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 - 빗소리가 어떻게 풍경을 보여주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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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가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같다. 칠판에 판서한 글씨를 알아보기 힘겨워졌다. 시력 검사를 통해 0.3정도 된다는 얘기에 안경을 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주 기뻐했던 철없는 기억 이후로 근시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3디옵터까지 떨어졌다. 대학 합격 소식에 제일 먼저 렌즈를 시도했고 결막염과 각막염이 번갈아 오는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좀 더 예뻐 보이고자 두꺼운 안경을 감추어 두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영 렌즈착용이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심지어 낀 채로 잠이 들기도 해서 토끼눈으로 기상하기도 하며 눈건강은 더욱더 나빠졌다. 그러다 드디어 라식수술이 해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작용이 걱정되어 여러 번 망설이다 결국 수술을 받았고 거기에 따른 경미한 부작용도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지금도 수술을 받고 안경 없이 핸드폰의 문자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던 그 첫 느낌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눈을 뜨는 기분 만큼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 근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근사한 느낌이었다.

 

'읽기'에 중독된 나로서는 사실 눈이 나빠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 노안도 그렇고 고도 근시가 있었기에 거기에 따른 각종 합병증도 두렵다. 보르헤스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시간이 죽기 전에 올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나의 바람은 늙어서도 죽음을 앞두고서도 제발 보고 읽는 능력 만큼은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과 계통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저자인 올리버 색스의 문장은 나를 거의 항상 압도한다. 수와 언어에 대한 능력은 같이 가기 힘들다는 생각에 그 둘이 한데 모인 지점에서 빚어내는 그의 이야기들의 진지함과 섬세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최근에 안구 흑색종의 전이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슬프다.

 

이 책의 헌사가 바쳐진 이는 그의 안구 흑색종을 진단하고 수술한 한때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올리버 색스는 '뇌의 가소성'을 이야기한다. 삶을 살다 갑자기 맞닦뜨린 불운, 그것이 하필 우리의 지각 체계를 망가뜨리거나 교란시켜 보고 듣고 말하는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과연 우리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대답들은 하나 하나의 아름다운 영화 같은 사례다. 어느 날 갑자기 악보를 보지 못하게 된 피아니스트, 항상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던 여인이 언어를 상실 했을 때, 읽고 쓰는 게 주업인 작가가 갑자기 읽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 앞에는 절망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가 인용한 찰스 디킨스의 표현인 '부활'의 세례가 그들에게도 내려진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족들의 혹은 지인들의 지지와 격려, 삶에 대한 사랑과 애착 등이 뇌의 지형도를 변화시켜 다른 지각 기능의 강화와 보조로 잃어버린 것들을 대체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말을 할 수 없어도 그러한 이들을 위해 저자가 본인의 장애를 딛고 만들어 낸 어휘집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친구들과 대화하고 세상과 교류하고, 이제는 눈으로 언어를 읽어내는 대신 오디오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새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은 상실이 아니라 기존까지 가져왔던 온갖 선입견, 허위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 새로운 가치관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올리버 색스 자신이 암 선고를 받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에 대한 솔직한 일기도 나온다. 이제 환자의 입장에 서게 된 그는 그렇게나 세상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보며 즐거워하고 읽는 기쁨이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었던 나날들을 포기해야 하는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체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제 그는 세상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으로 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사각지대가 생기고 눈으로 보며 즐거워했던 공간은 그에게 변형되고 왜곡되어 다가온다. 넘어지고 실수하고 착각하는 나날들 앞에서도 그의 위트는 이제 세상을 정물화처럼 인식하게 된 새로운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그가 서신을 교환했던, 제대로 교정되지 않은 사시 때문에 세상을 평면적으로 인식하다 드디어 내리는 눈 가운데에서 3차원의 세상을 경험하며 전율했던 한 여인과는 정반대의 경로에 선 그의 솔직한 투병기는 서글프기도 하고 장엄하게 느껴진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서 그 체험들을 온전히 껴안고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언어화하려는 그의 노력 덕택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한 걸음씩 뚜벅 뚜벅 걸어나가고 마침내 슬픈 종지부 앞에 섰음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그의 담대함이 존경스럽고 뭉클했다.

 

그의 트위터 계정에는 자신의 자서전 표지를 장식했던 근육질의 청년이 오토바이 위에 위용도 당당하게 타고 있는 근사한 사진이 떠 있다. 이제 그 용감하고 건장했던 청년은 시력을 잃고 생을 사랑과 신뢰로 채웠음에 감사하며 퇴장하려는 길목에 서 있는 노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은 행운이었다는 고백은 그가 우리들에게 남기고 가는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메시지가 될 것같다. 지뢰밭 같은 삶을 겁쟁이처럼 미리 땡겨 걱정하고 초조해하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던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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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1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몇 십 년 후에 노안이 찾아오면 책을 못 읽을까봐 걱정이에요. 제가 대학생 때 렌즈를 잘못 착용해서 시력이 심하게 나빠진 적이 있었어요. 안과에 검사를 받았는데 만약에 렌즈를 장시간 착용했으면 각막이 손상했을 거예요. 안경을 껴도 책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니까 정말 아찔했어요. 하필 그때가 시험 시간이라서 공부가 잘 되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시력이 회복되지 못할까봐 걱정만 했어요. 그 이후로 시력 건강에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blanca 2015-05-17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렌즈로 각막이 손상된 적이 있어요. 사실 눈건강에는 안경만한 것이 없지만 아무래도 불편하기도 하도 잘 안 어울리는 경우도 있어서 렌즈나 수술을 고려하게 되는 것 같아요. 건강한 눈, 좋은 시력은 당연시되면서도 조금이라도 손상이 오면 생활 자체를 흔드니 정말 중요하지요.

프레이야 2015-05-1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시력이 좋지않군요. 읽기중독인 사람으로선 몹시 불편하시겠지만 수술로 나아지신 듯하니 다행이에요. 저는 이제 노안이 오는 나이라 할 수 있지만 시력자체는 좋거든요. 시각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는, 그래서 난 행복하단 생각이 들 때는 낭독녹음하고 나올 때에요^^ 눈은 좀 침침해져도‥

blanca 2015-05-17 10: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부럽습니다. 지금은 좋은 시력으로 교정되긴 했는데 눈 자체가 고도근시 상황인 것은 같다고 해서 문득문득 걱정이 돼요. 원래 좋은 사람과는 다른 상황이니까요. 제발 할머니가 되어도 책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물고기자리 2015-05-1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 님이 투병 중이신 걸 몰랐네요. 아내를.. 이랑 색맹의 섬을 읽고 존경하게 되었었는데 안타깝기도, 더더욱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안그래도 요즘 새삼 눈의 고마움을 느끼며 다른 모든 것들처럼 언젠가는 시력도 상실될 거란 생각에 겁이 덜컥 났었는데 이래저래 마음을 더 키우며 살아야 겠습니다.. 책도 읽어봐야 겠어요.

blanca 2015-05-17 10:35   좋아요 0 | URL
아, 물고기자리님도 그러셨군요!! 올리버 색스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했는데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다고 해서 마음이 무거워요.

라로 2015-05-17 0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스틸 앨리스를 보며 적으신 부분을 생각했더랬어요. 지성적인 그녀가 치매라니,,,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리던 것을 하나씩 잃어가며 분투하는 모습,,, 더구나 책을 읽어도 계속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고,,,,,시력만이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니더군요,, 저는 막내를 낳고 급속도로 노안이 와서 이제는 안경이 없으면 책을 못 읽어요. 그래서 책을 더 안 읽게 되는 것 같은데,,,,저도 올리버 섹스처럼 비록 노안경을 쓰더라도 죽을 때까지 읽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래요. 오늘도 좋은 글,,고마와요. ^^

blanca 2015-05-17 10:36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저도 스틸 앨리스 보고 싶은데 아직은 아이가 어려 여건이 안 되어서 아쉬워요. 다들 많이 얘기하더라고요.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무너질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일상을 수습하고 재건할 수 있을지... 순간에 집중하며 항상 충만함을 누려야겠어요.

세실 2015-05-1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거나, 글을 쓸수 없다거나, 암에 걸린다면 청천벽력 같겠지만, 누구에게나 올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겨내는 긍정 마인드가 참으로 중요한듯요^^

가끔, 노안이 와서 책을 읽지 못할때 가장 서글프겠다는 생각해요. 저도 고도 근시인데 무서워서 수술도 못하고 지금까지 렌즈로 살고 있어요. 더 나이 들어 빙글거리는 안경 끼는것도 으악?

blanca 2015-05-17 10:39   좋아요 0 | URL
친구들이 이제 렌즈 대신 슬슬 안경을 다시 끼는데 그 모습도 이지적으로 보이던 걸요. 세실님도 잘 어울리실듯 해요. 그렇죠. 저도 다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죽을 때까지 그런 일들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요즘 절감합니다.

stella.K 2015-05-1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없던 시절 안경이 로망이었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내 나이 정도면 노안들이 와서 안경을 낄 때
아직은 버티고 있는 게 감사할 뿐이죠.

어딘가 아프면 우울하기도 하지만 새삼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되요.
그렇지 않아도 올리버 색스가 시안부 인생을 산다고 했을 때 지금 그의 마음은 어떨까
문득문득 생각해 보게 되곤 했죠. 역시 색스도 괴로워 했군요.ㅠ

눈 나빠질 것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오늘 책을 읽을 수 있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구요.
그때 되면 또 살아갈 놀라운 방법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도 눈이 버틸만 하다고는 했지만 예전 같지 않아 인터넷 폰트가 작은 글은 잘 안 읽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블랑카님 글을 제가 못 읽게 되더라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주세요.
가끔은 이렇게 읽는 답니다.ㅋㅋ

blanca 2015-05-17 15:02   좋아요 1 | URL
노안도 개인차가 있어서 삼십대 후반에 오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스텔라님 눈 좋으시군요. 부러워요. 저는 벌써 자간이 좁거나 글자가 작은 책은 피로해서 못 읽겠어요. 스마트폰을 너무 해서 그런지 걱정입니다.
맞아요. 제가 좀 걱정이 많은 유형이라 고치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고마워요^^

2015-05-19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9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5-05-20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의 건강이 가장 염려됩니다. 하루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쓰고 자료찾아 읽는게 직업이라서 라식은 꿈도 못꾸고 있구요.ㅎㅎ 대학교 1학년 때 100명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시작해서 4학년 때 맨 앞자리에서 졸업했네요.ㅎㅎ 무서워요.ㅎㅎ

blanca 2015-05-20 13:23   좋아요 1 | URL
제가 한 십사 년 정도 전에 수술을 할 때도 의사 선생님이 조언하시더라고요. 정말 정밀한 작업을 많이 하거나 눈을 많이 쓸 예정이거나 밤운전 많이 할 거면 권하지 않는다,고 신중하라고. 다 감수하고 했고 역시 시력의 질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게 미세하게 떨어지는 걸 느껴요. 그런데 성인 될 때까지 좋은 시력 유지하셨다가 떨어뜨리신 것은 정말 안타깝네요.

Nussbaum 2015-06-02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저히 렌즈는 불편해 쓸 수 없어서 그냥 안경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괜찮은 안경을 착용하고 있죠~ 문득 페이퍼를 읽으면서 어느날 아침 뭔가를 볼 수 없다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상상하기 어렵고, 또 상상하기도 싫으네요. 전 시력이 -7디옵타 정도 되는데 가끔 안경만 벗어도 암흑 같습니다. ㅠㅠ


blanca 2015-06-03 13:09   좋아요 1 | URL
제가 -3디옵터일 때에도 거울 앞의 제 얼굴이 명확히 안 보였는데 Nussbaum님의 암흑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옵니다. 눈이니 가장 가치 있는 소비가 아닐런지요.

아, 이것저것 정말 흉흉한 뉴스가 너무 많네요. 그냥 편안하고 아무런 일이 없는 일상이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 요즈음입니다.

[그장소] 2015-09-0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학생들이 안경을일찍쓰는걸보면 정말 속상하죠. 남일아닌까닭에.

blanca 2015-09-03 23:20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근시여서 더욱 예사롭게 보이지 않네요. 참 불편한 점이 많았거든요. 더운 여름 안경에 눌리는 콧잔등, 귀도 아팠고, 온도차에 따라 뿌옇게 김이 서리는 모습도 부끄러웠고요. 시력은 단순히 보이는 풍경의 선명함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그장소] 2015-09-0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아직 얼굴형태도 다 안잡힌 어린애들이 두꺼운 안경을쓰고. 맨얼굴의자유를 모른다 하니 속상해요. 저는 난시가심한데 안경 쓰기 싫어라해서 . 그냥 밖에 나가면 죄일그러져 뵈는데 도. 바람이 닿는게 좋아서 걍다니고 그래요. 시력은 정말 그 사람 인상을 죄지우지하잖아요. 안경이 어릴때야 관심의대상인지 몰라도 커가며 얼마나 불편한지 , 단지 패션 이기만한
사람들 은 절대 모르죠. 그것까지 인상이 된다는걸~
 

삶을 종단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체념하고 절망하고 희희낙락한다. 어떤 계기나 시간이 주어지면 꼬마 시절의 나, 소녀 시절의 모습, 지금은 떠나고 없는 사람들이 때로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여기 이렇게 두 아이를 키우는 중년의 아줌마가 지금 전부인 것 같은 시간은 어김없이 또 돌아온다.

 

뒤돌아 보면 또 앞질러 보면 대체 어느 지점의 내가 가장 나다운 것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책가방을 메고 언덕을 타박 타박 올라가는 자그만한 체구의 중학생이 정말 나같기도 하고 그냥 긴 생머리가 하고 싶어 무작정 곱슬머리를 안 예쁘게 기르고 한껏 그 모습을 의식했던 아가씨가 나 같기도 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일들 앞에서 이리저리 질문해대는 신입사원의 모습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남산만한 배를 하고 아기옷을 사러다니던 예비 엄마의 모습도 그렇고.

 

 

 

 

 

 

 

 

 

 

 

 

 

 

 

 

책이 출간된 1965년에서 오십 년이나 흘러서야 더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책이라 했다. 작가 존 윌리엄스가 평생 쓴 책은 이 책을 포함해서 총 네권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이 전부.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 정교수가 아닌 조교수로 예정보다 일찍 퇴임하게 되고 죽음을 맞게 된 한 사내의 삶을 따라가게 된다. 농삿군 아버지 아래에서 일손을 돕다 우연하게 농과대학에 입학하기 된 그는 2학년 영문학 개론 시간, 마치 그의 삶 전체를 예언하는 듯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듣고 영문학자이자 가르치는 이로서의 삶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성실하고  내면에 열정을 간직한 사내의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의 여정에 이끌리듯이 따라가게 된다. 소통하지 않는 외로운 결혼 생활, 갑작스럽게 찾아 온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상실, 교활하고 영악하지 못한 처신들이 마치 무능처럼 매도되는 바깥 세상과의 불화... 이다지도 평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가 가지는 흡인력은 그와 이러한 그의 삶을 그려내는 그 언어들의 진실성과 영롱함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작가의 눈은 스토너의 눈을 ,스토너의 심장 박동을 따라 유려하게 미끄러져 간다. 거기에서 나온 문장들은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마음결로 스며든다. 작가의 무리하지 않는 통제는 역설적으로 읽는 이들이 스토너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스토너가 마침내 중년을 넘고 노년으로 가며 죽음의 전조가 흘러들어올 때에는 마치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나갈 때처럼 가슴이 스산해져 옴을 느끼게 된다. 그 모습은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로 나의 것이 될 것임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핍진성 있는 묘사들.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의 죽음조차 천천히 관조하며 그 느낌과 그 시선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작가가 정말 죽음으로 가는 경험을 해본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그 문장들은 놀랍도록 설득력을 가진다. 맞아, 죽음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은 여기에서 멀지 않은 바로 이런 것일 거야, 하는.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책을 뽑아 들고 맞이하는 죽음은 청년 시절 그가 도서관을 자신의 장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의 현현이다. 언어가 그려낸 지도 속에서 반생을 거닐었던 남자는 그 언어들이 가장 그다운 곳을 보존한 그것을 의식하며 죽는다.

 

'소설의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듣거나 그 어떤 것일지라도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 때 이 책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넘어선 이야기. 태어나 살고 늙고 죽어가는 그 지리멸렬한 명제가 어떻게 구체화되는 것인지에 대한 그 단순명료한 예시가 스토너라는 이 도저히 미워하거나 멸시할 수 없는 사내를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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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5-0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랑카님이 좋아하실만한 바로 그런 소설이죠!

blanca 2015-05-02 17:00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런데 이 작가 책 딱 이 한권만 번역되어 있더라고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도 그렇고. 너무 아쉬워요.

서니데이 2015-05-02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서 스토너에 대해 쓴 글이 적지 않아서, 이 책 궁금하긴 한데 아직 못읽었어요,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라면 나중에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blanca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15-05-03 00: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아주 잘 읽히는 책이에요. 분량도 아주 많은 것이 아니라 언제 누구라도 몰입도 높은 독서가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말 잘 보내고 계시죠?

라로 2015-05-03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다시더니 어느새 읽으셨구나!! 역쉬~~~~^^*

blanca 2015-05-03 11:02   좋아요 0 | URL
나비님, 오랜만인 느낌이에요. 읽어야지,읽어야지 하다가 드디어 읽었어요.

망고 2015-05-0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님의 이글도 차분하게 정리된 느낌이라 정말 좋아요^^

blanca 2015-05-03 16:08   좋아요 0 | URL
망고님, 사실 저는 큰 기대 없이 읽어 더욱 감동이 컸답니다. 아쉽게도 단 한 작품만 번역되어 있네요. 다른 작품들, 그리고 시도 너무 궁금해요.

수이 2015-05-03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읽고 싶네요, 블랑카님 글 읽고 있노라니_

blanca 2015-05-03 16:10   좋아요 0 | URL
다들 이 좋은 소설 읽으셨군요. 저는 언제나 뒷북을 치네요 ^^;; 언젠가 스토너의 시간과 맞추어 비슷한 나이에 맞추어 한번씩 다시 보면 그의 정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앤의다락방 2015-05-03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정말 몰입해서 잘 봐지는 소설이더라구요~ 한번만 읽고 내버려둘 책이 아닌 때때로 꺼내서 다시금 읽어 보고 싶은 그런책이더라구요~저에게는요.... 또 보고 싶네요!^.^

blanca 2015-05-04 18:2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앤의 다락방님. 이러한 소설은 소장가치 정말 충분해서 나이가 들어 읽으면 또다른 느낌,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제가 수시로 읽게 되는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옆에 꽂아두었답니다.

2015-05-06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6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5-05-0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리 좋은 책을 아직 못 읽었네요^^
접수하겠습니다~~~

blanca 2015-05-07 17:5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정말 정말 강추드리옵니다.

유부만두 2015-05-1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순번을 미루고 있었어요. 이제 읽어야지요.

blanca 2015-05-12 06:59   좋아요 0 | URL
저도 서재에서 많이 이야기 되어서 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런가,에서 출발했어요. 그렇게 읽다 흠뻑 빠져버렸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5-05-1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단편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블랑카님의 이 책 리뷰를 보니 슬쩍 장편으로 돌아서는 마음.
장편과 단편은 확실히 그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블랑카 님의 리뷰를 보면 이 책은 확실히 사건을 겪으며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보일 것 같아요. 단편이 그 직전이나 직후의 숨고르기라면, 장편은 그 찰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일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회의라니, 마음을 읽힌 것 같아 순간 몹시 뜨끔했더랬어요. 이게 다 허구인데 무엇에 쓰는가, 하는 마음에 단편도 반 정도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읽던 중이었거든요.

blanca 2015-05-19 22:03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이 말만 요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어요. 그런데 이건 픽션이 아니다, 라는 확신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소설의 형식을 빌린 객관화된 시선을 필요로 하는 작가의 자서전이 아닐까, 하는 심증이 들 정도로 문장 하나 하나가 살아 있었어요. 쟌느님도 분명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저도 단편은 몰입이 어려운 경우가 많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5-05-20 04:26   좋아요 0 | URL
아이고 어제 블랑카님 리뷰를 읽고 스토너라는 책을 저는 분명 살펴만 보았는데 별점 넷이 등록되며 제가 이걸 읽었다고 북플에 알림이 뜨길래 북플은 내 마음을 읽나..읽지 않아도 이 책은 블랑카님 말씀처럼 당연 별 넷은 기본인가..아니면 내가 이걸 읽었는데 기억력이 개판이어서 잊은건가...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책이 더 궁금해지는 것이 사실이에요. 사실 소설은 극진한 위로, 적절한 공감, 아름다운 문장력, 정확한 표현력 같은 것에서 다른 장르를 능가하는 장점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그것만이 전부인 걸까, 하고 욕심을 더 부려보게 됩니다. 분명, 그것 말고 무엇인가 더 있을 거란 확신이 (읽기도 전에 블랑카 님의 리뷰 만으로) 듭니다.

blanca 2015-05-20 13:20   좋아요 0 | URL
저는 실컷 읽고 리뷰까지 써 놓고도 그 책 내용 기억도 못하는 기염도 토합니다. ㅋㅋ
 

많이 좋아하는 작가로 전작주의를 시도해 본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인 올리버 색스는 한번씩 신간을 내는지 아무래도 연로한 탓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최근에 너무나 슬프게도 그가 안구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고 <뉴욕타임스>에 이러한 자신의 상황과 죽음을 앞둔 소회를 기고한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아무리 연로하고 중병에 걸려 있더라도 죽음과 쉽게 화해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는 역시나 그의 저작들에 드러난 세상이나 사물 앞에 위트 있고도 진지하고 사려깊게 다가갔던 그 모습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감동을 주었다. 이제 여러가지 논쟁거리, 걱정거리를 던져주는 세상사에서 초연하게 물러나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겠다,는 거리두기도 인상적이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긍정적인 신뢰도 그다웠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그가 환자들을 만나 겪은 실제의 임상사례를 활용하여 인간이 삶에서 급작스럽게 결핍이나 퇴행, 장애의 상황을 겪어도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픽션이 아님에도 환자 하나 하나가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설득력과 몰입도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과학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모두에 빠져 있다고 한 표현은 올리버 색스를 어느 정도 그려내는 데에 긴요한 힌트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인간과 질병에 기울인 관심이 과학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모두를 아우르며 아름다운 글을 완성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의 사적인 삶에 개인적인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 자신의 어린 시절만 <이상하거나 멍청하거나 천재이거나>에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 자신이 자서전을 마무리지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어 불현듯 궁금해 아마존을 검색하니 정말 며칠 전에 그의 자서전이 발간되었고 더불어 발빠른 리뷰가 3건 보였다. 스스로가 죽음에 다가왔음을 이야기한 그의 죽음이 현실화될까 싶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의 사진 표지. 올리버 색스일까? 자서전 발간은 곧 그의 죽음이 정말 멀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걸까? 우리나라에 그의 자서전이 번역되어 내 손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도저히 영문원서로 삼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읽어낼 자신이 없는데... 하면서 이런 저런 상념들이 지나간다. 나도 늙어서 죽겠구나.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다 이렇게 죽어가겠구나, 하는 그 단순하고도 분명한 진실 앞에서 서늘해졌다.

 

부재중 전화. 엄마는 삼십 년을 함께 했던 이웃 아주머니의 죽음을 알린다. 청명한 하늘. 아이의 운동회. 반에서 제일 작은 아이가 달리기를 하며 자꾸 뒤돌아 본다. 나도 그랬었는데. 적어도 나보다는 더 잘 달리니 다행이다. 눈을 한번 깜빡이니 나는 엄마만큼 늙어버렸고 아이는 나만큼 커버렸다. 그러니 어쩌면 죽음도 늙음도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빨리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아연해진다. 그 뒤로는 항상 어떤 깨달음도 다짐도 아직은 이르다.

 

사람들은 자신이 늙어갈 거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리 늙어갈 것인가도 깨닫지 못합니다.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갑니다.-도리스 레싱 <작가란 무엇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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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30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약에 색스가 세상을 떠나면 독자들이 그의 책을 찾게 되겠죠? 저도 그렇고 사람들은 평소에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존재가 갑자기 부재하게 되면 그걸 찾거나 기억하려고 뒤늦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레싱의 말처럼 우리 곁에 있는 사소한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 빨리 소멸됩니다.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죠.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입니다.

blanca 2015-05-01 08:23   좋아요 0 | URL
아, 그래서 제가 마음이.. 자서전 출간이 의미하는 바가 혹시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서 멍해지더라고요. 그런데 또 그렇게 시간과 죽음에 자주 멀어지는 속성 때문에 일상이 잘 굴러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2015-05-2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5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 보니 인터뷰집 두 권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대화와는 조금 다르게 지면화될 것을 의식하는 인터뷰는 사적인 내밀함과 공적인 책임감, 약간의 허영이나 과시, 솔직한 변호나 변명이 혼재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져 더 와닿는다. 말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형상화하고 더 나아가 다수와 공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종국에는 실패에 가까워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시도는 언제나 많은 것들을 남긴다.

 

 

 

 

 

 

 

 

 

 

 

 

 

 

사십 대 중반의 수전 손택이 창턱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 아주 젊지는 않지만 생기와 자신감과 약간의 단호함이 느껴지는 모습. 아무렇게나 신은 듯 하지만 왠지 멋스러운 그녀의 앵클부츠가 돋보인다. 그녀의 책은 <타인의 고통>과 <은유로서의 질병>을,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그녀의 최후를 지키며 회한에 젖어 쓴 <어머니의 죽음>을 읽었다. 여기에서의 그녀는 유방암 투병을 끝내고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한 후 더욱 강인해진 모습이다. 1960년대 초, 컬럼비아대 학생이었던 조너선 콧은 당시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수전 손택에게서 학교 신문에 평론 한 편을 기고받은 적이 있다.  이후 <롤링스톤>지 창립공신 에디터가 된 그는 수전 손택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1978년에 이르러서야 상황이 무르익었다 생각하고 그녀에게 인터뷰 승락을 얻어내고 파리와 뉴욕이라는 두 장소에서 열두 시간에 걸쳐 수전 손택의 '말'을 듣게 된다. 주로 그녀의 두 저작 <사진에 관하여>와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내용이었지만 간간이 그녀의 사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오고 간다.

 

문장이 아닌 정연하고 여유로운 문단으로서 말했다는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사유하고 천착하는 그녀의 이지적 열정에 감탄이 일기도 했다. 그녀는 세밀하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원가족을 "붕괴되고 해체되었다"고 표현하고 한번도 누군가의 제자나 총아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후에 모자 관계를 무미건조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수전의 이야기 속에서 언급되는 아들에 대한 애정과 찬탄은 엄청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글로 쓰는 것만큼이나 지양하는 것 같지만 일찍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경험에 대하여서는 환희에 들떠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다. 작가의 소명은 세계를 향한 것이다. 수전은 자신이 글을 쓰고 난 후 항상 변화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삶의 일부라기보다는 삶을 그 자체로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핵심 동력인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네 시에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 폴 굿맨, 로라 라이딩 같은 작가들의 단편 선집을 기획하는 것이 일이었다,는 이야기 정말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솔직한 고백들과 더불어 미완으로 남아 아쉽다. 삼십 오년 전에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했던 인터뷰 전문을 마침내 세상에 내어놓게 된 저자가 무엇보다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과 경탄, 그녀의 저작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어 수전의 이야기는 더욱 강렬한 이끌림을 가지게 됐다.

 

그런가 하면.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 세 권 중 두 권을 먼저 읽고 가장 관심이 덜 가고 잘 모르는 작가들이라 뒤로 미루어 두었던 2권을 드문 드문 읽다 그만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3권 중 이 대체로 내가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못한 낯선 작가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에 제일 매혹되었다. '쓰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읽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사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각양각색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아라는 인식을 공유한 이 작가들의 모든 위트 있는 고백들이 나름대로 다.

 

 

 

 

 

 

 

 

 

 

 

 

 

 

 

이미 거의 맹인이 되어 버린, 그래서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낭독을 듣는, 하지만 국립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하며 사람들과 모여 앵글로-색슨어와 고대 노르드어를 공부하는 보르헤스의 이야기. 이미 위대해질 대로 위대해져 버렸지만 그는 자신의 글을 차마 부끄러워 다시 보지 못하고 특이한 단어 대신 평범한 단어를 택한다는 겸허함과 사소한 장난, 농담들로 사람들을 놀리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귀여운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현장 분위기와 보르헤스의 그 특이한 영어 발음과 젊은 여비서가 끊임없이 방문객의 면담을 독촉하는 그 정경의 묘사의 생생함이 마치 우리도 이 엉뚱한 노작가 앞에 있는 듯한 황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안타깝게도 단 한권의 책도 읽어보지 못한 토니 모리슨이 프린스턴 교정의 그녀의 연구실에서 따뜻한 부엌의 여주인처럼 친밀하고도 보이지 않는 통제력을 보여주며 나직나직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작품 <재즈>의 제목처럼 음악적이다. "낭비라는 사치스러운 특질을 얻기 위해 절제를 연습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밑줄을 긋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저 매 순간을 살았을 뿐이라는 비관주의자 주제 사라마구의 절망적인 비전은 삶이나 쓰는 일의 무기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두 쪽씩 성실하게 글을 쓰는 그가 삶과 일상에 보내는 성실한 경외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살해 협박을 받았던 살만 루슈디가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 같은 동시대 작가들의 성공에 소외감을 느꼈다는 고백은 참으로 솔직하게 들린다. 삶 자체가 지나치게 극적인 논픽선의 세계 같아서 상상력으로 창조한 이야기들을 복구하고 싶다는 소망은 당연하게 따라올 것으로 이해된다. 많은 것들을 삶에서 박탈당해 세상에 분노와 두려움으로 무장해 있을 것 같은 우려는 짧은 시간 농축된 그의 이야기들로 충분히 상쇄된다. 그는 충분히 따뜻했고 관용적이었다.

 

스티븐 킹은 역시나 스티븐 킹 답다. 자신을 비난하는 세력들에 거침없이 응수하고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여전히 성실히 참가하고 있으며 하루에 딱 세 개비의 담배만 피운다는 그의 고백들은 그의 작품들 만큼이나 이리 튀고 저리 튀며 도약한다.

 

 

지금은 192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쓰인 예이츠의 후기 시를 읽고 있습니다. 예이츠는 일흔세 살에 죽었지요. 그가 제 나이인 일흔두 살때는 어땠는지 알아내려고 애씁니다.

-오에 겐자부로 p.513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지적 장애를 가진 음악가 아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아직도 사십 대 아들을 화장실에 데려간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데에 대해 그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토로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삶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아들과의 시간의 무게를 존중한다. 이는 그의 작품으로도 승화되었다. 일본의 천황 숭배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전쟁 중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그의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작가로서의 책무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는 것이라 했던 수전 손택의 모습과도 만난다. 더이상 젊지 않고 이제는 황혼기에 접어든 그에게서 아직 온갖 비리와 허위에 분노하는 힘과 용기가 불타오르는 모습이 뭉클했다. 여전히 읽고 연구하고 쓰는 노년의 모습은 질리지 않는 부러움의 지향이다.

 

읽는 일은 이래서 질릴래야 질릴 수가 없다. 가까운 곳의 나이듦은 훈계와 기이함으로 비춰지기 쉽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오며 깨달은 것들, 지금 추구하는 것들을 장시간에 걸쳐 언어화하는 장면은 영 낯설다. 그 낯섦이 해체되고 자연스러워지는 곳이 인터뷰의 형식을 빌린 책이다. 읽기만 하면 그들의 지혜와 깨달음, 회한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집과 독선도 비어져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지는 지점에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 물론 '말'의 모든 것이 진실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로 모든 것을 위장하는 것도 어렵다. 그 중간 지대에서 언제나 적절히 타협해야 하는 모순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글을, 말을 들려주려는 성실하고 진실한 의도 앞에서는 주춤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쓰고 읽고 말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나 보다. 포기되어서도 안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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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5-04-2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책에서 손을 놓고 지냈는데, 다음 책은 수전 손택의 말,,로 정해버렸어요! 이 자리에서 ^^

blanca 2015-04-29 23:06   좋아요 0 | URL
와,icaru님이 다시 독서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에이바 2015-06-10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인터뷰 좋다고 내려오다가 겐자부로의 말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너무 너무 멋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자주, 생각날 것 같아요. 지금 제 삶과 마음가짐을 반성합니다. ㅠㅠ 인터뷰 읽기에 대한 블랑카님 말씀- 그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지는 지점에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는 말도 가슴에 와 닿아요.
 

드디어 오단 책장 두 개가 꽉 차고(물론 이것은 꽂은 책 위로 남는 공간에 책을 눕힌 것도 포함) 책상에 붙어 있는 삼단 가량의 책장도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몇 권 정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물론 전혀 짐작도 안 되는 실정이고 있는 책을 몇 번이고 들춰보며 처분할 책을 고민해도 더 이상은 내가 이 책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생각 안 나는 그런 상황. 이 책은 사실 처분할까 싶어 다시 꺼내게 되었는데 퍼더앉아 입 벌리고 지식인들의 넓은 서재에 감탄, 부러워하는 부작용에 시달렸다. 나는 인정받는 지식인이 아니니 사실 이런 넓은 서재에서 작가별, 혹은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나의 애서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미래가 과연 올까 싶은 데에서 오는 자괴감도 좀 들고.

 

 

 

 

 

 

 

 

 

 

 

 

 

 

특히나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널찍하고 입체적인 서재가 부러웠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전집류를 처분하지 않고 소장할 수 있는 공간, 마음의 여유도 더불어. 읽고 또 읽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난 마당에 첨부되어 있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더불어 그것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던 계몽사의 <소년소녀문학전집>은 이미 오래 전에 내 손을 떠나 버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몽환적인 표지의 <보리와 임금님>. 작가는 이야기 시작 전에  다락방에서의 자신만의 책들과의 잔치에 대한 추억을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려놓았었다. 나도 그런 다락이 있었으면, 그 다락 속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또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세상에나. 그런 오랜 이야기와 추억은 모조리 잊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가란 무엇인가 2>의 역자 후기에서 엘리너 파전의 <작은 책방> 이야기를 만났다.

 

 

 

 

 

 

 

 

 

 

 

 

 

 

이렇게 또 다시 소장해야 할 책의 목록들은 늘어만 가고. 나름대로 책의 충동구매를 지양하고자 아주 느리게 한두권씩만 주문하려고 하는데 장바구니의 배는 터지고. 소설가 김연수처럼 이제 나도 다시 읽을 책들 위주로 책장도 좀 정리하고 해야 하는 나이로 가고 있다는 마음은 언제나 아침에 읽을 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일어난다는 노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마음과는 좀 어긋나면서도 통하는 것도 같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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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4-2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는 뒤죽박죽인 책장이 정리될 날이 오겠지요. ㅎㅎ

blanca 2015-04-29 06:45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언젠가는 저도 가능하겠죠, 프레이야님?

파란놀 2015-04-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책을 만나면서
사랑스러운 생각이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blanca 2015-04-29 06:46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며 조금씩 더 커나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방심하면 다시 못난 구석들이 비어져 나오네요. 아직 읽어야 할 책도 커야 할 일도 많은 듯해요.

하이드 2015-04-2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프로 정리해요. 다시 읽어지고 싶을때 사는 책이 내 책이라 생각하구요. 그렇게 두번째 사서 읽는 책은 헤어졌다 다시 만난 남친처럼 아, 내 책이 아니구나,바이바이 하기도 하고, 나랑 살자. 책장에 탁 꽂아두기도 하구요.

...그러면 늘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책은 왜 계속 늘어나는가 ㅡㅜ

blanca 2015-04-29 06:48   좋아요 0 | URL
아 ㅋㅋ 이해하죠. 저 분명 이사오기 전에는 책장 두 개도 여유 있었는데 책장을 하나 더 추가하니 더 모자르는 이 지경은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ㅋ 사실 그 책장도 제 책을 위한 게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새끼를 치나 봐요, 책도.

transient-guest 2015-04-29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 연말부터 미루고 있습니다만, 사무실방 공간을 정리하고 가구를 재배치해서 약간 도서관처럼 만들고 더 많은 책을 가져다 놓을 생각입니다.ㅎㅎ 모든 책벌레들의 꿈이겠지요? `지식인의 서재`는 좀 기획도서의 냄새가 나는대로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국교수님은 안경환교수님과 함께 아주 약간 인연이 있는 분이기도 해서 더욱 그분의 이야기는 잘 읽었지요.ㅎ

blanca 2015-04-29 06:49   좋아요 0 | URL
부럽기만 하네요. 저도 서재 만드는 게 꿈이에요. 엑셀로 색인도 좀 만들고. 무엇보다 작가별로 분류해 놓고 싶어요. 의외로 이 책은 소장가치 충만해서 또 읽어도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