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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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전부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책은 당신을 깨운다. 그것만으로도 그 책은 전부가 아니어도 된다. 이 책은 나에게 그랬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대한 해석, 자신의 개인적 감상, 경험을 덧붙인 부드러운 책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면이라면 이 책은 닮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자주 그런 류의 책들에서 회자되는 대목들이 언급된다. 하지만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덧붙여진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실제 영문학과 교수다. 그리고 이 책은 숱한 문학에 덧씌워져 있는 거대한 환상의 장막을 가차없이 벗긴다.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로 이야기되지만 그 어떤 '~주의'도 문학을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데에 이용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주의도 낭만주의도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계는 명료하다. 문학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것은 객관적이거나 공정하거나 거대한 진실이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기대를 버리고 독자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읽는 이가 다가와야만 부활하는 이야기에 발을 들여 놓는다.

 

스토리는 타래처럼 뒤얽힌 이 세계에 억지로 일종의 도안을 새겨 넣으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세계를 단순화하고 빈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서술한다는 것은 변조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 말은 곧 모든 서사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서사는 그 자체의 한계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합니다.

-p.202~203

 

"하나의 총체적 서사는 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일견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시선과도 연결되어 있는 깊이 있는 자인이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은 그 앞에서 어불성설이다. 그에게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꼭 이야기가 아니어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이 깊이 와닿았다. 삶은 통합된 잘 직조된 패턴으로 설명 가능한 서사가 아니라는 것을 나이 들며 느끼게 된다. 중구난방으로 일어나는 일들, 맥락에 닿지 않는 반응들도 삶의 통로로 예고없이 기어 들어온다. 거기에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하면 어지러워진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이야기를? 질문은 난무하고 그것은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경로를 벗어나 소외된 고독한 이방인이 암흑을 대변해야 할 때 느끼는 심정과도 닿아있다. 하지만 원래 서사란 환상이고 심지어 그 환상을 토대로 쌓아올리는 문학마저 스스로 그것을 배반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면 당연히 살아 숨쉬는 인간의 삶이 잘 짜여진 이야기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p.308

 

문학에 대한 한계와 아이러니는 그것이 바탕으로 하는 삶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서도 연유하지만 그것을 언어로 옮길 때 따라오는 그 공백과도 겹친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절망이나 무용함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지점에서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할 수 없기에 그것을 향해 끊임없는 언어의 순례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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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6-02-1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깔끔한 문장입니다^^
여러 고전문학 읽기를 통해 다양한 사고와 간접 경험을 하는, 제 안의 감성을 깨우는....
덕분에 유연한 사고도 가능하겠지요. 나에게만 생긴 일이 아니라는 위안도 갖게 되고요.

blanca 2016-02-15 14:44   좋아요 0 | URL
한동안은 소설을 안 읽기도 했어요.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허무감이 좀 들어서요. 그런데 요새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안에 불완전하거나 상충되더라도 제가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경험한 것들의 조각들이 있어서 반가워요.

마녀고양이 2016-02-15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하이
전 책서평을 담은 책은 거의 안 읽지만, 블랑카님의 말씀대로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참 마음에 드는군요~~~

오늘 추워요

blanca 2016-02-15 14:4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도 잘 지내셨죠? 며칠 전만 해도 봄날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후진이에요--;; 오늘은 여느 겨울처럼 참 춥네요. 빨리 봄도 오고 꽃도 폈으면 좋겠어요.
 

이 모든 것이 완성되면......

내가 마지막 펜놀림까지 끝내고 나면

나는 옳거나 그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 헤어진다고 해도 그는 내 삶에서 횃불 노릇을 할 거야.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중>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십칠여 년간 오매불망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꿈꾸다 거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부부가 된 한스카 부인이 자신의 여동생에게 보낸 발자크에 대한 속내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실현되지 못하거나 거짓이었다. 발자크는 빅토르 위고의 조사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모두에게 위대한 평등이자 자유인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가 '옳았다'는 것을 그의 작품들로 증명해 내었고 그가 자신의 부와 명예를 담보로 한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숭배를 바친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한스카 부인은 끝까지 그의 사랑을 계산했으니까. 그녀의 발자크에 대한 정확한 감정은 그 어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모순적이고 베일에 싸여 있다. 그녀는 발자크의 오랜 연인이 되고 그와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 속의 한 존재로 승격시켰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의 진정성과 자신의 충절을 의심받는 불충을 저질렸다. 그녀 또한 발자크처럼 불멸을 택했다. 발자크를 사랑했던 이 책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여자를 미워한 것처럼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의 역작 <발자크 평전>은 그의 죽음으로 발자크의 저 거대한 인간 세계의 축도를 언어로 완성해 내고자 했던 꿈이 좌절된 것과 같은 길을 걸었다. 역설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를 지배했던 발자크의 삶, 문학에 대한 사랑과 경탄은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생명을 얻었다.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열려 있고 그 열려 있는 통로는 여전히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이 오고간다. 삶과 인간 세계 전체를 그렇게 자신의 작품 안에서는 현명하게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사내는 삶에서는 항상 실패했고 그 실패는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배가 막 항구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파도치를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와 같다. 발자크는 귀족을 숭배했고 돈을 숭앙했고 돈을 가진 귀족 여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전복시키고 그것을 딛고 뛰어 오르기를 바랐다. 항상 무모하게 사업을 벌였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쓰지도 않은 소설들을 미리 팔아 챙긴 돈을 흥청망청 쓰고 빚쟁이들로부터 도망다녔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돈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구제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실제 끊임없이 그러한 후보자들을 물색하고 쫓아다니고 그녀들에게 시간, 돈, 열정을 낭비했다. 파리가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 수도복을 입고 미친듯이 쓰고 또 쓰고 열번 이상을 고쳐 쓰며 인간의 그 어리석은 욕망을 그 좌절하는 행함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작가의 모습 또한 발자크의 것이었다. 발자크는 몸소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에서 가장 섞이기 힘든 그 모든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한데 뭉뚱그려 달고 다닌 인간이다. 서머싯 몸이 그를 진실성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 비난해도 "그는 내가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르고 싶은 유일한 작가"라고 상찬한 것이 한데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발자크라는 현상은 모든 논리적인 결론이 빗난간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차라리 하나의 사족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그의 서글프고 어리석고 무모한 삶이 우리 자신들의 삶이 극단적으로 극화되었을 때와 닮아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하나의 예언 같다. 모든 인간과 모든 삶은 언제나 항상 그러한 가능성으로 가장 쉽게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영악한 두 딸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도 발자크가 그려내려 했던 <인간희극>의 인간 군상의 한 축도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감안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하게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나귀 가죽>에서 골동품상 노인이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삶의 동인인 '바람'과 '행함'을 든 것도 결국 그러한 삶과 존재의 생래적인 모순,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발자크의 눈이 멀어서도 한스카 부인의 곁에서 귀족 생활을 누리려 했던 그의 어리석음은 그 자신이 마지막으로 쓰다 만 가장 서글픈 삶의 텍스트다. 그러한 그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까지 낭독한 사람이 빅토르 위고였다. 빅토르 위고는 이 성취로는 위대했고 삶으로는 어리석었던 남자의 삶을 가장 고결하고 우아하게 압축하는 언어를 선물한다. 마침표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신사 여러분,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밀도가 전부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발자크에게서 가장 온당한 밀도를 얻는다. 그는 단 하루도 '산다는 의미'에서 낭비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가 낭비된 것은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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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0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분방하게 살면서도 글 쓰는 일에 충실한 발자크의 삶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콜레트가 소녀였을 때 독서를 좋아했어요. 그녀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가 발자크였습니다.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blanca 2016-02-10 10:59   좋아요 0 | URL
이렇게 통찰력 있는 글을 써낸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밥 먹듯이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행태를 거의 죽을 때까지 계속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어쩌면 발자크가 실생활에서는 그랬기에 이러한 글들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랬어요. 벌써 연휴 마지막 날이네요.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부하기 싫을 때면 스무 살의 오월에는 꼭 사랑이라는 걸 해 볼 거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스무 살 오월에 그 남자를 만났다. 그것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팬심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아이돌을 따라다니듯 짝사랑인지 아니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인 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맹렬히 그 '첫사랑'이라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명명한 것에 매달렸다. 그것은 백일도 채 못 가 사그라질 잉걸불이었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하지만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스무 살로 돌아가면  그 남자에 퍼부었던 그 아낌없던 유치한 감정들이 도드라지며 떠오른다. 최선을 다했기에 어리석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미의 "슬픈 이별"의 가사처럼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싶지만 나는 어쩌면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그게 젊음이니까. 그게 또 첫사랑의 무모함이니까.

 

 

 

 

 

 

 

 

 

 

 

 

 

 

 

 

 

 

2011년 당신의 부음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 날은 눈발이 흩날렸고 첫아이를 낳았던 집에서 씩씩대며 이사나가던 날이었으니까. 아저씨들이 짐을 꾸릴 때 나는 우연히 당신의 부음을 들었다. 마음 한켠이 스산해져 와서 동생에게 문자를 보내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  벌써 당신의 죽음이 오년을 훑고 지나갔고 당신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했던 당신과의 대화, 대담들이 다시 뒤로 보내었던 시간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나 정이현 작가가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말.

 

우리는 주로 맛있는 밥을 같이 먹었다. 어떤 약속은 지켜졌고 어떤 약속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중 

 

박완서 작가와 정이현 작가의 거리가 그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 지켜진 약속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지나가도 변함없는 관계의 친밀감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남자네 집>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거론된다. 내가 읽은 것은 단편인데 그것이 후에 장편이 된 모양이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져 찾아보니 세상에, 2007년 박완서 작가의 친필 서명이 있는 <친절한 복희씨>에 몇 번이나 줄을 그으며 읽은 흔적이 있는 그 이야기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돌아가고 또 가고. 문장들이 낯설지 않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화자가 후배의 집들이에 간 김에 그 근처에 살았던 자신의 청년기와 첫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6.25라는 시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역사적이고 지극히 사적이다. 시대의 격동은 '나의 첫사랑'을 두고 흘러가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은 안일했지만 당연했다. 아름답지만 미숙했던 첫사랑을 저버린 것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흔들림 없이 양육할 굳건한 우산 같은 남자를 택해야만 한다고 믿었을 화자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것이 비단 그 때만의 시대상이었을까. 모든 허룩하고 순전한 첫사랑의 귀결 앞에는 그 동화의 마지막을 싹둑 잘라 낼 엄혹한 현실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 가식 없는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하나 하나가 다 필사하고 싶을 만큼 인간에 삶에 밀착해 있어 뚫고 들어온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이래야만 영원히 살아 꿈틀댈 것이다. 절망하기엔 이르다.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중략>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그 남자네 집> 중

 

첫사랑은 이런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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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이 쓴 소설 중에 슬프면서도 쓸쓸한 여운을 주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이 `그 여자네 집`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나왔던 소설이에요. ^^

blanca 2016-01-28 15:55   좋아요 0 | URL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에도 그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작가가 난감해 하는 반응이어서 김영하 작가도 그렇고 교과서에 작가들 작품이 실리는 게 한편 작품을 규격화하거나 인위적인 해석에 대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2016-02-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7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마다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는 편이다. 신기한 게 갈수록 글씨가 커지고 흘려 쓰게 된다. 서른 언저리의 다이어리의 글씨는 내가 쓴 게 분명한데도 읽으려면 눈이 피곤할 정도로 빽빽하다. 가소로운 것은 해마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겁에 질려하는 모습. 특히 서른 언저리에 그러고 앉아 있었던 과거의 나를 보면 슬쩍 귀엽기까지 하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젊지는 않다,고 느끼게 됐는데

 

육십대 내내 나는 여전히 중년 언저리에 있다고 느꼈다. 중년이라는 해변에 안착한 건 아니고 그 연안을 항해하고 있어 중년이 소리쳐 부르면 닿을 거리에 있다고 말이다. 일흔 번째 생일에도 그 느낌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건 내 생일이 지난 것도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그 느낌은 결국 바뀌었다. '일흔이 넘었다'는 건 늙은 것이다.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중

 

엥? 일흔까지 중년? '늙었다'는 건 일흔은 되어야 하는 건가? 저자 다이애너 애실은 1917년생이다. 물론 생존 작가. 은퇴는 75세에 했다. 문학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고 그곳의 편집자로 필립 로스, 잭 케루악, 진 리스, 존 업다이크를 발굴했다고 작가 소개란에 나와 있다.

 

 

 

 

 

 

 

 

 

 

 

 

 

 

 

손바닥 만한 책. 이백여 페이지. 낯선 이름. 게다가 여든 아홉의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드디어 "늙은 게 뭔지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려 볼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을 뻔 했지만 중간에 잃었고 무신론자고 자신의 가계를 따져가면 대부분 장수하며 얼마 안 앓다 감내할 수준의 고통을 겪다 죽음을 맞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서도 낙관한다. 대단히 건조한 듯한 어투지만 난감할 수준으로 솔직하기도 하고(여기서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나라 출신,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것의 공통점) 젊은 시절의 다소 화려한 연애 편력에도 그다지 죄책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나 때때로 삶에 대하여 예리한 통찰력을 꾸미지 않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매력적이다. 이런 여든 아홉이라면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솔직히 든다. 우울하거나 자조적이지 않다. 죽음에서 멀지 않은 나이에 떠올리는 이러한 기계론적 연상은 이 할머니의 담담한 말들 앞에서 밀려나간다.

 

그런데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해 모든 가능성이 열린,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간간이 보게 되면 우리는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이 아니라 시작과 성숙과 쇠락,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한 광대하고 다채로운 강의 일부라는 사실, 아직도 그 일부이며 우리의 죽음 역시 아이들의 젊음과 마찬가지로 그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p.110 

 

오늘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들. 아기 둘을 둘러싸고 이쁜 언니들이라고 당신들을 지칭하며 발산하는 느낌은 강퍅함도 서글픈 기운도 아니었다. '어떻게 늙을까' 그냥 한번씩만 물어보며 걸어가도 그 길은 조금 더 넓어질 것 같다. 떠밀려 가다 보면 다이애너 애실의 말처럼 때로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 " 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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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1-26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아직도 젊으신데 벌써부터 이런 쪽의 책을 너무 탐독하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사실 그렇더군요. 예전엔 60도 많다 싶었는데 저의 어머니 60대에 할머니란 소리 듣기 싫어하시더군요.
솔직히 75세도 좀 억울할 것 같아요. 100세 가까이 산다고 치면.
옛날 70대와 지금의 70대는 다르죠.
올해 저의 어머니가 80이신데 작년에 그리 아프셔서 그런지 이제 빼도 박도 못한 노년이다 싶더군요.
저도 중년이고 보니 마음은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나이만 든다는 게 좀 억울하다 싶더군요.
예전엔 몸도 마음도 다 청춘이었는데.
그러니 우리 2,30에 중년이면 나이 꽤 많은 줄 알고 줄긋기를 했다는 게 참 의미가
없어져요. 지금의 2, 30대가 우릴 보면 그러고 있겠지 하면 이 나이차란 극복할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ㅠ

blanca 2016-01-26 15:55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정말 그렇죠? 제가 요즘 보는 책들이 너무 한 분야로 집중된다는 느낌이... 아직 젊다고 얘기해 주시니 갑자기 기분이 정말 확 젊어진 것 같고 좋네요.^^ 맞아요, 제 예전 다이어리만 봐도 얼마나 가소로운지 실소가 자꾸 나온다니까요. ㅋㅋ 나중에 읽으면 지금 제 글이 또 그렇게 느껴질까 걱정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도 좋지만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낸 여섯 편의 장편의 묘미도 기막히다. 대단히 심오하거나 스토리라인이 걸출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한 권 한 권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 예리한 직관, 언제나 무리없는 이야기 진행력이 말 그대로 참 좋다. 그런데 유독 한 대목이 참 인상적이라 여러 번 펼쳐 보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독특한 모순에 대해서도 얼마쯤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다운 독단에 빠져 사람을 흔히 '착하다'  또는 '나쁘다'로만 평가했지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됐다. 그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용기를 내어 부상자를 구했던 사람이 방금 자기가 목숨을 내걸고 구한 사람의 작은 물건을 훔치는 비열한 지경으로 전락하는 꼴도 보았다.-애거서 크리스티 <딸은 딸이다> 중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의 양 대척점에는 분명 아주 소수만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하나의 환상이나 허상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어", 혹은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빈약한 표현인 지를 기억하려고 한다. 나부터도 과거의 수많은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보기도 부끄러울 만한 모습들이 있고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일부로 통합하기 어려운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는데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참으로 혼란스럽다.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반핵 운동 시위에 나섰던 행동하는 지성이자 <행복의 정복>의 저자가 너무 솔직하니 난감할 정도다. 그 솔직함의 잣대는 특히나 자신의 연애, 타인에 대한 평가에서 두드러지니 더욱 그러하다.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자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러셀이 아내를 두고 귀족 집안의 (이 대목이 강조되는 부분도 사실 프루스트가 귀족 가문을 동경해 마지 않았던 속물성과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유부녀와 벌이는 애정 행각도 시작해 불과했다. 그 여인과 소원해지며 또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관심을 끄는 대목까지 와 있다. 이미 훌쩍 노년기에 있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그저 그것을 미화하거나 하나의 거대한 조작으로 몰고 가는 것보다야 이런 솔직함이 더 그 글을 쓰는 취지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의 삶의 중년기까지도 이르지 못한 터다. 이미 늙어 자신의 삶을 큰 그림으로 조감하는 사람 앞에서 고작 그의 반도 못 산 내가 느끼는 이러한 당혹감은 미숙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러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중이다. 더해서 D.H. 로렌스와의 교유에서 그의 적나라한 실체를 고발하는 대목은 더욱 그러하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에는 그의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청년기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그의 묘사력과 언어는 로렌스만의 독특한 마력이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런 사람이었다니... 러셀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파시스트였다. 게다가 사상도 없이 그저 아내의 사상을 언어화하는 꼭두각시이기도 했다.

 

아, 어쩌나. 자서전이나 평전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난감하기는 또 처음이다. 아직 반도 안 왔으니 더 주욱 나가면 이러한 그의 뜨거운 솔직함도 인간에 대한 이해나 삶을 알아가는 데에 일부분으로 잘 통합될까. 이것은 마치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앞에서 의미심장한 비웃음으로 입술을 떼기 시작하는 그의 측근을 만나 껄쩍지근한 뒷얘기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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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1-2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읽고 대단한 건축가구나했는데, 그가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에 유부녀와 놀아나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 알고 경악했어요.,책에는 어찌나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시했던지..하아 흑인집사가 그이 멸시와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의 처자식을 죽일 정도로 개같은 인성의 소유자더라구요. 하....

blanca 2016-01-23 09:4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서재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유명인들이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사생활에서 비도덕적이었거나 그의 세평과 맞지 않는 뒷모습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기대했던 러셀상이 있어서 참, 타인이 쓴 평전도 아니고 자서전인데 실망스러운 면이 많이 보이네요. 그래도 적어도 자신을 포장하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는 그 정직성 만큼은 돋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