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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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직 칠십이 되지 않았고 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엄마의 고향은 부산이지만 엄마의 소녀 시절, 처녀 시절을 함께 더듬어 갈 기회는 아직 없었다. 엄마와 딸과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과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수많은 일상들이, 구체성이 그 어떤 추상성을, 개요를, 일반화를 내리눌러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나누어야 하는 그것과는 멀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대화가 많다고 해도 그것의 대부분은 생활 그 자체에 가 닿아 있어 그 사람의 본질을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김탁환 작가가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가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작가로서의 배아가 싹 튼 진해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나눈 그 어머니와의 진짜 대화가 눈물겹게 부러웠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도.


진해는 나에게 낯선 지명이다. 벚꽃이 피면 수많은 상춘객들이 일부러 그 허무하게 저버릴 것만 같은 무게를 이고 빛나는 찰나를 보기 위하여 내려간다는 그곳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남아 있다는 건 어쩐지 좀 덜 채워져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무방할 것 같아 안심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로가 좁은 2차선인 탓에 벚나무 가지들이 허공에서 서로 만나 벚꽃터널을 이룬다. 그 하얀 터널 아래로 걸어 내려가면,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의 특별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토록 새하얀 봄길을 걸어본 사람은 인생의 정갈함이 무엇인지 안다.

-p,124



그곳은 칠십 대 중반이 된 작가의 어머니가 무려 칠십 년을 보내며 이웃의 삼대의 가족과 소통한 공간이다. 작가를 낳고 키우고 단련시켜 훨훨 날려보낸 바로 그곳이다. 아들의 글을 어머니는 다 정독했다. 아들은 글 쓰는 이야기를 노모와 나눈다. 어머니는 함부로 간섭하거나 단정하거나 조언하는 대신 묵묵히 아들을 지지한다. 백석의 시집을 읽고 그 시집에 나온 음식을 직접 요리해 보는 어머니라니...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여인은 아들과 함께 걸으며 누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잘 여며 두어 행복하다. 하모니카를 불며 자신이 다 없애 버린 사진 속의 젊은 남편과 어린 아들들을 추억하는 나이 든 여인은 너무 멀리 보지 말고 하루 하루를 잘 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사라질 것임을 알고 인정하고 수긍한 겸허함이 서글프지만 눈부시다.


이 이야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가볍거나 통속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 균형은 작가 자신의 글 그 자체보다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회 전체의 애도로 감당하기 벅찼던 이야기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형상화하는 작가는 어머니의 격려를 지고 있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빌리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생래적 한계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개별성을 넘어선 어떤 공통의 공동의 영역이라 어머니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대단히 공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진해를 가본 적도 없는 내가 그 모자의 답사에 간접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다.


표지는 보랏빛. 어둠을 뚫고 형형히 빛나는 벚꽃에는 사실 빛이 없을진대 그것은 어둠을 뚫고 나올 듯하다. 아름다움은 그러한 것이다. 이미 고정된 고착화된 모든 한계를 스미고 나오는 것. 그것은 생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스러질 것임을 안다 해도 그것이 무의미와 동의어가 아닌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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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좀 이상한 증세가 생겼다. 글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할 때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에게 큰 시련이 닥치거나 선고되는 장면을 도저히 못 보겠다. 이를테면 가족을 잃거나, 어려운 병을 진단받거나, 예기치 않은 배신을 겪거나 하는. 그러다 자문하게 된다. 왜 이렇게 힘든 얘기를 일부러 듣는 거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내 삶 안에서 감당하는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이렇게까지 타인의 힘든 서사를 일부러 감당할 필요가 있나?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불편해졌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통각을 얻은 것이다. 

-은희경 <Axt 5/6 중>


이 대목은 마치 나에게 들으라고 한 얘기인 듯 와닿았다. 나는 불편하고 그 불편이 두렵지만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성장과도 만난다. 삶은 정합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온건하지도 않으니까 이러한 통각을 미리 습득해 두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또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읽고 듣고 쓰는 일을 타인과 소통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은희경의 이야기는 솔직하고 깊이 있고 새로운 층위의 사고를 도발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매일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통이라기보다는 각자의 독백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내가 미처 고백하지 않은 이야기와 질문에 예비된 답변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은 신비롭고 언제나 흥미롭다. 인터뷰의 힘일 것이다. 어제 내가 무얼 먹었고 아이와 어떻게 지냈는지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일이 나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닐 테니 그것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공허감이 치유받는 기분. 


소설가 존 쿳시는 이름만 알지만 그를 번역한 번역가 왕은철이 존 쿳시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는 글은 너무 아름다워 그 자체가 존 쿳시의 소설을 읽은 듯한 착각을 준다. 과묵한 작가와 머나먼 이국에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 이후로 그의 번역자가 되고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제자가 되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이야기. 어떤 글을 번역하거나 리뷰를 쓰거나 분석하거나 할 때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숨길 수 없는 대목은 그 글을, 그 작가를, 그 연구 과제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나, 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나와 소통할 수 없다. 그 언어를 나는 모르고 내가 쓰는 언어를 그는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소통할 수 있다. 언어가 다가 아닌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평생 배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언어를 매개로 숱한 오해와 착각과 상처를 교환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쓸려나간 자리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때로 진짜가 보일 때도 있다. 모르겠다. 아직은 좀더 배워야 알 수 있는 것들 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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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7-05-12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개 누르고 싶은 글이에요.. 어휴 :)

blanca 2017-05-13 06:27   좋아요 0 | URL
힘이 나는 댓글 감사해요.

AgalmA 2017-06-22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그래요. 어떤 사건들은 수년 째 떠올리며 혼자 몸서리 치며 분노하고 그래요.
왕은철 번역가와 존 쿳시 만남은 듣기만 해도 설레요!
요즘 blanca님 글을 많이 못 본 거 같은데 모쪼록 평안하시길.

blanca 2017-06-26 07:44   좋아요 0 | URL
AgalmA님 감사해요. 이게 또 서재가 뜸하다보니 습관처럼 그렇게 되네요. 분발할게요.^^

북극곰 2018-02-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지난 글인데... 이제서야 보고 악스크를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오랫만에 온 사이, 블랑카 님은 다른 나라로 사는 곳을 옮기셨나보아요. 온라인으로만 보던 분인데도, 왠지 서운해지는 기분. ㅎㅎ 늘 평안하세요.

blanca 2018-02-07 04:0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북극곰님. 저는 미국에 와 있어요. 악스트 꼬박꼬박 챙겨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것도 쉽지가 않네요. 멀어도 멀지 않은 곳이 여기 알라딘 서재가 아닐까요? ^^
 

자의식은 자존감은 사실 고정되거나 영구불변한 것이 아닌 것같다. 여기에서의 나의 자의식은 상당 부분 동양인, 유색인종에 닿아 있다. 백인만 있거나 너무 많은 동양인이 있거나 흑인이 있거나 그러한 것들이 부지불식 간에 의식된다. '다르다'는 반드시 어떤 위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아직은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내가 그렇기도 하고 때로 어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해서 그러한 것들을 전하기도 한다.


동네 도서관에서 신간은 한 곳에 모아 놓고 허리 높이에서 책을 뽑아 볼 수 있게 양방향으로 책등이 배열되어 있다. 건너편에 백인 중년 여자가 있었다. 다시 자리를 바꿔 내가 건너편으로 그녀가 내가 있던 자리로 건너오던 와중 그녀가 나에게 짜증스럽게 얘기했다. 그렇게 계속 책을 보지 말고 저기 의자가 있으니 앉아서 책을 보라는 나로서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였다. 본능적으로 나는 그녀가 나를 거슬리게 느껴서 신간 코너를 어슬렁거리지 말라는 핀잔으로 받아들였다. 자격지심일까? 그녀는 내가 달라서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녀의 근처에 있는 게 싫다,고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사과를 얼버무리다 대출을 망설이던 책을 뽑아들고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도서관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정말 바보 같았다. 이런 걸까? 이게 그건가? 내가 한 일, 내가 한 말이 아닌 그냥 내 존재 자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경험한 기분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모멸감이었다. 한편 어느 한켠에서는 계속 이런 부정적인 시선과 대우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게 어쩌다 겪는 한두 번의 일이 아니라 거의 일상인 사람들도 있다. 가슴 한켠이 계속 아려왔다. 나는 그들이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그 수많은 고통의 만분지 일도 경험하지 못한 축에 속할 것이다.



















남자 줌파 라히리의 느낌일까? 미국에 정착한 인도 이민자 가정의 소년의 시선은 그보다는 훨씬 건조하고 가슴 아플 정도로 솔직하다.  아이는 인도에서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었을 때에는 선택받은 소수의 자긍심 아닌 자부심이 있었지만 정작 미국에 왔을 때에는 소수자와 이방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뼈아프게 덧입혀야 했다. 게다가 성공적인 미국에서의 정착의 출발을 상징했던 형은 불의의 사고로 뇌에 영구 장애를 입고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면서 소년의 성장기는 더욱더 비장한 것으로 변모한다. 그의 성장은 머나먼 이국에서 가족의 상실까지 감당해 가며 달콤하고 쉬운 것들과 결별해 가는 과정이었다. 누워있는 형은 어느새 소년의 거짓말과 환상의 매개가 된다. 소년은 위로받고 싶어 친구를 사귀고 싶어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처럼 어떤 상실을 어떻게든 이겨 나가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도 그때 견디기 위해 변명처럼 친구들 앞에서 공상과 상상으로 현실을 윤색해서 묘사했던 것같다. 그래야 그래야만 숨이라도 쉴 수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영어를 알지 못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길, 사람들은 그들의 피부 색깔과 그 이색적인 옷만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는 너무 슬프게도 그 영어로 된 욕설 전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묻지도 않는 어머니에게 아이는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믿어준다.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훌쩍 나이를 먹어 소위 미국 최고의 명문대를 가고 최고의 투자 은행에서 근무하며 거액을 벌어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된 후에도 작가는 어린 시절 겪었던 숱한 일들이 남기고 간 상흔이 아물지 않아 아직도 그들을 대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고백한다. 누워있는 형 대신 형이 미처 이루지 못한 대부분의 꿈을 대리 실현하며 소년의 아픈 성장기는 막을 내린다. 아이는 고통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솔직히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다르니까 때로 싫고 거부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문제는 다른 이야기다. 하루키의 이야기처럼 비교적 교양 있는 사람들의 내심도 다르지는 않은데 잘 위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러한 대우나 그러한 이야기나 시선은 칼날 같다. 어쩌면 꼭 피부 색깔만이 아니라 이 세상은 나의 외피를 둘러싼 모든 주변인과 사물과의 경계에 위계를 입히는 과정을 마치 학습, 성장, 삶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 나와 조금만 달라도 내심으로 위계를 설정하고 때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며 그것을 내면화하는 기제에 우리는 이미 포섭된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완벽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왜냐하면 아직 내면의 날것들을 숨길 수 없는 시간이라 그것이 때로 잔인하게 아이들 간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인의 사회를 모방한다. 어른들이 사는 사회의 추악한 일면은 때로 아이들 세계에서 적나라하게 재생된다. 절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때로 괴물로 변모한다. 그 모습은 정치인들과도 닮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결국 우리가 어른이 만드는 세계 안에 아이들의 세상이 자리잡는다. 수많은 편견과 경쟁심과 고정관념을 저도 모르게 주입하며 또 다른 우리의 최악의 단면을 극대화하여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힘과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재편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선의로 포장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나 자문한다면 쉽게 부인하기 힘들 것같다. 성실과 열심의 지향이 가닿을 곳에 부와 권력과 힘이 놓여 있다면 그 과정에서의 소외되는 자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어떻게 가르쳐질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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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투표를 했다. 2002년 12월 9일 16대 대통령 선거를 하고 온 나는 취업 초년생이었다. 한창 마음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어렵게 취업이 된 상태였다. 전공과는 무관한 곳이었다.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어른들은 많이들 도와주려 애썼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지지자들은 노란 옷을 입고 대통령 당선자 부부를 둘러싸고 노란 풍선을 흔들었다. 잠드는 마음이 왠지 신이 났다. 뭐라도 가능하고 어떤 일도 헛된 공약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손으로 하는 행위가 실효를 거둔 느낌은 유일하고 소중했다.


2017년 오늘, 나는 예정되지 않은 날짜, 예기치 않은 곳에서 다시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솔직히 끝까지 갈등했고 확신이 없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누구나의 지향이자 소망이지만 현실과 자주 부딪혀 학습된 무력감을 끌고 오곤 한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이들이 살아갈 내 나라는 요즘 흔들린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우리 나라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마치 그들이 주체이고 우리는 객체인 듯한 요즘의 상황이 더없이 서글프다. 이 혼란을 뚫고 나갈 뚝심 있는 위정자가 나타나 다친 우리들의 마음과 떠나버린 우리의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고 다시 꿈을 꾸고 이상을 믿고 빛의 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헛된 말장난과 사익에 휩쓸리며 또 국민을 기만하지는 않을까? 나는 이미 너무 쇠락해버린 것인지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던 그 이십 대의 희망과 패기를 나의 것으로 가져올 수 없다.



아이들의 세상은 거대하고 신비하다. 어른들의 세계는 복합적이지만 점점 아이들의 세상이 가지던 빛이 어떤 무력감, 절망, 좌절, 타협으로 어둠에 먹힌다. 그것은 사는 문제로도 설명되고 현실의 한계로도 규정된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그 모든 선, 희망이 전부 거짓은 아닐지라도 살며 살아가며 상당 부분 점점 그것이 희미해지고 뒤로 물러나고 때로 타협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젊은 세대를 자라나는 아이들이 살아갈 공간을 의식하고 의사 결정을 하고 그들의 희망과 그들의 꿈을 보호해 주고자 하는 그 지향점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놀이터에서 손주 앞에서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함께 미끄럼틀을 타는 노익장을 과시하던 어느 할아버지의 눈빛을 닮은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타락하거나 타협에 젖거나 탐욕 그 자체와 늙음을 치환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투표를 했고 투표 결과를 기다리고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 만들어 갈 우리나라를 기대하려고 한다. "다 똑같아. " , " 다 나빠."는 움베르토 에코가 했던 농담처럼 죽는 그 순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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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30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이 있는 반면에 권력자 한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는 철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자는 어른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럽고 어울리지 않습니다.

blanca 2017-05-02 02:08   좋아요 0 | URL
사람의 특성을 개개인별로 보는 것보다 연령별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전형화하는 데 쉽다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권력이라는 게 주어졌을 때 그것을 사적 경계 안으로 가지고 오지 않는 지도자를 기대해 봅니다.
 

미국 작가 조앤 디디온은 갑작스럽게 외동딸과 남편을 잃게 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감기로부터 시작된 딸의 긴 투병 과정과 딸을 면회하고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며 여느날 같은 하루의 마무리를 배반한 남편의 죽음은 잔인하게 오버랩된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어느 가을의 거리에 불현듯 죽음을 떠올렸던 나날을 복기한다. 죽음을 연상시킨 것은 의외로 빛이었다. 눈부신 햇살은 설명하기 힘든 종말에 대한 예감을 상기시킨다. 영원히 이 아름다운 날들을 새털처럼 쌓아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상실과 쇠락의 나날은 소설처럼 전조나 복선의 예행 연습을 시키지 않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비집고 들어오는 운명의 전환은 그렇게 유한을 상기시킨다. 아무렇지도 않은 나날들이 어느새 무너지는 시점에 선 그녀의 생의 그 허룩한 지점에 대한 묘사는 절절하게 이미 예고된 우리의 상실들을 환기한다. 당연한데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들은 나간 자리에서 그 무게를 드리운다.






















헤밍웨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스캇 피츠제럴드와 절친이었다. 아내를 버리고 정부에게 가려는 그를 말린 것도 피츠제럴드였다. 두 여자 사이의 방황은 반드시 둘 다를 잃게 된다고 젤다 옆에 있었던 피츠제럴드는 격정에 눈이 먼 친구에게 경고한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저녁 둘은 재회한다. 황금의 시대 천재 작가로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둘은 이제 아픈 아내와 창작열의 고갈과 흘러버린 세월의 짐을 저마다 지고 만난다. 둘은 서로가 맞았다,고 이야기한다. 헤밍웨이는 아내를 버리려던 자신을 붙잡았던 피츠제럴드가 스캇은 결혼 생활이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 헤밍웨이가 옳았다고. 청춘과 너무 일찍 주어진 명성과 돈이 그 둘의 인생을 어떻게 저당 잡았는지를 깨달은 위대한 전설이 될 작가 둘은 스스로를 루저라고 폄하한다.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읽고 쓰는데 늙어버린 그들은 그들에게 사후에 주어질 이런 미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일종의 불멸에 대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다수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죽어서도 기억되는 일. 찬란하기도 했고 비천하기도 했던 나날들이지만 결국 남은 것들에 대한 찬탄.



















여기도 봄이다. 여기도 사람이 산다.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들을 여전히 추구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고 그렇게 영원히 살 것처럼 별 일도 없는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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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4-26 1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안 보이셔서 궁금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 거죠?^^

blanca 2017-04-27 02:48   좋아요 1 | URL
좀 뜸했죠? 스텔라님도 잘 지내시죠? 저도 잘 지내요. 독한 감기 걸려 한동안 엄청 고생했어요. 따뜻한 댓글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