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샌닥의 그림책 속 괴물들은 아이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아니, 어느 정도 친근하고 자기들과 같이 살자고 너스레를 떨기까지 한다. 아이가 떠난 괴물들의 세계는 아이가 침몰하는 곳이 아니라 잠시 거쳐가는 곳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이가 돌아오면 그 아이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따뜻한 밥이 있는 엄마의 품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성장하기 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그 수많은 두려움, 모호한 부정적 감정들은 괴물, 귀신, 전령의 판타지를 통해 건강하게 해소된다. 괴물들의 나라에 간 것은 갑자기 경험한 어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주변인의 생로병사의 충격, 사랑과 관심을 앗아간 동생에 대한 미움 등이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은 아이의 시선이 응집되어 만든 상징일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의 결이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 다 실체가 규명되고 설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모호하게 뭉쳐지고 흐릿하게 투사되어도 그러한 것이 살아가는 데에 불가결하고 성장통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너그러움은 아이가 잘 커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잘 쓰여진 성장소설은 아름답고 천진하기만 한 어린 시절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다. 때로 눈물겨운 일들도 고통스러운, 두려운 에피소드들도 모자이크처럼 잘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말 그대로 '성장'은 정지가 아니기에 아름다운 정경의 스냅 사진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마냥 웃고 떠들고 부모님과 어른들이 든든하게 지켜서서 아이에게 닥쳐올 모든 난관과 위기를 사전에 막아주고 해결해 준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친구들에게 부정당한 경험, 아기 동생이 별이 된 일, 엄마의 투병이 없었더라면 유년 시절이 완전무결했을까?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러한 뼈아픈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살며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그 수많은 곤란하고 난감한 일들에 대처하고 의미를 통합할 수 있지 않았나,도 싶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사이로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친구들, 밤새도록 싸우고도 부둥켜 안고 인형 놀이를 할 수 있었던 동생, 사랑을 주고 배려를 주었던 어른들에 대한 달콤하고 아련한 추억들도 농밀하게 배어 있다. 뒤돌아서면 결국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나날들, 감사할 따름이다.

 

 

 

 

 

 

 

 

 

 

 

 

 

 

 

열두 살. 소년의 마법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무쌍한 일들은 우리가 한때 상상했던 괴물, 유령, 천사, 심지어 멸종된 공룡까지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판타지일까? 성장 소설 안에서의 환상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역설이다. 꿈만 꾸면 하늘을 날아오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던 시절들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정말 하늘 전체를 수월하게 잘 놀고 어떤 날은 꿈에서도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추락하고 만다.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는 시점이 분명 있다. 그 시점까지의, 그 시점을 이미 넘어서버리고 그 나날들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호수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야기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마을 사람 거의 전부를 용의자선에서 진지하게 의심하는 소년의 철없는 귀여움은 일부다. 아이는 친구들과 사방을 뛰어다니고 환상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죽어가는 친구에게 그 친구가 갈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 속에 펼쳐 놓으며 이별한다. 외부에서 닥쳐오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 들은 아이의 이야기 세계 속, 환상 속에서 나름대로 건강하게 완충지대를 찾아 안착한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친구가 급작스런 사고로 떠나고, 형제처럼 친밀했던 개도 죽고, 아버지가 실직해서 가난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소년 코리가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거기에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흔 살 생일이 다가오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코리가 복기하는 제퍼에서의 열두 살 소년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익다. 꼭 다시 한번 살고 싶은 열두 살. 잠시 힘듦이 유예되어 있었던 눈부시던 나날들. 짧은 머리에 눈이 인형처럼 큰 여자애가 전학와 나의 단짝이 되어주던 나날들.

 

이제 나의 힘듦은 완충 지대가 없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버리는 나날들이다.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면 잃어버리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밀려온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없지만 때로 통제해야 하는 책임감은 야멸차게도 걸어온다. 아직 배워나가야 할 것들도 묻고 싶은 것들도 많은데 나는 이제 '어른'이라는 탈을 썼기에 성숙한 척 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소설을 읽는 것은 그것이 뻗어나갈 여로와 중간지대를 알기에 가슴이 아릿해진다. 영원한 해피엔딩은 없는 게 삶이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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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8-1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이라고 해도,
눈을 감고 바라보면
얼굴이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만날 테니,
그림책을 그리는 어른이나
그림책을 보는 아이나
모두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사이좋게 노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리라 느껴요

blanca 2015-08-11 10:28   좋아요 0 | URL
네, 모리스 샌닥의 괴물을 은근히 귀여워요.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괴물들 태반이 사실 아이에게 두려움이나 위협을 주는 존재라기보다는 친근한 형 같은 이미지예요. 무서운 척 하지만 기실은 안전하다,는 어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의 또다른 얘기인 것도 같아요.

희선 2015-08-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으면 어릴 때가 좋았어 하지만, 어린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듯합니다 어린이 나름대로 힘든 일이 있으니까요 나이를 먹고 겪는 일보다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한다면 별로기도 하네요 아무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은 없겠죠 아주 조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린이만 그런 건 아니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8-22 08:42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어요. 희선님 말씀이 맞아요.
 

할머니를 보며 나는 할머니는 할머니로 태어난 줄 알았다. 보드라운 주름의 결들, 굽은 허리에서 한때는 홍조를 띠었을 어린 소녀, 젊은 새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집에서 몸소 치룬 손님들은 돌아가며 "이제는 돌아가실 때도 됐는데..."라는 말로 어린 나를 울렸다. 그게 어떤 의미든 할머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느낌에 가슴이 저릿했다. 시간이 흐르고 죽음이 다가오며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셨다. 이제 걸걸하게 자신을 주장하던 할머니는 까마득한 옛날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돈을 받으러 가신다고 아파트 복도를 배회하셨다. 때로는 당신에게 보물 같았던 외아들을 못 알아보셨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할머니다운 할머니스러운 존재는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가버린 듯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며 배웅하지 못하고 때로는 지겨워하고 진저리내며 할머니와 석별하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도 이러했던 나의 과오에 끄달릴 것이다.

 

 

 

 

 

 

 

 

 

 

 

 

 

 

 

 

 

 

 

아직 영화관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대신 더듬더듬 책을 읽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교수, 다복한 가정, 무심한 듯하지만 평생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동반자이자 같은 직종에서 협업을 했던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앨리스에게는 알츠하이머가 온다. 그녀가 이루었던 모든 학문적 성과, 가르쳤던 학생들, 사회적 관계망 들은 자신마저 점차 망각하게 되는 이 잔인한 병마 앞에서 쓸려나간다. 우리는 치매 환자를 돌보거나 치료하는 입장에서만 그들을 이야기했었지만 여기에서는 앨리스 본인이 치매에 잠식되어 나가는 시선을 볼 수 있다. 아기를 기다렸던 첫째 딸과 연기를 했던 둘째 딸은 어느 순간 낯선 아기 엄마와 연기자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가 사랑했던 '읽기'와 '쓰기'도 맥락을 잃는다. 사랑했던 가족의 알츠하이머 투병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이 자신들의 삶의 진로를 때로 틀고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희생을 요구한다. 이를 둘러싼 다양한 반응, 다툼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부러웠던 것은 비교적 여기에 비해 앨리스를 둘러 싼 환경은 치매 환자와 그들을 돌보는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지지망이 두터워 그들이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느끼는 소외감, 격리의 느낌의 깊이에 대한 묘사는 그렇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치매 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지에 대한 반증 같아 씁쓸했다.

 

 

 

 

 

 

 

 

 

 

 

 

 

 

'존재','나'라는 느낌은 때로 '죽음'과 '늙음' 앞에서 무색하다. 노인의 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때로 경청되지 않는다. '삶'은 흔히 '젊음'과 혼동된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서른 살의 회계사를 빌려 스스로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미 서른의 그는 충분히 늙어버렸다. 그를 스쳐가는 풍경, 사물, 사람은 그를 관통하여 그의 일부가 된다. 사무실의 배달원의 떠낢도 그에게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가며 그의 조각을 남긴다. 그는 이미 죽을 것을 명징하게 인식한다. 모든 것이 떠날 것이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심지어 그 자신도 무로 화할 것을 항상 의식하며 스스로를 관통하며 지나가는 풍경을 하나 하나 언어로 주워 담는다. 마치 페르난두 페소아의 일기집 같은 이 책은 어떤 체계나 서사 없이도 스스럼 없이 읽힌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이 그의 입을 빌려 나올 때 이 꿉꿉한 더위는 탄산수가 넘어간 후 느끼는 청량감에 물러난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길에 그의 고백이 지나간다.

 

영국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 간호사 출신으로 수많은 노인들을 지척에서 돌보았던 여자가 칠십 대에 스위스로 가 안락사를 택했다. 그녀는 중병을 앓았던 것도 존재의 스러짐을 가족이 아프게 목격해야 하는 치매를 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늙었다. 그녀가 목격한 수많은 '늙음'은 암울하고 슬펐다. 이제 그녀는 존재하기를 멈추기를 택했다. 죽음에 먹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안락사가 그것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을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쨋든 그녀는 스스로 '무'로 걸어들어갔다.

 

어느 날 사물에 대한 인식이 끝나면, 심연의 문이 열릴 것이고, 우리가 가진 과거의 모든 것들-별과 영혼의 파편에 불과한 것들-은 집 밖으로 털려날 것이다.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이 다시 시작하도록 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중 

 

나는 아직도 삶에 애착이 많은가 보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명제와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면 눈물이 난다. 할머니는 떠나시며 당신의 조각을 나에게 부려 놓았나 보다. 아니 나 이전에 떠난 그 익명의 혹은 이명의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삶과 존재가 조각 조각 다 스며 있나 보다. 그러니 기억하고 돌이켜 보고 그리고 또 거기로 걸어들어가나 보다.

 

'존재'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나도 그처럼 제대로 인식하고 싶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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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5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8-06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안의 책,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여기서 보게 되네요. ^^
이 책 어떤가요? 추천할 만한가요?

blanca 2015-08-06 18:26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저는 추천하고 싶어요. 이게 좀 단숨에 읽히는 책은 아닌데 설명하기 힘든 마력이 있네요. 문장이 찰지다고나 할까요?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을 명료하게 문자화하는 능력이 대단한 사람인 듯해요.
 

두 번 다시 안 오는 시간, 비교적 관대함이 주어지는 나날들, 너무 이상주의적이어도 입찬 소리만 해도 조금은 미쳐도 용인되는 시절.

 

영감은 번득이고 천재가 태어나는 시간. 시인으로 가는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유일무이한 찰나들. 김연수가 종일 시를 쓰고 또 써도 시간이 남아돌았던 바로 그 시간. 하지만 두 번 경험하기엔 조금 저어하게 되는 성장통.

 

 

 

 

<길 위에서>의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우스, 앨런 긴즈버그, 루시엔 카는 1950년대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고유명사는 이제 마치 보통명사처럼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청춘의 치기, 무모함, 반항, 자유로움을 안고 회자된다. 시에서의 운율, 압운,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은 이 작가들 앞에서 탈피해야 하는 껍질이자 도약해야 하는 디딤대가 되고 민낯과 속살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다 거기에서 지금까지 미처 꺼내어 놓지 못한 실재의 조각들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쓰다듬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들이 공유한 시간들은 성정체성에 논란을 지피기도 했다. 여러가지 소문, 의견이 있었지만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동성애적 성향을 지녔던 것은 어느 정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인 듯하다. 신비한 눈빛의 배우로 십대 후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연상시키는 데인 드한이 그들의 모임 중 뮤즈가 되다시피 한 루시엔 카를 연기한다. 똘똘이 스머프가 떠오르는 해리 포터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유명한 시인 아버지와 정신병자 어머니의 가정 안에서 혼란을 느끼며 루시엔 카에 점차 매혹당해가는 미묘한 연기의 몸짓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루시엔 카는 앨런 긴즈버그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심이 발화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이 왜소하고 주눅들어 보이는 소년은 사랑과 우정, 이끌림과 염증의 미묘한 경계에서 루시엔과 관계를 맺으며 대시인으로 가는 여정에 선다.

 

<킬 유어 달링>의 핵심 사건은 실제 루시엔 카의 살인 사건이다. 오늘날로 보면 스토커를 죽인 셈이 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은 종반부에 가서야 일어나는 만큼 영화의 전면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음악에 이끌려 루시엔 카의 방으로 들어간 신입생 앨런에게 예이츠의 vision을 들려주는 그의 모습은 영화라는 영상물이 어떻게 그 한계 안으로 언어의 실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지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 되어 준다. 예이츠의 시, 앨런의 시, 심지어 랭보의 시까지 소년들의 입에서 자유자재로 읊조려지며 사건의 배경이 되고 영상의 자막이 되어준다. 예이츠는 비트 세대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부활했다. 삶과 죽음의 그 반복되는 수레바퀴에서 탈피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사랑에서 집착으로 변질된 동성 애인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낢은 그들이 예이츠의 시를 오독하기 쉬운 청춘이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잭 케루악은 욕망과 마음이 이끄는 길의 여정에서도 생을 진지하게 반추했다.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순환 속에 자리할 지도 모른다는 감각은 역설적으로 이들 사이에서 예이츠의 시로 벼려진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찰나 안에 가두어진 영원은 그렇게 이 영화 안에서 성공적으로 발화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노년의 예이츠의 시를 읽는다고 했다. 그의 시에는 어떤 '초월적인 것'이 있다는 노작가의 이야기가 와닿는다. 시가 죽어가고 폄하되는 나날들, 결국 사람과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위대한 과업은 시인의 손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영화 같아 마지막 엔딩 크레딧 앞에서 숙연해졌다.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아이들, 시인의 시로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했던 과거의 흔적들이 그 어떤 그 사건의 진지한 분석, 설명, 변명보다 중심을 건드렸다는 느낌은 착각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에서 업을 끊고 진저리 나는 순환의 매듭을 풀어버리려 했던 시도는 인간이 생에서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결국 늙어가는 것이고 청춘과 석별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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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2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루악 역의 배우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아마데우 역할을 맡았었는데요. 연기는 잘 하는데 영화는 별로였어요. 킬 유어 달링스는 그 시대와 연령대의 아찔한 분위기를 잘 담아낸 것 같아요. 드한과 래드클리프 합도 잘 맞고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꼬띠아르는 벨 에포크로 가고싶다고 하잖아요. 저에게 기회가 있다면 비트닛 시절로 가고파요ㅎㅎ

blanca 2015-07-29 13:3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저도 최근에 미드나잇 인 파리도 봤어요. 완전 공감 백배입니다. 막 과거로 여행 가고 싶다는 ㅋㅋ

stella.K 2015-07-2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근데 왜 전 몰랐을까요?ㅠ
데인 드한이 디카프리오를 닮았나요?
디카프리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왔을 때만해도 정말 꽃미남이 었는데...ㅠ
이 영화 한번 보고 싶네요.
블랑카님 영화 리뷰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전에 한 번 봤나? 기억이 안 나네...긁적 긁적~ㅎ

blanca 2015-07-29 14:17   좋아요 0 | URL
오늘은 실시간 댓글이네요. 스텔라님, 더 나아요, 디카프리오 한창 전성기 시절보다요. 연기력, 발성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꼭 보세요. 강력 추천합니다.

2015-08-05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5-08-1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냉큼 메모합니다. 어디서 봐야되죠?
무척이나 당기네요. 페이퍼 당선 축하드려요^^

blanca 2015-08-11 10:29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저는 네이버 영화에서 다운 받아 핸드폰으로 봤어요. 자기 전에 두 번에 나누어 봤는데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화면 정지해서 인용된 시를 몇 번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신인감독에 저예산 영화였다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도 높고 음악도 연기도 어디 하나 아쉬운 부분이 없었어요. 알라디너들이 참 좋아할 영화인 것 같아요.
 
사랑의 사막 마카롱 에디션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많은 이야기가 회상의 구조를 택한다. 청년과 중년이 만나는 경계인 삼십대 중후반의 나이는 특히나 과거의 일들을 복기하기 좋은 시점이다. 더 이상 젊지도 그렇다고 아직 늙었다고 하기는 애매한 나이에 청춘의 이야기는 하나 하나 되짚어 나가며 비로소 완성된다. 막상 현실에 퐁당 발을 담궜을 때에는 가질 수 없었던 통찰과 조망들은 산란하고 가벼운 사실의 조각들을 한데로 묶어내어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아주 그럴듯한 그림이 된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레몽도 그랬다. 술집에서 레몽은 이제는 늙어가는 첫여자와 해후한다. 마리아는 레몽이 열입곱이었을 때 이미 이십 대 후반에 이르렀고 어린 아들을 잃었고 한 사내의 정부이자 레몽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었다. 세월의 풍화는 아름답던 여인을 여지없이 깎아 놓았지만 그 여인을 상대로 정염과 복수심을 불타올리던 미성숙한 사내의 치기까지 다 잡아먹지는 못했다. 이윽고 레몽은 그 찬란했던 격정으로 가득했던 채 열아홉도 되지 않았던 나이에 전차에서 한 성숙한 여인의 시선과 마주쳤던 시간들을 회상한다. 둘의 시선은 은밀하게 교환되고 어설프게 만나게 되지만 소년의 서투름과 치기는 이미 성숙하고 닳아버린 여인에게 환영받지 못함으로 깊은 상처와 패배로 남게 된다.

 

이 이야기가 전부라면 <사랑의 사막>은 진부해져 버리고 말것이었다. 하지만 레몽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년의 어처구니 없는 격정을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깊이를 더하고 있다. 부자는 한 여자를 상대로 승산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너무나 늙어버린 너무나 어린 두 남자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결론난다. 두 남자는 한 남자의 사랑의 연대기의 대척점에 서 있다. 너무 어린, 혹은 너무 늙어버린 시점에 만나게 되는 정염, 정열. 그것이 설령 플라토닉한 것일지라도 에로틱한 것일지라도 사회적 시점에서는 다 관용어린 시선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레몽의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저명한 의학박사였고 부엌을 두고 사사로운 권력 투쟁에 열중하는 어머니와 아내가 있었다. 후일 레몽이 마리아와 재회하여 그녀의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아버지를 다시 불렀을 때 노인은 여전히 마리아에게 만남을 구걸하는 추태를 보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백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마음 속에서 저질렀던 현실화되지 않은 불륜들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실제 불륜을 저지른 사람보다 나은 것인지 반문한다. 근친을 저지를 뻔 했던 부자의 대화는 인간의 내면이 사회적 외연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축소하고 가장하고 죽이며 견뎌나가는 지에 대한 자조섞인 이야기다.

 

시간과 제도와 욕망 앞에서 인간은 흔들린다. 닳는다. 그것에 대한 통찰의 한 매개로 '사랑'이 택해졌다. 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노쇠했고 가망 없는 사랑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그 대신 가까스로 가정을 지켜내었다. 아들은 해소되지 않은 정염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패배자로 다시 그 여인 앞에 섰다. 그 여인은 어떻게 하여 자신의 정부와 그의 아들을 합법적인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늙어버린 여자는 한때 자신을 흔들었던 아들뻘 되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의붓아들을 자랑한다. 그들의 욕망, 언어, 감정은 모두 철저하게 어긋난다. 그 참혹함 속에서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삶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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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2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카롱 에디션으로 다시 나왔군요! 전 그 전의 표지가 더 좋아요.. 처음 읽은 모리아크의 책인데 삶의 정수를 보여주더군요. 세월도, 엇갈린 마음도 사막처럼 막막하기만 한.. 테레즈 데케루와 더불어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blanca 2015-07-28 23:12   좋아요 0 | URL
마카롱 에디션이 예쁘긴 한데 표지가 너무 얇아 금방 구겨져 아쉬워요. 솔직히 저는테레즈 데케루는 좀 어려웠는데 이 작품은 참 흡인력이 있더라고요.

2015-08-05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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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여섯, 직업은 없고 이혼했고 이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환상을 품게 했던 스물다섯 살 어린 연인은 떠나갔다. 더한 것은 그는 유명한 연극 배우여서 말 그대로 전락할 고점에서 추락 지점까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것. 백오십 페이지 안에 이 사내의 전락기는 충분히 담기고도 남는다. 필립 로스가 더 이상 이야기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백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것을 담는 일은 분명 사투다. 많은 언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생의 대부분을 경험하고 이미 걸어가 버린, 그래서 이제는 전락해야 하는,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작업 안에 그의 문장은 응축되고 농축되고 결집된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 , 연극계의 명사 액슬러는 어느 날 "마력을 잃고 말았다." 더 이상 "연극 무대에 서서 완벽히 배역과 결합했던 그 환희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그 이유없이 일어나는 몰락의 체계없는, 덧없는 과정 속에서 그는 역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성추행으로 고통받는 젊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 스치듯 지나가는 인연을 끝으로 그는 그녀에게서 남편을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듣고 그 충동과 고통에 공감한다. 한때 연극 무대에 함께 섰던 동료 연기자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액슬러는 삶의 재건을, 부활을, 다시 한번을 꿈꾸게 된다. 레즈비언이었던 그녀가 액슬러에게서 여자 연인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고 때로 빠지는 무모한 성적 충동과 욕망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그가 꿈꾸었던 것은 가장 단순하고 모범답안 같았던 아이가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허리가 아프고 향후 오년 안에 벌어질 일들이 도약보다는 침몰에 가까운 나이에 다가가면서 그는 오히려 부활을 꿈꾼다.

 

그의 꿈은 주관적으로 심정적으로 공감받으며 진행되는 듯하다 <에브리맨>에서의 '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처럼 갑자기 객관화된다. 어처구니 없는, 그래서 산산조각 나는. 필립 로스는 그 슬픈 반전 앞에서 언제나 가차 없다. 사랑에 빠져 늙은 아버지가 되기를 꿈꾸었던 몰락한 연기자의 죽음은 어느 순간 날아든다. 결국 절망. 섣불리 희망을, 해피엔드를 노래하지 않는 작가가 포트스잇에 "쓰기에 관련된 사투는 끝났음",을 적어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의 '쓰기'는 곧 '살아나가는 행위' 그 자체였다. 기만하지 않고 함부로 속단하지 않았기에 이제 필립 로스의 펜촉은 다 닳아 버렸다.

 

말뚝처럼 그의 몸에 꽂혀 있는 당혹스러운 경력과 마찬가지로, 그 실패도 자신의 것이니까.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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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7-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순다섯에 이제라도 아이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blanca 2015-07-24 10:17   좋아요 0 | URL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에게는 생물학적인 자녀가 없었고 아직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소망이 충족되지 못하고 말 그대로 파멸해버리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2015-08-05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