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의 가치 판단 기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필립 로스는 이러한 사회적 금지, 금제의 틀을 흔들고 넘어서는 고독한 투쟁을 종종 그린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모두가 머무는 지점이 아니라 대부분이 떠나가고 홀로 그 변방을 기웃거리거나 경계를 넘어가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1998년 여름, '부적절한 관계'라는 그 모호한 표현에 상상 가능한 모든 불순하고 불온한 것들을 우겨 넣었던 전대미문의  대통령 스캔들로 미전역이 달아 있었던 그 여름에 '나' 전업작가인 네이선의 이웃인 콜먼 실크의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도 그러하다. 콜먼은  지역 대학의 고전학과 교수로 학장직을 맡아 정체된 대학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고 학장직에서 물러나서도 강의를 하다 무심코 강의 시간에 던진 말 한마디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추방당한 일흔한 살의 남자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작가인 화자에게 토로하며 어느덧 지나온 자신의 삶을 복기하게 된다. 콜먼은 분명 자신의 출신의 한계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남은 생이 이제 거의 헤아려지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기'를 찾는 여정을 걷게 된다. 거대한 체계와 고정 관념, 인습,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를 확인하고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는 과정은 평탄하지 않다. 그것은 추방에서 시작해서 영원한 추방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필립 로스의 인물은 그 어떤 인물도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대학 사회에서 콜먼에게 극렬한 반감을 드러내고 콜먼이 막상 떠나오고도 그가 대학에서 청소를 하는 젊은 여자와 만나는 것에 강한 분노를 드러내는 젊은 여교수의 시점을 따라간 이야기도 그렇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상류층 출신의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는 콜먼과의 첫만남에서부터 묘한 긴장감과 부담을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이 나이든 정력적인 교수에 대한 끌림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결국 둘은 적이 되고 콜먼이 떠나고 나서도 그 대학의 젊은 여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된 후 그녀는 강한 반감과 혐오를 느끼게 되어 콜먼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품고 다니게 된다. 그녀가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은 것은 후에 자신이 걷게 될 길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보신주의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마침내 분별 없이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게 되는 계기가 흥미롭다.

 

그녀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이는 젊은 교수는 로맨스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도 했다. 필립 로스는 이러한 복합적인 어쩌면 당연한데 언뜻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그 양면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그려낸다. 누군가를 설명하거나 이해하거나 느낄 때 우리는 수많은 모순과 충돌, 불합리가 섞여 있는 그 우물을 헤치고 마치 표면의 그 잔잔한 모습을 전부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녀는 뉴욕시립도서관에 책을 보러 갔고 마침내 근사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약속이나 한듯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의 남편이 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상대로 로맨스를 상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막간의 공상은 갑자기 그녀보다 한참 어린 그 남자의 연인이 등장함으로써 깨지고 그녀는 항상 품고 다녔지만 결코 부칠 거라 여기진 않았던 그 콜먼의 사생활을 협박하는 그 비겁하고 치졸한 편지를 우체통에 던져 버린다. 그것은 그렇게 일어난 일이었다. 이 작은 사소한 로맨스에의 기대의 결렬로 그녀는 다시 작아진다. 이러한 일들. 어떤 일들은 너무나 어이없이 사소하게 일어난다. 어떤 말은 그 어떤 맥락 없이 성찰 없이 그대로 행해지고 망각된다. 필립 로스, 그는 징그럽게 이러한 면면을 놓치지 않는다.

 

나에게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일은...

바보처럼 <휴먼 스테인>1권을 중고로 두 권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그녀와 콜먼이 어떤 대치극을 벌이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지는 게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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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07-2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소설을 읽거나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솔직한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면, 정나미 떨어질만큼 내가 징그러울 때가 있어요.ㅠ
마지막 어처구니 없는 일에 공감의 미소를~~^^

blanca 2016-07-25 09:1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일단 두 권이 된 1권 중 하나는 처분하고 2권은 근처 도서관에서 빌리던지 하려고요. 서울은 아주 거대한 찜질방 수준의 더위라 힘드네요...

비연 2016-07-2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는... 참 잘 쓰는 작가인데, 그 표현이 가끔 힘들 때가 있어서 잘 읽혀지지 않는 것 같아요.
<휴먼 스테인>은 사놓고 안 읽은 책 중의 하나인데, blanca님 글 보니 한번 읽어볼까 싶네요^^

blanca 2016-07-25 09:15   좋아요 0 | URL
비연님, 또 유독 이 책이 필립 로스의 그 거대한 만연체 문장 덕택인지 쉽게 읽히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다 읽고 나면 반드시 무언가 의미 있는 앎이 남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The Vegetarian : A Novel (Paperback)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채식주의자』영문판
Han Kang / Granta Books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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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것이 유별나게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다. 먹는 것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고 생명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닌 조금 더 고차원적인 수준으로 관리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별안간 그 앞에서 고기를 먹는 나는 어떤 폭력성에 둔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단지 인간을 위해 대량으로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그 동물들의 비명을 망각하지 않고는 사실 그것을 무감하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어떤 둔감함과도 화해해야 견딜 수 있는 지점들과 자주 만난다. 이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숙명이기도 하다. 늙어 죽는 일도 사실 대단한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적어도 감내하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고 견디기 힘들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있다. 어느 날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 영헤의 남편, 하루 하루 꾸역꾸역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혜의 언니 인혜, 그리고 인혜의 남편인 예술가다. 지극히 평범했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를 선언하며 돌발 행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의 시선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시선은 따뜻하지도 애정을 담고 있지도 않다. 지극히 건조한 바깥의 시선이다. 회사 임원들 식사 자리에서의 불유쾌한 아내의 의상, 행동은 그를 당혹스럽게 한다. 친정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장인 어른의 폭력적인 행동에 자해로 대응하는 아내의 모습은 그가 아내를 떠나게 되는 변곡점이 된다. 표제작 <The Vegetarian>은 건조하고 소통의 한계가 있다. 우리는 돌연한 영혜의 변신도 거기에 대한 지리멸렬한 남편의 반응도 언뜻 언급되는 영혜의 어린 시절의 폭력성도 그저 잠깐씩 엿볼 수 있을 뿐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가 역부족임을 깨닫게 된다.

 

<Mongolian Mark>는 영혜의 형부, 즉 인혜의 남편이 성적 금기를 넘어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던 가정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처제 영혜를 향한 그의 욕망은 복잡하다. 예술적 욕망과 금기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이끌림과 욕정은 깔끔하게 분리할 수 없다. 자매의 남편들은 모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

 

<Flaming Tree>는 언니 인혜의 시선의 이야기다. 무너진 가정, 정신병원에 가서도 음식을 거부하며 무너져가는 여동생 영혜 앞에서 모든 공고하다고 여겼던 삶의 지축이 흔들리며 자매의 파멸은 섞인다.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가는 영혜가 이 세상의 모든 강압과 폭력적인 것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듯,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도 기실은 하나의 교묘한 위장이었음을 깨닫게 되며 인혜는 절규한다. 누구의 시선보다 인혜의 시선은 깊고 공감 지대가 넓다. 우리 모두가 견디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이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각성은 슬프지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는 깊지만 도저히 단단해질 도리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여기며 토닥이며 속이며 나아갈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

 

데보라 스미스가 원작을 영국인의 시선으로 변주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미묘한 것들을 충실히 이해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강의 목소리는 두 언어 사이를 왕복하며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충분히 살지 않았는데도 삶이 훓고 가며 남기는 그 상흔과 삶이 품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그 자비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다르면 약하면 결국 견딜 수 없는 지점에서 방황하는 모두에게 이 이야기는 헌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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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psan 2016-07-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1인이라 책 내용이 많이 궁금합니다. 전 고기 달걀 우유 일부 생선 이런 것만 안 먹어요 ^^

blanca 2016-07-21 14:26   좋아요 0 | URL
채식주의자도 단계가 세분화되어 있더라고요. 달걀,우유까지 안 드신다면 거의 채식주의라 하셔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에서 채식주의는 세상의 폭력적인 것들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그려져 있어요. 나중에는 음식 그 자체까지 거부하게 된답니다. 사실 걷고 먹고 살아나가는 과장 자체가 작든 크든 어떤 형태의 폭력이 끼어들지 않고는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 부분이 극대화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mipsan 2016-07-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음식 거부는 안 할거 같아요 ^^ 애초 꺼리게 된 이유가 동물사랑이나 폭력거부, 이런 거창한 게 아니었구요. 술 담배도 안하는걸요 ㅎㅎ
 

 

 

모든 사람은 늙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이 당연한 명제를 항상 실감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이 죽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도 별로 없다. 사실 이삼십 대만 해도 그 숱한 늙음과 죽음은 대부분 풍경일 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연한 타자다. 중년을 넘어서면 그 타자는 이제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때로 수긍한다. 비오는 날. 보조 보행기에 우비까지 쓰고 두 딸까지 옆에 두고도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노인의 모습이 아프다.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이니까.

 

 

 

 

 

 

 

 

 

 

 

 

 

 

 

 

생물학자인 저자 조너선 실버타운이 그러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종이 노화에서 절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준다. 450년을 사는 대양백합조개도 2000년을 산다는 자이언트세쿼이아도 결국은 죽는다. 그 생물들이 오래 사는 노하우를 우리가 빌려와서 우리의 생을 흡족할 만큼 늘리는 것은 아직 무리다. 설사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행복으로 더 가까이 가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화는 신체 유지의 실패에서 비롯하고 진화는 이것을 허용하고 어쩌면 더 선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의 추측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이 전존재적 측면에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암시를 품고 있는 것도 같다. 각 장마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여는 관문으로 사용하는 시인들의 시가 그 어떤 이야기의 전경보다 더욱 극적이고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것은 결국 필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누구나 죽는다. 누구나 사라진다. 아무리 과학이 진보하고 우리를 둘러싼 우리보다 오래 버티는 생물들의 노하우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결국 마침표를 피할 수는 없다는 근본적인 회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뭉클하다. 그것은 힘겨운 역설, 아이러니로 향하는 지난한 인간들의 투쟁사니까. 이 모든 수고는 조금씩 앞으로 힘겹게 밀고 나가지만 그래도 궁극에 도달하려먼 멀었으니까. 조너선 실버타운이 첫장부터 에밀리 디킨슨의 이 역설의 시를 인용한 것은 결국 그런 이유에서다.

 

 

밤은 아침의 캔버스

절도는 증여

죽음이 가리키는 것은 불멸

-에밀리 디킨슨

 

조너선 실버타운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중

 

 

불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멸을 희구한다는 것은 우리는 필멸의 존재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일'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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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07-1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한 독서와 리뷰~ 반가워요 블랑카님!^^

blanca 2016-07-18 22:3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인사는 언제나 참 따뜻해요...

stella.K 2016-07-1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맘에 들어요.^^

blanca 2016-07-18 22:37   좋아요 0 | URL
정말요? 신나요 ㅋ
 

교보문고로 가는 차 안, 오래 된 차의 에어콘에서는 정말로 뜨거운 바람이 히터처럼 계속 나왔다. 길은 막히고 볼이 빨갛게 익은 딸 아이와 말다툼이 시작됐다. 정작 오랜만에 만화책도 사주고 좋아하는 스티커도 사 주려고 힘들게 나선 길은 거꾸로 가동된 에어콘 덕분에 둘 다 땀을 거의 눈물 수준으로 흘리며 서른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한 유치한 힘 겨루기가 되었다. 게다가 길도 막힌다.이쯤 되면 대체 이 길은 누굴 위한 길인가, 왜 나선 길인가 싶다.

 

그러나 역시 에어콘 바람에 땀이 씻기고 저마다 좋아하는 구역에 서로 사이좋게 헤어져 문구 탐험 및 책 들추기가 시작되니 자연스러운 화해와 해빙의 분위기다. 저만치서 나이 든 할아버지가 바삐 책을 옮기는 북 마스터에게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북 마스터는 급해 보인다. 다급하게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추천한다. 할아버지는 <종의 기원>을 찾아 떠난다.

 

 

 

 

 

 

 

 

 

 

 

 

 

 

 

음, 할아버지에게 왠지 좀 언질을 드려야 할 것 같은 마음은. 나도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힘들고 때로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언어가 영상으로 덤벼들고 그 언어가 만드는 이야기의 심연이 무척 깊고 적나라해 내가 인간인 게 때로 미안하고 당황스러워지게 한다. 그녀는 책임없는 환상이나 불가능한 행복으로 위장하지 않는다.

 

이 날은 아주 오랜만에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았던 아버지와 만난 날이기도 했다. 누구에게 과연 완벽하게 존경스럽고 너그러운 아버지가 주어지겠느냐 만은 나의 아버지도 역시 한때 나와 몹시 힘겨루기를 했고 치기 어리고 미성숙한 나와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중년의 나에게 이제 아버지는 함께 할 남은 시간들이 한없이 아깝고 지나온 추억이 닳을까 두려운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웃으며 고장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내려가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여운이 길었다.

 

 

 

 

 

 

 

 

 

 

 

 

 

 

 

 

공교롭게 이 날 그 교보문고에서 산 <Axt>에서의 정유정 작가의 아버지가 <종의 기원>을 끝낸 다음 날 새벽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대목에서 눈물이 차 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차게 아버지와 육사시미(그녀답다. ㅋㅋ)를 나누었던 어린 시절을 추억했고 그녀의 '살아남기'에 대한 애착과 자신의 인생을 꿈꿀 처지가 아니었던 이십 대를 보내고 난 후의 지금의 시간에 대한 경탄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이 써 낸 그 이야기처럼 열정적이었고 간결했고 사족이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의 파고 만큼 그녀의 말도 참으로 강렬해서 자꾸 듣고 싶게 했다. 사람과 말과 글이 어긋나지 않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종의 기원>을 사 가지고 돌아갔을 지도 모를 할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러한 지점을 내가 감히 판단하고 조언하려 하다니... 역시 나는 또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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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7-09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유정은 작가가 되기 전에 간호사였다고 그랬죠~~ 빨간 책방 나왔을 때도 얼마나 목소리가 활기차던지... 속으로 음... 진짜 작가 느낌은 아니다, 했는데 전 또 그게 좋더라구요.
항상 그렇지만 이 페이퍼도 넘 좋네요.
딸아이랑 힘겨루기도 그렇구요, 아버지 이야기도요...

blanca 2016-07-09 09:23   좋아요 0 | URL
아, 빨간 책방에 나왔었군요. 저는 김애란 작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참 좋던데...궁금하네요.^^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에혀...

꿈꾸는섬 2016-07-09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블랑카님과 분홍공주의 힘 겨루기ㅎㅎ 현수도 저를 계속 이기려고 해요. 그래도 딸 아이와 교보문고 나들이 좋네요. 아버지와의 시간과 추억 정말 소중하죠.^^

할아버지는 종의 기원을 어떻게 읽으셨을지.....저도 괜한 걱정을 하네요하네요

blanca 2016-07-10 20:28   좋아요 0 | URL
이제 정말 품 안의 아기는 아닌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이거든요. 현수도 그렇군요.^^ 할아버지 재미있게 읽고 정작 좋아하셨을 수도 ^^;; 있지 않을까요?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하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제법 남아 있다. 그녀가 다발성 경화증으로 겨우 마흔 언저리에 사망했고 그 즈음 가족,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그녀 곁에 남아 있지 않았던 이야기는 그 이전에 살아 있는 동영상 속에서 긴 머리를 흩날리며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피아노를 치고 장난을 치는 모습을 더 찬란하게 비감어린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때 그녀의 슬픈 운명은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연을 기억하면 현재 다니엘 바렌보임의 행보가 아무리 거창하더라도 어디 한 곳이 기우뚱하게 느껴진다. 자클린 뒤 프레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그 온 몸이 현과 함께 약동하는 모습이 위대하고 동시에 안쓰럽게 느껴진다. 다른 악기들과 달리 유독 첼로는 연주자와 진정으로 교감할 때 그의 생에서 그 무언가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같다. 듣는 우리는 감읍하지만 연주자는 소진된다.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 관련된 책을 찾아보지만 절판이다. 근처 도서관에도 없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 최근 것은 거의 다 들어 이제는 가만 가만 시계를 돌린다. 어젯밤에는 초창기에 방송한 '대가의 소설들'을 듣는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싱글맨> 이야기에 놀란다. 연인을 잃은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작품이란다. 그는 노교수이고 그의 연인은 동성이다. 구찌의 디자이너 톰 포드가 콜린 퍼스를 주인공으로 영화화했다고 한다. 언뜻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죽어가는 짐승>을 연상시킨다. 김중혁의 상찬을 들으니 당장 읽어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것도 절판이다.

 

 

 

 

 

 

 

 

 

 

 

 

 

 

 

 

 

괴.롭.다. 이 둘을 어떻게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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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6-07-0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의 빨책 팬으로서 저는 최신 것들은 아껴두면서 듣고 있네요.
추천받은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이 절판일 때의 절망스런(?) 심정도 이해가 되어요 ^^

blanca 2016-07-06 11:42   좋아요 0 | URL
저는 <싱글맨>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검색조차 잘 안 되어서 당황스럽더라고요.
재출간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는 <빨간책방> 방청을 꼭 하고 싶은데 거리나 시간이 다 불가능해서 너무 아쉬워요.

카스피 2016-07-05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헌책방을 검색하심 혹 나오질 않을까 싶네요^^;;;

blanca 2016-07-06 11:4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저 요새 헌책 구입하고 자꾸 실망해서... 좀 망설이게 되요. 또 절판된 책이라 그런지 가격도 새책과 거의 같거나 더 높더라고요.

단발머리 2016-07-0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아쉽네요. 블랑카님이 이 책들을 읽으셔야 근사한 리뷰를 읽을 수 있을 텐데요... ㅠㅠ

blanca 2016-07-06 11:44   좋아요 0 | URL
ㅋㅋ 고마운 말씀이네요.

보슬비 2016-07-06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을 이용해보세요. 저희 도서관에는 두권의 책 모두 있더라구요.^^

blanca 2016-07-08 16:17   좋아요 0 | URL
흑흑, 무려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저희 동네 도서관에는 없더라고요.. 너무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