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을 읽고 있다. 몽테뉴가 스스로의 게으름에 괴로워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다 이러고 살았구나. 생활 전반에 걸쳐 처리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고단해하고 도피하고도 싶어하고. 서른여덟에 자신만의 서재 안으로 들어와 은거하려 했던 그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장면도 그러하다.

 

 

 

 

 

 

 

 

 

 

 

 

 

 

 

 

 

 

 

 

갑자기 읽고 싶은 책들이 마구 출간되는 중이다.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은 시를 잘 모르는 내가 시를 시작하게 해 준 시집이다. 시인은 평범한 우리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을 간파하고 우리가 멈추는 지점에서 더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어쩌면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보고 그것들에 찔리는 천형을 지닌 선택된 자들인 듯하다. 그래서 시어에는 어떤 존귀함이 있다.

 

반드시 또 시가 읽히고 시를 쓰는 일이 존중받는 시대가 오기를 올 것임을 믿고 싶다. 시를 포기하고 남는 자리에는 버려야 할 것들이 밀려온다.

 

 

 

 

 

 

 

 

 

 

 

 

 

파스칼 키냐르를 시도해 본 적은 있지만 솔직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형형한 눈빛의 노작가의 인터뷰 내용은 꼭 알고 싶다. 생각해 보면 그런 작가들이 많다. 정작 그 사람이 낸 책은 읽어보지도 못하고 그 사람 자체에만 관심이 가는... 아마 폴 오스터도 그럴 거다. 김영하가 팟캐스트에서 전문을 읽어 준 그의 단편 하나만이라도 읽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머리숱이 많아 머리를 다 늘어뜨리면 붕 뜨곤 해서 항상 묶고 다녔었다. 머리숱 좀 줄었으면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다. 이제 반묶음을 하지 않아도 머리가 뜨지 않을 정도로 머리숱이 줄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는 일년이 어린 시절 생각하던 일년의 무게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 한 달은 하루 같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나날이 달라진다. 더 가볍고 더 빠르고 더 절절하다. 영원히 읽을 수도 없다. 다 읽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슬프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이제서야 좀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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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3-0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숱으로도 제 노화를 실감해요. 처음엔 머릿결로 노화를 실감했는데요. 그토록 찰랑이던 머리가 이젠 힘없는 머리가 되었더라고요. 최근에는 새치도 생겼어요. 최근에는 노화를 여러가지로 실감하는데, 그러면서 저 역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저는 파스칼 키냐르는 두 권인가 읽었는데, 쉼보르스카를 성공하지 못했어요. [끝과 시작]이 궁금해 읽기 시작했다가 종국엔 팔아버리고 말았어요. `반드시 또 시가 읽히고 시를 쓰는 일이 존중받는 시대가 오기를` 저도 바라는데, 그런데 저는 시를 여전히 잘 읽지 못하겠어요.

blanca 2016-03-08 14:09   좋아요 0 | URL
정말 나이에 따라 시간에 때한 인상, 느낌이 확연히 달라져요. 거울 앞에 서면 요새 좀 묘한 느낌이 들어요. 조금씩 천천히 얼굴에 시간이 보여요. 싫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하고...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존중받고 시를 써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시간들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6-03-08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카락에 힘이 빠져야 어른이 됨을 실감하게 된다는 말 동감, 하고픈 일이 많은데 늘 체력이 발목을 잡았고 앞으로 더 하겠죠 ^^

blanca 2016-03-08 14:10   좋아요 1 | URL
흑,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아주 묘하게 야금 야금 나이가 몸을 먹어가는 것 같아요.

cyrus 2016-03-08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희끗해져도 어른이 다 된거죠. 검은콩을 많이 먹어야합니다. ^^

blanca 2016-03-08 14:11   좋아요 1 | URL
에잇, cyrus님은 젊잖아요! ㅋㅋㅋ 그러고 보니 검은콩 먹은 지가 너무 오래 됐네요. ㅋ

cyrus 2016-03-08 20:12   좋아요 1 | URL
콩이 여성에게 좋은 음식입니다. 여성호르몬 생성에 효과가 있습니다. 남자가 검은콩을 많이 먹으면 탈모를 방지할 수 있어요. ^^

에이바 2016-03-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쉼보르스카 좋아해요! 파스칼 키냐르에 대한 관심도 비슷해요. 세상의 모든 아침 읽었는데 원어로 읽으면서 곱씹어야 하나,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 크게 와 닿는게 없어서요... 철학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요. 이번 악스트는 구입해야겠어요. ㅎㅎ 머리숱, 시간... ㅜㅜ 페이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공감합니다...

blanca 2016-03-09 10:03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시인 노년의 사진도 다 참 `그녀답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파스칼 키냐르는 언젠가 다시 한번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작품으로 만나면 또 다시 친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기억의집 2016-03-10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숱... 정말 고민이죠. 저는 이제 파마를 해도 힘이 안 생겨서 파마를 하지 않고 있을 정도입니다. 머리칼도 너무 많이 빠져 젊었을 때 숱많은 사진 보면... 저의 친정엄마가 젊을 땐 머리카락이 돼지털같이 뻣뻣하고 굵더니.. 나이 드니 어쩔 수 없구나 하시더라구요. 블랑카님 그냥 탈모약 드세요. 저는 샴퓨니 먹는 거 다 해봤는데, 판토가가 젤 효과 있었어요. 지금도 복용중~

츠바이크 좋아요~ 예전에 그의 소설도, 사람 탐구 들도 읽었는데... 안 읽으니 까 먹더라구요!


blanca 2016-03-10 14:46   좋아요 0 | URL
저도 머리털이 엄청 두꺼웠어요. 남들의 세배의 숱이라고 할 정도였고요.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머리숱이 많겠구나, 착각했는데, 흑, 애 둘 낳고 나니... 그 어떤 것보다 제 머리를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영원한 건 없더라고요. 저희 친정 엄마는 제 나이를 듣고 계속 놀라세요 ㅋㅋㅋ 딸 나이 먹는 게 너무 실감이 안 나시는 듯... 아, 츠바이크 너무 좋아요. 왜 다 완성 못하고 죽음을 택했는지...정말 본인 말마따나 성급한 사내 맞아요.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살고 보고 듣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도피나 휴식으로만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읽는 일은 나에게 위로를 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차마 읽어나가기 힘든 내용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그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때로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읽으려 했다. 내키지 않으면 그만두려고도 했다. 누가 읽으라고 숙제라고 종용하는 것도 아니니까 멈추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도저히 멈추지 못하고 계속 괴로워하며 끝까지 밀고 나갔다. 이 차마 전하기도 힘든 슬픈 가족의 유랑기와 그것의 그 비참한 말로를, 그것도 그것을 직접 겪은 막내 아이가 자라나서 회고하는 목소리는 구슬픈 만가였다. 비단 그 아이의 사형수 형을 중심으로 죽고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 가족의 회고담이 아니라 이것은 결국 인간이 가족, 정의, 질서라는 외연 아래 숱하게 놓쳐 버리고 왜곡하고 묵과하고 외면해 버리는 것들이 가장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형태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슬픈 예증이다.

 

 

 

 

 

 

 

 

 

 

 

 

 

 

 

어떤 순간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그런 죽음이 되풀이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 마이클 길모어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독실한 몰몬교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여자는  아버지뻘의 정체가 불분명한 사기꾼 남자를 만나 미전역을 유랑하다시피 다니며 아들 넷을 낳는다. 늙은 아버지는 습관처럼 아들들을 때리고 그 앞에서 아내를 폭행한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선물 포장 리본을 풀며 따뜻하게 익은 칠면조 고기를 먹는 헐리우드 영화 속의 행복한 아이들과는 달리 길모어 집안 아이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친구를 때리고 마약에 중독되고 감옥을 드나든다. 아버지가 육십이 넘어 태어난 막내 아들 마이클은 유일하게 감옥을 드나들지 않아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이 책의 저자가 된다. 사실 마이클은 길모어 집안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태어난 막내이기에 위에 세 형들이 겪은 그 비참한 경제난과 아버지의 학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감이 있다. 그래서 때로 그는 그들의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는 소외감을 느낀다. 특히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형 게리는 감옥에서 출소하여 자신에게 새출발의 기회를 주려 했던 몰몬교 외가가 있는 유타주로 돌아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스스로 사형 집행을 종용하여 1977년 부활된 사형제에 의하여 잔인하게 총살을 당하게 된다. 저자 마이클은 <롤링 스톤>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언론인으로 졸지에 살인자이자 사형수의 동생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미 이러한 과정은 노먼 메일러의 <사형집행인의 노래>에 묘사되었다. 십수 년이 흐르고 연락이 끊겼던 맏형과 재회하고 그에게서 숨겨진 잊혀진 가족사를 찬찬히 짚어가며 마이클 길모어는 가슴 깊이 가라앉아 있던 숱한 상처와 눈물의 기록을 하나 하나 꺼내어 놓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때로 경직되고 보수적이고 가차 없는  몰몬교의 피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남편에게 학대받고 아들 둘을 먼저 죽음으로 떠냐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걸핏하면 떠나고 때리고 외면하고 체념하는 데에 익숙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매를 맞으며 증오와 복수심을 배워야 했던 형들의 이야기가 마침내 살의와 만나고 스스로의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결말로 치닫는 비가다. 남아있는 형제들 마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가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악운과 저주의 늪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댄다. 맏형 프랭크와 막내 마이클은 그렇게 남아 가족의 이야기를 복기하는 마지막 생존자가 된다.

 

불확실성의 세상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한다. 인간이란 연약하기 짝이 없는 허울 밑에서 선량해지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악행들을 사랑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하기 위해 시도된다.

 -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떠올랐다. 그도 가족사를 통하여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세대를 뛰어넘어 흐르는 악한 본성의 극복 가능성에 그가 돌연 갖다 놓은 '사랑'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응답받지 못했던 사형수 게리 길모어의 마지막 말은 이 무모한 사랑의 언어와 또 만나고 만다. "그래도 아버지란 존재는 늘 남아 있겠지."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은 하나의 삶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말 두려운 일이다. 문이 닫히면 그 안에서는 한 생을 직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는 일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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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6-03-08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리뷰는 언제나 탁월합니다. 캬, 하는 감탄이 나오죠. 특히 제가 부러운 건 글 앞부분입니다. 시작을 참 멋지게 하십니다. 글구...님이 쓰신 글 앞부분을 읽다보니 옛 추억이 떠오르더군요. 친구들과 놀이공원을 갔는데, 레일을 달리는 무서운 열차를 타자는 우리의 제안에 한 친구가 반문합니다. ˝왜 돈내고 무서워야 해?˝

blanca 2016-03-08 14:13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친구분 얘기는 바로 저의 얘기네요. ㅋ 저는 놀이공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사람이에요. 친구들 다 즐겁게 타는데 저는 너무 무서워서 가방을 들고 아래에서 구경하던 기억이 나요.

단발머리 2016-03-1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이공원에서 핫바 사먹고 커피 마시고 기념품 구경하고 놀이기구 안 타고 집으로 오는 사람, 여기 하나 추가합니다. ^^

blanca 2016-03-21 17:48   좋아요 0 | URL
왜, 돈 주고 그 무서운 걸 타야 하는지 ㅋㅋ 문제는 이제 애가 크니 놀이공원 가서 바이킹 타자고 하네요. 듣기만 해도 어지러워요.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진지한 깨달음은

 

빵을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케이크를 이야기해 빈축을 샀다고 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늘 운명에 의하여 쓰러진 자"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로코코의 여왕이라 명명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최고와 최악만을 몸소 구현한 인물이다. 인생에서의 성공이라는 척도가 지금 자본주의의 그것으로 한정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최고를 누려봤으며 파멸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가장 극악무도하게 운명의 손아귀에서 형상화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다면 그 극한의 마침표를 찍은 것도 그녀의 삶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려내는 마리의 삶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모두의 기대를 상회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그녀의 이야기의 만가의 대목에 이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그가 어떻게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신화, 오해의 휘장을 벗겨내고 인간에 밀착하여 그 내면의 심리, 감정, 욕망을 세밀하게 언어로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는가의 능력의 지평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실과는 너무나 먼 것이었다.

 

 

진실이란 대개 그렇듯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 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p.10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범했다. 위대하지도 그렇다고 비열하거나 간악하지도 않은 하지만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들의 댓가를 고려하지 못하는 둔감함에 굴복했을 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녀가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주고받은 편지를 자주 인용한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딸의 아둔함과 무절제함을 간파하고 걱정하여 몇 번이나 그러한 우려와 충고들을 했고 심지어 측근을 파견하여 멀리 떨어져서도 제대로 훈육하려 애썼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인지 딸의 개과천선도 비참한 말로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성장통은 혁명의 압력이 왕가에 직접 가해지면서부터 시작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녀의 불행이 그녀를 결국 제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음을 간파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통해서 자신이 학습했던 그 수많은 가치들이 이 평범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게 지대하게 주어진 물질적 풍요로 타락일로를 걸으려 했던 한 여인이 어떻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 앞에서 그것을 수긍하고 마침내 그것을 박차고 더 높은 경지로 뛰어오를 수 있었는 지에 대한 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삶을 통해 어떻게 단련되며 타락하거나 침몰하지 않고 고귀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해 준다. 그녀의 사치행각은 일부였고 억지로 파리로 끌려가 유폐되며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최소한의 불빛조차 빼앗겼을 때 그녀가 어떻게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비극들을 감수하고 죽음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그녀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제 미래 세대와 역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자신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자신을 단두대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혁명이 달성하려 했던 명분의 뒤안에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 순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렇게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한탄하며 되뇌었던 "도대체 넌 언제 너 자신이 될 거냐!"라는 어머니의 탄식에 응답하게 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호사가들의 입방정은 없다. 좀 빈약하더라도 진위가 분명한 자료들만으로 슈테판 츠바이크는 사치스러운 인형을 한 명의 평범한 어머니로 사랑하는 남자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은 반지를 감옥 안에서까지 끼고 있었던 여인으로, 마지막에는 역사에 남겨질 위대한 여제의 막내딸로 살려 놓는다. 그 틈새에는 인간에 대한 통찰과 그 내면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고찰이 더욱더 풍요롭게 이야기들을 낳는다. 특히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스웨덴 백작 페르센과의 이야기는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라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꿈꾸는 불멸의 가치와 만나 빛난다. 그녀가 추락할 때 이 남자는 전면에 등장한다.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 버린 지점에서 숨어 있던 사랑은 걸어 나온다. 그녀가 사라지자 이 선량했던 미남자는 냉정해지고 불우해지고 비관적이 된다. 그녀를 위해 죽지 못했던 날짜는 자신이 마침내 죽은 날짜와 만나 드디어  완성된다. 시종일관 담담했던 문장들은 이 둘의 사랑 앞에서 흥분하고 떨린다.

 

누구나 운명에 의하여 농락당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이나 그 인간의 내면의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국면은 달라진다.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은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가장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가 아니다. 불행은 아프지만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암초임을 그는 이야기한다.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여정은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 되고 만다. 그게 삶임을 슈테판 츠바이크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이 언젠가는 한없이 고귀해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은 그가 삶과 인간에 절망해서가 아니다. 그의 말들은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는 포기하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극단의 지점에서도 날아오를 수 있는 그 잠재력을 이미 보아 버린 다음에야 순전한 포기와 절망은 절대 뒤따라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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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이 2016-03-0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blanca 2016-03-03 18: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열심히 쓰겠습니다.

Jeanne_Hebuterne 2016-03-14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판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던 것 만큼이나 탁월한 자기변론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어요. 불굴의 정신을 보았다는 느낌이랄까요. 탕플 이후에야 이 사람은 진실한 자기 자신을 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하면 어제와 오늘이 같은 다른 이들보다 이 사람은 여러모로 압축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행운을, 그럼에도 그 압축된 삶이 하필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리즘을 지나쳐야만 했다는 점에서는 불운을 지녔던 게 아닐까. 그저 안타까웠어요. 츠바이크의 말대로 당시 보통의 귀족 딸로 태어났더라면, 아니면 그저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훨씬 더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요.

blanca 2016-03-14 14:58   좋아요 0 | URL
쟌느님은 며칠 전에 이 책을 읽은 저보다 더 세세하게 깊이 있게 내용을 잘 떠올리시는 것 같아요. 저에게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상을 보는 그 숱한 주어진 시선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 만큼 충격이었어요. 항상 사치스럽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던 여인이 삶의 비극 앞에서 보인 태도와 말들이 츠바이크의 말처럼 삶의 불행 그 자체가 사람을 성숙시키는 과정이더라고요.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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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망명지 브라질에서 1942년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은 언제나 내면의 자유를 중시했던 그가 히틀러에 의하여 자신의 저작들이 불태워지고 반유대정책으로 친구, 가족들이 죽어가고 모국인 오스트리아마저 붕괴되자 그 자신이 인용했던 셰익스피어의 "시간이 우리를 찾는 만큼 우리 시간을 맞이하리."를 그 자신의 해석대로 구현한 듯하다. 그의 발자크는 발자크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랬듯 완벽하게 완결되지 못한 채 그의 품 안에서 떠나 오히려 더 큰 생명력을 얻게 된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고백은 운명에 의하여 패배 당하지만 도덕적 의미에서는 승리를 구가했던 그의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의 그것이기도 했다. 이제 이 시대의 절망 속에서도 청년 시절의 마음의 별빛을 잃지 않았던 사내의 '한 세대 전체의 운명'과 만난 그의 '삶'을 감히 읽기 시작한다.

 

그 자신의 정체성은 스스로가 오스트리아인, 유태인, 작가, 휴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1차 세계대전 전의 안정적인 시대는 이 배움을 향해 온몸을 던질 태세가 되어 있던 청년 작가에게 더없이 좋은 학교가 되어준다. 김나지움 시절에 친구들과 몰려 다니며 빈 교향악단의 리허설에 숨어들고 골동품 가게를 더듬던 재기 발랄하던 아이는 모든 저속한 것을 못참아 했던 릴케에게 빌려준 책에 예쁜 리본이 묶여 되돌려 받는 빛나는 경험과 로뎅의 아틀리에에서 로뎅이 자신의 작품을 무아지경에 빠져 수정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생의 위대한 순간을 가지게 된다. 그 자신의 표현처럼 이러한 청춘은 "구애받지 않고 맛보고, 시도하고, 향유"하는 시간들로써 점차 이 세계를 향해 걸어나가는 지평을 확장하게 된다. 다채로운 경험들과 예술적 소양들을 쌓고 위대한 작가, 화가, 사상가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가지며 내면을 확장하는 그의 청춘의 그 무한한 깊이와 넓이의 스펙트럼이 참 부럽게 느껴졌다. 많은 미사여구나 과장을 동원하지 않고도 그의 문장 하나 하나가 마치 스무 살의 그것들처럼 생기 넘치고 발랄하게 다가와 읽는 과정도 마치 다시 젊음들을 맛보게 되는 것 같아 참 즐거웠다.

 

빛나던 성장의 시간들이 지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이제 유명인이 되어버린 츠바이크가 쉰의 생일을 맞아 느낀 그 알 수 없는 불안과 안정의 파괴 위에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그 불온한 소망은 그의 남은 시간들의 복선 같아 섬뜩했다. 회고하는 시점에서 그가 기억해 내는 그 오십 세 생일의 생각, 느낌들은 오래도록 그림자로 남았다. 경제적 안정, 명성으로 단단해진 지반은 곧 서서히 붕괴해 그의 그 불온한 소망을 비극적으로 실현시키게 된다. 이것은 소망이었다기 보다는 하나의 예감 같다.

 

1,2차 세계대전에 대한 츠바이크의 시선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2차 세계 대전이 비극의 극단으로 치닫는데에 일익을 담당한 히틀러의 잔학성은 그것을 묵인하고 동조한 거대한 무리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데에 더한 비극성이 있다. 양차대전이 실제 발발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신호나 가능성에 대하여 무심하였고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이 거대한 살육의 참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과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라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히틀러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것이 독일의 인플레로 인한 경제적인 불안정도 한몫을 했다는 대목도 기억할 만하다. 위기를 부추기고 전쟁을 선동하는 무리들에 대한 그의 경고는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58세의 나이로 그는 국적을 상실한다. 이 문장 위로 지나가는 비애는 시간과 공간을 뚫고 들어와 아프게 박힌다. 그의 회고의 문장들은 스스로가 자랑한 그 템포를 잃기 시작한다. 대신 눈물이 흐른다. 모든 보고 듣는 것들 위에 청명한 언어로 차근 차근 영롱한 집을 짓던 사나이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차마 읽어나갈 수가 없을 만큼 그의 비애와 절망과 슬픔의 강은 범람한다. 조금만 더 참고 버텼더라면 그는 다시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대부분의 것들을 다시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가정은 어리석다. 이 도덕적으로 염결했던 사나이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가슴 아프지만 그의 삶은 그러한 종결로 향한 것이었고 그의 죽음이 그가 절대 히틀러에게 양보하지 않았던 내면의 자유와 숱한 성취들을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니라는 후세의 깨달음은 오늘날 이 멀리 떨어진 이 나라에서 그의 글을 읽고 뒤늦게 배우고 깨닫는 나 같은 사람과도 만난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552

 

그는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인간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가버렸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 전체로 말하고 있다. 시대의 증언과 만난 겸허하고 진지한 삶의 고백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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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02-2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츠바이크를 읽을 때면 왠지 김소월이 떠오릅니다. 둘 다 암울한 시절 스스로 삶을 끝내버려서인지, 아니면 너무나 섬세해서 시대의 어두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요...

blanca 2016-02-21 15:25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공통점이 있네요. 그러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게 개인적인 삶으로 보면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또 전체 세대로 보면 시대를 통과하면서 남긴 글들이 많은 가르침을 주니 결국은 어떤 숙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비로그인 2016-02-2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멎있는 문장이네요. *^

blanca 2016-02-22 11:50   좋아요 0 | URL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랍니다. 긴 여운이 남는... `나는 진정한 삶을 살았다.`가 아니라 이렇게 제3자로 지칭하고 객관화해 버리는 게 츠바이크인 것 같아요.

무해한모리군 201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냄비속에 들어 서서히 삶겨지고 있다는 걸 아는 개구리, 지식인으로 불행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슬프네요.

blanca 2016-02-22 11:52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책 읽으며 자꾸 우울해지는 게 과연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라고 반문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더라고요. 전쟁을 선동하는 무리들이 히틀러 시대에만 있을까요. 정치 기사들은 마치 과거의 잘못된 행태들이 가져온 파국을 고스란히 잊고 다시 그 심연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아 때로 참 암울합니다.
 

입춘이 지나고 깜짝 추위가 간간이 오긴 했지만 갈피짬에 봄바람이 들어온다. 자연은 그 도저한 순환의 고리를 어떤 예외 상황에서도 잊지 않나 보다. 다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는 이제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벌써!) 큰딸 위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들이 엄마 공지영의 간단 요리 레시피와 함께 버무려져 있다. 때로 그녀의 행동이나 언사가 논란이 될 때가 있지만 내가 정말 힘들 때 펼쳐져 있던 그녀의 에세이에서 함께 공감한 고통의 시간들로 정이 들었다. 뻔한 이야기들 같지만 솔직한 자기 경험에 덧붙여진 삶의 조언들이 와닿아 옮겨 적게 된다.

 

 

물론 엄마도 가끔 질 낮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들을 막 때우고 싶은 때가 있단다. 그게 특별히 먹고 싶어서라면 모르겠는데 그냥 귀찮아서 말이야. 잘 생각하면 바로 그 때가 실은 엄마의 생 전반의 기력이 떨어지는 때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지. 음식은 그런 바로미터 역할을 하고 그럴 때 엄마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단다. 이 식사가, 이 식사의 앞과 뒤가 내 인생의 많은 모자이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공지영 <딸에게 주는 레시피> 중 

 

세 끼의 지엄함을 엄마가 다 챙겨주던  시절에는 사실 절감하지 못하다가 이제 내가 그것을 챙겨야 되는 입장이 되니 이 단순하고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에서 깨닫는다. 식재료를 사서 다듬고 메뉴를 고민하고 차려내고 먹이고 치우고 그릇을 닦고 다시 정리하는 몸을 먹이는 일은 때로 참으로 고달프고 영 별 의미 없는 것 같지만 때로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몸을 먹이는 일은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정말 별 거이기도 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너무 힘들 때에는 밥을 건너뛰고 커피만 연거푸 마셨다. 몸을 대우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삶의 조각들에게도 통용된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들에 때로 가장 큰 생의 저의가 있다.

 

공지영의 요리 레시피는 그냥 책 속에 삽입된 명분이 아니라 정말 실질적이어서 눈에 쏙쏙 들어온다. 재료도 과정도 다 간단하고 무엇보다 몸을 고려한 그 배려가 좋다. 그래서 하나 하나 조그마한 요리 레시피 수첩에 옮겼다.

 

 

 

삶이 공평하지도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만도 않다,는 그녀의 계속되는 이야기는 사실 친정 엄마가 후렴구처럼 읊는 "산 넘고 산이다."라는 이야기처럼 별로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정말 평화롭고 고느적하고 안심어린 시간은 막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무언가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단조롭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물론 자주 잊어버리지만 이렇게 또 되새기게 된다. '더운 양상추'라니 , 당장 해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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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1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운 양배추 음식도 맛있습니다. 그냥 양배추를 찐 겁니다. 거기에 쌀밥 한 숟가락 얹고 양념간장이나 된장 살짝 찍어 먹으면 맛있습니다. 생 양배추를 먹으면 사각사각 씹히는 맛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할 겁니다. 그럴 때 양배추 찐 것을 밥에 싸서 주면 좋아할 것 같아요. 제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blanca 2016-02-19 10:31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너무 좋아해요, 양배추쌈! 쌈장이 달큰하니 맛있어야 더욱 빛나는 음식이죠. 오전부터 배고프네요. ㅋㅋ

꿈꾸는섬 2016-02-1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운 양상추는 생각도 못한 음식이에요. 양상추는 늘 아삭아삭한 샐러드여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나봐요.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블랑카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분홍공주와 막둥이도 잘 크고 있죠? ㅎㅎ 넘 반가워서 호들갑스러워졌어요.

공지영작가 큰딸이 어느새 30대를 바라본다니 세월 참 빨라요.ㅎㅎ 전 지영언니 글 참 좋더라구요. 솔직하고 발칙하고 담백하고 위로도 되구요. 저도 다음에 찾아 읽어야겠어요.

blanca 2016-02-19 10:32   좋아요 0 | URL
꿈섬님도 잘 지내시죠? 아이들은 크고 저는 나이먹고 ㅋ 그러네요. 좀 자유로워져서 꿈섬님이랑 같이 좋아하는 작가들과의 만남, 요런 것도 좀 다닐 기회가 왔으면 싶어요. 기억나시죠? 김영하 작가와의 만남 좌절이요^^;;

꿈꾸는섬 2016-02-19 13:57   좋아요 0 | URL
ㅎㅎ블랑카님과 함께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요.^^
기억나요. 김영하ㅎㅎㅎ
언젠가 시간되면 같이 야나문에 가요. 아이들 학교보내고 막둥이 데리고 가도 될 듯 해요. 정말 좋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6-02-19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늘 아침 감성적이네요.
실은 공지영 작가의 멘트가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져서 거리감이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글을 보니 저 책이 궁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미리보기로 읽는데, 눈물이 왈칵, 이런이런....

blanca 2016-02-19 18:13   좋아요 0 | URL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아요. 그냥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담길 수는 없지만 그 무언가가 나와 만날 때 그냥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살아가는 건 언제나 어디서나 결국 만나게 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