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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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길을 걷는데 뜬금없이 어딘가에서 탄내가 났다. 화재를 감지하게 하는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낙엽 태우는 냄새 같이 군고구마를 굽는 향기처럼 따스하고 그리운 느낌이 나는 냄새에 순간 멈칫했다. 설명하기 힘든 느낌의 정체를 더듬어 보니 분명 어렸을 때 추운 겨울이 오면 으레 거리에서 맡아지던 냄새였구나 싶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그 냄새에 갑자기 내 기억이 찻잔의 꽃잎처럼 펼쳐지며 돌아오진 않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를 재촉하게 되었다. '걸어본다' 시리즈 중 네번째. 시인이 공부를 위해 우연히 찾아와 이십 년 넘게 살게 된 독일의 도시. 그녀의 시선은 미처 거기에서 태어나 산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않은 거리두기의 지점에 가 닿아 있고 이곳은 그 도시를 들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너무 다가가서는 곤란한 일이다. 한 발짝 떨어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 고인이 된 시인이  살고 있던 독일의 뮌스터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의 초입에는 그녀가 직접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가 의외의 덤이다. 거리의 풍경은 독일 전후의 역사, 시인 자신의 삶, 인용한 시인의 생애와 어우러져 한 편, 한 편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어색해하며 반가워하며 잡는다. 


모든 살아온 장소들이 어쩌면 지나간 꿈이거나 다가올 꿈인지도 몰랐다. 라일락 향기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염없이 빛났다. 저 별에도 우리는 갈 수 없으리.


이제는 전쟁으로 갈 수 없게 된 시리아에서 함께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굴했던 스승이 은퇴 후에 사들인 자그마한 집에서 묵게 된 시인이 밤에 라일락 향기를 잡으려다 못 잡고 내뱉은 탄식은 그녀 자신의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시처럼 빛난다. 그녀가 끝내 경유지로 여겼을지 모를 장소에 몸을 누이고 남은 이야기. "세계의 노예가 될 수 없어서 나는 내 자의로 이방인의 위치를 만들었다."는 그녀의 고백은 왠지 좀 근사하다. 고독할 때 시를 베낀다는 그녀의 스승처럼 제자는 자신의 고독을 지워지지 않을 시로 승화시켰다. 


언젠가는 그녀가 걸었던, 온갖 전쟁의 상흔과 학문의 열정과 시대와 결별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만의 거리를 두며 자기 갈 길을 가는 그 꼿꼿한 성정이 한데 다 뒤섞여 한 겹씩 벗겨내어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그곳에, 뮌스터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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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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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긍정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훼손하고 폄하하고 사람이 타인의 삶을 유린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종국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복합적이고 그의 생은 읽기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문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어제는 고귀한 일을 행했던 오른손으로 오늘은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비겁한 행동을 하는 왼손을 숨기는 인간의 치사한 면으로 인간 전체를 매도하거나 역사 전체를 악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고 반문합니다. 아주 많이 늙어 깊이 성숙하여도 나는 똑 떨어지는 답을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답들을 더듬어 봅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잊혀진 잃어버린 목소리를 각자의 시선에서 복원해 낸다. 비단 열여섯 살 소년 동호 한 명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뜻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 청년들의 그 날의 경험, 그 일이 남긴 상흔이 그들의 이후의 삶에 어떻게 드리워졌는지에 대한 천착은 실제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귓전에서 듣게 하는 착각을 낳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처절하다. 작가가  그들을 '너', 혹은 '그녀'로 거리두기를 하며 객관화와 중립의 거리두기를 하려 했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완강히 버티는 그 믿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사실들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킨다. 모두가 대단한 명분이나 현학적 가치를 지향하여 온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들은 선의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함부로 도륙된 같은 인간들의 몸을 수습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어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부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절규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의 욕구와 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여름을 견딘 자들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유린하고 파괴하려 했음에도 끝까지 남는 건 무얼까? 이 질문은 내도록 읽는 일을 힘들게 했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을 아직 꾸지 못한 꿈, 만나지 못한 사람,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파괴한 저들도 과연 여전히 인간일 걸까? 그들을 이미 만나버리고 살아남은 남은 자들은 대체 그 절망을 어떻게 수습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잊혀졌다 다시 돌아왔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운다." 이야기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거대한 악의 현장은 빈곤한 명분과 허접한 논리들로 뒤덮이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고 그것이 짓밟아버린 선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여전히 멀다. 


"우리는 고귀해" 노동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소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끌고 지나간다. 아무리 파괴하고 앗아가려 해도 결국 절대 함부로 갈취할 수 없는 그것의 고결한 핵에는 깨끗하고 절대 오염되지 않는 성역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든 짓밟으려는 거대한 악의 빈곤한 행사에 도취된 저들도 역시 같은 인간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순이다. 한강은 그것을 머리로 해석할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진혼제를 정성껏 지낸다. 소년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역사를 망각하고 그 실수와 그 상처와 그 훼손을 묻어버리고 정치와 권력행사를 혼동하고 공권력의 남용에 무감각해져 무고한 생명과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다. 자신의 욕망과 무지와 폭력이 만날 때 빚어질 비극은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위협한다.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 있다. 흩어진 비극적 사실들의 파편을 수습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증언한다는 것은 그래서 엄중한 무게를 가진다. 경청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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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넘으면 또 산이다."

친정 엄마 얘기가 귓가에 맴돈다. 솔직히 수긍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힘들게 산을 탔는데 또 넘어야 할 산이 내 앞에 나온다면, 게다가 그게 삶의 은유라면 생각만 해도 지친다. 그런데 정말이지 요즘은 엄마의 얘기가 당신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높이와 굴곡은 저마다 또 시간마다 다르지만 결국 숙제는 어렵고 어떻게든 마쳐서 제출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아무리 열과 성을 다 해도 결국 일의 완성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작용한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운명론적 체념이 나날이 한뼘씩은 늘어간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주명리학으로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한치의 오차없이 읽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주명리학이 점이나 미신, 헛소리로 폄하될 것도 아니다. 음과 양의 기본 개념에서 출발한 간지의 순환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살이를 풀이하는 일은 내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리듬에 내 시선과 자세를 맞추는 일이다. 일확천금이나 운수대통의 지점을 적시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일들이 결국 지나갈 것이며 그 지나간 자리에 앎이 남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가 사주명리학을 비교적 쉽게 설명한 입문서라고 하는데 정작 학문적 접근은 쉽지 않았다. 만세력을 보고 나의 출생연월일시를 넣어봤지만 대충이라도 읽어낼 수 없었다. 사주에 불이 많구나, 이 정도. 사주명리학 그 자체보다는 삶의 본질적 흐름과 외부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자본주의적 가치와 이분법적 잣대를 분리하여 나의 운명 그 자체를, '나'라는 인간 그 자체를 어떻게 포용하고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철학적 인문학적 시선이 와닿았다. 


특히 무기징역을 받고 추운 독방에 내몰린 신영복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 죽었어요."라고 이야기한 대목의 인용은 뭉클했다. 단지 두 시간, 그것도 고작해야 무릎크기의 햇빛을 기다리며 그래도 태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외부적 사건,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마음 속에 바로 파고드는 이야기.


나의 운명과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들의 삶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혹은 해석하거나 인과 관계로 정렬해 보려는 오만은 버려야겠다. 내가 이 땅에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데 내가 또 언제, 어떤 식으로 갈지 짐작할 수 없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견딜 수 있다. 견디고 버티면 어떻게든 시간이 가겠지.


















"엄마, 조보다 더 큰 수는 뭐야?"

요새 꼬맹이의 최대 관심사는 무지 무지 큰 수다. 아마 나도 고맘때쯤 아빠한테 비슷한 질문을 했고 아버지의 대답은 

"무량대수니라."해서 "에잇, 거짓말"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로 찾아보니 무려 "무량대수"가 있었다. 제대로 앉아 찾아보니 이 큰 수의 용어가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다. 칼 세이건의 마지막 책은 이러한 이야기로 출발한다. 정말 큰 수. 무지 무지 무지 큰 수. 칼 세이건이 사람들에게 "billions and billions"로 불렸던 건 아무래도 그가 우주의 역사와 그 언어로 충분히 묘사하기 힘든 광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언뜻 스치며 이야기한 단위가 부풀려진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의 생전 마지막 이야기를 이 큰 숫자들로 시작한다. 아이한테 큰 수를 설명하기에는 10의 지수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보너스로 알게 되었다. 숫자에도 과학에도 직관적인 이해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칼 세이건의 이야기의 태반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우주의 역사와 광대함을 듣는 것만으로 나날의 범속한 일들, 치사함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위안이 된다. 더 고차원적이고 거시적인 지대로 발을 딛는 것만으로 조금은 덜 작아진다. 착시일지라도.


사주팔자도 우주의 비의도 구체적인 일상의 지엽적 문제들의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 이 자리에 발을 딛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설명하기 힘든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 준다. 그래서 읽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도 앞으로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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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소설가의 사물 - 사소한 물건으로 그려보는 인생 지도
조경란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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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가족의 안부에 관련된 안좋은 소식을 들었다. 순간 멍해졌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아연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처럼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만큼은 찡하고 쌉싸레하지만 결국 남길 그 진한 여운으로 마음이 가라 앉았다. 일상은 다시 예전처럼 단단하고 안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순간, 비록 그것이 순간의 착각일지라도 감사했다. 


책상 앞에 앉기 전에 예가체프를 천천히 간다. 커피 향이 퍼지면 마음은 누그러져버리면서 뭐 이 정도도 괜찮잖아? 싶다. 삶의 바닥에는 수많은 단층선이 있고 그것 중 언제 하나가 일상을 뒤흔들게 될지 알 수 없다.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순간, 커피를 내리는 순간, 좋아하는 책 한 페이지를 읽는 순간, 괜찮은 순간들이 모이면 정말 괜찮은 하루가 될지 모른다.

마침 지금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이런 문장과 함께 위안을 받았다. 이 대목은 소설가의 사물 중 '핸드밀'에 나온 것. 그녀처럼 커피 원두를 직접 볶거나 핸드 드립을 하여 마침내 마시게 되는 커피는 아닐지라도 이제 나를 전혀 처음 보는 혹은 스쳐 갈 낯선 이로 치부하지 않는 점원의 다감한 눈빛과 함께 받아 드는 아메리카노는 나를 지금 흔드는 삶의 단층선의 진동을 조금 떨어져 느낄 수 있게 언젠가는 그것이 다시 단단하게 나를 지지해 줄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소설가의 사물은 달걀, 레몬, 연필, 뒤집개, 타자기, 깡통따개 등속이다. 그녀의 삶과 그 안의 사물과 그녀가 읽고 쓰는 일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이야기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여행하며 간절했던 손톱깎이는 마침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도 남자가 손톱깎이를 자신에게 주는 대신 주겠다고 얘기하는 영원히 여행할 수 있는 차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와다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 주섬주섬 펜을 꺼내 이 부분을 메모한다. 언젠가는 이 영원히 여행하는 차표와 손톱깎이의 교환의 등가여부를 판단할 수 있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사물은 작가의 일화와 작가의 독서와 작가의 쓰기와 어긋남이 없이 만나 어느덧  그 사물과 그 책을 찾게 한다. 뜬금없이 텀블러를 꺼내고 손톱깎이를 꺼내어 별로 길지 않은 손톱이나마 자르기 시작하는 것. 오후에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는 것은 저녁잠을 망치게 되는 일이라 좀 망설여지지만.


시간은 앞으로 간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사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물을 쓰고 경험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망각하는 시간 자체가 삶일 테니 당연한 결론일 것같다. 나답게 잘 버티어내야지. 명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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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와 류노스케의 생몰 연월일을 보니 세상에 나와 삼십오년을 살고 갔다. 그의 <귤>을 읽고 나니 이 짧은 생애에 다시 눈길이 간다. 열차 이등실에 앉아 우연히 보게 된 행색이 초라한 소녀에 대한 짧은 단상은 절창이다. 소녀의 남루한 행색에 대해 솔직히 느꼈던 반감과 혐오감이 어떻게 반전되는지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결고운 호소력 짙은 명문이다. 

















그때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그 애가 예의 부르튼 손을 쭉 뻗어 힘차게 좌우로 흔드는데, 맘이 들뜰 만큼 따스한 햇살에 물든 귤 대여섯 개가 배웅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이리저리 흩어져 내렸다. 나는 엉겁결에 숨이 멎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이해됐다. 이 아이는, 아마도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러 떠나는 이 아이는, 품속에 넣어온 몇 개의 귤을 창밖으로 던져 애써 건널목까지 배웅하러 나온 남동생들의 노고에 보답한 것이구나.

- 아쿠타와 류노스케 <귤>


터널 속에서 묵직한 차창을 어떻게든 들어올려 열려고 했던 시도를 거슬리게 느꼈던 아쿠타와 류노스케는 그 후에 나올 자기 집 개구쟁이 남동생들에게 귤을 던지는 소녀의 몸짓으로 인해 뜻밖의 경탄으로 숨이 멎는다.. 무겁고 둔하게 느껴졌던 소녀의 모습에는 이런 생기가 숨어 있었다.. 어떻게든 남동생들에게 품안의 귤을 던져주고 지나가고 싶었던 누이의 우애는 햇살 같은 귤로 몽글몽글 피어난다. 차갑고 무심했던 청년의 시선은 잠시 반짝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로 가 닿는다. 절망했던 그는 잠시 움찔한다. 대단한 교조적인 연설 없이도 생의 비의는 이렇게 순간의 찰나 같은 이야기로 드러나고 빛난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중심에 있있다 일본 정부의 검거로 투옥 생활을 하게 된 소설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이야기는 정작 그 자신의 이야기보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이름 모를 조선인 동료의 이야기가 뼈아프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외부에서 사식을 받지 못하는 감방수였다고 한다. 바깥의 소식도 감방에서의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 줄 그 어떤 물질적 지원도 받지 못하는 조선인 동료에 대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백 년 가까이 지나 같은 땅의 후손이 듣기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다. 


1902년 영국 유학 생활 중 하숙집 아주머니의 권고로 억지로 배우다시피 한 자전거로 인한 각종 사고와 해프닝을 유쾌하게 그 린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거 이야기>부터 일본의 근대 이후의 작가들의 수필들을 모든 이 책은 역자가 직접 동경의 국립 도서관이 문을 열 시간부터 닫을 시간까지 상주하다시피 하며 발굴해 낸 이야기들이라 한다. 번역이라는 체를 통과했다는 의식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려하면서도 일본 작가들 특유의 문체적 성격까지 충실히 살려 낸 이야기들이 잔잔하니 읽기에 보기에 듣기에 좋다. 유달리 요절한 작가들이 많고 그들의 시선은 청춘의 경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듯한데 시대의 질곡과 삶의 신산한 부침에 시달려 한 생애를 살아 낸 노인의 그것과 견주어 깊이에 부족함이 없어 보여 역설적으로 더 안타깝다. 구체적인 생활의 고난으로 한없이 절망할 듣도 한데 일상의 비일상성과 눈물 속의 해학을 길어 올리는 재주가 천상 작가들의 그것이다.


<슬픈 인간>은 슬프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자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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