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제목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다. 글쓰기 작법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은 작가의 삶을 감추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단순히 장르 안으로 한정되지 않을 수 있었던 깊이 안에는 쉽지 않았던 그의 성장 과정에서 체득한 것들이 쌓여 있다. 특히 두 살 터울의 형 데이브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는 각종 육체 노동을 전전하며 형제를 홀로 양육해야 했던 어머니를 뒀던 외로운 형제의 삶이 단지 음울하고 고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형제는 말도 못하는 개구쟁이에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창출해 냈으며 어머니에게 각종 자랑거리와 생각지도 못한 걱정거리를 선사하는 다이나믹한 아이들이었다. 형은 아우를 사랑했으나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아우를 골탕먹일 수 있을 지를 늘 고민하는 사색가이도 했다. 과학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수퍼막강전자석을 만들어 내기 위해 벌인 일들은 마을에 소방차까지 출동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개구지다' 남의 일일 때에는 읽으며 키득거렸다. 하지막 막상 이제 갓 두돌을 지난 둘째 아이가 드디어 사내애의 개구진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니 매일이  심적으로 놀랄 일 투성이다. 일단 며칠 전 화장실에 들어 와 있을 때 딸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달려가 보니 티비 화면에 무참히 금이 가 있었다. 티비 고장 중 가장 비용이 높다는 액정. 수리도 안 되고 아예 교체를 해야 하는데 정확히 구입해야 했던 비용의 반이었다.

 

다음 날, 가까스로 사람 안 다친 걸 다행으로 알자고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데 만년필 잉크를 책상에 쏟아 자신의 발과 손, 내 손을 검게 착색시켰다. 씻어도 씻어도 지문과 살결에 스며든 잉크는 끝끝내 버티었다.

 

오늘 아침. 부엌에서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온갖 집에 있는 도구를 다 활용하여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꿈쩍도 않는다. 급한 대로 각종 수리 및 열쇠를 취급하는 아저씨에게 전화하니 하필 지방이란다. 관리소에 전화해 보니 특정 도구가 있으니 빌려주겠단다. 아이는 화장실 안에서 절규하고 큰 애는 등교 시간이 다가오고. 머리 산발을 하고 관리실에 달려가 도구를 빌려 오는 길에 아는 분을 만나니 구멍에 젓가락을 넣어 들어올리란다. 관리실에서 빌려 온 도구로도 꿈쩍 하지 않던 문이 젓가락을 넣어 살짝 들어 올리니 눈물, 콧물 범벅의 아기와 재회하게 해 주었다.

 

 

아, 이런 거다. 이런 거였다. 개구쟁이를 키우는 것. 나처럼 순발력이 떨어지고 정해진 루틴을 중시하는 사람한테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일. 하지만 지나고 나면 또 별 것 아니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고 빙긋이 웃게 하는 일. 그러고 보면 지난 일들은 다 이야기가 되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해 주는데 닥친 일들은 언제나 급박하고 약간은 격한 반응을 끌어낸다.

 

그 개구쟁이 형제는 장성하여 어머니의 마지막을 성숙하고 아름다운 나름의 방식으로 지킨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훈계도 보호도 필요치 않게 된 시간들, 형제는 자신들을 먹이고 키웠던 그 위대한 몸이 이제는 병마로 줄어버릴 대로 줄어버린 최후의 어머니의 곁에 나란히 선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

 

"내 새끼들."

 

그래, 내 새끼를 키우는 일은 이런 것일 테지. 그리고 시간은 또 하염없이 가서 나와 이 개구쟁이의 관계를 역전시킬 것이다. 나는 작아질 것이고 약해질 것이고 아이는 크고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이별하게 될 것이다. 로버트 그루딘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재의 사건을 좀 더 큰 시간적 맥락 안에서 보는 습관을 키워야 겠다. 그래야 나중에 덜 아쉬워하고 덜 후회할 테니까. 나 자신을 다독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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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9-2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구진 아이들이 벌이는
엄청난 짓... 놀이... 삶을
지켜보고 돌아보면
허허 너털웃음도 나오고 고단하면서도
즐겁고 재미있어서
가만히 보면
새로운 기운이 솟습니다 @.@

blanca 2015-09-23 20:27   좋아요 0 | URL
고단하면서도 즐겁고 재미있다,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나중에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에 몰입하고 순간 순간 즐거움을 찾아야 아쉽지 않을 것 같아요.

기억의집 2015-09-2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화장실에 갇힌 적이 있는데(저의 집 화장실은 문고리가 개모양이라 밖에서 잠그게 되어 있어요. 제가 설치를 잘 못해서..), 그 때 핸드폰 들고 화장실에 들어간 게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하루종일 갇혀있을 뻔 했어요. 아들냄 무서웠을 거에요. 잘 달래주세요.

blanca 2015-09-23 20:28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댓글을 읽고 반성했어요. 사실 저의 당혹감에만 집중해서 아이가 놀라고 무서웠을 생각은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 야단만 치고 말았어요. 그게 화장실 문이 정말 집마다 구조가 달라 최악의 경우 전문가가 아니면 못 연다고 하더라고요. 기억의집님이 경험했을 상황도 상상만 해도 두렵네요.

라로 2015-09-2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에서 묻어 나오는 블랑카 님의 글,, 점점 깊어지는 걸요!!^^*

blanca 2015-09-23 20:28   좋아요 0 | URL
아, 아마 죽을 때까지 배우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인생은 학교가 맞아요.^^

ADRN 2015-09-2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비해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네요. 반가운마음에 댓글달아요^^

blanca 2015-09-24 12:37   좋아요 0 | URL
플레님, 그렇다면 지금 시작하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단 아주 재미있으니까요.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희선 2015-09-2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는데 저런 게 있었던가 했습니다 글을 봐서 그런지 형과 지낸 일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건 앞에 글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글 쓰는 것과 함께 자기 이야기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개구쟁이 글에서 볼 때는 재미있게 보여도 가까이에 그런 아이가 있다면 다르겠군요 아주 모르는 아이도 아니니 어떤 일은 웃어 넘길 수도 있겠죠 지금은 알고 하기보다 잘 모르고 하는 일이 더 많지 않을지... 그렇게 개구진 것도 한때겠죠

명절 식구들과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blanca 2015-09-26 08:26   좋아요 0 | URL
희선님, 정말 곁에 있는 것과 좀 떨어져 귀여워하는 것은 천지차이랍니다.^^ 그래도 참 예쁘긴 하네요.
희선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찰스 부카우스키 지음, 설준규 옮김, 로버트 크럼 그림 / 모멘토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은 일어나고 예측했던 일은 때로 어그러진다.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지만 그게 나는 항상 위험하거나 슬프거나 분노할 일에서 안전하다,는 뜻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누구나 늙고 변하고 죽는다. 이건 자명하고 대단히 단순한 논리 같은데 살면서 이 명제를 경험한다,는 일은 대수롭잖은 것이 아니다. 거울 앞에서 여드름을 짜던 나는 이제 눈가의 주름을 본다.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말로 쏟아내며 네 시간도 너끈하던 친구와의 통화는 겉돈다. 무엇보다 가족, 친구가 때로 거짓말처럼 존재하기를 멈춘다. 죽.는.다. 그렇다면 이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언젠가 나도 없을 그 날이 분명 온다는 얘기다. 그래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웃어대고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그렇게 잘 살아나갈 것이다. '나'에게 '나'는 존재의 축이었지만 세상의 축 그 자체는 아니다. 깊이 생각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방도가 없다. 화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는 그렇게 애써서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견디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 나아가고 꿈꾸었을까? 모든 의미가 넌센스 같다.

 

도박에 중독되고 대인 관계 기피증에 욕쟁이에 이미 이른을 넘겨 버리고 병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염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간기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이다. -p.17

 

찰스 부카우스키. 그는 쉰이 넘어서야 기가 쓴 글로 집세를 낼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가난했고 너무 오래 노동자로서 일해온 시간들은 그가 '정의'나 '신의'를 불신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스스로를 지옥 학교의 학생으로 명명한다. 노년에서 뒤돌아 보아도 '삶' 그 자체는 그에게 지옥이었다. 글을 쓰며 죽음을 잊고 마치 지난 시절 우체국에 출근하듯 경마장에 가서 돈을 걸고 때로는 따고 잃고 아홉 마리의 고양이와 그에 비해 지극히 상식적인 아내에게 돌아와 매킨토시 앞에 않는 그가 써갈긴 노년의 일기는 독설과 저주와 비아냥으로 가득하지만 그 자신이 이야기하듯 도박하듯 토해 낸 글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차마 꺼내지 못한 삶의 실재를 깨닫게 한다. 모두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아무렇지도 않게 익살스럽게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대하기 힘들 것같다.

 

마냥 계속하는 건 옳지 않다.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내게도 필요하고, 네게도 필요하다.

-p.42

알고는 있다. 보르헤스가 그렇게나 죽음을 기다렸듯 노년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렇게 죽음을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 주지 않던 괴팍한 우체국 직원이었던 (또는 스스로를 그렇게 묘사했던) 작가가 동거하던 여인의 산고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것처럼 그가 어쩌다 내뱉는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나 로맨틱하다.

 "모두 죽게  돼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린 서로 사랑해야 하건만 그러지 않는다."  모두 끝나니까 그것만 기억한다면 좀 더 사는 게 쉬워질 것이다. 여하튼 나는 또 항상 잊어버리겠지만, 그럴 때마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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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죽는다에서 빠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죠 다른 말 누구나에는 제가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지만, 죽는 것만큼은 들어갑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늘 효과가 있는 건 아니군요 언젠가 죽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기도 한데...


희선

blanca 2015-09-26 08:27   좋아요 0 | URL
`죽음`은 두렵고 알 수 없으면서도 한편 때로는 어떤 안도감을 주기도 하는 그런 거겠지요. 살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들, 과제들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아직 어려워요. 그것이 닥쳐오는 그 순간까지도 그럴 것 같아요. 인간의 숙명이니까요.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고영범 옮김 / 강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9월 3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감기로 뒤채다 견딜 수 없어 타이레놀을 찾아 일어났다. 약을 삼키니 이제 마저 읽고 싶어져 바닥에 퍼더 앉아 그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따라갔다. 이미 죽을 것임을 알고 일어나는 모든 현재진행형 일들이 사소하게도 느껴지고 엄혹하게도 느껴지고 너무 무기력하고 가련하게 보여 중간 중간 멈춰야 했다. 이제 레이먼드 카버는 바야흐로 미국 단편의 거장으로 그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축소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미니멀리스트 그 자체로  가는 시점이었다. 모든 실현되지 않을 여행 계획들, 출판할 책들이 죽음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던 동반자 시인 테스 갤러거는 그의 작품을 위해 자원해서 삶을 헌납했던 메리앤의 헌신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녀는 '그'를 완성시켰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던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간행하고 세상에 정련된 모습으로 보여주었던 그 여자가 결국 그의 마침표에 동했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십여 년에 걸친 자료수집, 생존자들과의 면담, 저자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실함과 레이에 대한 애정, 경탄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 만큼이나 그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복원해 내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사이의 틈새를 허룩하게 방치하며 검증된 낱낱의 사실들의 공허한 나열도 아니고 성급하게 그 막간에 개입하여 소위 소설을 써 나가는 오만도 아닌 가장 균형 있는 지점에서 이 모순적이고 매력적이고 천진한 작가의 삶을 관조하고 언어의 결들에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러니 그 모든 성실한 취재의 틈마다 생략된 잊혀진 이야기들은 공백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레가토를 따른다. 레이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느라 웨이트리스로 심지어 백과사전 세일즈까지 했던 전처 메리앤과 왜 결국 결혼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 지, 편집자 고든 리시의 오만에 왜 그다지도 미온적으로 반응했었는 지에 대한 의문들은 그러니 그 자체로 가지고 이 사내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도 괜찮다. 모든 상상력의 여지와 생략과 말줄임표 사이에 진실의 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캐롤 스클레니카는 잘 알고 있으니까.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름의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아들처럼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아들에게 불성실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웃의 사내에게 주말마다 사냥에 아들을 데려가 자연 속에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까지 했다.  이 시간은 오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레이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에 분명 무언가를 남겼다. 아버지는 소멸로 가는 그 여정에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육체 노동은 이제 글쓰는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길 거구의 아들을 둔 이 아버지의 존재감이었다. 레이는 그 자신조차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의 한계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딸을 아파하면서도 그 딸이 재정적으로 너무 기대어 올 때는 부담스러워했고 자신과는 다르게 착실하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감을 은연 중 내비치는 단편으로 아들을 아프게 한다.

 

레이의 작품들에는 거의 대부분 부부가 나온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에는 열다섯 살, 도넛상점에서 처음 시선을 마주친 아내 메리앤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제재소에서 일하고 돌아온 소년에게 함께 보바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한 소녀는 그가 글을 쓰는 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둘째를 가지고도 과수원에 일하러 나가 타자기를 사들고 온다. 자신의 학업이나 꿈은 항상 레이 앞에서 후순위였다. 마침내 남편이 성공하여 자신을 떠나 '자신은 여전히 빗 속에 있을 때에도' 그녀는 레이를 걱정하고 배려했다. 다른 여자 옆에 있어도 레이는 그러한 아내와 공유한 시간과 꿈들, 눈물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시인 테스 갤러거가 진정한 의미의 작가로서 레이를 완성시키는 데에 일조를 담당했다면, 메리엔은 레이를 작가로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자 레이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작품화 하는 데에 강력한 동기를 작용한 추동력처럼 보인다.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레이는 전처의 천사 같았던 그 모습을 제발 염두에 달라고 테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에서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그의 사후 작품에 관련된 모든 권리에서 대부분 소외되게 된 메리앤이었지만 이러한 레이의 진심만은 어떤 형태로든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 부모가 되었던 소년, 소녀는 들이닥치는 삶의 과제들을 외롭게 해결해 나가야 했던 그들은 그러한 것들 대부분을 이야기화해 나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마침내 전설로 만들어 버렸다.

 

레이먼드 카버의 알코올 중독 시절 쏟아낸 많은 작품들이 편집자 고든 리시의 과도한 개입에 의하여 더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는 지, 카버 특유의 색깔과 신선함을 잃게 되었는 지에 대한 의견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어디까지가 리시의 편집이자 창작인 지에 대한 경계도 그러하다. 이는 저자의 "출판이란 언제나 예술을 상업적으로 전환시키기 마련인데 거기에 리시의 과도한 편집과 카버의 알코올 중독이 합쳐지면서 이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호해졌다."는 표현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모호함'의 지대에 레이먼드 카버의 것들이 놓여 있기에 논쟁의 끝은 명료한 것이 되기 힘들다.

 

그 무엇보다 레이먼드 카버가 알코올 중독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그 자신의 표현 만큼이나 팬으로서 자랑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 있었던 그가 마지막 잔을 입술에 대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날들이 하루 하루 차곡 쌓여가는 과정이 마침내 술에 대한 그의 승리로 귀결되는 묘사가 아름답다. 드디어 레이먼드 카버는 삶과 글들을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해도 괜찮게 되는 시점, 그 원숙한 지점에 도달하고 걸작 <대성당>을 낳는다.

 

서른다섯의 하루키는 이미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작가와의 조우를 계기로 그를 초대하기 위하여 그 거구를 누일 침대를 일본에서 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서 밀려오는 그 잔인하고 때로 신비로운 우연 앞에서 좌절된다. 그것 또한 레이먼드 카버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통과하며 그 모든 것들을 잉크처럼 푹 담가 써 내려갔던 그의 모든 이야기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시도는 아니었다-여행."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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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다 해도 한사람의 삶이 끝나가는 걸 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죠

알코올 의존증은 고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마시지 않다 다시 마시면 다시 돌아가고...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도록 하면 좋겠지만 그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을 고쳤다는 말을 보고 이런 말을 했군요 딸도 그랬다니... 이것도 유전되는 걸까요 그것보다는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를 보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 하는 사람도 있고, 닮는 사람도 있잖아요

레이먼드 카버 소설 예전에 한권 읽기는 했는데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소설은 못 봤지만, 이건 한번 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9-20 22:34   좋아요 0 | URL
그만큼 어려우니 카버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이 술끊기에 성공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술잔을 입에 대고 그 날들이 쌓여 마침내 금주에 성공하는 장면이 그의 소설들 만큼이나 극적이고 감동적이었어요.
 

레이먼드 카버의 평전을 읽고 있는데 이제 반이나마 왔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빡빡한 자간이 부담스러웠는데 평생 육체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레이먼드 카버 아버지 이야기, 본인들도 채 다 크지 못한 채 부모가 되어 어깨에 지게 된 짐과 자신의 욕구, 욕망, 꿈과의 간극에서 헤매는 카버 부부의 분투, 아버지뻘의 존 치버와 대작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 이제 곧 성공의 진입로에 섰는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무질서와 상처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 그리고 너무 빨리 늙어버려 정작 카버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삶의 시계에서 중노년의 시점에 섰음을 알아차리며 남은 그의 짧은 아까운 생을 헤아려 보고 아쉬워하게 된다. 그는 쉰이 되어 죽고 결혼 생활 대부분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레이먼드 카버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에 거의 중추적인 역할 이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조강지처 메리엔과는 헤어지게 될 것임을 그는 지금 알지 못한다. 부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때로 불화하고 폭력적이고 기이하게 비쳤지만 분명 외면적으로 다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결속된 관계 속에 있었다. 십대에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을 부양하고 못다한 학업을 끊임없이 재개하려 애쓰고 남편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시키기 위해 이동, 또 이동, 포기, 선택했던 동반자적 역할은 부부 관계 안에서만 담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나도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처럼 될 턱이 없기에 전체적인 조망 아래 삶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내 삶에 얼마만큼 어떻게 와 있는지 알 수 없이 매일 매일의 일상과 과제에서 허우적댄다. 누군가가 조금 떨어져 나의 삶을 지켜본다면 수많은 나의 어리석음과 치기와 실수와 근시안을 찾아내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삶을 다 살고 나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그러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때 왜 그랬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 것을, 조금만 더 참을걸, 조금 더 나아갈걸, 하는 회한과 아쉬움은 지금 당장을 사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고 만성 위염이 도지고 아이 둘을 돌보다 지쳐 벼르고 벼르던 내시경을 했다. 전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것들이 걱정됐다. 혹시 내가 여기서 끝이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직 어린 아기는 어떡하지?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산한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급하게 혈압을 재고 수면 내시경을 시작하려 약을 투여했다. 마취가 잘 되지 않아 눈을 계속 뜨고 있으니 간호사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조금 더 약을 투입하는 듯한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웠다. 위염이었고 의사는 아직 내가 젊다고 했다. 그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위염이었다. 신입사원이 되어 제일 힘들었던 것도 위염이었다. 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먹다 보니 위염은 더욱 심해졌고 위벽이 다 헌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내가 과연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반문했다. 힘들면 마음이 아프면 영락 없이 나의 위도 시끄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어떻게 집에 왔는지 그 집으로 오던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약국에는 처방전이 아니라 병원 영수증을 내미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전날 밤 하도 오만가지 최악의 상황 속에서 헤메어서 그런지 어지러워도 좋았다. 그냥 그 안심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때로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다. 할머니가 되어 죽고 싶다. 할머니가 되면 그래도 죽음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체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이 모든 어리석음, 조급함, 치기가 다 소중하다. 무의미하고 실패할지라도 그게 어쩌지 못하는 삶인 것 같다. <대성당>을 쓴 카버의 삶도 그러지 않았는가? 정말 무언가,를 남을 것을 이룬 사람의 삶도 일상 속에서는 어리석고 슬프고 구태의연하고 구차한 면이 있다. 그는 점점 위대해져 전설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술독에 빠져 있다. 이제 막 술독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그 어떤 성취보다 바로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순간을 맞게 될 시점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나 사랑하고 지독하게 싸웠던 아내와는 헤어지고 다른 여자의 곁에서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의 지금이 무의미하다고 어리석다고 폄하될 수 있을까? 모르는 것들 투성이, 어떻게 결론에 치닫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바로 삶의 묘미이기도 한 것같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이미 결론을 아는 이야기도 그곳으로 닿는 길은 미답인 경우가 많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길에 진짜가 실재가 있는 지도 모른다는 느낌.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게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건 어쩌면 더 처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되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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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9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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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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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 속의 노인은 원피스 차림의 아름다운 실루엣의 젊은 여인의 한쪽 팔짱을 끼고 다른 한쪽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한쪽 눈은 흡사 감겨 있는 듯하고 성해 보이는 눈의 시선도 불안정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여인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연인이자 그가 그렇게나 소원하던 망각과 소멸로 가기 전에 결혼한 서른여덟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인 듯하다. "여름날의 더딘 땅거미처럼" 시력을 잃어버린 보르헤스는 그녀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경탄에 아연해하고 수많은 공적 자아, 대중, 성공을 하찮게 여길 줄 아는 여든의 보르헤스의 '말'이 있다. 그의 삶과 글쓰기에 관련된 공개 대화, 대담에서 그는 자신이 보르헤스인 게 싫다고까지 고백하기도 하고 언제 죽을 지 모르니 빨리 질문하라고 너스레를 떨며 재촉하기도 하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며 언어로 한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물론 당사자는 반문할 것이다.), 가장 실제적이고 평이한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거울, 미로, 글의 환상에 천착했던 보르헤스는 이제 땅에 내려와 자신을 해명하고 상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대신 그 자신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단테, 스티븐슨, 에밀리 디킨슨을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이미 위대해져 신화로 걸어들어가는 눈먼 작가는 소멸 앞에서 당당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이고 회의한다. 바리톤의 그의 실제 목소리를 상상하며 때로 그를 도발하는 인터뷰어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르헤스와 함께 사적인 만남을 갖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중은 환상이고 각각의 개인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진실일 것이다.

 

나는 울적할 때-간혹 울적한 기분에 빠져든답니다-죽음을 커다란 구원으로 생각하지요. 어쨌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사라질 뿐이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나는 불멸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건 허망한 생각이에요.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불멸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해요. 그리고 죽음은 행복일 거라고 여긴답니다. 망각보다, 잊히는 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게 바로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에요.

-p.160

 

1975년 크리스마스, 인터뷰어 윌리스 반스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의 시위 속에서 보르헤스와 만찬을 함께 하고 마리아 코다마를 먼저 보내고 난 후 노시인과 바람 부는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그들은 밤새 걸어 새벽에야 보르헤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보르헤스와의 구체적인 기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윌리스에게 노작가는 망각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2013년 윌리스는 이야기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평생 그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이는 보르헤스의 소망에 전적으로 역행하는 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잊히기를,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기를 희망했는데 끊임 없이 부활하고 있다. 그를 읽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인용하고 그를 계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에게 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과거가 되었고 현재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얼마간 위안이자 희망이 되지만 그의 미래에 대한 반어적인 예시가 되고 말았다.

 

모든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 모든 확신에 반문하고 회의하는 이야기. 해답은 없음을 전제하는 이야기. 구원은 없음을 수긍하는 이야기. 보르헤스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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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0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새겨 읽게되는 리뷰
반가워요. 보르헤스의 말, 담아갑니다. 가을이 와요. 이미 왔나요^^

blanca 2015-09-03 23:18   좋아요 0 | URL
덥다가도 문득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껴요. 유난히 힘든 일들이 많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그 만큼의 좋은 일들을 몰고 왔으면, 바라 봅니다.

AgalmA 2015-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작가는 ˝소멸˝을 원하는데, 그건 인생 때문일까, 글을 쓰면서 도달하게 되는 종국의 필연일까 늘 가늠하게 돼요.
작가는 언제나 글이 구원이길 바랐으나 매번 실패라고 생각해서 일까 싶고요. 타인의 열광과는 상관없이.
불가능과 한계....좋은 작품들에선 언제나 그게 문신처럼 보이더라는.
카프카는 사라지길 원했으면서 왜 브로트에게 유작의 처리를 맡겼는가 의견이 분분하죠. 저는 작가가 작품으로 자살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댓글이 심란한 점 죄송합니다;


blanca 2015-09-04 06:54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는 유명세가 자신의 실재와 많이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그의 개인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인간인 이상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각이 불멸의 욕구와 절대적으로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글은 영원히 남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썼다는 것은 남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해요.^^

yamoo 2015-09-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당~~ㅎ


blanca 2015-09-12 15:0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아직 허룩하죠. ^^;;

희선 2015-09-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도,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잊기를 바랐군요 라디오 방송에서 보르헤스가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 듣고 무슨 병이 있었던 건 아닐까 했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게 돼서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것을 느꼈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잘 들어뒀다면 좋았을 텐데...


희선

blanca 2015-09-20 22:36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실명이 유전적이었다는 건 아는데 정확히 어떤 질환에 의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듣기로 갈음한다 해도 한계가 엄연히 있으니까, 늙어 죽을 때까지 좋은 시력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행운인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