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는 편이다. 신기한 게 갈수록 글씨가 커지고 흘려 쓰게 된다. 서른 언저리의 다이어리의 글씨는 내가 쓴 게 분명한데도 읽으려면 눈이 피곤할 정도로 빽빽하다. 가소로운 것은 해마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겁에 질려하는 모습. 특히 서른 언저리에 그러고 앉아 있었던 과거의 나를 보면 슬쩍 귀엽기까지 하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젊지는 않다,고 느끼게 됐는데

 

육십대 내내 나는 여전히 중년 언저리에 있다고 느꼈다. 중년이라는 해변에 안착한 건 아니고 그 연안을 항해하고 있어 중년이 소리쳐 부르면 닿을 거리에 있다고 말이다. 일흔 번째 생일에도 그 느낌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건 내 생일이 지난 것도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그 느낌은 결국 바뀌었다. '일흔이 넘었다'는 건 늙은 것이다.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중

 

엥? 일흔까지 중년? '늙었다'는 건 일흔은 되어야 하는 건가? 저자 다이애너 애실은 1917년생이다. 물론 생존 작가. 은퇴는 75세에 했다. 문학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고 그곳의 편집자로 필립 로스, 잭 케루악, 진 리스, 존 업다이크를 발굴했다고 작가 소개란에 나와 있다.

 

 

 

 

 

 

 

 

 

 

 

 

 

 

 

손바닥 만한 책. 이백여 페이지. 낯선 이름. 게다가 여든 아홉의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드디어 "늙은 게 뭔지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려 볼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을 뻔 했지만 중간에 잃었고 무신론자고 자신의 가계를 따져가면 대부분 장수하며 얼마 안 앓다 감내할 수준의 고통을 겪다 죽음을 맞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서도 낙관한다. 대단히 건조한 듯한 어투지만 난감할 수준으로 솔직하기도 하고(여기서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나라 출신,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것의 공통점) 젊은 시절의 다소 화려한 연애 편력에도 그다지 죄책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나 때때로 삶에 대하여 예리한 통찰력을 꾸미지 않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매력적이다. 이런 여든 아홉이라면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솔직히 든다. 우울하거나 자조적이지 않다. 죽음에서 멀지 않은 나이에 떠올리는 이러한 기계론적 연상은 이 할머니의 담담한 말들 앞에서 밀려나간다.

 

그런데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해 모든 가능성이 열린,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간간이 보게 되면 우리는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이 아니라 시작과 성숙과 쇠락,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한 광대하고 다채로운 강의 일부라는 사실, 아직도 그 일부이며 우리의 죽음 역시 아이들의 젊음과 마찬가지로 그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p.110 

 

오늘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들. 아기 둘을 둘러싸고 이쁜 언니들이라고 당신들을 지칭하며 발산하는 느낌은 강퍅함도 서글픈 기운도 아니었다. '어떻게 늙을까' 그냥 한번씩만 물어보며 걸어가도 그 길은 조금 더 넓어질 것 같다. 떠밀려 가다 보면 다이애너 애실의 말처럼 때로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 " 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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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1-26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아직도 젊으신데 벌써부터 이런 쪽의 책을 너무 탐독하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사실 그렇더군요. 예전엔 60도 많다 싶었는데 저의 어머니 60대에 할머니란 소리 듣기 싫어하시더군요.
솔직히 75세도 좀 억울할 것 같아요. 100세 가까이 산다고 치면.
옛날 70대와 지금의 70대는 다르죠.
올해 저의 어머니가 80이신데 작년에 그리 아프셔서 그런지 이제 빼도 박도 못한 노년이다 싶더군요.
저도 중년이고 보니 마음은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나이만 든다는 게 좀 억울하다 싶더군요.
예전엔 몸도 마음도 다 청춘이었는데.
그러니 우리 2,30에 중년이면 나이 꽤 많은 줄 알고 줄긋기를 했다는 게 참 의미가
없어져요. 지금의 2, 30대가 우릴 보면 그러고 있겠지 하면 이 나이차란 극복할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ㅠ

blanca 2016-01-26 15:55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정말 그렇죠? 제가 요즘 보는 책들이 너무 한 분야로 집중된다는 느낌이... 아직 젊다고 얘기해 주시니 갑자기 기분이 정말 확 젊어진 것 같고 좋네요.^^ 맞아요, 제 예전 다이어리만 봐도 얼마나 가소로운지 실소가 자꾸 나온다니까요. ㅋㅋ 나중에 읽으면 지금 제 글이 또 그렇게 느껴질까 걱정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도 좋지만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낸 여섯 편의 장편의 묘미도 기막히다. 대단히 심오하거나 스토리라인이 걸출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한 권 한 권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 예리한 직관, 언제나 무리없는 이야기 진행력이 말 그대로 참 좋다. 그런데 유독 한 대목이 참 인상적이라 여러 번 펼쳐 보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독특한 모순에 대해서도 얼마쯤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다운 독단에 빠져 사람을 흔히 '착하다'  또는 '나쁘다'로만 평가했지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됐다. 그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용기를 내어 부상자를 구했던 사람이 방금 자기가 목숨을 내걸고 구한 사람의 작은 물건을 훔치는 비열한 지경으로 전락하는 꼴도 보았다.-애거서 크리스티 <딸은 딸이다> 중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의 양 대척점에는 분명 아주 소수만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하나의 환상이나 허상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어", 혹은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빈약한 표현인 지를 기억하려고 한다. 나부터도 과거의 수많은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보기도 부끄러울 만한 모습들이 있고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일부로 통합하기 어려운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는데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참으로 혼란스럽다.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반핵 운동 시위에 나섰던 행동하는 지성이자 <행복의 정복>의 저자가 너무 솔직하니 난감할 정도다. 그 솔직함의 잣대는 특히나 자신의 연애, 타인에 대한 평가에서 두드러지니 더욱 그러하다.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자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러셀이 아내를 두고 귀족 집안의 (이 대목이 강조되는 부분도 사실 프루스트가 귀족 가문을 동경해 마지 않았던 속물성과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유부녀와 벌이는 애정 행각도 시작해 불과했다. 그 여인과 소원해지며 또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관심을 끄는 대목까지 와 있다. 이미 훌쩍 노년기에 있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그저 그것을 미화하거나 하나의 거대한 조작으로 몰고 가는 것보다야 이런 솔직함이 더 그 글을 쓰는 취지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의 삶의 중년기까지도 이르지 못한 터다. 이미 늙어 자신의 삶을 큰 그림으로 조감하는 사람 앞에서 고작 그의 반도 못 산 내가 느끼는 이러한 당혹감은 미숙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러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중이다. 더해서 D.H. 로렌스와의 교유에서 그의 적나라한 실체를 고발하는 대목은 더욱 그러하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에는 그의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청년기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그의 묘사력과 언어는 로렌스만의 독특한 마력이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런 사람이었다니... 러셀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파시스트였다. 게다가 사상도 없이 그저 아내의 사상을 언어화하는 꼭두각시이기도 했다.

 

아, 어쩌나. 자서전이나 평전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난감하기는 또 처음이다. 아직 반도 안 왔으니 더 주욱 나가면 이러한 그의 뜨거운 솔직함도 인간에 대한 이해나 삶을 알아가는 데에 일부분으로 잘 통합될까. 이것은 마치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앞에서 의미심장한 비웃음으로 입술을 떼기 시작하는 그의 측근을 만나 껄쩍지근한 뒷얘기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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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1-2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읽고 대단한 건축가구나했는데, 그가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에 유부녀와 놀아나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 알고 경악했어요.,책에는 어찌나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시했던지..하아 흑인집사가 그이 멸시와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의 처자식을 죽일 정도로 개같은 인성의 소유자더라구요. 하....

blanca 2016-01-23 09:4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서재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유명인들이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사생활에서 비도덕적이었거나 그의 세평과 맞지 않는 뒷모습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기대했던 러셀상이 있어서 참, 타인이 쓴 평전도 아니고 자서전인데 실망스러운 면이 많이 보이네요. 그래도 적어도 자신을 포장하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는 그 정직성 만큼은 돋보여요.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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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이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하다'고 평할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떠올리는 그로테스크는 괴괴하고 음습한 분위기다. 서른이 안 되어 새벽의 극장에서 죽어간 시인의 시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평이라고 생각했다. 그로테스크는 진지하거나 무겁지 않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렇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라고.

 

기형도의 시집에는 맞춤하게 김현의 비평이 첨부되어 있다. 그는 다시금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하다고 평하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라는 김현의 한 문장으로 드디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내가 만난 기형도는 충분히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은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비평가의 이야기는 기형도의 시와 닮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중

 

 

기형도는 세상과 아니 기본적으로 삶과 불화했던 것 같다. 그는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표현한다. 불행하다,고 되뇌인다. 공장에 다니는 큰누이, 병든 아버지, 헛된 희망을 가지며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어머니를 둔 소년은 학교에서 받은 상장도 마음껏 자랑하지 못했던 아픈 추억들을 가진 그였다. 그러나 그의 개별적 삶은 그만의 "헛것"이나 절망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가 가지는 본원적 상처와 고통을 철저히 응시한다. 그러니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눈부시게 푸른, 푸르렀던 청춘은 조로했다. 그는 이미 늙어서 알아야 할 것들을, 깨달아야 했을 것들을 너무 일찍 농밀하게 가져버렸다. 그러니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는 그의 고백은 곧 유언이 될 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은 어쩌면 너무 많이 느끼고 보고 듣고 알아버린 그가 가져가야 하는 다른 모든 이들의 삶의 환멸, 절망을 이미 이 시인에게 지게 한 우리 모두에 대한 성찰일 지도 모른다.

 

너무 아픈 시. 그의 죽음 앞에서 김훈이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김현 해설 발췌) 라는 이야기는 기형도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삶의 그 무수한 희망, 헛된 시도, 생에 대한 끄달림을 한 마디로 다 끌어다 버리는 마침표 같아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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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19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처럼 마음 깊숙이 시리게 하는 겨울밤이면 생각나는 시집입니다.

blanca 2016-01-20 18:39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두어 번 더 읽어야 좀 이해가 될까 아직 저에게 기형도 시는 낯설고 다가가기 힘든 감이 있더라고요.

희선 2016-01-2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는 이름부터 시인 느낌이 많이 납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는 건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그런 말 생각하기도 했는데) 맨 뒤에 나오는 <엄마 걱정>은 국어 책에 실렸다고도 하던데,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동시 같지만 슬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이도 많지 않았을 때 그런 시들을 쓰다니... 제가 기형도 시를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그런 어둠이 좋기도 했다고 할까 그런 때도 있었네요


희선

blanca 2016-01-21 09:15   좋아요 0 | URL
아, <엄마생각> 저도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정제된 간결한 맛이 교과서에 딱 실릴 만한 모습이긴 해요. 저는 너무 뒤늦게 읽어서 그 치기 어린 청춘 특유의 맛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드디어 떨어졌다. 읽을 책이. 사실 지금 김현의 책을 읽고 있긴 한데 반에서 더 나아가 읽을 책을 쟁여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김현의 일기는 정갈하고 대단히 직설적이다. 지금 생존해 있는 작가들이나 작품평이 때로 무척 뾰족하다. 모든 평에 공감하기는 어렵고 내가 읽지 않은 시나 작품에 대한 평은 아무래도 집중이 잘 안된다.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좋다. 군데 군데 직접 인용하며 칭찬하거나 지적한 대목은 형형하다. 우리나라 시인이 우리 말로 쓴 시집을 차곡 차곡 읽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니 미루어 두었던 기형도 시집을 읽자. 수많은 시집들이 나오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풍성하던, 약속 장소가 때로 거리의 서점이었던 그 말과 글이 난무하던 시대가 그립기도 하다. 서점에 가도 책을 봐도 이러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이 모든 것들이 화석화 되지나 않을까 때로 두렵다.

 

 

 

 

 

 

 

 

 

 

 

 

 

 

 

읽는 일을 한 템포 늦추려 한다. 무엇보다 눈이 침침해져 온다. 마구 혹사시켰더니 이제서야 반란이다. 대신 책 관련 팟캐스트에 집중하게 된다. 낭독이라는 것에 그리 큰 기대가 없었는데 사람 목소리로 활자를 불러내는 일에 또다른 매력을 느낀다. 작가가 하는 낭독회, 각종 책의 오디오 파일 등이 활발한 문화가 부럽기도 하다. 어떻게든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하는 어떤 가냘픈 노력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다감하니 매력적이다. 스마트폰이 잡아 먹어버린 그 수많은 대화, 시선맞춤, 고개 끄덕임, 읽기, 듣기가 어디로 간 것일까?

 

자꾸 허무하다. 이것도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유독인 걸까? 자다가 깨거나 자기 직전이면 가장 허무하다.  한 팔십 먹은 노파처럼 추억이나 곱씹고 회한에 잠긴다. 자꾸 생이 유한하다,고 생각하면 이 모든 일상들이 이 모든 욕망, 꿈들이 초라하게 쪼그라든다. 자꾸 죽음, 상실에 관련된 책들을 읽게 되어 그런 건지,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구조는 생의 유한함으로 수렴되는 것이라 그런 건지. 이것도 더 살고 나이가 들면 또다른 위안이나 깨달음으로 달래지는 일일까? 서른 초반만 해도 늙는다거나, 죽는다는 일에 그렇게 집중했던 것 같지 않은데 이건 모 자꾸 어차피 다 늙고 소멸하고 사라진다,는 전제로 접근하기 시작하니 가슴이 다 서늘하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이 단계도 결국 어리석음이고 또 다른 차원의 성숙으로 가는 단계였으면 좋겠다. 이게 끝이라거나 별 거 없다,는 결론이 나올까 두렵다. 아주 늙은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실없고 엉뚱하고 때로는 가혹하다.

 

듣고 읽다보면 나아질까? 아니면 더 악화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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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8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302moon 2016-01-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프라인 매장에서 사려다 알라딘에서 사야지, 하고 나왔거든요. blanca님 리뷰를 읽으니, 당장 사고 싶어졌어요. 다음 달에 주문해야 하는데 T_T

blanca 2016-01-28 20:05   좋아요 0 | URL
다음 달이면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 참으셨다가 주문하시면 받아보시는 기쁨이 더 크지 않을런지요. 저도 사실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요.^^;;
 

결손 가정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아이를 학대하지도 않았던 엄마는 여느 날처럼 안녕이라고 말하며 학교에 보냈던 아이가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의 용의자라는 전화를 받고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이 더 다치기 전에 자신의 아이가 차라리 자살하게 해 달라고.

 

 

 

 

 

 

 

 

 

 

 

 

 

 

 

 

결국 아이는 그렇게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건장한 체구의 아들이 학교에서는 치욕적인 왕따와 굴욕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었고 졸업파티에 파트너를 대동하고 미소짓던 동영상을 남겼던 아이가 뒤에서는 이미 무서운 범죄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는 숱한 가정법과 만난다. 만약 그 때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라면, 아이는 이렇게 무차별 총격으로 친구들을 희생시키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하지만 그러한 모든 가정법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서 어머니는 그러한 아이를 낳고 기른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아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요. 우리는 그 아이가 다른 일을 하기를, 보다 나은 일을 하기를 바랄 수 없어요. 결말을 알고 있으면 이야기를 훨씬 잘 들려줄 수 있죠.

<중략>

 

나는 다른 누군가의 아픔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나는 아픔을 받아들여요. 인생은 아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이 내 인생이에요. 딜런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엔 더 나았겠죠. 하지만 내게는 더 나은 일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해요.

- 앤드루 솔로몬 <부모와 다른 아이들 2>

 

자식을 가지는 일은 어쩌면 자신의 삶으로 끝날 서사를 더 길고 거대한 것으로 만드는 길에 서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를 배반하고 자신보다 더 빨리 끝나게 될 아이의 이야기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참혹한 고뇌와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인가. 그 아픔 앞에 선 모정은 그러나 담담하게 저자 앞에서 이미 끝나버린 아이의 이야기를 술회한다. 이제 미래로 나아가는 가정법은 과거로 향한 가정법에 뭉그러지고 응시해야만 하는 그 처절한 비애 앞에서 나온 어머니의 이야기, 아픔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 이것이 내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된다.

 

1권에서는 사회적으로 도와주고 지원해줘야 한다는 합의가 전제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권은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 범죄를 저지른 아이, 타고난 생물학적 성정체성을 부정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어른들의 잘못된, 강요된 선택이 있었다는 사회적 시선이 더욱 가혹하게 작용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러한 아이들을 낳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비난이다. 아이들은 탄생 자체부터가 상처로 작용하는 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로 끝맺음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간으로 가지게 된 아이로부터가 손주까지 보게 된 여인의 이야기는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이겨내고 삶의 이야기로 통합하며 화해하게 되는지에 대한 가장 슬프면서도 처절한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내게 그들이 절대로 모를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요. 그들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모를 거예요. 귀여운 손주들이 있다는 사실도 절대로 알 수 없죠. 영원히 모를 거예요. 나만 아는 거예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다지만 아직도 이 지구의 곳곳에서는 남자들의 전쟁으로 폭력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르완다의 종족학살로 약 50만의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5천 명의 아이들의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는 충격이라는 말로 다 담아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자신을 낳은 엄마에게서도 부정당하고 버림받아 떠돌고 있다고 한다.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상처가 된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너무 슬프다.

 

"자기 구원을 위한 안내서로서 이 책은 수용에 관한 설명서다."라는 저자의 첨언은 그러나 그러한 수용이 반드시 사회적 지지와 구성원들의 강력한 감정적 공명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예증하는 사례집이기도 하다. 자식을, 그리고 그 아이가 더군다나 다른 여느 아이들과 다른 이례적인 아이일 때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게까지 양육하는 긴 여정은 참으로 고독하고 힘겨운 과정일 것이다. 또한 그 종착점이 그러함에도 끝까지 그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결론이 될 수도 있다. 해피엔딩은 삶의 의미도 결론도 아니다. 아프지만 이야기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주어지는 그러한 곳에 대한 기대가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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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1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빈에 대하여, 그을린 사랑이 떠오릅니다. ㅠ

blanca 2016-01-16 16:37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이다!! 아, 저 그 영화 본다 본다 하면서 못 봤어요. 조만간 봐야겠어요. `그을린 사랑`이라는 이야기에 가슴이 서늘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