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십 대에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든 조각가 로댕의 사방에서 밀려드는 우편물들을 정리하고 답장을 쓰는 비서 역할을 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된 예술가를 흠모한 청년 릴케는 그에게서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방식을 배우지만 상대적으로 삶과 죽음과는 유리된 현실부적응자로 다시 현실에 부딪히며 예술의 멘토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생을 알아가며 위대한 시인이 되어가는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둘은 불화와 결별, 재회 등 굴곡 많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예술에서의 성취는 반드시 삶의 성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둘의 대비되며 교차하는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언어가 빚어낸 삶의 비가와 섬세하고 처절한 터치가 완성해 낸 빛나는 조형물들의 틈새에는 미처 다하지 못한 가족으로서의 도덕적 책무들, 기본적인 배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들이 남기고 간 예술적 성취는 지금도 남아 삶의 온갖 책무에 너덜해진 우리들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성취를 가능케 한 가족들의 희생은 기억으로도 남지 않았다. 사실 사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다. 매일을 아름다운 시로 채우고 눈부신 조각으로 연인을 감동케 하는 드라마는 현실을 딛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이러한 담담함에 더 수긍이 간다. 대단한 드라마로 비장미가 가득한 그런 과장이 공허한 수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진짜 이야기. 결국 시간의 결이 모든 것을 훑고 가 삶의 이야기로 실을 잣는 그러한 이야기. 그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예순아홉 살이 되어 살아남은 자라는 지위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실이라고 느꼈다. 살아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었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골트이야기>















팔십 여년에 걸친 이야기. 아일랜드 역사의 격동은 한 가족의 평범한 소망과 일상의 행복을 흔들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드라마로 치닫지 않는다. 언제나 시간은 사건은 그 안의 삶을 쓸고 지나가지만 생과 삶의 지축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거나 단편적이고 정합적인 스토리로 수렴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서사로 쓸어담아 완결되는 것은 삶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말하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다행히 <루시골트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누구도 서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그렇듯이. 어떤 날이든 그 속의 시간은 서둘지 않고 지나가니까. 그걸 보고 배우면 된다. 서둘 필요 없다.

-<루시골트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서둘지 말자. 하루하루 속에 삶 전체가 나의 전 존재가 담뿍 담겨 있을 테니 천천히 하루하루 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학을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이십오년 동안 했지만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에 비해 소통의 수준은 낮다. 나라는 인간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고비용 저효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듯하다.

















오직 언어의 세계에서만이 아마추어가 가치를 발휘한다. 실수가 가득하다 해도 좋은 의도의 문장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롬브 커토 <언어공부> 중


그런 의미에서 마흔에 유럽으로 이주한 윤이상이 <생의 한가운데>의 작가 루이제 린저와 독일어로 나눈 대담은 놀랍다. 그녀는 머나먼 동방의 나라에서 온 이국의 음악가의 질곡어린 삶과 도교적 정신 세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그것이 엮어낸 음악적 성과에 대하여 깊고 넓고 진실되게 이해하고 있다. 둘 사이의 대화에서 언어의 벽은 온갖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걸러내는 고결한 체로 작용할 뿐이다. 무언가를 유창하고 쉽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상대가 더 많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 것같다. 모국어로 소통하는 가족이 대화를 통해 남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나 이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정답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윤이상이 투옥 중 감옥의 건너편의 대학생과 언어가 아닌 수신호만으로 우정을 나눈 이야기는 소통은 진정성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뛰어넘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루이제 린저와 윤이상의 대화는 윤이상의 태몽으로부터 연대기적으로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가 꾸었다는 상처입은 용의 꿈은 그의 운명의 파고를 예고한 듯하다. 아름다운 최남단의 어촌 통영에서의 어린 시절의 회고는 그림 같은 정경이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세시 풍속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윤이상과 남다른 이해와 관심으로 호응하는 루이제 린저의 대화가 뜻하지 않게 이국에서 나이들어가는 나를 촉촉하게 적신다. 자꾸 눈물이 났다. 어부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자란 소년은 그의 동양적 원천을 잊지 않고 자신의 창작에 주춧돌로 놓는다. 고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것이지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으로 상기하거나 끼워놓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엉뚱한 식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엄혹한 박정희 정권은 시대의 특수성과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이념적으로 재단하여 그를 가족과 떨어뜨려 강제로 고국으로 송환하여 짐승보다 못한 고문으로 강제자백을 강요하게 된다.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당시 해외에 있던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영문도 모르는 채 돌아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설명된 억지 프레임안에서 과거의 행적을 해석당한다. 정작 그들을 구한 것은 고국이 아니라 생업이나 일을 위해 잠시 경유하거나 적을 두었던 이국이었다. 윤이상은 책상 하나 없는 옥중에서 기약없는 감금생활 중에도 작곡을 하며 자신만의 창작의 세계에서 고귀한 자유를 맛본다. 이미 그는 죽음을 넘어섰다. 사랑했던 나라와 사람들이 자신을 철저히 배신했다는 그 잔인한 현실도 그의 존재 전체를 구속하지는 못한다. 우주의 광활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미약함을 의식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의심하지 않는 그의 도교적 깨달음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루이제 린저는 최선을 다해 그러한 그의 의식과 깨달음을 이해하려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진지함과 겸손함, 성실성은 윤이상과 같은 민족인 나의 이해도와 정서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부끄러웠다.


윤이상이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고 염원했던 고국에의 귀환은 미완인 채로 남았다.  그를 끝까지 구속했던 유교적 가치관인 장자로서 선대의 묘를 돌보려 했던 책임감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고국의 산천도 그의 영면의 터가 되지 못했다. 그를  사지까지 몰고가 핍박했던 시대적 격랑은 아직도 완벽히 투명하게 해명되지 않았고 그를 가두었던 생각지도 않았던 이념의 틀은 여전히 분단의 틀에서 잊을 만하면 다시 악몽처럼 부활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일은 아직도 수많은 인간들의 탐욕과 아집으로 끊임없이 뒤로 물러난다.


소년은 아버지 몰래 밤에 바닷가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별의 노래를 듣곤 했다. 때로 별은 공명판이 되어 어부들의 밤노랫소리를 전해주었다. 그 노래는 죽을 때까지 소년의 마음에서 울려 그가 만든 음악의 시원이 되어주었다. 그 바닷가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소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안에 남아 있었던 그 다 불러지지 못했던 노래는 오래도록 남아 그 소년이 살아내야 했던 숱한 시련을 이겨내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노래는  유한한 생을 뛰어넘어 영원이 되었다.


영원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죽을 뿐이지요....

-윤이상


그의 말처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7-10-2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윤이상을 ‘알쓸신잡‘에서 처음 들었어요.
무식이 탄로.....
본편에 잠깐 언급되었다가 나중에 감독편에 윤이상 이야기 하면서 작품을 듣는데, 충격적이더라구요.
100년 안에 현대음악의 거인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유희열의 말이 이해되기도 하구요.

언제나 그렇지만,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7-10-24 01:54   좋아요 0 | URL
아, 알쓸신잡에 윤이상 이야기가 나왔었군요. 이념에 관련된 부분은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아 윤이상에 대한 국내 평가는 아직도 잊을 만하면 색깔론으로 가서 참 안타까워요. 저는 현대클래식은 아직 귀에 잘 안 들어와서 솔직히 윤이상의 음악적 성과를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해 아쉬워요. 유희열은 작곡을 공부한 사람이니 그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읽어주셔 감사합니다.^6^

stella.K 2017-10-2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낸만이어요. 왤케 뜸하십니까?

blanca 2017-10-24 01:55   좋아요 0 | URL
시간은 빨리도 흐르는데 왜이리 챙기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지... 벌써 2017년도 두 달 남짓 남았는데 쓰는 일도 손 놓으니 안 쓰게 되네요...읽기는 읽는데 읽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좀 분발해야겠습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명한 하늘, 이국의 언어. 분명 아름답고 찬란한 구석이 있지만 늙어버린 나는 뭔가 내내 불편하여 서성이게 된다. 그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의 환시 같은 거다. 나는 구경꾼, 손님, 방랑자, 깍두기다. 나의 눈빛은 내내 불안정하고 숨결은 거칠다.

나는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나온 곳으로부터 내가 결국 가 닿아야 하는 곳으로 오랜만에 이 책이 왔다. 모국어란 때로 참 엄정하다. 내가 무시하는 것들, 내가 지나친 것들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떨칠 수 없는 모정과도 닮았다. 늙은 엄마는 장성한 자식을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 학교 가방을 처음 메고 나간 아이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 해도 별 수 없는 말들을 주워섬긴다. 아이는 다 흘려듣는 듯하지만 그 말들은 차곡차곡 쌓여 아이에게 무게를 더한다. 내가 그렇다. 그 어떤 내용이라도 이러한 모국어라면 나에게 결국 관통하여 들어와서 남고야 마는 완강함이 있다. 나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는 문장은 <입동>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면서 그 중심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다섯 번의 이사 끝에 부부가 당도한 곳은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아닌 또 하나의 상실을 담보한 허공이었다. 차곡차곡 열심히 벌어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점점 그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여겼던 안도감은 어이없는 사고로 일거에 부서지고 만다. 시시하고 안온한 일상조차 기적이자 어마어마한 붕괴 지점을 눈가림하고 있는 허룩한 이음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는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든다. 누구나 이러한 상실과 이러한 상실을 경험했을 때의 타인들의 몰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잔인한 현실에 대한 자각의 지점 때문일까? 담담한 문체가 뼈로 스민다. 부부는 그 상처로부터 나아갈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지점에서 현실은 그리 허룩하지 않음을 작가는 넌지시 이야기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애란의 시선은 상실과 소외로 가 닿는데 그 뻗침이 작위적이거나 연민을 담보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속으로 스며 따뜻하게 이동하다 보니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뜨려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조손가정의 아이가 우연히 만나게 된 유기견과 함께 지내게 되며 그 개의 아픈 마지막을 동행하는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노인 폭행 사건의 방관자가 되는 이야기를 엄마의 시선으로 그린 <가리는 손>은 다 같이 아직 채 성장하지 않은 소외 계층의 아이들이 어떻게 소극적 악에 무감하게 되는지가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다. 우리는 무조건적 선을 기대하며 최소한의 선조차 제공해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마냥 찬란해야 할 것만 같은 젊음을 누리지 못한 채 취업 시장의 어둑한 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음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히 유효한 듯 <건너편>에서는 공무원 시험 장수생이 가정을 이루고도 결국 자신이 지향했지만 한없이 거절당했던 그 지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중년을 향해 가는 그 수많은 젊음들은 거기에서 그렇게 작가의 방식대로 늙고 성숙하고 살고 있어 정이 든다. 흔들리고 절망하고 그럼에도 그 기적적인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이 기특하다.


그녀의 애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디로 가고 싶은신가요>에서 제자를 구하려다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은 그 남편이 '죽음'으로 뛰어든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남편의 시선으로 비로소 진화하는 마지막 이야기다. 그것은 분명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시간성 안에 걸린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환기되고 복기되고 다시 이해되며 그렇게 비로소 마침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 섣부른 치유와 화해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함이 빛난다. 그녀의 이야기가 날아서 들어온 이유다.


나는 내일도 또 실망할 것이다. 탄생으로부터는 또 하루 더 멀어지고 죽음에 하루 더 가까이 가고 사람들의 거죽은 더욱 두꺼워지고 나의 거죽은 더욱 허룩해질 테니까.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어 참 많은 위로가 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9-18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9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09 0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0 0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영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white'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왠지 모를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에서 보던 다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교감하는 장면은 사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장면이기에 반드시 도식처럼 삽입된 것이라는 감정적인 해석도 함께 왔다. 아직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 같이 서로를 존중해 주기에는 너무나 욕심이 많다. 사는 일에 욕심이 게재되지 않고 생존이 영위되는 일이 가능할까? 다 같이 고결하고 다 같이 서로의 눈을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현실에서 삶이라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는 없는 것일까? 미국의 대통령은 단지 태어날 때의 피부 색깔 하나로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짐승 같은 소리라고 일갈하는 대신 비난의 초점을 교묘하게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욕망과 편견을 드러냈다.


사회적 약자의 프레임에는 수많은 판단 기준이 혼재한다. 경제,성별, 인종, 가치관, 연령. 그러니 결국 그 누구라도 완벽한 승자가 되기란 절대적 패배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항상 언제나 처절하게 지는 사람들이 한켠에 있다. 그럼에도 언제나 역겹게 끈질기게 이겨대는 그들이 있다. 욕심쟁이를 욕하는 이야기는 쉽다. 하지만 항상 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어렵기 그지없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는 그러한 지는 자들에 대한 성찰이다. 지고 마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고 연가다. 아름답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절창에 한동안 아연해졌다.


남아프리카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인 메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 인종에 대하여 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운이 지독히도 나쁜 농장주 리처드를 만나 늦게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불행하고 힘든 유년이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처녀 시절을 누린다.  그러나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장주의 아내가 되며 그녀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상황의 안온하고 안전한 상황에서 누렸던 자신의 삶의 연약한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종을 의식하고 자신이 부리는 흑인 노예들에 감정적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외부와 단절된 시골에 갇혀 흑인 노예들에게 자신의 무력감을 해소하며 말 그래도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점점 나빠져 간다. 메리에게 아니 그 나라의 그 사회의 그 시간에서의 백인들에게 이미 자신들이 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흑인인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과는 도저히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메리는 전형적인 백인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노예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수족처럼 부리려 드는 모습은 지금 여기에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우리를 심히 역겹게 하지만 그녀를 전적으로 미워할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도리스 레싱은 메리를 적나라하게 그리지만 메리 안의 '그 무엇'의 이물감이 독자를 밀어내지 않도록 주도면밀하게 그녀의 모습을 조종한다. 그녀의 살갗에는 우리의 못난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그러한 것일까? 과연 그러한 사회적 압력과 제도하에서 그것에 반역할 용기와 신념이 시대와 사회의 프레임 안에 개인을 가두었을 때 쉬운 일일까?


그녀가 결혼 제도 안에서 자본주의의 열패 안에서 추락해 가며 또다른 의미에서의 약자를 하대하고 괴롭히는 모습은 분명 낯선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복합성과 모순은 생의 의지 안에 잠복되어 있어 언제 그 추한 외형을 드러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어제는 거액을 기부하고 오늘은 식당이나 가게의 직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모순은 바로 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


메리가 흑인 노예 모세에게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과 거부감은 도리스 레싱의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상당 부분 해석을 독자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메리가 모세를 증오했는지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 둘다였는지를. 비참한 최후 앞에서 자신을 결박해버린 그 처참한 배경마처 아름답게 관조해버리는 그녀의 시선은 그 자체로 모순의 결정체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그게 삶이 되어버리는...삶은 언제나 언어 저 너머까지 날아가 버려 도저히 말로써 담아낼 수 없다. 언제나 저기까지 언어로 밀고 나가려하지만 그 언어의 마침표는 삶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만다.


노예 모세가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해 달라는 그 당연한 요구로 그녀를 굴복시켜버렸듯 메리 또한 남편과 사회에 그 자신을 결혼 제도 안의 양순한 아내가 아닌 욕망과 꿈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해달라는 그 기본적이고 쉬워보이지만 한없이 어려운 요구를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떨구어 놓고 가버리고 만다.


그냥 머물러 있는 것. 그러다 그냥 쓸려가는 것. 메리의 슬픈 삶이 모세의 비참한 최후와 오버랩되어 잔상이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에 오래도록 서성거리게 된다.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장대한 이야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과연 오늘날은 메리의 시대에서 얼마만큼 진보되었는 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교양과 사회적 가면으로 위장하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억압을 자행하고 자행당하며 오늘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를 성찰하지 않고는 반드시 어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지 않을까. 나도 자신이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7-08-21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너무 반가와요~~~~부비부비! 저 나비, 비비아롬나비모리입니다. 제가 모처럼 온 건데 어째 블랑카 님이 그렇게 된 듯한??ㅎㅎㅎ

암튼 이 책은 못 읽겠네요. 너무 화나고 슬프고 그럴까봐. 요즘 언급하신대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인종주의에 더 불을 지피고 있는 현실이라~~~ㅠㅠ 뭐 세상이 이렇게 거꾸로도 돌아가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휴

blanca 2017-08-22 02:4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나비님 생각했었는데 왜 이리 뜸하셨어요! 막내도 많이 컸지요? 저도 요즘은 좀 뜸하게 됩니다. 시간이 참 빠르죠? 알라딘에 온 게 어언 십 년 전이라 생각하니...참 기분이 묘해요. 이 책은 강력 추천합니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첫작품이라네요. 원서로 읽으면 더 절창일 것 같아요.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 피아니스트의 아흔 해 인생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시모어 번스타인.앤드루 하비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면 그 때의 그 어떤 날을,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일주일 내내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 설레는 느낌은 다시 맛보기 어렵다.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 그 때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 준비해야 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나이가 들면 그 때의 내 앞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시간과 공간은 간데 없다. 대신 여기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나를 포박한다. 나이가 들면 이제, '절대', '정말', 같은 부사앞에서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분명 잃게 되는 다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이제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로 내 생활 전반이 흔들리거나 누군가가 나를 부정했다고 해서 내 전존재를 무의미하게 느끼게 되거나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무릎 꺾여 다시는 일어나기 힘든 경우는 그 전보다 줄어든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 상황을 깔끔하게 재단하거나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섣부른 믿음은 저만치 뒤로 밀려난다. 지혜나 깨달음의 축적이나 경험을 통한 학습된 효과로만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물론 나의 삶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내 전존재나 내 삶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어렴풋한 자각에서도 비롯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듦과 노인이 된다는 것, 죽음이라는 그 확연한 예정된 종말로 서서히 다가서는 일, 그리고 삶.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설명하기 힘든 힘, 섭리. 그래서 아흔이 가까운 거장 피아니스트와 환갑이 넘은 시인이 나누는 <말>을 듣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선망으로 물들였던 <스탠 바이 미>의 그 배우 에단 호크에게 헌정된 인터뷰집이라니...


배우 에단 호크와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친분은 에단 호크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되면서 비롯된다. 둘은 할리우드와 클래식 음악계, 적지 않은 나이차를 건너 뛰어 자신의 재능과 삶을 통합하려는 그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여정에서 만나 진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과 노력, 열정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의 부산물들을 절제 없이 향유하는 대신 더 거대한 생의 과제와 영혼의 탐사,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며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속적 견지에서 보는 '성공'이라는 열매는 때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치거나 그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오히려 거대한 난관으로 작용했는지 수많은 예가 있지 않은가.


여든여덟 살의 노인이 30년간 은퇴했다가 다시 나와서 독주회를 열고 계속해서 가르치고 삶과 죽음, 우주를 둘러싼 그 수많은 답해지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독선적으로 자신의 논리나 아집을 강요하는 대신 겸허하게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고 자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깊은 가르침을 주는 울림을 준다.


잘 늙어가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7-18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직접 겪어보면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는 번스타인의 말이 비트겐슈타인의 격언(˝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과 일맥상통합니다.

blanca 2017-07-19 06:45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말을 했군요. 비트겐슈타인은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철학도 삶도 흥미롭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