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는 편이다. 신기한 게 갈수록 글씨가 커지고 흘려 쓰게 된다. 서른 언저리의 다이어리의 글씨는 내가 쓴 게 분명한데도 읽으려면 눈이 피곤할 정도로 빽빽하다. 가소로운 것은 해마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겁에 질려하는 모습. 특히 서른 언저리에 그러고 앉아 있었던 과거의 나를 보면 슬쩍 귀엽기까지 하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젊지는 않다,고 느끼게 됐는데
육십대 내내 나는 여전히 중년 언저리에 있다고 느꼈다. 중년이라는 해변에 안착한 건 아니고 그 연안을 항해하고 있어 중년이 소리쳐 부르면 닿을 거리에 있다고 말이다. 일흔 번째 생일에도 그 느낌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건 내 생일이 지난 것도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그 느낌은 결국 바뀌었다. '일흔이 넘었다'는 건 늙은 것이다.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중
엥? 일흔까지 중년? '늙었다'는 건 일흔은 되어야 하는 건가? 저자 다이애너 애실은 1917년생이다. 물론 생존 작가. 은퇴는 75세에 했다. 문학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고 그곳의 편집자로 필립 로스, 잭 케루악, 진 리스, 존 업다이크를 발굴했다고 작가 소개란에 나와 있다.
손바닥 만한 책. 이백여 페이지. 낯선 이름. 게다가 여든 아홉의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드디어 "늙은 게 뭔지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려 볼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을 뻔 했지만 중간에 잃었고 무신론자고 자신의 가계를 따져가면 대부분 장수하며 얼마 안 앓다 감내할 수준의 고통을 겪다 죽음을 맞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서도 낙관한다. 대단히 건조한 듯한 어투지만 난감할 수준으로 솔직하기도 하고(여기서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나라 출신,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것의 공통점) 젊은 시절의 다소 화려한 연애 편력에도 그다지 죄책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나 때때로 삶에 대하여 예리한 통찰력을 꾸미지 않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매력적이다. 이런 여든 아홉이라면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솔직히 든다. 우울하거나 자조적이지 않다. 죽음에서 멀지 않은 나이에 떠올리는 이러한 기계론적 연상은 이 할머니의 담담한 말들 앞에서 밀려나간다.
그런데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해 모든 가능성이 열린,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간간이 보게 되면 우리는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이 아니라 시작과 성숙과 쇠락,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한 광대하고 다채로운 강의 일부라는 사실, 아직도 그 일부이며 우리의 죽음 역시 아이들의 젊음과 마찬가지로 그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p.110
오늘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들. 아기 둘을 둘러싸고 이쁜 언니들이라고 당신들을 지칭하며 발산하는 느낌은 강퍅함도 서글픈 기운도 아니었다. '어떻게 늙을까' 그냥 한번씩만 물어보며 걸어가도 그 길은 조금 더 넓어질 것 같다. 떠밀려 가다 보면 다이애너 애실의 말처럼 때로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
"
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