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와 하루키는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가 31년 생이고 하루키는 49년 생이니 열다섯 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이미 삶의 비의를 알아버린 노년의 성숙하고 세상사에 초연한 모습으로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에서 언제나 돌아가곤 하는 청년의 미성숙하지만 생동하는 모습이 남아 있어 어쩐지 두 작가가 함께 하는 모습은 잘 연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일본 삿포로에 갔다 우연히 근처의 대형 서점에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던 소회를 고백한 적이 있다. 더불어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두 작가가 실제로 만나 문학과 소설가로서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을 상상하면 재미있다. 당신의 삶이 겪은 풍상을 주로 이야기화한 박완서 작가와 자신의 내면의 심연으로 하강하여 상상의 이야기를 펼쳐나간 하루키는 분명 작품을 빚어내는 지점 그 자체는 어긋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작가로서 삶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나 태도 가치관 등에서는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친구가 되기 위하여 꼭 닮아 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너무 달라서 그 다른 부분에 이끌려 친해지는 경우도 있다.

 

 

 

 

 

 

 

 

 

 

 

 

 

 

 

 

 

낭만주의 시대의 쇼팽과 리스트의 교분도 그러하다. 리스트는 그 시대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수많은 여성팬들의 지지와 열광을 받았던 '차도남' 이미지였다면 쇼팽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인간 관계도 협소한 편이어서 둘은 언뜻 반대되는 성향처럼 보이지만 한 살의 나이 차이로 친구 사이였다. 게다가 프란츠 리스트는 친구에 대한 다감하고 더없이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쇼팽의 삶과 음악을 다룬 글을 남겼다. 문장 하나 하나에는 최후의 경계까지 넘어가 그 사람과 합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하고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후원자이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와 결국 불화하고 여동생의 옆에서 숨을 거두어야 했던 쇼팽이지만 이런 지기지우가 프란츠 리스트였다니 음악적 성취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짧은 삶이 헛되지 않다. 누군가 내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것은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특별한 교감은 분명 쉽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다. 리스트는 친구보다 거의 갑절에 가까운 삶을 살아내며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친구의 음악에 대한 열정, 삶에 대한 경의를 이어받았다.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게 아닌 것 같다. 그 친구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친구의 성취나 환희의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을 넘어서야 타인과의 결국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소통의 경계가 무너지고 확장된다. 그것을 뛰어넘은 자리의 시선의 마주침은 삶과 죽음을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한 우정에의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16-06-09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와 하루키, 그리고 쇼팽과 리스트를 연결시키는 님의 글솜씨는 정말 멋집니다. 님이야말로 책을 냈어도 여러권 내셨어야 하는데.... 님의 서재를 방문할 때마다 많은 영감을 얻고 갑니다. 맨날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미안한 맘이 드는데요 보답으로 좋아요 누를게용

blanca 2016-06-09 15:15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은 사람 기분 좋게 하시는 재주가 있네요^^;; 댓글 하나로 덥지만 기운 나는 하루 선물해 주셔서 감사해요. ^^
 

2008년 30년을 함께 한 아내 팻 캐바나가 쓰러지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죽는다. 그녀는 문학 에이전트였다. 감정적 지지 뿐만 아니라 줄리언 반스가 글을 쓰는 데에 있어도 동료 이상의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한 아내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의 농도는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은 슬픔을 견녀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은 그러나 그가 이미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이야기하고 난 이후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랬다고 해서 그의 예상처럼 더 견딜만한 것이 되지는 않았다. 줄리언 반스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해도 결국 우리는 울 수밖에 없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오십 년 뒤에는 대부분이 죽음을 맞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이것을 항상 볼테르처럼 의식한다면 분명 지금 이 순간이 가지는 중량감은 커지겠지만 만성적인 우울증과 허무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테면 어차피 죽을 텐데 오늘 책을 사고 무언가를 주문하고 읽고 미래를 계획하고 약속을 하는 이 사소한 일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늘 아침 나와 웃으며 다음 약속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오늘 오후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경우, 내년까지만 어찌 어찌 지금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을 유예하자 했던 사람이 그 내년이 왔을 때에는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가장 엄중한 죽음의 경고를 맞게 되는 경우가 다 남의 것이자 이야기로만 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멸이라 믿으며 오늘을 습관적으로 소비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줄리언 반스식의 천착이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프랑스의 작가들, 음악가들, 철학자인 반스의 형과의 '죽음'을 둘러싼 대화와 어우러지는 그의 솔직한 위트와 함께 결국은 삶을 내러티브화하며 허약한 의미를 힘들여 얻어내려 하는 그 무의미한 우리들의 분투와 치기,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해체는 때로 섬뜩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건조하고 걍팍하게 무의미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역자의 말처럼 줄리언 반스는 자기현시적이지 않아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격파해 줄 조언이라면 그것이 진실에 기반하고 있다면 기꺼이 승복할 자세다. 거만한 작가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학자연하는 태도가 아닌 자신이 채집한 수많은 죽음에 관한 예술가들의 실제 사례와 조언, 깨달음 등을 기꺼이 독자와 나누며 결국은 무의미하다고 결론지어진다 하여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종말이 지나치게 허무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기를 희구하는 평범한 소망에 솔직한 자세가 공명한다.

 

'마그니 만찬'은 플로베르, 투르게네프, 공쿠르, 알퐁스 도데, 에밀 졸라가 모여 만든 저녁 식사 모임이었다. 듣기만 해도 화려한 작가 군단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 저녁 식사에서 나눈 대화의 주제는 묘하게도 '죽음'이었다고 반스는 이야기한다. 가장 화려한 시기를 통과하며 가장 나다운 이야기와 나의 성취를 누리던 바로 그 시간을 공유하며 그들은 필멸을 의식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이라고 더 나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나 결론, 실제 그들이 그러한 죽음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줄리언 반스는 때때로 의심한다. 죽음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더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더 나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의기소침해한다.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도 또 잊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필연적인 무의미와 허무를 떨치기도 힘들다. 막상 그것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하는 것도 과연 내가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다가왔을 때 경험할 공포도 두렵다. 아니,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해도 그것과 화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런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전혀 위안이 안 된다는 게 사실 더 절망적이다. 필연적이었구나. 출구는 없구나, 싶은 답답한 기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6-0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화기애애한 만찬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분위기가 엄청 이상할 겁니다. 잘 먹던 음식이 입에 안 들어갈 거고요. ㅎㅎㅎ

blanca 2016-06-02 10:12   좋아요 0 | URL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마그니 만찬에는 그냥 객원 멤버로 참석만 해도 영광일 듯해요. 고급 레스토랑에서 내로라 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모여 정작 죽음에 대하여 고심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니 의외기도 하고 역시 그렇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단발머리 2016-06-0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항상.... 죽음보다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겪는 과정이 두려워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그 과정이요.
스스로의 삶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그런 순간이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큰 감동을 받았는데,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도 읽어봐야겠어요.
줄리언 반스니까요.^^

blanca 2016-06-03 11:07   좋아요 0 | URL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사실 더 불안하고 두려워졌어요. 굉장히 솔직하게 줄리언 반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듣고 나니 이렇게 많이 읽고 쓰고 깨달은 사람도 이렇다면 `죽음`이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종결이구나, 싶어서요. 독특한 반스 식의 글쓰기에 매료 당하는 중입니다. 훌쩍 나이 든 필립 로스도 한번 이런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글도 안 쓰고 이제 강연도 안 한다니...그답기도 하고 섭섭하네요.
 

작가의 이력에 이끌려 그의 책을 찾아 읽는 건 묘한 경험이다. '그'는 이 책을 아니, 문학을 칠십이 넘어 시작하고 완성했다. 거의 유일한 대표작이 되었고 생전에는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녹아있는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반대하다 유언으로 승낙하게 된다. 그는 4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영화를 보지 못했어도 그 아름다운 강의 정경과 생소하지만 묘하게 어떤 그리움을 자아내는 플라이 낚시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작가의 가르치는 자로서의 성실함과 시간의 두께는 <스토너>의 남자 주인공과 닮아 있다. 둘 다 화려하진 않지만 설명하기 힘든 비범하고 아름다운 생을 성실하게 살아냈다. 그 둘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가 된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언어는 대단히 정묘하고 생생하다. 장로교 목사 아버지와 어딘지 이 세상에 굳건하게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할 것 같은 반항아적 동생과 함께 플라이 낚시를 떠난 '나'의 시선을 통과해 오는 그 모든 순간들은 강과 낚시를 둘러싸고 한 가족의 역사와 사랑과 추억을 아로새겨 놓은 절창이다. 그가 '강'을 앞에 두고 하는 생각들은 '삶'을 숙고하는 자세의 메타포다. 그 '읽기'는 건조하지만 깊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아버지는 형제가 읽고 쓰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은 동생이 '플라이 낚시'에 보이는 재능, 열정이 극대화됨으로써 복선이 되고 또한 아버지와 내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를 구태여 소설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때로 불친절하고 거친 듯한 필체는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읽는 일을 하찮은 일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를 왜 해야 했는지, 왜 하고 있는지 묘하게 짐작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애니 프루의 서문은 좋은 지침이 된다. 공항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난 애니 프루는 깊어지는 황혼속 베란다에서 이 책과 완전히 결합하는 환상적인 경험을 통과하고 마침내 서문을 쓰게 된다.

 

"나는 언제나 강물 소리에 사로잡힌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은 "나는 언제나 생에 사로잡힌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아름답고 독특하고 애조띤 비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6-05-2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흐르는 강물처럼을 두 번쯤 본 것 같습니다. 정말 멋진 영화죠. 빵 피트가 신인으로 나왔을 때 제2의 로버트 레드포드라고 난리도 아니었죠. 매디슨 카운트의 다리와 가히 비견될만하지 않을까 합니다.ㅋ

blanca 2016-05-29 12:3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매번 티비에서 방영할 때마다 놓쳐서 너무 아쉬워요. 아, 그랬군요! 로버트 레드포드도 참 멋진 배우인데...메디슨카우티의 다리, 저 이 영화 너무 좋아해요...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리모 레비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그곳의 참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인간이 강제한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견디어 낸 시간은 삶의 자기회복력의 세례를 받아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개별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견디어내고 살아남았다고 섣불리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 기억은 그 인간들을 마주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 자체의 의미를 뿌리부터 흔든다.

 

그러나 <운명>은 여타 다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증언의 어조와 달랐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열네 살 소년이다. 회상의 형식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한창 가족의 따뜻한 보호 아래 공부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소년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노역을 다니다 그 출근 버스에서마저 끌려 내려와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 공부하지 않고 삶을 위해 공부한다."였다.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반드시 공부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4

 

열네 살 소년은 울지 않았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아이처럼 징징대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성실히 하루 하루 수용소 생활을 해나갈 따름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주변 풍광, 그를 둘러싸고 수용소의 질서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어른들, 같은 수용소 안의 또래 소년들, 때로 항상 배고픈 그에게 대가 없이 빵을 주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격려하는 멘토 같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수용소의 풍경은 마치 우리가 가진 삶의 일상처럼 흘러간다. 소년도 때로 그 점에 놀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하루 하루를 힘들지만 엮어 나가며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쳐 있는 수용소의 의사에게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까도 생각했다.

 

그는 일년 여의 수용소 생활을 종전으로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귀가하다 대신 전차 요금을 내어 준 어른에게 고국의 부다페스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증오심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른도 아닌 아이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 수용소에서 노역을 시키고 인간이하의 대우를 일삼는 것을 방조한 자신의 고국에 대하여 아이는 증오를 느낀다. 끔찍한 기억을 다 잊으라는 동네 어른들의 조언에는 반발한다.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고.

 

소년이 돌아올 곳은 해체되고 없었다. 아버지는 죽고 새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러나 노을지는 저녁 거리에서 생모를 찾아 가며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가 이 시간대를 수용소에서도 가장 좋아했다,고 회고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장엄하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계속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를 지키기 위하여 소년은 나아간다. 어른들의 잔인한 도발로 소년의 삶은 파괴되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살아 귀환한 자의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성장에 대한 기대가 어쩐지 눈물겨웠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이야기의 회고인 이 이야기가 그가 후에 소년 시절 겪은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순탄치 않은 삶을 이어가야 했음을 알고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생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그 자신이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단지 외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타인의 존재와 그에게 주어진 생 전부를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예시가 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p.284

 

언제나 삶에는 짐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과장하지 못하겠다. 느낌도 짐작도 생각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5-23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5-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혹시 영화 사울의 아들 보셨어요? 비르케나우 배경으로 한 영환데 영화 기법(잘은 몰라도)과 더불어 아우슈비츠의 삶을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어떤 방식에 대한 고민거리와 더불어... 굴라그 배경의 문학작품들도 떠올리게 되고요. 다르지만... 아직 운명 초반부밖에 읽지 못했는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blanca 2016-05-24 20:4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댓글 보고 찾아보니 아주 평이 좋네요. 아쉽게도 아직 못 봤는데 줄거리 보니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요. 이제 너무 참혹하거나 슬픈 영화는 차마 볼 수가 없어요. 홀로코스트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교롭게 여러번 접하게 되는데 결국은 절망으로 귀결되서 자꾸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예술 작품들이 악을 형상화한다. '선'에는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게 없다. 경로도 한정되어 있다. 기대치도 있다. 평면적이다. 그러나 악은 바닥도 경계도 없다.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에게는 끝도 없는 상승보다는 미담보다는 무한추락과 비극과 범죄 이야기가 더 가깝다. 그게 엄혹한 현실이다. 사람을 믿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이야기에는 그렇게 태어난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화자가 되어 자신을 설명하지만 그의 악행은 설득력도 이해도 얻기 힘들다. 단지 그렇게 타고 난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이 근거일 따름이다. 정신병,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면죄부라기보다는 그의 범죄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양육 과정이 아들의 삶을 통제하고 아들의 꿈을 파기하여 결국 아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실패로 결론이 난 어머니는 그리고 그들과 같은 여자들은 이 청년의 잔인하고 무감각한 악행의 조준점이 된다.

 

이 불편한 이야기의 경로에는 가파른 호흡을 물고 적확한 언어를 찾아 분투했을 작가의 지난한 시도와 그 시도의 궤적이 있다. 그가 이야기가는 인물들의 개연성, 관계, 매력을 떠나 그들의 어떤 행동도 정유정의 손끝에서 나온다면 살아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소설적 언어의 지루함도 종이의 그 생래적 한계도 그녀 앞에서는 밀려나간다. 읽는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이 남자의 범죄 현장에 동행하며 어느덧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바로 손 닿을 만한 거리에서 느끼며 멈칫하게 된다. 그 현장에서 말 없이 그의 행동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덧 공범이 된 듯한 죄책감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악행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개입할 자신이 없는 비겁함이 들킨 때문일까. 그를 끝까지 말리려 하다 결국 죽게 되는 형을 대신하는 존재였던 친구의 모습에는 우리가 용감한 시민이 되지 못하게 되는 어떤 참조점이 말라붙어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미 한계와 거리를 가지고 시작하는 관계, 형제에 대한 묘한 경쟁심, 그리고 죽음, 일을 저지르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양가적 감정, 이미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묘한 긴장 관계에서 시작하는 통제권을 가지고 싸우는 과정 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닫힌 가정 안에서 일어나다 마침내 밖으로 비어져 나와 애꿎은 희생양을 만드는 비극.

 

이러한 이야기는 이제 이야기에서도 현실에서도 낯익은 것이 되어버렸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으로 그들을 한정하는 것은 그러한 악행을 감치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동어반복적으로 완성시키고 끝내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어쩔 수 없어. 이미 그랬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당분간 나이가 들 때까지 격리시켜 버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거야. 그럼 그런 애가 나의 아이가 된다면? 우리 가족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의 결론은 또 다른 물음표와 말줄임표로 가고 만다. 인간의 악은 그렇게 동어반복적이고 자기복제적으로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야기는 남의 것으로 소비되고 나의 것이 되어버리면  추방된다.

 

어두운 이야기의 슬픈 결말은 출구가 없어 답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