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렸다. 자의가 아닌 상황과 타의에 의해 하는 이사는 얼마쯤 서러웠다. 그리고 무심코 보게 된 인터넷 기사에서 당신의 부음을 전해들었다. 2011년 1월 22일.

 

 

 

 

 

 

 

 

 

 

 

 

 

 

 

 

박완서 작가의 죽음이 훑고 지난 간 4년의 시간 후, 당신의 고즈넉하고 단아한 문체를 닮은 맏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현재의 자신을 둘러싼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노작가가 세상과 작별하기 이전, 이후, 그리고 딸의 삶이 잘 버무려져 있다. 딸이 바라보는 작가는 평범하고 엽엽한 가정주부로서의 삶과 전후 시대의 질곡과 여인의 신산한 삶들을 섬세한 문장으로 갈무리한 위업 사이의 어느 지점에 가 닿아 있다. 그것은 평범한 모녀 관계에서 조금 더 나아간 일종의 경외감이 자아낸 거리. 익숙하지 않은 그 간극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를 훌쩍 키워내고 갑자기 등단하게 된 작가의 원고를 직접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여고생의 풍경이 그려진다. 어머니의 마지막, 그렇게나 완벽하고 단단해 보이던 여인이 이제 마침표를 찍기 위에 풀썩 주저앉은 자리는 의외로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않았기에 안심이 되었다. 이제 딸들은 작고 약해진 어머니를 마음껏 사랑하고 어루만지며 아쉬움과 회한을 달랜다. 그리고 어느 새벽, 이삿짐을 기다리며 몸을 뒤채며 내가 보내던 그 신새벽, 나의 첫아이의 태교의 지문을 주었던 다감하면서도 엄격할 것 같던 소설가 할머니는 생의 소임을 다하고 훌쩍 사라져간다.

 

작가들이 태어남과 길러짐의 모호한 지점에 서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로맹가리의 이야기처럼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려는 특별한 소명의식 때문인지 유달리 어머니와의 추억과 석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에서 기억에 각인처럼 남은 몇 작품들.

 

 

수전 손택의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은 살아 있는 지성으로서의 그녀의 신화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하고 작아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모습에 대한 아들의 시선은 절절하다. 가장 명료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세상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던 그녀의 이지러짐은 그래서 더더욱 슬프고 또 애끓는다. 자신에게 닥친 병조차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그 해답을 구하려 했던 그녀의 시도들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 그녀의 저작들, 그녀의 삶과 지근거리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녀가 없어져 버린 거리에서 아들은 정작 했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되짚으며 자책한다. 그 누군들 이러한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참 신기하게도 이 흑백 사진 속 어머니의 옆모습에서 나는 친정 엄마의 미소를 발견했다. 엄마가 젊었을 때에도 이런 옆모습, 이러한 느낌이었다. 잘 웃지 않아서 미소로 들어가는 관문의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수줍었다. 종군기자인 아들이 고백하는 어머니와의 내밀한 순간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것이 지는 지점에서는 너무나 눈물겨워 한번에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 군데 군데 삽입된 흑백사진들이 가두어 놓은 찰나들은 도저히 시간의 결 속에 고여 있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어머니는 25년 간이나 정신병으로 아들을 보살펴 주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서는 말 그대로 무너진다.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노숙인처럼 입성이 추레해진 이제는 도저히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늙고 병든 여자 앞에서 또 그녀의 죽음 앞에서 그가 정신이 명료한, 젊은, 온전한 엄마를 되찾기 위해 엄마의 요리 레시피를 찾아 그녀의 그 따스했던 부엌을 다시 복원해 낸다. 애도와 추모의 과정은 한 인간의 성숙의 여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고백은 뼈아픈 것이지만 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탈피와 성장의 노래이기도 하다.

 

 

 

 

 나이들어 노망난 여자와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로 합쳐 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에 대한 연가는 사실 모든 어머니에 대한 글쓰기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젊고 여자의 향기가 바래지 않았던 젊은 엄마의 품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걷고 뛰고 자라나서 마침내 우리보다 더 작아지고 약해지고 혼미해진 늙은 여인의 슬픈 뒷모습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다가간다. '그녀'라는 3인칭은 애써 그녀를 객관화하고 그녀와 나와의 거리감을 만들면서 동시에 좁히려는 그 헛된 시도의 응축일런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는 아니 에르노만의 것이 아니라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화장실에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를 들고 들어갔는데 맞춤하게도 그 안에 저자의 어머니 박완서의 에세이집 <세상에 예쁜 것>이 꽂혀 있었다. 묘한 기분. 딸의 글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커다란 아쉬움, 회한 대신 어떤 충족된 애착, 존경심, 애정이 느껴져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 속에서도 지나친 고통이나 쇠락을 떨구지 않고 가 뒤에 남은 이들의 부책감을 줄여준 노작가의 단정한 모습이 그의 작품 같아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그러고 보면 이별도 만남 만큼이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맞잡은 손을 놓을 때 비로소 '나'와 '당신'의 관계는 완결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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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3-21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사시는 곳이 서울이 아니신가 봅니다.
서울은 눈이 안 온 것 같은데...

이렇게 쓰시니 뭉클합니다.
저의 엄마는 건강하신 편이긴한데 꼭 요맘 때 한번씩 병을 앓곤 하죠.
며칠 전에도 그냥 안 지나가시더라구요.
예전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요즘엔 부쩍 마음이 무겁고 걱정이 앞서더군요.
저러다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죠.

저는 세번째 책은 읽은 적이 있는데 생각 보다 크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런 책 좀 많이 읽어 둘까봐요.
언젠가 저도 엄마와 헤어질 날을 위해...ㅠ

blanca 2015-03-22 09:22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제가 혼란을 드렸나 봐요.^^;; 2011년 1월 이삿날에 눈이 오더라고요.
부모님이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참 쓸쓸하고 무서워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건한 모습이 되기란 힘든가 봐요. 아니 에르노 책은 사실 우리의 정서와 안 맞는 노골성, 냉정해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 더 와닿았어요.

몬스터 2015-03-21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며칠 전에 ˝ Still Alice˝ 란 영화를 눈물 흘리면서 봤어요.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여성의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데 , 내 엄마가 마음에 걸려서 내내 울면서 봤어요. 글 읽으면서 제 엄마와 나의 추억을 생각해 봤어요. 많이 늦기 전에 더 많이 만들어야 되는데.

blanca 2015-03-22 09:2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몬스터님. 저는 아쉽게도 보지 못한 영화인데 들려주신 내용만으로 슬퍼지네요. 예전에 소설가 박민규가 인간인 것만으로 연민을 느낀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실감해요. 유한한 삶 앞에서 너무 무기력한 부분이 있어서요. 저도 몬스터님도 가족들과 순간 순간에 집중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15-03-22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라는 말만 들어도 때로는 가슴 따뜻하고, 때로는 짠해지지요.
연로하신 친정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살아서 자주 보는 편인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라 못가네요. (건강에 안 좋다고 오지 말라고 하세요.)

어머니와 관련한 책만 모아서 완결된 페이퍼를 잘 쓰신 것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

blanca 2015-03-22 15:00   좋아요 1 | URL
페크님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같은 서울이기는 하지만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해서 엄마가 고생이랍니다. 오늘 미세먼지 너무 독하네요. 이 좋은 봄날 벌 서는 것처럼 갇혀 있어야 해서 참 속상하네요.

세실 2015-03-26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의가 아닌 상황과 타의에 하는 이사....저도 경험했기에 많이 서러웠고, 많이 울었답니다.
두 어머니, 아니 네분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때로는 버겁지만, 좀 더 열심히 찾아뵈려고 노력합니다.
나중에 덜 후회하려구요. 이별은 아직 낯설기만 합니다.

blanca 2015-03-28 21:32   좋아요 0 | URL
저는 특히 한겨울이었고 한달만에 이사갈 집을 구해야 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세실님도 그러셨군요. 네분의 부모님이 건강히 생존해 계신다는 것 참 행운이고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려 합니다. 세실님은 이미 그러고 계신 듯해요.
 

'화양연화'의 뜻을 찾아보니 인생의 가장 찬란한,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말이다. 이승환의 뮤직 비디오를 보니 그의 화양연화는 지금 이 순간인 듯 그를 꼭  닮은 할아버지 보컬의 밴드가 회고하는 현재의 이승환의 모습이 빛난다. 가사는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인 듯 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우리가 보내버린 찬란한 젊음, 흘려버린 찰나들의 은유가 보태어져 있는 듯하다. 동명의 영화는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대신 장만옥이 가장 외면적으로 빛났던 순간들의 이미지들이 떠돌아 다닌다.

 

 

 

 

 

 

 

 

 

 

 

 

 

 

 

 

 

플로베르의 '화양연화'의 단서는 여기에 있다. 카프카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꾼 꿈은 놀랍게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을 큰 소리로 읽으면, 그 소리가 벽에 부딪혀 반향되는 것이었다고 한다.(제프리 월의 서문 참조) 1840년, 갓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프레데릭 모로가 홀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는 플로베르의 평생을 지배하다시피 한 연상의 귀부인에 대한 첫사랑이 강렬하게 투영되어 있다. 근대 파리에서 청춘이 어떤 치기, 무모함, 어리석음의 조류에 흔들리며 권력, 명예, 돈에 물들어갈 때에도 결국 프레데릭을 가장 매혹하고 힘들게 한 것은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그녀였다.

 

솔직히 <감정교육>의 주인공인 프레데릭 모로는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남자 주인공들 중 가장 비호감인 면이 있었다. 양다리는 기본에, 심지어 문어발까지 서슴지 않으며 '내 맘을 나도 몰라'란 무책임한 언사에 매춘부와 동거까지 하면서도 권력이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자리에는 젠틀한 척하며 참석하고 부르주아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향유하며 민중의 편에 선 듯한 가식적인 행태들은 역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어쩌면 지금까지 소설 속에 등장한 사람들 중 가장 사실적이고 그렇기에 가장 덜 매력적인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꿈꾸는 인물은 이야기에서 난무했지만 정작 난무하는 사람의 모습은 그러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누구나의 마음 속의 가장 못난 구석들이 청춘과 만나면 빚어지는 형상이 플로베르에 의해 그려진 이 사내일까. 지나치게 사실적인 이야기들은 때로 역겹게 느껴진다. 주춤, 주춤, 프레데릭 모로와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하며 힘겹게 그의 비속함, 비열함에 동행한다.

 

마침내 그러나 다행히 왜 카프카가 이 이야기를 낭독하는 꿈 속에 헤매었는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프레데릭이 '만물이 수렴되는 빛의 중심'으로 여겼던 아르누 부인과의 늦은 재회. 그녀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렸다. 이 재회는 프레데릭의 청춘의 출발점에서 이미 예정된 결론처럼 담담하지만 더없이 낭만적이다. 일종의 체념, 회한이 훑고 간 자리에서 프레데릭은 자신과 함께 가기도 하고 때로 어긋나기도 했던 절친과 함께 둘의 삶을 회고한다. 그들이 정작 '화양연화'로 추억한 시점은 흥청망청 쾌락과 권력과 명예에 탐닉했던 청춘이 아니라 모호하고 미진하고 순수했던 소년 시절의 작은 일탈의 공모의 순간이었다. "그때가 제일 좋았지!"라는 이제는 늙어버린 친구들의 회고는 어쩐지 눈물겹다.

 

어리석음에 무모함에 대한 회한이 남지 않는 과거는 이미 늙어버린 과거다. '화양연화'에는 그래서 반드시 실패와 좌절과 아쉬움이 남아야 제맛이다.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화양연화'로 만들어 버린 이승환의 뮤직 비디오가 근사하게 느껴지면서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반드시 과거의 환영 속에 모호함 속에 돌이킬 수 없음의 휘장을 걷고 걸어 나와야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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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17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젊은 주인공도 <감정 교육>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유사해요. 시대적 배경도 비슷하고(두 소설 다 프랑스 19세기 중반일 겁니다) 속물적인 인간들이 등장해요. 주인공도 어떻게든 부르주아 사회에 편승해서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서 부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가 발자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19세기 프랑스의 어두운 사회상을 잘 표현했어요. 소설이 오래돼서 지루할 법한데 재미있어요. 씁쓸하지만 소설 속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니까요.

blanca 2015-03-18 10:08   좋아요 0 | URL
아, cyrus님, 저도 발자크 <고리오 영감>이 떠올랐어요. 미처 시대적 배경의 유사점은 몰랐었는데, 음, 그렇군요. 모옴의 <인간의 굴레>도 비슷한 구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감정교육>은 이상할만치 플로베르 자신의 이야기의 고백처럼 느껴졌어요. 어떤 느낌, 감정보다는 주인공의 행동들, 그 행동을 둘러싼 주변 정황에 치중하는 게 마치 좀 자신의 내면을 얘기하기에는 멋쩍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착각일 수도 있지만요. 맞아요, 사실 이런 속물성은 인간인 이상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다락방 2015-03-1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별로 관심갖지 않았었는데 말이에요. 블랑카님이 말씀해주신 프레데릭은 모파상의 벨 아미와 겹치는 것 같아요. 캐릭터적인 면에서요. 하아-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나 많군요. 저 오늘 읽던 책 다 읽을 것 같아 새로운 책도 한 권 챙겨가지고 왔는데, 그것들 다 치우고 이 책을 읽고 싶네요.

blanca 2015-03-18 10: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벨아미>는 저도 너무 좋아하는 책인데, 이 책은 뭐랄까, 지극히 사실적이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푹 담기는 맛이 좀 부족했어요. 하지만 마지막 대목이 너무 좋아서 모든 단점을 상쇄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뭉클했어요.

아, 다음 읽을 책이 없으면 항상 초조해요. 저는 요새 왜이리 책이 더디게 읽히는지 모르겠어요.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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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먼로에게는 단편만을 쓸 수 밖에 없는 데에 대한 일종의 무력감이 있었지만 트루먼 커포티는 단편이 현존하는 산문 중 가장 어려우면서 절제된 형태라고 칭송했다. '단편'은 분량의 압축 뿐만 아니라 고도의 응축이 일어나야 공간의 한계를 이길 수 있다. 자칫하면 회색 지대에서 부유하기 쉬운 형태, '삶의 이야기'는 멈칫하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해야 비로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고 한다면 <환상의 빛>의 미야모토 테루는 빛난다.

 

바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파도의 잔물결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환상의 빛>의 어제 서른두 살이 된 그녀의 시아버지가 "멀리 있는 사람을 속인다."고 이야기한 그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어서다. 젖먹이를 두고 전차 선로 위를 스스로 걸어나가 죽어버린 남편에게 하는 혼잣말들. 그녀는 이미 쇠락한 어촌의 '새 남편' 곁이다. 이 이야기 안에는 죽은 남편, 재혼한 남편과 함께 하는 환상의 빛이 떠도는 바다, 그리고 '가난'에 사무친 어린 시절, 그 속에 노망 난 할머니의 가출이 수시로 교차하고 어긋나며 젊은 여인의 신산하고 처절한 삶의 근저에 있는 '존재'와 '삶'에 대한 이해의 비말을 분출한다. 그녀가 수시로 자문하는 남편의 자살의 이유는 구태여 정확한 '답'을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함께 했던 삶을 해석하고 현재의 삶에 통합하기 위한 작은 여인의 몸부림이다. 보여지는 그녀의 삶은 화려하지 않지만 전남편의 죽음과 비로소 화해하는 그녀의 '찰나'는 이 작품의 아름다운 마침표다. 마치 한 편의 정제된 산문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이제 곧 쉰이 되는 아야코는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다 일년 전에 아들을 사고로 잃게 된다. 하숙을 치려 했던 아들 방에 하루 묵겠다고 다짜고짜 온 청년이 다시 갓 결혼한 아내까지 데리고 왔을 때 그녀는 황망함에도 그들을 내치지 못한다. 가난한 신혼 부부가 벚꽃이 보이는 곳에서 소원대로 아늑한 초야를 치루는 건너편에서는 그녀가 밤새 밤 벚꽃에 몸을 담근다. <환상의 빛>의 어제 서른두 살이 된 그녀가 암흑의 바다 위를 떠도는 환상의 빛을 보며 알 수 없는 환희를 느꼈듯이 <밤 벚꽃>의 아야코는 꽃비를 맞으며 표현하기 힘든 찰나의 깨달음에 몸을 떤다. 비애를 머금은 환희는 아마도 우리 모두의 삶의 동력 그 자체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불량했던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떠나는 원정에 동행했던 모범생은 지금 불륜 행각의 가운데에 있다. 우연히 그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그는 그 시절 그 친구의 비행의 세계에서 도망쳐 오며 느꼈던 당혹감과 지금도 무관하지 않은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어둑시근한 그때 우연히 봤던 <박쥐>의 모습과 소리는 지금의 축축한 '낙엽'위에 다시 돌아온다.

 

마지막 <침대차>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 '미생'의 직장인들의 처절한 생의 고투 현장 한복판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가 절창이었다. 기계 제조업에서 어쩔 수 없이 영업까지 해야 하는 주인공의 곁에 어느새 파트너로 상사로 내려 온 그가 사무실의 석양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은 침대차 동승객 노인이 한없이 흐느끼던 그 어깨와 닮아 있다. 뒤켠에는 누구나 나약하고 작은 인간으로 생의 가혹함을 밀고 나가며 살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삶 전체를 목격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를 우연히 사고로 잃을 뻔한 기억이 있다. 친구와는 그 일로 소원해지고 그 친구는 그렇게 힘들게 목숨을 건졌건만 젊은 시절 다른 경로로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다. 부모가 없는 그를 키워냈던 친구의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환자 대 의사로 만나며 '나'는 회한에 잠긴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있는 생의 격류. 도시락을 먹으며 출장지로 향하는 기차 안의 담담한 '나'의 모습은 내가 또 그렇게 틈새에서 살아나갈 것임을 예고한다.

 

구체적인 것과 단정적인 것과 멀어지면 보이는 것들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들 속에 갑자기 아연해져 버렸다. 이 사람은 무언가를 알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을 선뜻 다 꺼내 보여주지는 않는구나, 그리고 그 신중한 몸짓 이면에 간직한 것들이 언뜻언뜻 속살처럼 내비칠 때 우리는 그만 쓰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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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26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5-02-2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를 보면 ˝리뷰는 이렇게 써야 하는데˝란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끝맺음을 특히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리뷰 쓰는 게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줄거리를 조금은 얘기해야겠는데 스포일러를 주면 안되고.저도 님처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어요 그런 건 타고나는 걸까요ㅠㅠ

blanca 2015-02-26 17:3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아마 저만의 편견, 아집 같은 것들로 작가의 작품을 작가 의도와 다르게 파악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저는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주는 듯해요. ^^;; 그 부분도 고려를 해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15-03-02 22:30   좋아요 0 | URL
아네요 블랑카님 리뷰는 스포일러 거의 없어요 읽고싶을 만큼만 살짝 보여주는 그런 멋진 리뷰에요

Nussbaum 2015-02-2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면서도 의미있는 리뷰, 다른 일 하다가 좀 머리가 복잡해져서 blanca님 서재에 들렸는데 머리를 정리하고 갑니다.
마침 이 책도 관심있어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구나 하고 생각도 하고 말이죠~

blanca 2015-02-26 17:40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참 좋더라고요. 원래 여행지에 들고 가기만 했는데 의외로 거기에서 흠뻑 빠져 제법 읽고 왔어요. 분명 태어나는 작가, 태어나는 작곡가가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여전히 놀라고 감탄할 것들이 있다는 게 새삼 참 기쁘네요.

2015-03-01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한성에 관한 사유들
빅터 브롬버트 지음, 이민주 옮김 / 사람의무늬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요즘 책을 소장하는 데에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살아 온 시간 만큼만 더 살면 어쩌면 나는 너무 노쇠해서 그 책들을 다읽지 못할 수도 있고, 이런 상상은 지극히 슬프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 처분에 대한 번거로움이 고스란히 남은 사람들에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막무가내로 욕망하고 쌓을 나이의 능선은 이미 넘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내가 죽는다','나의 삶이 유한하다'는 명제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느낀 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계절의 변화도 좀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영원히 이 계절의 순환을 볼 수 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냄새는 때로 가슴에 아린다. 그럴 때 듣는 이러한 얘기는 좀 더 경청할 수 있다. '유한성에 관한 사유들'은 과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명문대의 비교문학과 석좌교수. 그는 두 세계대전 사이에 태어나 실제 전쟁에 참전했고 함께 살아 남았던 동료들이 그를 제외하고 다 죽어버릴 만큼 나이가 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삶의 유한성'을 의식했고 최근에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 만큼 더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다. 게다가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무존재를 거부할 수 있게 해 주는" 예술 중 특히 문학을 연구하고 강연한 세월이 사십 년에 이른다. 저자 빅터 브롬버트는 19,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 여덟 명의 작품들을 원어로 읽고 그들이 천착했던 삶의 유한성을 그들의 개인 이력과 그들의 언어와 조우하는 지점에 중개자로 선다. 대단히 신중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보물찾기할 때 아주 꽁꽁 숨겨 둔 보물 만큼이나 쉽게 찾을 수 없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그도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서술 시점에 서 있음으로써 이야기의 일반화에 성공했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다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고 몰입할 수밖에 없는 미덕이다.

 

톨스토이, 카프카, 카뮈, 버지니아 울프,  조르지오 바사니, 쿳시, 프리모 레비. 구태여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그들의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친절한 노교수의 강의는 가슴을 파고든다. 읽었다면 혹시 읽고 있다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 군데군데 있다. 왜냐하면 독서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일인데 친절한 안내자가 내가 헤매거나 의아해하는 대목, 한 조각 꺼내어 주머니에 넣어 버리고 싶은 부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 내어 언어로 풀어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고찰을 죽음에 대한 묵상이나 암흑의 세계에 대한 집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린다는 건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간의 유한한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도덕적인 고민을 한다는 뜻이다.

-에필로그 중

 

저자가 매료되어 있는 몽테뉴의 관심사는 본질이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행'이었다는 것, 스스로를 "나는 지나감을 그리는 사람이다."라고 했던 것은 저자가 여덟 작가들의 작품과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과 만난다. 결론, 본질, 이데올로기, 관념이 해체되고 남은 모순, 흔들림, 스러짐에 대한 천착이 눈부시다.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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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간과 관련된 문화사나 과학 분야 도서를 읽는 중인데 우리에게 딱 주어진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비록 유한성의 한계가 있더라도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blanca 2015-02-18 09:17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 님은 충분히 젊고 또 제가 그 나이 때 낭비한 시간들을 생각하면(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님의 독서의 깊이와 넓이가 참 부러워요. 저도 `시간`에 관련된 책 참 좋아해요.

2015-02-1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8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2-18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은 글도 잘 쓰시지만 제가 느끼는(블랑카님의) 장점중 하나가 성실하시다는 거에요!!!
이 책 읽으시고 계시다고 북플에 올라온 것 봤는데 벌써 읽으시고 이렇게 멋진 리뷰도 쓰시고!!^^

blanca 2015-02-18 09:18   좋아요 0 | URL
비비아롬나비모리님, 흑, 제가 추구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오늘 아홉 시에 일어나버리고 말았어요. 지금은 망연자실, 황당 모드랍니다.--;;

세실 2015-02-18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권의 책을 읽기전 또는 읽고 난후, 친절한 안내자의 설명을 읽어보면 공감하는 부분이 참 좋더라구요~~

유한한 생!
요즘은 그저 아이들이 잘 커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네요. 제 삶보다는....

blanca 2015-02-18 09:21   좋아요 1 | URL
아이들 잘 커 주는 게 이게 참 너무 많은 변수와, 나의 희생과, 각종 주변 여건의 도움이 필요한 거더라고요.
아직 아기인데도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예쁘기도 하지만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장소] 2015-03-29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겨울나기전..책을 근근히 사 정말 볼정도만 사보던 제가있고..겨울나고선..
책에대해선 생각..아..이책들을 다봐야 죽을 수 있을 거같아..랄까요.
그 전엔 당장이라도 정리될 수있게 최소한의 ..살림늘리기를 주저한 반면..지금은 변했죠.남겨줄게..책밖에 없어도..그러면 놓겠다고.그럼 어떻겠냐고..

blanca 2015-03-30 10:16   좋아요 1 | URL
저도 또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마구 늘어나며 절제하려던 다짐이 무너지는 중이랍니다. ㅋ
 

서머싯 몸의 소설은 다 읽기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다. 문체는 간결하고 알기쉽고 인물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곁에서 살아 숨쉬는 것같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 <달과 6펜스>, 마치 서머싯 몸 자신이 보고 듣고 개입한 것처럼 한 청년의 구도의 여정을 지척에서 그린 <면도날>, 그리고 자서전은 아니지만 그 안의 정서는 모두 자신의 것이라 고백한 자전적인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아홉 살 절름발이 소년이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잃고 사제인 큰 아버지에게 맡겨져 엄격한 기숙학교에서, 독일, 런던, 파리, 다시 런던에서 사제, 화가, 회계사, 의사의 진로를 두고 방황하며 서른 가까이까지 친구, 은사, 멘토, 연인을 만나 사랑하고 우러르고 실망하고 헤어지고 웃고 울며 성장해 가는 궤적은 작가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지난 날과 닮아 있기도 하다. 주인공 필립이 이 여정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영생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상을 좇으면서 현실에 발목잡히기도 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물질적 향락에 기대기도 하는 모순과 불합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의 인간 군상이다. 특히 필립이 비열하고 얕은 여자 밀드레드에게 끊임없이 농락당하면서도 다시금 그녀를 받아주고 그녀에게 이용당해 주는 모습은 그 세계의 바깥에서 지켜보는 나의 눈에 마뜩찮아 보이고 한없이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그 상황과 그 나약함,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음에서 나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필립은 점차 자신의 삶에서 조금씩 물러나 그림을 감상하듯 삶의 정경을 이해하고 알아차리려 한다. 과연 이 굴레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분명히 머리와 관념과 이성이 있는데 인간의 선택은 또다시 상황에 내몰려 어리석음으로 치닫는 이유는 뭘까. 아니, 이렇게 태어나 고생하고 죽는 삶이라는 게 과연 가지는 의미와 의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술주정뱅이 시인 크론쇼가 선물한 페르시아 양탄자의 그 정교한 무늬들이 과연 의미하는 삶에 대한 대답은 무엇일까. 서머싯 몸은 섣불리 이 대답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는 답없음, 아니 답이 불가능한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법에 대한 길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필립은 자신을 이용하고 농락하는 밀드레드가 또다시 거리의 여자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고 그녀를 받아준다. 한때의 어리석은 사랑도 그녀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상황 속에서 그녀가 무기력하게 신산한 삶의 노예가 되었음을 연민으로 이해하고 용서한다. 분만 왕진을 하며 만나게 된 하류층 사람들의 출산을 도우며 그들의 사랑, 고난, 죽음을 목격하며 그는 그야말로 하나 하나 밀려오는 삶의 경험과 체험을 절절하게 겪고 받아들이고 느낀다. 이제 그는 섣불리 삶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고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해 간다.

 

홉농장에서 한때 자신이 일하던 병원의 환자였던 유쾌한 허풍쟁이 애설니의 딸 샐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많은 말이 필요없는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다. 서머싯 몸이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대답은 바로 이런 것. 필립은 실패한 저열한사랑들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건강하고 어린 풀의 싱싱한 내음이 나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생울타리 밑에서 입을 맞춘다.

 

이야기의 중간에 나오는 어느 동방의 왕이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어 현자에게 오백 권의 책을 요약해 오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다 마침내 한 문장으로 받은 내용은 이러하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이 단순 명료한 이야기가 가장 완전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희극이기도 하고 하나의 형형한 실재이기도 하다. 잘 모르겠다. 필립이 그렇게나 꿈꾸었던 스페인 여행의 꿈을 접고 샐리의 남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정말 가장 간명한 삶에 대한 태도의 전범인 지는. 서머싯 몸은 나의 나이 언저리에서 필립을 만들었고 훌쩍 더 나이들어 인간과 삶에 더 큰 의미와 의의를 부여하는 현장에서 <면도날>의 래리를 창조해 냈다. 그저 삶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라는 허무한 결론에서 어쩌면 인간이 지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더 큰 차원에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는 죽음으로 더 한 발짝 전진했을 때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몸짓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작품도 작가와 더불어 변전하고 늙고 성숙한다. 그 흔적을 찾아 보는 것도 또다른 읽기의 즐거움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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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5-02-0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2014년의 발견이었어요. 인생의 베일도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면도날을 읽으며 감동이 철철...더 많은 글을 남겨주지 않은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에요 ㅠㅠ

blanca 2015-02-09 19:2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면도날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어젯밤에 서머싯 몸 소설 검색해 보니 번역 안 된 게 많더라고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쉬운 대로 <과자와 맥주> 빨리 읽어보고 싶어요.

moonnight 2015-02-0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 달과6펜스를 접했을 때 마음을 홀딱 뺏겼었지요. 감히 내 인생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부끄럽게도ㅠㅠ 서머싯 몸의 작품을 읽은 게 별로 없네요. blanca님 덕분에 올해 새로운 독서계획을 세워봅니다. ^^

blanca 2015-02-09 21: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도 달과 6펜스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런데 혹시 면도날 안 읽어보셨다면 꼭 읽어보세요. 흑,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강력 추천드려요.

moonnight 2015-02-09 21:30   좋아요 0 | URL
네 면도날 꼭 읽어볼거에요. 불끈ㅠㅠ; 심지어 소장`은` 하고 있다는ㅠㅠ;;;;;

라로 2015-02-10 03:5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ㅎㅎㅎ 달밤님!!!!!ㅋㅎㅎㅎㅎㅎ넘 재밌으셔~~~~ㅎㅎㅎㅎ
저도 면도날은 꼭 읽어볼게요!! 저 달과 6펜스 최근에 읽었는데 넘 좋았어요. 면도날 기대됩니다!!!저도 올 해는 몸의 작품을 다 찾아 읽으려구요~~~ㅋ

붉은돼지 2015-02-0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은 아직 이지만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는 분명 읽었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ㅜㅜ
제가 읽은 건 다 어디로 가셨는지...

blanca 2015-02-09 21: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ㅋㅋ 이제는 제 자신을 못 믿을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

cyrus 2015-02-0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의 작품을 거의 읽으셨으면 <어센덴>이라는 소설을 권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스파이 소설로 알고 있어요. 단편집인데 블랑카님의 취향에 어울릴지 모르겠어요. ^^

blanca 2015-02-09 23:10   좋아요 0 | URL
의외로 서머싯 몸이 단편을 많이 썼던데 저는 한 편도 제대로 못 읽어 봤어요. 기회가 되면 찾아 볼게요^^

[그장소] 2015-02-10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대기중..ㅎㅎ

blanca 2015-02-10 13:14   좋아요 0 | URL
와, 첫만남이 부럽습니다.

Alicia 2015-02-1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문장, 사람의 내면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통찰력,.. 저는 서른이 다 되어서 달과 6펜스를 읽었는데 읽어도 읽어도 좋더라구요. ^-^

blanca 2015-02-11 11:26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인터넷에 찾아보니 몸이 여성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가라는 평도 있더라고요. 저도 <달과 6펜스>를 최근에 다시 읽었어요. 어렸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었어요.

마녀고양이 2015-02-1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서머셋 몸에 대한 글을 보니 너무 반가와요.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책들을 사놓고.... 그저 쟁여놓았다눈... 아하하.
그래도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친구 입에서 들을 수 있을 때는 행복하네요.

blanca 2015-02-13 15:12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작가가 겹치는 일만큼 이 알라딘 서재에서 반가운 일이 또 있을가요? ^^ 번역안된 작품에 많은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

페크pek0501 2015-02-16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모두 제가 읽은 책이라니...
아, 모두 제가 쓴 글에 인용한 적이 있는 책이라니...
서머싯 몸의 작품은 다 읽기로 했거든요.

몸의 광팬으로서 님의 페이퍼가 무척 반가웠다는 것을
늦게나마 밝힙니다. ^^ 반가운 글이에요. ^^

blanca 2015-02-16 15:00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저 요새 몸앓이 중이에요. 정말 <인간의 굴레> 다 읽고 무언가로 한 대 엊어맞은 느낌. 막 눈물 나려 하고... 그래서 막 다 찾아 봤는데 우리나라에 번역 안 된 작품이 왜이리 많을까요? 짧은 자서전도 있고. 아마존에서 몇 번이나 주문하려다 역시 나는 무리다, 하며 포기했는데. 지금도 어떻게 할까 고민중이랍니다. 너무 읽고 싶은데 원서를 제대로 소화하긴 힘들 것 같고 해서요.

앤의다락방 2015-02-17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책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아... 또 읽고싶은 책이 늘었네요 ㅋㅋ 북플하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들 책을 많이 소개받(는 느낌이랄까요..)게 되니 북플하는 재미 또한 쏠쏠합니다^ ^

blanca 2015-02-17 16:30   좋아요 0 | URL
앤의다락방님! 축하드립니다. 아직 읽으시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읽으면서 가지게 될 기쁨이나 설레임이
얼마나 클까요. <면도날>부터 시작하셔도 괜찮고 <달과 6펜스>도 재미있어요. 무엇보다 몸의 소설들은
아주 재미있어요. 어서 서머싯 몸의 세계로 들어오세요.^^

transient-guest 2015-02-2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문학책은 무슨무슨 문학전집 세트 또는 단권으로 나오던 시절에 `달과 6펜스`를 사서 읽었어요. 중학교 때였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 뒤로도 다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네요. 그저 `달과 6펜스`라는 제목에서, 그리고 그런 책을 읽는 저 자신이 뿌듯했던 것이 생각나요.ㅎㅎ 조만간에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네요.

blanca 2015-02-21 14:55   좋아요 0 | URL
저는 아마 고등학교 때 여동생과 함께 읽었을 거예요. 정말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스트릭랜드`라는 주인공의 성도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안 와서 의아했어요. 서머싯 몸을 좋아하지만 <달과 6펜스>가 그의 베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