의의 견고한 서열 아래 가능한 것으로 전락시킬 때다. 이 서열은 내가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들마저 구속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뉘는 지점에는 분명 돈으로 추구 가능한 쾌락과 안정이 있다. 계나도 이러한 것들 앞에서 경쟁력 없는 자신을 조소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다수가 추구하는 것들 자체를 상큼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거나 사회가 주입한 그 지리멸렬한 가치들에 무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떠난 것은 일종의 도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처럼 계속 주저앉아 불평하고 불행해하지만은 않는다. 계나는 외부의 시선을 거두어 내면으로 향한다. 자신을 읽.는.다.

 

 

잘 읽힌다,는 것은 분명 문자 텍스트가 외면 받는 이 시대의 작가로서 무시못할 장점이다. 잘 읽히는 것이 어떤 심오함과 상충되는 지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깊이가 밀려나갔다고 해서 산만하지는 않다.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으로 우리가 순응하고 불평하며 견디는 사회 체제 바깥으로 뛰어 나가 시원한 서사를 구축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는 왠지 여기에서 언젠가는 꼭 들었어야 할 이야기인듯 반갑다. 그 날 그렇게 지옥철 아닌 지옥철을 기다리며 무서운 상상을 했던 내가 걸어나간 자리에서 불혹을 맞았다고 해서 내가 그 체제에서 탈출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다른 형태의 또다른 불평 거리를 주워섬기며 여기를 배회한다. 그러한 관성에 이러한 이야기는 날카롭게 아프다.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산적이고 체제적인 대안을 모색했어야 한다는 그 꼰대스러운 조언을 남발하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이다. 사는 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당연히 들었어야 하고 당연히 결행했어야 할 일들이 신선하게 들리는 이 사회의 그 이미 결정되어 버리는 모든 것들에 일침을 가하는 가장 자기다운 방법을 작가는 잘 실행했다. 이 이야기는 왠지 자랄 것 같다.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유연해지길 바라 본다. 그것은 나 또한 그래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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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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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데?"

드디어 시작된 질문 세례. 느릿 느릿 말문 트이는 네 살 아이는 종일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그 답을 어른에게 구한다. 마치 아이는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을 알고 싶고 어른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을 답할 수 없듯이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나를 돌아본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모든 일들에 주어진 답이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체념과 함께 알아야 할 것들 중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오만과도 통한다. 그래서 아이의 돌연한 질문들과 죽음을 앞두고 짐짓 모든 것을 새로이 보듯이 질문하는 대시인의 시에 아연해서 멈춰서게 된다. 그 질문들은 내 안에서도 있었던 것들이다. 가라앉아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돌연 떠오른다. 질문은 신선하고 사랑스럽고 때로 눈물 난다. "왜 사람들은 헬리콥터들이 / 햇빛에서 꿀을 빨도록 가르치지 않지?"라고 묻는 첫장의 질문은 네루다를 소개한다. 네루다는 이런 시인이다. "소금 사막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다.

 

 

44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중략>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나였던 그 아이"는 각각 다른 시간 대에 다른 키를 가지고 두서없이 나타난다. 가장 슬펐던 기억 속에서도 찬란했던 기억 속에서도 다만 그 기억의 주체가 나라는 것으로 "그 아이"는 동일성의 흔적을 가질 뿐, 그 모든 다른 나이의 그 모든 일관성 없는 두서 없는 기질과 행동의 아이는 정말 나였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과도 헤어지지만 결국 그런 나였던 그 모든 아이들과 작별해야 하는 삶의 종점에 결국 다다르게 된다.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라는 말 앞에서 가슴이 시리다. 노년의 네루다는 '결국' 그 모든 답하여지지 못했던 질문들과, 그 모든 결국 행해져야 했던 이별들이 결국 한 곳으로 수렴될 것임을 이미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이제는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한다.

 

 

36

 

당신의 절멸은 또하나의

목소리와 다른 빛에 흡수되지 않을까?

 

 

위로가 되는 이야기.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섣불리 마침표를 이야기하지 않고 '나'라는 아이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 생의 기억들이 엉겨붙어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질문이지만 하나의 가능성의 계시처럼 따뜻하게 들린다. 그 모든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질문은 그 모든 허무를 해체한다. 섭리 앞에 필멸 앞에 절망하지 않는 결기가 너무 공격적이거나 오만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그 모든 자연 현상과 사물들에 던지는 질문들에 스며든 시인의 따뜻한 애정과 위트 덕분일 것이다. "단봉낙타가 그들의 혹 속에 / 달빛을 지니고 있다는 걸 믿지 않는가?" 라고 묻는 시인 앞에서 어느덧 정말 낙타의 혹 속에 달빛이 농밀하게 고이는 느낌이다. 우리가 다만 헤어지지 위해 자란다고 해도 이러한 질문들을 하고 그 질문들 앞에서 멈추는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한 그 질문에 모두 최선을 다해 답해주려 한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마음 속에서 모락 모락 피어나는 질문들에 따뜻하게 반응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어린 시절 사랑을 기억했으면 하니까. 적어도 답이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생의 그 유일한 시기의 그 유한하고 허무한 아름다움을 어렴풋이나마 배워가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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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28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문하는 법을 까먹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시의 진가를 보지 못할 겁니다. “엥? 이런 것도 시야? 나도 이런 시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할걸요. ^^;;

blanca 2016-03-28 20:17   좋아요 1 | URL
그런 그림도 많잖아요. ㅋㅋ 하지만 네루다의 이 시집은 굉장히 단순하고 간명한데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고 또 그게 공명하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초딩 2016-03-2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냉큼 넣어 봅니다 :-)

blanca 2016-03-28 20:17   좋아요 0 | URL
초딩님, 후회하지 않는 독서가 되기를 바라 봅니다.^^;;
 

 

꾸준히 다이어리를 써왔다. 매일의 일상에서 기억해 둘 만한 일들 위주로 적어둔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는 그러한 일상의 기록이 성장기가 되어준다. 때로 잘못 기억하고 있던 일들, 좁은 소견들이 부끄럽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글자는 점점 덜 귀엽고 크기도 커지고 기록의 세밀함도 감정의 파도도 줄어든다. 글씨들도 성장하고 늙는 몸이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이것들이 남아서 좋을까 싶어졌다. <수런거리는 유산들>의 저자는 어머니,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며 느끼는 피로감과는 별개로 젊은 시절 그들이 주고 받은 연애 편지를 통해 아버지, 어머니의 찬연했던 사랑의 이야기를 복원해 내며 애도 작업을 마친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흔적과는 달리 내가 적어가는 것들이 정말 남아도 좋은 걸까? 확신이 옅어지며 기록하는 일에 대한 정열도 줄어드는 와중에 만난 책.

 

 

 

 

 

 

 

 

 

 

 

 

 

'밥장'이 여자 작가인 줄 알았다.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리고 하는 일을 무심코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했었나 보다. 그는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남자 작가다. 쓰고 기획하고 저지르는 데에 평범하지 않은 재능이 있어 보인다. 자신이 쓰고 그리고 지니고 있는 몰스킨과 또 이러한 몰스킨에 자신의 일상이나 직업적 기록을 남기는 다른 이들의 내밀한 기록과 인터뷰도 있다. '몰스킨'이라는 브랜드는 하나의 접점이자 대명사화되어 있지 비싼 노트의 브랜드 네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보고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손글씨 사진들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접사가 잘 되어 있다. 그래서 사진이 아니라 또 하나의 본문으로 보인다. 자기를 설명하고 삶을 요약하는 데에는 어쩌면 수많은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보다는 이러한 사물들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수첩 안에 작은 팝업북을 만들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모눈 격자에 맞추어 도면을 그리고 소믈리에는 와인의 맛과 향을 기록한다.

 

 

 

어젯밤 <케빈에 대하여> 영화를 보고 머리를 한 대 망치로 맞은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추상성을 해체하는 일이다. 낭만성의 허구를 가감없이 목도하는 과정이다. 내 속에서 나왔다고 내 앞에 있다고 전적으로 내 의지, 감정에 귀속되어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주 많이 잊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나의 자장 안으로 들어오는 한 작은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그의 성장에 어떤 지원을 하느냐가 때로 어마어마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오기도 한다. '학대'는 의외로 아주 쉽게 작은 데에서 시작되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린 램지 감독은 이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섬세하게 영상화한다. 이러한 기록을 나의 다이어리에 남겨둔다. 나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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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6-03-21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체를 아는 것이 전부인 일, 이유를 묻는 순간 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케빈에 대하여.
처음에는 양육과 모성, 나와 다른 존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작년 실연한 친구가 제게 `왜 대체 그사람은 나를 떠났을까/`라는 말에 `왜냐고 묻는 순간 백퍼 네가 질 수밖에 없어. 이유같은 거 알려고 하지 마. 존재만 받아들여`라고 말하다가 흠칫, 놀랐어요. 그것은 오히려 모든 저지름과 악에 관한 이야기.
(여기까지 쓰다가 갑자기 격하게) 그러고 보니 왜 자식이 부모에게 전생의 빚 받으러 온 존재라고들 하는지 알 것 같지 말이어요!!!! 흐흫

blanca 2016-03-21 15:35   좋아요 0 | URL
삶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있고, 왜? 라는 물음에 답보다는 그냥 질문 자체가 떠오르는 걸로 끝나 버리는 일이 많다는 걸 배워가는 게 늙는 일인 것 같아요. 감독도 여배우도 다 그 미묘함을 정확히 포착한 노련함이 너무 좋았어요. 아우, 어른들이 하는 말은 결국 인정하게 되어버리네요. 자식은 채무자 맞아요. ㅡㅡ

단발머리 2016-03-3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에 대하여>는 오랫동안 피하고 안 봤던 영화인데, blanca님 리뷰 읽고 나니 더 이상 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아이가 악마가 되려하는 그 지점에, 엄마의 어떤 실수 혹은 유약함이 있지 않았나, 어느 정도는 그것이 엄마의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그게 두려워서.... 저는 아직도 미뤄두고만 있네요. 아.... 케빈....

blanca 2016-03-31 13:08   좋아요 0 | URL
이 영화를 보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한창 배변훈련 중에 봐서 다 큰 케빈이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엄마의 그 비난하는 듯한 시선에 아팠어요. 이게 양육으로도 어쩔 수 없는 소시오패스에 대한 이야기라는 의견도 있지만 솔직히 저는 케빈을 진정한 의미에서 안아주지 못한 엄마의 그 냉랭한 시선을 찾게 되더라고요.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는 데에서 이 영화는 참 잘 된 것 같아요. 이 영화 보고 일주일이 힘들었다는 글도 읽었어요. 저는 보다가 울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