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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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망명지 브라질에서 1942년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은 언제나 내면의 자유를 중시했던 그가 히틀러에 의하여 자신의 저작들이 불태워지고 반유대정책으로 친구, 가족들이 죽어가고 모국인 오스트리아마저 붕괴되자 그 자신이 인용했던 셰익스피어의 "시간이 우리를 찾는 만큼 우리 시간을 맞이하리."를 그 자신의 해석대로 구현한 듯하다. 그의 발자크는 발자크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랬듯 완벽하게 완결되지 못한 채 그의 품 안에서 떠나 오히려 더 큰 생명력을 얻게 된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고백은 운명에 의하여 패배 당하지만 도덕적 의미에서는 승리를 구가했던 그의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의 그것이기도 했다. 이제 이 시대의 절망 속에서도 청년 시절의 마음의 별빛을 잃지 않았던 사내의 '한 세대 전체의 운명'과 만난 그의 '삶'을 감히 읽기 시작한다.

 

그 자신의 정체성은 스스로가 오스트리아인, 유태인, 작가, 휴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1차 세계대전 전의 안정적인 시대는 이 배움을 향해 온몸을 던질 태세가 되어 있던 청년 작가에게 더없이 좋은 학교가 되어준다. 김나지움 시절에 친구들과 몰려 다니며 빈 교향악단의 리허설에 숨어들고 골동품 가게를 더듬던 재기 발랄하던 아이는 모든 저속한 것을 못참아 했던 릴케에게 빌려준 책에 예쁜 리본이 묶여 되돌려 받는 빛나는 경험과 로뎅의 아틀리에에서 로뎅이 자신의 작품을 무아지경에 빠져 수정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생의 위대한 순간을 가지게 된다. 그 자신의 표현처럼 이러한 청춘은 "구애받지 않고 맛보고, 시도하고, 향유"하는 시간들로써 점차 이 세계를 향해 걸어나가는 지평을 확장하게 된다. 다채로운 경험들과 예술적 소양들을 쌓고 위대한 작가, 화가, 사상가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가지며 내면을 확장하는 그의 청춘의 그 무한한 깊이와 넓이의 스펙트럼이 참 부럽게 느껴졌다. 많은 미사여구나 과장을 동원하지 않고도 그의 문장 하나 하나가 마치 스무 살의 그것들처럼 생기 넘치고 발랄하게 다가와 읽는 과정도 마치 다시 젊음들을 맛보게 되는 것 같아 참 즐거웠다.

 

빛나던 성장의 시간들이 지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이제 유명인이 되어버린 츠바이크가 쉰의 생일을 맞아 느낀 그 알 수 없는 불안과 안정의 파괴 위에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그 불온한 소망은 그의 남은 시간들의 복선 같아 섬뜩했다. 회고하는 시점에서 그가 기억해 내는 그 오십 세 생일의 생각, 느낌들은 오래도록 그림자로 남았다. 경제적 안정, 명성으로 단단해진 지반은 곧 서서히 붕괴해 그의 그 불온한 소망을 비극적으로 실현시키게 된다. 이것은 소망이었다기 보다는 하나의 예감 같다.

 

1,2차 세계대전에 대한 츠바이크의 시선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2차 세계 대전이 비극의 극단으로 치닫는데에 일익을 담당한 히틀러의 잔학성은 그것을 묵인하고 동조한 거대한 무리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데에 더한 비극성이 있다. 양차대전이 실제 발발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신호나 가능성에 대하여 무심하였고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이 거대한 살육의 참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과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라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히틀러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것이 독일의 인플레로 인한 경제적인 불안정도 한몫을 했다는 대목도 기억할 만하다. 위기를 부추기고 전쟁을 선동하는 무리들에 대한 그의 경고는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58세의 나이로 그는 국적을 상실한다. 이 문장 위로 지나가는 비애는 시간과 공간을 뚫고 들어와 아프게 박힌다. 그의 회고의 문장들은 스스로가 자랑한 그 템포를 잃기 시작한다. 대신 눈물이 흐른다. 모든 보고 듣는 것들 위에 청명한 언어로 차근 차근 영롱한 집을 짓던 사나이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차마 읽어나갈 수가 없을 만큼 그의 비애와 절망과 슬픔의 강은 범람한다. 조금만 더 참고 버텼더라면 그는 다시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대부분의 것들을 다시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가정은 어리석다. 이 도덕적으로 염결했던 사나이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가슴 아프지만 그의 삶은 그러한 종결로 향한 것이었고 그의 죽음이 그가 절대 히틀러에게 양보하지 않았던 내면의 자유와 숱한 성취들을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니라는 후세의 깨달음은 오늘날 이 멀리 떨어진 이 나라에서 그의 글을 읽고 뒤늦게 배우고 깨닫는 나 같은 사람과도 만난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552

 

그는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인간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가버렸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 전체로 말하고 있다. 시대의 증언과 만난 겸허하고 진지한 삶의 고백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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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02-2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츠바이크를 읽을 때면 왠지 김소월이 떠오릅니다. 둘 다 암울한 시절 스스로 삶을 끝내버려서인지, 아니면 너무나 섬세해서 시대의 어두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요...

blanca 2016-02-21 15:25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공통점이 있네요. 그러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게 개인적인 삶으로 보면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또 전체 세대로 보면 시대를 통과하면서 남긴 글들이 많은 가르침을 주니 결국은 어떤 숙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비로그인 2016-02-2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멎있는 문장이네요. *^

blanca 2016-02-22 11:50   좋아요 0 | URL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랍니다. 긴 여운이 남는... `나는 진정한 삶을 살았다.`가 아니라 이렇게 제3자로 지칭하고 객관화해 버리는 게 츠바이크인 것 같아요.

무해한모리군 201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냄비속에 들어 서서히 삶겨지고 있다는 걸 아는 개구리, 지식인으로 불행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슬프네요.

blanca 2016-02-22 11:52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책 읽으며 자꾸 우울해지는 게 과연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라고 반문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더라고요. 전쟁을 선동하는 무리들이 히틀러 시대에만 있을까요. 정치 기사들은 마치 과거의 잘못된 행태들이 가져온 파국을 고스란히 잊고 다시 그 심연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아 때로 참 암울합니다.
 

입춘이 지나고 깜짝 추위가 간간이 오긴 했지만 갈피짬에 봄바람이 들어온다. 자연은 그 도저한 순환의 고리를 어떤 예외 상황에서도 잊지 않나 보다. 다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는 이제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벌써!) 큰딸 위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들이 엄마 공지영의 간단 요리 레시피와 함께 버무려져 있다. 때로 그녀의 행동이나 언사가 논란이 될 때가 있지만 내가 정말 힘들 때 펼쳐져 있던 그녀의 에세이에서 함께 공감한 고통의 시간들로 정이 들었다. 뻔한 이야기들 같지만 솔직한 자기 경험에 덧붙여진 삶의 조언들이 와닿아 옮겨 적게 된다.

 

 

물론 엄마도 가끔 질 낮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들을 막 때우고 싶은 때가 있단다. 그게 특별히 먹고 싶어서라면 모르겠는데 그냥 귀찮아서 말이야. 잘 생각하면 바로 그 때가 실은 엄마의 생 전반의 기력이 떨어지는 때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지. 음식은 그런 바로미터 역할을 하고 그럴 때 엄마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단다. 이 식사가, 이 식사의 앞과 뒤가 내 인생의 많은 모자이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공지영 <딸에게 주는 레시피> 중 

 

세 끼의 지엄함을 엄마가 다 챙겨주던  시절에는 사실 절감하지 못하다가 이제 내가 그것을 챙겨야 되는 입장이 되니 이 단순하고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에서 깨닫는다. 식재료를 사서 다듬고 메뉴를 고민하고 차려내고 먹이고 치우고 그릇을 닦고 다시 정리하는 몸을 먹이는 일은 때로 참으로 고달프고 영 별 의미 없는 것 같지만 때로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몸을 먹이는 일은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정말 별 거이기도 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너무 힘들 때에는 밥을 건너뛰고 커피만 연거푸 마셨다. 몸을 대우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삶의 조각들에게도 통용된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들에 때로 가장 큰 생의 저의가 있다.

 

공지영의 요리 레시피는 그냥 책 속에 삽입된 명분이 아니라 정말 실질적이어서 눈에 쏙쏙 들어온다. 재료도 과정도 다 간단하고 무엇보다 몸을 고려한 그 배려가 좋다. 그래서 하나 하나 조그마한 요리 레시피 수첩에 옮겼다.

 

 

 

삶이 공평하지도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만도 않다,는 그녀의 계속되는 이야기는 사실 친정 엄마가 후렴구처럼 읊는 "산 넘고 산이다."라는 이야기처럼 별로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정말 평화롭고 고느적하고 안심어린 시간은 막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무언가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단조롭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물론 자주 잊어버리지만 이렇게 또 되새기게 된다. '더운 양상추'라니 , 당장 해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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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1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운 양배추 음식도 맛있습니다. 그냥 양배추를 찐 겁니다. 거기에 쌀밥 한 숟가락 얹고 양념간장이나 된장 살짝 찍어 먹으면 맛있습니다. 생 양배추를 먹으면 사각사각 씹히는 맛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할 겁니다. 그럴 때 양배추 찐 것을 밥에 싸서 주면 좋아할 것 같아요. 제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blanca 2016-02-19 10:31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너무 좋아해요, 양배추쌈! 쌈장이 달큰하니 맛있어야 더욱 빛나는 음식이죠. 오전부터 배고프네요. ㅋㅋ

꿈꾸는섬 2016-02-1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운 양상추는 생각도 못한 음식이에요. 양상추는 늘 아삭아삭한 샐러드여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나봐요.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블랑카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분홍공주와 막둥이도 잘 크고 있죠? ㅎㅎ 넘 반가워서 호들갑스러워졌어요.

공지영작가 큰딸이 어느새 30대를 바라본다니 세월 참 빨라요.ㅎㅎ 전 지영언니 글 참 좋더라구요. 솔직하고 발칙하고 담백하고 위로도 되구요. 저도 다음에 찾아 읽어야겠어요.

blanca 2016-02-19 10:32   좋아요 0 | URL
꿈섬님도 잘 지내시죠? 아이들은 크고 저는 나이먹고 ㅋ 그러네요. 좀 자유로워져서 꿈섬님이랑 같이 좋아하는 작가들과의 만남, 요런 것도 좀 다닐 기회가 왔으면 싶어요. 기억나시죠? 김영하 작가와의 만남 좌절이요^^;;

꿈꾸는섬 2016-02-19 13:57   좋아요 0 | URL
ㅎㅎ블랑카님과 함께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요.^^
기억나요. 김영하ㅎㅎㅎ
언젠가 시간되면 같이 야나문에 가요. 아이들 학교보내고 막둥이 데리고 가도 될 듯 해요. 정말 좋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6-02-19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늘 아침 감성적이네요.
실은 공지영 작가의 멘트가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져서 거리감이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글을 보니 저 책이 궁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미리보기로 읽는데, 눈물이 왈칵, 이런이런....

blanca 2016-02-19 18:13   좋아요 0 | URL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아요. 그냥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담길 수는 없지만 그 무언가가 나와 만날 때 그냥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살아가는 건 언제나 어디서나 결국 만나게 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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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전부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책은 당신을 깨운다. 그것만으로도 그 책은 전부가 아니어도 된다. 이 책은 나에게 그랬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대한 해석, 자신의 개인적 감상, 경험을 덧붙인 부드러운 책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면이라면 이 책은 닮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자주 그런 류의 책들에서 회자되는 대목들이 언급된다. 하지만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덧붙여진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실제 영문학과 교수다. 그리고 이 책은 숱한 문학에 덧씌워져 있는 거대한 환상의 장막을 가차없이 벗긴다.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로 이야기되지만 그 어떤 '~주의'도 문학을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데에 이용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주의도 낭만주의도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계는 명료하다. 문학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것은 객관적이거나 공정하거나 거대한 진실이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기대를 버리고 독자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읽는 이가 다가와야만 부활하는 이야기에 발을 들여 놓는다.

 

스토리는 타래처럼 뒤얽힌 이 세계에 억지로 일종의 도안을 새겨 넣으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세계를 단순화하고 빈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서술한다는 것은 변조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 말은 곧 모든 서사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서사는 그 자체의 한계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합니다.

-p.202~203

 

"하나의 총체적 서사는 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일견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시선과도 연결되어 있는 깊이 있는 자인이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은 그 앞에서 어불성설이다. 그에게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꼭 이야기가 아니어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이 깊이 와닿았다. 삶은 통합된 잘 직조된 패턴으로 설명 가능한 서사가 아니라는 것을 나이 들며 느끼게 된다. 중구난방으로 일어나는 일들, 맥락에 닿지 않는 반응들도 삶의 통로로 예고없이 기어 들어온다. 거기에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하면 어지러워진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이야기를? 질문은 난무하고 그것은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경로를 벗어나 소외된 고독한 이방인이 암흑을 대변해야 할 때 느끼는 심정과도 닿아있다. 하지만 원래 서사란 환상이고 심지어 그 환상을 토대로 쌓아올리는 문학마저 스스로 그것을 배반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면 당연히 살아 숨쉬는 인간의 삶이 잘 짜여진 이야기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p.308

 

문학에 대한 한계와 아이러니는 그것이 바탕으로 하는 삶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서도 연유하지만 그것을 언어로 옮길 때 따라오는 그 공백과도 겹친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절망이나 무용함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지점에서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할 수 없기에 그것을 향해 끊임없는 언어의 순례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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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6-02-1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깔끔한 문장입니다^^
여러 고전문학 읽기를 통해 다양한 사고와 간접 경험을 하는, 제 안의 감성을 깨우는....
덕분에 유연한 사고도 가능하겠지요. 나에게만 생긴 일이 아니라는 위안도 갖게 되고요.

blanca 2016-02-15 14:44   좋아요 0 | URL
한동안은 소설을 안 읽기도 했어요.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허무감이 좀 들어서요. 그런데 요새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안에 불완전하거나 상충되더라도 제가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경험한 것들의 조각들이 있어서 반가워요.

마녀고양이 2016-02-15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하이
전 책서평을 담은 책은 거의 안 읽지만, 블랑카님의 말씀대로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참 마음에 드는군요~~~

오늘 추워요

blanca 2016-02-15 14:4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도 잘 지내셨죠? 며칠 전만 해도 봄날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후진이에요--;; 오늘은 여느 겨울처럼 참 춥네요. 빨리 봄도 오고 꽃도 폈으면 좋겠어요.
 

이 모든 것이 완성되면......

내가 마지막 펜놀림까지 끝내고 나면

나는 옳거나 그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 헤어진다고 해도 그는 내 삶에서 횃불 노릇을 할 거야.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중>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십칠여 년간 오매불망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꿈꾸다 거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부부가 된 한스카 부인이 자신의 여동생에게 보낸 발자크에 대한 속내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실현되지 못하거나 거짓이었다. 발자크는 빅토르 위고의 조사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모두에게 위대한 평등이자 자유인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가 '옳았다'는 것을 그의 작품들로 증명해 내었고 그가 자신의 부와 명예를 담보로 한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숭배를 바친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한스카 부인은 끝까지 그의 사랑을 계산했으니까. 그녀의 발자크에 대한 정확한 감정은 그 어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모순적이고 베일에 싸여 있다. 그녀는 발자크의 오랜 연인이 되고 그와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 속의 한 존재로 승격시켰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의 진정성과 자신의 충절을 의심받는 불충을 저질렸다. 그녀 또한 발자크처럼 불멸을 택했다. 발자크를 사랑했던 이 책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여자를 미워한 것처럼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의 역작 <발자크 평전>은 그의 죽음으로 발자크의 저 거대한 인간 세계의 축도를 언어로 완성해 내고자 했던 꿈이 좌절된 것과 같은 길을 걸었다. 역설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를 지배했던 발자크의 삶, 문학에 대한 사랑과 경탄은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생명을 얻었다.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열려 있고 그 열려 있는 통로는 여전히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이 오고간다. 삶과 인간 세계 전체를 그렇게 자신의 작품 안에서는 현명하게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사내는 삶에서는 항상 실패했고 그 실패는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배가 막 항구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파도치를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와 같다. 발자크는 귀족을 숭배했고 돈을 숭앙했고 돈을 가진 귀족 여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전복시키고 그것을 딛고 뛰어 오르기를 바랐다. 항상 무모하게 사업을 벌였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쓰지도 않은 소설들을 미리 팔아 챙긴 돈을 흥청망청 쓰고 빚쟁이들로부터 도망다녔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돈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구제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실제 끊임없이 그러한 후보자들을 물색하고 쫓아다니고 그녀들에게 시간, 돈, 열정을 낭비했다. 파리가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 수도복을 입고 미친듯이 쓰고 또 쓰고 열번 이상을 고쳐 쓰며 인간의 그 어리석은 욕망을 그 좌절하는 행함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작가의 모습 또한 발자크의 것이었다. 발자크는 몸소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에서 가장 섞이기 힘든 그 모든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한데 뭉뚱그려 달고 다닌 인간이다. 서머싯 몸이 그를 진실성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 비난해도 "그는 내가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르고 싶은 유일한 작가"라고 상찬한 것이 한데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발자크라는 현상은 모든 논리적인 결론이 빗난간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차라리 하나의 사족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그의 서글프고 어리석고 무모한 삶이 우리 자신들의 삶이 극단적으로 극화되었을 때와 닮아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하나의 예언 같다. 모든 인간과 모든 삶은 언제나 항상 그러한 가능성으로 가장 쉽게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영악한 두 딸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도 발자크가 그려내려 했던 <인간희극>의 인간 군상의 한 축도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감안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하게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나귀 가죽>에서 골동품상 노인이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삶의 동인인 '바람'과 '행함'을 든 것도 결국 그러한 삶과 존재의 생래적인 모순,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발자크의 눈이 멀어서도 한스카 부인의 곁에서 귀족 생활을 누리려 했던 그의 어리석음은 그 자신이 마지막으로 쓰다 만 가장 서글픈 삶의 텍스트다. 그러한 그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까지 낭독한 사람이 빅토르 위고였다. 빅토르 위고는 이 성취로는 위대했고 삶으로는 어리석었던 남자의 삶을 가장 고결하고 우아하게 압축하는 언어를 선물한다. 마침표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신사 여러분,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밀도가 전부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발자크에게서 가장 온당한 밀도를 얻는다. 그는 단 하루도 '산다는 의미'에서 낭비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가 낭비된 것은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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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0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분방하게 살면서도 글 쓰는 일에 충실한 발자크의 삶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콜레트가 소녀였을 때 독서를 좋아했어요. 그녀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가 발자크였습니다.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blanca 2016-02-10 10:59   좋아요 0 | URL
이렇게 통찰력 있는 글을 써낸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밥 먹듯이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행태를 거의 죽을 때까지 계속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어쩌면 발자크가 실생활에서는 그랬기에 이러한 글들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랬어요. 벌써 연휴 마지막 날이네요.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부하기 싫을 때면 스무 살의 오월에는 꼭 사랑이라는 걸 해 볼 거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스무 살 오월에 그 남자를 만났다. 그것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팬심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아이돌을 따라다니듯 짝사랑인지 아니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인 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맹렬히 그 '첫사랑'이라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명명한 것에 매달렸다. 그것은 백일도 채 못 가 사그라질 잉걸불이었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하지만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스무 살로 돌아가면  그 남자에 퍼부었던 그 아낌없던 유치한 감정들이 도드라지며 떠오른다. 최선을 다했기에 어리석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미의 "슬픈 이별"의 가사처럼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싶지만 나는 어쩌면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그게 젊음이니까. 그게 또 첫사랑의 무모함이니까.

 

 

 

 

 

 

 

 

 

 

 

 

 

 

 

 

 

 

2011년 당신의 부음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 날은 눈발이 흩날렸고 첫아이를 낳았던 집에서 씩씩대며 이사나가던 날이었으니까. 아저씨들이 짐을 꾸릴 때 나는 우연히 당신의 부음을 들었다. 마음 한켠이 스산해져 와서 동생에게 문자를 보내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  벌써 당신의 죽음이 오년을 훑고 지나갔고 당신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했던 당신과의 대화, 대담들이 다시 뒤로 보내었던 시간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나 정이현 작가가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말.

 

우리는 주로 맛있는 밥을 같이 먹었다. 어떤 약속은 지켜졌고 어떤 약속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중 

 

박완서 작가와 정이현 작가의 거리가 그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 지켜진 약속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지나가도 변함없는 관계의 친밀감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남자네 집>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거론된다. 내가 읽은 것은 단편인데 그것이 후에 장편이 된 모양이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져 찾아보니 세상에, 2007년 박완서 작가의 친필 서명이 있는 <친절한 복희씨>에 몇 번이나 줄을 그으며 읽은 흔적이 있는 그 이야기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돌아가고 또 가고. 문장들이 낯설지 않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화자가 후배의 집들이에 간 김에 그 근처에 살았던 자신의 청년기와 첫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6.25라는 시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역사적이고 지극히 사적이다. 시대의 격동은 '나의 첫사랑'을 두고 흘러가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은 안일했지만 당연했다. 아름답지만 미숙했던 첫사랑을 저버린 것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흔들림 없이 양육할 굳건한 우산 같은 남자를 택해야만 한다고 믿었을 화자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것이 비단 그 때만의 시대상이었을까. 모든 허룩하고 순전한 첫사랑의 귀결 앞에는 그 동화의 마지막을 싹둑 잘라 낼 엄혹한 현실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 가식 없는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하나 하나가 다 필사하고 싶을 만큼 인간에 삶에 밀착해 있어 뚫고 들어온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이래야만 영원히 살아 꿈틀댈 것이다. 절망하기엔 이르다.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중략>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그 남자네 집> 중

 

첫사랑은 이런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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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이 쓴 소설 중에 슬프면서도 쓸쓸한 여운을 주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이 `그 여자네 집`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나왔던 소설이에요. ^^

blanca 2016-01-28 15:55   좋아요 0 | URL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에도 그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작가가 난감해 하는 반응이어서 김영하 작가도 그렇고 교과서에 작가들 작품이 실리는 게 한편 작품을 규격화하거나 인위적인 해석에 대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2016-02-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7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