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 나는 나를 복기한다. 때로 다시 대학생이고 가끔은 신입사원으로 돌아간다. 꿈 속의 나는 이게 진짜가 아니라고 의식한다. 나는 나를 나의 과거의 시간을 빌린다. 꿈이 아니어도 종종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를 비집고 들어온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건 왜 그렇게밖에 결론날 수 없었을까? 궁극적으로 그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 혹은 남기게 되는 걸까? 내가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의 나는 다른 곳에 가 있었을까? 


답은 언제나 모호하다. 혼란스럽다. 좋았던 일들도 부정적인 경험도 순차적으로 일어나 여기에 나를 데려다 놓았기에 어떤 다른 가정은 결국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곤 한다. 상실의 기억을 전복시켜도 여기 지금의 더 나은 나를 확신할 수 없다. 시간과 삶의 불가항력은 생각보다 더 가혹하고 더 강렬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내 삶 자체가 이야기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이런 생각들을 언어화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고의 편린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불명확하고 소통 불가능한 지대를 스치고 갈 뿐이라 대화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갑자기 옆 사람에게 그 때 우리가 안 만났다면 지금 더 행복했을까요? 이럴 수는 없으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질문한 아름다운 단편을 늦게 만났다. 정묘하고 치밀하고 아름다워서 놀랐다. 이런 게 SF 소설이라면 이런 소설을 미처 읽지 않은 나를 어리석었다, 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 <콘택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보지 않았다. 그것의 원작이 된 이야기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에 실린 동명의 중편이다. 


"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로 시작하는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단다."고 상기시키는 이야기. 화자는 이미 잃게 될 것을 아는 딸에게 그럼에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그 딸을 가질 것을 결심하는 이야기를 한다. 현재의 '나'는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해독하고 소통하는 작업에 참가하며 그들의 새로운 언어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세계관을 인간들의 순차적이고 인과론적인 세계관과 접목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들에게 과거-현재-미래의 순차성은 의미가 없다.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동시적인 것으로 한데 어우러져 떠오른다. '나'는 이러한 이질적이고 혁명적인 언어와 접촉하며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이야기와 자유 의지의 모순을 깨닫는다. 이미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다면. 그럼에도 그 선택은 또 가능한가. 그렇다면 나는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삶의 경로를 갈 것인가.


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잃을 것을 알고도 엄마는 다시 그 아이를 가질 것을 결심한다. 이렇게 될 줄 안다는 것은 이 선택을 하지 않을 개연성을 함축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 길은 내가 그럼에도 또 걷게 될 삶의 경로다. 


내면으로 향한 수많은 질문과 혼란을 테드 창은 상상의 한계를 넘어 형상화한다. 그것이 물화되어 나올 결론들이 깨끗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질문을 망설이지 않는다. 언어를 통해 그것의 이야기를 통해 한 단계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작가의 시도는 놀라울 정도로 도발적인데 한켠 슬프다. 천상을 향해 올라가지만 다시 지상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인간의 이야기<바빌론의 탑>의 분위기가 내도록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를 인식하고 한계를 깨려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설득력이 있지만 어쩐지 좀 서글프다. 


다시 꿈 이야기. 나는 어린이가 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을 뿐이다. 다른 선택을 하는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내가 가던 곳, 만나던 사람들이 꿈 속에 있다. 성큼성큼 나는 다시 그 시간을 걷고 여기 이 시간으로 아침마다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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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잘 모르고 미술 시간에 데생을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거의 유일하게 항상 볼 때마다 경탄하는 그림이 있다. 이 화가의 그림은 나 같은 회화의 문외한에게도 직관적으로 즉각적으로 와 닿는다. 유심히 들여다 볼 때마다 수많은 의미와 상징이 떠올라 밀려온다. 보는 것만으로 심오한 생과 사랑과 섭리의 메시지를 한꺼번에 전달받는 느낌이다. 도저히 언어로 형상화하기 힘든 감동이다.


클림트 <키스>


클림트. 그의 그림은 도처에 깔려 있다. 퍼즐, 벽, 심지어 가전들에도. 특히 이 <키스>는 너무 흔해서 하찮게 여겨질 법도 한데 생명력이 끝이 없다. 반복해서 보아도 그렇다. 클림트에 대해서는 언젠가 꼭 제대로 알고 싶다고 생각했고 우연히 '빨간책방'에서 소개된 이 책으로 바라던 바를 얻었다. 클림트와 그가 태어나고 살다 죽은 빈을 분리해서는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사족이 아니다. 실제 저자 전원경은 클림트의 행적을 좇아 빈을 방문하며 그의 생애를 풀어나간다. 클림트는 그림 이외에는 스스로를 표현하거나 기록하는 데에 인색했던 사람으로 그의 생을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린 그림을 실제로 보고 그가 살고 그렸던 곳들을 직접 방문하며 형상화해 낸 한 거장의 삶은 저자의 대상에 대한 정과 존경에 기대어 더없이 생생하다. 지나치게 넓지 않고 과하게 깊지 않아 듣기에도 보기에도 좋다. 클림트를 전혀 몰랐던 관심이 없었던 사람일지라도 이 책을 통해 장식예술가의 아들로 태어나 해체되어 가는 조국의 세기말에 자신의 창조력과 예술적 영감을 묵묵히 표현해 낸 한 남자의 삶과 그의 그림을 보는 일은 즐겁고 뭉클한 일이 될 정도다. 




클림트에게 빈은 츠바이크에게 그러했듯 삶의 무대라기보다는 삶의 견인력이자 중추였던 듯하다. 쇄신과 혁명과는 멀리 떨어져 비잔틴의 황금이 발산하던 빛에서 끝내 돌아서지 못했던 모습은 제국과 예술가가 공유했던 옛것에 대한 향수이자 집착이었다. 클림트의 시선은 머나먼 과거로 향했지만 그가 그려낸 여성들의 모습은 지극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도발적이었고 도전적이었고 농염했다. 그림 속 여자들은 클림트만이 클림트여서 가능한 여전사들이었다. 그의 뒤에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일부일처제의 관습 밖에 있었던 에밀리라는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에밀리는 그녀 자신이 당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녀와 관계는 평생을 끌었고 죽음 뒤에 클림트가 남긴 것들을 수습하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클림트의 그림을 가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금액. 그의 그림의 소유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개인 소장가의 다툼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대신 그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날을 꿈꾼다. 그는 죽음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의 후기작들에 찬란한 생명력과 대비되는 지점에 그려낸 무자비한 파괴의 징조로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불멸을 이루었다. 그림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그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당시 상류층 여성들이 클림트의 그림 속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다는 에피소드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암시한다. 그 그림과 그 그림 속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은 남을 것이라는 직감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예술은 감히 불멸을 꿈꾸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의 최전선에 있다. 그게 무용한 시도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을 꿈꾸는 통로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무의미를 뛰어넘는다. 


이미 정점에 선 클림트는 소년 화가 지망생을 만난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 궁금했고 거장은 답한다.


"재능이 많아, 너무 많아"

- 전원경 <클림트> 중


그 아이는 에곤 실레였다. 정점에서 이제 서서히 내려가야 할 사람은 떠오르는 신예를 질투하거나 깎아내리는 대신 아낌없는 찬사를 들려주었다. 이 장면을 상상하면 왠지 가슴이 아릿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에게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가는 길, 소년의 가슴은 벅차 올랐을 것이다. 저무는 세상과 이미 완성한 것들이 내어주어야 하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클림트가 죽은 모습을을 스케치로 남긴 에곤 실레는 그가 퇴장한 세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가슴 먹먹한 후일담이 결론은 아닐 것이다. 황금의 시대를 함께 누리고 그 시대의 퇴로를 함께 걸어간 예술가가 남긴 그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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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8-09-1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어요.. ㅜㅜ 아르테의 이 예술기행 시리즈는 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일단 사모으고 있습니다 ㅎㅎ

blanca 2018-09-13 03:09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이 처음인데 참 좋더라고요. 시리즈 다른 책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데미안>을 처음 언제 읽었는 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중학교 때였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 때인 것 같기도 하고 대학교 때 한번 더 읽은 것도 같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읽지 않았고 큰 감동도 없었다는 점이다. 주인공 싱클레어와 비슷한 나이대였음에도 그에게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죽기 전에 헤세의 <데미안>을 자신의 관 속에 함께 넣어달라고 말했던 어느 소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중년이 되어 대표적인 성장소설이라는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참 이상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헤세의 문장들이 하나 하나 가슴에 와 박힌다. 아직 제대로 삶을 다 살아낸 것도 아닌데 이제는 싱클레어가 왜 아벨이 아닌 그를 죽인 카인의 표적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 왜 삶을 사는 것이 외부 세계가 부여한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 자신에게 걸어가는 길의 도정이 되어야 하는지도... 사람과 삶이 얼마나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것인지 받아들여야 그 모든 어리석은 단정과 편견과 편협함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도 가슴으로 와닿는다. 
















<데미안>을 비단 거대한 은유와 추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우연히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싱클레어를 가해자로부터 마침내 해방시켜 주는 '데미안'의 등장과 그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성장하는 싱클레어의 구체적인 성장기는 혹독한 성장통을 겪은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여지가 많다. 밝고 정연한 세계에서 어둡고 엄혹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이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지 않고는, 이 도저히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지대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없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내면의 어두운 지대로 내려가지 않고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조차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많은 작가들이 결국 저마다의 서사로 풀어내려 한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닌가 한다. 비근한 예로 하루키가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내면의 어두운 우울의 풍경은 <데미안>의 그것과 닮았다. 싱클레어를 둘러싼 어두운 외부의 세계는 결국 싱클레어 내면의 자신의 그것이 투영된 것이다. 하루키가 끊임없이 형상화하려 한 부분이다.


요즘 밝고 아름답고 질서 정연한 세계가 삶의 대부분이 아님을 절절하게 알아가고 있다. 때로는 그 밝고 건강하고 무지스러운 세계로 후진하고도 싶다. 그 세계를 돌아볼 때 싱클레어가 그랬던 것처럼 때로 눈물이 흐를 만큼 심경이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결코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난 이 문장이 오래도록 아팠다. 이상스러울 만큼.


Demian had gone away. I was alone.



데미안은 떠나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새가 날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알을 부수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출해 주고 수많은 유용하고 값진 조언을 해주던 이와도 결국 작별하여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처절한 고독과 사투를 벌이며 결국 어른이 된다. 그 다음에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산다. 데미안의 엄마 에바의 말처럼 힘들지만 전적으로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고통스럽지만 빛나는 지점들을 통과한다. 그리고 또 걷는 것이다. 끝에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버티고 '나'를 맞아줄 것이다. 수고했다고, 너는 마침내 너 자신으로 돌아온 거라고, 다독여주기를 바란다.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데미안>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소년의 성장기는 중년이 되어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후일담과 만난다. 복기하지 않고는 제대로 천착할 수 없다. 그 지대를 통과하는 당사자는 그 의미와 그 행간의 암시를 알아낼 길이 없다. 그것을 다 안다면 삶은 살아볼 만한 매력과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어리석어야 살 수 있고 , 현명해져야 이해할 수 있다니 말이다. 이제 노년이 되어 다시 이 이야기를 읽어보고 또 다른 깨달음과 해석을 자아낼 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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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싫어했다. 지금도 여행을 그리 좋아한다고 할 수 없다.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 크고 낯선 곳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 여행은 다시금 용기를 준다. 다음에 또 가고싶다,는 느낌은 참 신기하고 고맙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아주 특이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자각이 좋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정도다. 


어쩌다 보니 이십 대가 태반인 패키지 여행에 유일한 가족 단위로 합류하게 됐다. 시작도 전에 가슴 한켠이 답답해왔다. 민폐 작렬일까봐. 삼십 대도 아니고 이십 대라면 상상도 잘 되지 않았다. 출발 당일, 약속 장소에 한 명씩 나타나는 젊은 친구들은 내가 내 모습이라고 여기던 모습들이어서 또 한 번 놀랐다. 나는 늙었던 것이다. 자기가 늙었다,고 자각하는 일을 그런 식으로 경험하니 뭐라고 말로 옮기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그렇게 일박 이일을 함께 했다. 


친해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피로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질문도 수다도 삼갔다. 초면인 친구들 역시 서로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청년들은 과묵했다. --;; 차 안의 수다는 주로 우리 꼬맹이들, 엉뚱한 싸움에 간간이 웃음소리가 나오는 정도. 서로 힘든 일을 맡아 하려는 자세도 놀라웠다. 한 마디로 놀라운 청년들이었다. 내가 저 나이 때 하지 못한 것, 시도하지 못한 것, 참아내지 못한 것들을 잘 해내는 젊음을 보니 또 가슴 시리도록 부러웠다. 다시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삼십 대 중반 정도로 타협하고 싶지만 그런 젊음이라면 이십 대 후반도 괜찮을 듯.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놀라운 경관 앞에서는 함께 점프 사진을 찍었다. 사진 때문에 카톡을 어쩌다 공유하게 됐지만 그렇게 거리를 지키며 함께 한 여행의 잔상이 오래 간다. 




김연수가 얘기한 청춘과 김연수가 예고한 중년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 사십 대가 되어 가장 힘들다는 그 골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한정없이 뻗어나가는 시간을 죽이는 청춘의 미학도 모든 것을 지나온 오십 대의 여유도 없다. '청춘의 문장'을 이야기했던 김연수가 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문장의 결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연재했던 글들은 한 바닥씩 조금씩 읽기 좋다. 전 세계 유명 여행지를 개관한 것은 아니고 그가 여행했던 곳중 개별적인 의미나 여운을 남긴 곳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자의 정서, 삶 그자체를 바라보는 이야기다.


작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여행과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사진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는 게 더 좋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좋은 시절, 나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시절이 이제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도, 그래서 누군가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나빴던 시절을 그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해 말하리라.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그러고 보면 여행은 삶과 참 닮았다. 지나오고 나면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힘들었던, 나빴던 시절도 결국 서사가 된다. 그것이 고이는 곳이 우리의 기억이다. 삶의 끝에 다다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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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National Book Award Finalist) (Paperback) - 애플TV '파친코' 원작/2017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
이민진 / Grand Central Pu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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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잘 견디다가도 한번씩 무릎이 꺾이는 경험을 견뎌야 하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숙제들을 안고 있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제들로 더 한층 그럴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생계나 강제징용 같은 상황으로 한국을 떠나 일본에 거주하다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는 차별과 소외의 역사다. 일단 그들의 이주는 여타 다른 나라로의 이민과는 달리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강제적이었던 경우가 많고 분단된 국가로 인한 국적 선택 문제로 인해 색깔론으로 변질되거나 이용된 경우도 빈번하다. 한 마디로 제대로 재일 일본인의 이야기가 공론화되거나 이야기된 경우는 최근까지도 극히 드물었다. 한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아닌,  재미교포 작가가 <파친코>라는 소설로 4대에 걸친 자이니치의 파란만장한 가족의 서사를 다룬 것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는 1910년 한일합병기 부산 옆 작은 섬 영도에서  장애를 가진 청년 훈이 영진과 만나 딸 선자를 낳는 얘기로부터 선자가 유부남이었던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아들 노아를 갖게 되고 어머니 영진이 운영하던 하숙집에서 만난 이삭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전개된다.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피지배 민족으로 거주한다는 건 빈곤과 멸시, 차별의 일상화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일자리는 사행산업인 파친코에서 파생된 것이 많았다. 소설의 제목 '파친코'는 이러한 재일 한국인들의 차별적 입지와 고난의 은유다. 이야기의 속도는 가파르고 인물들의 묘사는 생생하다. 개인적 삶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역사적 격랑 속에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수많은 갑남을녀의 생존과 어떻게 어우러져 흘러와 오늘날까지 왔는지에 대한 가족적 서사시다. 


작가가 이미 그 자신이 국외자라는 점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에 양날의 검이다. 일단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공감력이 설득력과 핍진성을 띠지만 한국적 정서를 백프로 이해하고 역사적 입지의 취약한 부분을 냉철하게 관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재일 한국인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전형화 하는 대목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끝부분에 이를수록 약해지는 감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역사를 끌고 가는 힘이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그 파고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저다마의 삶을 최선을 다해 지탱해 나가야 하는 다수의 익명의 평범한 이들의 잊허진 이야기와 만난다는 각성은 이야기의 전면에 유유히 흐르고 있고, 이것은 <파친코>의 큰 미덕이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도 그렇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태어나 꿈꾸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때로 절망하고 또 다시 일어나 묵묵히 걸어나가다 마침내 죽음 속으로 잊혀져 가는 수많은 그들이 비록 국경을 벗어나 있지만 내 안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값지고 뭉클한 것이었다. 영웅이 되거나 이름을 드날리지 않아도 저마다의 운명과 그 안에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그들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감동을 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마지막 선자가 돌아온 곳에서 선자가 소녀 시절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한수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애잔하다. 결국 위험한 사랑에 빠졌던 소녀가 일본으로 건너와 그 사랑의 결실을 낳고 키우고 살아나가는 인생의 여정은 피할래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자신을 배반했던 사랑과 닮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흘러간 것이다.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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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8-20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blanca님 서재에서 처음 듣는 책이고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책소개에서 작가소개 읽어보니까 이력 자체가 무척 특이하네요.
이 책도 참 관심이 가기는 하지만, 저는 blanca님 리뷰가 더 좋네요.
이 책을 읽게되더라도 그 생각은 변함 없을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8-08-21 02:1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접한 작가예요. 완성도면에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있는 작가라 일단 책장이 잘 넘어가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

감은빛 2018-08-22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선 얼핏 듣고 번역본을 보관함에도 넣어두긴 했는데,
왠지 구매가 망설여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쩌면 한국계 작가가 영어로 쓴 텍스트를 다시 번역한 책을 읽는다는 건,
왠지 뭔가 빠진 것 같고, 어딘가 어색할 것 같은 느낌.
근데 또 원서로는 읽을 실력과 여유가 없어서 시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블랑카님의 감상과 평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8-08-22 04:28   좋아요 0 | URL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한 걸요. 아, 보관함에 넣어두셨었군요. 책장이 굉장히 잘 넘어가는 책이에요. 재미있어요. 저도 분량 때문에 부담스러웠는데 금세 다 읽게 될 정도로 이야기의 힘이 있더라고요. 이 책 그 자체도 그렇지만 무언가 어떤 계기가 없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hnine 2018-09-12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표기되긴 했지만 이 책 제목을 보고 일본의 그 도박게임 빠찡꼬인가보다 담박에 알아차렸답니다 ^^
이 작가의 이전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blanca 2018-09-13 03:11   좋아요 0 | URL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안 그래도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