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중요하다. 흔히 생명과 삶의 가치와 같은 저울에 올려 그 가치를 논하기도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에 가지는 그 ‘돈’의 중요한 동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비교와 대조는 필연적 자기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욕망은 때로 삶의 동력이고 그것의 외연적 교환가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돈’으로 치환된다. 누구나 생과 삶은 차마 돈과 저울질당해서는 안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현대 사회의 돈의 위력이나 가치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은 아니다. 돈 자체는 선악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친 악덕의 드라마를 ‘돈’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19세기 후반의 파리 사회가 백 년도 훌쩍 지난 현대의 배금주의와 거의 오차없이 겹친다는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외형적 교환 가치가 제어 없는 욕망과 만날 때 빚어내는 필연적 귀결이 얼마나 끈질기게 부활하는지 보여주는 예다. 증권거래소, 실질적 자금의 불입이 없는 무차별적 증자와 회사 실적 부풀리기, 작전세력, 개미 투자자들의 패망. 이것은 20세기 이후의 신조어가 아니었다.

초로의 몰락한 은행가 사카르가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투기 세력을 규합해 거대한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주가시장을 지배하는 모습에는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가 거세되어 있다. 다만 인간의 탐욕에 덧씌운 자기 기만, 환상, 이전투구가 실제보다 더 현실 같은 날조된 가치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거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드러날 뿐이다. 파멸의 전조가 곳곳에 드러나도 레밍이 한꺼번에 물에 뛰어들듯 단체로 치닫는 절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근래 전세계를 휩쓸었던 각종 금융 위기, 사건들과 겹친다.

에밀 졸라는 이러한 사태에 교조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삶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돈’의 필연적 영향력을 중립적 입장에서 관찰하고 해부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모든 비열한 왜곡된 욕망의 부산물을 돈에 몰아넣는 인간의 무책임함과 경솔함을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파멸한 사카르와 대척점에 서 있어 보이는 여주인공 카롤린이 사카르의 은행에 투자한 돈을 잃고 마지막에 빈털털이가 되었음에도 역설적으로 생의 의지와 환희를 느끼는 대목은 생이 돈을 배제할 수는 없어도 뛰어넘는 초연한 경지까지 약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돈’과 ‘삶’을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 동력의 주도권을 주냐,는 인간 개개인의 선택의지가 개입할 수 있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 또한 그렇다. 그 미약한 가능성이 이 비극적 얘기를 마치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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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8-01-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우아한 글을 쓰시는 블랑카님. 작년 한해도 고생하셨고 새해에도 우아하고 감성적인 글 기대할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02 03:29   좋아요 0 | URL
헉, 시이소오님 칭찬에 없던 우아함도 생길 기세입니다. ^^ 새해에는 시이소오님이 더욱 마음 편히 책을 읽으실 수 있는 내외적 여유가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성실한 독서와 기록 언제나 응원해요.

카스피 2018-01-0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만원도 아니 78만원 세대에게는 누가 뭐래도 돈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ㅜ.ㅜ 블랑카님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02 03:3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돈이 가지는 위력에 압도당해서도 안 되지만 기본적으로 사는 데에 필요한 그 마지노선도 부정할 수 없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스피님.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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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때로는 어떤 대단한 층위에 있는 것도 같아 ‘어찌 감히 내가’라는 의심의 시험에 들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글 속의 ‘나’는 언어의 체로 이미 한번 걸러진 후라 가짜 같기도 하고 너무 진짜인 것도 같아 민망해질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삶’은 언어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로 빠져나가는 많은 것들의 그 허룩한 지점에서 서성이는 것이라 ‘쓰는 일’은 때로 한없이 허무해지는 것이다. 쓰는 일은 용기와 더불어 선별과 선택과 포기와 체념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이런 대목에서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어깨도 다독여주고 손도 잡아주는 따뜻함이 있다. 그는 읽고 쓰는 일을
함부로 과장하거나 미화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김중혁이 쓰기 위해 동원하는 사물과 그가 쓰기 위해 읽어낸 많은 것들이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언어를 통과하면 한결 가볍고 한층 실한 것들로 거듭나는 기분이다. 그가 사용하는 애플의 펜슬과 이미 내가 쓰고 있는 팔레르모의 블랙윙만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호기를 불러일으킨 책임을 작가에게 물어도 될까.

그가 애플 펜슬로 그린 그림과 수능문제 형식으로 빚어낸 독자들 대상의 창의력 테스트는 이미 완결된 텍스트를 이스트처럼 발효시켜 ‘읽는다’는 그 단순하고 수동적인 행위를 창의적인 즐거운 소통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확실히 김중혁은 유쾌한 작가다. 꼭 쓰는 일이 아니라도 우울해지고 소심해지고 자괴감의 동굴로 파고들고 싶어질 때 ‘그’를 권한다. 사는 일의 무게가 덜어지지만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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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12-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다니,,,,겸손하세요.
제 아들 해든이 글을 올렸다가 님의 분홍공주 생각이 났어요. 어떻게 지내나요?? 의젓한 누나가 되었나요??? ㅎㅎㅎㅎㅎ 엄마 닮아서 글도 잘 쓰고 책도 많이 읽겠죠?^^

blanca 2017-12-29 08:08   좋아요 0 | URL
해든이와 분홍공주가 아마 동갑이지요? 동생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도 어찌나 투닥거리는지 몰라요. ㅡㅡ 요즘 부쩍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떠올라 기분이 참 묘해요. 벌써 사춘기 소녀 느낌이 나기 시작해요. 제가 분홍공주 나이 때도 기억이 생생한데... 해든이 큰 모습 사진도 보고 어찌나 쑤욱 컸던지 깜짝 놀랐어요.

라로 2017-12-29 16:49   좋아요 0 | URL
투닥거리고 할때가 좋은 때 같아요,,,ㅎㅎㅎㅎ
분홍공주 벌써 사춘기 느낌이 나는 군요!!!
가끔 아이들 얘기도 올려주시고 사진도 살짝 올려주세요~~~. 어떻게 컸나 궁금해요,,,해든이랑 동갑이라 더 궁금한가봐요~~~.^^
 

어제 우연히 둘째와 같은 프리스쿨에 다니는 친구 엄마가 '한국은 알파벳이 몇 개냐',고 진지하게 묻자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솔직히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외국인들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깨우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일 뿐 아니라 상형문자 못지않게 아름다운 외형을 지닌 고유문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더욱 부끄러웠다. 정작 나의 정체성을 둘러싼 우리의 문자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고 다녔던 것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그렇게나 열심히 외웠던 자음 19개, 모음 21개가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심 부끄러워지는 밤이었다. 지금도 가끔 한글 창제 당시의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대왕의 그 창조적 에너지가 끓어올랐던 밤들을 상상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런게 가능했을까? 그냥 중국문자를 쓰고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 과정에서 맞닥뜨렸을 수많은 회의와 시행착오, 경직된 계급 구조와 보수적인 유교 통치 구조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해 가며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했던 그들이 새삼 경이롭게 보였다.  비록 수직적 통치 구조의 한계는 있었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의 애민 정신을 발휘한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으랴.
















<황금 물고기>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제주도의 해녀를 실제로 보고 영감을 얻어 소설까지 썼단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남다른 어린 시절은 그의 정체정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듯 이국적 정서와 다른 언어는 그의 이야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로서만 남는 게 아니라 때로 견인차 역할을 한다. 그 나라의 정서와 그 나라의 배경 정도를 아는 것과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문자를 조금이라도 알고 하는 이야기는 천양지차가 될 수밖에 없다. 공통의 외국어로 교감하는 것은 언제나 어느 지점까지다. 그 경계 넘어 확장이 될 듯 말 듯한 지점에서 서로가 머뭇대면 항상 얼마쯤은 아쉽고 슬프다. 그런 점에서 르 클레지오는 다른 이야기를 좀더 깊이 넓게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기대가 된다.


그 엄마에게 나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니까. 한글은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라고. 그럼에도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동안 수업 적응에 그 당시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다행히 금세 배울 수 있었다. 자음과 모음을 사정없이 해체해 가며 샤파 연필깎이로 연필심을 최대한 뾰족하게 깎고 무자비하게 쓰고 또 쓰며 배웠던 글자들이 결국 내 속으로 들어와 지금도 웅웅대고 있다. 나는 아마도 다시 한글을 제대로 배워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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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7-12-14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은 자음 14개, 모음 10개, 지 않은가요?

blanca 2017-12-14 13:28   좋아요 0 | URL
별족님 말씀이 훈민정음에 의거하면 맞습니다. 복자음과 복모음을 합쳐 마흔 개로 보는데 훈민정음 기준으로 맞는 얘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이 기회로 저도 공부를 하게 되네요.^^

별족 2017-12-14 13:28   좋아요 1 | URL
저는 너무 많이 적으신 거 같아서 가나다라~,랑 아야어여~하면서 손가락 접으면서 셌어요. 쌍자음과 복모음을 다 세신 거구나. 저는 외국인이 물어보면 손가락 접으면서 셀 거 같아요.

에이바 2017-12-14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녀 이야기는 폭풍우 말씀이시죠? 저도 짧게 보긴 했는데 르클레지오가 이대 교수로 있던 시절이 좋으셨나봐요. 이대 기숙사 전경이 좋아서 한국 오면 꼭 거기 가신다는데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니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네요. 오늘 아침에 문득 친구랑 얘기했던게 떠올라서 블랑카님 페니퍼가 반가워요. 한글은 알파벳인가 캐릭터인가(한자랑 헷갈렸나 봐요) 하는 이야기였거든요...

blanca 2017-12-14 13:25   좋아요 0 | URL
아...에이바님이 더 잘 알고 계시네요. 저는 한글을 유창하게 읽는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어요. 독학하셨다 하더라고요. 외국 사람들은 알파벳으로 표현하는데 표음문자라 이게 맞는 얘기가 아닐까 싶어요. 흥미롭네요.

2017-12-26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8 0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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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전 그곳에 삼악산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읽는다. 강원도 춘천의 실제 삼악산일까,는 중요치 않다. 권여선의 묘사의 힘은 그녀가 만드는 그 가상의 세계를 진짜처럼 보여줄 테니 말이다. 지리적 배경은 삶의 층위로 치환된다. 높고 가파른 곳은 험하고 거칠다. 낮고 넓은 지대는 풍요롭다. 그 가운데에 자리한 '우물집'은 어쩐지 좀 애매하다. 풍요롭지도 극도로 궁핍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야기가 생겨날 여지가 피어오른다. '우물집'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세를 놓아 재미를 보았던 주인집 순분은 아들 금철, 은철 또래의 두 딸 영, 원과 무언가 수상쩍은 남편을 대동하고 나타난, 처지에 맞지 않는 활달한 필체를 지닌 '새댁네'로 인해 아연 새로운 서사로 진입하게 된다.


'우물집'의 둘째 아들인 은철은 어린이의 관찰자적 시선으로 삼벌레 고개의 온갖 인물과 그 인물들이 엮어내는 역동적인 이야기를  묘사한다. 없는 살림에도 생의 의지는 활기를 띠고 그 활기는 드문드문 질곡어린 나날에 눈부신 빛을 비춘다. 거침없이 이웃들의 속사정을 염탐하고 자기식대로 재해석하여 얼마간의 악의와 호기심으로 왜곡하여 떨어대는 여자들의 수다는 구수하지만 결국 순분이 겪게 되는 온갖 고단한 고난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쉽게 내뱉을 때 그것은 천만 배의 무게로 다가오는 경험을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엄중한 심판은 시대의 이념을 둘러싼 비극과 만난다.


권여선의 언어는 그 자신의 겸손한 실패의 고백과는 달리 그 어떤 본질에 마침내 닿아 빛난다. 이를테면


그 순간 은철은 알게 되었다. 지동순 할매가 소리 소문 없이 삼벌레고개를 떠난 이유를. 할매는 평상 위에 오롯이 새겨진 뚜벅이할배의 없음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오고갈 때마다 할매만 보면 벌떡 일어나던 그 할배의 없음을, 강한 부재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p,197


그'없음'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폐부에 와 박힌다. 시간의 고랑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잃는다. 그 상실이 '없음'으로 표현될 때 가슴을 할퀸다. 그렇게 찾아 헤매이던 슬픔의 지점을 그녀는 정확히 조준하여 언어로 낚아챈다. 말해지면 때로 낫는다. 내가 어쩌지 못했던 그 수많은 어쩔수 없었음이 해명되는 순간 가슴이 떨린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할매를 할배는 황송해하며 그 있음에 감읍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할배가 벌떡벌떡 일어나던 순간들의 비의를 할매는 아마 알았을 것이다. 알았기 때문에 할매는 이제 그 할배의 '없음'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수많은 생의 환희는 시간과 삶의 가혹한 일탈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를 떠나게 한다. 성장으로 삶의 그 끈질긴 견디는 힘으로...그 끝에서 서성이는 마음이 시리다. 내 안의 어린이는 아직도 다 자라나지 못했고 그 어린이는 이럴 때 다시 걸어나온다. 슬픔만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 되새김은 얼마간 감당해야 하는 없음 앞에서 돌연 아연해진다.


아름답지만 분량에서 다 되지 못한 이야기가 아쉽다. 결국 이 이야기도 시간과 지면의 제한을 뚫고 나와 저마다의 확장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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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냄새가 있다. 약간의 비릿함, 적당한 음습함, 향내는 아닌데 달콤한 어떤 전조. 그 냄새는 비를 몰고 온다. 그 냄새만 의식하게 되면 나는 다시 여섯 살이 된다. 왜 그렇게 혼자 비를 맞았는지. 그 비를 맞으며 묘한 행복감에 젖었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흠뻑 비를 맞고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수건으로 비를 닦아주던 기억에 불쾌한 느낌은 섞여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시간인 듯하다. 나를 만들고 나를 통과하고 마침내 나를 없애버릴 시간.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하고 눈부시게 형상화한 이야기로 이것을 능가할 것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번역되는 순서와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 읽을 수 있을까? 거의 삼천 페이지에 달한다는 이 방대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결국 가장 보편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사실 현 시점에서 어느 누가 벨 에포크 시대의 귀족 살롱에 드나들며 그들의 속물적인 대화와 심리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겠나, 싶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신기하다. 그들 모두에 '내'가 들어있다. 프루스트는 그래서 프루스트다. 그의 삶 자체가 그리 다이나믹하거나 공적인 영역을 종횡무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한계에 봉착할 것도 같은데 그는 마침내 제한된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시간의 단층들로 해체하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느끼다 다시 재조립해 죽음을 넘어서는 찰나의 영원성을 포착해냈다. 그의 이야기는 어떤 중독성을 가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 안에 푹 젖어서 내가 잃어버렸던 그 모든 어떤 그리움의 요소들을 놀랍게 채집하여 숨결을 불어넣어 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결국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과정과 섞인다.





프루스트를 읽기에 좋은 계절이 있을까? 사실 여름보다는 실내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겨울이 더 좋을 것도 같지만, 딱히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그 삶의 시간성이 어떤 계절성에 머무를 것 같지도 않다. 프랑스의 작가, 교수 등 여덟 명 각자가 이야기하는 프루스트는 묘하게 겹치고 어긋나고 확장되고 사라지다 다시 읽는 사람의 내면으로 점프하듯 뛰어들어온다. 각자가 좋아하는 구절, 대목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그를 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와 한결 맑아진 눈으로 바로 자신의 인생, 삶, 그것의 종결을 바라보는 확장된 지평을 제공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들어가기 이전에도 들어간 와중에도 나온 후에도 이 책은 따뜻하고 유쾌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이다.








인생의 대원리, 의미를 확언할 수 있는 지점이 과연 있을까?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힘들게 담금질하는 것이 유의미할까? 이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의 결이 훑고 지나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 길은 괴롭고도 고독하다. 프루스트가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그가 했던 고민들이 시간의 결 속에서 어떤 마침표를 찍는지를 그의 고통스럽도록 예민한 목소리로 듣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시간도 지나간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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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 0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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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1 0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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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5 1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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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5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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