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자기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몽테뉴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과 어떤 일에 대한 경계를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무슨 일에든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 않고 빌려주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나아가 "영혼의 자유를 지키면서 분명히 옳다고 생각되는 드문 순간 말고는 그것을 빌려주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중 

 

 

 

 

 

 

 

 

 

 

 

 

 

 

너무 당연한 몽테뉴의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는 마치 거기 그렇게 어떻게든 있으려는 그녀를 정조준한 것 같다. 하기사 옳고 그름에 대한 자각의 순간이 이해 관계에 대한 직관으로 당연히 대체된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나날이 참담하다.

 

이 책의 저자인 번역자 김남주는 프랑스 문학 번역자다. 로맹 가리, 카뮈의 책을 번역했다. 더불어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도 그녀의 손을 빌렸다. <사라지는 번역자들>은 저자가 남프랑스 아를의 번역자 회관에서 묵으며 세계 각국의 번역자들과 보낸 시간들 속에 '번역'이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 질문, 자신들이 번역했던 작품들에 대한 교감이 녹아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이란인과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의 시를 불러내는 시간, 몽테뉴를 번역한 불가리아인과 볶음밥을 함께 먹는 순간, 인세를 적게 받아도 너무 사랑하는 시인이라 그 번역 과정 자체를 행복해했던 프랑스계 폴란드인 번역자와 심보르스카의 시를 주고받는 찰나. 이 모든 시간은 모국어가 아닌 구두의 번역 행위 속을 통과한다. 저자가 이야기한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는 멀고도 가까운 지점에서 손을 잡으며 놓치고 마는 것들을 뚫고 결국 만나는 그 작은 것들로 소통하며 교감한다. 번역은 꼭 다른 언어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타인과 이야기하는 그 모든 순간의 은유가 될 수 있을 터다.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면 상대는 때로 '저것'으로 오해한다. 나의 생각, 마음 속을 떠도는 모든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어느 정도의 과장, 거짓, 착각의 옷을 입고 '너'를 향해 출발한다. 그것은 또한 '너'가 이미 단단히 쌓은 자신만의 철책의 경계를 힘겹게 뚫고 '너'의 언어로 이해, 해석을 거쳐 다시 되튕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人間'이 되는 것은 결국 그 둘 사이의 언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사라진다. 이것을 진실로 자각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자녀를 통해 부, 권력, 명예를 세습할 수 있다는 욕망도 다 허상이다. 생은 한번 뿐이다. 모파상의 <벨아미>에서 자신의 궁색한 처지를 비관하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무대로 탐욕을 가지고 기어오르기 시작하게 된 청년 뒤루아는 하필 화려한 야회가 끝난 뒤 동행한 노시인의 엄중한 조언을 듣게 되어 밥맛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그에게 떠오르게 된다. 그는 청년 뒤루아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의 민낯을 드러낸다. 모든 것에는 결국 '죽음'이라는 종결이 있기 마련이라는 자각과 자신의 상황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물러나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객관화시키는 현명함을 가지라는 이야기는 젊디젊은 욕망쟁이 청년을 불편하게 만든다. 늙은 남자는 자신 앞에 남아 있는 죽음 앞에서 인간들이 욕망에 좌지우지되며 미쳐 날뛰는 세상을 서글프게 바라본다.

 

 

 

 

 

 

 

 

 

 

 

 

 

 

 

 

잿빛하늘이 맑게 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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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2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존재의 성격이 더 강하죠. 듣는 것도 말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듯.
동물들의 대화가 상호적인 것과는 매우 다르죠. 인간의 강한 자의식 때문에 이런 큰 차이가 난다 싶어요.

독서가 말하기 위해서 인가, 잘 듣고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인가는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죠. 종교가 독특한 것은 한없이 들으려 하는 그 자세. 지금은 너무 변질되고 파편화 되었지만 이것도 인간이 만든 삶의 순리라면 순리겠죠.
듣는 일에 몰두하는 번역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겠다 생각합니다.

blanca 2016-11-22 12:59   좋아요 0 | URL
나이가 들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잘 들어주는 것이 사실 대화술의 절반인 것 같아요. 사실 듣는 순간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을 짚어보게 되잖아요. 상대를 진정한 의미에서 존중한다면 사실 절로 듣는 일이 즐거워야 되는데... 저도 유념해야겠어요.

기억의집 2016-11-2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 벨아미가 순시리와 닭으로 오버랩 되네요~ 탐욕!

blanca 2016-11-22 13:00   좋아요 0 | URL
아, 몇 년 전에 읽고 다시 읽었는데 게다가 그런 벨아미 같은 놈이 잘 나가는 해피엔딩이었다니. 어젯밤에 다 읽고 기분이 절로 나빠져서 처분하려고요...모파상한테는 미안하지만...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여든한 살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많이 늙어도 참 괜찮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절필을 선언해버린 나이 든 필립 로스의 결심이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트레버가 늙고 또 나이 들어 다시 한번 젊은 남녀의 사랑에 충분히 이입하며 그 안에서 유장한 삶들을 담을 수 있다,는 예시는 그의 결심을 아쉬운 것으로 만든다.

 

6월의 초저녁, 아일랜드의 라스모이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는 설명만으로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이 소박한 작은 마을의 코널티 부인의 장례식으로 이야기는 풀려 나간다. 장례식은 물론 망자의 것이기에 어느 정도 아쉽고 슬프지만 그 장례식으로 인해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끝났으니 존중받을 만하다. 남은 남매는 이미 충분히 나이든 중년의 코널티 남매다. 누이는 젊은 시절 사랑을 잃었고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라스모이 마을의 '광장 4번지'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고 남동생 조지프는 이런 저런 코널티 가가 남긴 저탄장 등 마을의 시설들을 관리하게 된다. 사랑은 우연히 장례식 날 출사를 나온 청년 플로리언이 수녀원에서 지내다 가정부로 왔다 주인의 아내가 된 엘리에게 길을 묻다 피어난다. 나이 든 코널티 양은 이 은밀한 여름의 우정, 사랑을 자신의 그것에 빗대어 목격한다. 신분 차에서 시작된 결혼 반대로 사랑의 도피를 한 부모의 유산인 저택을 처분하며 이미 떠나기로 예정된 플로리언과 유부녀이자 아내와 아이를 실수로 죽게 한 나이 든 남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엘리의 교감은 이미 해피엔딩을 가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랑을 둘러싸고 흐르는 라스모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정경은 단조롭지만 평화롭고 아름답다. 저마다 잃어버린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그들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짓고 밥을 짓고 서명을 하는 등의 생업, 일상을 영위하며 그 틈새를 흐르는 생의 저류는 어쩐지 눈부시다. 트레버의 언어는 간명하고 절제하고 빛난다. 그의 언어를 통과해 나온 삶은 어떤 것이라도 충분히 위대해 보여서 눈물이 난다. 사랑도 고통도 이별도 중언부언하거나 과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깔끔하게 떨어진다. 언어가 이 삶의 난삽함을 이겨낸 듯하다. 그것이 착각일 지라도 그가 정리한 삶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어서 삶을 살 만한 것이라 믿게 만든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말 그렇다. 마침내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남게 되는 엘리와 그런 엘리를 떠나며 자신이 기억할 것들을 그러모으는 그의 남자와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엘리의 이별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리하는 코널티 양에게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치유하는 시간의 양이 있을 테니 말이다. 기억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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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1-1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리뷰가 참 좋네요, 블랑카님. 언제나처럼요. 안그래도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블랑카님 빨리 읽으셨네요. 제목도 좋아요. 여름의 끝, 이라는.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남게 되는 이야기라니,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6-11-16 11:37   좋아요 1 | URL
아, 정말이지, 최고였어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트레버를 읽는다‘, 이런 표현을 많이 써서 트레버가 대체 누구야? 그랬거든요. 다 읽고는 너무 좋아서 일어났다니까요. ㅋㅋ 제인에게 헌정되어 있어 찾아보니 제인은 트레버가 사십 년 넘게 함께 한 아내 이름이더라고요. 다락방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시이소오 2016-11-1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고 절제되어 빛나는 리뷰. 언제나 좋군요. ^^

blanca 2016-11-16 11:37   좋아요 1 | URL
책이 너무 좋으니 리뷰는 그 감동의 반도 못 담았답니다.
 

"아, 정말이지, 그 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했구나."

 

 

 

큰 애가 아기였을 때 아기띠를 하고 장을 다 보고 양 손에 짐을 들고 마을버스를 타면 제발 자리까지 균형을 잡고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랐던 시간을 이야기하니 옆지기의 반응 --;; 우연히 예전에 자주 다니던 재래시장을 스치게 되어  함께 걸었던 내 인생의 어느 시기 비슷하거나 같은 상황에 있었던 인연들을 생각하니 잠시 뭉클했다. 더 어렸을 때에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작별이나 어긋남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지금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손을 잡은 사람들과 헤어질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슬퍼진다. 그냥 그렇게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나중'에 얽매이게 된다. 중년이 되고 나면 그래도 여전히 대책 없이 희망하거나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새삼스러운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주위에 사람들을 두며 살고 싶어요. 인생 후반을 좋은 사람들과 교우하면서 보내고 싶어요. 나는 지금껏 주위에 사람을 만들어놓지 못한 채 살아왔거든요. 또 지금부터는 죽음을 대비한 삶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도 그렇고 사는 것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요. 잘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어느 순간 담담하게 그 경계를 넘어서고 싶습니다.

- 윤대녕 <Axt> 인터뷰 중 인용

 

 

 

윤대녕 소설가의 이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말 그렇다. 사람을 항상 곁에 두고 시달렸던 사람들은 나이들며 자기에 충실하고 고독에 익숙해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윤대녕은 반대의 경우인 듯하다. 삶을 관조하고 자기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세속은 결국 불화하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다. 오십 대를 넘어서고도 자기를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기꺼이 인정하는 그의 사려 깊은 태도가 절로 그의 얘기를 경청하게 했다. 중년에서 노년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타인에 끊임없이 휘둘려도 흉하지만 독불장군도 고독하다. 그 어느 접점에서 욕망의 균형추를 잡지 않으면 추하게 미끄러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고유하고 개별적 존재라는 것, 모든 타인은 나만큼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런 인식이 확보돼야 비로소 삶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윤대녕 <Axt> 인터뷰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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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11-1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년의 내 사랑 대녕씨..그립고 궁금하네용^^지금은 헤어진지 오래지만ㅎ그래도 그 이 덕분에 20대를 지나왔습니다 소설 속의 광화문이며 대학로가 하도 궁금해서
상경해 몇 해 살았는데..

blanca 2016-11-14 19:45   좋아요 1 | URL
대학교 때 정말 찬란하게 등장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저는 그때 책을 열심히 안 읽던 시기라 윤대녕을 잘 알지 못해서 아쉬워요. 교양국어 시간에 교수님이 ˝윤대녕, 참 글 잘 쓰지.˝해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아름다운 단편들을 읽었더라면 더 흠뻑 몰입할 수 있었을 터인데...아쉬워요.
 

움베르트 에코는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에서 스무 살이나 서른 쯤에는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고 마흔 쯤에 미심쩍다는 생각을 품은 다음 백 살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보라는 확신을 가지고 홀가분하게 떠나라고 조언한다. 즉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선의나 대의에의 헌신에 어느 정도 기대나 신념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니 죽기 직전까지는 그런 헛된 기대를 유지하되 마지막에는 이 세상은 전혀 그런 기대와 맞지 않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삶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는 정치도 지도자도 대의도 신뢰하지 않은 듯하다. 이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상황은 그가 세상에 남긴 유언이 어떤 식으로 서사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의 민주주의는  에코의 풍자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식견과 능력과 선의를 가진 지도자를 가정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에코가 이겼다. 문제는 에코가 이야기했던 마흔 쯤에는 그래도 의심하는 수준이어야지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백 살 때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는 쾌감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벌써 틀려버렸다. 권력의 사유화와 각종 전횡,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 누리는 각종 이득과 이권에 도취되어 날뛴 역겨운 무리들. 그리고 계속되는 부인, 거짓말. 이 모두가 법치국가 민주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은희의 소설에는 그런 인간들이 결국 짓밟고 착취하게 되는 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트 매장 상품 진열 아르바이트, 카페 서빙, 식품 회사 댓글 알바, 공시생들은 그들이 갇힌 프레임 안에서 자신이 왜 이 일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혼란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자본주의의 최하위에서 고통 당한다.

 

그애들이 남긴 커피잔을 치우다가 나는 내가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수의 애인이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은희 <푸른 문을 열면> 중

 

 

<푸른 문을 열면>의 '나'는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다 우연히 한때 좋아했던 대학 후배와 그의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후배에게 음료와 디저트를 서빙하게 되며 그녀는 자신과 한때 교감했던 남자가 데려 온 연인이 자신과는 다른 계층에서 왔음을 직감하며 상처 받는다. 이것은 엄격한 '선긋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처절한 고독과 소외를 느낀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여기에서 울어야 하는지 거창하게 성찰하거나 분석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들의 비애는 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공명한다.

 

 

 

 

 

 

 

 

 

 

 

 

 

 

 

슬픔만은 언제나 그녀에게 답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내 삶의 리더이기 위한 지침이다. 내 슬픔에는 언제나 중대한 이유가 있다.

-이은희 <꿈꾸는 리더의 실용지침> 중

 

 

슬픔은 분노와도 통할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힘, 에코가 이 세상 전체를 다 잿빛으로 바라보는 건 충분히 늙어 죽기 전에 해도 괜찮다고 했으니 희망을 가지고 분노해도 아직 괜찮을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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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11-12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을 가지고 분노하기.. 백번 공감합니다. 바로 오늘 같은 날 말이죠.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수업 - 91세 엄마와 아들이 주고받은 인생 편지
앤더슨 쿠퍼.글로리아 밴더빌트 지음, 이경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죽음을 앞둔 멘토와 멘티의 수업을 표방한 책은 어느새 진부해져 버린 감이 있다. 죽음을 앞두고 각자의 개별성은 확 트인 일반성의 시야 앞에서 해체된다. 우리는 매일 전투를 치르며 삶을 견뎌내며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고견은 때로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의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그런 비슷한 류의 책들과 확실히 다른 차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92살의 어머니와 오십이 다 된 아들이 일년 여 동안 주고받은 편지 안에는 죽음의 이야기보다는 삶의 이야기가 더 많이 담겨 있다. 게다가 그 주인공 둘은 세속적 의미에서 특별하다. 어머니의 이름은 글로리아 밴더빌트(록펠러, 카네기와 어깨를 겨루던 철도왕 밴더빌트의 후손), 아들은 CNN의 대표 앵커 앤더슨 쿠퍼다. 글로리아의 삶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반짝였지만 수많은 슬픈 체험들을 안고 있었고 이 편지 왕래가 있기 전까지 아들과 진정으로 교감하지도 못했다. 스포트라이트, 언론의 집요한 관심에 가족의 상실과 치부는 거의 생중계되었다. 글로리아는 담담히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아들에게 들려준다. 변호하지도 미화하지도 비하하지도 않는 자신의 삶의 재구성은 그녀 자신이 이미 지난 온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다시 소화해내는 것이기도 하고 그녀의 삶의 대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들려주고 공감을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로리아의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밴더빌트가였지만 그녀가 십오개월 때 죽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글로리아를 낳은 친정 엄마는 딸을 외면하고 화려한 사교계의 파티의 유명 인사들과의 자극적인 관계에만 탐닉한다. 그녀를 키운 팔할은 유모와 외할머니였다. 그러나 글로리아를 둘러싸고 그녀의 어머니와 밴더빌트가의 고모가 벌인 긴 시간에 걸친 양육권 다툼은 소녀를 공포에 몰아넣게 된다. 그녀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던 내니와는 이 과정에서 강제로 헤어져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글로리아는 어른들에 의하여 때로 전략적으로 이용되었고 정작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나쁜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고 학대당했고 아이를 낳고 또 결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 당행스럽게도 마침내 앤더슨 쿠퍼의 아버지가 될 성실하고 정서가 안정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어 카터와 앤더슨 형제를 낳게 된다. 그러나 남편과는 앤더슨이 열살 때 사별하게 되고 큰 아들 카터는 스물세 살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는 참상을 겪게 된다. 결국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둘을 제외한다면 이 가족은 모자 글로리아와 앤더슨만 남게 된 것이다. 앤더슨 쿠퍼는 이 상실을 단 하루도 상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를 유년기에 잃고 두 살 차이의 형마저 자살로 잃게 된 앤더슨은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곳도 없다는 자각 속에서 항상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통제하고 비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한없는 낙천성과 순수함으로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람을 믿고 배신당하고 대책없이 미래를 낙관하는 그럼에도 그 결과로 얻은 그 수많은 상흔마저 긍정하는 구십이 넘은 어머니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셈이지만 이렇게 다른 둘의 대화는 진솔하고 담백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교차하는 지점에서 빛나는 영롱함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모자는 서로를 믿고 사랑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과거 양육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를 용기 있게 인정하고 사과한다. 아들은 아팠던 두려웠던 슬펐던 느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한다.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고 하기 쉬운 이야기만 지껄이지 않는 대화가 부럽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네가 지닌 생각이나 감정 혹은 가치관을 재단하지 마라. 항상 진심을 말해야 한다.

-P.347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아. 우리의 삶도 덧없이 흘러가고 말지. 그런데도 우리는 온갖 것들을 모으려고 하고, 자기 주변에 쌓아 두려 하고, 사람에 돈에 지위에 집착한단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 가지 않아.

늘 행복할 수는 없어. 그걸 바라는 사람도 없지. 행복이 영원하다면 이 행복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단다.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난대도 당황하거나 놀랄 일은 없어.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 고약한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면서 번뇌에 시달릴 일도 없단다. 어떤 일이 너에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란다. -P. 355            

 

 

워즈워스의 <송시>에서 따온 "무지개는 피었다 지고"는 이 책의 원제가 된다. 그것은 삶의 파고의 은유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글로리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 이 모퉁이를 도는 그 수많은 사람들도 각자의 삶의 전투를 치르고 있기 때문에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저 위의 사람들도 알았다면 좋겠다. 그래도 아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의와 신의와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요즈음 한 세기에 이를 자신의 삶의 치부까지도 가감없이 노출하며 후손에게 마음이 울리는 조언을 남기고자 한 글로리아와 그것을 경청하며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고백하며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앤더슨 쿠퍼의 대화가 유난히 큰 울림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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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이런 시절 에 무지개가 천국으로 향하는 다리로 생각했었습니다. 워즈워스의 시구가 인상적입니다. 무지개 한 번 보기 힘들고, 운 좋게 본다고 해도 오랫동안 감상하기 힘들어요. ^^;;

blanca 2016-11-06 09: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무지개 참 보기 힘들죠. 저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만 기억이 나요. 인생에서 좋은 일도 그럴까요. 빨리 우리 나라에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어요.

나와같다면 2016-11-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상실을 단 하루도 상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blanca 2016-11-06 09:18   좋아요 1 | URL
저도 이 문장이 참 뼈아프더라고요. 상실은 잊는 게 아니고 안고 가야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