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하루키한테 빠져서 인터넷으로 하루키에 관해 이것저것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친정엄마 연배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어떤 유연성이나 청취력 같은 부분에 분명 한계가 오는 것 같은데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당최 이것은 아주 많이 깨달아 버린 똑똑한 젊은이의 분위기니 참.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디어 그의 부인 사진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아, 안 나온다, 더 궁금하다. 그러다 찾았다......

음..... 놀랐다. 하루키가 더 괜찮아 보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김영하의 인터뷰를 읽고 그가 전업 작가로 생활하기 힘들다,는 고백을 듣고 놀란다. 하루키와는 또다른 세상이다. 책이 안 팔리는 시대, 소설은 더더욱 안 팔리는 시대, 김영하 정도의 인지도와 해외 유수의 신문에 고정 칼럼을 싣고 수 권의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한때 대학에 적도 두었던 사람마저 전업 작가로 생계유지가 안 된단다. 그렇다면 나머지 작가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울 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로서는 덩달아 우울해진다. '이야기' 없이 살 수 있을까?

 

다시 하루키로 돌아오면 하루키는 경제적 문제에서는 적어도 완전히 해방된(물론 그의 내밀한 경제 사정을 알 길은 없다) 작가다. 물론 거기에는 또다른 비판의 시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우리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삶도 그들의 소비도 그들의 발언도 좀 더 책임감 있고 좀 더 대의에 헌신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분명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의 생각, 판단, 삶에 대한 태도에서 결코 독립되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작가도 지나친 부자 작가도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바닥에 떨어진 불꽃들처럼 어딘가로 가는 차들의 행렬을 보다 갑자기 나의 기억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고 또 살아도 결국은 그것은 쌓인다기 보다 단편적인 기억들의 흩뿌림 정도로 느껴지면 너무나 허무하다. 어떤 전후맥락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들은 그래서 혜택받은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를 만들 수 없으니 작가들이 만든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작가들이 살 수 없다면 너무 가혹한 세상일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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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1-19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중국처럼 소설가한테 월급주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말이어요.
작가들마다 말하는 것도 달라요.
어떤 작가는 기본적인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야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고,
또 한쪽에선 가난해야 글을 쓸 수 있다고도 하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후자는 설득력이 없다고 봐요.
무엇보다 소설가는 상위 1%를 제외하곤 명예직인 거죠.
통반장처럼...ㅋㅋ

blanca 2015-01-19 20:50   좋아요 0 | URL
참, 이게 딜레마일 것 같아요. 작가가 돈을 많이 벌어도 너무 적게 벌어도 쓰는 일과의 균형 유지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예전에 김연수가 다른 나라 작가들이랑 이것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글에서 읽었는데 외국에서도 전업 작가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 봐요.

cyrus 2015-01-1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분 중에 문학잡지에 작품이 실린 적이 있는 젊은 시인이 있어요. 아직 시집 한 권을 출간하지 못했는데 시를 틈틈이 쓰면서도 기자직을 꿈꾸고 있더라고요. 현재 모 일간지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요. 기형도 시인처럼 ‘시인+언론인’ 조합을 괜찮다고 보는 편인데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경제적 여건을 위해서 제2의 직업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15-01-19 20:54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경우를 봤는데 이게 참 전력을 쏟아야 하는 일이 창작이니 투잡 하면서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소설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렇고요. 소설 쓰기를 위해 직장을 내려놓았는데 매너리즘에 빠져 더 이상 성과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참 괴로울 것 같고. 작가란 정말 대단한 결심, 결단, 주변 정리가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장소] 2015-01-1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를 오늘 두번째..!
저도 오늘 그의 연혁을 보곤 아버지보다 한살 연하. 돌아가신분과 나이세기를 하면 곤란할테지만..암튼..그랬다는..

blanca 2015-01-20 18:02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그장소님 아버님, 그리우실 것 같아요.....

[그장소] 2015-01-2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두번째..이젠 답글하기 무서움..ㅎㅎ
blanca 님 글 아니면 애쓰지 않을거예요..
아마도..ㅎㅎ 뭐가 문제지..
벌써 22 년 넘은 일..입니다.겨우 십년지난듯한데..시간이 쏜 살 같다..는 말 알겠어요!...활 시위를 떠난 쏘아진 화살..쏜..살,,같다.

blanca 2015-01-23 10:41   좋아요 0 | URL
아,꽤 오랜 시간이 지났군요. 그장소님 말씀 들으니 시간이 쏜살 같다, 는 직유가 정말 대단한 예리함을 갖춘 비유로 보여요.

세실 2015-01-2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작가 랜드로버 타고 댕기던데요.....
작가 강연회만 다녀도 살만한거 같던데 힘들다고 함.....ㅎㅎㅎ
하루키는 소설 한편 쓰고 나서 쉬는 타임에 에세이 낸다고 하더라구요. 그저 감탄했어요^^

blanca 2015-01-23 10:4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거였어요?

[그장소] 2015-01-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향수라는 노래 들으며 생각했어요.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하는 대목이요..
그 건 아마 그냥 화살이 아닌 시간.
철없던 시절..아닐까.고
그냥...말하자면...요.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활짝 갠 초봄의 아침. 아직 바람이 차가워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코트를 입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 내일은 춘분 휴일, 즉 연휴 한가운데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그냥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상 당신은 쉴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머리말 중

 

 

 

 

 

 

일상이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나이듦일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남의 일', 때로는 '나의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도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미워하고 욕망한다.

 

이윽고 회사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들은 거의 압사당할 것 같은 지옥철의 사람의 밀도에 헉헉대며 전날의 휴식의 아쉬움을,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들을 생각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목격하고 어떤 사람은 미처 자신의 시야를 어둡게 하고 욕지기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것의 실체도 모르는 체 무방비로 당한다. 그럼에도 그 날 그 지하철을 탔던 시민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몸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질에 의해 교란당하고 있음을 자각하기도 하고 자각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기어서라도 회사로 출근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이야기다. 몸이 괴롭고 도저히 컨디션이 살아나지 않는데도 관성처럼 다들 비틀거리며 회사로 향했다. 자신이 무엇에 의해 왜 이렇게 되었는 지에 대한 자각과 고민은 대부분 없었다.

 

1995년은 우리나라에도 대형 참사가 일어났던 해이다. 강남 한복판 견고하게 서 있던 백화점은 허술하고 빈약한 껍질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그 속에 품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죽고 다쳤다. 결코 움직여서도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았던 건물이 노쇠한 노인처럼 예고도 없이 자멸하는 모습은 그것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비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근처 일본에서는 고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 옴진리교라는 컬트적 색채를 띠는 종교의 교주의 지령 아래 붐비는 통근 시간 지하철 안에 치명적인 독가스가 살포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외국에 있다 귀국해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이 날 지하철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익명화 속에 침몰되어 매스컴에서 무람없이 살포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개별적인 삶들을 건져내고 싶었다. 다만 그것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어야지, 그 어떤 부담감이나 타의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대신 그들의 삶 속으로 1년 남짓 걸어들어갔고 그것의 집적물을 가지고 걸어 나왔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첫인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삶의 여정을 걸어왔는 지가 이야기되고 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3월 20일 사린 가스가 살포된 그 지하철에 올라탄다. 때로는 3분 먼저 집앞에 온 버스 덕택에 타지 않아도 됐을 그 지하철에 타는 불운에 처하기도 했다. 근무교대가 끝나고 지원을 나온 덕에 사린 가스를 마신 역무원도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를 들이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그들은 그게 어떤 고의적인 악의에서 나온 독가스이고 빨리 병원으로 가서 해독제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쓰러져 바라보는 '저쪽 길'의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바쁘게 출근길을 가고 있었다. 회사에 가서야 비로소 뉴스를 보고 자신이 사린 가스를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치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내가 출산을 앞둔 에이지라는 사람은 아내와 딸,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출근길에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하루키 앞에서 아내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그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모든 참사와 비극이 타자와 되는 것에 대하여 그녀는 한탄한다. 부지런하고 효녀였던 여동생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힘겨운 자활을 하는 여정에 동참한 오빠는 여동생 대신 여동생이 항상 써왔던 일기를 대신 쓴다. 하루키는 아직 회복되지 않아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를 만나 그녀의 손을 잡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기억들의 교차로 부정합이다. 기억은 완벽한 사실들의 집적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이러한 집합적 이야기 속에 내재된 팩트를 뛰어넘는 진실에 주목한다.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린 사건의 피해도 개개인이 살아온 내력과 상처를 처리하는 패턴에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개별의 이야기들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역시 하루키는 이러한 예고되지 않은 대형 재난에 대처하는 구조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 지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얼마나 개개인의 개별적인 선의와 구조 의지에 기대는 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어떤 제도=시스템에 인격의 일부를 맡기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해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로 당신의 이야기일까?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 자신의 꿈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 누군가의 꿈이 아닐까?

-p.712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선의와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 같은 종교 집단이 비록 그것이 약간의 컬트적인 요소가 있는 신흥종교일지라도 대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이제 '저쪽'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대를 더듬는 것으로 나아가려 한다. 혐오스럽고 괴이한 '저쪽'을 균질하고 단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발적으로 '저쪽'으로 걸어들어간 사람들도 익명성에서 구출해내어 '이쪽'을 비추는 거울상으로 면밀히 들여다보려 했다. '저쪽' 사람들도 한때 분명 '이쪽'에서 '우리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옴진리교 신도이거나 한때 그 종교에 귀의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실하고 진지한 청취자의 자세를 견지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지나치게 왜곡되거나 편중된 지점으로 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절한 균형추로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평범하고 여느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하거나 더 외로움을 느끼거나 했던 이들은 저마다의 개인적인 고민, 건강 상의 고민들로 우연히 옴진리교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가 제시한 그 평면적이고 단순한 세계관은 너무나 허술하고 빈약한 실체로 인해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사람들도 그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옴진리교에 귀의하여 부정합과 모순이 난무한 세계를 등지고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명쾌한 지향을 향해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었던 지난 시간을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교란시키려 했던 폭력을 걷어내고 남은 정경은 또다른 우리의 못나고 아픈 구석이다. 첨언처럼 덧붙인 하루키와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 내용은 우리 인간 내부의 악하고 약하고 못난 구석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것을 무조건 거부하고 부인할 때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순수와 선으로 포장할 때 악은 기어나와 스스로를 형상화한다. 하루키가 왜 이토록 꾸준히 지하와 그리고 인간 내부의 부정적인 괴물 같은 면에 천착했는 지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거나 단정짓지 않게 되었다. 물론 상식과 선과 타인에 대한 선의를 기반으로 하루 하루를 살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내 자신을 어떤 사건이나 어떤 상황에서 면밀히 들여다 보면 분명 거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내부의 정경이 있다. 그것을 뿌리째 소거해 버릴 수만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편하고 단순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부터 어떤 비극은 시작될 지 모른다. 타인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소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은 자선을 행한 사람이 내일은 극도의 추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전전긍긍할 수도 있다. 어느 한 면으로 그 인간을 다 설명, 판단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심판을 내리는 지점에 분명 폭력의 맹아가 있다. 하루키는 어떤 판단을 정지하고 명확한 다수의 시점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데에 집필의 목적을 두었다 한다. 하지만 분명 이 지점은 대단히 웅변적이지만 더 나아가려다 머뭇거리고 만 것만 같아 아쉽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 지점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판단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또다른 폭력과 오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식과 지각, 판단의 외연은 분명 또다른 어떤 한계 안에 봉착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궁금해 하며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게 삶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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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금요일날 돌아와줘> 책이 나온 걸 보고 하루키 <언더 그라운드> 생각을 했거든요. 하루키 책 중에 가장 하루키답지 않은 책이기도 한데, 이 책처럼 그 책도 객관적으로 뭔가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 생각을 했어요. 눈물 속에 오기와 미움만으로 맴돌지 않게 말이죠. <약속된 장소에서>는 읽지 않았는데 출판사 의도이든 아니든 하루키는 책임감있게 두 세계의 무너짐들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마무리를 하려 했구나 싶군요.
오래전 누군가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지인들이 그건 아픔을 섣불리 건드리는 것 같다, 유족에게 더 아픔을 주는 일이다 비난조여서... 우리나라는 얼른 덮고 지나가려거나 회피하는 정서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절망스러웠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마무리하지 못했던 과거는 되풀이되었고, 세월호 사건을 다시 겪으며 <삼풍>웹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곡의 댓글을 올렸던가 다시 뼈아픈...
한강 작가 <소년이 온다>도 귀감이 되는 사례겠죠.

blanca 2015-01-20 18:01   좋아요 0 | URL
저도 대구지하철참사가 떠올랐어요. 어쩌면 더 많은 피해와 참혹한 슬픔을 안겨준 사건인데... 아픔을 말하는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한다면 더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나라 정서로 소설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다면 하루키 식의 르포는 더욱 힘들것 같아요. 한강 작가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누군가의 삶을 편견 없이 또 어떤 선입견에 기초한 재단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란 어쩌면 하나의 헛된 기대이자 망상, 무모한 시도로 결론나고 말지도 모른다. 시간의 풍화 속에 바랜 사실 들은 그 자체로 마멸, 퇴색되어 남을 것이고 또 어떤 선후 관계나 전후 상황이 소거되고 남은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된 진실이 아니라 얼개가 무너진 쇠락한 잔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하필 그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누구라면, 내가 증오하고 반면교사로 삼고 싶은 이라면, 그의 일생을 내가 복기하는 자체가 그저 그 '누군가'를 빗대어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몸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어떻게든 뚫고 나가려고 하는 그 처절한 노력이 비어져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수긍할 수 있다. 아니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인 안도현이 쓴 백석의 평전이 그러한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을 것같다. 솔직히 유명한 시인이 줄곧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 게다가 북한에서 중년과 말년을 보내고 사망한 시인의 삶을 복원하였다 했을 때 어떤 가정,느낌, 감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막상 안도현 시인이 백석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하여 백석을 다시 읽는 일환으로 복원해 낸 그의 평생은 최대한 드러난 진실, 그것을 단초로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의 망을 벗어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두드러졌다. 그 틈새에서 빠진 것들에 대한 상상의 몫은 오롯이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읽기이자, 백석과의 만남의 일환이 될 것같다.

 

 

 

 

 

 

 

 

 

 

 

 

 

 

 

 

 

 

해방 이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귀향하는 백석의 행로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는 이윽고 오산학교 앞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한 부모 밑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는 그의 유년기와 오산학교 시절로 회귀한다.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평생의 지기들과 실패하는 첫사랑으로 남게 되는 여인과의 만남 들이 생생하게 시인의 필체로 떠오른다. 군데 군데 삽입되는 그의 시들은 평북 방언들로 처음 대할 때는 어렵게 들리지만 몇 번 되뇌이면 무어라고 언어화하기 힘든 친밀감과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눈과 귀와 마음의 비늘을 벗겨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석의 전성기는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인 듯하다. 그때의 모습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각인되고 추억된다. 올백 머리, 최신식 양복, 50 명의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단번에 매치하고 출석을 부르는 놀라운 기억력, 출퇴근을 나귀로 하고 싶어하는 엉뚱하고 낭만적인 모습. 그리고 평생을 그를 그리워하며 여든이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그에 대한 추억, 사랑, 아쉬움을 술회했던 함흥권번 소속의 기생이었던 자야와의 만남. 그녀의 백석과의 로맨스는 그녀와 원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함께 집필하다시피 한 시인 이동순 교수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의 쇠락은 해방 이후 그가 고향인 북한에 남음으로써 시작되는 듯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그는 예전 같은 아름다운 토속의 방언으로 된 감각적이고 전아한 시들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한다. 대신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시들, 러시아어 문학 작품 등의 번역 등에 매진하다 북한에서 가장 추운 지방의 하나인  삼수의 협동농장에 현지파견을 나가게 된 백석은 몸에 익지 않은 육체 노동을 하며 젊은 시절 영롱한 문학혼이 응축되어 있던 그만의 시어 대신 사회주의 체제에 어느 정도 복무하는 교조적이고 선동적인 시 몇 편을 남긴다. 북에서의 그의 문학은 사실 문학이라기보다는 어떤 생존을 향한 몸짓 같아 안쓰럽다. 죽는 그 날까지 시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그의 생애를 한정된 자료로 추적하며 안도현 시인은 그러나 섣불리 그의 삶이나 문학적 성과를 단정짓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삶의 의미나 무게에 대하여 말을 아끼는 안도현 시인의 모습은 단정한 말줄임표 같아 와닿는다.

 

백석이 태어나 자라 늙고 죽은 시대는 유달리 개인의 삶을 질곡으로 치닫게 할 우여곡절이 많은 시공간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일본에 협력하거나 이념에 복무하기를 강요받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시대의 격류에 저항하거나 야합한 흔적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시인의 표현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려 했다. 그를 내리 눌렀던 질곡의 삶도 그 자체도 가고 난 지금,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오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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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2015-01-1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빨간책방 듣고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아직 주문못한책이예요
어제 재방으로 듣고 박씨봉방은 검색해서 베껴쓰고 혼자읽어보고 했는데
넘 좋고 쓸쓸하고 슬픈것이 머랄까 이런느낌이 행복한거라고 하려고요

blanca 2015-01-14 15:53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이 빨책방에 나왔었군요! 맞아요, 저도 시는 문외한인데 백석시는 방언 때문에 정확하게 의미를 못 알아차려도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시란 이런 것이구나, 싶어요.

Nussbaum 2015-01-1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그는 단호하다기 보다는 때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치만 눈빛은 꽤나 날카롭고 말하는 문장 사이에 나오는 다양한 생각들은 매우 지적인 것이어서 학생들이 그에 대해 받은 인상은 꽤나 강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침 책장 뒤에 백석 시집이 있길래 펼쳐보았더니 2010년 어느 커피숍에서 읽었는지 커피 영수증이 있네요. 살짝 바랜 종이가 지난 날을 거스릅니다.

이 밤에 통영,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같은 시를 뒤적이네요.

blanca 2015-01-14 15:55   좋아요 0 | URL
엉뚱하기도 하고 좀 결벽성도 있고 학생들이 꽤나 고생 좀 하게 한 영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네요.^^ 맞아요, 두고 두고 백석의 수업 시간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더라고요. 아! 저는 백석 시집에서 엉뚱한 채소 이름(장볼 것) 잔뜩 적은 메모 발견했어요 ㅋㅋ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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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로서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소설가로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나는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낸 적이 없기에 왜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조목조목 댈 말은 없다. 어느 날 여동생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고 들어왔다. 누군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며 읽어보라 했단다. 이윽고 나는 동생 대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었지만... 끝내 완독하지 못한 소설로 남았다. 그 다음부터 막연히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청춘에 그의 작품과 조우했던 극적인 순간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오히려 너무 젊어서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정서들, 느낌들과 나 사이에는 분명 어떤 휑한 간극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야기하는 하루키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다. 대인관계도 활발하지 않고 그저 규칙적으로 일어나 근육을 단련하듯 필력을 연마하는 겸손한 생활인이다. 그런데 그가 썼다는 이야기들에는 흔히 방황하는 청춘이 있고 꿈틀대는 심연의 욕망이 있고 때로 미처 실현되지 않은 좌절된 꿈들이 있단다. 그는 나의 엄마 연배이다. 그러한 그가 썼다는 이야기가 정말 그 어떤 젊음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나는 의심했다. 그러니 내가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의구심이 항상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쩌다가 이동진과 김중혁이 이야기하는 색깔 없는 사내 다자키 쓰쿠루와 엮여 버리고 말았는 지. 만약 이번에 다자키 쓰쿠루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영영 하루키의 소설과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매혹된 지점은 읽기도 전에 서른여섯이 스무 살로 돌아가서 푸는 어떤 실타래라는 것이다. 종종 아니 이제는 가끔 나는 그 비슷한 연배에서 스무 살로 곧잘 돌아가서 움직이고 느끼고 사랑하고 울고 좌절하는 나를 무연히 지켜본다. 그 나이의 나는 지금의 '나'와 백만년보다 더 떨어져 있다. 분명 똑같은 나인데 지금의 깨달음과 노쇠함을 가지고는 그 시절의 나를 곱게 지켜볼 도리가 없다. 아마 그런 아이가 내 주변에 지금 있다면 나는 참 황당한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잔소리와 훈계를 해댈 지도 모른다. 나는 스무 살에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었다.

 

내 인생은 스무 살 시점에서 실질적으로 발걸음을 멈춰버린 것 같다고 다자키 스쿠루는 신주쿠 역의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그 이후 찾아온 나날들은 거의 무게가 없었다. 시간은 잔잔한 바람처럼 그의 주위를 조용히 불어 지나갔다. 상처도 남기지 않고 슬픔도 남기지 않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이렇다 할 기쁨도 추억도 남기지 않고. 그리고 이제 그는 중년의 영역으로 접어들려 했다.

-p.421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스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로 시작하는 다자키 스쿠루의 이야기.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절친 그룹에서 제명당한다. 이유도  모르는 채 모두 그의 연락을 피한다.  그는 고향 친구들의 왕따에 여린 속살이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파한다. 이후로 그는 대학을 마치고 철도기업의 지하철역을 설계하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것처럼 보이며 그 일을 수면 밑으로 가라앉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며 다시 그 일을 떠올리게 되고 그녀의 제안과 독려로 스무 살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옛 친구들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 그는 함께 했던 친구들이 때로는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남고 때로는 부적응자가 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들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 우정의 펜타곤이 무너진 지점에 그룹의 일원인 시로가 자신을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지목한 것을 발견한다. 도저히 그럴 캐릭터가 아니었던 그였지만 친구들은 저마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그녀의 위증 아닌 위증을 수용한다. 하루키가 주목한 지점은 이곳이었다. 남녀가 섞여 있던 친구 집단에 그 어떤 이성적 호기심도 허락하지 않았던 암묵적 동의 밑에 깔려 있던 저마다의 어두운 욕망, 질투가 마침내 옅은 속살을 뚫고 나온 곳. 누구나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욕망이 해소되지 못한 지점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다는 통찰. 만약 그랬더라면,의 가정들이 난무하는 추억으로의 회귀 지점에서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똑같은 오늘에 대한 긍정. 여기에는 매일 아무리 힘들어도 육체 단련을, 글쓰기를 미뤄두지 않는 성실한 절제력을 가진 하루키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욕망을 응시하지만 그 욕망에 함몰되는 인간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 욕망을 억지로 비끄러매고 숨기면서 때로 불거지는 비극으로 인간의 삶 전체를 포박하지 않는다.

 

쓰쿠루가 대학에서 만나게 된 연하의 친구와 그를 그룹에서 내치게 만든 여자 친구 시로와 쓰쿠루를 연결하는 지점에 리스트의 피아노곡 <르 말 뒤 페이>가 있다. 그 자신이 재즈바를 해서 그런지 하루키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소설적 정서와 장면의 여운을 고조시키는 데 아주 절묘한 역할을 한다. 그 어떤 부속이 아니라 순간 핵심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개별의 이야기를 보편의 그것으로 확대시키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은 단지 무미건조한 쓰쿠루가 겪은 왕따의 아픈 추억에 대한 치유의 여정이 아니다. 직업병에서 비롯된 면도 있겠지만 쓰쿠루가 지하철역에서 관찰하는 그 수많은 출퇴근에 지친 직장인들의 정경, 특이한 유실물들에 대한 역직원들과의 대화, 아버지의 방황기를 통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대학 후배와의 대화 들은 내러티브를 뛰어넘는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진지한 철학이 있다. 사람의 내면에는 아무리 친밀한 타인도 심지어 그 자신도 응시하기 힘든 어두운 심연이 있다. 그 심연에 조약돌을 던져 생기는 파문이 번져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자리에 하루키가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지나치게 골몰하거나 함몰되지 않는 미덕에 그가 거는 타인과의 공명이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한 '너'와 충실하게 걸어가는 것이 삶에 대한 책무라는 것을 하루키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이제서야 온전히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냈다. 그것은 분명 이십 대의 나로부터 내가 걸어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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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시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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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나 보다. 전학와서 사귄 친구와 단짝이 되어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 우연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책을 보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의 책이었나 했다. 단숨에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이 되었다. 어떤 긴장을 끌고 가는 힘 뒤에 애거서가 슬몃 슬몃 뿌려 놓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막 달리는 롤러 코스터가 아니라 때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뒤를 짚어볼 수 있게 하는 그녀만의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은 감해지지도 스러지지도 않고 꾸준히 나의 성장과 함께 했다. 그녀가 다른 필명으로 장르 소설이 아닌 본격 소설 작품을 한동안 썼고 그것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또 다른 진지한 삶과 여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참 반가웠다. 까도 까도 또 깔 껍질이 나오는 양파처럼 이 작가는 무궁무진하고 깊다.

 

그녀는 다행히도 환갑 언저리에 시작하여 장장 15년에 걸쳐 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어 나 같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고고학자인 남편을 따라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이라크의 님루드에서 시작된 그녀의 삶의 복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파란만장한 문학이다. 전체를 따라 흐르는 그 유쾌한 분위기와 삶의 애착이 참으로 따뜻하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진 듯 절망하고, 날카로운 비참함에 온몸이 꿰이고, 슬픔에 몸서리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것임을 여전히 확신한다.- 서문 중

그녀는 뉴욕 출신의 아버지와 영국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오빠와 언니를 둔 다복한 가정의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인내심 많은 유모와 유쾌한 아버지, 이해심 많고 끊임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 밑에서 그녀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는 행운을 누린다. 유아기와 유년기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서 상상놀이에 심취하고 굴렁쇠를 굴리는 어린 애거서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한번도 진지하게 작가를 꿈꿔보지 않았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이고 약제실에서도 일했던 그녀가 우연히 어머니의 제안과 격려로 이야기를 쓰게 되는 장면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써 보기 전에는  쓸 수 있는 지 알 수 없다,는 어머니의 조언은 금과옥조다. 디킨스를 함께 읽고 어떤 선택이든 지지해 주었던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거의 한 세기 전의 그녀의 어머니의 육아 방식은 자녀의 눈높이에서 성장의 단계마다 아낌없이 호응하고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각종 육아서에서 설파하는 가장 이상화된 엄마의 현현 같았다. 어쩌면 애거서가 그렇게도 삶에 대한 굳건한 애정과 신뢰를 보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러한 행복한 성장 과정이 밑받침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의외로 평생 눌변이었고 소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여행이나 변화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애거서가 그 틀을 깨고 나와 세계일주를 하고 심지어 중동에 가서 유적 발굴에도 참여하는 모습이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누군가 데려다 주기 전에는 산책을 나가지 않는 개 습성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렇게 살 지 모른다는 그녀의 조언은 울림이 컸다. 그녀의 이야기 속 귀여운 해결사 할머니 미스 마플의 모습은 그녀가 군데 군데 남발하기도 하는 빛나는 조언들 속에 녹아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듣기 싫지 않도록 위트와 자신의 경험을 풀어 놓는 장치가 아주 정교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녀가 아마추어 작가에서 프로 작가로 나아간 지점에 '돈'이 있었다는 솔직한 고백도 그렇다. 백년해로할 줄 알았던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하다 끝내 이혼을 선택하는 장면은 노년인 지점에서의 회상씬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슬프고 애잔하다. 재혼의 대상이 될 줄 모르고 한참 어린 청년과 예쁜 빛깔의 돌을 색깔별로 늘어놓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의 이름은 맥스이고 그녀와 백년해로하게 되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등장시킨 미스 마플의 <잠자는 살인>을 헌정받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나는 지금 대기실에서 피할 수 없는 부름을 기다리며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 부름이 내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리라. 운이 좋게도 우리는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지금까지 너무도 복된 삶을 살아왔다. <중략>

에스키모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찬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화창한 날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얼음 너머로 걸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처럼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나는 것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리라.

-에필로그 중

 

 

일흔다섯의 나이에 삶에 관한 한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으므로 자서전을 끝내야겠다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되풀이해 읽었다. 그저 언어로 포장한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대하여 이토록 담담하고 아름답게 이야기한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늙음과 죽음은 항상 두렵고 소외된 것이라 여겼는데 이 위대한 추리 소설의 여왕이 노년에 이야기하는 그것은 어떤 타협의 지점에서 깊이 있는 울림을 주어 기억해 두고 싶다.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삶의 근사한 대미로 장식될 것이다. 소멸은 물론 분명 어떤 고통을 담보로 하겠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번 존재한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라는 애거서의 이야기를 위로로 담는다. 그녀처럼 더없이 행복하기만 한 유년을 가지는 축복은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아낌없는 헌신과 스러지지 않는 사랑을 가르쳐준 나의 할머니와의 추억들도 엄연히 거기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가 끝내 하지 못한 포옹과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으니까.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를 장식한 애거서의 어린 시절 사진은 분명 그런 기회가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삶을 예찬할 수 있었던 그녀의 작품들을 읽어 온 시간들이 더욱 더 오롯이 나에게 채워지는 것 같은 시간들, 고마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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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03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라면 실종 사건이 제일 먼저 떠올려요. 어렸을 때 미스터리 모음집에서도 나올 정도로 특이한 사연이었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로 크리스티가 사라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도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 자서전을 읽으면 실종 사건에 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blanca 2015-01-04 10:09   좋아요 1 | URL
저도 어렴풋이 들었는데 자서전에서 이 중대한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요. 찾아보니까 첫남편의 외도후 운전해서 나간 차에서 실종되었는데 어느 여관에서 그 남편이 외도한 상대 여성의 이름으로 묵고 있었다고 해요. 이게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인지 아니면 일존의 연기였는지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cyrus 2015-01-04 23:50   좋아요 0 | URL
하필 제일 중요한 내용이 없다니 아쉬워요. 그래도 본인에 관한 모든 얘기를 자서전이라해서 무조건 다 알려줘야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ㅎㅎㅎ

라로 2015-01-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 나이에 아가사의 팬이 되셨군요~~~초딩때의 독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해든이도 아가사를 읽히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수준이~~~ㅠㅠ 그러고보니 블랑카님 엄청 똑똑하셨군요!!!

blanca 2015-01-04 10:09   좋아요 0 | URL
아웅, 비비아롬모리님, 똑똑한 것과는 ㅋㅋ 거리가 있었어요. 참, 해든이 혹시 구스범프는 어떨까요? 요새 분홍공주는 거기에 빠져 있는데 글밥이 좀 많아서 부담스러워하긴 하더라고요.

라로 2015-01-06 04:16   좋아요 0 | URL
분홍공주는 벌써 구스 범스를 읽는 다는 말이에요!!! 저도 이번 학기는 분발해야겠네요~~~. 어쩌면 해든이도 읽으라고 하면 읽을지도 모르겠긴 하네요,,,^^;;; 암튼 더 분발해야 겠어요,,,해든이 막내라고 거의 방목!!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