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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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아이는 팔 년 전에 알았지. 내 수업을 들었어."라고 시작하자 멈칫했다. 음, 사회적으로 탄탄한 성취를 이룬 나이 든 남자와 아직 세상에 나가기 전의 젊은 여자와의 이야기의 도식. 필립 로스가?

 

"나는 이미 예순둘이었고 그 아이, 콘수엘라 카스티요는 스물넷이었어." 아, 솔직히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벌써 지겨워져 버렸다. 대체 이 나이 차와 이러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진폭이 얼마나 넓을 수 있을까? 이런 단정 뒤에 이어지는 본능적이고 에로틱한 관계로 가는 그 경로의 세밀한 묘사가 결국 도착한 곳은 나의 편협한 예상을 배반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교수와 젊은 여제자와의 욕정에 기반한 그렇고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거치는 여러 변곡점에는 찬란한 찰나적 젊음이 가지는 그 아름다움과 덧없음, 사회적 기대치에 순응하며 자기를 죽이는 삶의 기만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언제나 인간의 예상과 기대를 여지없이 비웃어 버리는 그 커다란 운명의 무작위성에 대해 생각과 감정과 언어가 들어가고 헤집고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포착하려 한다. 그러니 너무 힘겹다. 그냥 무시하고 잊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마주해야 하니까. 남녀 간의 관계가 가지는 근본적인 불안정, 불균형, 가족제도의 그 허약하고 불합리한 지점, 모든 것을 파괴하고 허물어 버리는 시간, 그리고 근본적인 존재의 유한성으로 가는 그 처절하고 초라한 늙음.

 

노년을 상상할 수 있어? 물론 못하겠지. 나는 하지 않았어. 할 수 없었어. 그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어. 잘못된 이미지조차 없었어-아무런 이미지가 없었어. 사실 누구도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아. 어쩔 수 없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가운데 어떤 것과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 모든 게 나중에 어떻게 될까? 여기서는 둔감함이 관례야.

 

이미 지나온 궤적인 젊음조차 때로는 현재가 아니기에 또렷이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자리한 노년의 이미지는 흐릿하다. 아니, 또렷이 떠올리고 항상 의식하며 산다면 그 자체가 때로 고문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필립 로스가 케페시 교수의 입을 빌어 '둔감함'에 대한 요령을 가르쳐 준 것은 적절하다. 예민하고 예리하게 늙음과 노년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지성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요령은 될 수 없다. 이것은 메멘토 모리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케페시는 누군가에게 자신과 콘수엘라와의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그 누군가의 존재는 끝까지 은폐된다. 그리고 콘수엘라와의 이야기는 팔년 전의 일이다. 그 어떤 때보다 나이차를 통해 케페시는 이 부유하고 보수적인 쿠바 출신의 '아이'에게 매혹당하지만 또한 자신이 생의 후반부에 다다르고 있음을, 이제는 상승이 아닌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한다. 보편적인 결혼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아들이 여덟 살 때 가족을 떠남으로써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 거의 척을 지다시피 한 케페시는 '미덕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직의 유토피아'에 입성한다. 케페시의 입장에서 이것은 도덕적인 잣대 하에 재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한 존재로서 자기 크기를 갖고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성적 방종은 케페시에게 하나의 표현 경로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사회적 베일을 걷어 버리고 그 아래의 욕망의 속살을 직시한다. 케페시의 고백은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반항아를 깨워 일으킨다.

 

여기까지. 이게 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케페시가 향한 곳은 너무나 슬픈 도저히 예상할래야 제대로 상상하기 힘든 아픈 결말이다. 그 아이,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던 그 아이의 추락 지점은 너무 아프다. 아이는 팔년 만에 다시 한때 자신의 교사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교사가 가는 곳은 마지막에 드디어 등장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던 미지의 누군가의 반응으로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가면 망하는 거예요."

 

그런 줄 알면서 가니까 인간이다. 필립 로스의 절필이 정말 너무 아쉬워지는 마지막 대목. 아직 할 수 있는 이야기, 어떻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고 싸면서 놓치는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끌어올릴 수 있는 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간파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이렇게 쓰는 일을 멈출 수 있는 지...

 

번역자가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 가는 길>을 덧붙인 것은 그 대목에서 제목을 따 온 작가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그 이상이다. 오늘 대학가에서 마주친 그 수많은 아까운 젊음들 앞에서 순간 아연해졌다."저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예이츠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삶은 노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 그곳으로 간다는 자명한 명제 때문이다. 젊음을 꿈꾸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감히 노년을 상상하고 꿈꾸는 사람들은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살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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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1-0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가 정말 좋아요, 블랑카님. 정말요.

blanca 2015-11-04 09:3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니었으면 이 책 못 읽었을 거예요.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읽게 되었거든요.
 

소백산천문대를 꿈꾸던 열일곱 살의 나를 만난다면 귀뺨 한 대 정도 맞을 용의가 있다. 겨우 그 정도에서 포기하다니. 아마도 그 어린 녀석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김연수 <스무 살> 중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놓고 저희끼리만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스무 살> p.9

 

시인으로 등단했던 김연수가 단편의 초입마다 인용해 놓은 시들은 그가 만든 이야기다보다 어쩌면 더 적확하게 그 이야기의 심중을 반영한다. <스무 살>에는 최하림의 <어두운 골짜기 중에서> 이러한 대목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옛날엔

훌륭한 삶을 원했지...

 

젊음 안에 내장된 순진함이 품는 이상은 크고 훌륭한 삶의 주어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살면서 나이 먹어가며 모든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혹은 더 나아가고 싶은 지점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꾸역꾸역 견뎌 나가게 된다. 그러면 스무 살에 혹은 그 이전에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거나 심연에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타락했다거나 비겁하다고 폄하만 할 것도 아니다. 사는 일에는 차마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에 연루되어 분명 하루 하루를 전진시키는 신비한 생명력이 있다. 그러니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표현했던 김연수의 이야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낭만과 처연함을 한데 모아 스무 살의 나날들을 치장한다고 해도 그 이후가 있음으로 해서 스무 살이 더욱 빛남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가 반드시 초라한 것도 무력한 것도 타락한 것도 아니다.

 

 

 

 

 

 

 

 

 

 

 

 

 

 

 

부천 원미동 23통 거리에는 스무 살 이후의 삶들이 있다. 지물포 주씨, 행복사진관 엄씨, 형제슈퍼 김반장의 살아나가는 나날들은 어떤 거대한 이상이나 가치보다는 그날 그날의 생계에 기대어 있다. 그 사이 사이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 몇 년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지금 다시 그것을 되짚는 사이의 간극은 이제 정말 나의 스무 살들은 저 멀리 등뒤에 쌓이고 그 이후의 더 길고 더 많은 지루한 삶들이 분분하며 쌓였기 때문에 생긴 것일 게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중

 

부천 원미동의 거주민들의 이야기의 대미는 작가의 자전적 사연이 녹아 있는(그렇게 보여지는) <한계령>이다. 어린 시절 친구가 변두리 클럽의 밤무대 가수가 되어 작가가 된 '나'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연락해 오며 시작된 이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올망졸망한 동생들과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었다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큰오빠에 대한 뼈아픈 회고로 이어진다. "수십 년간 가슴에 품어온 고향의 얼굴을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다,라고 나는 생각했다."의 '나'의 고백은 그렇게나 친구 은자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술집에 가서 친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여가수의 '한계령' 노래를 먼 발치에서 듣고 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세월이 쌓인 자리를 이따금씩 뒤지며 그것은 그대로 두는 것이 다시 불러오는 것보다 더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될 때가 있다. 어느 시점에서 만난 그 숱한 사람들, 그리고 그 거리에서 벌어진 일들, 나눈 이야기, 꿈, 소망, 회한은 결론이야 어떻게 됐든 바로 그 지점에 오롯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모여 삶의 이야기를 이룬다. '내'가 유년을 공유했던 '은자'를 꼭 지금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의 일부였을 것이다.

 

김연수의 <스무 살>'죽지 않는 인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해 주었던 '기억의 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어린이 대공원에 갔던 찬란한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되뇌는 '나'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그 방의 이야기로 안심시킨다. 그러한 나날들에서 하루를 불러온다. 열다섯 살. 단짝친구들과 나는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한다. 그 날은 시험이 끝났고 그래서 우리는 시장통에서 떡볶이 파티도 하기로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서너 군데나 가야 하는 그 거리가 우리가 다 아는 친구, 선생님, 연예인 이야기로 비좁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제 어쨌든 아무것도 걱정할 건 없다. 중간 고사가 끝나면 난 다 된 거다. 달콤한 떡볶이를 먹고 책도 좀 사고 낮잠을 자고 가요톱텐을 보면 저녁이 올 테고. 이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 꼭 다시 한번 살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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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0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는 고등학생 시절이 하나도 그립지 않았는데, 대학교 졸업하고나서 이년 지나니까 고등학생 시절이 가끔 그리워져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십년 전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최근에 버즈의 노래를 듣게 되면서 그 시절이 더 그립습니다.

blanca 2015-11-02 15:39   좋아요 0 | URL
그리워지는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의 시간들도 먼 훗날에 그리움으로 기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hnine 2015-11-02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연수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런 사람을 알고 지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 얘기를 시작하든지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보곤 해요.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은 제가 대학생때 읽은 것 같은데 실제 출판년도를 보니 1997년으로 나오네요. 그렇다면 제가 졸업하고 훨씬 뒤인데, 아무튼 정말 오래전 기억을 되부르는 책이어요.
그보다 더 이전 열다섯살때, 시험 일정이 스케쥴의 전부이던 그때, 시험 끝나도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책도 사러 가고 가요톱텐도 보고, 그런 기억이 제게 없는게 아쉬워요.
(blanca님 서재에서 보고 구입한 Peter Bieri의 <자기결정>을 지난 주말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서니데이 2015-11-02 07:08   좋아요 0 | URL
hnine 님, 원미동 사람들의 조기 출판연도는 기억하시는 것처럼 그보다 더 전일거예요, 아마 그 다음에 다시 출간한 것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blanca 2015-11-02 15:42   좋아요 1 | URL
아, 서니데이님 말씀처럼 재출간이네요.^^ 김연수 작가는 사실 제 입장에서는 작품의 편차가 좀 있는 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무언가 자꾸 심금을 울리는 지점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청춘 시절이요. 특히 에세이집은 정말이지 어디 하나 물릴 것이 없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요^^;;) 저는 지금도 떡볶이 중독이랍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떡볶이 탐험을 떠났던 이력은 사라지지를 않네요...

희선 2015-11-19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간 시간이기에 더 좋게 기억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을 조금 전에 어디선가 봤네요 지나치듯 봤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좋았지, 하는 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지금이 힘들면 더 지난날을 떠올리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스무 살은 누구나 지나고, 저는 별거 없었네요 다시 생각하니 지금까지 지나오면서 더 안 좋아졌네요 시간이 지나서 별거 없는 지금을 그리워할지도... 예전에도 이런 생각했군요


희선

blanca 2015-11-20 00:0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말. 지금도 결국 과거가 될 테니 나중에는 또 지금을 그리워할 듯 싶어요. 현재, 순간에 집중하며 시선은 정면을 향해야 겠어요. 요새는 기억 자체에도 좀 회의가 들기도 해요. 시간이 지나며 자꾸 변질되는 것 같아요.
 
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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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표지, 채 백  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작가는 여기에서 자신의 철학 전공을 십분 살린다. 과장도 현학도 없다. 정갈하고 명료하고 쉬워서 지루하지도 않고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는다. 분주한 나날들 속에서 무언가가 정말 바로 중요한 그 '무엇'이 상실되었다고 여겨진다면 조금 시간을 내어 페터 비에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같다.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 참 필요한 이야기들이었다. 작년부터 가족을 포함해서 건강과 관련하여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몸이 화두가 되어버리면 여타의 것들은 모두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밀려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고 무기력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내가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있는 것들 앞에서조차 압도당한다. 산다는 것은 늙는 것이고 늙음은 병마와 가까워지는 일이니 더욱 간이 오그라든다. 이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보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저 나이에도 건강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삶의 의지를,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생을 엮어 나가는 일은 대단한 일이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 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요 며칠 느꼈던 우울감이 명징해졌다. 나는 내가 나의 삶의 주체가 아니라 내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배경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력감을 느꼈고 따라서 자기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이들며 살아가는 일들은 이러한 일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고 그게 삶이라고까지 비관하기도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어 버리면 사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다. 저자는 물론 인간에게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무조건적 낙관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자신의 경험에 통합하게 되는지 그 이력에 초점을 맞추고 적어도 이러한 것들을 체계과하고 범주화하고 통합하며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흔히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자기 결정의 힘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에 있어 읽고 쓰는 일이 가지는 신묘한 역할에 대해서도 덧붙인다.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라는 이야기는 꼭 읽힐 것을 감안하고 쓰는 일이 가지는 가치가 아니라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그 과정에서 자기 내면의 흐릿한 것들을 구체화하고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렇게 읽고 쓰며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밖에서 휘몰아치는 그 개연성 없는 서사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그 한계를 체감하고 절망하는 일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이야기 안에 들여 놓으며 내 삶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일은 내가 내 삶에서 가지는 주도권의 회복의 관문이다.

 

수업 시간에 졸다 나를 깨우는 이 한 마디. 단상에는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철학을 공부한 페터 비에리가 있다. 그래서 읽는 일은 언제나 힘든 나날들을 견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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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10-2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 읽어야겠어요. 명료하고 명징한 게 힘이 될 것 같아요. 늘.
삶의 격, 과는 달리 두께가 얇군요. 블랑카님의 리뷰는 믿고 찜이에요~
나쁘지않은 가을날 마음 가득 안는 날들이길요^^

blanca 2015-10-28 11:5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정말 오랜만에 명강의를 듣는 느낌이었어요.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것들이 또렷해지는 게 참 시원해지더라고요. <삶의 격>도 시도해 보고 싶은데 분량이 의외로 두꺼워서 망설이는 중이랍니다. 오늘 하늘은 정말 가을다워요~

hnine 2015-10-2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화두가 되면 다른 것은 그저 사소할 뿐이라는 말씀, 동감입니다.
견디는 힘이 있어서 견딜 수 있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걸 어쩔 수 없이 견뎌내다 보면 그 견디는 힘이라는게 점점 쌓여가는것 같아요.
이 책 관심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채 백페이지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 들으니 관심이 사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까요? ^^ 제 허영이겠지요.
이 책을 제가 막상 읽어도 이보다 더 명징한 리뷰를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blanca 2015-10-28 11:56   좋아요 0 | URL
아, 나인님, 저는 요새 나이드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좀 체념적인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그러니 나이드는 건 그냥 시간이 가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랍니다. 아무래도 분량이 아쉬워요. 그건 책을 다 읽는 순간도 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만큼 사족이 없는 핵심만 있어서 어쩌면 그게 또 이 책의 매력인 듯 합니다.

파란놀 2015-10-2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일도 힘들지 않은 일도
모두 곱게 내려앉아서
마음속에 이야기꽃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하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15-10-28 11:58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이 책에도 언어로 표현하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그러한 삶에 있어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정체성에 통합되는 과정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숲노래님 말씀처럼 곱게 내려앉기를 바라 봅니다.

2015-10-31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1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주 편안한 죽음 - 엄마의 죽음에 대한 선택의 갈림길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청년정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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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해나 수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든 가까이 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보부아르는 죽음의 구체적 경험이 오히려 그것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더 부각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제목은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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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0-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좀 비관적으로 봤군요. 보부아르는...
자연사가 흔한 건 아니지만 아주 없지는 않더라구요.
자연사가 아니어도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잖아요.
예를들면 헬렌 니어링 같은.

blanca 2015-10-25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헬린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죽음이 어떤 면에서 참 이상적인 소멸과 닮아 있다 싶었어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자연스럽게 마감해 나간 스콧 니어링의 죽음... 죽음도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노량진에서 재수하던 시절 종종 자그마한 문구점에 가서 펜을 고르곤 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즐거운 반전도 없는 생활에서 조금 더 또박또박 환기되는 내용들을 더 눈에 잘 띄게 적어놓는 일은 어쩌면 나의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이었다. 당연히 여기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문구류 이상이었다. 수험생활이 지나가고 이제는 시험 성적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도전에서 해방된 지금이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문구덕후다. 수많은 색깔,다양한 굵기의 각양각생의 필기류, 노트 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하고 조금 더 산다는 일을 단순하고 균질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윤색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사각사각 펜과 조응하는 사철식의 노트, 번지지도 않고 뭉개지지도 않으며 좀 허접하더라도 흘러가는 나의 언어들을 어느 순간 잡아서 보여주는 담담한 만년필 혹은 볼펜, 궁극의 그것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같다. 그러한 욕구들,소망들이 멈추면 이윽고 펼쳐질 황량함이 나는 때로 두렵다.

 

 

 

 

 

 

 

 

 

 

 

 

 

 

 

저자 소개는 좀 생뚱맞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자 '나는 지루한 것들을 좋아해'블로그 운영자란다. 소개 위에 좀 멍한 표정으로 측면이 찍힌 젊은 남자의 모습에서 과연 진지하고 깊이 있는 문구의 역사들이 연상되기란 쉽지 않지만 그러한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책은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읽는 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적절한 무게추를 잘 잡고 있다. 물론 당연히 저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문구에 탐닉해 있었다. 영국의 소도시 서리주 우스터파크에서 자란 저자가 종종 방문하던  파울러스 문구점에서 먼지 덮인 회전식 문구류 정리함을 사서 그것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는 클립의 발명, 만년필과 볼펜의 시대, '진정한 몰스킨은 이제 더는 없어요'라는 문구점 주인의 애도의 목소리, 스타인벡이 선호했던 블랙윙 연필, 오타에 시달리던 여비사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리퀴드 페이퍼(우리가 종종 화이트라고 부르는 그것)의 서사의 현장에 들어가게 된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부터 그렇게나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던 그 물질적인 것들이 그 이상이 되는 지점에는 분명 이러한 그것들의 탄생과 발전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의 부활이 있다. 대단히 정신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며 삶의 본질적인 측면에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환각 뒤편에는 분명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의 실재가 내재되어 있다. 어느 날 꾹꾹 몽당연필을 눌러쓰며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분명 이해해 보려 했던 시도 속에 갑자기 부러져 엄지 손가락 뿌리 왼편에 박혀 버린 연필심에는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 치던 밤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갑자기 노출된 흑연의 광맥의 화석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었다. 지금도 그 연필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언제나 나는 나의 손바닥을 펼치고 그 연필심을 볼 수 있다.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따금 그러할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간의 층은 무심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듯 나를 노려본다. 저자가 노란색 스타빌로 형광펜으로 그것을 만들어 낸 슈반호이저 공장의 이야기를 그어가며 느꼈던 희열과 닮아 있다.

 

"물리적인 것은 뭔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한다."p.349

 

정말 진심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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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10-2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날이 지난 뒤 연필을 오래도록 안 쥐다가
아이들하고 살며 새삼스레 연필을 다시 쥐다 보니
연필을 하나하나 모아서 책상맡에 잔뜩 올려놓고
이것저것 골라서 쓰는 재미가 쏠쏠해요.
연필을 다시 쓰니 볼펜을 다시 쓰기 어렵더군요 ..

blanca 2015-10-25 22:04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젠가부터 연필을 안 쓰게 되었어요. 다시 연필로 사각사각 글을 쓰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지다보니 글씨가 영 미워졌더라고요. 연습해서 또박또박 잘 써보고 싶어집니다.^^

희선 2015-10-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펜은 쓰기 편하면 한가지만 써요(볼펜은 볼펜심만 바꾸는 걸로 쓰고... 내 친구) 공책은 예전에는 두꺼웠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얇아졌는지... 전에 보이면 사두기도 했는데 요새는 잘 안 가는군요 펜은 종이에 따라 쓰기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요 어떤 종이에든 잘 써지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볼펜은 괜찮군요


희선

blanca 2015-11-01 12:50   좋아요 0 | URL
희선님처럼 저도 한 가지 펜에 정착해야 하는데...자꾸 이것저것 들쑤시게 됩니다. 결국 궁극의 펜과 노트를 만나야 해결될 일이 아닐런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