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묘한 게 책 선택도 어떤 흐름 같은 게 있어서 한동안은 고르는 책마다 잘 읽히고 좋은 내용이 많은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시기는 고르는 책마다 그만 읽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후자다. 벌써 두 권째 실패 중이라 곁에는 지금 읽는 책이 없는 상태. 이럴 때 새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일은 심한 죄책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이상한 강박인데 아무리 재미없고 흥미 안 가는 책이라 해도 일단 돈 주고 사면 끝가지 다 읽어야 한다는 아주 지독하고 자학스러운 독서관이 있다.--;;


새로 나온 책들은 어찌나 상큼한지... 가상으로 장바구니를 꾸려봐야겠다.



편혜영의 작품을 다 읽은 것은 아니라 그녀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거나 깊이 있게 분석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여하튼 그녀의 그 서슬 퍼런 문장이 좋다. 길게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돋보이는 작가. 일단 서사의 진폭과 심리 묘사의 결이 아주 잘 어우러져 가독성이 높은 작가다. 지루하거나 어려운 글은 그녀와 멀다. 기대되는 이야기. 어서 읽어보고 싶다. 양지로 가서 해바라기를 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 저 깊이까지 내려가 만지는 실재의 무게를 실감하게 해주는 진지한 작가의 글이 매력적이다.











 



제목에 끌린다. 젊은 여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만 늙은 여자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미 젊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늙기 위해 공부를 좀 해야 한다. (공부가 가능한 영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자꾸 끌린다. 아이를 키우는 게 개인적인 육아관보다 그 아이를 키우는 문화권의 영향을 엄청나게 많이 받는다는 것을 순간순간 절감한다. 이 문화권에서는 용인되는 아이의 행동이 저 문화권에서는 무례하게 받아들여져 훈육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분명 그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이러한 다른 양육 태도는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 안 가는 것이 중요한 곳이 있고 (기본적인 도덕률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자율성(참, 이것의 경계 만큼 모호하고 자의적인 것이 없다.)이 무조건 최고인 곳도 있다. 여하튼 궁금하다.






작은 아이의 영어 이름이 올리버인데 어떤 아이가 자기 올리버 안다고 이 올리버 아니냐고. 사실 개인적으로 올리버 색스 작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마음에 좀 무리수를 둔 작명이긴 했지만 나는 정작 <올리버 트위스트>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는 발견을 했다. 찰스 디킨스는 의외로 지루하거나 읽기 어려운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문장도 쉽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도 있어 대체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제대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기다려야 하느니라... 이게 삼십 대와 사십 대의 차이인가 싶기도 하다. 삼십 대에는 책상에 새 책을 가득 쌓아놓고 냄새 맡고 어루만지며 뿌듯해했다면 이제는 자꾸 공간과 비용과 이런것 저런것을 저울질하고 계산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서글프기도 하고 타협하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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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8-04-27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아마 다음 페이퍼는 책상 또는 책장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단, 공감합니다. 이사하고 책을 많이 버리면서 책을 구입하는 데 인색해진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쩌면 책을 읽고 구입했던 것들이 어떤 종류의 허영이 아니었나 하는 반문도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blanca 2018-04-28 02:56   좋아요 0 | URL
와, 책상, 책장, 문구 이런 거에 관련된 이야기 저 너무 너무 좋아해요. 빨리 올려주시기를... 아직도 노트, 필기구 이런 것에 관련된 욕심은 사그라들지를 않아요. 딸아이랑 싸울 정도예요. ^^;; 허영은 청춘의 특권 아닌가요? ^^;;

stella.K 2018-04-2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침 노년 성장 소설이라네요.
노년을 여전히 성장으로 보는 관점이 좀 놀랍네요.
저도 아직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공부는 해 두는 게 좋겠죠.

저도 마지막 문단에 공감하는데, 이젠 책 사는 게 무섭더라구요.
작년까지만 해도 중고로 그동안 못 본 책 마구 사 들였는데
이건 뭐 사 놓기만하고 읽는 속도는 느리고 그 사이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동안 괜히 책 사 들였나? 후회하고. 그러다 못 참고 사고.
책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널을 뛰는 것 같습니다.ㅠ

blanca 2018-04-28 02:57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책 관련해서는 참, 정말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또 전자책 읽어보겠다고 막 다운받아놓고 이것은 종이책보다 더 실감이 없으니 방치되고 있어요. 이런 개념이 아예 없고 읽고 싶은 책 다 사서 읽어야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던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

AgalmA 2018-05-0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이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가치관을 담은 훈육 or 지적이 심한 한국에서 이 문화적 특징이 쉽게 바뀔까 싶어요... 교육, 취업, 혼사, 장례 등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속속들이 관계되니~_~;;

blanca 2018-05-06 23:44   좋아요 0 | URL
좁은 공간, 촘촘한 인구 밀도, 가족 중심 문화의 결합이 낳은 이 틀이 쉽게 바뀔 것 같진 않지만 그럼에도 좀더 유연하고 느슨해지기를 바라봅니다.
 
[전자책]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라틴어 수업 1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대학교 때 문과계열 전공자는 제2외국어를 필수로 수강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 불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지만 열심히 안 하니 못하고 못하니 더 열심히 안 하는 악순환으로 이미 질려버렸던 터라 무언가 전혀 새로운 언어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선택한 언어가 스페인어다. 단짝동기도 설득해서 함께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스페인어 수강생 중 많은 학생들이 이미 스페인어를 배웠거나 스페인 체류 경험이 있었다. 교수님은 그들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는 대신 다행히도 초급자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수업 난이도를 조정해서 우리가 포기하지 않게 도움을 주셨다. 스페인어는 영어와 유사한 단어가 대부분이고 문법이나 발음 규칙이 다른 언어들보다 까다롭지 않아 대체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외국어로 느껴졌다. 차근차근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그 과정에서 맛보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 그리고 좀 흔하지 않은 언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허룩한 자부심 등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전공공부보다 더 열중해서 하는 경지까지 나아갔지만 졸업 후 나는 스페인어는 전혀 쓸 일도 쓰일 일도 없는 세계에서 그 매력적인 언어의 야트막한 기초공사를 방치하다 거의 흔적도 없이 떠나오게 되는 허무한 결론을 맞게 되었지만, 지금도 나의 스페인어 공부에 관한 추억은 아스라한 대학 교정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남아있다. 


이 책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10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5년여 동안 저자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초급,중급 라틴어의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교회법학을 공부했고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한동일 신부다. 라틴어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책은 아니고 로마에서부터 현대 유럽의 역사, 법, 문화, 종교,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라틴어를 둘러싼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곁들여 라틴어의 아름다운 경구를 현실과 접목시켜 마치 강의실에서 실제 진지하고 잔잔한 강의를 하듯 엮은 책이니 만큼 잘 읽히고 쉽게 들어와 박힌다.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Prima Schola alba est.)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어느 대목을 펼쳐 읽어도 좁게는 생소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 노력을 경주하는 것부터 젊게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대면하는 것까지 어마어마하게 확장되는 외연을 경험할 수 있다. 기성세대로서 젊은 세대에게 막연한 이상주의나 고정관념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보다는 기성세대가 공정한 경쟁,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에 가지는 책임감과 한계를 자인하고 자신이 가진 종교관의 틀 안에서만 세상을 재단하려 하지 않는 유연함이 구태의연하지 않아 와닿았다.


막연하고 공허하고 자신의 삶과 무관한 언어로 자신과는 다른 세계관과 보여지는 삶을 직조하기 쉬운 세태다.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부류에 편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지나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과 인정, 겸허한 모습들은 그런 의심을 스러지게 했다. 삶과 죽음 앞에서 많은 언어의 모어가 된 라틴어의 단순하고 기본적인 명제로 돌아가 깊이 있게 천착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독자를 참여시키는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한뼘쯤 더 진지해지고 유의미에 가닿은 느낌이 든다.


나의 스페인어는 그렇게 스러져갔지만 아직도 어떤 언어를 통해 미지의 세계로 가는 하나의 경로를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신도 그렇다면 이 책은 올바른 선택이 될 듯하다. 꼭 언어에 대한 것이 아니어도 무언가를 배우고 경험하는 데에 대한 호기심이 줄지 않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간직한 채 삶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소중한 지침들을 < 라틴어 수업> 청강을 통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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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5 0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어폰을 꽂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려는 찰나, 중년의 아저씨가 내 건너편의 안쓰는 의자를 좀 써도 되겠냐고 미안해했다. 혼자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 흔쾌히 응하고 테이블을 살짝 훔쳐보니 이미 커피 두 잔이 준비되어 있다. 나머지 약속한 사람들이 나타나자 세 남자의 시끄러운 커피타임이 시작된다. 이것은 흡사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저녁 술 자리 같은 강도. 마지막엔 커피잔으로 건배까지 하며 좋아한다. 이어폰으로 들으려던 내용은 흡사 딴 세상에서 꿈결에나 들리는 듯해 도통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포기해버리고 책을 보기로 한다.

















솔직히 언어에 대한 욕심이 있다. 한국어도 영어도 유창하게 잘 말하고 쓰고 싶고 더불어 제2외국어도 하고 싶지만 현실은 둘 다 점점 언어의 표현, 인식의 날이 무뎌지고 있다. 내가 말하면 상대가 난감해하는 경우, 나는 제대로 말하거나 쓰지 못한 것이다. 어떤 새로운 표현이나 단어를 완전한 내 것으로 소유하는 일은 사람을 그렇게 하려는 욕심보다 작지 않다. 그러니 실현 불가능한 영역은 점점 넓어져만 간다. 발은 현실을 딛어도 시선은 별을 보라지만 그것은 자칫 도를 넘다보면 지치게 된다. 이제 내가 딛고 있는 땅은 지평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진하는 것이니 만큼 고개를 한없이 위로만 향하다가는 자칫 넘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라틴어 경구들은 또 그런 욕심을 다시 생겨나게 한다. 아, 하나 하나 다 기록하고 싶고 외우고도 싶고 그런데 책장이 넘어가면 바로 전에 감동을 주었던 라틴어 문장은 이미 저 멀리 쫓겨나 있다. 저자가 이탈리아에 유학가서 공부할 때 수업 내용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 절망해서 포기하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대목은 그래서 반갑다. 그럼에도 버티어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그의 근성은 그래서 더 와닿는다. 라틴어를 언어학적으로 집중해서 가르쳐 주는 책은 아니고 아름답고 의미 있는 라틴어 경구들을 하나의 챕터에 각각 담아 대학 강의를 하듯 친절하게 현실에 접목시켜 풀어줘 더 좋다. 


어머니의 죽음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 난감했다. 이탈리아 유학 당시 쓴 손편지가 실려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하며 소개한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라틴어 문장의 울림이 크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죽음은 지극히 개별적이면서 또 지극히 보편적이라 우리 모두의 일이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도 분명 닥칠 일이다. 사소한 끌탕은 슬며시 자리를 감추게 된다. 몰랐는데 바깥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난감하지만 그 속을 뚫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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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8-04-20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숨마 쿰 라우데...
저도 언어의 욕심뿐. 영어도 참 어려워요..
아저씨들의 수다가 더 심할때 많아요.ㅎㅎ
나이들수록 목소리는 더 커지는든요.

blanca 2018-04-21 02:40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제 목소리도 점점 커지나 봐요. 조심하긴 하는데 그 아저씨들도 너무 신나서 미처 목소리를 챙기지 못하신듯 ㅋㅋ 그래도 나중에 커피 잔으로 건배까지 하며 즐거워하다 갑자기 해산하는 모습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저는 제가 학창시절부터 수학에 취약해서 더 반대급부로 언어에 집착했던 것도 있어요. 그런데 이젠 이것마저도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의기소침해진답니다.

다락방 2018-04-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막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읽기를 마쳤는데, 블랑카님은 [라틴어 수업] 읽기를 마치셨네요.
외국어에 대한 동경은 누구에게나 있는가 봅니다. 저 역시 그러한데, 그러나 어느 외국어도 하질 못해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좋아요, 블랑카님. 읽다가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라틴어 수업을 읽어도 그럴 것 같네요.

blanca 2018-04-21 02:42   좋아요 0 | URL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지금 당장 검색 들어갈게요.^^ 흑, 타일러 보면 진짜 부러워요. 그 나라의 언어를 성인기에 배워 토론까지 할 경지까지 나간다는 건 정말 근사하고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라틴어 수업>도 참 좋네요. 진짜 다시 이십 대가 되면 이 교수님 수업 청강하러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이미 그만두셨다지만요. 요새는 별 일에 다 눈물이 나서... 그냥 순간 순간 뭉클합니다.--;;
 

뒤늦게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다시 제대로 정주행 중이다. 나정이를 둘러 싼 그 묘한 애정 기류들에 나도 덩달아 자꾸 설레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마흔의 아줌마와 볼살 통통하고 걸핏하면 짝사랑과 그것이 응답받는 착각에 빠지곤 했던 그 대책 없던 스무 살의 간극은 몇백 광년 같다. 스무 살의 오월 나는 짝사랑에 빠졌다. 너무 큰 애정과 그 응답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의와 넘치는 그 사람을 다 안을 수 없는 내 보잘것없음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오열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쓰던 시간들은 다른 차원의 다른 삶, 때로는 하나의 과장된 허구 같다. 정말 그 때 그 아이는 나였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내가 썼던 그 오글거리지만 원없이 사랑했던 시간들은 어떻게 이 억겁의 시간 안에 쌓일까, 혹은 사라질까, 여전히 그 차원에서 그 공간에서 그 일은 현재진행형일까도 싶고. 하여튼 말로 담을 수 없는 온갖 회한과 공상과 그리움은 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막무가내의 열정과 헌신과 범벅이 되어 기억의 화석이 되어 가끔 돌아보게 된다.

















영문판 표지만 봐도 이 소설의 사랑이 어떤 종류일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열일곱 소년 엘리오와 그의 이탈리아 집에 부모님의 젊은 학자들의 책출간 후원의 일환으로 초대받게 된 이십 대의 미국 청년과의 감각적인 이끌림을 처절할 정도로 정묘하게 묘사한 이야기다. 비단 퀴어 로맨스물로 한정되어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겪게 되는 성장통과 첫사랑이 어떻게 어우러져 한 사람의 삶에 저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게 되는 작품이다.


특히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엘리오의 단골 동네 서점에서 스탕달의 처녀작 두 권을 나란히 나눠 갖는 장면. 엘리오는 자신의 성소, 이미 올리버가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를 꿈꿨던 그 곳으로 그를 안내하는 듯한 느낌에 전율한다. 이때의 엘리오의 시점은 복합적이다. 그 둘만의 내밀한 시간이 어떻게 서로의 삶 안에서 기억될지를 앞서 예감하고 인식하는 한편, 미래에 이미 나이들어버린 엘리오가 관조하는 과거의 추억의 생생한 복원처럼 느껴지는 복합적인 시선은 시간이라는 자장 안의 일련의 사건들을 여러 차원에서 더 깊이 있고 넓은 차원에서 재해석하게 된다. 경험하는 나와 서술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와 예견하는 나는 흠결없이 하나의 늙어가는 몸 안에서 섞인다. '응사'를 보며 추억하는 스무 살의 나와 그 스무 살이 기억하게 될 스무 살의 일들과 지금 내가 추억하는 그 스무 살의 일들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통합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 담담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이러한 가정은 그 당시의 그 무모한 열정에 색깔을 더 입히지도 그 것을 바래게 하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가정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고 그 교감, 그 열정, 그 치기 자체를 쓰다듬는 애치먼의 언어의 결의 섬세함과 예리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짧고 강렬한 사랑 이야기로 삶과 인간 자체를 제대로 시간의 격자 안에서 탐구하는 진지한 철학으로까지 확대된다.


열일곱은 내 경험상 자신 앞에 펼쳐질 삶을 시간의 축소 안에서 조망하는 게 아니라 무한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나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엘리오의 시선은 엘리오의 열일곱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미 시간이 지나버린 중년의 그가 재해석하는 내면의 가정에서 다시 탄생하는 이야기다. 그 정교한 장치 안에서 결국 청춘은 어리석고 근시안적이어야 제대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통찰과 예지가 실수와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강타하는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넘어져도 조금 너무해도 다시 복기할 이야기가 있는 중년은 그 치기의 시간을 소중이 다시 주워담아 구석에 쌓아두려 한다. 


'너'를 만나러 '나'는 간다. 햇살은 눈부시고 나는 너를 보면 눈이 부시고 자꾸 눈물이 나려 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한다. 너가 나중에 그렇고 그런 아이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난 그 때 그랬다. 엘리오처럼. 다시는 내 생에 다시 오지 않을 감정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기꺼이 무모한 멍청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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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인 모델이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원폭 투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방송에서 듣게 됐다. 그녀는 피해자로서의 자신들의 억울한 입장을 토로했다. 죄없는 민간인들의 피해에 가슴 아파했고 미국인 진행자도 그녀의 이야기에 안타까워 했다.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갔고 나 역시 전쟁의 가장 증오스러운 면이 그 전쟁에 동조한 적 없는 죄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서 2차 세계대전에 있어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책임은 통째로 빠져 있었다. 일본 또한 죄없는 수많은 여자, 남자, 아이들의 학살의 책임의 당사자가 아니었는가. 그 책임의 통감도 제대로 된 배상도 반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에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전혀 개인적 유감이 없는데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논박할 처지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감정적으로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대단한 애국자여서거나 역사에 정통해서가 아니라 이제 남은 자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 중 일부만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그 빠진 나머지가 가지는 그 처절한 무게와 진실의 핵을 묻어버릴 경우 얼마나 왜곡된 이야기로 역사가 변질될 수 있을까 싶어 두려웠다.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힘없는자들은 남은 자들의 입과 펜 끝에서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테우리'라는 이국적인 말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제주도의 주특별자치도에서 목축(牧畜)이나 목축에 종사하는 이들을 관장하는 신. 제주도 에서는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 곧 목동(牧童)이나 목자(牧者)"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는 일흔여덟의 이 마지막 테우리 노인의 차마 말하여질 수 없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개인의 것이기도 하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역사라는 올가미 속에 개인의 삶이 포박당해 어쩔 수 없었던 개인의 그 무참하게 짓밟힌 자유 의지에 관한 회한이기도 하다. 현기영의 절창은 노인의 눈을 통해 역사와 무관하게 형형하게 빛나는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그 자연이 품어 온 수많은 범인들의 짓밟힌 삶을 더 한없이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복원한다. 


한철이 끝나버린 목장은 바야흐로 초겨울 특유의 눈부신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아름다움. 눈부신 금빛의 들판과 오름들, 서리 깔린 듯 하얀 억새꽃 무리들, 구름이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밝았다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제주 4.3 사건 또한 역사 속에 음각되어 있던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비교적 최근들어서야 제대로 된 진상 규명 요구와 맞물려 드러나고 있다. 현기영은 실제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 마을의 몰살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이 비극을 중심으로 파편화된 개인들의 아픈 상처를 형상화하고 있다. 너무 참혹해서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그 죄없는 죽음들은 반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반문된들 도저히 얻을 답이 없으니 그 질문은 다시 허공의 메아리로 눈물과 만난다.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오빠, 형, 동생들의 요구는 죄없는 가족들의 몰살로 돌아왔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맞아야 하는지를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가.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절경의 섬 안에는 이렇게 아픈 역사가 있었다. 제대로 말하여지지도 딱지가 앉지도 못한 상처에서는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있다. 작가는 고향의 아픈 역사를 우직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말하기 시작하여진 것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적으로 동요했다. 하지만 제대로 적절하게 나의 마음과 입장을 설명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당황스러움도 그 감정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나의 언어로 다시 재정립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논박하려면 나의 바깥을 흐르는 역사적 사실들을 내 안으로 먼저 끌고 들어와야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개인은 역사 바깥에서 별개의 개인적 삶을 꾸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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