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의 많은 장점에 공감하지만 이 점 하나는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책표지가 전면에 나타나다보니 절로 손가락이 스치며 읽지도 않은 책에 떡하니 별점 하나가 매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중에 발견하고 삭제하며 때로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책을 정말 읽고 이러한 최악의 별점을 매겼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싶겠지만(그래도 별 하나 나올 책을 완독할 만한 에너지가 이제는 없다) 읽지도 않은 책에 내가 준 적도 없는 별점이 갑자기 확 나타나는 경우는 그야말로 식겁한다. 그래서 책표지가 선명하고 아름답게 나타나는 북플을 이용해서 이웃들 글을 읽는 게 좋지만 책표지를 터치할까봐 신경이 쓰이다 보니 이것도 이제 피곤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비단 북플만의 한계는 아니다.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각종 인터넷 서비스에 미스터치로 일어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 너무 쉽게 반응하고 접근할 수 있다는 게 때로는 치명적인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도 이어진다. 포털서비스의 댓글신고 터치도 종종 그렇다. 재미있게 읽은 댓글을 살짝 잘못 스치면 댓글신고가 된다. 즉각적인 반응성은 쉽지만 아주 민감하고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쉽게 반응하고 표현하는 세계에서 망각과 용서와 배려는 더 대단한 것이 되어버렸다.

 

스마트폰은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이 되었다. 특히 나는 팟캐스트로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정은임 아나운서의 영화음악도 듣고 김중혁과 이동진의 소탈하고 끊이지 않는 주거니 받거니 만담스러운 책 이야기와  김영하의 절로 평화스러운 수면을 부르는 그 단조로운 낭독도 듣고 스트레칭 동영상 보며 운동도 하니 도저히 2G폰으로 돌아가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호기는 부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한 풍요로움 안에 어떤 대면관계나 직접적인 체험들은 뒤로 밀려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이제 사람을 직접 만나 소통하는 대신 내가 골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모든 간접체험으로 직접 체험의 효용을 대체하려 하려는 경향이 빈번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 세상에 직접 나가 부딪히고 깨어지고 해야 하는 성장이나 성숙의 불편함은 상당 부분 이러한 기기들로 해소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으로 삶으로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 풍요로운 것 같으면서도 빈곤하고 고독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스마트폰 안에서의 삶이다.

 

나쁜 손가락에 대한 짧은 변명이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6-01-11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늘 그 점이 불편하고 불만이었어요. 얘기해야지, 건의해야지 하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말씀해주셨네요. 공감합니다!!

blanca 2016-01-12 08:32   좋아요 1 | URL
저도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 이제서야 말하게 됐어요. 자꾸 별점 둘, 셋도 아닌 하나가 매겨져 있더라고요.

무독서 2016-01-11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합니다.
별점과 책읽는 상태들이 너무 쉽게 터치됩니다.

blanca 2016-01-12 08:32   좋아요 1 | URL
저만 그런 건 아니었군요. 저는 유독 나만 이러나, 이런 생각 한 적도 있어서요.

yureka01 2016-01-11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류터치..공감됩니다..ㄷㄷㄷ서너번 발생했어요 ㄷ

blanca 2016-01-12 08:33   좋아요 1 | URL
심지어 모르고 있다 어떤 분이 왜 별점 하나인지 좀 궁금해하시는 댓글을 달아주셔서 화들짝 놀란 적도 있었답니다.

cyrus 2016-01-11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정면으로 보는 모습이 있는 책표지를 볼 때 깜짝 놀랍니다. 북플에서는 책표지가 너무 크게 나옵니다.

blanca 2016-01-12 08:33   좋아요 1 | URL
아, ㅋㅋ 그런 적도 있어요. 공포소설이었어요.

chika 2016-01-11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는 정말 훌륭한 책인데 제가 별 하나를 준적도 있더라고요. 화들짝 놀라 삭제했던 기억이... ㅠㅠ

blanca 2016-01-12 08:34   좋아요 1 | URL
치카님도 그러셨군요! 열심히 작업한 관계자나 저자가 보면 사기가 떨어질 듯해서 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장소] 2016-01-1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한번씩 느끼는 군요..그래서 그 덕에 한번 더 보나봐요.^^

blanca 2016-01-12 08:34   좋아요 1 | URL
묘한 위로가 되네요. 저는 몇 번이나 그래서 이거 내 손가락이나 주의력 문제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답니다.

[그장소] 2016-01-12 11:19   좋아요 0 | URL
해놓고 무신경한 경우도 있을텐데 ㅡ가끔 생각이 깊은 이런 면에 참 놀라곤 해요.
그러면서 한번 더 봐야겠구나..뭐 그런 생각도 들고요. 어느땐 앞의 별점을 수정하고 싶을 적도 있곤한데..여러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는 글 입니다.^^

오거서 2016-01-12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
가끔씩 내가 그 책에 별점을 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별점이 매겨져 있음을 보고는 놀라면서도 몹쓸 기억력을 탓하였는데 내 탓만은 아니었군요. 휴~

blanca 2016-01-12 08:35   좋아요 1 | URL
^^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자책하지 않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더무브>를 아껴 읽고 있다. 유년 시절의 이야기는 이미 <이상하거나 멍청하거나 천재이거나>에서 다루어서 그런지 비중이 높지 않고 대신 모토사이클을 타고 스쿼트로 몸을 키우던 청년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의료 현장에서 환자들과 교감을 나누며 드디어 로빈 윌리엄스가 그로 분했던 영화 <사랑의 기적>을 태어나게 하는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대목까지 왔다. 모험이라고는 모르고 살아 온 인생이라 그런지 본인은 계속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잭 케루악을 방불케 하는 그의 모토사이클 질주 이야기가 왠지 짜릿했다. 근엄한 할아버지상이 갑자기 가죽재킷을 입은 건장하고 활달한 청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젊은 시절 올리버 색스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탄탄한 근육을 가진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의 전도유망한 젊은이다.

 

 

 

 

 

 

 

 

 

 

 

 

 

 

 

 

 

올리버 색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심리학을 전공한 가수 호란의 어느 인터뷰에서였다. 그녀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강력 추천하여 우연히 그것을 찻아 읽게 되었고 의료 현장에서의 환자들과의 교감과 자신의 전문 분야를 접목시킨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 흠뻑 빠졌다. 삶에서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그 모든 고난, 병마, 장애 앞에서 또다른 형태로 삶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고 명징하게 잘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가 낸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식물학, 음악, 운동에도 조예가 깊은 올리버 색스의 삶은 어렴풋이 독신 생활을 누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어떤 흔한 로맨스에 대한 암시도 보이지 않아 어쩌면 조금 다른 형태의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호하고 흐릿한 가정이었다.

 

그런 그가 거의 여든에 이르러서야 소위 커밍아웃을 했다. 여기에도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된다. 청소년기 아버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는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이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한테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는 말을 듣는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 아들 넷 중 막내로 태어나 집안의 귀염둥이이자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들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아들과 함께 어머니에게 극심한 충격과 고통을 안겨준다. 그는 아주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형태의 관계이자 사랑으로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한 시간들 속에서 많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의 어머니는 원래 완고하거나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에게 수많은 책들을 읽어주고 아들의 원고를 하나 하나 경청해가며 듣고 함께 이야기하는 다감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범하지 않은 아들의 성적 정체성에는 그렇게 반응했다. 그건 누구나에게 있는 이중성일 것이다. 한없이 너그럽고 융통성 있고 자신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수많은 다양성에는 관대하게 반응하더라도 막상 그 일이 직접 나에게 닥치거나 가족, 친구의 것이 되면 반응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보편성에 쉽게 동화되고 또 그래야 살아나가는 일에 큰 무리가 없기에 깊은 곳에는 누구나 완고하고 단단한 구석이 있는 것같다. 특히 자식을 낳고 키우는 부모가 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또 역설이 있는 것같다. 자식은 나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나 다른 생각, 행동을 하며 나의 그 완고한 틀을 압박해 오기 마련이다. 사춘기에 든 자녀와의 격한 갈등은 어쩌면 이 다름에 대한 가장 처절한 수련 과정일런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 읽었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그 책의 저자 또한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오랜 시간 대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쓰면서 그의 분노는 잦아들었다. 여러 다른 형태의 '다름'을 둘러 싼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투쟁, 화해의 서사들과 만나면서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또 자식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여러 갈등, 상처 들을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나도 두렵다. 아이들이 커나가며 나와는 또 어떻게 다른 모습들, 가치관으로 나를 압박해 오고 또 때로 다투고 불화하고 이것에 난 또 얼마나 유연하게 잘 대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 이렇게 적어 놓은 글들이 나중에 적어도 기억하고 감안할 수 있는 지침이 되면 좋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16-01-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오랜만이죠.^^
저도 찜해둬야겠어요.^^

blanca 2016-01-10 13:02   좋아요 0 | URL
꿈섬님 자주 오세요. 이제 반 정도 읽었는데 책장이 줄어가는 게 참 아쉽네요.

희선 2016-01-11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온 거 보고 블랑카 님이 좋아하겠구나 했습니다 올리버 색스를 좋아한다고 하고 이 책이 나오기를 바랐잖아요 벌써 만나고 있군요 예전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 책 이야기를 어디선가 보거나 듣고 한번 볼까 한 적이 있는데 못 봤네요 들었다기보다 저 책을 도서관에서 보고 볼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그때 봤다면 좋았을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부모는 아이를 한 사람으로 못 보기도 하죠(그렇다는 말을 보고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책을 보면...) 아이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희선

blanca 2016-01-11 14:48   좋아요 0 | URL
아, 번역을 정말 기다렸던 책이에요. 그래도 역시 올리버 색스 인생 전체를 조망하기엔 뭐랄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더라고요.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는 게 어쩌면 너무 큰 꿈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엄연히 객체인데 때로 자신이 낳아 자신이 소유하고 있고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망상에 흔들릴 때가 있으니까요.
 

아! 당신 나이에 생각하듯이 우리 삶에는 장미꽃만 있는 게 아니라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천천히 계속 읽고 있는데 역시 아주 책장이 잘 나가지는 않는다. 솔직히 사람들과의 대화의 그 세밀화를 연상시키는 촘촘한 묘사나 감상이 때로 질리기도 한다. 그런데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다. 분명 지독한데 매력적이다. 특히나 프루스트는 사람 하나 하나의 그 진저리나는 위선이나 기만, 가식, 속물근성을 어쩌면 그렇게 적확하게 집어내어 언어로 하나 하나 풀어 헤치는지 그 귀족 살롱에서 그들의 대화를 다 엿듣는 기분이다. 민주사회를 가장한 내부의 교묘한 위계를 예상한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화자인 젊은 '나'는 그러한 귀족 세계를 강렬하게 동경하면서도 환멸을 느끼는 그 지점에 걸터 앉아 신랄하게 게르망트 가의 살롱을 씹어대는 중이다. 모순, 모호함의 경계에 걸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직시하며 언어화 하는 작업이 놀랍다. 이 책은 그래서 이렇게 길어지나 보다.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 소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거의 근접해 가며 일어나는 모든 일, 말하여지고 듣게 되는 그 모든 말들을 최대한 다 복기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삶과 닮아가니까 그것을 읽다 보면 정말 그러한 정경 속의 삶을 사는 듯하다.

 

화자는 이제 소년에서 성년기로 넘어간다. 유년 시절의 버팀목이자 평생에 걸친 판단의 준거가 될 할머니는 이제 그의 곁을 떠난다. 동경해 마지 않았던 귀족 사회의 화려한 세밀화는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과 어린 시절 집을 드나들었던 유대인 스완의죽음의 전조와 지근 거리에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누군가를 이기고 그럴듯해 보이는 허식에 얽매이는 모습은 사촌의 죽음과 방문객 스완의 죽음의 기운을 짐짓 못 보는 것처럼 거부하는 게르망트 공작의 허위 앞에서 절정을 달한다. 사실 이러한 죽음에의 거부와 향락, 소비에의 집착은 낯설지 않다. 소멸과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일상을 채우는 그 모든 사소한 것들에 끄달리지 않고는 때로 견딜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지금은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무엇보다도 저는 부인이 밖에서 하는 저녁 식사에 늦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하고 그는 남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사교적 의무가 친구의 죽음보다 우선한다는 걸 알았으며, ...<중략>

-p.484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산 자들은 죽어가는 자를 옆에 눕히고도 오늘 저녁 약속, 만남의 즐거움을 떠올린다. 죽음은 자신에게 닥쳐오기 전까지는 언제나 추상적이고 타자화된다. 스완은 그러한 현실을 담담히 감내하고 받아들이고 심지어 표현한다. 그는 죽음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든 적대감과 환멸을 무심히 포기해 버린 듯하다.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일은 비겁하고 어리석지만 그게 또 삶의 속성이기도 하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서야 어떻게 꿈꾸고 욕망하겠는가. 그러나 또 여기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다 보면 추악해진다. 죽음을 기억하며 절절하게 사는 일은 영원한 화두다.

 

젊음이 난무하는 대학교 교정에 아이 유모차를 밀고 가야 했던 일은 묘한 경험이었다. 거의 모든 문을 밀어야 하고 경사로 대신 계단으로 연결된 지점들은 휠체어나 유모차 등을 이용해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적대적이었다. 영원히 건강하고 젊어 모든 것들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누릴 수 있는 순간과 혜택이 전부인 것처럼 조장하는 사회에서 죽음과 노화, 약한 모습은 뒤안길로 밀려난다. 프루스트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나도 게르망트 가의 살롱의 그 환멸이 여전히 죽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6-01-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이 넘어가지 않지만 매력이 있군요 여러 사람의 안 좋은 면을 보면 그만 보고 싶어질지도 모를 텐데... 그걸 보게 하는 힘이 있는가 보네요 그것뿐 아니라 죽음을 말하기도 하는군요 가끔 사람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죽기 때문에 지금을 잘 살아야지 하기도 합니다 둘 다 맞겠죠 나이를 먹는 것이나 죽음은 누구한테나 찾아오죠 그걸 잊지 않고 살아야 할 텐데...


희선

blanca 2016-01-11 18:09   좋아요 0 | URL
어릴 때에는 지금,여기가 영원할 것만 같은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도 그런 느낌, 생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그래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잘 살아가려고 노력은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방학을 맞아 아주 오랜만에 거리가 좀 있는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갔다. 숲이라기엔 조금 덜 한 나무들이 창으로 보이고 다보록하니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서관은 공부하는 열람실도 책을 빌려보는 자료실도 잘 되어 있지만 걸어갈 수 없는 거리인데 교통 편의성이 떨어져 아쉽다. 분량이나 내용적인 면으로 자꾸 망설이게 되었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1권만 빌렸다. 생각보다 더 두껍고 무거워서 튼튼한 캔버스 천의 가방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들고 오기 힘들었을 모양새다. 전창 앞의 책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에 열중하는 젊은 아이들의 시간이 부러워 살짝 등 너머로 보기도 하고... 그 아이들이 밥을 먹을 식당에서 김밥과 오뎅을 사들고 근처 공원에서 미끄럼틀도 좀 태우다 집에 와서 읽기 시작했다.

 

 

 

내 자의적인 생각으로 인생의 중간 정도 온 것 같다. 살면 살수록 더 사는 게 서툴고 두렵다. 이제 아무리 좋은 일들도 마냥 기뻐하기 힘들고 힘든 일들을 툭툭 털어버리는 시원함도 마냥 즐기기 힘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건 상당 부분 아직 미성숙한 내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를 기다리는 순간은 빛난다. 마냥 웃고 온순하고 귀여운 아기의 청사진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례적인 아이와 만나지는 않는다. 반항하는 사춘기 자식도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도 그러한 경우를 상정하고 부모되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아직 반도 못 온 것 같은데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를 배반하고 때로 좌절하게 만들며 다른 차원의 고난이나 상처를 이겨나가기를 요구할 때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너무 기분이 가라앉고 그것은 내가 이제 서른 살이 아니라 마흔 살이 된다는 것과 맞물려 앞에 남은 시간들의 전망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그만 읽을까, 싶었다. 그냥 부모가 되어 부모로 사는 것도 힘든데 어떤 의미로든 특별한 아이의 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례적인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애초에 나쁜 부모가 되었을 사람들은 보다 끔찍한 부모가 되고 좋은 부모가 되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다 훌륭한 부모가 된다.

-p.27

 

일상이 무난하고 삶이 비교적 쉬울 때 좋은 사람이 되기란 쉽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고난의 돌부리가 튀어 나오면 우리는 진짜 자기와 진짜 당신을 만나게 된다. 꼭 부모 역할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긍정적 특성과 부정적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두드러지게 된다. 그게 자신을 닮은 하지만 또한 자신을 닮지 않은 한 사람의 생애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중도 장애가 있는 스무 살 자녀의 어머니가 해마다 아이를 새로 낳는 것 만큼의 고통을 겪는다고 고백한 대목은 이례적인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부모 역할의 고충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 자신도 난독증, 우울증, 동성애로 그의 부모에게 이례적인 기대하지 않았던 자식의 모습으로 맞서 불화한 경험을 고백한다. 그리고 건강한 아이들을 기대했던 부모들이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중증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과 만나고 그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들과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십여 년에 걸쳐 인터뷰하고 나누며 그 자신도 부모와의 불화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잔재들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학대한 부모는 여기에 나오지 않는다. 다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의 기준에서 평범하고 정상적인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아이들을 사랑하며 돌보고 성장시키는 그들의 여정은 참으로 지난하고 고통의 파편들로 가득하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때로 뭉클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중성화 수술을 중증 장애인 딸에게 감행한 부모의 이야기, 위탁모에게 아이를 맡긴 어머니의 고백 등도 나온다. 저자는 이러한 행동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가 부모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갑자기 떨어진 이 고통스러운 숙제 앞에서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때로 도망칠 수도 있음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고결하고 숭고한 지점도 비참하고 어리석고 악한 곳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그렇게 똑 떨어지는 범주로 자신의 삶을 재단할 수 없다.

 

고통을 제거한 삶은 허상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건 삶이 아닐 거다. 그리고 고통이 흩뿌려진 삶이 고통에 의하여 압도되고 추락하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삶은 고통의 바다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경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고통이라는 거친 파편들은 절대로 부족한 법이 없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라도 그 안에는 이런 교훈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분히 많은 고통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p.88

중증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우다 둘 다 세상에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가 그럼에도 그러한 경험이 주어진다면 또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졌다. 너무 무겁고 진지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이라 차마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 그 틈새, 공백, 뒤에 가라앉은 것들에 얼마나 많은 미덕이, 진실이 숨어드는 지를 이렇게 찬찬히 보여주는 사람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2권에서 진행될 이야기들 역시 부모의 평범한 기대를 어떤 형태로든 배반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6-01-03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사놓고 아직 못 읽고 있는 수많은-_-책들 중 하나예요ㅠㅠ 삶이 쉬울 때 좋은 사람이 되기는 쉽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엄마가 아닌 고모로서도 조카들을 대할때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책을 읽으며 자꾸 가라앉게 된다는 말씀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됩니다ㅠㅠ

blanca 2016-01-04 14:27   좋아요 0 | URL
달밤님, 이 책 부피가 어마어마한데 게다가 두 권이잖아요. 사실 아주 잘 읽히는 책은 아니더라고요. 천천히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셔도 괜찮을 듯해요. 저도 2권은 아직... 예전에 다섯, 열씩 키우셨던 할머니 세대 생각하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자는 속물이다. '나'는 비겁하다. 그리고 이야기 뒤에 숨어 그것을 위장하지 않는다. 귀족 사회의 모든 화려함을 대변하는 게르망트 가의 별채로 이사한 그는 이제 목하 가장 속물적이고 치기어린 또 하나의 짝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게르망트 부인은 그가 가지고 싶어하고 도달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서 나의 모든 환상과 어리석음과 치기를 구현한 존재다. 젊은 '나'는 미성숙한 '나'는 그 부인의 시선을 한번이라도 받아보려 계획에도 없는 산책을 매일 가장하여 마침내 그녀에게 스토커 같은 인상을 남기고 만다. 게르망트 가의 후계자인 친구 생루의 병영으로 찾아간 것은 우정을 빌미로 그녀와의 만남을 얻어내려는 수작임을 독자에게 밝힌다. 이렇게 솔직하고 어리석고 적나라한 젊음의 치기는 언제나 비현실적이고 때로 기이하게 커져만 갔던 그 미성숙한 모든 우리의 열망들을 반영하고 있어 낯설지 않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언제나 떨쳐낼 수 없는 여정인가 보다. 그 길에서 찾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든 이상과 모든 아름다움은 예민한 '나'의 시선으로 적나라한 속살을 들키고 만다. 퇴락해 버린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에 방문하게 된 것도 '나'의 아버지가 사회에서 원하는 자리를 얻어내려 물밑 작업을 하려 아들을 밀사로 보낸 것이 아닌가. 정작 애송이인 그가 발견한 것은 숱한 어른들의 그 왜곡된 욕망, 저마다의 탐욕, 위선, 가식의 향연이다. 만화경은 유대인을 탄압하려 한 통속이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저마다의 그 잇속에 관려된 왜곡된 진실의 가공 앞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각자의 결핍과 은폐된 욕망을 비춰 준다. 아버지의 지인이자 나의 미래를 격려해 주었던 전직 대사는 정작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나'를 험담하고 아버지의 반대편에 섰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미 늙어버린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여인들은 저마다의 살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추잡한 경쟁과 연극을 벌인다.

 

난무하는 진실을 가장한 허위들을 명료한 시선으로 기술하는 이는 화자가 아니다. 화자를 관통한 시선은 사실 프루스트의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도 아직 충분히 깨닫지도 못한 어린 '나'는 이런 노회한 이들의 살벌한 전장에 발가벗겨진 채로 이리 저리 휩쓸리는 유약하고 무기력한 하나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어리석음과 그 모든 편견들은 어느 한 시기 모두 화자를 통과하고 화자를 오염시킨다. 정작 위선과 가식에 귀족연하는 게르망트 부인이 가진 그 숱한 모든 부스러기들이 가지는 환상 앞에서 아연해하는 화자의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게르망트 가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생루가 거리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화자의 도움을 청할 때 때로 그를 도와주고 그의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에 동조하고 싶다가도 그를 둘러 싼 그 공고한 이미 이루어진 기성 세대들의 고정 관념에 복무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미성숙함과도 만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 그 어떤 이상이나 기대도 이미 포기한 프루스트 자신의 체념과 교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어머니 같은 존재인 외할머니가 병과 노화로 허물어져 가는 옆에서도 그 모습을 부인하려 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삶을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이 아닌 언제나 얼마간은 비겁하고 얼마쯤은 무감한 것처럼 견뎌나갔고 견뎌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처럼 이야기들은 때로 길을 잃는다. 만연체의 문장 안에서, 의식의 흐름 안에서, 시간의 낙차 앞에서. 그런데도 읽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 같아서? 잃어버렸던 그 수많은 치기, 실수, 실패, 환상 들을 이미 주섬 주섬 챙기는 읽기다. 쓰잘데기 없는 것 같은 살롱에서의 그 가식적인 행동들, 비겁한 언동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 시공간의 격차를 가로질러 복제되는 축도 같은 오늘날의 현실의 연상에 찌릿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반복이다. 모든 좋은 것도 대부분의 나쁜 것도 결국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속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사회가 주입하는 그 모든 욕망 앞에서 무한정 초연하고 고결해지기란 어렵다는 깨달음, 하지만 그 끝이 향할 곳을 예감할 수 없기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5-12-28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blanca 2015-12-29 18:26   좋아요 1 | URL
네, 다사나단했던 한 해 되도록 잘 마무리하려 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도 미리 복 많이 받으세요.

2015-12-31 0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1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